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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왕국 Regno di Sicilia Regnu di Sicilia | ||
국기 | 국장 | |
Animus Tuus Dominus 용기는 우리의 주이시니 | ||
1190년 시칠리아 왕국의 판도 | ||
{{{#FCDD09 1130년 ~ 1816년}}}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시칠리아 백국 | 양시칠리아 왕국 | |
아풀리아-칼라브리아 백국 | ||
위치 |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 |
수도 | 팔레르모(1130년~1266년) 나폴리(1266년~1282년) 카타니아(1282년~1401년) 팔레르모(1401년~1816년) | |
정치 체제 | 봉건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루지에로 2세(1130~1154)[1] 피디리쿠 1세(1198~1250) 카를루 1세(1266~1285) | |
언어 | 이탈리아어, 시칠리아어, 나폴리어, 라틴어 | |
민족 | 시칠리아인, 나폴리인, 노르만인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 |
현재 국가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언어별 명칭 | |
시칠리아어 | <colbgcolor=#fff>Regnu di Sicilia |
나폴리어 | Regno 'e Sicilia |
이탈리아어 | Regno di Sicilia |
라틴어 | Regnum Siciliae |
스페인어 | Reino de Sicilia |
프랑스어 | Royaume de Sicile |
카탈루냐어 | Regne de Sicília |
독일어 | Königreich Sizilien |
영어 | Kingdom of Sicily |
1. 개요2. 역사
2.1. 배경
3. 관직4. 종교적 관용5. 역대 군주6. 같이보기2.1.1. 중세 초기 이탈리아의 정세2.1.2. 무슬림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진출2.1.3. 동로마 제국의 역습2.1.4. 노르만족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정복2.1.5. 시칠리아 백국
2.2. 오트빌 왕조2.3. 호엔슈타우펜 왕조2.4. 카를루 1세의 압제와 시칠리아의 만종2.5. 바르셀로나 왕조2.6. 트라스타마라 왕조2.7. 합스부르크 왕조(스페인)(1516~1713)2.8. 사보이아 공국(1713~1720)과 합스부르크 제국(1720~1735)2.9. 보르본 왕조(스페인)(1735~1816)[clearfix]
1. 개요
12세기~19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존속했던 왕국이다. 노르만계의 오트빌 왕조, 독일계의 호엔슈타우펜 왕조, 프랑스계의 카페앙주 왕조를 거쳐 아라곤 왕국에 편입되었다.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이 모두 거쳐간 시칠리아 위에 세워진 국가로서 다양성이 두드러진 문화가 특징이었다.2. 역사
역대 국기1130년 ~ 1258년(오트빌 왕조) |
1258년 ~ 1266년(호엔슈타우펜 왕조) |
1266년 ~ 1282년(앙주 왕조) |
1282년 ~ 1296년(바르셀로나 왕조) |
1296년 ~ 1816년 |
2.1. 배경
2.1.1. 중세 초기 이탈리아의 정세
7세기 초반 이탈리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는 오도아케르의 지배를 받다가 테오도리크 대왕이 오도아케르를 제압한 뒤 동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을 받든 벨리사리우스의 침공으로 발발한 고트 전쟁이 553년 환관 장군 나르세스가 토틸라를 꺾고 동고트족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이탈리아 전역은 동로마 제국에 수복되었다.
그러나 18년간 이어진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황폐화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바닥을 드러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이탈리아인들에게 과중한 과세를 매기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게다가 사산 왕조와 아바르족의 침략으로 정신없던 터라 이탈리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568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착취에 이골이 난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현지에 주둔한 동로마군 역시 수적인 열세와 사기 저하, 통합된 지휘관 부재, 본국의 지원 미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결과, 랑고바르드족은 파비아를 3년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킨 것을 제외하고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이탈리아 북부를 순조롭게 공략했다.
알보인은 토스카나에 거점을 삼고 36개의 공국을 점령지 곳곳에 신설했다. 공작들은 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전시에 왕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합류할 의무를 준수하는 한 자기 영지에서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알보인의 휘하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다만 랑고바르드족은 공성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로마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라벤나,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는 랑고바르드 족이 세운 랑고바르드 왕국, 라벤나 총독부로 대표되는 동로마 제국의 잔여 세력, 교황이 근근히 버티는 로마로 나뉘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이탈리아 내 동로마 세력을 압박해 6~7세기 동안 카푸아, 살레르노, 크로토네 등의 도시를 공략했다. 663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친정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 했지만 격퇴되었고,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과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압박, 성상 파괴 운동 등으로 인한 국내 혼란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이탈리아에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못했다.
8세기 중반 이탈리아
결국 751년 라벤나 총독부가 아이스툴프 왕이 이끄는 랑고바르드군에 함락되면서, 그 때까지 동로마 제국에 기대고 있던 교황은 더 이상 제국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아이스툴프가 여세를 몰아 로마 시 인근 요새들을 공략하며 강하게 압박해오자, 교황 스테파노 2세는 754년 1월 6일 프랑크 왕국으로 찾아가서 피핀 3세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일전에 교황이 메로빙거 왕조를 밀어내고 자신이 프랑크 왕이 되는 걸 용인해준 적이 있는 데다 교황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가신이 되는 걸 막고 싶었기에, 피핀 3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기로 했다.
755년 봄, 피핀 3세는 알프스 산맥으로 진입해 수사 계곡 요새에서 랑고바르드군을 상대로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아이스툴프는 파비아로 도망쳤지만 프랑크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어진 평화 협상 끝에, 755년 6월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이스툴프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인질을 넘기며, 자신이 빼앗았던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피핀 3세가 철수한 후, 그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756년 1월부터 3월까지 로마 공방전을 전개했다. 알프스 산맥을 겨울에 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프랑크군이 산맥을 넘지 못하는 사이에 로마 시를 함락시켜서 모든 걸 끝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의지하며 끝까지 저항한 수비대와 시민들 때문에 함락되지 않았고, 아이스툴프는 4월 초 포위를 풀고 파비아로 돌아갔다. 한편 피핀 3세는 아이스툴프가 약속을 어겼다는 소식을 듣고 4월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아이스툴프를 또다시 격파하고 파비아에서 포위 공격했다. 아이스툴프는 결국 756년 6월 항복하고 훨씬 가혹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번에는 일전에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이 아니라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로 돌아가야 하고, 더 많은 인질을 프랑크 왕국에 보내야 했으며, 상당한 배상금을 프랑크 왕국에 지불해야 했다.
피핀은 랑고바르드 왕국을 물리친 뒤 그들로부터 탈취한 영토를 교황청에 기증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를 가운데에서 가로지르는 교황령이 탄생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마지막 국왕 데시데리우스는 친 프랑크 성향을 보이는 교황 하드리아노 1세와 갈등을 벌이다 772년 말 로마 인근의 여러 마을을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 공격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를 파문하고 프랑크 국왕 카롤루스 대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774년,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군이 남하하여 교황령을 회복시키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 파비아를 함락시키고 데시데리우스를 생포했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킨 프랑크 왕국은 여세를 몰아 남부 이탈리아로 남하하여 스폴레토 공국을 속국으로 삼았다. 베네벤토 공국은 이에 맞서 항전하며 랑고바르드 왕국의 후예를 자처했으나, 786년 교황령을 공격했다가 교황의 구원 요청을 받은 카롤루스 대제가 787년 베네벤토까지 쳐들어오자 결국 굴복하여 스폴레토 공국과 함께 프랑크 왕국의 봉신이 되었다.
788년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아델치스를 앞세운 동로마 군이 베네벤토 공국을 공격했지만 프랑크-롬바르드 연합군에게 격퇴되었다. 하지만 베네벤토 공국은 프랑크 왕국과 거리가 멀다는 이점을 살려 수시로 반기를 들었고, 카롤루스 대제는 이들을 상대로 791년, 792 ~ 793년, 800년, 801년 원정을 잇따라 단행했지만 결국 그들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다. 한편, 800년 성탄절에 서로마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른 카롤루스 대제는 802년에는 동•서로마의 제위를 합치고자 동로마 여제 이리니에게 청혼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측에서 거부하자 805년 ~ 807년, 810년 ~ 812년에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양 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동로마가 카롤루스를 '프랑크인의 황제'로 인정하며 일단락되었다.
베네벤토 공국에서 떨어져 나온 살레르노 공국
814년에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후 프랑크 제국의 입김은 약해졌고, 베네벤토 공국은 지카르드(832년 ~ 841년)의 지휘하에 838년에 일시적으로나마 아말피를 점령하고 나폴리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지카르드가 암살당한 후 10여년간 내전이 일어났고, 지카르드의 동생인 지코눌프가 살레르노 공국을 수립하며 독립했다.
