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00:21:22

교회론/가톨릭

가톨릭 교회론에서 넘어옴
1. 개요2. 교회론의 역사적 개관3. 대략적인 설명
3.1. 교회의 정의3.2. 하느님과 교회에 대하여
3.2.1. 교회와 삼위일체3.2.2. 교회와 성부3.2.3. 교회와 성자3.2.4. 교회와 성령
3.3. 구약과 교회3.4. 교회와 사도, 그리고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
3.4.1.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예수의 대리자들이다3.4.2. 사도들은 권한을 갖는다3.4.3.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3.4.4. 사도들의 후계자들(주교)은 사도들로부터 권한을 물려 받았다
3.5. 교회와 교황
4. 관련항목


라틴어: Ecclesiologia
한국어: 교회론

1. 개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스미르나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35? - 104?)[1]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습니다."
사도 신경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의 믿는 교리를 따를지니, 이 교리를 온전히 믿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영원히 죽으리라."
아타나시오 신경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 6,1, 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 주교( 200/210?-258년)[2]
만일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마니교도 서간 반박(Contra epistulam Manichaei quam vocant fundamenti)」 5, 성 아우구스티누스[3]

교회에 대한 신학. 교회학이라고도 한다.

교회론은 교회의 성격 규명, 권한, 교계제도, 조직, 사명, 기능, 구성원의 성격 규명 등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2. 교회론의 역사적 개관

신학에서 교회론이라는 부분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사도 시대와 사도교부 시대(사도 시대 직후의 시대)에는 교회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루는 학문적 연구가 없었다.

다만, 성 치프리아노의 「De Catholicae Ecclesiae Unitate(가톨릭 교회의 단일성)」이라는 저작이 하나 있을 정도 뿐이었다.

중세에 와서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신학자들은 신학총서 격인 신학대전을 쓰면서도 교회론을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저자들과 교부들은 그리스도론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와 구원과의 연관성에서 그리스도 신비체로서의 교회를 깊은 뜻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뜻에서 성 바오로나 성 아우구스티노를 신약성서의 교회론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분열(종교개혁)이라는 홍역을 겪고 난 교회는 얀세니즘, 갈리치아니즘, 18세기의 합리주의 등 반교회적 사상 풍조를 만나 교회를 이론적으로 천명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따라서 교회론은 자연히 교계제도를 변론하는 이른바 교계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 교회론은 신학교 교과에 편입되었다. 교회 옹호론이 절정에 이른 것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였고, 여기서 교회는 교권의 지상권과 교황무류성을 온 세계에 공표했다.

교회론이 본격적으로 학문적인 면모를 갖춘 것은 19세기 동안이었다. 성서와 교부들의 문헌에 입각하여 교회의 가시적인 기구의 신비적인 뜻을 밝히고, 생생한 이해력을 돕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교회론의 첫 연구 센터는 독일 튀빙겐 신학대학이었다. 그 지도자 요한 아담 묄러(1796~1838)는 교회의 공동체적 역할과 은총의 내적인 생활을 강조하면서 교회론을 폈다.

3. 대략적인 설명

3.1. 교회의 정의

세간에는 개신교의 종교시설만을 교회라고 착각들 하는데,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이다. 부연하면 추상적인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가 교회이며, 구체적인 장소의 개념으로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을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당, 개신교에서는 예배당이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개신교의 전유물처럼 말해 생긴 오해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개신교에서 말하는 그들의 자칭 '교회'는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교회(Church, Ecclessia)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가톨릭 입장에서 개신교는 교회가 아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4대 속성인 지일성, 지성성, 보편성, 사도전래성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 가톨릭 교회 문헌에서 '교회'라고 말하면 백이면 구십 이상 '가톨릭 교회' 그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수식어를 다 떼고 오로지 '교회'라고만 말해도 단 하나의 참교회인 가톨릭을 가리킬 수 있다는 엄청난 자부심의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밖에 가톨릭 교회가 자기자신 이외에 교회로 인정해 주는 교파는 정교회뿐이다. 가톨릭은 개신교를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또는 '교회적 공동체'(Ecclessian Community)로만 대우한다.[4]

교회는 하느님의 계획처럼 머나먼 영원의 어둠에서부터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비록 교회가 시간 안에서 실현된다 할지라도, 영원은 언제나 교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는 교회를 지상의 하느님 나라라고 했다.

