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9:50:48

마태오의 복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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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그리스어 κατὰ Ματθαῖον εὐαγγέλιον
라틴어 Evangelium secundum Matthaeum
영어 Gospel of Matthew
한자 가톨릭: 마태오 福音(書)
개신교: 마태福音
중국어 간체자: 玛窦福音
정체자: 瑪竇福音
일본어 マタイによる福音書(マタイによるふくいんしょ)
기본 정보
전승되는 저자 마태오
기록 연대 AD 약 80-90년대
분량 28장
주요인물 예수

1. 개요2. 구성 및 형성과정3. 집필 이유4. 내용5. 특징6. 주요 구절들
6.1. 2장 23절(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는 예언)6.2. 5-7장(산상수훈)6.3. 8장 21-22절(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6.4. 9장 1-8절(죄 사함 받은 중풍병자)6.5. 9장 14-17절(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6.6. 10장 16절(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6.7. 10장 23절(재림과 이스라엘 순회)6.8. 10장 28절(영혼의 건강)6.9. 10장 34-39절(검을 주러 왔노라)6.10. 11장 2-3절(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6.11. 11장 12절(천국은 침노를 당한다)6.12. 11장 13-14절(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6.13. 11장 25-27절(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6.14. 12장 32절(성령훼방죄)6.15. 12장 34절, 23장 33절(독사의 자식들아)6.16. 13장 1-9절(네 가지 씨 비유)6.17. 13장 24-30,36-43절(곡식과 가라지 비유)6.18. 13장 31-33절(겨자씨와 누룩의 비유)6.19. 15장 1-20절(장로들의 전통)6.20. 15장 21-28절(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6.21. 16장 17-20절(베드로의 신앙고백)6.22. 16장 26절(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6.23. 16장 27-28절(이 사람들 중에 살아서 재림을 볼 자가 있다)6.24. 17장 19-20절(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6.25. 18장 23-35절(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6.26. 19장 16-30절(예수를 찾은 젊은 부자)6.27. 20장 1-16절(포도원의 일꾼들)6.28. 22장 30절(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도 시집도 안 간다)6.29. 23장 1-12절(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6.30. 24장 1-36절(성전의 파괴와 마지막 때의 징조)6.31. 25장 14-30절(달란트의 비유)6.32. 25장 40절(형제에게 베풀라)6.33. 26장 6-13절(향유를 부은 여인)6.34. 26장 52절(베드로에게 하신 꾸짖음)6.35. 27장 46절(십자가에서의 절규)6.36. 28장 19절-20절(예수의 지상 대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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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donatello-metthew.jpg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1]
마태오의 복음서 1장 1절 (공동번역 성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오의 복음서 11장 28절

성경의 47번째/40번째 권.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마태오(Ματθαῖος, 코이네 그리스어로 마세오스)가 집필한 것으로 되어있는 복음서.[2] 정경으로 인정받는 4복음서 가운데 첫 번째이며, 3권의 공관 복음서 중 한 권이다. 개신교에서는 마태복음이라고 부른다. 마태오는 족보를 통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혈통을 강조하며 인간성을 뚜렷이 부각하고 있기에 ‘사람’을 상징으로 나타낸다.[3][4] 4복음서 중 "하느님은 왕이다."라는 관점이 가장 두드러지기도 하다.[5] 4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덕분에 먼저 읽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4복음서 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복음서이기도 하다.

2. 구성 및 형성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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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필 이유

유대교의 전통이나 계율, 풍습 등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는 점을 보아 점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갈등이 시작된 시기에 쓰였다고 추정되며, 이 시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예수의 행적을 제시함으로써 공동체 성원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자 작성된 것이다.