2.1.2. 무슬림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진출
한편, 시칠리아는 652년과 669년에 이집트에서 출진한 무슬림 해군의 공격을 받았다.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7세기 말엽부터 시칠리아에 테마를 설치하고 군사 총독이 섬의 방위를 책임졌다. 무슬림의 마그레브 정복 전쟁으로 북아프리카가 무슬림의 수중에 넘어간 후, 무슬림 함대는 703년, 728년, 729년, 730년, 731년, 733년, 734년에 걸쳐 시칠리아를 습격했다. 740년에는 아프리카 총독 하빕에 의해 시라쿠사가 함락되었지만, 베르베르 대항거로 마그레브가 혼란에 빠지자 곧 철수했다.827년,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던 아글라브 왕조가 시칠리아에서 동로마 제국에 반기를 든 에우페미오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시칠리아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벌어진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은 무슬림 세력이 이제까지 벌인 정복 전쟁과는 달리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시칠리아 만큼은 절대로 내줄 수 없다고 여긴 동로마 당국의 적극적인 원조와 현지 주민들의 항전 의지, 전염병 창궐, 아랍인과 베르베르인간의 내분 등 여러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글라브 왕조는 지지부진한 전쟁에도 물러서지 않고 지하드를 명분삼아 전쟁을 지속한 반면, 동로마 제국은 멀리 떨어진 시칠리아에 지원을 계속하기엔 불가리아와 아바스 왕조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기에 불가능했다. 결국 902년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타오르미나 요새가 함락되고 남은 기독교 요새들이 복속되면서 시칠리아 전역이 무슬림의 영토가 되었다.무슬림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시칠리아 토후국을 세우고 지중해 해안 지역들을 지속적으로 약탈하고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러면서도 지중해 해상 무역을 주관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고, 이를 발판삼아 이슬람 문화를 시칠리아에서 꽃피웠다.
무슬림들은 시칠리아를 지속적으로 공략하는 한편 이탈리아 본토에 손을 뻗었다. 840년 말 또는 841년 초 남부 이탈리아의 해안 도시 바리를 일시적으로 공략했고, 847년 아글라브 왕조의 모울라(노예 출신 관료)였던 칼푼이 바리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탈취하여 바리 토후국을 세웠다. 바리 토후국은 영역을 빠르게 확장하며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계 공국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871년 이탈리아 왕 루도비코 2세가 이끄는 프랑크-독일-랑고바르드 연합군과 동로마 함대의 수륙 협공에 의해 바리가 함락되면서 몰락했다.
2.1.3. 동로마 제국의 역습
9세기 동로마 제국의 남부 이탈리아 재정복.
서기 1000년경의 남부 이탈리아
867년 황위에 오른 바실리오스 1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868년 함대를 파견해 달마티아에 대한 패권을 재확립했으며, 아풀리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아랍 세력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였다. 885년 이탈리아 남부 전선으로 파견된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타란토, 바리, 산타 세베리나, 레기온, 타오르미나, 트로파이 등 여러 도시를 탈환하고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이탈리아 남부로 이주시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회복했다.
885년 바리에 동로마 총독부가 설치된 뒤, 동로마 제국은 남부 이탈리아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특히 10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의 국력이 신장하면서,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제국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남부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계 귀족들은 막대한 공물을 제국에 바쳐야 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1015년경, 40명 가량의 노르만족 순례자들이 아풀리아 북부 몬테 가르가노에 있는 대천사 미카엘의 동굴 수도원을 순례했다. 이때 바리의 랑고바르드 귀족 멜루스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멜루스는 1009년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1010년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에게 패배해 바리를 상실한 뒤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은거했다가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던 교황 베네딕토 8세의 도움으로 가릴리아노 요새에 자리잡았다.
멜루스는 노르만 순례자들의 지도자 라눌프 드렝고(Rainulf Drengot)에게 자신이 바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며 풍부한 전리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1017년, 라눌프와 노르만 용병대는 카푸아에서 멜루스 휘하의 랑고바르드군과 합세한 뒤 아풀리아로 진격했다. 이후 1018년 10월까지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하며 동로마 제국을 남이탈리아에서 축출하는 듯했다.
1018년 10월, 바실리오스 2세로부터 바랑인 친위대와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은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보이안네스는 군대를 일으켜 그 옛날의 포에니 전쟁의 주요 전투와 같은 장소의 칸나이에서 랑고바르드-노르만 연합군과 맞붙었다. 결과는 동로마군의 압승이었고, 멜루스는 아내와 아들 아르이로스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병력, 세력 기반을 모조리 빼앗기고 독일로 망명했다. 하지만 바실리오스 보이안네스는 노르만족의 용맹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들에게 높은 급료를 주고 북쪽의 신성 로마 제국과 남쪽의 시칠리아 토후국의 침략으로부터 변경 요새를 사수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 후 라눌프 드렝고는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귀족들, 교황령,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에 잇따라 고용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고, 1030년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로부터 아베르사(Aversa)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으면서 남이탈리아에 정착했다. 노르망디 공국에서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지 못해 곤궁하게 살아가던 노르만 전사들은 라눌프의 성공담을 전해듣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남이탈리아로 대거 이동했다. 이리하여 훗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제패한 시칠리아 왕국을 건국하게 될 노르만인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1.4. 노르만족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정복
1084년 로베르 기스카르와 루지에로 1세의 활약으로 남부 이탈리아 전역과 시칠리아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은 노르만족.
1058년 ~ 1090년 노르만족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정복.
노르만인들은 남부 이탈리아에 집단 이주한 뒤 교황, 랑고바르드 귀족, 동로마 제국을 오가며 용병 활동을 하고, 영주들로부터 영지를 수여받으면서 차츰 영향력을 키웠다. 이들 중에서 오트빌 가문이 두각을 드러냈다. 오트빌 가문의 가주 탕크레드는 노르망디의 코탕탱 반도를 영지로 삼고 있었으며, 2명의 아내로부터 1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자식들에게 영지를 나눠주기에는 토지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식들은 활로를 찾고자 남이탈리아로 대거 이주했다. 장남 강철팔 기욤(William Iron arm)은 1042년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백작위를 확보했고, 뒤를 이은 차남 드로고(Drogo)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백작 작위의 정당성과 계승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노르만족은 남부 이탈리아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현지 이탈리아인을 심하게 핍박했다. 많은 교회가 약탈당하고 많은 수도자가 살해당하고 수녀는 강간당했으며, 노르만군이 들이닥친 마을 중 무사했던 곳은 별로 없었다. 이에 현지민들은 노르만족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고, 기존에 남이탈리아를 다스렸던 랑고바르드 귀족들과 동로마 제국 역시 위협을 느꼈다. 1053년 교황 레오 9세를 중심으로 뭉친 랑고바르드족-로트링겐 공국-스와비아 연합군이 노르만족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축출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아르이로스 역시 이에 호응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교황이 이끈 연합군은 치비타테 전투에서 노르만족에게 완패했고, 레오 9세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가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의 종주권을 갖는 것을 인정한 후에야 겨우 풀려났다. 아르이로스는 북상하던 중 교황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철수했다.
그 후 노르만족은 아풀리아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의 지휘하에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섰다. 1057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칼라브리아의 동로마 제국령인 카리아티 시를 포위 공격해 수 개월만에 함락시켰다. 뒤이어 교황 니콜라오 2세와 밀약을 맺었다.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압력으로부터 교황령을 지켜주는 대신, 교황은 그를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공작으로 봉한다는 것이었다.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 속했고 시칠리아는 시칠리아 토후국 수중에 있었다. 즉, 그는 교황으로부터 이 지역을 자기 것으로 삼을 권리를 인정받은 것이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동생 루지에로 1세와 함께 수십년 동안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귀족들의 저항을 분쇄하며 남부 이탈리아를 지속적으로 공략한 끝에 1071년 4월 이탈리아 총독부가 있던 바리를 공략하면서 동로마 제국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축출했다. 또한 내부분열에 휘말린 시칠리아 토후국을 침략해 꾸준한 공세를 거듭한 끝에 시칠리아 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로마 제국마저 손에 넣고자 1081년부터 1085년까지 발칸 원정을 단행했지만,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병사했다.
로베르 기스카르 사후, 로베르와 시켈가이타의 아들인 루지에로 보르사가 아풀리아 공국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배다른 형인 보에몽 1세가 이에 반감을 품고 내전을 일으켰다. 루지에로 1세는 두 조카의 전쟁을 지켜보다가 1085년 9월 루지에로 보르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기스카르와 공동으로 소유했던 모든 칼라브리아 성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보에몽과 루지에로 보르사 간의 갈등을 중재해 보에몽이 루지에로 보르사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타란토, 올리아, 오트란토 등 솔렌티나 반도를 다스리는 '타란토 공국'의 공작이 되게 했다. 이후 루지에로 1세는 여전히 남아있던 시칠리아 토후국을 마저 공격해 1090년 시칠리아 전역을 공략했다. 이리하여 노르만족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노르만 족의 정복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과 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참조.
2.1.5. 시칠리아 백국
루지에로 1세는 1071년 시칠리아 토후국의 중심지인 팔레르모를 공략한 뒤 시칠리아 백국의 백작을 자처했다. 그는 서유럽 기사와 라틴 성직자들을 시칠리아에 이주하도록 권장하면서도 대다수 인구가 무슬림과 그리스인이고 노르만족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한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시칠리아를 자신의 통치하에 유지하기 위해 국가적 및 종교적 관용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아랍어, 그리스어 및 라틴어는 공용어로 쓰였고, 기존의 법률은 효력을 유지했다. 자신에게 복종한 에미르와 콰이드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영지를 수여받았으며, 무슬림 병사들은 루지에로의 군대에 소속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다. 루지에로와 그의 후계자들의 지도하에, 무슬림들은 시칠리아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세금 및 관세 징수 역시 무슬림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루지에로는 다섯 개의 새로운 가톨릭 교구를 시칠리아에 세웠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시칠리아 무슬림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다. 본래 교회였다가 모스크로 개조된 건물들은 교회로 복원되었지만, 새로 지어진 모스크들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스인들 역시 정교회를 그대로 믿을 수 있었다. 루지에로는 발데모네 일대에 12개 이상의 정교회 수도원을 건설하는 것을 후원했다. 이러한 조치에 만족한 아랍인과 그리스인들은 노르만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전란으로 쇠락했던 시칠리아는 빠르게 회복했다.
