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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있으나 고고학적 실체는 불분명한 6가야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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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碧珍國경상북도 성주군에 있었던 소국. 원래 명칭인 벽진국보다 성산가야(星山伽倻)로 더 알려져 있다.
성주 지역은 대가천 연안과 백천 양안에 충적(沖積)지가 발달하였으며 이로 인해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춰 주변에 여러 부족사회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원래 가야국이 그렇듯 성산가야도 주변의 여러 부족사회를 통합하여 시작된 것이다.
다른 가야계 국가들도 왕사 기록이 부족한 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성산가야의 왕사는 기록이 희박해 거의 알 수 없는데 족보의 기록상 초대 왕은 수로왕의 넷째 동생인 벽로왕(碧露王)이라고 전해진다.
'성산', '성주'라는 지명도 '벽진'에서 유래된 것이다. 벽진은 고대 신라어로 '볏(별)들'을 음차한 표기인데, '볏(별)'을 훈차로 '별 성'자로 바꾼 것.
2. 국명
가야 연맹의 6개국 중 성산가야로 알려져 있지만 XX 가야란 이름은 먼 훗날 고려 시대에 대충 그 동네에 있었던 소국들에 일괄적으로 붙인 이름으로, 정작 이 나라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성산가야라는 이름을 전혀 쓰지 않았다. 성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나라가 없어진 지 한참 뒤인 통일신라 경덕왕 때 새로 붙인 이름이다.성주는 원래 벽진국(碧珍國)이라 칭(称) 하였는데 이는 언전(諺傳,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진 말)이다. 신라(新羅) 때는 성산군(星山郡)이라 칭하고 (본래 일리군(一利郡),또는 이산군(里山郡)), 경덕왕(景德王) 때 가리현(加利縣)이라 고치고..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상주도(尙州道) 성주목관(星州牧官)
(고려사에서는 경덕왕이 일리군을 성산군이라 고쳤고, 고려초에 가리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상주도(尙州道) 성주목관(星州牧官)
3. 상세
성주읍에 위치한 성산동 고분군이 이 나라 지배층의 능원으로 추정된다. 봉분의 크기나 무덤의 수가 상당해서 전성기에는 강한 국력이 밑바탕 되는 중견 국가였을 듯하다.
이 밖에도 성주군에는 금수면 명천동, 대가면 옥화동과 도남동, 월항면 인촌동, 용각동 등에 크고 작은 고분이 흩어져있다. 성산동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 발굴 이후로 1986년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와 트럭을 여러 차례나 불러 부장품을 옮겼다고 한다. 현재도 제48호분이 재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성주군 가천면에 위치한 영남 지방 최대 산성인 독용산성이 성산가야(벽진국)의 산성으로 추정되며, 1963년에 사적 제91호로 지정되었다가 군부대 주둔으로 1966년에 지정 해제된 성산성도 명확한 시대는 불분명하지만 위치를 감안했을 때 벽진국의 성곽으로 추정된다.[1]
삼국유사에는 6개 가야 구성국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외에 문헌 기록은 거의 없다. 아무튼 기존에는 삼국유사를 따라 성주군 지역이 가야 계통의 성산가야가 자리잡은 지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몇 차례 조사가 됐고 남익희, 김세기, 이영호 등 현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벽진국이 가야 구성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후대의 변형된 인식이란 설이 우세하다. 일단 성주에서 나오는 유물을 보면 5세기 이전에 이미 신라화가 완료되어 가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산동 고분군의 고총에선 신라식 은제 관모와 요패 장신구가 출토되었고, 토기도 대가야 양식 가야토기보다는 신라토기들이 주로 출토된다. 묘하게도, 오늘날 고령군과 성주군 경계선쯤을 기준으로 마치 물과 기름처럼 위 성주 용암면은 신라식, 아래 고령 다산면에서는 대가야식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2]
때문에 오히려 초기부터 진한-신라계 소국이 아니었냐는 견해가 있다. 벽진국이 있는 성주는 거리상으로는 대가야의 고령군과 가깝지만 성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발굴품은 정작 고령보다는 낙동강 건너 대구의 비산동, 내당동 고분과 유사성이 강하다. 그리고 5세기의 대구 지역은 명백히 신라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던 지역이다. 그리고 대가야의 고령군에서도 북쪽 성주 방향으로 산성을 쌓아서 방어선을 형성한 정황도 엿볼 수 있다. 고령군의 대가야와 성주군의 벽진국은 대립 관계였다는 것이다.[3]
또는 초기에는 가야 연맹에 속했지만, 나중에 신라에 편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3, 4세기까지는 대가야와 비슷하지만 5세기 이후로는 신라와 심하게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삼국유사에는 성주군이 가야의 일원으로 기록되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는 진한, 변한 시기에 낙동강 유역 같은 경계 지역은 어느 한 쪽에 고정적으로 소속돼 있다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어느 쪽으로 기울지가 바뀌는 유동적인 상태였고[4] 성주가 일시적으로 가야에 속한 때가 있었고 그 시기의 인식이 문헌에 남아 먼 훗날 가락국기를 거쳐 삼국유사에 남았다는 식으로 보고 있다. 일단 4세기까지는 뚜렷하게 칼로 자르듯 나누긴 힘들지만 문헌을 고려하면 성산가야가 있었다던 벽진국 일대는 4세기까지는 변한 내지는 가야의 일원이었다고 보고 5세기부터는 신라의 영역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신라계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가야의 구성국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게 사료 측의 기록이 일부 존재할 뿐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성산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분은 아직 일부에 불과하고 성산성도 군부대 주둔으로 인해 연구가 거의 되지 못한 상황이다. 신라계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으니 가야 구성국 중 이른 시기에 신라에 병합되었거나 세력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높지만 가야의 구성국이 전혀 아니었는지는 불분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