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22:35:27

삼국시대(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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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 三國時代
220년 ~ 280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am_Gwok_262_CE.png
삼국정립도
<colbgcolor=#980000> 국가 조위 촉한 손오
초대 황제 조비 유비 손권
성립 220년 221년 229년
멸망 265년 263년 280년
수도 업성
허도
낙양
성도 무창[1]
건업[2]
멸망 이후 서진

1. 개요2. 시기에 대한 견해3. 주요 사건4. 왕조5. 특성
5.1. 정치·사회5.2. 경제5.3. 문화5.4. 언어5.5. 군사
6. 삼국시대와 역사학
6.1. 삼국시대와 《삼국지연의6.2. 삼국시대가 인기 있는 이유6.3. 로마 제국과 비교할 때6.4. 한국사와 비교할 때6.5. 주요 인물
7. 대중매체에서8. 여담9.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중국 후한에서 서진 사이에 있었던 시대를 말한다. 중국의 통일 왕조인 후한이 멸망하면서 군벌들의 세력 싸움 끝에 조위(曹魏), 촉한(蜀漢), 손오(孫吳)라는 세 나라로 갈라졌으나[3], 결국 위나라를 계승한 서진이 천하를 통일시켜 삼국시대는 종식되었다. 중국사 중에서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덕분에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대다.

삼국 중 220년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된 위나라가 실질적으로 한나라를 계승했다는 점과 이후 265년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된 서진이 삼국을 통일한 점으로 인해 한위교체기(漢魏交替期) 또는 한말위초(漢末魏初)라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의 영향 때문에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중국 역사이며, 그 이름값만큼 삼국시대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반을 놓은 시대이기 때문에 중국사 내에서도 역사적 중요성이 높은 편이다.

2. 시기에 대한 견해

중국 중세의 시작인 위진남북조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삼국시대를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해서는 주로 학계에선 다음과 같은 두 견해들이 있다.
  • 1. 조위의 건국(220) ~ 서진의 삼국통일(280)
    역사학적 개념에 충실한 정통적인 정의이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서 400년간 중국을 통치한 통일제국 한(漢)나라를 220년에 공식적으로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면서 자신들이 한나라의 지위를 대체함을 선언하였으나 촉한과 오라는 두 거대 지방정권은 위의 명분을 인정하지 않고 결국 자신들도 나라를 건국하고 칭제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 기간동안의 중국은 통일왕조가 존재하지 않는 분열기였다. 그러니까 새로운 통일제국 진나라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3개 독립정권이 병존했던 분열기가 바로 이전의 한나라 시대 및 이후의 진나라 시대와 구별되는 '독립된 시대로서의 삼국시대'라는 것이다.

    다만 이 정의는 '중국의 삼국시대'라고 말하면 대중이 흔히 연상하는 '삼국지 이야기에 나오는 시대'와는 괴리가 크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사랑받는 삼국지의 영웅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후한 말기에 속하므로, 역사학적 개념으로 정의한 '삼국시대'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중이 큰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2. 황건적의 난(184) ~ 서진의 삼국통일(280)
    대중적인 인식에 기반한 정의이다.삼국지연의》가 다루는 시기이며,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 다루는 인물들의 활동 시기 역시 이 시기와 거의 겹친다. 왜 184~220년 사이의 시기를 후한시대 말기에서 떼어내 삼국시대에 집어넣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삼국지(三國志)라는 역사책과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이 시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설명이 없다. 어떻게든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겠다면 '한나라가 직접적인 멸망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첫걸음으로서 황건적의 난을 선택한다는 것은 충분히 좋은 선택이 될 수 있겠지만, '한나라 쇠망사'는 당연히 '한나라 시대'의 일부이지 한나라 시대가 끝난 이후인 '삼국시대'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삼국시대'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가 바로 소설 '삼국지연의'의 커다란 인기이기에 삼국시대라고 하면 곧 삼국지 이야기의 시대, 즉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영웅들이 활약하는 시대를 연상하는 것이 대중적인 인식이 된 것이다.

실제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가장 유명한 1세대 인물들인 조조, 유비, 관우, 장비, 여포 등은 삼국이 건국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거나 생존했어도 건국 극초반기에 대부분 사망했다. 참고로 손권, 제갈량 등은 2세대 인물이다.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위, 촉, 오라는 국가의 주인공들은 그 뒷세대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역사학적으로 보자면, 황건적의 난 이후 군벌들이 난립하던 시절(군웅할거)부터 후한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내전의 시기'이다. 각지에 난립하던 군벌들은 격렬한 배틀로얄을 펼쳐 결국 조조, 유비, 손권의 마지막 세 생존자로 정리되지만, 그 시점까지도 이 셋은 모두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후한 황제의 신하로 남아있는 처지였기에 이는 독립국간의 전쟁이 아니라 헌제의 신하이자 한나라의 제후인 이들이 벌인 내전이었던 것이다.

물론 190년 동탁의 집권과 195년 삼보의 난(이각·곽사의 난)을 거치면서 후한 조정은 사실상 통치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따라서 각지의 군벌들은 사실상 조정과 황실의 눈치조차 볼 필요 없는 독립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므로 이들간의 전쟁을 '내전'취급하는 것은 상당히 명분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러나 단지 '명분'이라 해도 당시 기준으로 한나라 황실과 조정의 명분은 여전히 당대의 사회와 정세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고, 현대의 역사 연구자들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공식적인 역사적 시대 구별 기준'을 정의하는데 '공식적인 명분'을 배제하고 생각할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한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여지가 아주 많다. 하지만 '한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것은 언제인가?' 에 대해서는 사실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역사적인 삼국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대개는 그 시대의 원인인 후한말의 상황을 함께 고려하여 연구하는 것은 물론 당연하지만, 역사적 시대 구분으로써의 삼국시대는 후한의 공식적 멸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기준을 세워야 정확, 명확하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위에서 제기된 대중적 관점을 설명하자면,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삼국지(및 그 파생 매체들)의 이야기는 후한 말엽의 혼란상에서 일어난 여러 영웅들이 삼국시대를 열어가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역사학적 개념인 1번의 시기를 다루고, 확장된 개념인 2번의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지 문서에서 다룬다.

3. 주요 사건

주요 사건을 일일이 기재하면 끝도 없기에 천하 판세에 영향을 준 굵직한 사건만 추려 기재하면 다음과 같다. 자세한 항목은 삼국지/연표 참고,

4. 왕조

파일:d8a6fd9ea9717ab8ec3ae74d67d58398.jpeg.jpg

삼국시대의 삼국은 다음의 세 왕조를 가리킨다.
  • (魏)(220~265): 중원을 장악. 통칭 조위(曹魏).
  • 촉한(蜀漢)(221~263): 파촉(사천) 일대에 할거. 정식 국호는 한(漢). 통칭 촉(蜀).
  • (吳)(229~280): 강남(강동) 일대에 할거. 통칭 손오(孫吳), 혹은 동오(東吳).

유비가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는 흔히 부르는 ''이 아니라 ''이다. 유비가 한나라의 후계자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당장 조선시대의 <적벽가>만 해도 첫머리가 "한나라 말엽 위•한•오 삼국 시절"로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의 중국사 연구나 대중매체에서는 '촉한'(蜀漢)이라고 언급한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은 보통 하나의 한나라 역사로 다루는 편이 많으나 촉한의 경우엔 삼국시대 자체가 혼란의 분열시대였으며, 그 정통성에 있어도 논란이 있기에 사학적으로 따로 분류하여 연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 삼국시대 역사의 정사인 《정사 삼국지》와 삼국시대를 가장 널리 알린 소설 《삼국지연의》의 판본 및 번역물들 역시, '촉'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 스스로 사용한 이름도 아닌 '촉'이라고 하면 한나라를 이은 정통왕조가 아닌 촉 지방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촉한"이 맞는 명칭이다. 게다가 "촉"이라고만 하면 다른 촉나라들과 헷갈릴 여지도 있다. 이건 다른 2개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해당문서 및 역사에서는 '한'이라고 하면 통일제국인 한 왕조와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촉한"이란 명칭으로 표현한다.
  • 촉한? 촉? 계한?
    '촉한정통론자들이 촉이 아닌 촉한을 선호한다'고 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촉한은 촉한정통론에 기반한 명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촉한정통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올바른 명칭의 문제로 역사학적으로 보면 촉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4] 이는 당연한 것으로 촉한의 국호가 촉이 아니고 단순히 파촉 지방에 위치한 나라였을 뿐인데 이걸 촉나라라고 부르는 것은 중세의 고려를 '대방'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 각주에서 언급된 소설에서의 구분 문제나 당대 역사가의 서술이 아니라 후대에서 역사학적으로 촉한을 촉으로 부른다면, 촉한이란 나라가 파촉 지방에 위치한 지방 할거정권 겸 괴뢰정부에 불과하다는 조위종통론을 따르는 비하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촉한은 국가의 구성 요건을 갖춘 엄연한 국가였는데 굳이 공식 국호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이는 '촉한정통론'과 상관없다. 촉한이 한나라를 이은 정통 왕조가 아니라고 보는 측에서는 촉한에 대해 '유비가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상관없는 한나라'라고 하면 그만이다. 어느 나라가 정통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국호는 그냥 그 나라 이름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부분이 한나라로 부른다고 해서 유비의 주장("우리나라는 한나라의 후예다")을 긍정하는 건 아니란 점이다. 물론 유비가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며 나라 이름을 한나라로 세운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의도로 이름을 지었건 일단 붙은 이상 그게 이름이 된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 인조의 경우 아들인 효종이 효심 때문에 성군에게나 어울리는 인(仁)조란 좋은 묘호를 올렸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 시호를 맥락대로 받아들여 그를 '덕을 지켜 업을 높인 임금'이라는 의미로 부르는게 아니라 그저 묘호가 인조니까 인조라고 부르는 것처럼. 인조는 그 부정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분명히 조선의 왕이었고, 인조란 이름 역시 공식 묘호였으므로 그 의미가 어울리건 말건 인조는 인조다. 인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능양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인조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능양군은 폄훼하는 의미의 명칭이지 '더 적합한 명칭'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촉한 역시 어떻게 평가하냐와 상관없이 분명한 진짜 국가였으며, '한나라' 역시 공식 명칭이다. 그 의미가 어떻든 간에 한나라는 한나라이며, 단순히 구분을 위해 촉을 붙여 촉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촉한정통론에 기반한 명칭은 촉한이 아닌 계한(季漢)이다. 계한이라는 명칭 자체가 전한과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나라라는 의미로, 한 황실을 계승하는 나라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5] 반면 촉한은 촉한정통론과 상관없이 단순히 이 시대에 존재했던 한나라를 국호 그대로 부르면서 역사학적으로 (다른 한나라들과 헷갈리므로) 쉬운 구분을 위해 지방 이름을 붙혀 촉한이라고 부르는 중립적인 이름이다.[6][7]

5. 특성

이 시대가 이토록 혼란스러워진 것은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내/외부적인 모순들이 수백년간 (상당수는 한무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한 결과였다.

- 호족 소유 토지의 증가에 따른 자작농 계급의 붕괴와 빈부 격차의 확대
- 일부 명문 호족들의 관직 나눠먹기로 인한 국가 기능의 저하
- 왕망 이후 가속화된 유교의 형식화 및 윤리 수준의 저하
- 소빙하기 도래로 인한 토지 생산력의 감소
- 국가 역량을 넘어선 영토 확대로 인한 국방비 지출의 증가 및 국경 병력의 이민족화/사병
- 유능한 군주의 부재 및 환관 세력의 득세

이릉대전과 같은 대참사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국력이 열세였던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해 강대국 조위를 견제하는 1강 2약의 구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위나라는 후한말 득세한 군벌의 대부분을 제거하고 중원을 장악한 나라였다. 이 당시 중원이란 중국 문명이 탄생한 황하 유역을 일컫는 표현이었으며,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실질적인 면적으로는 약 1/3 수준에 불과했으나 당시 중국 인구와 총 생산력에서 약 7~8할을 차지했다.

