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6 23:02:09

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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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
Second Spanish Armada
시기
1596년 10월 24일~11월 1일
장소
대서양 피니스테레곶
원인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에 보복하려는 펠리페 2세의 고집.
교전 세력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스페인 제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산타가데아 백작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디에고 브로체로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산초 마르티네스 데 레이바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카를로스 데 아레야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에식스 백작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노팅엄 백작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월터 롤리
병력
갤리온 24척, 무장상선 53척, 수송선 수십 척.
총합 126~140척, 병사 19,500명
갤리온 13척, 무장상선 74척, 병사 12,000명, 다양한 해안 방어 시설.
피해
갤리온 5척 침몰, 기타 선박 38척 침몰 또는 난파
5,000명 사망.
전무.
결과
폭풍으로 인한 스페인 대함대의 큰 손실.
영향
스페인 대함대의 3차 잉글랜드 원정 단행.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96년 10월 24일~11월 1일,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에 보복하려는 펠리페 2세의 명령으로 단행한 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 스페인 해역을 떠나기도 전에 폭풍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2. 배경

1588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이 대실패로 끝난 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해군을 재편했다. 그는 프랑스 서부 해안에 전진 기지를 건설한 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끊임없이 위협하고자 했다. 1589년 스페인 함대 재건을 막으려는 잉글랜드 대함대의 스페인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 스페인 해군은 무사히 재건되었다. 1593년, 스페인군은 브르타뉴의 블라베를 장악하고 그곳에 해군 기지를 건설한 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해안을 위협했다.

1596년 4월, 스페인 해군이 지리적으로 근접하여 잉글랜드 본토 침공을 쉽게 수행할 수 있는 칼레를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를 따르는 위그노로부터 접수했다. 이 일련의 성공에 고무된 펠리페 2세는 대규모 함대를 끌어모아서 잉글랜드를 침공해 전쟁을 끝내버리려 했다. 잉글랜드에서 스페인으로 망명한 예수회 사제 로버트 퍼슨스는 펠리페 2세에게 엘리자베스 1세가 예상하지 못할 때 잉글랜드를 공격해야 한다며 겨울에 해상 원정을 감행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1588년 스페인 함대의 잉글랜드 원정 실패는 적이 충분히 예상할 때 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봤다. 또한 적군이 알아채는 걸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규모의 함대를 동원하라고 권고했다.

여러 인사는 스코틀랜드 왕국, 켄트주, 밀포드 헤이븐, 와이트 섬을 상륙 거점으로 제안했지만, 왕의 인사 상당수는 잉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 현지 주민들의 대규모 반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아일랜드에 스페인군을 상륙한 뒤 그들과 연합하여 잉글랜드군을 쳐부수자고 제안했다. 아일랜드 반란군 지도자인 타이론 백작 휴 오닐과 휴 로 오도넬은 일찍이 펠리페 2세에게 가신이 될 테니 지원해달라고 호소했고, 펠리페 2세의 사촌인 오스트리아 대공 알베르트 7세를 아일랜드 대공으로 옹립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펠리페 2세는 측근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산타가데아 백작이자 해군 제독인 마르틴 데 파딜라에게 아일랜드로 진군할 함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리스본에서 대함대가 조직되었다. 카스티야에서 갤리온 15척이 리스본으로 이동했고, 포르투갈에서 온 갤리온 9척, 포획한 플랑드르와 독일 함선 53척, 피네스 6척, 카라벨 1척이 편입되었다. 여기에 병사 10,790명이 리스본에 이르렀고, 세비야에서 플리부트 30척에 2,500명이 탑승해 원정함대에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비고에서는 다양한 톤수의 함선 41척이 병사 6,000명과 함께 합류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선원 수는 5,500명이었고, 장비가 부족하고 열약한 보병 11,000명과 기병 3,000명으로 구성되었다. 마르틴 외에도 디에고 브로체로, 산초 마르티네스 데 라이바, 카를로스 데 아레아노가 각각 함대를 지휘했다.

스페인 대함대가 조직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임박한 스페인 해군의 침공을 훼방 놓기 위해 네덜란드 공화국과 힘을 합쳐 카디스에 정박한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1596년 6월 30일~7월 15일, 찰스 하워드가 지휘하는 잉글랜랜드-네덜란드 연합함대가 스페인 함대 집결지인 카디스를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하워드의 카디스 습격) 현대 학계에서는 스페인이 이때 입은 경제적 손실을 500만 두카트로 추산한다. 여기에 교회와 병원 외에도 주택 1,303채 중 290채가 불에 탔으며, 함선 32척이 침몰 또는 나포되었다. 이 사건에 격노한 펠리페 2세는 기필코 잉글랜드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하고, 원정을 곧바로 감행하라고 명령했다.