특히 마태오 복음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을 위해 쓰인 것으로 보인다. 마태오 복음서 1장에 '아브라함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운운하며 장황하게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도, 유대인이 중시하는 구약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특히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14대,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14대'라면서 14란 숫자를 강조하는데, 다름 아니라 '다윗(דוד)'을 표기하는 히브리 문자인 'ד(달레트, [d])'가 4, 'ו(바브~와우, [v~w])'가 6으로, 4+6+4=14가 되기 때문이다.[6] 족보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예수의 강림이 왕중왕되신 그리스도의 강림임을 드러내는 메시지로 검토하는 것이 타당하다. 매우 철저하게 유대 전통을 지키면서 법적 계보가 우선시되는 전승 자료다.[7]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구약과 신약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구약 성경을 빈번하게 인용하기도 했다. 예수의 인격과 삶, 가르침이 구약의 성취로서 가장 분명히 설명되어 있는 것도 그 증거로 들 수 있다. 또한 마르코 복음에서 이미 다룬 부분은 가급적 생략하면서, 마르코 복음에서 제자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이거나 어이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부분에 대해 다소 제자들 시점에서 변호하거나 긍정적으로 거론하는 다른 관점의 얘기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8]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아무래도 그가 보기엔 지나치게 희화화되거나 쪽팔린 꼴을 보이는 마르코 복음서 속 사도들 일화에 대해 불편했거나 좀 다른 정보를 넣어둘 필요를 강하게 느낀 정황인 것으로, 복음서의 저자가 정말로 마태오일 개연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4. 내용

마태오 복음서는 '행적-설교-맺음말'의 묶음이 5회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이를 육화와 파스카가 책의 앞뒤에서 감싸는 매우 탄탄한 구조로 되어있다.
  • 그리스도의 육화 (1,1-2,23)
  • 제1묶음
    • [행적] 복음 선포 시작 (3,1-4,25)
    • [설교] 산상 설교 (5,1-7,27)
    • [맺음말] (7,28-29)
  • 제2묶음
    • [행적] 치유 및 구마 (8,1-9,38)
    • [설교] 파견 설교 (10,1-10,42)
    • [맺음말] (11,1)
  • 제3묶음
    • [행적] 배척 및 음모 (11,2-12,50)
    • [설교] 비유 설교 (13,1-52)
    • [맺음말] (13,53)
  • 제4묶음
    • [행적] 기적과 논쟁 (13,54-17,27)
    • [설교] 교회 설교 (18,1-18,35)
    • [맺음말] (19,1)
  • 제5묶음
    • [행적] 적대자들 (19,1-22,46)
    • [설교] 심판 설교 (23,1-25,46)
    • [맺음말] (26,1)
  • 그리스도의 파스카 (26,1-28:20)

5. 특징

개종한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태오 복음서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변증서적인 성격이 강하다. 예수에 대한 많은 의문점들에 대해 답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마르코 복음서에도 나오는 예수의 부활기사에, '예수의 시신을 도둑질해 간 후 예수가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퍼트리는 게 아니냐'는 의문에 대한 변론이 28장 11-15절에 설명되어 있는 것 등이 있다.

예수의 유년기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이집트로 피난한 예수의 이야기를 넣으면서 모세의 이야기를 대량으로 인용하는 점으로 보아 예수를 모세에 대비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태오 교회의 신자들이 모세와 친숙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중요한 부분으로 주기도문/주님의 기도(6장 9절 - 13절)가 실려 있는데, 이 부분은 예수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분으로 묘사하여 그 순명을 본받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율법을 강조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마태오 교회의 구성원들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6. 주요 구절들

6.1. 2장 23절(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는 예언)

나자렛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오의 복음서 2장 23절(공동번역성서)

구약 성경에는 누군가를 나자렛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라는 구절이 없어서,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이 구절은 난해 구절로 꼽힌다. 이에 대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 11장 1절[9]에서 가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의 발음이 '네쩨르'인데, 이것이 나자렛을 말한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 반면,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흠모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예언하는 이사야 53장 2절[10]을 인용했다는 견해도 존재하는데, 요한의 복음서 1장 46절[11]을 볼 때 그 당시에 나자렛 사람이라는 말은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고,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서 53장 2절과 최대한 간결하게 연결하려다 보니, 이런 표현이 나왔다는 의견이다.