반면에 손오의 경우에는 이러한 난세를 피해 변방으로 이주한 세력들이 당시만 해도 아직 개발이 덜 된 남중국 지방의 토착 세력들과 타협하면서 세운 나라였다. 이 때문에 영토 면적은 중원에 크게 뒤지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주요 거점 부근을 제외하고는 개발이 되지 않아 사람이 살기 어려웠고, 영토의 상당 부분이 이민족들의 영향 아래 있었던 까닭에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애초에 오나라에서도 남반부 지역은 한무제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동월, 민월, 남월 같은 이민족 국가들이 지배했고,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이 아니었다. 남월은 국왕이 한족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위만조선과 비슷하게 중국계 유이민과 현지 세력간의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되었고, 민월과 동월은 한나라의 책봉을 받기는 했지만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원과 크게 달랐다.

촉한의 경우, 사천 자체는 통일제국인 진나라 시절부터 집중적으로 관리되며 개발된 땅이었고, 토착 호족들도 유비 이전 통치하던 유언이 대부분 밟아놓았던 상태라 비교적 중앙 집권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운남 지역은 남만과 같은 이민족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사천의 힘만으로 중원의 조위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런데도 삼국 간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1) 중원이 전란에 빠지면서 인구와 생산력이 일시적으로 크게 저하되었고,
(2) 촉한, 손오 두 나라의 주도하에 변방의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3) 이 두 나라가 기본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4) 조위가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두 나라를 동시에 제압하기에는 전선이 넓을뿐더러, 흉노, 선비족, 강족저족, 고구려 등 여타 이민족 세력도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5) 위나라 자체도 건국 과정에서의 한계로 인해 지방 호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사람도 많이 죽고, 유랑민도 대폭 증가했다. 《삼국지연의》만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떼로 죽어나간 막장 시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도 거의 5,000만명에 육박하던 후한 시절의 인구가 고작 수십 년 만에 767만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만큼 죽었다기보다는 호적 유실 등의 원인이 크고, 실제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만한 인구 손실은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으로 서기 2세기의 중국 인구는 본토만 5~6,000만 명을 육박했고, 3세기 삼국시대에도 4~5,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별거 아니었네'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호적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것은 국가 행정 체계가 대책없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인구가 더이상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게다가 위에 언급되었듯 추정 인구로만 봐도 중국 전역의 인구가 17~20%나 줄었다는 얘기가 되므로 전쟁과 학살, 기근과 도적떼의 난립으로 어마어마하게 죽어나간 것은 분명하다.[8]

이는 기록으로 보면 알 수 있는데 삼국지를 보면 도적에 불과한 엄백호가 1만여 명의 무리를 데리고 있다는 언급이 있고, 감녕이 수적 시절 땅에서 출입할 때 수레와 기마병, 배들이 길게 늘어서 정렬했으며 온갖 금은보화로 떡칠하고 다녔다는 점에서 매우 부유하고 부하도 많은 준군벌 수준의 위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공식 관리가 아니었으니(감녕은 관직을 때려쳤다) 이들의 부하들이 세금을 내고 군역을 질리가 만무하다. 위에서 언급된 엄백호의 부하 1만여명이란 건 1만명의 병사들이란 뜻으로, 여기에 딸린 처자식이나 잡일꾼들을 합치면 최소 수만명이 엄백호의 통제 하에 있어 국가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얘기다. 물론 엄백호나 감녕은 훗날 손오측 세력에 흡수되지만, 저런 '도적'들이 저들만 있었던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공식 인구의 몇배나 되는 인구가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것도 이상한게 아니다.

실제로 도적과 거리가 먼 조운 역시 공손찬에게 임관하기 전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중앙정부가 무너진 시대 태어난 이들은(조운은 활동시기나 추정되는 나이로 보면 황건적의 난을 10대 중반 쯤에 겪었을 것이 유력하다) 정부의 보호를 포기하고 동네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실력자들 위주로 각자도생하는 것이 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구 4,432,000명
인구 940,000명
인구 2,300,000명

일단 등록된 인구는 이렇지만 이걸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이 혼란기였기에 유랑민이나 지방 호족에게 위탁한 소작농 인구가 엄청나게 많았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조세를 확실하게 거두고 개인 경제력 유지가 가능한 인구, 그중에서도 노동력이 되는 성인 남자와 돈으로 납세가 가능한 호구 위주로만 등록을 했기 때문에 저런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을 통일하자마자 767만명이 갑자기 1,600만명으로 불어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숫자도 실제 인구보다는 크게 적었을 것이다. 서진이 통일한 이후 오나 촉한에 대응하는 병력을 자국 국방과 치안에 쓸 수 있으니 다른 군소세력들을 흡수하긴 했지만, 위에 언급된 대로 이미 각자도생하던 수많은 인구를 당시 행정력과 군사력으로 일시에 중앙정부에 편입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9]

고대에는 폭정, 기아, 전염병, 전쟁이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나 높은 출산률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간 인구가 큰 증가없이 정체가 지속되곤 했다. 다른 시대에도 널린 것을 삼국시대에만 갑자기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게 그 이전의 난세였던 진나라의 6국 통일전쟁부터 초한전쟁, 한 고제까지의 시기, 신나라의 실정과 후한 교체기에 벌어진 군웅할거 시기에도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는 상투적으로 등장하며 그만큼 시대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강조한 기록일 뿐이다.

국가 자체는 그나마 온전한 듯이 보여도 폭정이나 심지어 자연 조건에 따라서도 인구 변동은 있어왔다. 뭐 진정한 중국사의 헬게이트인 송•원 교체기에 비하면 그저 그렇지만. 1200년대의 중국 인구가 1억 1,500만 명에서 1300~1400년대 7,500만~8,500만 명으로 급락하고, 155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따라잡는다. 이 시대에는 인구가 감소할 조건은 모두 갖추어 중국의 경쟁력을 폭락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금나라 5,000만명, 송나라 6,000만명의 1억 1,000만명인 중국 인구가, 몽골 제국의 침입을 거치고 원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강북, 강남까지 다 합쳐도 7~8,000만명이 되어버렸다.

물론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전쟁, 기아,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실제 인구는 최소 배 이상은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후한말 6,000만명에 육박했던 인구가 불과 수십 년 만에 등록상이라고는 해도 767만명으로 급감한 것이다. 《삼국지연의》 덕분에 후한 말 군웅할거 시기에 대하여 낭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나라의 6국 통일 전쟁부터 초한전쟁까지의 시기와 신나라부터 후한으로 이어지는 군웅 할거의 붕괴 후 혼란기 여러 시기가 그랬던 것처럼 엄청나게 살기 어려웠던 시대였으며, 군웅이든 무장이든 모사든 호족이든 백성이든 모두 살아남기 바빴던 시대였다.

단, 난세가 언제나 그렇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업적도 많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후한 시대라면 절대 출세하지 못했을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일단 삼국의 창업주들만 보더라도 난세가 아니었다면 실제 역사에서처럼 명성을 남기기 어려운, 뭔가 하나씩 출신상에 하자가 있었고 평시였다면 본인들이 거느렸던 명문가 출신 귀족들에게 커리어와 인생 행보 등에서 뒤쳐졌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10]

더불어 후한 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 개혁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이 시대의 둔전제는 후대 왕조들에게 여러모로 좋은 참고 사례가 되어 남았다. 유학 일색이었던 중국 사상에 법가 및 도가에 대한 재고찰이 이루어진 것도 중세 중국 문화가 풍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5.1. 정치·사회

한말 삼국의 전란기를 거치며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지방 자작농이 전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이로서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비대해진 관료제와 유교의 사상 독재하에서 세력을 키워온 호족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당시 호족들은 중국의 유일한 지식인 계층으로 극히 일부의 예외가 있긴 했지만 중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여론을 좌우했으며, 중국의 대부분을 사유하고 있는 지주였다. 그들은 오랜 세월 사실상 주거니 받거니 하며 관직을 대대로 독점하였다. 개중에는 이런 호족을 무시하고 뭔가를 해보려는 군벌들도 있었지만[11]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기반으로 한 현대의 각종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숱한 무장이나 참모들은 작품 속에서 조조, 유비, 손씨 집안이나 기타 군벌들의 가신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지역 호족이었다.

삼국의 군주 중 가장 호족들에게 엄격했던 조조조차 기본적으로는 연주 지역의 호족들과의 연대를 기반으로 세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예를 들면 조조의 1급 참모로 알려진 순욱이나 순유를 배출한 순씨 가문 자체가 영천의 호족 가문이었으며, 뒷날 위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고 서진 건국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의 사마씨 역시 하내의 호족이었다. 실제로는 긴장 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삼국의 군주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축해 호족연합체를 넘어서는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각기 달랐지만 셋 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위나라에서는 호족들 가운데 문벌이 높은 몇몇 가문이 중앙 관직을 장악하여 호족을 뛰어넘는 귀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귀족 사회가 형성된다. 이것이 중국사에서의 문벌귀족의 시작이다.

오나라에서는 강남이라는 미개척지 특유의 성격으로 호족들이 강한 독립성을 가지면서, '호족연합체' 적인 정권이 형성되었으며, 오의 군주인 손씨 가문도 사실상 강동 지역 호족이자 그 연합체의 맹주와 같은 위치였다. 오나라 계통 호족은 오나라의 붕괴 이후에도 서진에 등용되면서 귀족적인 지위를 유지한다.

촉한에서는 영토가 작고 옛 한나라의 계승을 표방하여 한의 문물을 갖추려 했던 덕분에 상대적으로 중앙 정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호족 사회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국을 통일했던 것도 호족에 의해 세워진 친 호족국가, 서진이었다. 삼국이 서진에게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삼국이 모두 호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이 호족 세력들이 자기 나라를 내팽개치고 사마씨의 서진의 패권을 인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크다. 등애촉한 침공 때 어이 없을 정도로 쉽게 성을 내준 마막과 같은 인물을 생각해보자.

이는 다시 말하자면 후한을 멸망시킨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고, 결국 호족들이 모여서 "우리끼리 다 해먹으며 천년만년 누려보자."며 세운 서진은 중국 역대 통일왕조 중에서 반면교사의 사례를 남기며, 중국은 장장 400년 가까이 남북으로 갈린 기나긴 분열시대를 겪게 된다.

다만, 고도의 중앙집권을 당연시하는 후대인의 시점에서 호족의 득세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으로 여겨지기 쉬우나 한나라 당대의 사회 구조 및 기술, 행정 수준에서 호족의 탄생 자체는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교육 자체가 특권계급의 전유물이었고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해 줄 산업의 발달이 미비했던 전근대 사회에서 지방 지주 계급인 호족이 곧 지식인 계급이 되는 현상, 즉 호족=사대부인 현상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호족의 존재가 반드시 한나라에 악영향을 끼쳤던 것도 아니다. 한나라의 보편적인 관료 등용 시스템인 향거리선제는 곧 지방의 유력자(호족)들이 자기들 중에서 유능한 인재를 중앙정부에 천거해 올리는 천거제 제도였다. 그리고 한나라의 중앙정부(조정)는 이를 통해 당시 최대의(사실상 유일한) 지식인 집단이었던 호족중에서 어느 정도 선별된 인재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고, 동시에 교통, 통신, 행정기술의 한계 속에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12]

물론 현대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소수 호족들이 자기들끼리 주거니받거니 추천하며 관직을 나눠먹는 향거리선제(와 이후의 구품관인법)는 불공정하고 부패한 제도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마저도 춘추전국시대 ~ 한나라 초기까지 대부분의 관직과 관품이 세습되고, 극히 예외적으로 군주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인물을 종종 발탁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에 비하면 개방성과 공정성이 크게 향상된 나름의 발전이었다고 볼 만 하다.

결국, 호족 자체는 처음부터 한나라를 좀먹는 암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한나라의 시스템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거대 제국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둥 역할이었다. 막강한 황권 아래서 황제의 친위세력인 외척/환관이 서로 견제하고, 또 이들을 실무진인 호족=사대부가 견제하는 균형 위에서 성립되어 있던 것이 한나라의 시스템인데 후한 후기 너무 어리거나 무능한 황제가 연이어 즉위하면서[13] 이전까지 거의 300년간 한나라를 유지해왔던 이 시스템이 완전히 균형을 잃고 무너져 버린다.

