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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드너 SC | |
Dresdner SC | |
<colbgcolor=#c80205><colcolor=#fff> 정식 명칭 | Dresdner Sportclub 1898 e.V. |
창단 | 1898년 4월 30일 ([age(1898-04-30)]주년) |
1990년 3월 30일 ([age(1990-03-30)]주년) | |
소속 리그 | 6. 작센리가 (6. Sachsenliga) |
연고지 | 작센 주 드레스덴-프리드리히슈타트 (Dresden-Friedrichstadt) |
홈구장 | 하인츠 슈타이어 슈타디온 (Heinz-Steyer-Stadion) (23,767명 수용)[1] |
라이벌 | SG 디나모 드레스덴 - 드레스덴 더비 |
회장 | 귄터 레티히 (Günther Rettich) |
감독 | |
공식 웹사이트 | |
우승 기록 | |
★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 (2회) | 1942-43, 1943-44 |
VMBV 축구 선수권 대회[2] (6회) | 1904-05, 1925-26, 1928-29, 1929-30, 1930-31 1932-33 |
DFB-포칼 (2회) | 1939-40, 1940-41 |
FDGB-포칼 (1회) | 1957-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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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레스드너 SC는 독일 작센 주 드레스덴을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이다. 독일 1부 리그 역사상 최초로 전승 우승이자 무패 우승을 달성한 팀이며 유럽 4대 리그 유일의 전승 우승을 달성한 팀이다.[3]2. 역사
2.1. 舊 드레스드너 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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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 로고 |
1943년, 1944년 독일 챔피언 드레스드너 SC |
1898년 4월 30일 "슈타트 코블렌츠"라는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드레스드너 SC가 창단되었다. 사실 드레스드너 SC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1843년 창단된 ATV 드레스덴이나 1873년 드레스덴 잉글리시 풋볼 클럽이라는 팀들이 있었지만 두 팀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드레스드너로 합류한것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창단일은 1898년이다.
1901년 시작된 중부 독일 챔피언십에 참가했다. 그때당시엔 VfB 라이프치히와 함께 거의 리그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을정도로 상위권을 맴돌았다. 1934년 가우리가로 바뀌기 전까지 1905, 1926, 1929, 1930, 1931, 1933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가우리가로 바뀐 뒤에도 1934, 1939, 1940, 1941, 1943, 1944년에도 우승을 차지했고 1940, 1941년엔 DFB-포칼의 전신이었던 참머포칼에서 우승하고 1943, 1944년에는 독일 챔피언까지 달성했다. 특히 1942-43시즌엔 23전 전승 152골 16실점이라는 믿을수 없는 성적도 이루어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독일 챔피언십 우승자였기 때문에 그때당시 독일축구의 패권을 상징했던 빅토리아 트로피를 영구 소장하게 된다.[4]
2.2. 동독 시절
1945시즌 도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며 클럽이 해산되었다가 1946년 SG 프리드리히슈타트라는 이름으로 재창단되었다. 과거 드레스드너 SC 시절 로고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으며, 선수였던 헬무트 쇤을 다시 영입하기도 했다. 클럽의 형태 역시 일반적인 사회주의 기업 시스템과는 다르게 총회에서 자체 이사회를 선출하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동독 초기에는 엄청난 인기팀이었으며 당시 리그 평균 관중의 두 배 이상이 경기를 보러 왔다.하지만 사회주의 시스템을 거부한 축구단은 눈엣가시일수밖에 없었다. 오버리가 창설 이전 1949시즌 소련 점령지역 챔피언십 8강에 진출해 ZSG 우니온 할레를 만났는데 이례적으로 중립구장이 아닌 할레의 홈구장에서 치뤄지는 일도 발생했다. 또한 할레는 경기전 등록하지 않은 선수를 4명이나 영입해 뛰었고, 이러한 규칙위반에 대한 논의조차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이는 시작이었으니...