6.2. 5-7장(산상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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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8장 21-22절(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제자 중 한 사람이 와서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의 복음서 8장 21-22절

일반적인 윤리관과 상충되어 논란이 많은 구절 중 하나이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이 구절 바로 뒤에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는 제자가 장례를 다 치르기까지 기다려 줄 수 없는 상황인 것이 나타난다. 즉, 예수를 따르는 것과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을 둘 다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을 포기하고서라도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마태오의 복음서 19장 29절[12]에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가족이나 재산을 버린 자를 칭찬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가족을 버리는 것이 선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13], 가족들이 자신이 예수를 믿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경우 가족을 떠나는 일이 있더라도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자기 의나 개인의 편안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그런 행위를 하는 상황이어야 그것이 선한 일이라는 것이다.

6.4. 9장 1-8절(죄 사함 받은 중풍병자)

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 자기 동네로 돌아오시자
2.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3.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며 수군거렸다.
4.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어찌하여 너희들은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5.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마." 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7.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8. 이것을 보고 무리는 두려워하는 한편, 사람[14]에게 이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오의 복음서 9장 1-8절 (공동번역성서)

6.5. 9장 14-17절(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태복음 9장 14-17절

구약시대(낡은 가죽 부대, 낡은 옷)가 끝날 무렵에 드디어 메시아가 와서 기뻐해야 할 시기인데 금식(새 포도주, 생베 조각)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며, 신약시대(새 가죽 부대)가 시작되면 금식(새 포도주)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좀 더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새 포도주는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들의 고난을 상징하고, 묵은 포도주는 그것이 결실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기쁨을 상징한다.

6.6. 10장 16절(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장 16절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이 구절을 들어 전도할 때에는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가르치는데, 기독교에서 거짓말은 어떤 경우에든 죄에 해당한다. 이 구절의 뜻은, 뱀이 상황과 상대방을 고려하여 그럴듯한 말로 하와를 속인 것 같이, 다짜고짜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겁주는 것처럼 미련한 짓은 하지 말고 상황과 상대방에 맞는 말을 하되, 그 과정에서 비둘기 같은 순결함은 유지하라는 뜻이다.

6.7. 10장 23절(재림과 이스라엘 순회)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태복음 10장 23절

6.8. 10장 28절(영혼의 건강)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오의 복음서 10:28 (공동번역 성서)

6.9. 10장 34-39절(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0:34-39 (공동번역 성서)

실제로 이 본문 처럼 부모 자식 관계 같이 위계적 관계로 얽힌 사람들끼리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를 때에는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 본문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그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이라면 평화를 위해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6.10. 11장 2-3절(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태복음 11장 2-3절 (개역한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에서는 이 구절과, 그 뒤에 나오는 11장 11절[15]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는 크다는 말을 한 것을 근거로 들어 세례 요한이 배교를 했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신천지 교리 옹호를 위한 억지 주장에 해당한다. 구약성경의 예언서를 온전히 문자적으로 해석했을 때 구약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아는 이 땅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어 낼 메시아인데, 세례 요한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구약성경의 예언서에서 말하는 화려한 모습과는 달라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또한 11장 11절의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는 크다는 말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천국에 있는 존재들처럼 죄를 아예 안 지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6.11. 11장 12절(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12 (개역개정)

구약 시대에는 구약성경의 예언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 것이라는 인식만 가지고 있었지,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뚜렷한 인식 없이도 일상적인 삶에서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었던 것이다.[16] 그리고 메시아의 초림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려고 하자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다며 회개를 촉구한다.[17] 그래서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위하여 회개하기에 힘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마태복음 11장 3절[18]을 볼 때, 세례 요한은 정치적 메시아가 이 땅에서 통치하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다.