시칠리아 아랍인과 그리스인들은 프리드리히 2세 시대까지 국정에 상당한 영향력과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한편,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정복에 기여한 노르만 귀족들에게 영지를 골고루 나눠주면서도, 그들이 대규모 영지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감독했다. 여기에 자신의 가신들이 또다른 가신을 두는 것을 엄격히 금지해, 내분의 여지를 없애려 노력했다. 그 결과, 가신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던 형 로베르와는 달리, 그는 가신들의 대규모 반란에 시달리지 않았다.
1011년 6월 22일 루지에로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시모네가 시칠리아 백작에 올랐다. 그러나 4년 후인 1105년 칼라브리아의 밀레토에서 사망했고, 동생 루지에로 2세가 신임 백작에 취임했으며 어머니 아델라시아 델 바스토의 섭정을 받았다. 1112년 시칠리아의 수도가 밀레토에서 팔레르모로 이전했을 때 왕실 일가와 함께 팔레르모로 이동했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기사라고 칭하며 본격적으로 통치를 시작했다.
1122년 아풀리아 공작이자 사촌인 굴리에모 2세가 민심의 이반과 재정 악화로 인해 곤란을 겪자, 루지에로 2세는 병력과 자금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아풀리아 공국과 시칠리아 백국의 공동 소유로 되어있던 팔레르모와 메시나를 시칠리아 백국이 완전 소유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칼라브리아 일대를 온전히 차지하는 것을 용인하게 했다. 1125년에 굴리에모 2세가 재정 지원을 재차 요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당시 자녀가 없던 굴리에모 2세의 상속인으로 인정받았다.
1127년 7월 25일 굴리에모 2세가 사망하자, 그는 곧바로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그런데 굴리에모 2세는 죽기 전에 다른 사촌인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2세와 교황 호노리오 2세에게 아풀리아 공국의 상속권을 약속했다. 보에몽 2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아랍인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기에 아풀리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지만, 교황 호노리오 2세는 루지에로가 기예르모의 영지를 상속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풀리아 귀족들에게 교황의 종주권을 인정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루지에로는 자신이 아풀리아 영지를 상속받는 것을 기정사실로 삼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아풀리아의 수도인 살레르노 성벽에 이르렀다. 살레르노는 처음에 그를 공작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지만, 루지에로가 자유시로 인정해주고 세금 특혜를 약속하는 등 여러 조건을 내걸자 비로소 받아들였다. 여기에 이복 누이 마틸다의 남편이자 알리페 남작인 라눌프 2세에게 아리아노 백작의 영토 일부를 가지게 해 자기 편으로 회유했다. 다른 대도시 및 남작들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회유되었고, 루지에로 2세는 1127년 말에서 1128년 초에 아풀리아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루지에로가 시칠리아로 돌아간 뒤, 호노리오 2세는 트로이아 시, 알리페의 라눌프 2세,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 및 여러 영주들을 포섭하여 반 시칠리아 동맹을 맺은 뒤 루지에로를 파문했다. 1128년 5월, 루지에로는 남부 이탈리아로 재차 진군해 아풀리아에 도착한 뒤 그해 7월 교황군과 브라다노에서 대치했다. 그는 교황과 섣불리 전투를 벌이는 대신 협상을 택했고, 양측은 2개월간 대치하며 사절을 교환했다. 호노리오 2세는 처음에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지만, 교황을 따르던 영주들이 점차 서로 다투었고 용병들도 전쟁을 지속하기를 거부하자, 마음을 바꿔 협상에 응했다.
1128년 8월 22일, 교황은 베네벤토에서 루지에로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인정했다. 루지에로는 교황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베네벤토가 교황에게 속해 있으며 카푸아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1129년, 루지에로는 여전히 자신에게 반항하는 남작들을 성공적으로 복종시켰다. 라눌프 2세가 트로이아를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충성 서약을 받아냈고, 로베르토 2세를 자신의 가신으로 인정했다. 1129년, 멜피에 아풀리아의 고위 성직자들과 남작들을 집결시킨 뒤 자신과 아들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1130년 2월 14일, 호노리오 2세가 선종했다. 그 후 교황청은 2명의 교황 인노첸시오 2세, 아나클레토 2세로 분열되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아나클레토 2세를 추종하는 세력에 밀려 로마를 떠나야 했지만, 대부분의 유럽 군주가 그를 지지했다. 로마를 통제했지만 외부 세력으로부터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한 아나클레토 2세는 루지에로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아나클레토 2세에게 자신을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대관식을 치러준다면 교황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1130년 9월 27일, 아나클레토 2세는 루지에로 2세와 그의 후손에게 시칠리아, 아풀리아, 칼라브리아에 대한 왕권을 인정하겠다고 선포했고, 루지에로 2세는 살레르노에서 열린 남부 이탈리아 남작들의 대규모 회의에서 자신을 왕으로 받들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1130년 12월 25일, 아나클레토 2세의 사절인 코스마스 추기경은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루지에로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 카푸아의 로베르토 추기경은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2. 오트빌 왕조
2.2.1. 루지에로 2세
1130년 건국 당시의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
아프리카 왕국과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1154년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
루지에로 2세의 시칠리아 국왕 등극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노르만 남작들과 남부 이탈리아 자유 도시들은 강력한 군주가 등장해 자신들을 통제하는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남부 이탈리아를 자신들의 영토로 여기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와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2세 역시 그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던 유럽 국왕들은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로부터 왕관을 받은 새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1131년, 콘베르사노의 탕크레드와 바리의 그리말디가 루지에로에게 반란을 일으켜 브린디시를 공략했다. 여기에 라눌프 2세의 형제인 아벨리노 백작 리카르도도 독립을 선포했다. 1132년 3월, 루지에로는 다시 이탈리아로 출진해 2달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아벨리노는 왕실 직할지로 들어갔고, 왕실 수비대는 바리에 주둔했다. 그리말디와 그의 가족은 포로로 잡혀 시칠리아에 보내졌고, 탕크레드는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반란이 벌어지는 동안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왕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던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와 알리페의 라눌프 2세는 아나클레토 2세를 지원하라는 명을 받고 로마에 파견되었다.
1132년 5월, 루지에로는 또다시 반란에 직면했다. 라눌프 2세의 아내이자 루지에로의 이복 누이인 마틸다가 시칠리아로 도망쳐서 남편이 자신을 심하게 학대하고 있으니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을 접한 라눌프 2세는 로마를 떠나 알리페로 귀환한 뒤 아내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요청이 거부당하자, 라눌프 2세는 역시 카푸아로 돌아온 로베르토 2세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다. 루지에로는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했지만, 도중에 베네벤토 시가 반군 편에 서는 바람에 보급로가 끊기자 카푸아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도시인 노세라로 후퇴했다. 1132년 7월 24일, 반란군은 루지에로의 시칠리아군을 대파했고, 루지에로는 4명의 군인과 함께 전장에서 탈출했다. 루지에로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시칠리아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풀리아 전역이 반란에 가담했다.
한편, 로타르 3세는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에 올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다. 1133년 4월 30일, 로타르 3세와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에 도착한 뒤 아나클레토 2세가 농성하고 있는 산탄젤로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산탄젤로 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입성하려던 계획 역시 아나클레토 2세의 추종자들이 결사적으로 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로타르 3세는 1133년 6월 4일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교회에서 인노첸시오 2세로부터 황제의 제관을 씌워졌지만, 식량과 자금이 바닥나서 원정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자 독일로 철수했다. 인노첸시오 2세 역시 황제를 따라 피사로 도주했다.
황제가 로마에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무슬림으로 구성된 새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탈리아 본토로 진군했다. 그는 반역을 일으킨 도시들을 파괴하고 여러 남작을 처형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남작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1134년 아풀리아 지배권을 회복한 루지에로는 피사로 도망친 로베르트 2세가 소유하던 카푸아를 왕실의 소유로 삼았다. 라눌프 2세와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용서를 받았다. 루지에로는 자신의 권력이 불가침임을 현지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세 아들 루지에로 3세, 탕크레드, 그리고 알폰소를 각각 아풀리아, 바리, 카푸아 공작에 선임했다.
1135년 초, 루지에로는 중병에 걸렸다. 급기야 그가 사망했다는 헛소문이 남부 이탈리아에 확산되자, 또다시 반란의 조짐이 일었다. 1135년 4월,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는 피사 함대와 함께 나폴리에 도착했고,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로베르토와 손을 잡았다. 알리페의 라눌프 2세 역시 로베르토 2세와 연합해 시칠리아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카푸아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루지에로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을 가하자, 로베르토와 세르지오는 나폴리로 후퇴했고, 라눌프는 아베르사에서 시칠리아군을 막으려 했지만 패배를 변치 못하자 역시 나폴리로 철수했다.