환관의 권력이 터무니없이 거대하게 성장하여 제위 계승까지 좌지우지 할 정도가 되니[14] 본래대로라면 환관 세력을 견제해야 할 외척 세력들마저 환관 세력에 억눌리게 되고, 이러한 환관 세력을 그나마 견제하려 시도했던 호족=사대부 세력마저 당고의 금으로 철저하게 탄압당하면서 환관 세력이 완전히 권력을 독점하고 절대권력이 된 만큼 절대적으로 부패하여 전횡을 일삼아 외척, 사대부(호족) 세력과 충돌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혼란한 시대상에 의해 벌어진 사태가 바로 황건적의 난이고, 황건적의 난이 순식간에 후한 13주 중 8주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급성장한 것 역시 (후한 체제에 대한 기대를 버린) 일부 호족의 지원과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15] 게다가 당시 한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고 전횡하던 환관 세력(대표적으로 십상시)들은 그 탁월한 정권 장악 능력 및 부정부패 능력에 비하면 참혹할 정도로 실무 능력이 부족했고, 호족 = 사대부 = 사인 세력이 탄압의 대상이 되면서 대규모 민란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실무진의 공급 역시 끊긴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황건적의 난은 어찌저찌 진압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호족 = 사대부 세력은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전국을 휩쓰는 대규모 반란을 진압할만한 대규모 군사력을 확보하고 운용할 능력이 없었던 환관 세력으로써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각 지역에 영향력을 가진 호족들이 군대를 편성하는 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유비와 같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의병들이 등장했음을 생각해 보자. 당시 각 지역에서 나름 자체적인 군사력을 편성할 수 있는 집단은 기본적으로 그 지역의 유력자인 호족들이었다.

말하자면 이들 호족은 황건적을 지지한 반 한나라계 호족들에 비해선 한나라 충성파라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환관 세력에 우호적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당고의 금 이후 오랜 탄압으로 호족 = 사대부 세력에서는 반 환관 세력인 청류파의 영향력이 커져있었고 이들은 당연히 군사력까지 갖게 된 이상 (그리고 환관이 장악한 조정의 군사력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환관 세력을 숙청하고 그동안의 탄압에 대해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었다.[16]

그 이후, 그나마 청류파 호족들의 젊은 지도자인 원소[17]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환관 세력을 완전히 박살내 버릴 의도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던 하진[18]십상시들의 화려한 자살골로 살해당하고, 이에 그나마 폭주를 막던 안전판이었던 하진의 죽음으로 완전히 폭발한 청류파 호족들의 군사력에 의해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 세력은 철저히 몰살당하여 환관 세력은 일단 한나라의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이 혼란기를 틈타 동탁이 중앙으로 진입하고, 원소를 위시한 청류파 호족들이 이번에는 동탁과 맞서다가 그나마 한나라의 체제를 복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기회였을 수 있는 왕윤의 시도가 최종적으로 실패하여 삼보의 난을 겪은 끝에 각지의 호족들이 한나라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나 군벌들의 세력 기반이 되는 군웅할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당시의 군벌치고 호족들을 무시하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고 봐야 한다. 동시에 군벌이 아닌 한나라 중앙 조정조차도 호족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각지의 호족은 곧 해당 지역의 유력자였고, 시대적 한계속에서 한 지방을 통제하는 방법은 곧 그 지방을 장악한 호족들의 지지와 협력을 받는 것 뿐이다. 그나마 한나라는 수백년에 걸쳐 축적되어온 황실의 권위 + 향거리선제를 비롯하여 나름 안정적으로 정착된 시스템의 힘으로 호족들에게 명확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 비해, 그런 권위가 없는 군벌들은 나름의 긴장과 알력을 겪으면서도 호족들의 협력을 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 호족과 군벌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은 문학작품인 《삼국지》 내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삼국지의 수많은 군웅들(유비, 조조, 손견, 손책, 손권 손씨 삼부자, 원소, 원술, 동탁, 여포, 도겸, 공손찬, 공손도, 공손강, 공손연, 유표, 유장, 장로 등)과 호족 간의 관계, 일례로 군사적 재능은 별개건으로 정치력은 훌륭했던 유표 생전에는 형주의 호족인 채씨나 괴씨 등과 긴밀히 협력하여 형주를 통치할 수 있었지만, 그 유표가 죽은 이후에는 채씨로 대표되는 형주의 호족들이 후계자 유종을 무시하고 앞장서서 조조에게 항복한 것이다. 또한 그 직후, 조조가 강동 원정을 시작하자 손권이 동원한 병력이 고작 20,000 ~ 30,000명에 불과했다.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오나라의 병력이 230,000명이니 작정하고 모으면 100,000명은 모을 수 있어야 정상인 강동에서 동원한 병력이 고작 신야를 가지고 있던 유비 + 강하태수 유기가 동원한 20,000명과 비슷한 수준 밖에 안 되는 것이었으며, 이는 호족들이 손권에게 제대로 협력하지 않아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19]

결국 당대 군벌들에게 있어 호족들이란 협력해주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어 곤란한 상대였다. 물론 유표나 조조처럼 믿음직한 (또는 무서운) 인물이나 뛰어난 수완을 가진 강력한 카리스마적 인물이라면 호족들의 협력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지만, 유종이나 손권처럼 막 군벌의 자리를 물려받아 아직 호족들의 신뢰를 확보하거나 기세를 꺾어 제압하지 못한 '애송이'들은 병력조차 제대로 동원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손권처럼 무서운 애송이라면 "저 애송이 보통은 아닌데, 자기가 조조를 막겠다고 하니 정말 할 수 있나 한번 보자구? 해 내면 우리 두목으로 인정해줘도 좋지?" 정도의 반응이었고, 정말 조조를 막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후 강동 호족들을 자신의 지배력 아래 휘어잡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종처럼 안 무서운 애송이면 "너 하나만 넘겨주면 어차피 조조는 형주를 지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기득권을 인정해 줄 텐데, 왜 우리가 널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냐?"고 그냥 항복하자고 밀어붙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로 중앙정부 출신으로 조정의 관직을 받아 권위를 가졌던 군벌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해당 지역의 호족들로부터 협력을 구할 수 밖에 없었고, 공손찬이나 여포처럼 이런 협력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군벌들은 폭망했다. 호족 다수가 작정하고 불성실하게 굴기라도 하면 군벌들로서도 일일이 때려잡을 수도 없이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삼국 정립 후 삼국 모두 호족들을 제압하여 중앙집권을 구축하려 시도했다는 것 역시, 당대의 기술적 한계상 호족 없이 각 지역을 직접 장악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나라 시절처럼 호족들을 조정의 권위 아래 묶어놓기라도 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의 결말은 결국 하내 사마씨진나라가 삼국을 재통일하는 것이었고, 애초부터 호족 출신으로 위나라의 조씨보다 더 억지스러운 찬탈로 제위를 차지하여 권위가 약할 수 밖에 없었던 사마씨는 그나마 호족들을 제어해 보려는 시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결국 당나라 말기까지 왕조는 망해도 귀족 가문은 변하지 않고, 황실마저도 황제가 우겨야 최고 등급 성씨로 끼워준다는 문벌귀족의 전성기가 열리게 된다.

이러한 이후의 역사적 흐름을 볼 때, 한나라 말기 호족의 발호를 그리 긍정적으로 보기는 힘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환관이나 외척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느 정도는 시대적 한계상 그 탄생이 불가피했던 면이 있고, 필요악적인 측면, 또는 시스템이 건전하던 상태에서는 나름 긍정적인 측면도 있던 것이 한나라의 체제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정치적 괴물로 재탄생했음을 감안해야한다.

관제적인 면에서는 삼국시대의 지명, 행정구역과 관직은 기본적으로 후한과 같다. 다만 난세이므로 군벌들이 임의로 각종 임시직을 설치하거나, 기존 관직의 권위가 이리저리 바뀌면서 혼란이 많은 편이다. 자세한 것은 삼국지/지명삼국지/관직 참조

정치적인 측면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조위는 특유의 조하후 가문의 족벌 체제로 정치권을 구성하고 있으며 군주 조조가 아니더라도 조인, 하후돈, 하후연, 조홍 등 일가친척들이 주요 직위를 차지한 뒤 남는 자리를 다른 장수들에게 주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다.

손오는 여러 호족들의 연합체이며[20][21] 그 중 군주 손권의 손씨를 필두로 육손의 육씨,주유의 주씨, 제갈근의 제갈씨, 보즐의 보씨 등 오의 사성 및 여러 호족들이 돌려가며 주요 직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이게 나중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촉한은 조위나 손오와는 달리 한 황실을 계승한다는 명분이 명확했고 상대적으로 국토가 작았으므로 굳이 심한 족벌정치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유비에게는 나이가 비슷한 가까운 유씨가 없었으므로 할 수도 없었다. 군주 유비를 필두로 제갈량이 사실상 부군주 역할을 하며 유비를 보좌했으며 유비가 황실종친인 덕분에 세 나라 중 가장 중앙집권이 잘 되는 국가였다.

5.2. 경제

후한의 멸망으로 농업이 붕괴 상태에 놓였으며, 화폐경제가 몰락했다. 후한 조정이 통제 능력이 붕괴한 탓에 동탁의 동탁소전, 촉한의 직백오수전 등 대량의 시뇨리지를 노린 악화들이 출현했다. 위, 촉한, 오 세 나라가 정립된 뒤에 새로 발행된 동전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지 못하여 포, 비단, 곡식, 등 실물을 주요 화폐로 부득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세 나라 모두 동전을 발행하고 가치를 부여하여 경제적으로 사용되기를 바랐으나, 황건난~동탁의 난정 이후부터 후한의 화폐가 저질적으로 폭락하고 국가가 아닌 사사로이 만든 돈 때문에 국가가 만든 화폐 역시 이에 맞물려 가치와 신용이 떨어졌다. 때문에 민중들은 물물교환을 통한 경제활동이 더 가치있고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각국의 화폐제도는 화폐로 값을 치르는 데 미치지 못해서 물물교환이 다수로 있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제 1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다만 삼국의 정세가 고착화되면서 상업경제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각국은 기존 화폐경제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비록 전란 이전의 오수전 체제를 완전히 복수하지 못해 각국의 화폐정책이 현대 역사학에서 실패로 평가되는 부분은 있으나 이들이 이런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려 노력은 안한 것은 아니었다.

조위의 경우엔 동탁이 장안으로 도주한 이후 발행한 악화를 비롯해, 중원의 전란으로 인해 발생한 초인플레이션 폐해는 조조도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하였고 조비 치세 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후한의 상품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킨 오수전의 붕괴를 조위는 초기에 회복하진 못했다. 조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예 오수전의 유통을 금지하고 물물교환으로만 거래가 이루어지게 하는 극약처방을 썼다. 이는 상업 발달에 지장을 준 사례임에는 맞으나, 당시 초인플레이션의 여파는 계속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조세는 토지와 현물 위주로 재편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란의 피해가 회복되고 상업이 다시 활성화됨에 따라 금속 화폐의 수요는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결국 오수전은 위나라의 2대 황제 명제 조예 시절에 사마지 등의 건의에 의해 최종적으로 다시 복구된다. 《진서》의 식화지에 따르면 전은 폐지되고 곡식이 사용됨이 이미 오래됐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교묘하게 속임이 점점 많아져, 다투어 물기가 있는 곡식으로 이익을 늘렸고, 척박한 비단을 만들어 거래하니, 비록 엄한 형벌을 처분해도 금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마지 등 모든 조정에서 크게 의논하길, 전을 사용함은 단지 국가를 흥성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형벌을 줄이게 되니, 지금 만약 다시 오수전을 주조하면, 국가가 흥성해지고 형벌은 줄어서, 국가대사에 있어 편리할 것이라고 여겼다. 진서는 위명제가 이에 다시 오수전을 일으켜, 서진까지 이를 사용했고 이후에는 이를 다시 고쳐 만들거나 폐지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쓰고 있어 위명제가 복구한 오수전 체제가 최종적으론 서진 시기까지 문제없이 통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손오의 경우,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손오는 삼국 중 후한의 화폐경제, 상업경제가 가장 잘 살아남은 지역이었다. 돈과 천을 주요 국가적 결제수단이자 민간경제 유통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손오의 경제는 호조를 중심으로 한 조위의 경제와 직물과 수탈을 중심으로 한 촉한의 경제가 아닌 동한 말기의 화폐경제와 일치한다. 손오는 한나라 때부터 돈 위주의 인두세(算頭稅, 이른바 계산부과구전)를 실시했고, 전세(田稅, 곡물포전)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비해 당시 중원지방에서는 남경여직(남성이 경작하고 여성이 직무을 짬)의 생산기반이 무너지고 오수전(五铢钱)이 주물이 되는 등 전란의 여파로 고정적이고 통일된 호조제가 실시되었으며, 이러한 호조조는 이후 일부 개조되어 서진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손오는 구리 광산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화폐경제도 중원처럼 파괴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또한 손오는 남경여직 정책을 계속하여 동한 이래의 기본세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손오는 각지의 자연환경에 따라 유연한 세제를 만들어 막대한 전비 수요에 대응하였다. 그 일환으로 국가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손오는 돈 위주의 인두세와 조세 외에 다양한 수요물자를 수시로 조달한다는 뜻이다. 그 중 적어도 일부는 관이 매입한 것이다.

