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08:18:57

라디슬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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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islao
가문 앙주 왕조
생몰년도 1377년 2월 15일 ~ 1414년 8월 6일
출생지 헝가리 왕국
사망지 나폴리 왕국 나폴리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386년 - 1414년
아버지 카를로 3세
어머니 두라초의 마르게리타
형제 조반나 2세
배우자 쿠스탄차 치아라몬테, 뤼지냥의 마리아, 마리아 드 엥기엔
자녀 두라초의 레이놀드(사생아), 두라초의 마리아(사생아)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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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7대 국왕.

2. 생애

1377년 2월 15일 헝가리 왕국 자다르에서 슬라보니아 공작 카를로와 조반나 1세의 여동생인 칼라브리아의 마리아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의 막내 딸인 두라초의 마르게리타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나로 조반나 2세가 있었다. 아버지 카를로는 두라초 공작 루도비코와 산세베리노의 마르게리타 사이의 외아들로, 루도비코는 두라초 공작 조반니의 아들이고, 조반니는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이슈트반 5세의 딸 마리어의 막내아들이다.

1382년 아버지 카를로가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를 살해하고 카를로 3세로서 왕위에 오른 뒤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385년 9월, 카를로 3세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로부터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되자 곧장 헝가리로 진군해 1385년 12월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 입성한 뒤 12월 중순에 헝가리 여왕 마리어를 퇴위시키고 12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카로이 2세'로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1386년 2월 7일 부더 궁정에서 마리어의 어머니 엘리자베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왕이 마시는 음료수를 담은 컵을 가지고 다니는 시종 포르가치 벌라주(Forgách Balázs)가 휘두른 둔기에 머리를 가격당해 중상을 입고 비셰그라드로 실려간 뒤 2월 24일에 사망했다.

당시 9살이었던 라디슬라오는 아버지의 부고를 접한 뒤 곧바로 나폴리 왕위에 추대되었고, 어머니 마르게리타가 섭정했다. 마르게리타는 조속히 나폴리의 명목상 군주인 교황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당시 교황청은 서방교회 대분열로 인해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었다.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는 라디슬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어린 왕을 통제하고 싶었기에 대관식 거행을 쉽사리 허락해주지 않았다.

한편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주요 지지자였던 조반나 1세가 카를로 3세에게 폐위당한 것에 분노했고, 앙주 공작을 나폴리의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처음에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카를로 3세와 대적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384년에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고, 그의 아들 루이 2세는 어머니 발루아의 마리의 섭정을 받았다. 클레멘스 7세는 루이 2세를 나폴리 왕으로 세움으로써 로마 교황을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압박하려 했다.

나폴리 왕국 내에서도 두 정파가 갈등을 벌였다. 한 정파는 카를로 3세를 지지했던 이들이 주류였지만, 다른 정파는 나폴리 왕국의 본류인 앙주 공국에서 새 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여겼다. 헝가리 귀족들은 라디슬라오를 새 왕으로 받들려 하니 라디슬라오나 섭정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마르게리타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거절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이 카로이 2세의 뒤를 이어 헝가리 왕 '라슬로 5세'로 즉위했다고 선포하는 등 아들의 위신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1387년 7월, 친 앙주파가 나폴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게리타는 라디슬라오와 조반나를 데리고 가에타 요새로 도주했고, 나폴리는 조반나 1세의 네번째 남편으로 카를로 3세와 맞서다가 패배한 뒤 숨어지냈던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에 의해 장악되었다. 오토는 앙주 공작 루이 2세를 나폴리 국왕 '루이지 2세'로 받들었고, 앙주 공국에서는 총독을 파견해 나폴리 왕국을 대리 통치하게 했다. 교황 우르바노 6세는 레이몬트 오르시니에게 나폴리를 라디슬라오의 지배로 돌려놓으라고 지시했지만, 레이몬트의 공세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직 가에타, 아베르사, 카푸아만이 라디슬라오를 지지했고, 일부 도시는 아예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던 1389년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하고 피에로 토마첼리 추기경이 보니파시오 9세로서 새 교황에 즉위했다. 그는 나폴리 왕국을 교황청의 수중에 온전히 돌려놓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로 마음먹고, 라디슬라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에 마르게리타는 시칠리아의 유력 귀족인 만프레디 치아라몬테의 딸 쿠스탄차를 며느리로 삼음으로써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앙주 세력 역시 치아라몬테 가문에 루이지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만프레디는 라디슬라오를 택하기로 하고 1389년 9월 초 4척의 갤리선을 가에타로 파견해 라디슬라오를 지원했다.

