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1 00:00:30

라미루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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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왕조
펠라요 파빌라 알폰수 1세 프루엘라 1세 아우렐리우
아스투리아스 왕조
실루 마우레가투 베르무두 1세 알폰수 2세 네포시아누
아스투리아스 왕조
라미루 1세 오르도뉴 1세 알폰수 3세 프루엘라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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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라미루 1세.jpg
Ramiro I de Asturias
가문 아스투리아스 왕조
생몰년도 790년 ~ 850년 2월 1일
출생지 아스투리아스 왕국 오비에도
사망지 아스투리아스 왕국 오비에도
재위
기간
아스투리아스 왕국 국왕 842년 - 850년
아버지 베르무두 1세
어머니 누닐라
배우자 우라카, 파테르나
자녀 오르도뉴 1세, 가르시아, 알돈자

파일:Royal_flag_of_Ramiro_I_of_Asturies.svg.png
라미루 1세의 깃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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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투리아스 왕국 11대 국왕.

2. 생애

790년경 아스투리아스 8대 국왕 베르무두 1세와 누닐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791년 아버지가 퇴위하고 알폰수 2세가 왕위에 오른 뒤, 알폰수 2세의 궁정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3세기에 집필된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알폰수 2세는 모종의 이유로 결혼하지 않으면서 라미루를 후계자로 일찌감치 지명했다고 한다.

842년 3월 20일 알폰수 2세가 오비에도 왕궁에서 숨을 거뒀을 때, 그는 모종의 이유로 밖에 나가 있었다. 궁정관리이자 알폰수 2세의 혈족이었던 네포시아누는 이를 틈타 아스투리아스와 바스크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모아 왕을 자칭했다. 이에 라미루는 갈리시아인들을 모집해 오비에도로 진군했다.

양군은 오비에도 서쪽의 코르넬리아나 마을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참패한 네포시아누는 칸카스 데 오니스 인근의 프리모리아스에서 체포되었고, 실명형에 처해진 뒤 알려지지 않은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네포시아누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그는 로그로뇨에 산티아고 교회를 세우고 최초의 이베리아 반도 기사단인 로그로뇨 기사단을 설립했다.

844년 바이킹 함대가 히혼 해안에 나타났다. 그들은 라 코루냐까지 침투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라미루 1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역공을 가해 많은 바이킹들을 죽이고 70척의 배를 불태웠다. 여기서 살아남은 바이킹들은 좀더 남하해 리스본을 공략하고 세비야까지 침투해 세비야를 폐허로 만들 정도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다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2세에게 궤멸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무슬림군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침공하여 클라비조에 이르러 라미루 1세의 군대와 격돌했을 때 대 야고보가 눈부신 흰 말을 타고 나타나 무슬림들을 긴 창으로 쓸어버렸다고 한다. 라미루 1세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짓고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농부들에게 매년 곡물을 성당에 공물로 바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전승은 300여 년이 지난 뒤에 집필된 카스티야 문헌에서 처음 등장해 현대까지 살이 붙여졌는데, 초기의 문헌 자료에는 834년에 벌어졌다고 서술했지만 후대의 사료에서는 라미루 1세의 집권 기간을 고려해 844년으로 수정했다. 학계에서는 클라비조 전투 이야기를 후대에 지어진 이야기로 간주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레콩키스타 운동을 촉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845년, 무슬림들은 레온 시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846년, 라미루 1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카스티야로 진격해 알베타 평원에서 무슬림군과 격돌해 악전고투 끝에 승리했지만 레온 시 탈환엔 실패했다. 그 후 라미루 1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잔혹한 형벌을 행사했다. 강도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실명형에 처했으며, 마법사로 규탄받은 자들을 잡아들여 화형에 처했다. 또한 자신을 암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고발을 받은 알드로이투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으며, 역시 역모 혐의로 체포된 피놀로를 7명의 자녀들과 함께 사형에 처했다. 알비센데 연대기는 그런 그에게 '정의의 지팡이(Uirga iustitiae)'라는 별명을 붙였다.

라미루 1세는 우라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하여 오르도뉴 1세를 낳았고, 파테르나라는 여인과 두번째로 결혼하여 가르시아와 알돈자를 낳았다. 850년 2월 1일 오비에도에서 사망하고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레이 카스트로 교회에 안장되었다. 사후에 장남 오르도뉴 1세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