이 밖에 손오에는 한나라 때부터의 시세 등 상업상 관세가 있었다. 그 기본은 백전 단위로 한대의 시조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지만, 한제와 대체로 일치하는 점이 많다. 손오의 인구 통계는 일견 촉한의 군사 최우선형 경제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군사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비상근 관리와 비상근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오의 부역제 및 병제는 거의 완전히 한제를 답습하고 거기에 병호제를 추가한 형태였다. 결과적으로 손오는 소득이나 지출 면에서 모두 동한(특히 동한 말) 오수전 화폐 상업 경제제도의 계승자였다. 즉 정치적으로 손오는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중세의 도입기고 화폐경제나 세제는 고대국가 진한의 연장선상인데, 화폐 경제와 상업 네트워크가 살아있다보니 관이 물자 필요할 때 공출 대신 민간 상업을 통한 매입을 하는 일종의 재정국가적 성격도 강하게 띄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22] 다만 전란을 겪으며 손오 지역은 화폐주조 능력을 상당수 상실했기에 화폐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청동의 무게를 재어 결제에 사용할 목적으로 비록 악화였지만 촉한의 화폐를 다수 유입시켜 사용하기도 하였다.

촉한의 경우엔 잦은 외정을 뒷받침할 재정을 확충하는 것을 국가 재정 목표의 최우선 요소로 두었는데, 때문에 직백오수(直百五銖)전이라는 액면 가치가 오수전의 무려 100배인 악화를 운영했다. 오수전이 2.6 g이었고, 직백오수전은 7.9 ~ 9.5 g이었으니, 고작 3배의 주조 비용이 증가했다 한들, 주조 차익이 100배나 늘어나면 그 화폐는 사실상 헐값을 넘어 똥값이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계산하면 직백오수전은 크기도 작았으며 불순물도 섞였던 동탁의 동전보다도 그 가치가 1/10 이하였기에 동탁의 동전보다도 악화임에 분명하다. 촉한은 이런 식으로 민간 경제를 약탈하였으며, 화폐경제는 촉한 경내에서 완전히 붕괴되었고 촉한은 외부에서 손오와 교역할 때는 금속화폐를 상납하고 경내에선 화폐 경제보다 비단을 위주로 물물 교환하는 원시 자연 경제로 돌아갔다. 촉한은 이런 주조차익으로 얻은 이득을 한중 공방전형주 공방전 등에 사용하였다.[23] 관아의 창고가 가득찼다고 서술된 것은, 촉한의 화폐와 화폐 경제가 우수했던 것이 아니라, 흥선대원군당백전을 발행해 주조 차익을 거둔 일과 흡사하다.

그러나 촉한의 화폐가 분명 악화였음에도 촉-오관계에서 이루어진 무역에서 촉한의 화폐가 통용되는 상황은, 앞서 언급했듯이 촉한의 화폐가 악화였음에도 금속가치 자체는 있어서 손오의 화폐수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켰기에, 이 시대에 보인 촉한의 손오에 대한 화폐 수출과 손오 경내에서 촉전이 쓰이는 현상은 이 시대 양국 동맹간 다른 중국사 어느 기간에서도 찾기 힘든 특수한 종류의 무역 양상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촉한은 자국의 악화를 교역 과정에서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더 풍요로운 손오에서 필요한 물자를 구매해 근본적으로 군벌국가 체제였던 자국의 안정성을 도모하였다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촉한의 기형적인 화폐경제 구조는 촉한 멸망 이후엔 상당부분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위진의 정상적인 오수전이 옛 촉한 영토에 유통되기 시작했는지, 촉한의 옛 수도 성도는 이후 상업적으로 번영하였고 서진의 좌사는 촉한 멸망 이후 10~20 여년이 지난 상황에서 성도의 (번영한) 상업을 묘사하였다. 좌사의 《촉도부》(蜀都赋)는 성도 상업의 발달로 점포가 즐비하고, 각종 진기한 상품들이 모두 시시각각으로 늘어져 있으며, 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24]

촉한의 존속기간내에 다른 산업은 사실 별 볼일이 없었지만 비단만은 오나라와 위나라에 팔리며 유명세를 떨쳤고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에서도 촉한의 멸망 당시 창고에 있던 금, 기, 채, 견 80만 필 중 금(錦), 기(綺)를 유명하고 진귀하며 기술요구도가 극히 높은 견직물로 인정하며, 이것을 능히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음이 촉한 수공업의 창성과 발달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강북 지방 쇠퇴의 조짐이 처음으로 보인 시대였다. 삼국시대 이후엔 인구 급감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전란으로 인한 민호의 도주와 관개시설 및 농경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 등의 이유로 버려진 농경지가 대량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황하 중상류 지역의 황폐화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발생하였고 삼국시대의 뒤를 이은 남북조 시대로 인해 이 흐름이 더욱 가속화된다.

중원의 경우 역대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전란을 거치며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조조가 패권을 구축하면서부터 회복의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토지 개혁과 전후 재건에서 다른 군벌들을 크게 앞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도 자체는 기존에도 있었지만, 조조가 대단했던 점은 이를 전국 규모로 장기간에 걸쳐 추진한 조직력과 추진력이었다. 실제 기존의 둔전제는 일부 국경지대에 한해 한시적으로 실행된 제도였으으로 조조와는 규모/기간에서 비교가 안된다.

한편 손오는 세력 확대를 위해 강남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특히 오나라의 강남 개발의 경우 한족이 본격적으로 장강 이남 개발에 착수한 시초로서 중국 경제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비록 당대에는 아직 미약한 수준이었으나 오나라가 이때 잡아놓은 기틀에 영가의 난 이후 북쪽에서 몰려든 우수한 농업기술을 가진 서진의 유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남조 시대 경제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었다.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성과를 내기 시작한 건 빨라도 위진남북조시대부터였고, 당•송 무렵에야 절정에 이른다. 이후 송나라 시대 즈음에 이르면 강남이 대체적으로 개발되어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절정에 이르름으로써 강남의 경제력이 중원을 압도하게 된다.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각지에 명맥을 유지하던 소수민족들, 즉 무릉만산월이 완전히 중국에 복속 동화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중국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영토를 한족이 사실상 독점하기 시작한 시대가 삼국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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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문화

이 무렵의 중국은 좌식(座式) 생활을 했다.[25] 즉, 마룻바닥이나 평상에 돗자리나 깔개를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서 지냈다.[26] 물론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그냥 흙바닥에 돗자리 하나 덜렁 깔고 지내는거다.

삼국시대에는 비록 주류는 아니긴 했지만 한나라 시대에 이미 흔했던 유제품 관련 식문화가 아직 건재해있었다. 조조의 일합수(一合酥) 일화로 유명한 타락죽 간식도 유제품이었다. 사치품이었는지 천하통일 이후 육기 형제가 서진의 부자 왕개의 초대를 받았는데 왕개가 양락(羊酪:양젖으로 만든 유제품)을 가르키며 손오에도 이와 비교될 음식이 있냐고 물어봤다. 유제품 관련 식문화는 이후 유목 민족의 발호가 계속된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고 개간으로 인한 목초지의 상대적 감소 등의 이유로 북송 무렵 중국 내에서 자취를 감춘다.

참고로 이 시대에는 이름이 대부분 외자 이름이었다. 이름이 모두 한 글자고 두 글자 이름이 없다는 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고 곳곳에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 이래로 두 글자의 이름을 쓰게 하는 것은 죄인에게 모욕을 가하기 위한 조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돌아다니지만 이건 '혹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고 어림잡아 내놓은 가설일 뿐이다. 후한 시대의 이름이 실제 대부분 외자이기 때문에 두 자 이름이 없다는 설은 상당히 예전부터 있었지만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盧弼)은 후한 시대에 두 글자 이름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이름이 전부 외자라는 건 깊이 살피지 않은 잘못된 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일제, 곽유지, 장춘화, 왕원희, 손노반, 손노육 등 두 글자 이름이 제법 있다. 다만 남성보다는 여성 중에서 두 글자 이름이 더 흔하게 보인다.

상기한 것처럼 전한 한무제 이래 유교가 독점하던 지적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법가, 문화적으로는 도가를 재조명하는 시도가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도교의 경우 이 시대에 사실상 제2의 탄생을 맞이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후한 때 전래되어 남북조시대에 번성하게 되는 불교가 점차 뿌리를 내려가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5.4. 언어

삼국시대의 언어상고한어의 말기 발전 형태인 후한한어(Eastern Han Chinese)를 거쳐 상고한어에서 위진남북조시대 초기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사실 한국 인터넷 상에 퍼진 서주-춘추전국시대 발음을 재구한 상고한어식 삼국시대 인명들은 이 시대로부터 수백년~수천년전 발음을 그대로 사용한 완전히 잘못된 사용례이다. 한국으로 치면 현대 한국어 인명을 중세 한국어식으로 읽는 격인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당대의 인명은 중고한어음에 가깝게 읽는것이 그나마 바람직 하다고 할 수 있다.
<rowcolor=#d4cd99> 상고한어 중화민국 국가 후한한어 중화민국 국가 중고한어 중화민국 국가

발음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면, 해당 동영상들은 각각 서주-춘추전국시대 상고한어음, 후한시대의 후한한어음, 위진남북조 이후의 중고한어음으로 부르는 중화민국 국가 동영상들인데 실제 재구되는 음만 봐도 후한한어는 상고한어보단 중고한어음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5. 군사

향촌 사회의 붕괴와 함께 후한의 모병제도 붕괴했다. 군사 제도는 둔전과 결합된 세병제로 변화했다. 본디 후한은 대대적인 군축을 시행했으므로 변경의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군사 인프라가 약해져있었다. 그러나 180년대 이후 전란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군역과 군사조직이 생겨났다. 이 군사적 변화점들 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뽑자면, 일반 백성층과 확연히 구분되면서 대를 이어 군역을 세습하며 호족들에 의존하는 군사 계급의 형성, 비-한족계 오랑캐 기병에 대한 급격한 의존, 각 지방의 토착호족들과 도독, 막부 등 군사령관들에게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는 군 지휘체계의 시작과 확립이 있다.

전란이 장기화됨에 따라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전문병사 계층 양성에 호의적 여론이 일어났고, 이들은 자신의 주군(군벌)들이 임지를 이동해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전쟁의 운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초창기 한나라 군역제도를 가동시켰던 안정적 행정시스템은 후한시대 모병제로 대체되었고 후한말의 혼란으로 완전히 붕괴해버렸다. 혼란상이 가득해던 당시 시대상 덕에, 군대에 투신할 보충병의 수가 모자랄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매우 많은 숫자의 절박한 농민들, 유랑자들, 난민들이 군에 입대했다. 이 시대의 대규모 군대는 약소 군주와 그 추종자들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군주의 종류엔, 자신을 따르는 농민들을 병사로 전환한 토착 거물, 그리고 관군이라기 보단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개인 사병 집단을 양성한 군사령관들이 있었다. 이 두 형태의 군주를 따르던 사병 집단을 부곡(部曲)이라고 불렀다. 이런 배경하에서 세워진 삼국은 재통일을 위해 군사 인프라 확충에 힘썼다.

후한 시대에는 화폐의 보급과 상업화가 진전되면서, 기존의 비용이 많이 들던 국가적 보급 시스템을 폐기하고, 세금의 전납화 / 대대적인 민영화로 효율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결과, 반란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일시에 상업망이 무너지면서 기존의 보급 시스템이 아예 남아나지 않는 결과가 되었고, 평화시기에 전투용으로 준비해둔 저축이 존재하지 않으니, 딱히 털어먹을 것도 없고 결국 둔전이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축적량이 없어서 "잠깐 농사 좀 해서 군량 모으고 싸우자." 이걸 반복해야 하니 당연히 내전이 지지부진 장기화 될 수 밖에 없었다.

