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란드 닐손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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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축구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롤란드 닐손 Roland Nilsson | |
본명 | 닐스 레나르트 롤란드 닐손 Nils Lennart Roland Nilsson | |
출생 | 1963년 11월 27일 ([age(1963-11-27)]세) / 스웨덴 헬싱보리 | |
국적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79cm | |
직업 | 축구선수(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헬싱보리 IF (1974~1980 / 유스) 헬싱보리 IF (1981~1982) IFK 예테보리 (1983~1989) 셰필드 웬즈데이 (1989~1994) 헬싱보리 IF (1994~1997) 코번트리 시티 (1997~1999) 헬싱보리 IF (1999~2001) 코번트리 시티 (2001~2002) GAIS[1] (2004~2006) |
지도자 | 코번트리 시티 (2001~2002 / 선수 겸 감독) GAIS (2004~2007 / 선수겸 감독) 말뫼 FF (2008~2011) FC 코펜하겐 (2011~2012) 스웨덴 U-17 대표팀 (2014~2017) 스웨덴 U-21 대표팀 (2017~2020) IFK 예테보리 (2020~2021) | |
국가대표 | 116경기 1골 (스웨덴 / 1986~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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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축구선수 출신 現 축구감독.
90년대 스웨덴 축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수비수로 자신의 고향팀 헬싱보리 IF에서 UEFA 컵을 들어올렸으며 셰필드 웬즈데이에서는 짧지만 강력했던 팀의 중흥기를 이끈 일원으로 활약한 레전드이다.
2. 클럽 경력
헬싱보리에서 태어난 닐손은 지역 클럽 헬싱보리 IF 유소년 팀에 입단하여 1980년까지 유스팀의 라이트백으로 뛰면서 축구를 연마했다. 17살의 나이에 1군팀에 승격하면서 최연소 프로데뷔 선수로 주목 받았고 1983년에는 자국의 명문팀 IFK 예테보리와 계약할 정도로 유망한 선수였다.예테보리에 입단했지만 2시즌 동안은 벤치에 머물렀고 1985년 시즌이 돼서야 팀의 레귤러 멤버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해 시즌 유러피언 컵 무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한 닐손은 준결승 바르셀로나전에서도 선발로 출전했다. 팀은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3:0으로 이겼음에도 캄프 누에서 열린 2차전에 3골을 허용하며 결국 총합스코어 동률로 승부차기에서 결판을 내야만 했다. 그리고 닐손은 5번째 키커로 나왔지만 어린 나이에 부담이 컸는지 실축을 범하며 바르샤의 결승 진출을 지켜봐야했다.
가슴 아픈 순간이었지만 닐손은 주저 앉지 않았고 다음 시즌 예테보리의 키플레이어로 맹활약하면서 1986-87 UEFA 컵 결승에서 던디 유나이티드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지난 바르샤 전의 악몽을 떨쳐버리는데 성공한다. 또한 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1989년 12월, 닐손은 잉글랜드 퍼스트 디비전의 셰필드 웬즈데이로 이적료 75만 파운드에 이적한다. 첫 시즌에 클럽은 강등을 당했음에도 그는 팀의 승격을 돕기 위해 잔류를 자청했고 한 시즌만에 다시 승격하는데 크게 견인한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힐스버러의 팬들을 감동시켰고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선수가 되었다.
이후 1995년까지 웬즈데이에서 활약한 그는 1991년, 구단 최초로 풋볼 리그 컵 우승을 도왔고 1993년에는 FA컵과 리그컵 준우승을 거두며 팀의 짧지만 강렬했던 중흥기를 이끌었다. 인상적이었던 당시 닐손의 활약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웬즈데이의 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으며 2007년 설문조사에서는 클럽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웬즈데이의 핵심으로 활약하던 닐손은 1994년 1월, 자신이 향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구단에 고백했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즌이 한창 중이었기 때문에 핵심 선수인 그를 당장 보낼 수는 없었다. 결국 트래버 프랜시스 감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닐손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잔류한다. 그리고 잔여 경기동안 구단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13위를 기록하며 1부리그 잔류에 크게 기여했다.