1389년 11월 1일, 클레멘스 7세는 루이지 2세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1390년 봄, 보니파시오 9세는 피렌체의 수석 추기경 안젤로 아치아올리에게 라디슬라오를 시칠리아, 예루살렘, 헝가리의 왕으로 즉위시키라고 지시했다. 안젤로 아치아올리는 가에타에 도착한 뒤 1390년 5월 29일 라디슬라오의 대관식을 거행했고, 마르게리타와 함께 라디슬라오 왕의 후견인이 되었다. 1390년 7월, 당시 13세였던 루이지 2세는 나폴리로 향했다.

이후 라디슬라오 세력과 루이지 2세 세력은 나폴리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루이지 2세의 병력이 더 많았기에 몇몇 나폴리 요새가 그에게 넘어갔지만, 보니파시오 9세의 정치 공세에 넘어간 귀족들이 라디슬라오 편을 든 데다 치아라몬테 가문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라디슬라오 세력이 용병을 대거 고용해 반격해오자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393년 즈음에 이르러 친 앙주 세력은 나폴리에서 점점 고립되었다. 1393년, 그동안 라디슬라오를 지원했던 만프레디 치아라몬테가 사망했다. 이후 치아라몬테 가문이 시칠리아 국왕 마르티노 1세의 군대에 참패해 몰락해버리자, 라디슬라오는 마르게리타의 조언에 따라 보니파시오 9세의 결혼 무효령을 접수받고 쿠스탄차와 이별했다.

이후에도 라디슬라오의 세력은 점점 강성해진 반면, 루이지 2세 세력은 1394년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한 뒤 새 아비뇽 교황에 즉위한 베네딕토 13세가 자금 부족과 내부 정쟁으로 인해 더 이상 나폴리에 신경쓰지 못하게 되자 쇠락했다. 1399년, 라디슬라오는 오르시니 가문의 지원에 힘입어 나폴리를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봉쇄했다. 결국 나폴리는 항복했고, 루이지 2세는 앙주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라디슬라오는 나폴리 왕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고, 이와 동시에 친정을 시작했다.

라디슬라오는 아버지가 한때 차지했던 헝가리 왕위를 탈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크로아티아-달마티아-헝가리 남부 영주들을 포섭해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지기스문트는 이에 맞서 브렌덴부르크를 모라비아의 변경백이자 자신의 사촌인 요프스트에게 저당잡히는 대가로 군자금을 지원받은 뒤 나폴리 왕국 및 반란자들을 상대로 투쟁했다. 그러나 보유한 군사력이 반란군을 압도할 수준이 되지 못하는 데다 보스니아 왕국트브르트코 1세가 반란군을 지원하는 바람에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자, 막강한 사병과 드넓은 영지를 보유한 치릴레이(Czillei)-가라이(Garai) 가문 연합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왕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양도해야 했다.

1390~1391년, 가라이 미클라시가 이끄는 왕실군이 트브르트코 1세 휘하의 보스니아군을 격파하면서 보스니아 왕국이 반란군을 더 이상 후원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반란군의 위세는 점차 약화되다가 1394년 7월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급격히 위축되었다. 이에 라디슬라오는 나폴리 왕국의 봉신이었지만 이미 아차이올리 가문에게 넘어가고 있던 아테네 공국을 1394년에 정식으로 아차이올리 가문에 넘겨 그들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또한 북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 국가 중 하나인 제노바를 자기 편으로 포섭했다.