미개척지 천국이라 중앙집권은커녕 각 지역 한족 토호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통치가 불가능했던 손오는 세병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각 지역 토호들의 사병에 의존하는 세습령병제로 나아갔다. 병호제[27] 아래서 일반 편호(남녀구)와 병사(兵)를 구분함은 물론 관리(吏)의 명부도 따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촉한의 경우, 유비가 입촉한 이후 군사력의 주력은 보병이었고, 기병이 그 다음이었다. 남중은 예로부터 의 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에 남중을 평정하고 나선 기병 전력도 어느 정도 충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나라의 대규모 기병대와 맞설 전력까진 아닌 환경이라 팔진도 등 보병 병법의 발전으로 이를 파훼하려고 노력했다. 촉한은 소수민족 부대도 편성했는데 종병(賨兵), 수병(叟兵), 청강병(青羌兵) 등 촉한 경내의 종족, 수족, 강족 등을 편성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부대는 왕평이 운영했던 남중 출신 정예부대인 무당비군(無當飛軍) 오부(五部)일 것이다.

촉한은 일반 편호(남녀구) 이외 군사(兵), 관리(吏)를 따로 기록하였는데, 중국 현대사학자 백수이(白寿彝, 1909~2000)의 《중국통사》(中国通史)[28]에서는 촉한의 <사민부>에 나오는 대갑장사(帶甲將士)를 세병제(병호제,사가제)를 전제로 한 병적상의 수치가 아니라 당시 상비병의 숫자로 간주하고, 촉한에서는 세병제(병호제,사가제)가 아닌 한나라 때의 징병제가 그대로 실시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시대 특히 촉한은 진•한시대에 비해 병사들에게 보급할 방호구, 병장기류와 운송수단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 제갈량과 촉한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포원은 야금술을 발전시켜 튼튼한 갑옷투구, 신도(神刀)라 불리는 갑옷과 투구를 가를 정도의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제갈량은 '원융노'라고 불리는 십시연노를 개발했다. 이는 쇠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촌인, 한 번에 10발씩 쏘는, 현대 기준으로 말하면 기관총 같은 무기였다. 또한 《삼국지》 <촉지> '제갈량전'에서는 제갈량이 병법을 미루어 넓히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군사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그 운용은 반드시 연노와 배합되었다고 한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부릉의 힘좋은 병사 3,000명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고 한다. 제갈량이 보급의 편리를 위해 운송용 수레 목우유마를 개발한 것도 유명하다.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군은 '대오가 질서정연하고 상벌이 엄숙하고 밝았다'라고 한다. 이런 엄격한 군기와 고양된 사기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며,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훈련의 결과였다. 또한 촉한군은 '무기를 날카롭게 갈고, 무예를 강습하며 뒷날을 도모하니, 병사들은 간결하게 정련되었다'고 한다. 즉 제갈량은 촉군을 정예군으로 육성했다.

위나라는 기존 세병제의 틀에서 흉노족, 선비족, 오환족, 강족 등 이민족 전력 영입에 반란군 유입분자나 유민들을 잡아다가 둔전을 시키고 부곡을 기반으로 한 사병집단의 영향을 굉장히 다대하게 받아들였다. 병사와 그 가족들은 군호(병호)(軍戶:兵戶))라는 특수한 지위를 얻었다. 군호 집단은 다른 일반민이나 농민층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군호에 속한 사람의 명단은 특별한 군문서에 기록되었고, 지역 민간행정관보다는 군당국의 통제를 받았다. 일단 어느 사람이 병사가 된다면, 그는 평생에 걸쳐 군복무를 수행해야 했다. 해당 병사가 전사하거나 군무를 수행하기에 너무 노쇠/병약해질 경우, 그의 아들이나 혹은 가까운 친인척이 그를 대신해야 했다. 위나라의 병사와 그 가족들은 오직 같은 군호 지위를 가진 사람과만 결혼할 수 있었다. 다른 집단과의 결혼은 군역에 종사할 인력층을 감소시킨다고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서진 왕조는 위나라 군주들이 시행한 이 가혹한 정책을 일정부분 완화시켰지만, 기본적인 제도는 그대로 유지시켰고, 병력의 대부분을 여전히 이 제도를 통해 충당했다.

이렇듯 세 나라 각각 자기들의 특색이 두드러졌다. 전란의 시대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군벌의 난립 등의 이유로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다. 이는 훗날 서진의 중국 통일 이후 일어난 팔왕의 난영가의 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족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알더스 고원의 통제권을 최종적으로 상실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 통일 이후 서진이 영가의 난으로 그 대가를 치른다. 물론 영가의 난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일어난 건 결코 아니다.

6. 삼국시대와 역사학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서 중국 역사학적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다.[29] 이에 대해 《하버드 중국사-남북조 분열기의 중국》의 서문에서는 '중국인은 중국이 통일되고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시대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한제국이 종교 반란 집단과 지역 군벌의 손에 무너진 이후의 400년 역사는 소홀하게 다루어진다.' 라고 설명하며 삼국시대부터 , 이전까지 시대가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해석했다. 간단히 말해서 중국이 통일되어서 주변국에 힘 쓰던 중화제국의 시대를 중국인 역사학자들이 더 선호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국의 중국사 연구자들이 삼국시대에 크게 주목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중국의 분열-혼란기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삼국시대는 위진남북조시대초반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대와 시대라는 두 통일시기를 나누는 위진남북조시대의 분열기는 무려 370년에 이르고[30], 이를 다시 세분하면 <(프롤로그격인 후한 말기) - 삼국시대 - 서진시대 - 오호십육국/동진시대(또는 육조시대) - 남북조시대>로 나뉘게 된다. 즉 중국사 교과서를 만든다면 위진남북조의 분열기라는 대단원에 속한 하나의 소단원을 차지할 정도의 비중인 것.[31]

일단 이 분열 시기가 100여년 정도로 그리 길지 않고 위진남북조, 5호 16국시대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이후에는 화이잡거(華夷雜居)의 시작점으로서 다뤄지거나 후한 말부터 축적되어 서진 시대에 터진 각종 사회 모순들을 설명하면서 언급되는 정도다.[32]

물론 이 시대에 역사적 중요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상술했듯 고대 한나라의 해체이자 중세 중국의 시작이다. 전근대 동북아 관료제의 정립이라 평가할 수 있는 구품중정제 또한 이 시기에 창설됐다. 사상적으로는 도교의 역사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주목을 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태평도오두미도가 나타나면서, 기존의 도가 철학이 도교라는 종교 집단으로 변화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두미도의 경우에는 한중군에서 하나의 정치체제를 수립하기도 했다.[33]

하지만 삼국시대가 중국사를 통틀어 가장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가지고 있는 시대임을 생각할 때, 이러한 대중적 관심에 비하면 역사학적인 주목은 별로 받지 못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삼국시대가 누리는 대중적 인기의 대부분은 역사적 비중에 의한 사학적 중요성이 아니라 《삼국지연의》(와 그로부터 파생된 무수한 작품들)에 기반한 문학적, 문화적 존재감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삼국시대가 역사상의 다른 시대와 비슷한 정도의 관심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역사 교과서, 또는 어지간한 역사책에서는 조비(+조조,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유비(+유선), 손권(+손량, 손휴, 손호), 그리고 사마염(+사마의)를 중심으로 이 시대를 다룰 것이며[34],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 시대 인물로 조비사마염 정도를 떠올리고 여기에 유비손권까지 안다면 약간의 관심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서 더 나가 다른 역대 황제들이나 조조, 사마의 같은 창업의 기반을 마련한 자들, 제갈량진군과 같이 중요한 업적을 세운 재상들까지 알고 있으면 해당 시대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매니아라고 여길만 할 것이며[35] 한술 더 떠서 원소원술, 유표, 마등공손찬같은 주요 군벌들이라거나 관우장료, 주유육손 같은 주요 군 지휘관까지 알 정도면 연구자, 또는 전문가급 삼국지 팬덤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심지어 간손미방통, 서서와 같은 수준의 인물이 되면, 해당 시대를 전공으로 삼은 전문 연구자, 또는 중증 매니아급 삼국지덕후가 아니면 그 행적은 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라는 대중적 문학작품에서 역사 교과서라면 잘해야 한 단원, 어지간하면 한 페이지나 심하면 몇 줄로 퉁치고 넘어갈 분량을 십여권에 이르는 장대한 대서사시로 펼쳐놓은 덕분에 다른 시대 같으면 '많은 문무신하들'중 하나에 불과했을 인물들에게까지 사람들의 관심이 일일이 쏟아지게 된 것이다. 일부 《삼국지》 팬들이 '삼국시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일부' 라는 해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중국의 역사적 흐름에서 삼국시대가 가지는 비중은 무수한 《삼국지》 독자들이 가지는 큰 관심과 애정에 비하면 사소하기에 '《삼국지》 독자들의 기대에 비하면' 삼국시대는 별다른 역사적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학계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최진열 교수가 2022년에 <역사 삼국지>라는 책을 내기 전까지 삼국시대를 다룬 제대로 된 연구서가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

당장 고등학교 세계사 책과 수능특강을 펴봐도 이 부분에서 위나라의 구품중정제서진이 통일했다라는 내용만 쓰여있고, 바로 5호 16국과 남북조시대로 넘어가는 아주 적은 삼국시대 분량 때문에 고딩 《삼국지》 덕후들이 처음에 당황하고 좌절한다.

6.1. 삼국시대와 《삼국지연의

워낙 《삼국지연의》가 유명한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실제 역사와 《삼국지연의》를 혼동해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기본적으로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서 쓴 소설이다. 역사 《삼국지》는 따로 있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틀은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만 세세한 내용에서는 영웅쟁패를 다루어 극의 재미를 위해 내용을 변개하거나, 촉한을 정통성을 가진 왕조로 간주한 '촉한 정통론'적인 시각이 많다. 따라서 실제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정사 삼국지》 등 관련 역사서를 읽어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연의》는 군담소설이고, 삼국시대의 각종 야사와 민담이 종합된 소설인 만큼 당시의 시대적 배경 및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사실, 《삼국지연의》에 쓰인 자료들은 출처 등의 기반을 아무래도 역사를 잘 알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두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도 꽤 많이 다르다. 대충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이비 군사학[36]과 진짜 군사학이 아주 많은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한 한계점 때문에 문관의 경우, 정치적 리더십과 비전, 행정적 업적은 거의 묻어 버리다시피 하고 오로지 현란한 권모술수 위주로 다룬다. 조조가 패권을 잡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둔전제에 대해서도 '유랑민을 모아서 농사를 시켰다 - 끝 - ' 수준의 설명에 그친다. 또한 행정가로서 큰 공을 세운 유복, 양습, 한호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도 지나가는 엑스트라 1 수준의 대접만 해줄 뿐이다.

무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극적 재미'를 위해 장수들의 개인적 무용을 설명하는데 집중하며 통솔력이나 전술적 재능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빈약하다. 사실 나관중이 복잡다기한 전쟁에 대해서 얼마나 작중 묘사를 하기 어렵겠는가?[37] 덕분에 《삼국지연의》는 조금 심하게 말하면 혼자서 수천 명을 상대하는 초능력자들의 능력자 배틀물이 되어 버렸다. 팔진도, 팔문금쇄진 같은 진법 묘사가 깔짝 나오긴 하지만 그나마도 털리는 역할이다. 그리고 그런 기록을 맹신해 '중국 군대는 우루루 모였다 우루루 흩어지는 오합지졸'이라는 나름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당연한 일이지만 수천, 수만 명의 병사들이 엄청난 물자를 소모하며 벌이는 전쟁이 그렇게 대장전 한판에 승부가 결정났을 리 만무하다.