3.2. 하느님과 교회에 대하여

3.2.1. 교회와 삼위일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 헌장(Lumen Gentium)」에서 지적한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기원을 삼위일체적 전망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과 더불어 친교를 나누고자 했던 삼위일체 하느님의 인격적인 통교로부터 탄생하기에 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 교회는 성부께서 성자의 강생 그리고 성령을 인류 안에 부어주시면서 인류에게 선사하기로 작정하신 구원 밖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삼위일체로부터의 교회는 삼위일체로부터 출발해서 교회의 기원을 표현해줄 뿐 아니라 나아가 삼위일체의 신비와 삼위일체적인 삶에 대한 교회의 지속적인 참여를 잘 보여준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이콘이고, 삼위일체의 현존이다. 따라서 신적 위격들 사이의 일치는 교회의 근원이자 나아가 교회의 모델이요,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3.2.2. 교회와 성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헌장」 2항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지혜와 자비의 지극히 자유롭고 심오한 계획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들어높여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콜로 1,15) 구세주 그리스도를 보시어, 언제나 인간들에게 구원의 도움을 주셨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모든 뽑힌 이를 영원으로부터 "미리 아시고,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 당신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다"(로마 8,29 참조).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을 거룩한 교회 안에 불러 모으기로 결정하셨다. 이 교회는 세상이 생길 때부어 이미 예표되었고, 마지막 시대에 세워져 성령 강림으로 드러났으며, 세말에 영광스러이 완성될 것이다. 그때에는 거룩한 교부들의 기록대로 "의인 아벨부터 마지막 뽑힌 사람까지" 아담 이래의 모든 의인이 보편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모이게 될 것이다.

성부께서는 교회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해서 창조되었다.

3.2.3. 교회와 성자

성자께서는 성부에게서 파견되어 오셨다. 성부께서는 성자 안에서 천지창조 이전에 우리를 뽑으시어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시고, 당신 뜻에 따라 성자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세우기 시작하시고 성부의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하셨으며, 당신의 순명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다.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 즉 교회는 하느님의 힘으로 세상에서 볼 수 있게 자라고 있다. 그 기원과 성장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신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상징되었고,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두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올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예고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월절 양으로서 희생되신 십자가의 희생제사가 제단에서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시에 성체를 나누는 성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자들의 일치가 표현되고 실현된다. 모든 사람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이렇게 일치되도록 불리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며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있다.

(LG 3)

성부의 구원 계획을 실현에 옮기는 당사자는 다름 아닌 성자시다. 사실 그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우리가 성부의 양자가 되게 하기 위해 파견되셨다.

3.2.4. 교회와 성령

그리고 성부께서 성자께 지상에서 이루시도록 맡기신 일이 성취된 다음,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도록 파견되셨다. 또 이렇게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이 성령께서는 바로 생명의 영, 곧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이시다. 이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서는 죄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마침내는 그들의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키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그리고 바로 성전인 신자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여 주신다.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켜 주시며, 교계와 은사의 여러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주신다. 복음의 힘으로 성령께서는 교회를 젊어지게 하시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며 자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신다. 성령과 신부가 주 예수께 "오소서!" 하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온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으로 나타난다.

(LG 4)

3.3. 구약과 교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약의 가톨릭 교회의 모상이었다"라고 교부들은 말했다.

모세가 홍해를 갈라건너는 놀라운 일을 보고 이스라엘유대교가 생겼듯이, 그리스도부활이라는 놀라운 일에 의해 교회가 생겼다.

구약의 백성들이 광야를 떠돌아 다니며 만나를 먹었듯이, 신약의 교회는 지상의 나그네살이를 하며 천상 만나인 성체를 먹는다.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았듯이, 우리는 영원한 고향인 천국을 향하고 있다.

이외에도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가톨릭 교회는 유사점이 많은 것을 교부들이 설명했지만, 정말로 여백이 부족하므로 생략한다.

3.4. 교회와 사도, 그리고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메시아적 백성을 주위에 모으려 했다는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은 12사도의 설립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표현을 따르면 그분은 "열둘을 세우셨다". 이 '세우다'라는 말은 명백한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동사의 사용은 예수께서 열두 지파로 구성된 새로운 백성을 만든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12사도라는 숫자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특히 이스카리옷 유다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 때도 여전히 '열둘'에 대하고 말하고 있는 것(요한 20,24; 1코린 15,5; 사도 6,2)은 이 '12사도'가 일종의 제도적 직책으로 변모되었음을 의미한다.

3.4.1.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예수의 대리자들이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요한 17,1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한마디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며 이 세상에서 바로 그 사명을 지속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았다. 즉 계속해서 실현해야 할 사명이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사도들에게 위임되었고 그들이 이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의 사명과 사도들의 사명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보는 이는 성부를 본다고 말씀하셨다면(요한 14,9), 그분은 또한 사도들의 말을 경청하는 이는 그분의 말을 경청하는 이고 사도들을 업신여기는 이는 그분을 업신여기는 이라고 말씀하셨다(루카 10,16).