문제는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 이들은 나폴리 왕국과 헝가리 왕국이 한 군주에 의해 통치된다면 아드리아 해에 대한 자신들의 패권이 흔들릴 거라고 여겼다. 라디슬라오는 1402년 30,000 두카트를 받고 코르푸를 베네치아에 넘김으로써 그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고자 했지만, 베네치아는 여전히 미심쩍은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9세 역시 굳이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와 적대할 이유는 없다고 봤기에 헝가리 왕이 되려는 그의 야심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렇듯 베네치아와 교황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상황에서 성공 가능성은 불확실했지만, 라디슬라오는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1403년,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로 간 틈을 타 나폴리군이 헝가리로 출격했다. 그들은 자다르를 공략한 뒤 헝가리 귀족들에게 자신을 왕으로 받들라고 요구했다.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고, 달마티아 전역이 라디슬라오의 수중에 넘어갔다. 지기스문트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헝가리 귀족 가라이 미클로시와 마로티 야노시가 반격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3년 4월 말, 보니파시오 9세는 대세가 라디슬라오 쪽으로 넘어갔다고 여기고 라디슬라오를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다는 뜻을 전 유럽에 알렸다. 6월 1일 앙겔로 아차이올리 추기경은 헝가리로 가서 그곳의 주교들에게 새 국왕 라디슬라오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7월 14일, 라디슬라오 본인이 7척의 갤리선과 5척의 소형 선박과 함께 비에스티에서 출발해 7월 19일 자라에 상륙한 후 이틀 늦게 도착한 헝가리 귀족들을 성문 앞에서 말을 탄 채 맞이했다. 이후 영주들과 협상을 벌인 끝에 그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충성서약을 받아내고 1403년 8월 5일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대관식을 치른 뒤 달마티아 도시의 특허를 확인하고 헝가리 본토를 향해 북상했다.

한편, 보헤미아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지기스문트는 가라이 미클로시의 구원 요청을 받자 헝가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1403년 7월 하반기에 군대를 소집한 뒤 헝가리로 출발했고, 7월 24일 브라티슬라바 부근에서 헝가리 지지자들과 합세한 뒤 군대를 3개 분대로 나누고 달마티아 공세를 개시했다. 지기스문트 본인은 에스테르곰으로 이동했고, 스티보르츠의 스티보로가 이끄는 주력군은 죄르를 포위했으며, 페레니 페테르와 로즈고니 시몬이 이끄는 또다른 분견대는 티서 강변을 따라 이동했다. 스티보로는 죄르 공략에 성공한 뒤 가라이 미클로시와 연합한 후 라바 강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여 라디슬라오의 주력군을 섬멸하고자 했다.

라디슬라오는 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라바 강 서쪽의 세베스 인근에 진을 치고 있던 헝가리와 이탈리아 군대를 라바 동쪽으로 옮겼다. 이후 파포치 인근에서 스티보로와 가라이 미클로시가 이끄는 적군과 맞붙었으나 참패를 면치 못했고, 그가 가지고 온 군대 장비 대부분을 상실했다. 라디슬라오는 자다르로 도주했고, 지기스문트의 추종자들은 공세를 이어가 달마티아 각지를 약탈하고 에스테르곰을 공략한 뒤 그곳의 교회를 약탈했다. 교황은 대교구 재산을 파괴한 자들에게 천벌이 내려질 것이라고 비난하고, 지기스문트 편에 선 주교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자다르로 돌아온 라디슬라오는 자신을 따랐던 헝가리 귀족과 주교 대부분이 지기스문트에게 귀순했다는 소식을 듣자 11월 7일 교황 특사와 함께 나폴리로 도주했다. 자그레브의 세페치 야노시 주교(이후 나폴리 대주교), 컬로처의 크리조곤 대주교, 에스테르곰의 죄르지 주교도 헝가리를 떠나 나폴리로 망명했다. 이후 라디슬라오는 아직 자신을 따르는 달마티아 도시들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100,000 두카트에 팔았다. 이후에도 헝가리 각지에서 발발한 반란에 시달리던 지기스문트는 부더에 소집된 의회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선언해 내전을 어느정도 잠재웠다.