다만 전쟁론 등을 참고하면 적의 핵심 지휘관들을 괴멸시키는데 성공하면 사기 등이 바닥나 패주할 수도 있었다. 과거에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적의 힘과 전투력이 얼마나 되는지 등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괴멸되거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중요 도시나 지역이 따이거나 하면 그 충격이 엄청났다. 단적으로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음에도 이미 졌다고 생각해서 다 도망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심지어 나폴레옹 역시 사기빨이 있긴 했다. 프로이센군처럼 질적으로 우수한 군인들을 보유한 나라와의 전쟁에서는 프랑스군보다 적들이 우세하거나 막상막하로 싸우고 있다가도 민족주의로 무장한 프랑스군과 달리 적들의 사기가 먼저 떨어져서 도망가다 프랑스군에 개발린 전투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전근대 냉병기 시대의 전장에서는 전장의 불확실성이 컸다는 의미일 뿐이지, 《삼국지연의》풍의 영웅쟁패 능력자배틀 서사에 현실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사례 역시 그 승리의 원인 중 일부가 민족주의적 의식에 기반한 높은 사기에 있다 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민족주의 개념이 막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근세 말~근대 초의 일이고, 화기의 도입으로 '다수의 징병제 병력'이 철저히 정예화된 소수의 엘리트 전사집단을 압도할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무엇보다도 당시 프랑스의 엄청난 군사적 위상을 가장 확실히 뒷받침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대육군'(Grande Armée)이었고, 민족주의적 사기의 의미는 이전 시대 소수 귀족과 직업적 군인들의 범위를 넘어 징병에 의한 대규모 육군의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는 데 있다[38]. 애초에 중국 삼국시대의 상황과 비교할 이유가 없는 사례인 셈이었다.
  • 조금 더 부가설명을 하자면 고대에는 실제로 (지배계층에 속하는) 지휘관들이 못 먹고 못 살던 병졸들보다 체격조건이 더 좋기도 했고, 지휘관을 잃은 군대가 속수무책으로 패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두 가지 고려할 것이 있는데 1) 이러한 (소위 '일기토라 불리는) 지휘관들 사이에서 단기접전은 《정사 삼국지》를 통틀어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매우 극소수였고 2) 이렇게 일기토가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이 우르르 후퇴하(면서 피해를 입)는 정도였지 전쟁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정사에 기록된 관우와 안량의 일기토를 보자. 백마 전투 당시 원소의 선봉장 안량을 상대로 조조가 기습공격을 했고, 조조 측의 선봉장 중 하나였던 관우가 안량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말을 달려 병사들 사이에 있는 그를 찌르고 수급을 취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안량, 추가로 출격한 문추까지 사망한 이후 백마의 포위가 풀렸다. 그런데 이를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보자. 안량이나 문추는 원소군의 선봉장이므로 당연히 격전지 가까이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조군의 선봉장인 관우가 (소수의 정예기병 정도를 대동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대기하면서 지켜보다가 빈틈을 발견하고 바로 말을 달려 기습돌격하여 지휘관을 처치해 버린 것이고, 그래서 어처구니없이 지휘관을 잃은 원소의 선봉부대는 당연히 지휘체계를 잃고 혼란에 빠져 포위를 풀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 흔히 등장하듯 북을 둥둥 울리며 "적장 아무개는 나오라! 나와 겨루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며 사실 현대전이라도 '기동력과 돌파력이 좋은 소수의 정예부대로 적의 지휘부를 기습하여 괴멸시키는 것'은 만약 가능하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선택지인 것이다. 무엇보다 정사에 기록된 관우의 '일기토'장면은 이것이 전부이며, 여포나 장비, 허저와 같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장수들의 일기토 기록은 전무하다. 거꾸로 보면 관우와 안량의 일기토가 정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이 남고, 그 후 관우의 명성이 온 중국에 퍼졌다는 것은 당시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관우의 활약이 그만큼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우라는 엽기 괴물이 일개인의 무용으로 한 전투의 향방을 뒤집어버린다는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역사에 굳이 기록을 남기고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될만큼 특별한 사례였다는 것. 그 외에 지휘관들 사이에서 1대1로 합을 나누며 무력을 겨루는 일은 거의 없었다. 또한, 관우의 일기토 이후에도 결국 조조는 계속 밀렸다. 기습돌격을 통한 지휘관 처치같은 기책으로 일시적인 전투의 방향을 뒤집는것은 가능했지만 전략, 전쟁 자체의 방향까지 뒤집을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전국시대에 이미 총력전 개념이 생겨났을 정도로 고대부터 이미 고도로 작전술의 개념이 발달한 나라였다. 물론 냉병기 시대였던 만큼 무장들의 개인적 무용은 전쟁의 중요한 요소였고, 실제로도 용맹을 떨친 맹장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돌격대를 이끌고 선봉을 선다든지 성벽에 앞장서 먼저 오른다든지 하는 형태로 승리에 기여한 것이지 혼자 나가서 수만 명을 싹 베어버리다든지 적장과 1vs1 해서 진 쪽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조리 후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 정예병들이나 전력이 강한 병종들이 전략적 혹은 전술적으로 불리해도 오히려 무용으로 죄다 썰어버리는 경우가 역사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39] 냉병기가 상당히 유용했던 시대에는 개인적 능력이 뛰어나면 전략적, 전술적, 장비에 의한 차이를 극복하기가 실제로 화기 시대보다 쉬웠다. 화기는 워낙 사기적인 무기들이 많아 개인적 능력이 별 의미없지만 실제로도 간단한 훈련만 받은 일반인들이 냉병기로 실력자들과 싸운다면 어지간한 신체적, 전략적, 전술적, 장비적 차이가 아닌 이상 질 확률이 더 높다.

6.2. 삼국시대가 인기 있는 이유

개중에는 삼국시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시대가 아닌데 《삼국지연의》가 워낙 널리 읽힌 덕분에 과대평가가 됐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가 오로지 《삼국지연의》 때문에 유명해진 시대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왜냐면 삼국시대는 《삼국지연의》가 집필되기 이전부터 이미 중국인들에게 서양의 《아서 왕 전설》이나 《샤를마뉴의 12기사》처럼 가장 유명하고 주목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나관중이 《연의》에 끼워맞춘 가상의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돌고 있던 이야기들이었고, 나관중은 그걸 집대성해 소설로 쓴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삼국시대가 워낙 유명해서 《삼국지연의》가 대박을 쳤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관중은 삼국시대가 끝난지 1,000년도 더 지나 태어난 원말명초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 쓰인 민간설화 등은 당시에 이미 있었던 설화들을 소설적으로 정리한 정도에 불과하다. 《연의》의 내용은 《삼국지》에 대한 민간설화를 모은 《삼국지평화》와 야사, 실제 역사의 내용을 혼합한 것이다. 즉 명나라 시대에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삼국지》의 인물들은 역사상의 실존인물보다는 민간설화 속 영웅/캐릭터에 가까웠다.[40]

《삼국지연의》가 이처럼 사랑받는 까닭은 한나라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실질적으로 통일을 완성한 최초의 중화제국 왕조이고, 중국 농경 문화의 기초적인 뼈대를 한나라 때 다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1] 한나라는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는데 제도가 상당히 유용하게 잘 만들어졌고, 세계사를 통틀어도 특이할 정도로 단기간에 후세대 농경 왕조들조차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넘기 힘든 엄청난 영토와 인구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아무래도 너무 단시일 만에 영토와 인구를 얻었다는 점에서 그 영토와 인구를 제대로 다 활용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영토와 인구라면 아예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이 출현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걸로 봐서는 한나라[42]가 최소한의 의의가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니 한나라가 몰락하는 시기였음에도 여러 군웅들이 형태는 다를지언정 다시 한나라의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가자는 기치로 싸운 역사가 사랑받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여기에 더해 삼국시대 만큼 수많은 문사와 무장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사서 안에서 한껏 발산하고 있는 시대도 드물다. 고작 100여 년 남짓한[43] 기간을 역사서로 서술하자니 정치사보다는 인물들의 <열전> 중심으로 엮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유명한 장군 너댓 정도나 알려지면 많은 수준인 다른 시대의 전쟁사에 비해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의 행적을 인간관계 하나하나 대조해가며 추적하는 것이 비교적 쉬운 몇 안 되는 시대다.

잔학한 동탁, 배신과 무력의 화신 여포, 난세의 간웅이라는 말에 껄껄대는 조조, 어설프게 칭제했다 알거지가 되어 죽어간 원술, 4세 3공의 가문이라는 강점과 얼자라는 약점을 동시에 지닌 원소 등등, 지도자급 군웅들만 해도 각양각색의 개성이 정사 안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그 가운데 죽어도 백성을 저버릴 수 없다 부르짖으며 돗자리 장수부터 시작하여 끝내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유비를 위시한 유관장 삼형제와, 제갈량이라는 촉한 만고의 충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공감과 지지를 얻었고, 심지어 '승리자'인 조위-사마진이 아닌 '패배자' 유비와 그의 사람들을 주인공이자 촉한을 중국사의 정통으로 바라보는 문학적 해석이 자생적으로 나타나 역사적 정통론에 영향을 끼쳐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지연의》의 저술은 물론 나관중의 광범위한 자료 수집능력과 근성, 문학적 재능이 큰 기여를 했지만 그 이전에 그 수많은 인물상을 입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이미 마련됐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삼국지》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단순한 역사나 설화, 전설을 넘어 일종의 대체신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당장 관우나 제갈량이 중국 민간신앙에서 신으로 받들여지는 모습만 봐도 쉬이 이해할 수 있다. 한나라, 한황실로 대표되는 하나의 천하라는 관점은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군웅들이 천하통일을 목표로 치열하게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더더욱 강화되었고, 이 관념이 《삼국지(연의)》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됨으로써 중국, 중화권을 초월한 범중화문화권, 즉 한자문화권의 사상적 토대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측면이 있다.

어찌 보면 작가 스스로 대체신화를 만들고자 목표했던 레젠다리움, 미국의 대체건국신화로 대접받는 스타워즈의 진정한 대선배라고도 할 수 있다.[44] 이는 중국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삼국시대만큼 인물 중심으로 소비되는 시대가 없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45]

단, 삼국시대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한족 민족주의적 서사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조의 정통성 개념에 영향을 받았는가 하면 맞지만 근데 그게 현대 민족적 개념이냐 하면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지》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고 중화랑 가장 흡사한 게 로마 제국 계승 관념인데, 두 관념의 특징은 그 계승이 문화적 이념적 개념이지 역사적, 혈통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과 달리 외부 혈통집단에 열려 있다는 게 핵심이다.

《삼국지연의》는 청나라 시대 금서였지만(판본에 상관없이), 워낙 재미있다보니 널리 유통되었고, 단연 《모종강 평본》이 인기였다. 느슨한 금서였던 셈인데, 만약 '한흥반청' 의도가 있었거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면 당장 청나라가 가만히 있었을까? 적어도 청나라 중기까지 책이 유통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6.3. 로마 제국과 비교할 때

같은 시기 서양에서는 로마 제국세베루스 왕조군인황제시대였다. 비슷한 시기(260 ~ 274, 중국 삼국시대의 최후반과 같은 시기) 유럽의 로마 제국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군에 포로로 잡힌 후 군벌들이 난립하여 칭제를 하는 자칭 황제들만 20명이나 등장하는 등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타 제국의 서쪽과 동쪽 양쪽에서 반란이 일어나 서부의 갈리아 제국, 중부의 로마 제국, 동부의 팔미라 제국 세 나라로 쪼개져 버려서 중국의 후한과 마찬가지로 멸망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이 셋으로 쪼개졌다는 점 이외에는 이 두 사례가 그렇게까지 비슷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주변의 이민족들에 비하면 대체로 분명한 군사적 우세에 있던 위+촉+오=중국과는 달리 로마판 삼국은 사산조 페르시아 라는 강력한 적국과 게르만족이라는 왕성한 이민족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에 수십년간의 치열한 전쟁을 치른 중국의 삼국과 달리 서로간의 싸움보다는 외부의 적에 대한 대응을 우선시했다. 그래서 결국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로마 재통합 전쟁을 시작하자 그나마 강력하게 저항하던 팔미라가 먼저 무너지고, 갈리아 역시 뒤이어 굴복하면서 로마판 삼국지는 20년도 채 되지 않아 막을 내린 것. 그리고 이렇게 재통일된 로마는 (서진의 짧은 재통일이 얼마 안 가 무너진 중국과는 달리) 얼마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군인 황제 시대도 종식되면서 일단은 혼란기의 수습에도 성공하여 전성기의 안정적인 위세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그럭저럭 이백년 가까이 체제를 유지해나갔으니 삼국시대가 곧 위진남북조시대라는 사상 최대의 분열기의 시작이었던 중국과는 이 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서구 사학계 등에서는 흔히 '한나라의 쇠망사'를 '로마 제국의 쇠망사'와 비교하여 연구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나, 이는 시대가 딱 겹쳐서 비교한다거나 '삼국분할이 일어난 적 있으니 유사하다'는 의미는 더욱 아니다. 로마 제국의 쇠망기와 비교대상이 되는 것은 위진남북조시대 자체, 특히 제국이 본래의 중심지를 포함한 영토의 절반 이상을 상실한 후 나머지 반쪽에서 잔명과 제국이 이룩한 문명을 이어나갔던 동로마 제국동진의 사례이며,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두 제국 중 중국은 재통일에 성공한 중국과는 달리 유럽은 재통일에 이르지 못했다는 차이점 등이 연구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로마판 삼국시대는 정확히 말하면 로마 제국의 쇠락기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로마판 삼국시대가 속한 군인황제시대의 종식 이후, 로마는 한 세기 이상의 그럭저럭 마지막 중흥기를 한번 더 거치고서야 다시 찾아온 혼란기를 통해 서로마의 멸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중국의 삼국시대와 딱 비슷한 시기에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의 로마 역시 삼국분할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 자체는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이지만, 이러한 우연의 일치를 마구 침소봉대하여 로마의 멸망사를 왜곡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6.4. 한국사와 비교할 때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한국의 삼국시대와 비교가 되는데 이름이 같은 중국의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한국 삼국시대 안에 중국 삼국시대가 완전히 포함된다.

