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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르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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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1756년 5월 20일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미노르카 섬을 둘러싸고 맞붙은 해전. 7년 전쟁의 첫 번째 전투이다.

2. 배경

미노르카 섬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08년 영국 해군이 스페인으로부터 탈취한 곳이다. 이후 스페인은 위트레흐트 평화 조약에서 미노르카 섬을 지브롤터와 함께 영국에게 넘기기로 합의했다. 미노르카 섬에 마련된 마온(Mahón) 항구는 대서양에서 활동하는 영국 해군의 주요 기지로서 기능을 발휘했으며, 영국의 최대 경쟁자인 프랑스 해군이 대서양으로 진출하는 걸 차단하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미노르카 섬을 북미 식민지 경영 및 대서양에서의 자국의 패권 확보를 훼방놓는 골칫거리로 여겼다.

1750년대 무렵, 프랑스와 영국의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그들은 인도에서 몇차례 분쟁을 벌였고 북미에서도 오하이오 강 계곡을 따라 일련의 국경 분쟁을 벌였으며, 두 나라의 정착민들은 애팔래치아 산맥과 미시시피 강 사이의 광대한 영역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1754년 5월 28일 네세시티 요새에서 프랑스-인디언 동맹군과 영국 식민지인들간의 무력 충돌[1]이 벌어진 후 양국은 더 많은 병력을 북미 대륙으로 파견했고 서로간의 적개심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그러던 1755년 10월, 영국 전쟁부는 프랑스 대서양 함대가 미노르카 섬으로 원정갈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가장 중요한 해군기지 중 하나인 미노르카 섬의 방비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던 1756년 3월 8일, 프랑스 대서양 함대가 출항했다는 급보를 전달받은 영국 전쟁부는 급히 존 빙 제독에게 미노르카 섬을 노리는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존 빙 제독에게 주어진 배는 지브롤터에 있는 전열함 10척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수리가 필요했다. 사실 비스케 해협과 만에는 27척이 있어서 이들을 동원할 수도 있었으나, 존 빙은 이 선박을 이용하는 건 물론이고 이 선박들에서 일하는 선원들을 데려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상태가 안 좋은 10척의 전열함을 이끌고 적을 막으러 출항했다.

한편 4월 10일 가릴소니에르 후작 휘하의 전열함 12척과 5척의 프리깃함이 툴롱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4월 18일 미노르카 섬의 북서쪽 끝에 있는 시우타델라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상륙했고 4월 20일에 프랑스 함대 전체가 상륙을 완료했다. 4월 22일, 프랑스군은 마혼 항구에 대한 포위 공격을 개시해 6월 28일까지 지속했다. 한편 5월 2일 지브롤터에서 함대를 규합한 존 빙 제독은 적이 이미 미노르카 섬에 상륙한 뒤 섬의 거의 모든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빙은 지브롤터 총독에게 육군 1개 대대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러면 지브롤터 방어가 허술해진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결국 5월 8일 존 빙 제독의 함대는 지브롤터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동풍을 타고 미노르카 섬으로 항해했다. 이후 그는 5월 17일에 미노르카 섬 근방의 소르카 섬 앞바다에서 추가로 전열함 3척과 합세한 뒤 미노르카 섬으로 접근했다. 이리하여 미노르카 섬을 둘러싼 양국 해군의 전투가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총사령관: 존 빙 제독
  • 전열함 13척

    • - HMS 디파이언스: 대포 60문. 토머스 앤드루스 대위 지휘.
      - HMS 포틀랜드: 대포 50문. 패트릭 베어드 대위 지휘.
      - HMS 랭커스터: 대포 66문. 조지 에드쿰베 선장 지휘.
      - HMS 버킹엄: 대포 70문. 미첼 에버리드 대위 지휘.
      - HMS 캡틴: 대포 64문. 찰스 캣포드 대위 지휘.
      - HMS 인트레피드: 대포 64문. 제임스 영 선장 지휘.
      - HMS 리벤지: 대포 64문. 프레드릭 콘월 대위 지휘.
      - HMS 프린세스 루이사: 대포 60문. 토머스 노엘 선장 지휘.
      - HMS 트라이던트: 대포 64문. 필립 두렐 대위 지휘.
      - HMS 라밀리즈: 대포 90문. 아서 가디너 대위 지휘. 존 빙 제독은 이 배에 탑승했다.
      - HMS 컬로덴: 대포 74문. 헨리 워드 대위 지휘.
      - HMS 킹스턴: 대포 60문. 윌리엄 페리 선장 지휘.
      - HMS 뎁트포드: 대포 60문. 존 암허스트 대위 지휘.
  • 프리깃 함 5척

    • - HMS 체스터필드: 대포 44문. 존 로이드 대위 지휘.
      - HMS 피닉스: 대포 24문. 어거스트 존 허비 선장 지휘.
      - HMS 포츈: 대포 14문. 하비스 메이플스든 중령 지휘.
      - HMS 익스페리먼트: 대포 24문. 제임스 길크리스트 선장 지휘.
      - HMS 돌핀: 대포 24문. 벤자민 말로우 중령 지휘.