하지만 라디슬라오는 여전히 헝가리 왕이 되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1404년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의 후견인을 맡던 빌헬름과 자신의 누이 조반나의 결혼을 주선했고,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와도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사방에서 공격당할 위기에 직면한 지기스문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1405년 첼레 백국의 백작 헤르만 2세의 막내딸 바르바라와 결혼해 당시 상당한 군사력과 부를 갖추고 있던 첼레 백국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 중부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라디슬라오가 중부 이탈리아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게 했다. 1407년 보스니아 일대가 라디슬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자, 지기스문트는 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보스니아로 진군해 1408년 도보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보스니아 귀족 200여 명을 학살했다.

헝가리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라디슬라오는 이탈리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 반란을 도모했던 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어머니와 누이를 가에타 요새에서 나폴리의 카스탈 누오보로 데려왔다. 이후 보니파시오 9세의 권유에 따라 1403년 2월 키프로스 공작 자크 드 뤼지냥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지만, 마리아는 1404년 9월 4일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1404년 보니파시오 9세가 사망하자, 로마의 추기경 8명이 베네딕토 13세에게 교황직에서 물러나준다면 아비뇽과 로마 추기경들이 공동으로 모여서 새 교황을 추대하는 데 동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13세의 사절단이 그를 대신해 거부하자, 로마 추기경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7세를 선출했다. 인노첸시오 7세는 강성 구엘프파(친 교황파) 지지 지역인 나폴리 왕국의 술모나 출신이었기에, 기벨린파(친 황제파)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지만, 라디슬라오가 파견한 군대가 이들을 진압했다.

1405년 로마로 향한 라디슬라오는 일부 로마 귀족들로부터 로마의 영주권을 가지라는 제안을 받았다. 라디슬라오가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치자, 교황 인노첸시오 7세는 위협을 느끼고 1406년 1월 9일 라디슬라오를 나폴리 국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라이몬드 오르시니에게 나폴리에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겼다. 라이몬드 오르시니는 곧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망했지만, 아내 마리아 드 엥기엔은 반란을 이어갔다. 1406년 봄 라디슬라오가 이끄는 나폴리군이 마리아가 있는 타란토를 포위했지만, 마리아는 2개월간 항전한 끝에 격퇴했다. 1406년 7월, 라디슬라오는 교황 인노첸시오 7세와 로마를 다시는 노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평화 협정을 맺고 나폴리 왕으로 인정받았다. 마리아는 이후에도 항전을 이어갔지만, 1407년 4월 23일 라디슬라오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와 결혼함으로써 반란을 끝냈다.

1406년 11월 6일 인노첸시오 7세가 선종했다. 뒤이어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2세가 교황령 통제에 애를 먹자, 라디슬라오는 1407년 교황령을 침공해 아스콜리피케모와 페르모를 공략했다. 1408년에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하는 도시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오스티아를 포위했다. 짧은 공성전 끝에 교황군 사령관 파올로 오르시니에게 뇌물을 줘서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4월 25일 로마에 입성해 군대를 주둔시켰고, 페루자 역시 손아귀에 넣었다. 1409년, 라디슬라오는 토스카나를 침공해 그곳의 군주 게라르도 아피아니로부터 코르토나와 엘바 섬을 빼앗았다. 뒤이어 피렌체를 공격했지만 피렌체가 고용한 용병대장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격파당하자 퇴각했다. 하지만 그는 북부 이탈리아를 공략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를 압박해 가에타로 이송시켰다.

시에나 공화국과 피렌체 공화국, 그리고 추기경 발다사레 코사는 그의 야심을 막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피사의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는 라디슬라오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앙주의 루이지 2세에게 나폴리를 다시 정복하라고 권고했다. 루이지 2세는 1409년 7월 말 1,500명의 기병과 함께 피사에 도착한 뒤 나폴리 왕관을 썼다. 여기에 무치오 아텐돌로, 브라초 다 몬토네가 이끄는 동맹군이 라디슬라오의 통제 아래 있던 교황령을 침공하고 로마로 이동했다. 라디슬라오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2,000명의 병력을 줘서 로마를 지키게 했지만, 그들은 적군이 로마로 접근하자마자 항복했다. 그러나 동맹군은 바티칸과 트라스테베레 구역만 공략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친 나폴리 세력이 여전히 강성했다. 코사 추기경과 루이지 2세는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로마 공략을 맡기고 추가 지원을 얻고자 이탈리아 북부와 프로방스로 이동했다.