DDR 오버리가에 참가한 첫 시즌인 1949-50시즌동안 엄청난 기록들을 써내려갔다. 앙커 비스마어전 11대0, 바벨스베르크전 12대2 등 다득점경기가 이어졌고, 이 덕에 평균 한경기당 3.35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썼다. 이는 이후 1984-85시즌 BFC 디나모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리가 초대 우승팀이 될수는 없었다. 당시에 리가에서는 당시 사회주의 클럽 시스템에 맞게 지역 기업인 호르히의 후원을 받던 ZSG 호르히 츠비카우역시 강팀이었다. 그리고 1950년 4월 16일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츠비카우와 만나 우승 결정전을 치루게 되었다. 하지만 하인츠 슈타이어 슈타디온의 약 6만명의 관중 앞에서 치러진 경기는 비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프리드리히슈타트의 쿠르트 레만이 경기시작 3분만에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나갔다. 몇분뒤 하인츠 자트라파의 동점골이 터졌다. 이때부터 경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2분 츠비카우 선수의 거친 태클로 프리드리히슈타트의 주장 발터 크라이슈가 심각한 부상을 당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5] 당시 축구 규정에 교체제도가 없었기에 그대로 10명이 경기를 해야했다. 이후로도 츠비카우의 거친 파울이 계속되었는데 이상하리만큼 심판은 츠비카우에게 관대했다. 경기가 끝날 즈음 프리드리히슈타트는 8명의 선수만이 남았다. 5대1이라는 처참한 점수로 패했고, 분노한 프리드리히슈타트의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츠비카우의 선수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나서서 진압하게 된다.[6] 경기가 끝나고 하인츠 슈타이어 슈타디온에서 6개월동안 축구경기를 열수 없게 되었으며 팬을 통제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프리드리히슈타트는 클럽 해체 명령을 받았고, 당시 선수 겸 감독이었던 헬무트 쇤은 스포츠위원회에서 폭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물어 추후에 처벌할것을 알렸다.
이에 경기 며칠후 헬무트 쇤의 주도하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서베를린으로 도망쳐 헤르타 BSC와 DSC 하이델베르크에 입단했다. 남은 선수들은 BSG 타바크 드레스덴으로 이적했고, 뿔뿔이 흩어졌다.
사실 당시 동독에는 한 도시에 여러 클럽들을 강제 합병해 기업 구단(BSG)으로 만들어 축구 수준을 높이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1. FC 로코모티베 라이프치히. 이에 따라 드레스드너 SC 역시 해체되어 BSG 타바크 드레스덴으로 모든 선수들을 이전시켜야 했기에 명분이 필요했던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독일 챔피언이자 중부 독일의 최강자였던 드레스드너 SC는 공산주의 정권앞에 무릎꿇으며 사라지게 된다.
2.3. 해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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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G 로타치온 드레스덴 로고 | SC 아인하이트 드레스덴 로고 | FSV 로코모티베 드레스덴 로고 |
서독으로 도망치지 못한 선수들은 예정대로 BSG 타바크 드레스덴에 입단했고, SG 미크텐, BSG 작센페를라크 드레스덴, BSG 로타치온 드레스덴을 거쳐 1954년 SC 아인하이트 드레스덴에 합병되었다. 1958년 FDGB-포칼에서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1966년 최종적으로 FSV 로코모티베 드레스덴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통일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그리고 당시 갑자기 응원하던 팀이 해체된 프리드리히슈타트의 팬들은 대체 클럽으로 SV 도이체 폴크스폴리차이 드레스덴을 찾았다. 당시 각지에 흩어져있던 SV 도이체 폴크스폴리차이의 선수들을 한데 모아 창단했던 클럽인데, 이 클럽이 바로 SG 디나모 드레스덴이다.
2.4. 新 드레스드너 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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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 로고 |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독일에서 공산주의정권이 물러나자, 동독시절 쪼개졌던 FSV 로코모티베 드레스덴과 SC 아인하이트 드레스덴이 합병하며 해산된지 약 40년 만에 재창단되었다.
4부리그에서 시작한 드레스드너는 1992년 승격해 가장 높은 아마추어리그였던 3부리그까지 승격했지만, 다시 강등당하고 만다. 그리고 클럽 창단 100주년인 1998년 다시 3부리그로 승격에 성공했지만 같은해 12월 클럽이 파산하는 악재속에서 1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0년에는 과거 자신들의 유산이었던 SG 디나모 드레스덴을 40년 만에 넘어서며 드레스덴의 1인자 자리를 되찾았으나, 2년만에 다시 디나모에게 제쳐졌다. 2002-03시즌 강등당했고, 2005년 또다시 클럽이 파산하며,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며 7부리그까지 추락했다.
2018년 7부리그에서도 강등당했다가 다행히 2018-19시즌 바로 다시 승격에 성공했다. 2023-24시즌 7부리그에서 우승하며 6부리그인 작센리가로 승격했다.
3. 유명 선수
[1] 안전상의 이유로 4천 5백명으로 제한되어있다.[2]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3] 1942-43 시즌[4] 현재도 드레스드너 SC 서포터의 은행 금고에 있다.[5] 발터 크라이슈는 이 부상으로 인해 은퇴했다.[6] 이러한 경기 조작은 동독에선 흔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BFC 디나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