물론 중국의 삼국시대는 한국의 것과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위, 촉, 오는 모두 건국된 지 50년도 못 버티고 사마씨라는 제3자에 의해 멸망했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최소 삼국이 정립되었을 당시 이미 건국된 지 장장 300년이 다 되어갔다. 그리고 1강 2약이던 중국의 삼국시대와 달리 1강 2중으로 세 나라의 힘이 엇비슷하여서 100년 동안 삼국이 대립하다가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에 의해 통일된 점이 다르다. 사실 중국한국의 역사를 비교하려면 중국의 삼국시대는 한국의 후삼국시대(왕건이라는 제3자 성씨에 의해 통일), 한국의 삼국시대는 춘추전국시대와 비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한국사에서는 이 시대의 책이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데, 부여, 고구려, 삼한, 동예, 옥저 등 당시 고대 한민족 국가들에 대한 기록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외의 기록은 거의 전해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중국의 정사 삼국지가 90년을 다루고, 한국의 삼국사기는 삼국 ~ 후삼국 통일까지 거의 1천년을 다루는데도, 중국의 정사 삼국지 분량이 더 많다. 특히 인물쪽으로 가면 아무리 인구가 많은 중국이라지만, 시대 분량이 10%도 채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정사 삼국지 쪽이 삼국사기를 그냥 압도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왕계가 일부 누락(차대왕, 고국천왕)되거나 사건의 기년이 불명확하게 기재가 되어 있는 등 오류도 있는 편이다.

중국 삼국시대의[46] 직전이자 시작과 끝[47]의 시기로서 삼국사기 상 기년에 근거하면 중국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기간에 재위한 한국사 군주들은 아래와 같다. 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왕통, 특히 백제와 신라의 경우 후대의 왕사가 선대로 소급되었으므로 중국 삼국시대 초반부(황건적의 난~조위의 건국)의 백제/신라 군주들은 기년과 실제 활동 연대가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야 역시 왕통 계보가 자세히 전하진 않으나 수로왕으로 대표되는 초기사 연대가 소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6.5. 주요 인물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이름이 대중에게 각인된 인물만 추려도 수백명은 되겠지만, 일단은 이하의 인물들이 중국사와 주변 국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만 넣도록 한다. 자세한 사항은 삼국지/인물 참조.
  • 정치
    • 장각 - 중국 최초의 종교에 입각한 반란인 황건적의 난의 주동자. 후한말 삼국시대의 시초.
    • 조조 - 삼국 중 위나라 건국 기틀 마련.
    • 조비 - 삼국 중 위나라 건국. 삼국시대 시작.
    • 유비 - 삼국 중 촉한 건국. 유비의 끈질긴 저항이 없었다면 조조가 천하를 통일했을 가능성이 크다.[48]
    • 손권 - 삼국 중 오나라 건국. 강남 유역 개발.[49] 또한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공손연, 고구려와의 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전부 실패하였다.
    • 제갈량 - 촉한의 명재상. 그가 없었다면 삼국시대가 훨씬 빨리 끝났거나 아예 막이 열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 진군 -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50] 제안.
    • 사마의 - 서진의 건국 토대 마련.
    • 사마염 - 서진 건국과 삼국 통일, 삼국시대 종결.

  • 종교
    • 장각, 장로 - 삼국시대 태평도오두미도의 교주. 둘 다 도교의 일파로 이후, 오두미도는 도교의 중요한 교파로 발전했다.
    • 관우 - 사후 도교에서 군신, 재물신 등으로 추앙.
    • 지겸, 강승회- 중국의 불교 보급 역사 중 초기 인물에 해당함.
  • 문화
    • 조조, 조비, 조식 - 부자가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특히 조조의 시는 높은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 건안칠자 - 조조, 조비, 조식 아래서 활동한 문인.
    • 종요 - 해서체 확립으로 서예의 발전에 기여.
    • 채옹 - 영자팔법 개발로 서예의 발전에 기여.
  • 중국 외 주변국 역사
    • 공손도, 공손강 - 부여 등과 연합해 고구려를 견제하고, 대방군을 설치함. 반대로 동연이 없어지기 전에는 위나라와 고구려는 협력관계였다. 238년 위나라의 공손연 토벌 당시 고구려도 위나라 측에서 참전했다. 이후 위나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고구려-위 전쟁, 서안평 전투와 관구검의 침공으로 이어진다.
    • 관구검 - 비류수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환도성을 함락시킨 장수.
    • 사섭 - 당시 베트남 지역을 통치하며 베트남에 한자를 비롯한 동북아 문화를 도입한 인물. 베트남의 고대사에서 비중이 매우 큰 위인이다.

7. 대중매체에서

상술하였듯이 중국의 역사 시대 가운데 제일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향유되는 시대이다. 지역관광이나 삼국지(삼국지연의)뿐만 아니라 여러 창작물에서도 매우 마르고 닳도록 울궈먹는 소재기도 하다. 삼국지물이라는 장르가 있을 정도. 삼국지/관련 작품 참조.

8. 여담

  • 워낙 혼란스러웠던 시기라서 별의별 희한한 기록들이 다 있는데, 삼국시대의 막바지인 오나라 영안(永安) 2년(서기 259년) 3월, 오나라의 수도인 건업에 무려 화성에서 왔다고 스스로를 밝힌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지》 시대에 나타난 화성인 사실 이 이야기의 출처인 수신기 자체가 이런 식의 신비한 이야기 모음집이라 손권 손노육의 귀신이 목격된 일화라든가, 서한 시대 무덤에 묻힌 궁녀가 살아나와서 곽여왕와 지내며 옛 시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거나 하는 일화들도 실려있다.