6.12. 11장 13-14절(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13-14 (개역개정)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5-6 (개역개정)

구약성경의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의 끝부분에서는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구약의 마지막 부분에 예언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을 말하는 것이므로, 마태복음은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이 세례 요한까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13. 11장 25-27절(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1:25-27 (개역개정)

6.14. 12장 32절(성령훼방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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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12장 34절, 23장 33절(독사의 자식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오의 복음서 12장 34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태오의 복음서 23장 33절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단 하나도 없다고 믿는 기독교 입장에서 이러한 구절들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가 욕쟁이였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건 용인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마음의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성경에 대해 알 만큼 알면서도 자신의 죄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 사람들을 엄하게 꾸짖는 것과[19][20] 상대방을 업신여기며 비난하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같은 말을 하더라도 뉘앙스가 천지 차이이다. 기독교에서는 당연히 전자의 뉘앙스로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장사하는 것을 방해했던 성전 정화 사건 역시, 기독교에서는 올바른 믿음에서 나온 정당한 대처였다고 해석하지, 욱해서 혈기 부린 사건이라는 식으로는 해석하지 않는다.

6.16. 13장 1-9절(네 가지 씨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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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 13장 24-30,36-43절(곡식과 가라지 비유)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6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태복음 13장

6.18. 13장 31-33절(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6.19. 15장 1-20절(장로들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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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 15장 21-28절(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21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21]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복음 15장

예수 그리스도의 매정한 태도로 논란이 되는 일화이다.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여인에게 매정하게 대하는 것 같으나, 사실 발언 하나하나를 따지고 보면 그 자체로는 맞는 말이고 여인이 강아지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도 않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 자체로는 맞는 말이지만 상황적으로는 여인을 비하하는 것 같이 들리는 말을 고의적으로 한 것이고, 여인은 그렇게 들리는 말을 듣고도 자신을 낮추는 큰 믿음을 발휘한 것이다.

예수는 그 여인의 발언에 크게 놀라서 기쁨을 표현하며 환자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낫게 해 주었다.

6.21. 16장 17-20절(베드로의 신앙고백)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마태오의 복음서 16:17-20 (공동번역 성서)

가톨릭에서 교황수위권의 근거로서 제시하는 구절이며, 가톨릭에서는 이 구절이 초대 교황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가톨릭의 교황은 이를 근거로 베드로가 받았다는 천국 열쇠를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는 이 구절이 쓰여 있다.

정작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섬기는[22] 아우구스티누스[23], 요한 크리소스토모,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반석이라고 해당 구절을 해석하였고, 에우세비우스는 그리스도 본인이 반석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는 당대에는 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는 인식이 약했음을 나타내며, 이는 정교회가 가톨릭을 비판하는 강력한 근거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신교에서는 16장 18절에 '이 반석'[24]이라고 번역된 구절 'ταύτῃ(타우테/this/여성 지시대명사) τῇ(테/the/여성 관사) πέτρᾳ(페트라/rock/여성 명사)'는 전체가 여성형이지만 베드로의 이름 'Πέτρος(페트로스)'는 남성 명사라는 점에서, 반석은 남성 명사인 베드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백이라는 뜻의 συγγνώμη, 믿음이라는 뜻의 πίστις 등의 헬라어 단어들이 여성 명사라는 점에서 '이 반석'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내지 믿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하고[25],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반석이시라는 구절들이 많기 때문에[26] 반석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본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개신교 전체에서는 베드로의 반석 여부와 별개로 마태오의 복음서 18:18[27], 요한의 복음서 20:23[28], 에페소서 2:20[29] 등을 근거로 다른 사도에게도 비슷한 권능이 주어졌다고 비판하면서 교황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마르코의 복음서 8장 29절은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6절의 병행구절에 해당하는데, 그 이후의 사건인 마르코의 복음서 9장 34-35절을 보면 제자들끼리 누가 가장 큰지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30] 만약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8절이 베드로의 교황수위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미 베드로가 가장 크다고 결론 난 상황에서 제자들끼리 누가 가장 크냐고 다투는 것은 이상하다며, 이 구절이 교황수위권을 나타낸다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이 존재한다.