1410년, 라디슬라오는 제노바의 반 프랑스 반란을 이용해 제노바의 지지를 얻어냈다. 동맹군은 그해 1월 2일에 로마를 접수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로방스에서 새 병력을 싣고 항해하던 루이지 2세의 함대는 토스카나 해안에서 나폴리 해군의 급습으로 6,000명의 병력과 60만 두카트 가치의 보물을 상실했다. 그 동안 알렉산데르 5세는 사망했고, 발다사레 코사가 요한 23세로서 교황에 즉위했다. 요한 23세는 라디슬라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이를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면죄부 판매를 승인했다.

라디슬라오는 적이 주춤한 사이 피렌체, 시에나와 평화 협약을 맺고 병력을 집결시켰다. 1411년 5월 19일 무치오 아텐돌로가 이끄는 군대와 로카세카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나폴리군이 패배했지만, 무치오는 라디슬라오가 산게르마노에 설치한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병력과 물자가 소진된 루이지 2세는 앙주로 돌아갔고, 1412년 라디슬라오에게 고용된 용병대장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가 안코나 변경백의 일부 영역을 공략했다. 대세가 라디슬라오 쪽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눈치챈 무치오는 라디슬라오에게 귀순했다. 결국 1412년 6월 14일, 요한 23세는 라디슬라오를 나폴리 국왕으로 인정하고 75,000플로린을 배상했다. 라디슬라오는 그 대신 그레고리오 12세를 가에타에서 리미니로 이주시키고 그를 교황으로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요한 23세가 배상금 75,000플로린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고, 피렌체가 지기스문트와 연합해 다시 나폴리 왕국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라디슬라오는 1413년 5월 중순에 군대를 일으켜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해 6월 8일, 그의 군대는 로마를 공략한 뒤 약탈을 자행했고, 요한 23세는 피렌체로 달아났다. 라디슬라오는 뒤이어 움브리아와 라티움 북부로 향했다. 피렌체는 라디슬라오의 공세를 두려워해 그가 교황령을 정복하는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불가침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이탈리아 북부를 향한 대규모 원정 준비에 1413년 후반기를 보낸 라디슬라오는 1414년 4월 로마를 떠나 볼로냐로 진격했다.

요한 23세는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라디슬라오를 막아설 동맹이 없자 지기스문트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얻지 못했다. 시에나, 아시시, 볼로냐 등이 잇따라 라디슬라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호소했다. 이제 이탈리아 전체를 손아귀에 쥐려는 그의 야망은 곧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가 이탈리아 전체의 군주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토디 공방전을 치르던 중 병에 걸린 라디슬라오는 페루자와 로마를 거쳐 나폴리로 돌아갔고, 1414년 8월 6일 카스텔 누오보에서 사망했다. 대부분의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는 생전에 정식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누이 조반나가 조반나 2세로서 나폴리 여왕에 등극했다. 조반나 2세는 남동생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기게 했다.
QUI POPULOS BELLO TUMIDOS, QUI CLADE TYRANNOS
그는 육지와 바다에서 거인이 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PERCULIT INTREPIDUS, VICTOR TERRAQUE MARIQUE
군대와 방벽들을 잇따라 무찌르고
LUX ITALUM, REGNI SPLENDOR CLARISSIMUS HIC EST
우리 이탈리아에 햇살을 비추고 우리 왕국을 찬란하게 빛나게 했던
REX LADISLAUS DECUS ALTUM ET GLORIA REGUM.
옛 왕의 자손인 라디슬라오가 이 무덤에 잠들었다.

3. 가족 관계

  • 쿠스탄차 치아라몬테(1377년 ~ 1423년): 시칠리아 귀족 만프레디 치아라몬테의 딸
  • 마르 드 뤼지냥(1381년 ~ 1404년): 키프로스의 자크 드 뤼지냥의 딸.
  • 마리아 드 엥기엔(1367년 또는 1370년 ~ 1446년): 카스트로 백작 조반니의 딸.
  • 사생아
    • 두라초의 레이놀트(? ~ ?): 카푸아 공작.
    • 마리 드 두라초: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