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01:23:39

루디 사르조

1. 개요2. 활동3. 사용 장비4. 플레이 스타일5. 기타6. 참여 앨범

1. 개요

파일:rudysarzo.jpg
로돌포 막시밀리아노 사르조 라비에이예 그란데 루이스 파이레티 이 차우몬트
(Rodolfo Maximiliano Sarzo Lavieille Grande Ruiz Payret y Chaumont, 1950년 11월 18일 출생)

쿠바 출신의 현업 애니메이터이자 하드락/헤비메탈 베이시스트로 70년대부터 꾸준히 활동해 온 메탈계의 원로급이다. 화이트 스네이크, 디오, 오지 오스본, 블루 오이스터 컬트, 콰이어트 라이엇 등 메이저 밴드를 돌아가면서 세션을 하였고 현재도 활동 중이다.

2. 활동


오지 오스본의 Mr.Crowley

유튜브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랜디 로즈의 Mr.Crowley 라이브 연주 영상에서 빨간색 쫄쫄이 입고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루디 사르조이다.

현업 3D 애니메이터로 활동도 하고 있어서 공연에 사용하는 애니메이션을 직접 제작하기도 한다.

3. 사용 장비

  • Peavey Cirrus Rudy Sarzo Signature
  • Music Man Sabre
  • Spector Euro4 LX Rudy Sarzo Signature
  • Washburn B-70RS Rudy Sarzo Signature

4. 플레이 스타일

신체적으로 팔이 길고 손이 커서 베이스를 효율적이며 손쉽게 다룬다. 효율성을 극대로 끌어올린 피킹을 구사하여 피킹하는 손가락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인다. 원 핑거로 피킹이 가능할 때는 가급적 투 핑거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곡을 투 핑거로 끝내므로 투 핑거로도 충분히 관광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왼손 운지가 특징이며 왼손으로 코드를 잡고 오른손으로 바디를 때려 울림을 만들어내는 특이한 플레이도 자주 구사한다.[1] 어느 잡지와 인터뷰에서 피크 피킹을 안하는 이유를 물어보자 본인이 피크 피킹을 못해서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가 연주한 Heaven and Hell 영상으로 원곡의 기저 버틀러와는 약간 다른 플레이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5. 기타

실력 못지 않은 타고난 어부지리 운빨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80년대 초부터 수많은 유명 밴드를 거치면서 명성을 얻었는데, 그가 유명해진 계기가 된 앨범들이 정작 그가 레코딩때는 참여하지 않은 앨범들이었다.

루디는 커리어 내내 특정밴드에 장기간 머무르지 않고 저니맨 활동을 하거나 개인활동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밴드에 가입하는 경우가 대부분 전임 멤버가 이미 앨범 레코딩을 끝낸 직후 어떤 이유건 활동 전에 탈퇴해서 그 자리에 대체 멤버로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그 앨범이 상업적, 음악적으로 성공한 명반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작 레코딩 과정에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대체 멤버인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서 계속해서 무임승차를 하게 됐던 것이다.

그의 활동 초기부터 이 기가 막힌 운이 작용하였는데 79년 콰이어트 라이엇의 오리지널 베이시스트 Kelly Garni 가 2집 레코딩을 끝낸 직후 탈퇴 하면서 그 후임으로 들어갔으나, 아무 것도 안했는데 활동 시작과 함께 앨범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자켓 사진에 까지 등장하였다. 이때 먼저 와있던 기타리스트가 랜디 로즈.

81년에는 오지 오스본 솔로 밴드에 가입하면서부터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도 무임승차로 명성을 얻는다. 콰이어트 라이엇이 앨범 2장을 내고도 자리잡지 못한 탓에 랜디 로즈가 콰이어트 라이엇 활동에 의욕을 크게 잃고, 팀을 떠나 슬로터의 데이나 스트럼에게 소개를 받아 오디션을 합격하면서 오지 오스본 밴드로 이적한다. 그리고, 오지 1, 2집 전곡에 송라이팅까지 참여한 전임 베이시스트 밥 데이즐리(Bob Daisley)가 2집 Diary of a Mad Man 의 레코딩이 끝난 직후 탈퇴하면서, 먼저 들어온 랜디 로즈와의 인연으로 루디 사르조가 급하게 대체 멤버로 들어가게 되었다. 루디는 또 한번 녹음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밥 데이즐리[2] 대신에 앨범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자켓 사진까지 찍었다. 이 자켓 사진에는 루디 외에도 드러머 타미 알드리지[3]도 등장하는데, 그 역시 앨범 녹음 직후 탈퇴한 드러머 리 커슬레이크 후임으로 들어간것이다.[4] 오지 오스본 재적시에는 정식 레코딩을 한 적도 없고 공연에만 참여하였고, 라이브 실황 녹음반인 Speak of the Devil이나 상단 링크 영상인 로체스터 극장 라이브 영상분정도에만 실제 연주를 볼 수 있다.[5]