또한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는 유대 율법 준수 강요에 대한 비판만 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인물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라는 점, 갈라디아서에 바울로가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일화가 나온다는 점 등이 베드로가 교황이었다는 가톨릭의 주장을 비판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다만 가톨릭 측에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 율법 준수를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것은 야고보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예루살렘 교회의 주교였기 때문에 그들을 대표하여 양보의 의사를 밝힌 것이고, 디다케를 근거로 사도 베드로는 유랑 선교사였기 때문에 예수의 형제 야고보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가톨릭의 반박에 대하여 베드로가 야고보보다 윗사람인데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가 야고보 아래에 있는 사람들 눈치를 보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비판도 있으나 가톨릭 측에서는 아무리 교황이라도 교회 내에서의 평판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사도행전갈라디아서를 근거로 교황수위권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톨릭 나름의 방어 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31]

개신교에서 존 웨슬리는 반석이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는 입장이었다. 장 칼뱅의 경우 성도 개개인들이 연결되어 교회가 된다고 말하는 에페소서 2장 21절[32]을 들어,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개인의 성도들이 반석으로 비유될 수 있고 베드로는 그들 중 하나일 뿐이며 베드로는 성도들을 대표할 뿐이라는 주장을 했다. 또한 장 칼뱅은 에페소서 2장 20절[33]을 볼 때에, 교회가 신약을 쓴 사도들과 구약을 쓴 예언자들 위에 세워졌다는 말은 명백하게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즉, 장 칼뱅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모여 성경의 가르침을 최종 권위로 삼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주장했으며, 베드로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을 뿐 베드로 위에만 교회가 세워진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존 웨슬리의 해석과 유사하게, 장 칼뱅은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기초이고 그리스도 홀로 교회 전체를 지탱한다고 주장했으며, 성도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서게 된다고 부연적으로 설명했다.

개신교 주석인 매튜 헨리 주석이나 호크마 주석 등에서는 교황이 베드로를 계승했다는 것에 반대할 뿐 베드로를 반석으로 보는 견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한편 앵커바이블 마태오 복음서 주석(개신교 주석이다)에서는 더 단호하게, 개신교가 종종 "베드로는 반석이 아니다"라고 독해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후대의 교황들이 베드로를 '계승'했는가에 대해서는 개신교에서 당연히 반대하지만, 베드로가 1세대 교회에서 인정받은 특별한 위치를 편협한 독해로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Rock(Aram. Kēphā). This is not a name, but an appellation and a play on words. There is no evidence of Peter or Kephas as a name before Christian TImes. On building on a rock, or from a rock, cf. Isa li 1 ff.; Matt vii 24 f. Peter as Rock will be the foundation of the future community (cf. I will build). Jesus, not quoting the OT, here uses Aramaic, not Hebrew, and so uses the only Aramaic word which would serve his purpose.
In this view of the backgrond of vs. 19, one must dismiss as confessional interpretation any attempt to see this rock as meaning the faith, or the Messianic confession, of Peter. To deny the pre-eminent posotion of Peter among the disciples or in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is a denial of the evidences. Cf. in this gospel x 2, xiv 28-31, xv 15. The interest in Peter's failures and vacillation does not detract from this pre-eminence; rather, it emphasizes it. Had peter been a lesser figure his behavior would been of less consequence cf. Gal ii 11 ff.).
[바위(아람어. Kēphā). 이것은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며 언어유희이다. 베드로 혹은 케파가 그리스도교 시대 전에 이름으로 쓰였다는 증거는 없다. 바위 위에, 혹은 바위로부터 건설을 하는 것에서 (cf. 이사 51,1 ff.; 마태 7,24 f.) 바위로서의 베드로는 미래 공동체의 기반이 될 것이다(cf. 내가 ... 세울 터). 예수는 구약을 인용하지 않고 여기서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하는데, 그렇게 그의 목적에 봉사하는 유일한 아람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19절을 볼 때는 어떠한 교파적 해석도 떨쳐버려야만 한다. 이 바위가 베드로의 믿음라느니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라느니 하는 시도를 떨쳐버려아만 한다. 베드로가 제자단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에서 가진 탁월한 포지션을 부정하는 것은, 증거를 부정하는 것이다.(Cf. 마르 10,2; 14,28-31; 15,15.) 베드로의 실패와 흔들림에 대한 관심은 이 탁월함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베드로가 덜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행위는 훨씬 덜 중요했을 것이다 (cf. 갈라 2,11 ff.).]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195
15.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여라.' 한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17.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19.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20.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8장 15-20절(공동번역성서)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9절의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가톨릭에서 교황이 가진 특별한 권능을 의미한다고 주장된다. 이는 18장 18절에서도 반복되는 말인데, 이 말은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한 말이므로 가톨릭에서는 18장 18절이 사제가 고해성사를 통하여 신자의 죄를 사하는 등 사제가 가진 특별한 권능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반면 정교회에서는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한 말이라는 점을 들어, 가톨릭이 주장하는 교황수위권을 부정하며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천국 열쇠를 받았다고 말한다.