여기서 구약성경의 샬리아라는 제도를 알아야 이해를 할 수 있다. 샬리아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으로부터 그를 대신해 파견된 사람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당신 사도들을 이런 방식으로 부르고 파견했다면, 그분 자신이 열둘을 '사도'로 임명했다면, 이는 후기 유다이즘의 맥락에서 언급되는 '전교자'나 스토아학파 안에서 드러나는 '유랑하는 설교자'로 세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들을 객관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예수께서 현존하지 않는 곳, 나아가 예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예수의 대의가 살아 움직이고 현존하기를 바라는 바로 그곳에서 그분을 대리해야 한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악마를 물리칠 권한, 죄를 용서해 줄 권한, 성체를 축성할 권한 등을 사도들에게 주셨다.

3.4.2. 사도들은 권한을 갖는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율법을 세울 권한도 주었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8,18)"라고 하였다.

"매다-풀다"라는 형태는 당시 유다 세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들을 내포한다.
  • 탈무드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용례에 따르면, 이는 우선 정당한 것(풀다)과 부당한 것(매다)을 의미한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사도들이 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직접 율법을 만든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제지된 것은 하느님의 제지를 받기 때문이다.
  • 시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랍비적인 어휘에서는 '매는 행위들'과 '푸는 행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랍비 힐렐이 푼다", "랍비 샴마이가 맨다"라는 그 당시의 현행적인 형태들처럼 이 행위는 율법에 의해 금지된 것과 허락된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첫번째는 허락된 것을 2번째는 금지된 것을 선언하고 있다.
  • "묶다-풀다"는 파문하거나 파문을 일으킨다는 것을 뜻한다. 이 역시 랍비 세계에서는 현행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사도들 역시 법률적인 권한을 갖는다. 즉 그들은 신자들을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키거나 받아들이는 권한을 갖는다.
  • 마지막으로, '묶다-풀다'라는 형태에 대한 마지막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형태는 상반된 실재들 사이의 일치를 표현하는 광범위한 권한에 대한 양도를 내포한다. 즉 사도들이 통치하는 교회 내에서 최종적인 권위에 대한 양도를 의미한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에게 자신의 권위와 권한을 넘겨주었고, 그렇기에 주교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다.

3.4.3.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성화하는 그리스도의 행위는 여러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 교회 안에서 지속된다. 우리 가운데 영원히 십자가의 희생을 지속시켜 주는 성찬례의 희생 제사를 설립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사도들 사이에 새로운 사제직을 설립하셨다. 이 사제직은 교회를 성화시켜 줄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봉헌을 재현하는 임무를 갖는다.(1코린 11,23-26)

그리스도는 당신 사도들에게 죄를 사할 권한을 주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3)". 이는 죄의 용서 또는 죄를 그대로 두는 것이 실재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 앞에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지탱해주시는 모든 능력들, 즉 성부로부터 받은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이 능력들을 사도들에게 전수해 주셨다. 이러한 전수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에게 직접 향하는 것이지 교회 공동체의 중재를 통해서 아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가 아닌 성부로부터 솟아나는 이 사명은 비록 그리스도의 사명 자체가 교회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지향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어떤 중재도 있을 수 없다.

한편, 이 사명은 세기 말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마태 28,20).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명은 모든 인류를 위해 이루어지는 구원을 위한 결정적이면서도 영속적인 사명이기 때문이다.

묶고 푸는 사도들의 권한은 시대 속에 제약을 받는 어떤 개별적인 사람 또는 특권으로서 열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영속적인 사제적 권한의 진정한 기원이자 원천으로서 교계제도 질서 안에서 사도들로부터 그의 계승자들, 즉 보편 교회의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전수되었다.

3.4.4. 사도들의 후계자들(주교)은 사도들로부터 권한을 물려 받았다[5]

사목 서간들의 문학 장르는 이미 사도행전 20장 17-38절에서 본 것과 같이 고별사이다.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직감한 사도 성 바오로는 여기서 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될 분열과 여러가지 문제들을 예견하고 있다. 이 경우에서 다뤄지고 있는 문제들은 이미 원시 불가지론에 물든 유다계 신자들로부터 오는 듯하다.

바오로는 이러한 오류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책임을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지웠는데, 여기서 그들은 마치 원로들에 대한 권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드러난다. 티모테오와 티토는 본래적인 의미의 사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바오로적인 의미의 사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별 교회들의 원로들에 대한 권위를 갖고 있었다.