3.2. 프랑스군

  • 총사령관: 가릴소니에르 후작
  • 전열함: 12척

    • - 오르페: 대포 64문. 트로녜 들레기유 지휘.
      - 이포포탐: 대포 50문. M. 드보몽 지휘.
      - 르두타블: 대포 74문. M. 드글랑데베 지휘
      - 사쥬: 대포 64문. M. 드메르시에 지휘.
      - 게리에: 대포 74문. M. 드그라몽 지휘.
      - 피에: 대포 60문. 데르비유 지휘.
      - 푸드르와양: 대포 80문. 가릴소니에르 후작 지휘.
      - 테메레르: 대포 74문. M. 드사브랑 지휘.
      - 콩탕: 대포 64문. 셰발리에 드레몽디 지휘.
      - 리옹: 대포 64문. 비야 들라브로스 지휘.
      - 쿠론: 대포 74문. 마르키 드생테냥 지휘.
      - 트리통: 대포 64문. M. 드로슈모르 지휘.
  • 프리깃함: 5척

    • - 쥐농: 대포 42문. M. 드르베 지휘.
      - 로즈: 대포 30문.
      - 그라시외즈: 대포 24문.
      - 토파즈: 대포 24문.
      - 냉프: 대포 20문.

4. 전투 경과

5월 20일 아침, 마온 항구를 포위하고 있던 프랑스 함대는 적 함대가 근방에 접근중이라는 첩보를 척후선으로부터 전달받자 즉시 전 함대를 이끌고 적 함대로 다가갔다. 양측은 정오 무렵에 마주쳤고 서로를 마주보며 전투 대형을 갖췄다. 이윽고 오후 2시, 존 빙 제독이 전 함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당시 함대는 평행한 대열을 이루지 않고 30도에서 40도의 각도를 형성했다. 그는 적 함대의 전열에 평행한 루트를 따라 프랑스 함대의 끄트머리에 접근했다. 이윽고 존 빙 제독은 뎁트포드 함을 비롯한 일부 함선들에게 뒤로 물러나면서 적을 유인하게 한 뒤 다른 방면의 전열함들에게 적에게 접근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엔 신호체계가 열악했기 때문에 존 빙 제독의 복잡한 기동 작전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어떤 배들은 무작정 적에게 달려들었다가 대열을 이탈해버렸고, 어떤 함선은 지나치게 뒤로 물러났다. 게다가 출발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존 빙 제독의 전열함들은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물이 새어나오는 등 온갖 문제를 일으켜 선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함대는 적이 이렇듯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아군 쪽으로 튀어나온 적 함선들에게 맹포격을 퍼부었다. 그러는 동안 빙의 기함을 포함한 함대의 후위는 효과적으로 적을 포격할 만 한 거리에 접근하는 데 실패했다.

상황이 갈수록 꼬이자, 존 빙은 회의를 소집해 부하들에게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아직 한 척의 배도 가라앉지 않았지만 선봉 함대의 피해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데다 적에게 더 많은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희박하고, 그렇다고 항구의 봉쇄를 풀 수도 없으니 더이상 싸우는 건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부하들은 그의 주장에 동의했고, 존 빙은 오후 6시에 전 함대를 동쪽으로 철수시켰다. 이에 가릴소니에르 후작은 항구 봉쇄를 이어가기 위해 적 함선 추격을 금지했다. 이리하여 영국과 프랑스간의 첫번째 해전이 종결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43명이 전사하고 168명이 부상당했다. 프랑스군의 전사자는 38명, 부상자는 115명이었다. 프랑스군은 장교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던 반면 영국군의 경우 디파이언스함의 토머스 앤드루스 대위가 전사하고 프린세스 루이사함의 토머스 노엘 함장이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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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민들은 미노르카 수비병들을 구원하는 데 실패한 존 빙 제독을 비난했고, 해군 본부는 애당초 존 빙 제독에게 제대로 된 함선 지원을 해주지 않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가 주어진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군율 위반의 책임을 물었다. 결국 존 빙은 군법 회의에 소환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1757년 5월 14일 전열함 모나크에서 총살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시신은 사우스힐에 매장되었다.
[1] 이 전투에서 그 유명한 조지 워싱턴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