루지에로는 아베르사를 파괴한 뒤 육상과 바다에서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다. 반군은 교황 이노첸시오 2세와 황제 로타르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137년 2월, 로타르 3세는 군대를 이끌고 볼로냐에 입성한 뒤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황제 본인은 인노첸시오 2세와함게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남하했고, 사위인 하인리히는 토스카나와 교황령을 거쳐 나폴리로 진군한 뒤 바리에서 로타르 3세와 합세하기로 했다. 로타르 3세는 신속하게 진군했고, 하인리히는 로마를 해방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베네벤토와 몬테 카시노를 복속시켰다.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루지에로는 시칠리아로 철수했고, 카푸아의 로베르토는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카푸아를 탈환한 뒤 피사 함대와 함께 살레르노를 포위했다. 1137년 5월, 로타르 3세와 하인리히의 군대가 바리에서 합세한 뒤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 가신들이 귀국을 강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가지 못했고, 1137년 8월 라눌프 2세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승격시킨 뒤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
제국군이 이탈리아를 떠난 후, 전력을 재정비한 루지에로 2세는 1137년 10월 반격에 착수했다. 카푸아는 시칠리아군에 재차 넘어갔고, 로베르토는 다시 도주했다.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루지에로에게 또다시 충성을 서약한 뒤 리그나노에서 반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루지에로는 나폴리를 왕실 직할지로 삼고 군대를 주둔시켜서 그곳을 확고히 통제했다. 이제 남은 상대는 알리페의 라눌프 2세였다. 1137년 10월 30일, 루지에로는 리기아노에서 라눌프 2세와 맞붙어 패배했지만, 남작들의 충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137년 12월 4일, 루지에로를 계속 훼방놓던 로타르 3세가 사망했다. 그리고 1138년 1월 25일에는 아나클레토 2세가 사망했고 인노첸시오 2세가 단독 교황이 되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에 입성한 뒤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루지에로 2세와 그의 아들들을 파문했다. 1139년 4월 30일 라눌프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리하여 루지에로 2세를 대항할 유력한 귀족은 아무도 없게 되었고, 루지에로 2세의 권위는 트로이아와 바리를 제외한 남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인정받았다.
루지에로 2세는 자신을 파문에 처한 교황을 응징하고자 로마로 진군했다. 1139년 7월 22일, 교황군은 갈루치오 전투에서 시칠리아군에게 패배했고 인노첸시오 2세는 포로로 잡혔다. 1139년 7월 25일, 인노첸시오 2세는 루지에로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했고, 그의 장남 루지에로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삼남 알폰소를 카푸아 공작으로 인정했다. 그 대신,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교황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교황청과 화해한 루지에로 2세는 마지막까지 저항을 이어가는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먼저 트로이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항복을 받아낸 뒤 그곳에 묻혀 있던 라눌프 2세의 유해를 끌어낸 뒤 도랑에 던졌다. 하지만 장남 루지에로가 "기독교도로서 망자에게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간절히 설득하자, 그는 마음을 바꿔 라눌프 2세의 유해를 재매장했다. 이후 바리를 공략하고 바리 공작과 고문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많은 주민들을 실명시킨 뒤 지하 감옥에 수감했다. 이로써 카푸아, 나폴리, 바리 등 그동안 자체적으로 통치를 행사하던 공국들은 청산되었고, 대부분의 도시는 자치권을 상실했으며,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를 넘어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직접적으로 통치했다.
루지에로는 아버지 루지에로 1세의 종교 관용 정책을 그대로 이행했다.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교는 그의 왕국에서 동일한 권리를 누렸다. 루지에로는 라틴 수도원과 그리스 수도원을 동등하게 후원했으며, 정교회 신자들은 공식적으로는 라틴 수도자들에게 복종하면서도 정교회 방식의 의식을 고수할 수 있었다. 무슬림들 역시 모스크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기독교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국가 행정 직책을 맡았으며, 시칠리아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서 활약했다. 특히 무역 관세와 세금 징수는 무슬림 관료들이 전문적으로 맡았다. 형사 재판은 각지를 순회하는 재판관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기독교인과 무슬림을 포함한 지역 주민 중에서 배심원을 뽑아서 판결을 심의했다.
루지에로는 무슬림과 그리스인들의 전통적인 토지 소유권을 인정했다. 그 결과, 시칠리아 왕국은 다양한 형태의 토지 보유와 불완전한 봉건제의 특성을 지녔다. 노르만 기사들은 영주로 군림하기는 했지만 종종 농노를 거느리는 대신 자유민들에게 토지를 임대하는 형태를 띄었다. 왕 역시 왕권이 제약을 받을 게 뻔한 봉건제의 형성을 막는 정책을 추구했다. 영주가 기사에게 토지를 양도하려면 왕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했는데, 오직 왕에 대한 충성과 충돌하지 않는 경우에만 허락받았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시칠리아 기사들은 왕에게 직접 의존해야 했고, 대귀족이 대규모 사병을 거느릴 기회가 박탈되었다. 루지에로는 이에 더해 이웃 지중해 국가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상당한 함대를 건설하고 유지 및 관리했다.
1140년 7월, 루지에로는 소위 <아리아노 법령(Assizes of Ariano)>으로 일컬어지는 법전을 반포했다. 이 법전은 당시 시칠리아 왕국에 종속된 모든 민족의 고유 법전의 효력을 왕실 법령과 상충하지 않는 선에서 인정했다. 또한 신성한 권위를 지닌 왕만이 법을 만들고 폐지하고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으며, 왕의 뜻을 따르지 않거나 반대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자 반역으로 간주했다. 왕족에 대한 범죄와 음모는 반역일 뿐만 아니라 왕국의 모든 민족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었다. 전투에서의 비겁함, 왕이나 그의 동맹의 군대 지원 거부 역시 반역으로 취급되었다. 당시에 반역죄를 이 정도로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나라는 오직 시칠리아 왕국 뿐이었다.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그의 치세에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과의 활발한 무역 거래를 수행했다. 주요 수출 품목은 듀럼밀이었고, 치즈와 덩굴 과일 등 식용품들도 수출되었다. 시칠리아 상인들은 강력한 해군과 왕의 후원에 힘입어 지중해 전역을 돌며 무역을 수행했고, 자연히 국내 시장과 산업 역시 갈수록 발전했다. 루지에로는 왕국에서만 쓰이는 동전인 두칼레(ducale)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 동전에서, 왕은 'REX' 칭호로 일컬어졌다. 이 새로운 동전은 장거리 무역을 더 쉽게 만들었지만, 자신들을 짓밟은 루지에로에게 반감을 품은 이탈리아인들이 그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내 무역에는 잘 쓰이지 않다가 1150년대 이후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인과 아랍인 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루지에로는 동시대의 유럽 군주들과 많은 면에서 달랐다. 그는 아랍어와 그리스를 훌륭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아랍과 유럽 세계의 많은 철학자, 수학자, 지리학자, 의사를 팔레르모로 초빙해 시간이 남을 때마다 그들과 담화를 나누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루지에로의 절친한 친구였고 루지에로의 요청에 따라 지리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화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던 알 이드리시였다. 이드리시는 위원회 활동을 통해 대항해 시대 이전 주요 지리서로 취급된 <루지에로의 책>을 발간했다. 그는 루지에로 2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수학 및 정치 영역에 대한 그의 지식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했다. 과학에 대한 그의 지식 역시 무궁무진했으며, 모든 세부 사항을 깊이있고 현명하게 연구했다. 그는 어떤 주권자도 이전에 만든 적이 없는 놀라운 발견을 이뤘고, 놀라운 발명품을 소유했다."
루지에로 2세 치하에서, 시칠리아는 그리스어와 아랍어로 이뤄진 과학과 철학 연구가 동시에 수행되는 독특한 장소로 각광받았다. 또한 그는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시대에 세파루 대성당이 건설되었고, 로마네스크와 그리스 모자이크, 아랍식 예술이 혼합된 산 조반니 델리 에레미티(San Giovanni degli Eremiti) 수도원과 팔레르모의 팔라티노 예배당도 세워졌다. 그의 대관식이 거행된 마르토라나 교회는 루지에로 2세의 수석 장관이자 시리아 정교회 수사였던 안티오키아의 게오르기오스의 후원으로 건설되었다. 이 교회의 모자이크에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왕관을 전달받는 장면이 그려졌다.
루지에로 2세의 어머니 아델라시아 델 바스토는 1112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1세와 결혼했다. 이때 맺은 협약에 따르면, 이전의 결혼에서 자녀를 얻지 못한 보두앵 1세가 아델라시아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끝내 얻지 못한다면 루지에로가 예루살렘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보두앵이 이전에 맺었던 결혼을 끝맺지 않고 아들라시아와 결혼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은 1117년 무효화되었다. 아델라시아는 불명예를 안은 채 시칠리아로 돌아갔고, 지참금은 반환되지 않았다. 보두앵 1세가 사망한 후,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2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어머니가 받은 모욕에 반감을 품고 예루살렘 왕국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1130년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리던 보에몽 2세가 사망하고 어린 딸 콩스탕스가 여공(女公)이 되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 자신이 보에몽 2세의 가까운 친척이니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릴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1135년 푸아티에의 레몽이 콩스탕스와 결혼하고자 이탈리아를 거쳐 동방으로 향하자, 그를 중도에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138년에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향하던 라틴 총대주교를 억류하기도 했다. 안티오키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의 태도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주권자를 자처하던 동로마 황제의 반감을 샀고, 가뜩이나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이래 서로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던 동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1145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에 가담했다. 이때 루지에로는 십자군을 이용해 동로마 제국을 공략하기로 하고, 프랑스 십자군들을 팔레스타인까지 수송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랑스 조정은 반 동로마 세력이 강했고 루이 7세에게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지만, 루이 7세는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걸었던 육로를 선호해 루지에로의 제안을 거절했다.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는 1147년 6월 11일 프랑스를 떠나 10월 4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부관들이 루지에로의 제안을 이제라도 받아들여 동로마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지만 루이 7세는 기독교 제국을 공격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다.