바오로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바오로는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고하고 지시할 수 있는 권위"(1코린 1,10; 5,4; 1테살 4,1-2; 2테살 3,6.12)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 권위는 성자 하느님인 예수로부터 전해진 것이었다(2코린 10,8; 13,10).[6]

그리고 이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권고하고 지시할 수 있는 권위"는 안수를 통해 후계자들에게 전해져 왔다. "내가 갈 때까지 성경 봉독과 권고와 가르침에 열중하십시오.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1티모 4,13-14)"와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절)"라는 구절은 그들이 과거에 안수를 받았으며, 그 시점에서의 안수를 통하여 일정한 책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한 책임이었다. "나는 엄숙히 경고합니다.(1티모 5,21)", "나는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2티모 4,1)", "그러므로 감독은 ~해야 합니다.(1티모 3,2)" "어떠한 경우에도 ...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2티모 4,5)" "그대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이러한 것들을 말하고 권고하고 또 꾸짖으십시오.(티토 2,15)" 그렇기에 코린토 2서 8장 23절에서 바오로는 티토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티토로 말하면 ... 교회들의 대표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그들의 첫번째 책무는 이단을 거슬러서 싸우는 것이었다. 즉 정통성의 기준을 갖고서 신앙의 위탁물을 지키는 것이었다. 티모테오가 안수를 통해 받은 선물은 사도로부터 받은 건전한 해석을 잘 보존할 의무를 그에게 지워주었다. 감독은 건전한 가르침과 일치되어 있고(티토 1,9) 이를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건전한 말씀은 선포되어야 한다.(2티모 4,1-4)

티모테오는 자신보다 높은 권위에 기대는 가운데 이를 실행해야 했다.(1티모 5,17-22)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독은 ... 가르침을 받은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티토 1,7-9; 2,1-15)"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한 번 또 두 번 경고한 다음에 관계를 끊으십시오.(티토 3,6)[7]"

또한 감독은 개별 교회들을 위해 원로들과 부제들을 준비해주어야 한다.(1티모 3,1-13; 티토 1,5-9)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티토 1,5)" 이러한 임명은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1티모 5,22)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 지을 수 있다:

"교회 건설을 위한 신비로서의 사도직은 티모테오와 티토의 모범을 통해 시도됐고, 계승자들을 보장하도록 티모테오에게 내려진 의무처럼 지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의 계승자(혹은 후계자)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안수를 통해 교회 안에 원로들을 만들어야 할 과제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직 1세기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의 서간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감독(주교)의 모습이 완전히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 대한 근본적인 모습은 발견된다.

프리스(H. Fries)는 원로 혹은 부제라는 말은 복수로 나타나는데 반해 감독이라는 말은 단수로 나오는 점에 주목한다. 후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게서 드러나는 '감독(주교)-원로[8](신부)-부제'라고 하는 삼중적인 어휘가 이미 형성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감독(주교)과 원로(신부) 사이의 한계 확정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다."라고 프리스는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이 사목서간이 쓰여진 후 30년 후 쯤 쓰여진 안티오키아의 아냐시오 서간에서 감독(주교)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발견되고 있다.

"감독(주교)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만이 전례 봉사, 특히 성찬례를 거행하고 성사들을 주기 위한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를 거행하고자 한다면 오직 감독(주교)의 동의하에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감독(주교) 안에서 일치된 백성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지역 교회는 감독(주교) 그리고 원로(신부)단과 부제단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3.5. 교회와 교황

교황수위권 문서 참조.

4. 관련항목



[1] 분도출판사의 박미경 역주판으로부터 발췌.[2] 이형우 역주판 발췌. 맞춤법은 현 규정에 맞게 수정함.[3] 『가톨릭 교회 교리서』 119항 발췌. 원문 링크.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 인류의 빛」 참조.[5] 본문에서는 신약성서의 번역대로 '감독'과 '원로'라 쓴다. 다만 감독과 주교 둘 다 그리스어로는 Episcopus이고, 원로와 신부 둘 다 그리스어로는 Presbyterus이다. 즉, 서로가 같은 단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6] 한편으로 바오로는 이 사도로서의 권한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으며,(갈라 2,1-2)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케파요한은 하느님께서" 바오로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다.(갈라 2,9) 즉, 바오로 스스로도 기존 12사도로 대표되는 교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직접 예루살렘까지 향했던 것.[7] 마태오 복음서 18장 17절 참고.[8] 개신교 성경에서는 '장로'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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