개신교에서는 바로 이어 나오는 18장 19-20절이 합심 기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권세를 말하며 모든 성도들은 천국 열쇠를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혹은 18장 15-17절과 문맥이 이어지도록 이 말을 교회가 개인을 권징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6.22. 16장 26절(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26절 (공동번역성서)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영혼의 구원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뜻이다. 다만 여러 성경구절들을 조합했을 때, 성경은 하느님도 구원받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34] 기독교계에서는 복음을 전할 때 필요한 것은 사역의 규모에 대한 계산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와 같이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6.23. 16장 27-28절(이 사람들 중에 살아서 재림을 볼 자가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16장 27-28절 (개역개정판)

6.24. 17장 19-20절(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

사람들이 없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루에도 이 구절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산을 옮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이 옮겨지지 않는 것을 볼 때, 이 구절은 믿음만 있으면 아무 일이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 행하시기를 원하는 것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믿음을 가지고 구하면 그것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6.25. 18장 23-35절(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23.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8장 (공동번역성서)

이 비유는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취소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많이 해석된다. 한번 받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고 영원하다는 주장을 하는 개신교 교파들의 경우, 자신들의 교리에 맞춰 이 비유를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세대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이 비유에서 나오는 금액인 일만 달란트는 1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으로 이는 당시 기준으로 일반 노무자의 16년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그런데 이 채무자가 진 이 일만 달란트는 자그만치 16만년치 임금에 해당되는 거액으로 다시말해 사람이 절대로 갚지 못할 거액이란 뜻이다. 참고로 역대상 29장 4절에서 다윗 왕이 성전건축에 필요한 재원으로 마련한 돈이 금만 3천 달란트였다고 하니 이 채무자는 다윗 왕이 성전건축을 위해 기부한 금액보다 3배나 더 많은 돈을 빚졌다는 말이다.

반면, 이 채무자에게 빚진 다른 채무자의 금액인 일백 데나리온은 고작 일반 노무자의 3개월치 월급에 불과하다.

6.26. 19장 16-30절(예수를 찾은 젊은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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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 20장 1-16절(포도원의 일꾼들)

1"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2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3아홉 시[35]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4'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라고 말하니
5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36]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오후 다섯 시[37]쯤에 다시 나가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하고 물었다.
7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와서 일하시오.'하고 말하였다.
8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하고 일렀다.
9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11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12'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13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16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20:1-16 (공동번역 성서)

그리스어 원문의 시간 관념이 현대인이 보기에는 생소한데, 이는 해시계를 사용하던 옛 사람들이 해뜰녘인 오전 6시부터 해질녘인 오후 6시까지의 '일과 시간'을 12등분해서 제1시-제12시까지로 셈했기 때문이다. 즉, 6시 + 성경의 제n시 = 오늘날의 시간(24시간제)으로 얼추 셈하면 된다. 위의 우화에서 영어의 관용 표현인 'the eleventh hour'(= the last minute, 막판)가 유래했다.