1147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십자군이 발칸 반도를 통과하는 동안 벌어질 부작용을 최소화하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제국군을 대거 동원해 십자군이 지나가는 경로 주변에 배치시켜서 십자군을 통제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드리아 해 방위가 상대적으로 허술해지자, 루지에로는 이 기회를 틈타 코르푸를 기습 공략하고 이어서 테베와 코린트를 약탈했다. 하필이면 쿠만족이 다뉴브 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걸 막아야 했기도 했기에, 마누일 1세는 시칠리아군의 공격에 곧바로 대처할 수 없었다. 한편, 루지에로는 북아프리아 해안의 트리폴리, 가베스, 마디아, 수스, 스팍스 등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이로써 시칠리아 함대는 지중해 중부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아프리카 내륙으로의 무역로가 이 도시들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아프리카 무역로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겼다.
1149년, 마누일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어 코르푸를 탈환했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을 응징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여기에 마누일 1세의 환대를 받고 동로마 제국에 긍정적인 입장이 된 데다 남부 이탈리아를 공략하고 싶었던 콘라트 3세가 마누일과 손을 잡았고, 에우제니오 3세도 반 시칠리아 정책을 추구했다. 1152년 콘라트 3세가 죽은 뒤 신성 로마 제국이 한동안 프리드리히 1세와 하인리히 사자공의 대립으로 인해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당분간 그들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마누일 1세는 대규모 함대와 병력을 디라히온에 집결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가시화되던 1154년 2월 26일, 루지에로 2세는 팔레르모에서 병사했다.
2.2.2. 굴리에모 1세
루지에로 2세는 나라를 현명하게 이끌었지만 후계자 준비를 소홀히 하는 실책을 범했다. 그는 장남 루지에로(아풀리아 공작), 차남 탕크레드(바리 공작), 사남 알폰소(카푸아 공작)[2] 중 한 사람을 후계자로 세우면 되니 앞날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막내 아들 굴리에모 1세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식과 통치술을 익히는 데 힘쓰지 않았다. 그러나 세 아들 루지에로, 탕크레드, 알폰소 모두 아버지보다 일찍 죽어버리면서, 굴리에모가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막상 왕위에 올랐을 때 나라를 잘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굴리에모 1세는 곧 문제를 드러냈다.동시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하렘을 세워 수많은 미녀들을 모집한 뒤 그곳에서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고 한다. 또한 정무를 돌보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아버지 치세 말기에 행정을 담당했던 대신들에게 떠넘겼다. 이중에서 바리의 마이오(Maio)가 실권을 행사했다. 마리오는 상인의 아들이자 바리의 순회 판사 출신으로, 왕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왕국의 통치를 전반적으로 이끌었다. 이탈리아 태생의 마이오는 노르만 귀족들과 그리스인들을 국정에서 배제하고 이탈리아인과 무슬림을 중용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귀족들은 굴리에모의 사촌인 로베르토 데 로리텔로 백작을 중심으로 뭉쳤고, 로베르토는 동로마 제국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난날 루지에로 2세의 침략으로 코르푸를 빼앗기고 테베와 코린트를 약탈당한 것에 복수하기 위해 디라히온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원정을 준비하던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루지에로 2세가 사망하고 새 왕이 즉위하여 왕국이 어수선한 지금이 원정을 단행할 호기라고 여겼다. 황제는 우선 주변 국가 및 현지 주민들을 포섭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선왕 콘라트 3세와 남부 이탈리아를 함께 협공하자는 협약을 맺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남이탈리아 현지의 귀족 및 시민들과 접촉해 막대한 금을 뿌려 충성을 맹세받았고, 교황청에도 접근해 "야만스러운 노르만인보다는 로마인을 곁에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라며 협조를 잘해준다면 차후에 교황령을 지킬 병력 모집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많은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포섭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지자, 마누일 1세는 1155년 원정을 단행했다.(마누일 1세의 남이탈리아 원정) 마누일 팔레올로고스와 요안니스 두카스는 서방 전선에서 차출한 병력을 이끌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보내준 수송 함대에 탑승해 바리로 이동했다. 그해 8월 바리에 도착한 동로마군은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노르만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현지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바리에 순조롭게 입성했다. 이때 주민들은 앞장서서 도시 중앙의 시칠리아 성채를 완전히 파괴했다. 인근 도시인 트라니와 지오비나초, 타란토, 브린디시도 곧 귀순했다. 오직 안드리아의 리카르도 백작 만이 동로마군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끝내 동로마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전사했고 안드리아 역시 함락되었다. 아베르사 백국의 백작 아스클레티노 드렝고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은 캄파니아에 주둔하다가 동로마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해 9월 아풀리아로 진군했지만 적의 기세에 밀려 바를레타에서 봉쇄되었다.
1155년 9월,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동로마 제국의 편을 들어 캄파니아로 교황군을 파견했다. 일전에 루지에로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패한 뒤 교황령으로 망명했던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가 교황군과 함께 돌아와서 카푸아를 탈환한 뒤 교황을 대군주로 받들었으며, 캄파니아의 다른 지역들도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55년 말, 시칠리아 왕국의 수중에 있던 남부 이탈리아 중 아풀리아는 동로마 제국, 캄파니아는 교황에게 넘어갔다. 오직 칼라브리아만이 시칠리아 왕국을 여전히 지지했다. 굴리에모는 2,000명의 노르만 기사를 포함한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막게 했으나 격퇴되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이 80여 년만에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하는 듯했으나, 상황은 점차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먼저 기대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사실 프리드리히 1세는 북이탈리아를 통제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또다른 제국이 남이탈리아에 진출한다면 북이탈리아를 통제하기 힘들어진다고 여기고 병력을 보내주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원정군 총사령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현지 귀족들에게 고압적으로 일관해 반감을 샀다. 이에 로리텔로 백작 로베르트 3세는 그를 경질하지 않는다면 협조하지 않겠다고 경고했고, 마누일 1세는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소환했다.
그러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고압적이기는 했지만 군략은 뛰어난 장군이었던 반면, 요안니스 두카스는 범용한 인물일 뿐이었다. 굴리엘모는 이 때를 틈타 12,000명의 보병과 5천 기사대를 소집한 뒤, 아스클레티노 드렝고를 메시나로 소환한 후 적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죄를 물어 지하 감옥에 투옥해 그 곳에서 옥사하게 만들고 전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1156년 4월 말에 칼라브리아로 건너간 후 아풀리아로 진격해 동로마군과 반란군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후 시칠리아군이 육상과 해상에서 압박을 가하면서 동로마군의 급료 마련이 어려워졌다. 동로마 용병들은 급료 지급이 미뤄지자 "당장 금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이탈해버렸다. 이로 인해 동로마군의 전력이 크게 줄어들자, 현지 귀족과 시민들은 실망해 동로마군에 등을 돌렸다.
요안니스 두카스는 브린디시에 군대를 끌어모아 항전했고, 마누일 1세 역시 1158년 알렉시오스 악수흐를 안코나로 보내 제국군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전세는 바뀌지 않았고, 동로마군은 속절없이 밀린 끝에 브린디시에서 최종적으로 쫓겨났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로 다시는 남부 이탈리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굴리에모는 브린디시를 탈환한 뒤 동로마군을 환대했던 바리로 진격했다. 바리 주민들은 왕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굴리에모는 폐허가 된 시칠리아 성채를 가리키며 거부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이틀을 줄 테니 재산을 챙겨서 나가라고 명했다. 이윽고 사흘째 되던 날이 바리를 초토화하고 남은 재물을 모조리 빼앗았다. 오직 성 베드로 대성당과 니콜라스 수도원 등 몇몇 예배당만 무사했다.
굴리에모는 뒤이어 캄파니아로 진격했다. 로베르토 데 로리텔로는 측근들과 함께 교황령으로 달아났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귀족들은 뱀이 득실거리는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그들의 아내와 딸은 하렘으로 보내지거나 매춘을 강요당했다.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는 생포된 뒤 사슬에 묶여 팔레르모로 끌려간 뒤 실명형에 처해진 뒤 지하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복역했다.
하드리아노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이 교황령까지 쳐들어 올까 두려워 평화 협상을 맺자고 간청했고, 굴리에모는 교황을 적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받아들였다. 굴리에모는 교황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남부 이탈리아 본토의 교회 문제에 대한 교황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 대신, 교황은 굴리에모를 시칠리아의 왕, 아풀리아 공작, 카푸아 공작으로 인정하고, 시칠리아 성직자들의 청원을 접수할 권리를 포기했다. 여기에 시칠리아 왕이 시칠리아 주교를 선임하고 시칠리아 성직자가 로마로 순례하는 것을 허락하거나 거부할 권한을 가지는 것도 인정했다. 이후 시칠리아 왕들은 시칠리아 교회에 대한 거의 무제한적인 통제를 행사했다.