9. 같이보기


[1] 오늘날의 후베이성 어저우시.[2] 이때 건업이라는 이름으로 바꿨으며 그 전 이름은 말릉. 나중에 사마염천하통일한 후 사마업의 이름을 피휘한다고 해서 '건강(建康)'으로 또 이름이 바뀐다.[3] 여기에 더해 동연이 238년까지 존재했다. 다만 공식적으로 '연'이라는 국가를 선포한 것은 237년.[4] 《정사 삼국지》는 '한나라가 정식으로 선위한 것이 위나라->진나라로 이어지므로 한나라를 이은 것은 위나라->진나라이다'라는 '위진정통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학적인 측면에서 유비를 소열제가 아닌 단순한 선주로, 국호가 한이었던 촉한을 단순히 촉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는 대중이 읽기 쉽게 만들어진 소설이므로 계속해서 언급되는 '한나라'와 구분하기 쉽도록 촉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점들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학적으로 본다면 엄연히 존재했던 고대 국가의 정식 국호를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므로 '한나라'라고 부르는게 맞고,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 '촉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5] 물론 촉한정통론 자체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할 뿐 역사학적으로 결론이 내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한이란 이름 역시 '유촉'이란 이름만큼이나 부적절한 표현이다. 이 나라의 이름은 '촉'이 아닌 '한'이며, 이 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것 역시 역사학적인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6] 실제 국가의 국호를 그대로 부르는 것은 그 나라의 정통성과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성이란 그 나라가 실제 국가냔 의미의 정통성이 아니라 '촉한정통론'에서 다루는, '한나라를 계승한 나라'로서 정통성을 의미한다) 한나라를 계승한 나라가 무엇이냐는, 이른바 '정통론'과 1도 상관없는 오나라도 국호인 '오' 그대로 불러준다. 마찬가지 원리로 촉이 아닌 위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했다고 보는 입장에서도 굳이 촉한이란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떻게 봐도 정통이 아닌 오나라는 국호 그대로 불러주면서 유독 촉한만 국호를 부르지 않는 건 이상하기 때문이다.[7] 다만 당대 오나라와 위나라에서는 한이란 국호를 써주지 않았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로 '한'이란 국호에 담긴 정통 왕조로서의 상징성 때문이다. 촉한 건국 당시엔 조비가 헌제 유협으로부터 선양받아 후한을 멸망시켰으며 헌제가 시해당했다고 잘못 알려졌고(헌제는 유비가 죽고나서 12년 후에 죽었다) 유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망한 한 황실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한으로 지은 것이다. 당연히 촉한과 위나라는 공식적으로는 서로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통념으로 황제는 천하(라지만 결국 중화세계)에 단 하나만 존재해야 했기 때문에, 오나라의 손권은 훗날 칭제를 하면서 옥황상제에게 올리는 표를 통해 "황제 자리가 비어있으니 제가 그 자리에 오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즉 삼국은 모두 자기가 서로 진정한 황제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위나라의 입장에서 '너(위)는 가짜 황제니 황실은 내가 잇겠다'는 의미인 '한'이라는 국호를 유비 정권에게 쓸리가 만무하며, 황제가 없으니 내가 황제하겠다고 나선 손권의 입장에서도 써줄리가 만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비 사후에 제갈량의 주도하에 촉한과 오나라가 동맹관계를 회복했을 당시, 촉한의 사신들이 오나라 측에 스스로 촉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한'이라고 하면 그 문제 하나로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정작 대사를 망칠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는 촉한 쪽이 더 약소국이면서도 오히려 한나라를 회복하겠다는 국가 이념상 제위를 찬탈한 위나라에 더 공세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북벌 도중 후방을 습격당하면 더 치명적이라 오나라에 비해 동맹 체결에 더 간절하고 아쉬운 처지였기 때문이다. 즉 외교적인 배려로 촉이란 명칭을 쓰기도 하고, 나라 밖에선 촉이라는 통칭으로 불렸지만, 스스로 쓰는 공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한'이었다.[8] 좀 더 와닿게 비유하면 2024년 대한민국의 인구가 5100만 명이 조금 넘는데, 여기서 20%가 줄었다면 1000만명, 즉 서울 전체의 인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망한 것이다. 백년에 걸쳐 일어난 인구 감소라고 해도 엄청난 수치다.[9] 실제로 중국인 역사학자 왕육민이 삼국시대의 호적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삼국시대 인구는 약 3,800만명으로 계산되었다.# 즉, 삼국시대에는 행정권에 들어온 인구는 약 3,800만명이었지만, 이 중에서 돈으로 납세가 가능한 인구는 겨우 767만명 정도였을 뿐이라는 소리다.[10] 조조는 환관 집안 출생이고 할아버지인 조등은 정계의 거물이었지만 조숭(조등의 양자)은 돈이 무지하게 많을 뿐 정치적 입지가 거의 없었으므로 집안의 배경 덕을 딱히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조숭이 태위직을 돈으로 사긴 했지만 이조차도 난세와 암군이란 특성상 가능했던 것 뿐이다)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은 그냥 싸움 잘하는 무관으로 지방 장수로 일했을 것이고 막강한 배경 출신인 원소는 어머니가 노비인 얼자 출신이라 난세가 아니라면 실력자로 떠오르긴 힘들것이다. 그나마 저들은 벼슬길에 오를수나마 있지 거진 평민이었던 유비는 기껏해야 말단 관직이나 얻을수 있지 성공할만한 돈도 배경도 전무했다. 사실 평화로운 시기 성공하기 가장 조건이 좋은 자는 사세삼공 원가의 적통 후예인 원술이다.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으로 황족이지만 사실상 껍데기만 황족인 평민이었다.[11] 뭘 몰라서 무식했던 케이스나 호족들과 끊임없이 트러블을 일으켰던 케이스(관우, 공손찬)도 있었고, 계획적으로 호족을 찍어 누르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케이스(원소, 손책, 조조)도 있었다.[12] 중앙정부에서 각 지역의 상황을 일일이 확인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방의 실권을 가진 호족 중에서 선별된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중앙정부에 유입됨으로써 각 지역이 스스로 한나라의 구조 내에 남아있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13] 후한 최후의 명군으로 꼽히는 장제가 88년 32세로 요절한 뒤,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189년에 즉위하기까지 100년 이상의 기간동안 만 18세가 넘은 성인의 나이로 즉위한 황제가 단 한명도 없었다.[14] 연달아 어린 황제가 등장한 것 자체가, 권력을 쥔 환관들이 다루기 편한 어린아이를 황제로 즉위시킨 결과이다. 성인이 된 뒤에도 철저하게 무능한 황제가 많았던 것 역시 황제의 지근거리에서 그 성장을 책임지는 환관들의 영향이 상당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15] 애초에 한나라 시기에 호족 = 지역 지주란 곧 해당 지역의 유력자이자 세력가였다.[16] 환관 세력의 탄압으로 중앙정계에서 사대부=사인의 세력은 크게 꺾인 상태였지만, 각 지역에 세력 기반을 둔 지주인 호족의 세력 자체가 약화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중앙정부에서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각 지역에 토지와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주민들을 가진 호족의 세력은 그대로였으며 이러한 세력 기반 자체를 꺾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었던 것. 게다가 권력 장악 이외의 영역에 대체로 무능했던 환관 세력은 이런 호족들에 대한 통제력마저 별볼일 없었기에 사대부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을 뿐 지방에서 호족들이 토지를 집어삼키며 세를 불려나가는 것을 견제하는 능력은 이전 시대보다도 훨씬 부족했다. 여기에 난세가 시작되면서 토지를 잃은 유민들이 이들 호족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면서 그 세력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17] 사실 우습게도 원래 원소의 가문인 원가는 청류파가 아니라 탁류파였다. 그런데 워낙 원소의 개인 처신이 뛰어나다보니 원래는 탁류파 집안이었던 원소가 청류파의 아이돌이 되었던 것이다.[18] 이 시점에서 하진의 복안은 환관 세력을 적당히 손봐주는 것으로 그 동안 지나치게 성장한 권력을 토해내고 제자리에 돌아가게 하되, 완전히 근절하지는 않고(지난 수백년간 한나라를 지탱해 왔던 시스템을 복구하려던 것으로 추정하면 대략 적절할 것이다.[19] 물론 이후 손권은 이 50,000명의 병력(물론 유비의 병력도 포함해서다.)으로 조조를 적벽에서 물리치는데 성공했고 또한 유비의 도움으로 중앙에 표를 올림으로써 원래는 군사력만 남다를 뿐 다른 호족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손가를 다른 호족들보다 우위에 세우는데 성공했다.[20] 손오의 정치체제에 대한 설명에서 '호족 연합체'임이 자주 강조되는 것은 결국 두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①미개척지의 비중이 높은 변방이던 강동 지역의 특성상 중앙권력의 영향력이 약하고 각 지역을 기반으로 개발을 주도하여 세력을 구축한 토호(호족)들이 원래 해당 지역 세력의 주축이었으며 ②게다가 손오의 손씨는 조위의 조씨, 촉한의 유씨가 가졌던 강력한 통치명분마저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오나라의 손씨 정권은 '정당한 명분을 가진 지배자'(=다른 호족들의 위에 서 있는 지배자)라기보다는 '동등한 호족들의 연합체를 이끄는 대표자'에 가까운 입지에서 출발해야 했던 것. 게다가, 그나마 이 정도의 입지조차 손책과 손권이 잘난 덕에 얻은 것이다. 원래 손씨는 강동 출신이긴 하지만 그 세력은 군소 호족에 불과했기에 이 형제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호족 연합체의 대표자는 커녕 대호족틀 틈에서 one of them의 입지조차 차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출발하여 짧은 생애에서도 기어코 각지의 호족들을 복속시켜 내실이 다소 허술하나마 세력권을 구축한 손책이나 긴 생에에 걸쳐 기어코 자신과 손씨 가문을 동오의 확고한 지배자로 인정하도록 만들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손권의 역량은 물론 대단한 것이기는 한데, 어쨌거나 그들의 역량으로도 강동지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의 세력을 확실히 중앙권력에 복속시킬수는 없었던 것. 따라서 손오의 정치체제는 (특히 삼국중 다른 두 나라에 비교할 때) 호족 연합체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21] 적벽대전 당시 양주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손권이 세력의 명운이 달린 방어전에서 이미 망한 세력인 유비와 비슷한 수준의 2,3만명만 동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황제국이 된 이후에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비교적 느슨한 강동지역이니만큼, 양주에 대한 지배력도 온전치 않았던 당시로서는 호족들로부터 대량의 병력을 징발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익주를 차지한 촉한이 비교적 강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바탕으로 침략전쟁(즉 본토를 수호할 병력을 제외하고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는 전쟁)인 이릉대전에서 저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것과 대비된다.[22] 손오 화폐 경제의 구조와 특징. - 카키누마 요헤이.출처[23] 카키누마 요헤이, 『촉한의 선군 정치와 경제 시스템(蜀漢的先軍經濟體系)』, 2011.[24]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 1993년, 인민출판사.[25] 입식은 호족들과 서방 문물이 대규모로 유입된 이후에야 도입된다.[26] 드라마나 영화 같은 삼국지 관련 영상물을 보면 연회나 회의 장면에서 주연급들이 어딘가에 올라가 앉아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올 것이다.[27] 병농일치의 징병제와 달리 대를 이어 군역을 전담하는 사가(士家,병호)에서 병력을 충당하는 제도. '세병제'나 '사가제'라고도 함.[28] 상해인민출판사(上海人民出版社) 1989~1999년 출판, 총 12권 22책, 1,400만 자, 백수이가 주편집자가 되었고, 22명의 분권 편집장, 탁월한 성과에 조예가 깊은 500여 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썼다.[29] 반면에 오호십육국시대와 남북국시대는 대중과 사학계의 반응이 정반대이다.[30] 이중 서진의 통일기 30년을 제외하면 340년이고, 통일제국 멸망사를 연구하기 위해 후한 말엽의 쇠락기까지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면 황건적의 난에서 한-위 선양에 이르는 약 35년을 다시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31] 예를 들어 삼국시대까지는 한나라에서 형성된 통일제국의 체제가 명확히 계승되고 있었고, 이를 복원하여 다시 통일제국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였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서진이다. 하지만 그 서진이 불과 30년만에 몰락함으로써 한나라에서 유래한 통일제국의 체제가 해체되고 중국사는 중세의 긴 분열과 혼란기에 빠져들게 되는 것. 따라서 삼국시대는 그 후 300년 가까이 지속된 중세 혼란기의 도입부이자 역사적 갈림길로써 큰 중요성을 가진다.[32] 원래 일반적인 역사학에서는 인터넷이나 대중사학에서 하듯이 이 시대와 인물 하나하나에 주목해서 다루진 않는다. 가령 초한지의 시대인 초한쟁패기만 해도 역사학에서는 진•한교체기 정도로 뭉뚱그려 설명하지, 인물 하나하나를 다루며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33] 물론 그렇다고 태평도처럼 신왕조 수립 같은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한중군 내에서 종교적 군벌 행세했다고 보면 된다.[34] 사마염 이후의 서진(사마진) 황제들은 삼국시대의 인물이 아니니 논외. 그리고 후한 말기 군웅들의 활극을 중심으로 하는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나 손견, 손책의 비중이 높지만 왕조의 흥망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 서술이라면 황제가 되지 못한 이들에 비해 후대 황제들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의되는 '삼국시대'의 개념이 삼국지연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해당 작품의 배경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35] 당장 왕맹, 사안, 최호 같이 제갈량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커리어를 쌓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명재상들의 처참한 대중적 인지도를 떠올려보면 된다.[36] 의외로 이런 종류의 사이비 학문도 아주 좁게 보면 진리에 가까운 것이 있거나 창시자가 나름 머리를 짜내서 이론을 갖추기 때문에 영리하지 않으면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거의 절대 다수는 결정적인 허점들이 있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알아봐야 현실에서 별로 유익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해로운 경우가 많다.[37] 설령 나관중이 그걸 설명하더라도 그걸 독자나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흥미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38] 엘랑 비탈 항목에도 설명된 것처럼, 중세~근세 유럽에서 프랑스 육군의 위세는 기본적으로 서유럽 최대의 대국이었던 프랑스는 대부분의 경우 적국보다 우세한 병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즉 프로이센군이 아무리 질적으로 우수한 정예병을 가지고 있더라도 양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이 왕성한 공격정신을 바탕으로 계속 공격하면 정예군도 결국은 지쳐 물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 이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는 독일이 아직 통일 전이었기에 개중 세력이 왕성했던 프로이센 역시 프랑스에 비하면 국력의 규모가 작았다는 데 기인한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화기의 발달 역시 '상대적으로 훈련도가 낮은 징집병도 유효한 전력으로 활용 가능한 수준' 까지는 발전했지만 '압도적으로 강력한 화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단숨에 섬멸'할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39] 실제로 삼국지 정사에서도 지휘력이 뛰어났던 장수들과 개인의 무용이 뛰어났던 장수들을 구분해 묘사하고 있다. 관우vs안량의 케이스를 보면 관우가 병사들 사이에서 지휘하는 안량을 발견하고,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그를 찔러 죽인뒤 수급을 베어 자기 진영으로 돌아오는데 원소의 제장들 중 당해낼 자가 없었다고 나온다. 기록에 명확히 언급된 저 '많은 병사들'이 관우의 퍼포먼스를 구경만 했을 리는 당연히 없으니 관우의 돌격을 막기 위한 저항도 있었을 것이고, 안량의 목을 벤 후 조조 진영으로 복귀하는 관우를 막으려는 저항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저항을 모두 뚫어낸 것이다. 즉 기록에서 상세히 묘사되지 않을 뿐이지 '무력이 매우 뛰어난 장수가 (신체능력과 무장 차이가 극심히 나는) 일반병사들 사이에서 무쌍을 펼치는' 케이스는 실제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다만 소설에서처럼 군대가 추풍낙엽으로 쓰러지거나 일기토만으로 전쟁이 결판나는 수준은 아니란 것이다.[40] 특히 관우 숭배가 널리 퍼졌으며, 당연히 관우를 신격화하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송나라 시절부터 나관중이 살던 홍무제 때까지 여러차례 추봉되고 묘가 세워졌다. 《삼국지연의》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수호전》에서 별다른 설정이 없는 일반인이 자연스럽게 '관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수호전의 시간대가 송휘종 즈음인데 송철종 때 헌열왕이라 불렀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41] 당연히 한나라 때야 영토의 개척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북방이나 남방이나 한족을 칭한 왕조들의 영역은 대체로 한나라 때 확보한 영역과 비슷하거나 적었다.[42] 심지어 한나라 때 선택한 유교가 일부 유목민들을 제외한 중화 문명의 주류 문화로 거의 끝까지 가게 된다.[43] 황건적의 난~손오 멸망까지 정확히 만 96년. 그나마도 조위 건국~손오 멸망까지는 꼴랑 60년이다.[44] 다만 뒤의 두 사례는 현대신화 창조의 의도로 만들어진 완전한 창작물인데 반해 《삼국지(연의)》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45] 토탈 워 삼국이 첫 유료 DLC로 팔왕의 난을 내놨을 때 중국을 비롯한 《삼국지》의 전통적 소비지역(=동아시아)에서 영 못마땅한 반응을 내놨던 것은 단순히 진(晉)나라 역사에 대한 생소함이나 거부감(특히 중국인들 입장에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물(캐릭터)을 소비하는 《삼국지》의 전통적인 향유 방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본편만 해도 유니크 무장이 너무 적다며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판국이다.[46] 당고의 금/십상시의 난/황건적의 난[47] 아시다시피.[48] 국력 자체는 오가 촉한보다 컸지만 적벽대전 당시 유비가 없었다면 지방군벌이자 토로장군이 불과했던 손권이 조조와 전쟁하러 호족들로부터 병력을 징발할 명분이 없었고, 적벽대전 없이 그대로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젊은 손권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역 자체는 꽤 넓었지만 호족에 대한 지배력이 낮았다.[49] 남경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육조시대 강남경제권의 시발점을 연 군주로 평가받는다.[50] 9품관인법은 이후 과거제로 대체될 때까지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장 조선시대에도 정1품, 정2품과 같은 9품은 남아있었고, 오늘날의 공무원 계급도 3급, 2급, 1급과 같이 숫자가 올라가면 높아진다는 것은 9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