6.28. 22장 30절(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도 시집도 안 간다)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마태오의 복음서 22장 30절(공동번역성서)

성경에 따르면 천국에는 남녀간에 사랑해서 결혼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아쉬워하는 시각도 있으나, 기독교에서 남녀간의 결혼이 하느님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모형인 것을 볼 때, 천국에서 사람들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이 땅에서 남녀가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좋을 것이므로 천국에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아쉬워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6.29. 23장 1-12절(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1그 때에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2"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3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5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
6그리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7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8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9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10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마태오의 복음서 23장(공동번역성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특정 인물을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높이는 말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그런 말을 듣기에 합당한 존재는 하느님 뿐이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사람이 자신의 친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이 본문에 나오는 랍비(스승), 아버지, 지도자라는 단어는 단순히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경배의 뉘앙스를 가진 단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내 사랑하는 자녀로 생각하고 교훈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지도해 줄 교사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교인으로 태어나게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4장 14-15절(공동번역성서)

6.30. 24장 1-36절(성전의 파괴와 마지막 때의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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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 25장 14-30절(달란트의 비유)

14"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15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16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18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
19얼마 뒤에 주인이 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님, 주인께서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2그 다음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님, 두 달란트를 저에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그래서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4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25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6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다면
27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28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25:14-30 (공동번역 성서)

6.32. 25장 40절(형제에게 베풀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25:40(공동번역 성서)

위 구절은 요한 복음서 3장 16절과 함께 복음서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다. 이는 가톨릭에서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위, 즉 자선, 봉사 등을 중시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가톨릭 교회에서 자선 주간 및 연말이 되면 더욱 강조되는 구절이다. 물론 야고보서에 보면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등 여러 구절이 더 있지만.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에서도 등장하는 구절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가톨릭에는 봉사를 기치로 내건 성직자나 수도회가 많은 편이며, 예를 들어 콜카타의 성녀 테레사 수녀원장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 성 요한 보스코 신부가 설립하고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가 소속된 살레시오 수도회 등이 있으며, 가톨릭의 대표적인 자선 수녀회인 사랑의 딸회[38]의 설립자이자 가톨릭의 대표적인 자선 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주보 성인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라고 하며 가난한 사람을 돕는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길은 꼭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처의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단체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 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아무도 이해해주지도 온정을 베풀어주지도 않는 사람을 한번 사랑으로 위로해주고 공감해주어 보자.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배척을 많이 당해온 사람은 오히려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에는 관심을 두어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무관심한 성향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기독교의 가르침상으로 어떤 지위에 있든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지저분한 환경 속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기아보다도 비참한 영적인 불우이웃이므로 모든 사람을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야 한다.

한편 개신교에서는 '믿음에 의한 구원'(이신칭의)을 더욱 중시하므로, 상대적으로 가톨릭에서 지니는 의미보다는 약한 면이 있다. 그래도 많은 정통 개신교 교단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그에 따르는 행동(즉 선행이나 봉사 등)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의 성향상 실천보다는 믿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고, 장로회 목사인 옥한흠은 이에 대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하였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라고 꼬집기도 하였다.