비록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긴 했지만, 굴리에모는 동로마 제국이 작심하고 대군을 동원해 또다시 쳐들어오면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시칠리아는 아드리아 해 건너편 일리리아 해안을 공격하지 않으며 안코나가 제국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왕국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 정도 성과는 원정에 들어간 엄청난 비용[3]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격퇴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지만, 그 사이에 루지에로 2세가 공략했던 북아프리카의 해안 도시들이 시칠리아로부터 독립했다. 1156년 스팍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가베스가 뒤를 이었으며, 1159년에는 트리폴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그곳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마흐디아 요새로 달아났다. 무와히드 왕조는 이 때를 틈타 튀니지로 진격해 시칠리아령이었던 해안 도시들을 모조리 석권한 뒤 1159년 6월 20일부터 마흐디야 요새를 포위했다. 시칠리아 함대가 출격해 해상에서 봉쇄를 풀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이후 지원이 없자 마흐디야 수비대는 1160년 1월 11일 항복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은 북아프리카 내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1160년 11월 10일, 무슬림과 이탈리아 토착민들을 우대하면서 노르만 귀족들을 억압하는 마이오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이 마테오 보넬루스를 주축으로 삼아 팔레르모에서 반기를 들어 마이오를 살해했다. 살인자들은 보복을 두려워해 팔레르모에서 카카모(Caccamo) 성으로 도주했다. 굴리에모는 노르만 귀족과 팔레르모 시민들이 보넬루스를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걸 보고, 그를 처벌했다간 자신마저 무사치 못할 거라 우려해 화해하기로 했다. 본넬루스는 팔레르모로 돌아간 뒤 왕의 영접을 받고 궁정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음모자들은 굴리에모의 잔인한 성격상 언제라도 자신들을 해칠 거라 여기고 그 전에 왕을 제거하기로 했다. 1161년 3월 9일, 그들은 궁전 바로 옆에 있는 감옥 경비원에게 뇌물을 주고 1155년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이때까지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석방했다. 루지에로 2세의 사생아 시모네, 굴리에모의 조카 레체의 탕크레드를 포함한 죄수들은 석방되자마자 궁전을 장악하고 추종자들을 들여보냈다. 굴리에모와 아내, 아이들은 구금되었고, 궁전 경비원 및 왕과 가까운 환관들은 살해되었다. 이때 팔레르모 궁전은 약탈되었고, 알 이드리시의 은색 평면구를 포함한 귀중한 예술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여기에 정변 소식을 접한 팔레르모 시민들이 마이오에게 중용받았던 무슬림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음모자들은 굴리에모를 퇴위시키고 그의 9살된 아들 루지에로를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살레르노의 로무알드 대주교와 시라쿠사의 리카르도 주교를 포함한 고위 성직자들이 이들을 용납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고, 팔레르모 주민들은 성직자들의 선동에 따라 궁전으로 진격했다. 이어진 시가전에서 어린 루지에로가 눈 먼 화살에 맞아 죽자, 공모자들은 굴리에모를 석방하고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다. 굴리에모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발코니로 나가서 주민들에게 반란군이 도망칠 때 해를 입히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후 공모자들은 카카모 요새로 도주했고, 굴리에모는 자유를 되찾았다.
굴리에모는 처음에는 공모자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아들 루지에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피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했다. 메시나에서 파견된 육군과 해군이 카카모 요새를 포위하자, 반란군은 항복하고 대부분 추방되었다. 보넬루스는 팔레르모 궁전으로 가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곧 체포되었고, 지지자들이 봉기를 시도했으나 곧바로 진압되었다. 굴리에모는 보넬루스를 포함한 주모자들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고 지하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갇혀 있게 했다. 여기에 보넬루스의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피아짜와 부테라가 왕실군에 의해 함락되어 파괴되었다. 1162년 모든 반역자가 체포되어 교수형이나 익사형 또는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고, 반항적인 도시와 지역에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다. 반역을 저지른 자들의 편에 섰던 아풀리아의 수도 살레르노 역시 굴리에모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1162년, 굴리에모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세례받은 아랍인 내시 마틴을 시칠리아 총독으로 남겨뒀다. 마틴은 지난날 무슬림을 학살한 시민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무슬림인 친구들과 함께 시칠리아에 사는 아랍인들을 집결시킨 뒤 팔레르모의 기독교도 중 아랍인 살해에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1162년 여름 굴리에모가 팔레르모로 돌아온 후 더 이상 기독교도들을 학살하지 못하게 막았지만, 이후에도 마틴에게 정사를 맡기고 자신은 하렘에서 향락에 빠져 지냈다.
굴리에모는 말년에 팔레르모 인근에 키사 궁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166년 5월 7일 이질에 걸려 팔레르모 궁전으로 이송된 후 사망했다.
2.2.3. 굴리에모 2세
굴리에모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굴리에모 2세는 13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어머니 마르그리트의 섭정을 받았다. 마르그리트는 굴리에모 1세에 의해 지하감옥에 갇힌 정치범들을 사면하고 반란에 가담했다가 무거운 벌금을 부과받은 도시들을 용서해주는 등, 민심을 끌어모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국정 경험이 부족했기에 다양한 고문의 지원을 받았다. 초기에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고관은 대신 마테오 데 아젤로(Matteo d'Aiello), 시라쿠사의 주교 리카르도 팔머, 세례받은 아랍인 내시 베드로였다. 그들의 배후에는 국가를 장악하려는 다양한 파벌이 있었다. 여기에 마르그리트의 사촌인 길베르트 그라빈스키와 몰리셰 백작 리카르도가 팔레르모에 들어온 뒤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마르그리트의 고문들은 곧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베드로는 음모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몰리자 시칠리아에서 도망쳤다. 아랍 문헌에 따르면, 그는 튀니지로 피신한 뒤 도로 무슬림이 되었고, 아흐메드 알 시켈리라는 이름으로 개명 후 기독교 국가에 맞서 무슬림 함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마르그리트는 베드로의 빈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1166년 9월 동방으로 가는 여정을 떠났다가 시칠리아에 무기한 머무르고 있던 자신의 사촌 스테판 뒤 페르슈를 1166년 11월에 수석 공증인에 임명했고, 1167년 여름에 팔레르모의 대주교를 겸임하게 했다.
이 인사는 각각 수석 공증인과 팔레르모 대주교가 되기를 희망했던 마테오 데 아젤로와 리카르도 팔머의 불만을 샀다. 여기에 페르슈가 수석 공증인이 된 뒤 프랑스 출신 측근들을 대거 기용하자, 이에 대한 반감이 궁정에서 커졌다. 얼마 후, 마르그리트의 형제인 몬테스카글리오소의 엔리코 등이 스테판 암살을 계획했다. 1167년 12월, 메시나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엔리코는 타란토 공국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이때 그는 일부러 스테판을 자극하는 내용을 실어서, 스테판이 자극받아 언쟁을 벌일 때 공모자들을 시켜 몸싸움을 벌이는 척하며 죽이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 계획을 간파했던 스테판의 사주를 받은 길베르트 그라빈스키가 엔리코가 음모를 꾸미고 스테판을 암살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엔리코는 즉시 체포되었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공범들은 뜻밖에 포위되었다. 스테판은 마르그리트를 대신하여 모든 공모자에게 시칠리아를 떠난다면 용서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리하여 정적들을 모조리 몰아낸 스테판은 1168년 3월 마르그리트와 함께 팔레르모로 돌아온 뒤 엔리코와 몰리세 백작 리카르도를 지하 감옥에 가두었고, 마테오 데 아젤로 역시 체포했다. 이리하여 그는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체포를 두려워한 인사들이 메시나에서 주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칼라브리아의 레지오, 로메타, 타오르미나를 점령한 뒤 엔리코와 리카르도를 석방시키고 팔레르모로 행진했다. 여기에 마테오 데 아젤로도 감옥에서 탈출한 뒤 팔레르모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스테판과 프랑스 동료들은 팔레르모 대성당의 종탑에 포위되었고, 반군과 협상한 끝에 시칠리아를 영원히 떠나는 조건으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들은 곧바로 배를 탄 뒤 다음날 시칠리아를 떠났다.
스테판이 추방된 후, 마테오 데 아젤로, 리카르도 팔머, 몰리셰 백작 리카르도 등은 정국을 장악하고 마르그리트를 권력에서 배제했다. 몬테스카글리오소의 엔리코는 나바라로 돌아갔고, 마르가리트의 사촌 길베르트 그라빈스키는 모든 가족과 함께 시칠리아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성년이 된 굴리에모는 이 대신들과 함께 국정을 다스렸다. 시칠리아는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번영했으며, 군사적으로도 강력한 해군과 무슬림+노르만 혼성군을 갖춘 강국이었다. 그는 이러한 경제럭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벌였다.
굴리에모 2세는 이탈리아를 수중에 넣으려는 프리드리히 1세의 야망을 경계해 이에 대항하는 교황청과 롬바르드 연합에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면서 오랜 갈등을 벌였던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기 위해 마누일 1세에게 딸을 자신에게 시집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마누일 1세는 처음에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1169년경 자신의 딸 마리아 콤니니와 굴리에모의 약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지정된 날이 지나도 마리아가 오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해 어떠한 설명과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굴리에모는 방향을 바꿔 1177년 2월 13일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딸인 조안나와 결혼했다. 이후 1177년 프리드리히 1세가 베네치아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앞에서 회개하고 롬바르드 연합과 장기 휴전 협정을 체결했을 때, 살레르노 대주교,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 등 시칠리아 대표단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1171년 시리아의 통치자 누르 앗 딘 마흐무드와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를 공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사방에서 압박하자,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 1세가 서유럽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했다. 굴리에모 2세는 요청에 응하기로 하고, 1174년 탕크레드 데 레치의 지휘 아래 20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그해 7월 말, 시칠리아 함대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탕크레드는 알렉산드리아 해안에 상륙한 뒤 공성전을 벌였지만,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공성 무기가 파괴되면서 난항을 겪었다. 여기에 아모리 1세가 이집트로 향하던 중 사망하고 젊은 왕 보두앵 4세의 후견인을 놓고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예루살렘 왕국군의 지원이 오지 않자, 탕크레드는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오기 전에 철수하기로 했다. 300명의 기사들이 본대가 시칠리아로 떠날 때까지 해안에 남아서 끝까지 싸우다가 살라흐 앗 딘에게 사로잡혔다.