짧았던 오지 오스본 밴드 커리어는 자신을 먼저 이끈 랜디 로즈의 요절로 인해 끝나게 되었다. 비행기 사고로 로즈를 허망하게 잃은 오지는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공연을 위해 랜디의 대타를 구해야 했고, 그때 루디가 자신의 동생 로버트 사르조를 임시 기타리스트로 제안했지만 소속사 제트 레코드에서는 오지나 멤버들과 논의 없이 이안 길런의 밴드 기타리스트였던 버니 토메를 지명해 오지 오스본 밴드로 뛰라고 영국에서 LA로 보내버렸다. 소속사가 갑이라 버니 토메와 일단 손을 맞춰보지만 오지는 버니의 사운드를 싫어해 밴드 활동을 거부했고 술에 쩔어 지내면서 루디는 오지에 학을 뗐고, 그 시기 요절한 랜디에게 헌정하는 트랙 Thunderbird를 전 밴드인 콰이어트 라이엇 멤버들과 작업했다. 그러면서 오지 밴드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루디는 콰이어트 라이엇로 돌아가게 되나,[6] 재합류하게 되는 과정에도 논란이 있었다. 랜디 로즈의 헌정과 함께 83년 콰이어트 라이엇의 신보 Metal Health 앨범은 한참 제작중이었고 셀프 타이틀 트랙이자 대표곡 Metal Health(Bang your head) 와 Don't Wanna Let You Go 의 베이스 트랙은 베이시스트 척 라이트(Chuck Wright)에 의해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루디 사르조가 콰이엇 라이엇에 재합류 하길 원하면서 척 라이트는 녹음 도중 해고를 당해야 했다.[7] 나머지 곡들은 그의 베이스 트랙으로 완성 되었으나, 그가 레코딩 하지 않은 밴드의 히트곡 Metal Health(Bang your head)의 뮤직비디오 출연도 그의 차지였다.[8]

콰이어트 라이엇은 루디의 복귀후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Metal Health의 성공 이후 후속 앨범 Condition Critical이 그에 미치지 못한 성적으로 혹평을 받았고, 정작 팀의 리드보컬 케빈 듀브로는 팀의 기대 이하 성적에도 오만방자한 인터뷰로 타 밴드를 씹고 다니면서 어그로를 왕창 먹는 바람에 또 갈등이 심했고, 결국 루디는 다시 콰이어트 라이엇을 떠나 87년 화이트 스네이크 최고의 명반 1987 앨범의 완성 직후 해당 문서에도 나와있는 대량 해고 사태로 짤린 베이시스트 닐 머레이(Neil Murray)의 대체 멤버로 또 다시 발탁이 된다.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한껏 젊어 보이는 외모로.[9]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세 곡의 메가 히트곡의 뮤직비디오에 전부 등장한다.그리고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10] 미국 투어에 참여하면서 그의 커리어에서 최고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후로도 Dio, Blue Oyster Cult 등 여러 유명 밴드를 거치게 되나, 작곡이나 스튜디오 레코딩에 참여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고, 밴드 멤버로서 앨범 작업에 참여하기 보단 딱 연주자에 머무른 케이스.

그래서 그의 참여 앨범도 무슨 무슨 Live 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체멤버가 기타리스트나 보컬리스트 라면 전임 멤버와 비교 대상이 될수 밖에 없고, 월등한 실력을 보이지 않는 한 보수적인 하드록 헤비메탈 리스너들에게 일단 까이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베이시스트나 드러머 인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고 그러면서도 연주력에 기복없이 안정적이고 무대매너가 좋아서 까이지 않고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 여러 밴드를 돌면서 여러 뮤지션을 상대한 경험과 인맥, 이런 업계의 거물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친화력덕에 저니맨이지만 알고보면 좁디좁은 이바닥에서 간판급 뮤지션들이 오히려 인정하는 베이시스트로 장수할 수 있었던 것.

메탈씬에선 한 밴드를 이끌면서도 전면으로 나서면서 화려한 테크닉과 스피드를 보여주는 베이시스트를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루디는 메탈씬에서만 활동한 연주자도 아니고 베이스를 딱 베이스답게 연주하는 연주자였다. 그는 아이언 메이든의 리더 스티브 해리스처럼 밴드를 관리하고 작곡에 관여하지 않고, 나이트위시의 전 베이시스트 마르코 히에탈라나 딤무 보거의 전 베이시스트의 ICX VORTEX 처럼 서브보컬 등 다른 영역에서 존재감을 보이는 뮤지션은 아니다. 실제로 일반 리스너들은 Slayer의 데이브 롬바르도 정도가 아니라면 밴드의 리듬 섹션의 변화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 밴드를 이끄는 리더나 보컬리스트,기타리스트 입장에서는 사소한 리듬섹션의 변화도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고 정작 없을때 존재감이 더 큰 기존 멤버의 이탈 상황에서 루디는 다른 사람이 녹음했던 파트를 제대로 커버해서 실전 라이브에서 살려주는 쉽지 않은 일을 매우 잘했다. 이미 누가 만들어둔 것이라도 그것을 돈내고 보러온 관객 앞에서 자연스럽게 연주를 할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 그의 튀지 않는 기본기에 충실한 안정적 베이스 레코딩과, 라이브에서의 연주 역량도 떨어지지 않고 다양한 무대경험을 통해 다져진 무대매너를 통해 업계에서 언제든지 급할때 불러서 1인분을 해 줄 수 있는 특급 소방수로써 루디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11]