6.33. 26장 6-13절(향유를 부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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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 26장 52절(베드로에게 하신 꾸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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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 27장 46절(십자가에서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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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 28장 19절-20절(예수의 지상 대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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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약성서의 기념비적인 첫 번째 구절이다. 후술하듯,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어보이는 구절이지만, 이 복음서의 집필 의도가 개종한 유대인들을 위해 쓰인 것임을 생각하면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과 최고의 명군 다윗이라면 껌뻑 죽는 유대인들에게 이만큼 직빵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단, 이 구절에서 서술하는 족보는 정확히는 예수의 양아버지 나자렛의 요셉의 족보이다.[2] 에우세비오의 저서 《교회사》, 성 이레네오의 저서 《이단반박》 인용.[3] https://ko.wikipedia.org/wiki/%EB%B3%B5%EC%9D%8C%EC%84%9C%EA%B8%B0%EC%9E%90[4] 아우구스티누스는 마태오 복음서의 상징을 사자라고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회화나 작품 속에서는 성 예로니무스의 이론에 따라 사람으로 하였다. 참조: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2421[5] 1장에 아브라함-다윗을 통해 이어지는 족보를 열거하는 것 또한 "예수는 왕이다."라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함이다.[6] 사실 세는 법은 차치하더라도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역대기의 유다 지파의 족보에서 2명이 빠져 있다.[7]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족보는 요셉 가문이라 정확히는 예수의 족보는 아니고 요셉의 족보가 맞기는 하다.[8] 오히려 이것이 성서비평학자들에겐 높이 평가되는 부분이지만,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9]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0]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11] 그러나 그는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권하였다.[12]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13]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는 벌써 믿음을 버린 사람이고 비신자보다도 못한 사람입니다. (디모테오 전서 5장 8절)[14] 원어를 따르면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가톨릭에서는 이것이 여러 사람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이 주어졌다는 뜻이라며, 이를 사제가 고해성사를 통하여 신자들의 죄를 사하는 것의 근거로 삼는다. 반면, 개신교 측에서는 단순히 율법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죄 사함의 권능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6] 고대 이스라엘 같이 율법과 엄중한 심판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정국가에 기독교적 천국과 지옥 개념까지 들어가면, 오늘날의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들처럼 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복음서에 나오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율법주의적 종교생활을 하던 바리새인들이 딱 이 케이스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런지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해 명시적으로 나오는 다니엘서는 12장 4,9절에서 다니엘서가 안티오코스 4세의 때까지 봉해졌었다고 나온다. 구약의 예언서에는 사람들의 해이해진 신앙을 책망하는 내용이 많은데, 율법을 통해서는 이런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보다 철저히 법망을 피해서 죄를 짓는 바리새인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훨씬 어려울 것이다. 바리새인들 같은 율법주의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율법에 의한 구원의 수명이 다할 때 쯤에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셈이다.[17]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3장 1-2절)[18]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9] 성경에 정통하고 악인의 부활을 믿었던 바리새인들이니까 엄하게 꾸짖은 것이지, 기독교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지옥 갈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20] 성경에 능통하고, 율법을 통달했으며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이에 반하는 생활양식과 풍습, 그리고 태도를 보고 '외식하는 자들', 즉 위선자들이라고 불렀다. 사실 이는 더 점잖은 표현으로 요한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라고 하자 예수는 그들이 아브라함과는 전혀 다르게 행한다며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란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치 않았다.[21] 원문에서도 이 부분에 "오"라는 감탄 표현이 있으나 어째서인지 개역성경들의 번역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 앞 부분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대조되는 강한 믿음에 대한 기쁨이 표현된 중요한 부분이다.[22] 정교회의 성인들이기도 하다.[23] 초기 저술에서는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후 의견을 바꿨다.[24] 참고로 반석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는데, 그 중에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도 있다.[25] 이런 해석을 따를 경우 이 해석은 외적인 형식과 관계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개신교 교리와 부합하는 면이 있다.[26]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시편 18장 31절)[27]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28]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9]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30]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31] 다만 이런 케이스에서는 방어 논리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그 자체로 그 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000년 전에 살던 A라는 사람이 "나는 오늘 바쁘지만 여건이 되면 B의 집에 들릴 것이다."라는 기록만 남기고 여건이 안 되어서 B의 집에 들리지 않았다고 해보자. 후대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논리적 허점이 없는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A가 B의 집에 들렸다고 주장할 수 있고 그 주장이 틀렸다는 명확한 근거를 댈 수 있는 사람도 없으나, 현실은 A는 B의 집에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방어 논리의 존재 여부가 그 주장 자체가 참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32] 온 건물(성도 개인)은 이 모퉁잇돌(그리스도)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교회)이 됩니다.[33]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34] 그에게는 뭇 나라가, 고작해야,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과 같을 뿐이다. 섬들도 먼지를 들어 올리듯 가볍게 들어 올리신다. (이사야 40장 15절)
야훼께 충실한 자의 죽음은 그분께 귀중하다. (시편 116편 15절)
[35] 원문에는 '제3시(τρίτην ὥραν)'라고 되어 있다.[36] 원문에는 '제6시와 제9시(ἕκτην καὶ ἐνάτην ὥραν)'라고 되어 있다.[37] 원문에는 '제11시(τὴν ἑνδεκάτην, the eleventh hour)'라고 되어 있다.[38] 파리의 성모 발현을 목격한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가 생전에 소속되어 있었던 수도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