1183년 9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이래, 동로마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굴리에모 2세는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이래 발칸 반도 제패를 숙원으로 삼던 오트빌 가문의 꿈을 이룰 기회라고 여겼다. 1184-1185년 겨울, 굴리에모 2세는 메시나에 육군과 함대를 집결시킨 뒤 함대 지휘권을 사촌 탕크레드에게, 육군 지휘권을 아케라 백작 리샤르와 보두앵에게 맡겼다. 원정 준비가 한창이던 1183년, 프리드리히 1세가 콘스탄차에서 롬바르드 연맹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굴리에모 2세는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갈등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프리드리히 1세와 협상한 끝에 프리드리히 1세의 장남 하인리히 6세와 루지에로 2세의 딸이자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의 조카이며 굴리에모 2세의 고모인 쿠스탄차를 약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약혼식은 1184년 10월 29일에 거행되었다.
1185년 6월 11일, 메시나에서 출항한 시칠리아 함대는 그해 6월 24일 발칸 반도의 아드리아 해 인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인 디라히온에 진입했다. 100여년 전 로베르 기스카르가 발칸 원정을 감행했을 때 디라히온에서 오랜 공성전을 치러야 했지만, 이번에는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수비대와 주민들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도 않고 항복하면서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그 후 시칠리아군은 적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며 동진한 끝에 8월 6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카를 육상에서 포위했고, 8월 15일 시칠리아 함대가 해상을 봉쇄했다.
당시 테살로니카엔 안드로니코스 1세의 친척이었던 다비드 콤니노스가 4개 부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다비드는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등 어떻게든 도시를 지키려 애썼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를 위해 싸울 마음이 없던 3개 부대가 8월 24일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1개 부대만 챙기고 도주했다. 시칠리아군은 테살로니카에 입성한 뒤 1182년 4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벌어진 라틴인 학살에 보복하겠다며 테살로니카 시민 8,000여 명을 학살하고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테살로니카를 공략한 뒤, 시칠리아군은 3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테살로니카 수비를 맡았고, 한 부대는 세레스로 진군했으며,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부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한편, 테살로니카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한 안드로니코스 1세는 다비드 콤니노스를 투옥한 뒤 반격에 착수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대군을 맡겼다가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눌 것을 우려해 아들 요안니스와 테오도로스, 장군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와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그리고 환관 니키포로스에게 각각 한 부대씩 맡겨 시칠리아군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다섯 지휘관들 중 누가 우선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기에 지휘체계가 문란해졌고, 결국 동로마군은 연전연패했다.
시칠리아군이 파죽지세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자, 안드로니코스 1세는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에게 적과 내통할 지도 모르는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히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가 명령에 따라 여러 인사를 잡아 처형하고 있을 때,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자신을 잡으러온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사키오스는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한 뒤 시민들에게 호소했고,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에 반감을 품고 있던 시민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황궁을 향해 진격했다. 대세를 읽은 수도 방위군과 근위대는 폭동 진압을 거부하고 안드로니코스 1세를 체포했다. 폐위당한 안드로니코스는 시내로 끌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새 황제가 된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를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남은 병력을 지원군으로 편성해 합류시키면서 군대를 독려했다. 브라나스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거듭된 승리에 자만하고 있던 시칠리아군을 요격하여 트라키아의 모시노폴리스에서 격파하고 마케도니아까지 추격했다. 시칠리아군은 암피폴리스로 물러난 뒤 브라나스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브라나스는 이를 무시하고 재차 총공격을 가했다. 시칠리아군은 괴멸되어 상당수가 스트리온 강에 익사했고, 육군 지휘관 리샤르와 보두앵은 사로잡혔다. 해군 지휘관 탕크레드와 핀도스 산맥을 넘어 이피로스로 달아난 소수의 패잔병만이 이탈리아로 탈출했다.
발칸 원정이 재앙으로 끝난 뒤, 굴리에모는 1186년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의 정식 결혼식을 거행해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두텁게 한 뒤 동로마 제국을 향한 2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 딘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전해졌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전 유럽의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참여해달라고 호소했다. 굴리에모는 장인인 헨리 2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그리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시칠리아에서 지원군과 보급품을 수급해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항로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굴리에모는 먼저 십자군을 파견하기로 하고,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제독의 지휘하에 60척의 함대를 시리아 해안으로 파견했다. 마르가리트는 1188~1189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을 지속적으로 정찰했고, 1188년 7월 트리폴리를 급습해 타격을 입혔으며, 라타키아, 마카브, 티레에서 아랍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이들의 활약은 십자군이 시리아 해안의 가장 중요한 항구와 요새를 손에 쥔 채 유럽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던 1189년 11월 18일, 굴리에모 2세는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그는 아내 조안나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굴리에모 2세의 고모이자 유일한 혈육인 쿠스탄차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마테오 데 아젤로 등 대다수 노르만 귀족들은 쿠스탄차와 결혼한 하인리히 6세가 이를 빌미 삼아 시칠리아 왕을 자처할 게 뻔하고,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칠리아에 들어서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게 뻔하다고 여겨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안드레아 백작 루지에로와 레체의 탕크레드를 놓고 고심한 끝에 1190년 1월 탕크레드를 왕으로 추대했다.
2.2.4. 오트빌 왕조의 단절
탕크레드는 즉위 직후부터 반란에 시달렸다. 1190년 1월, 팔레르모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간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무슬림이 희생되었다. 이에 분노한 시칠리아 무슬림들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탕크레드는 이를 수습하느라 1190년 말까지 시칠리아 전역을 돌아다녀야 했다. 1190년 3월,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아풀리아 및 캄파니아 귀족들은 탕크레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탕크레드를 몰아내기 위해 하인리히 56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하인리히 6세는 1190년 5월 칸덴의 하인리히 휘하 제국군을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무슬림 봉기를 진압하느라 바빴던 탕크레드는 아세라 백작 리샤르에게 남부 이탈리아를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리샤르는 상당한 용병을 모집한 뒤 제국군과 반란군이 합류하기 전에 공세를 개시해 1190년 9월 반란군을 섬멸하고 제국군을 쫓아냈다.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는 토벌군에게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1190년 9월 14일과 9월 23일, 필리프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메시나에 상륙했다. 이보다 앞서, 굴리에모 2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두 왕에게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항로를 제공하고 지원군과 보급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굴리에모 2세는 십자군 원정이 본격적으로 단행되기 전에 사망했지만, 두 왕은 이 제안을 이용해 시칠리아에 찾아왔다. 문제는 탕크레드와 리처드 1세의 관계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탕크레드는 굴리에모 2세의 왕비이자 리처드 1세의 아버지 헨리 2세의 딸이었던 조안나를 억류하고 그녀의 재산을 압류했으며, 결혼을 통해 그녀에게 이전되었던 몬테 산탄젤로 교구의 수입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리처드 1세는 메시나에 상륙한 뒤 조안나를 석방하고 그녀가 겪은 손실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잉글랜드군과 대결할 이유는 없었기에, 탕크레드는 리처드 1세의 요구에 따랐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굴리에모 2세가 십자군을 위해 완전히 장비된 선박을 포함한 전쟁 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이를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탕크레드가 이에 난색을 표하자, 리처드 1세는 1190년 9월 30일 메시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의 바나라 시를 점령하고 조안나를 영국 수비대의 보호 아래 그 곳에 두었다. 이후 메시나로 돌아온 잉글랜드군은 그리스 수도원을 점령하고 그곳의 수도자들을 몰아냈다.
1190년 10월 3일, 영국인들의 행동에 분노한 메시나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그들을 수도원에 봉쇄했다. 필리프 2세가 양자를 중재하려 했지만, 리처드 1세는 협상 대신 무력 행사를 택하기로 하고 메시나로 진군해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는 새로운 반 영국 폭동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인질을 요구했고, 메시나 성벽 인근 언덕에 마테그리폰(Матегрифон: 그리스인을 위한 굴레) 요새를 세웠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이같은 행동에 분개했고, 카타니아에 있던 탕크레드에게 "당신이 영국인들을 대적하려 한다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정적인 벨프 가문을 지원하는 영국 왕 리처드 1세는 프랑스 왕보다 시칠리아에게 더 선호되는 잠재적 동맹이었다. 탕크레드는 이 점을 고려해 리처드 1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1190년 11월 11일 메시나 조약을 체결했다. 탕크레드는 조안나에게 몬테 산탄젤로 교구의 수입을 넘겼고, 굴리에모 2세가 약속했다는 군수 물자을 모아서 리처드 1세에게 넘겼다. 그리고 리처드 1세의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르튀르는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했다. 리처드 1세는 그 대가로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탕크레드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주고 메시나를 파괴한 것에 대한 보상, 마테그리폰 요새 해체를 약속했다. 이후 두 왕을 시칠리아에서 얼른 내보내고 싶었던 탕크레드는 1191년 3월 리처드 1세에게 지난날 필리프 2세가 보냈던 밀서를 보여줬다. 이에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한바탕 다퉜고, 곧 시칠리아를 떠나 동방으로 얼른 가기로 합의했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1191년 3월 30일과 4월 10일에 각각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이끌고 메시나에서 출항했다.