친정팀 헬싱보리로 돌아온 닐손은 3년간 알스벤스칸과 스벤스카 쿠펜 준우승을 거두었고 1996년에는 스웨덴 올해의 축구선수를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는 남은 커리어를 헬싱보리에서 보내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러나 웬즈데이 시절 그를 영입했던 론 앳킨슨 코번트리 시티 감독이 20만 파운드에 제의를 했고 닐손은 수락하면서 3년만에 잉글랜드 무대로 복귀했다.
옛 스승의 부름을 받은 닐손은 주전으로 나섰으나 팀은 시즌 내내 부진한 성적으로 강등권을 맴돌면서 2부리그 강등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마지막 라운드 토트넘 홋스퍼전에서 승리하며 극적으로 잔류했고 이후 한 시즌을 더 뛰고 헬싱보리로 복귀했다.
2년 뒤 다시 코벤트리로 복귀한다. 당시 팀은 2부리그로 강등당한 상황이었고 감독인 고든 스트라칸이 성적부진으로 해임되면서 그는 플레잉코치 자격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초중반까지는 팀의 순위를 꽤 높이 끌어올렸지만 이후 성적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닐손은 코치에 집중하기 위해 선수 은퇴를 강행했으나 여전히 성적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팀이 플레이오프권에 멀어지면서 2002년 4월, 경질된다.
경질 이후 자국의 GAIS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며 2004년 이후에는 감독 일에 집중하기 위해 선수 생활을 그만둔다.
3. 국가대표 경력
1986년,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른 닐손은 2년뒤, 올림픽대표팀 자격으로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했다.
이후 1990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1992에서 주전 라이트백으로 전 경기를 뛰었고, 유로대회에서는 준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1994년에 치러진 미국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의 역사적인 3위를 이끌었다.
37살의 나이에 참여한 UEFA 유로 2000에서는 벨기에를 상대로 한 개막전에서 전반 43분, 벨기에 선수인 바트 고르의 강력한 전방 압박에 공을 빼앗기는 실수를 범하며 선제골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후 뇌진탕의 영향으로 하프타임 후 교체된 닐손은 더이상 경기에 나서지 못하면서 그의 마지막 국제 메이저대회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대회 폐막 후 그는 대표팀에서 4경기를 더 뛰었는데, 마지막 경기는 2000년 10월 11일에 열린 슬로바키아전이었고, 공교롭게도 경기결과는 그의 국가대표 데뷔전과 마찬가지로 0:0 이였다.
1986년부터 2000년까지 13년간 대표팀에 헌신해온 닐손은 116경기를 뛰며 현재 대표팀 최다 출전 8위에 기록되어 있다.
4. 수상 내역
4.1. 선수
4.1.1. 클럽
4.1.2. 국가대표
-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1986~2000)
-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 1992 3위
- FIFA 월드컵 : 1994 3위
4.1.3. 개인
- 스웨덴 올해의 축구선수 : 1996
- 스웨덴 올해의 수비수 : 1996, 1999
4.2. 감독
4.2.1. 클럽
4.2.2. 개인
- 스웨덴 올해의 감독 : 2010
[1] 예테보리 선수 스포츠 연맹의 줄임말
분류
- 1963년 출생
- 1981년 데뷔
- 2006년 은퇴
- 헬싱보리 출신 인물
- 스웨덴의 축구선수
- 스웨덴의 축구감독
- IFK 예테보리/은퇴, 이적
- 셰필드 웬즈데이 FC/은퇴, 이적
- 헬싱보리 IF/은퇴, 이적
- 코번트리 시티 FC/은퇴, 이적
- GAIS/은퇴, 이적
- GAIS/역대 감독
- 코번트리 시티 FC/역대 감독
- 말뫼 FF/역대 감독
- FC 코펜하겐/역대 감독
- IFK 예테보리/역대 감독
- 스웨덴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1994 FIFA 월드컵 미국 참가 선수
- 스웨덴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2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0 참가 선수
-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스웨덴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88 서울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