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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용

파일:노기용 선생.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노학준(盧學俊)
성옥(聖玉)
우전(雨田), 재전(再田)
본관 광주 노씨[1]
출생 1897년 7월 2일
경상남도 초계군 중방면 황정리
(현 경상남도 합천군 적중면 황정리 79번지)[2][3]
사망 1975년 9월 11일[4]
부산시 동구 초량3동 664-25번지 자택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2
묘소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상신리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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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 때 항시 권총을 휴대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유자재로 출몰하여 일경(日警)을 괴롭혔던 대담무쌍한 투사(鬪士)'
- 《사진으로 본 국회20년》(1968)에 수록된 노기용 전 국회의원에 대한 인물평.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경찰공무원, 정치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다.

2. 생애

1897년 7월 2일 경상남도 초계군 중방면(현 합천군 적중면) 황정리 79번지에서 아버지 노수현(盧秀鉉)과 어머니 안동 권씨[5]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성부 보성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했다.

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대구의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1920년 그는 송두환(宋斗煥)·최윤동·김종철(金鍾喆)·정두희(鄭斗禧) 등이 주도·조직한 비밀결사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정두규(鄭斗奎)·노원용(盧圓容)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1921년 8월부터 9월 사이 권총을 소지하고 경주군 양북면(現 경주시 문무대왕면)의 최세림(崔世林)과 합천군 덕곡면의 조성걸(趙性傑)의 집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펼쳤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23년 4월에 합천군 초계면 문재규(文載奎)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1923년 음력 6월에는 이수영(李遂榮)의 집에서 최윤동과 모임을 갖고 전라북도 정읍군에 소재한 보천교 본부를 습격, 교인들로부터 수금한 3만원을 탈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백동희(白東熙)를 새로이 동지로 포섭하여 거사를 준비하였으며 그해 7월 노원용과 함께 군자금 수합을 위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일제 경찰의 경계가 심하자 충청남도 대전군의 윤길수(尹吉洙)에게 권총을 보관하게 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3년 12월 2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1924년 4월 9일 예심이 종결되고 공판에 회부되었으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감정관계로 공판이 여러 번 연기되었다. 1924년 10월 16일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총포화약류 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가택침입, 강도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1925년 4월 21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징역 5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미군정 시기이던 1946년 경위경찰공무원에 입직했다. 1946년 2월 경감으로 승진해 1946년 2월 17일부터 1946년 5월 18일까지 제3대 선산경찰서장, 1946년 2월 23일부터 1946년 8월 8일까지 제2대 청송경찰서장, 1946년 2월 2일부터 1947년 4월 4일까지 제3대 문경경찰서장, 대구경찰서장, 1948년 4월 경상북도 경찰학교 교장 등을 지내고 그해 11월 총경으로 퇴직하였다.#

이후 1949년 6월 13일부터 1950년 4월 21일까지 제6대 경상남도 고성군수를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합천군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이때 9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표가 많이 분산되었고, 결국 23.81%(7,321표)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에서 내무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1952년 6월 6.25 전쟁 2주년 부산기념식장에서 발생한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김시현, 서상일, 백남훈 등과 함께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1954년 1월 최종적으로 공소 기각 판결을 받기도 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합천군 갑 선거구에 또 다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유봉순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부터 한의사에 종사하며 민주당 부산 을구 당위원장으로 있었다. 1956년 지구당 구역 내 1956년 지방선거 출마자들과 부산 초량출장소장 집을 방문하다 청년 백 여명으로 부터 집단 구타를 당해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오위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합천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는데, 무려 13명의 후보와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각축을 벌인 끝에 민주당 정길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으며, 1975년 9월 11일 부산시 동구 초량3동 664-25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상신리 박곡재에 안장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합천군 갑[6]

[[무소속(정치)|
무소속
]]
7,321표 (23.81%) 당선 (1위) 초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4,080표 (13.67%) 낙선 (3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부산시 동구[7]

[[무소속(정치)|
무소속
]]
1,386표 (4.21%)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합천군 을[8] 2,468표 (7.02%) 낙선 (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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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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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묵재공파 29세 용(容) 희(喜) 렬(烈) 항렬.[2] 광주 노씨 집성촌이다.#[3]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는 황정리 79번지가 아버지 노수현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4] 음력 8월 6일.[5] 권석(權鉐)의 딸이다.[6] 제31선거구[7] 제7선거구[8] 제40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