6. 참여 앨범

콰이어트 라이엇
  • Metal Health (1983)
  • Condition Critical (1984)
  • Alive and Well (1999)
  • Guilty Pleasures (2001)
  • Live At The US Festival (2012)[12]

디오
  • Holy Diver Live (2006)

오지 오스본
  • Speak of the Devil (1982)
  • Tribute (1987)

화이트 스네이크
  • Slip of the Tongue (1989)
  • Live at Donington 1990 (2011)

애니메탈 USA
  • Animetal USA (2011)
  • Animetal USA W (2012)

게스트 참여 앨범
  • Bassinvaders[13] - Hellbassbeaters


[1] 이 플레이는 현재 Black Veil Brides의 애슐리퍼디가 자주 사용한다.[2] 송라이팅 크레딧에만 이름이 올려졌다.[3] 이 두명은 이후 화이트스네이크에서도 같이 활동한다.[4]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 앨범의 리듬섹션이 루디 사르조 와 타미 알드리지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오지 오스본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오지는 솔로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항상 자신의 밴드 멤버들의 수익분배 문제로 큰 갈등과 법적공방을 수도 없이 치렀는데, 이때도 오지와 밥 데이즐리, 리 커슬레이크간에 법정공방이 수년간 이어졌고 오지는 2002년에는 아예 새로운 멤버들을 동원 베이스, 드럼 트랙을 재녹음해서 출시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5] 링크된 Mr Crowley 외에도 Crazy train,I Don't Know등 몇개가 더 있다. 사실 대부분 이 영상의 가치는 랜디 로즈의 몇 안되는 라이브 영상이라는 점이 무게가 실린다.[6] 지금이야 오지 오스본 밴드가 1류 슈퍼 밴드이긴 하지만, 밴드 리더가 제대로 활동을 할 생각을 안하는데다가 잭 와일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밴드 멤버들과 각종 문제를 일으켰던 오지의 만행을 생각하면 그의 탈주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7] 척 라이트는 아예 전문 세션, 투어 전용, 심하게 말하면 땜빵 전문 뮤지션으로 콰이어트 라이엇 외에도 앨리스 쿠퍼, 슬래시 솔로 밴드, 그렉 올먼, 카마인 어피스 등 수많은 뮤지션들의 레코딩과 세션에 참여한 베이시스트 겸 백킹보컬이다. 메탈 뿐 아니라 레게,랩,컨트리등 90여개에 달하는 앨범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영화음악도 참여했으며 콰이어트 라이엇 전기영화까지 참여한 진정한 저니맨 베이시스트.[8] 루디가 나간 오지 밴드 쪽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오지 오스본 밴드를 떠난 뒤 콰이어트 라이엇 멤버로 복귀한 1983년 스티브 워즈니악이 큰 돈 들여 벌였던 1983 US 페스티벌에서 콰이어트 라이엇 소속인 루디와 오지는 다시 마주치고, 오지는 술에 취해 분노하여 루디에게 달려들었다가 시큐리티에 제지당하는 소동도 있었다. 오지와의 화해는 콰이어트 라이엇을 다시 떠난 후에야 했다고. 하지만 최근 인터뷰에서 오지의 성공은 모두 그가 어떤 뮤지션과 작업을 하느냐에 달려있었다라고 얘기하는걸로 보아 사이는 다시 틀어진듯 하다.[9] 당시는 헤어메탈 전성기 시절이었고 아직 20대였던 비비안 캠벨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매니지먼트의 권유에 따라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기 위해 모두 금발로 물들여야 했다.[10] 축구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기브스를 하고 무대에 올랐는데, 리더 데이비드 커버데일은 무대 중앙에 의자에 앉아 연주할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11] 아무리 세션 특화된 뮤지션이라도 전세계 1류 밴드의 만단위 이상 관객을 모은 공연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제대로 연주하는 뮤지션은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것...[12] 1983년 US Festival에서 공연한 라이브 앨범으로 2012년에 정식 발매되었다.[13] 헬로윈의 베이시스트인 마커스 그로스코프 주도로 가동된 프로젝트 밴드로 베이스, 드럼, 보컬로만 파워/스래시 메탈을 구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