3. 경과

1596년 7월,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는 스파이와 상인들로부터 리스본에 적선 46척이 있으며, 비스케이 해안의 여러 곳에서 새로운 전함이 건조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여왕에게 보고했다. 잉글랜드 당국은 스페인 함대가 바다가 무척 사나워지는 겨울에는 이동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만일을 대비해 해군에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했고, 와이트 섬, 팔머스, 잉글랜드 함대가 정박해 있는 채텀의 메드워이 하구까지 방어하고자 증원군을 보냈다.

10월 초, 펠리페 2세는 연일 출격을 독촉했지만, 스페인 대함대는 아직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식량과 자금이 무척 부족했고, 병사들이 무리한 출전을 거부해 반란을 일으킬 낌새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펠리페 2세는 격노했고, 지체하지 말고 당장 출격하라고 강요했다. 산타가데아 백작은 지휘권을 박탈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펠리페 2세는 상황이 어렵다면 아일랜드 출진을 내년으로 미루는 걸 받아들일 테니, 라코루냐로 항해한 후 브레스트를 접수하여 아일랜드 반군을 도울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10월 24일, 아침 날씨가 호전되자, 산타가데아 백작은 함대를 이끌고 리스본 항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10월 25일에 라코루냐로 향했고, 비아나 두 카스텔루로 안전하게 항해한 후 정박한 채 순풍이 불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순풍이 불자, 스페인 대함대는 스페인 반도 북서쪽 끝인 피니스테레곶으로 가까이 갔다. 그러나 얼마 후, 예상치 못한 폭풍이 들이닥쳤다. 이 폭풍으로 수많은 배가 침몰 또는 난파되었다. 나머지는 간신히 폭풍을 해쳐 나가는 데 성공했지만, 편대 대열을 이탈하고 비스케이만의 여러 항구로 뿔뿔이 흩어졌다. 겨우 항구에 들어온 선박 다수도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되었다. 11월 1일까지 함대의 잔존 병력이 복귀했고, 산타가데아 백작은 이 비극적인 소식을 궁정에 알렸다.

이 무렵, 잉글랜드 궁정은 스페인 대함대가 출격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찰스 하워드 휘하 갤리온 13척 등 강력한 함대를 파견해 적을 물리치게 했다. 하워드는 적이 올 만한 해역에서 수색했지만, 떠다니는 잔해와 시체만 확인했다. 다만 스페인 플리부트 1척과 선원 200명이 나포되었고, 이를 통해 적 함대의 규모와 계획이 밝혀졌다. 이리하여 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4. 결과

스페인의 교황 사절이 1596년 11월 중순에 교황청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선박 30척이 실종되었고, 13척이 암초에 충돌했으며, 포르투갈 상류층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침몰한 선박 중 18척은 금수조치 된 선체로 대체할 수는 있었지만, 갤리온 5척이 침몰된 건 몹시 뼈아팠다. 그중 큰 손실은 900톤 갤리온 '산티아고' 호로, 군인과 선원 330명을 태웠지만 그중 23명만 살아남았다. 여기에 전염병마저 창궐하면서, 5천 명에 달하는 남성이 난파로 사망하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펠리페 2세는 처음에는 폭풍으로 손상 입은 함선들을 간단히 수리하면 다시 출격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재난의 규모가 분명하게 드러나자, 그는 마지못해 11월 13일에 원정을 취소했다. 카디스 습격에 이어 원정 실패까지 겹치자, 스페인 당국은 1597년 초 펠리페 2세가 재위한 이래 3번째로 파산을 선언하고 채권자들에게 빌린 돈 지급을 중단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펠리페 2세는 원정을 다시 밀어붙이고 싶었고, 이탈리아의 영지에서 더 많은 돈을 빌린 뒤 함대를 어렵게 꾸려 1597년 가을에 잉글랜드를 향한 해상 원정을 다시 단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폭풍에 직면해 막대한 손실을 보았고, 펠리페 2세는 끝내 잉글랜드를 굴복하지 못한 채 1598년에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