1191년 1월, 하인리히 6세가 이끄는 제국군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롬바르드 연맹과 피사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4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로마에 입성했다.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했던 클레멘스 3세는 제국군이 당도하기 직전에 사망했고, 뒤이어 새 교황이 된 첼레스티노 3세는 제국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191년 4월 15일,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는 새 교황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서 즉위식을 치렀다. 이후 하인리히 6세는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아베르사, 카푸아, 타란토, 몬테 카시노 등 여러 도시가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고, 살레르노 주민들은 아예 제국군이 접근하기도 전에 하인리히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쿠스탄차에게 자신들의 도시에서 여름을 보내도록 초대했다.
그러나 제국군의 공세는 나폴리 성벽에서 저지되었다. 아크라 백작 리샤르는 제국군에 맞서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지만, 살레르노 대주교 니폴라 데 아겔로가 수비를 이끌어 제국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여기에 해상에서는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제독이 지휘하는 시칠리아 함대가 제국군을 지원하던 피사 함대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나폴리 공성전이 지지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군영에서 전염병이 나돌면서 많은 제국 병사들이 죽어갔다. 결국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8월 24일 나폴리 포위를 해제하고 독일로 철수했다. 그는 이전에 점령한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고, 쿠스탄차는 살레르노에 남아서 자신과 남편의 시칠리아 왕관에 대한 권리를 고수하기로 했다.
하인리히 6세의 제국군이 독일로 철수하자, 그 때까지 쿠스탄차를 극진히 모시던 살레르노 주민들은 태도를 싹 바꿔 쿠스탄차를 붙잡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살레르노에 찾아온 탕크레드의 조카가 이를 막고 쿠스탄차를 메시나로 이송했다. 메시나에서 쿠스탄차와 대면한 탕크레드는 외국군을 끌여들어 조국을 위태롭게 만든 책임을 물었다. 이에 쿠스탄차는 탕크레드에게 빼앗긴 자신의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탕크레드는 쿠스탄차를 팔레르모에 유폐시킨 뒤 하인리히 6세가 남겨둔 수비대를 모조리 몰아내고 북부 캄파니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했다.
쿠스탄차는 팔레르모에 이송된 뒤 탕크레드의 왕비 시빌라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시빌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식사를 하고 그녀의 침실에서 함께 자야 했으며, 궁궐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그런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자, 시빌라는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탕크레드는 마테오 데 아젤로의 제안에 따라 쿠스탄차를 나폴리로 이송해 엄중한 감시를 받게 했다.
1192년 6월, 첼레스티노 3세가 파견한 교황 특사가 그라비나스에서 탕크레드와 만났다. 하인리히 6세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감을 품었던 첼레스티노 3세는 전임 교황 클레멘스 3세와 마찬가지로 탕크레드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탕크레드는 그 대가로 루지에로 1세 시대부터 시칠리아 왕이 누려왔던 권한인 "교황의 간섭 없이 시칠리아 주교들을 임명하고 교황 사절이 시칠리아에 방문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 포기일 뿐이었고, 시칠리아 왕들은 이후로도 시칠리아 주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이때 교황 사절은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첼레스티노 3세는 하인리히 6세의 황후를 인질로 삼음으로써 하인리히 6세와의 정치 대결에 이용하려 했다. 탕크레드는 이를 받아들여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은밀히 파견한 독일 기사단이 로마로 이송중이던 쿠스탄차를 빼돌려 독일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탕크레드는 이제 하인리히 6세가 대대적인 침공을 가할 것을 예상하고, 새로운 동맹국을 찾았다. 마침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는 것을 꺼린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가 접근했다. 양자는 협상 끝에 탕크레드의 장남 루지에로 3세와 이사키오스 2세의 딸 이리니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1193년, 탕크레드는 후계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루지에로 3세를 공동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해 12월 24일, 루지에로 3세는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망했다. 장남의 요절에 큰 충격을 받은 탕크레드는 몸져누웠고, 오랜 투병 끝에 1194년 2월 20일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사후 차남 굴리에모 3세가 집권했고 시빌라 왕비가 섭정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이 때를 틈타 공세를 가했고, 귀족들이 대거 하인리히 6세 편을 들면서 대세가 기울었다. 결국 하인리히 6세는 팔레르모에 순조롭게 입성한 뒤 1194년 12월 25일에 시칠리아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고, 굴리에모 3세와 시빌라는 폐위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탕크레드를 찬탈자로 낙인찍고 그의 유해를 무덤에서 꺼내 부관참시했다. 시빌라와 딸들은 독일로 끌려갔고, 굴리에모 3세는 어찌 되었는지 전해지지 않으나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3. 호엔슈타우펜 왕조
프리드리히 2세(시칠리아 국왕으로는 페데리코 1세)가 아풀리아에 세운 몬테 성.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 왕국을 손에 넣으면서 독일, 네덜란드,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북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아우르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는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공작을 벌였지만, 교황과 교황파 제후들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다. 이후 독일왕에 아들을 앉히고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착수했으나 1197년 9월 28일 말라리아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팔레르모 궁정에서 아들을 양육하며 조용히 지내던 쿠스탄차는 남편이 죽자 여왕 쿠스탄차 1세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그녀는 남편의 독일인 동료들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시칠리아인들로 대체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을 지키기 위해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단호히 물리쳤다. 1198년 5월에는 이제 갓 세살 된 아들을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 중병에 걸려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녀는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왕국을 통치하고 후견인이 되어줄 역할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맡긴 뒤 1198년 11월 27일에 사망했다.
1201년, 브리엔의 발터 3세는 탕크레드의 딸 엘비라와 결혼한 뒤 아내를 내세워 시칠리아 왕이 되고자 교황에게 십자군에 참여할 테니 자신을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후견인을 맡았는데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다며 거절했지만, 타란토 공국과 레체 백국에 대한 발터 3세와 엘비라 부부의 권리를 인정했다. 발터는 일단 교황의 뜻에 동의하고 1201년 늦은 봄에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골몰했다. 1202년 시칠리아 왕국의 권신 팔레리아의 발터와 보부르크의 디에폴트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이 이에 맞섰으나 카푸아와 칸나이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보부르크의 디에폴트가 전열을 정비해 계속 맞서자 점차 수세에 몰리다 1205년 6월 진영에 잠입한 적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1206년, 디에폴트는 어린 프리드리히를 경비하고 있던 카파로네의 빌헬름을 설득해 프리드리히를 팔레리아의 발터에게 넘기게 했다. 이후 디에폴트와 발터는 서로 힘을 합쳐 팔레르모 왕궁을 장악하고 있던 빌헬름을 추방했다. 그러나 디에폴트와 발터는 곧 권력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1207년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디에폴트는 감옥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후 살레르노로 도망친 후 카파로네의 빌헬름과 팔레아리아의 발터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빌헬름과 발터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그들을 몰아낸 후 시칠리아의 섭정으로 군림했다.
1209년 2월, 디에폴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로부터 "마기스테르 카피타네우스 토티우스 아풀리에 에트 테레 라보리스(magister capitaneus totius Apuliae et Terre laboris: 아풀리아와 테레의 대리인)"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오토 4세의 지지자를 자처했으나, 1218년 제위를 오토 4세로부터 되찾은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체포되어 독일로 끌려가 옥고를 치르다가 1221년에서야 풀려난 후 튜튼 기사단에 들어갔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실권을 잡은 뒤 시칠리아를 본거지로 삼고 그 곳의 인력과 자본을 기반삼아 오토 4세에게 빼앗겼던 황제 직위를 탈환하고 독일에서 호엔촐레른 왕조의 영향력을 회복시키는 데 골몰했다. 또한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해 예루살렘을 일시적이나마 기독교 세력의 손아귀에 들게 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원정과 모략을 벌였다. 그는 평생 독일에 발을 별로 들이지 않았고, 생애 대부분을 시칠리아에서 살았고 스스로도 시칠리아에 애착을 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보다는 시칠리아 국왕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 무슬림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의 고급문화를 습득하여 시칠리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자신 대신 독일을 다스리던 아들 하인리히 7세와 지나치게 갈등을 벌이다가 아들이 끝내 반란을 일으키자 체포한 뒤 죽을 때까지 유폐시키는 비정한 면모를 보였고, 교황청과 오랜 세월 갈등을 벌이고 모략을 일삼아 교황청과 친 교황파 세력의 반감을 샀다. 그러던 1250년 12월 12일, 프리드리히 2세는 사냥을 마친 후 고열에 시달리다 시칠리아의 카스텔 피오렌티노에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죽기 전에 아들 콘라트 4세가 자신의 영지를 물려받되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는 사생아인 만프레디가 타란토 공작으로서 대리 통치하게 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악감정을 품고 있던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부 이탈리아 귀족들을 부추겨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만프레디는 곧바로 왕실군을 이끌고 토벌에 착수해 나폴리를 제외한 수많은 반란시들을 제압했다. 이후 나폴리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면서 인노첸시오 4세와 화해를 시도했지만, 교황이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러던 1252년 남부 이탈리아에 찾아온 콘라트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모든 권한을 도로 가져가고 만프레디는 타란토 공국만 다스리게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 콘라딘을 시칠리아 왕으로 선임하고, 교황에게 콘라딘을 보필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콘라딘의 섭정으로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 후작을 임명했다.
1254년 5월, 콘라트 4세가 26세의 나이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만프레디는 인노첸시오 4세에게 시칠리아를 넘겨주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가 섭정을 맡는 것 역시 거부하고 자신이 섭정을 맡았다. 이에 인노첸시오 4세는 그해 7월 만프레디를 파문했다. 만프레디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하면서, 교황의 특사가 남부 아틸리아에서 교황을 대신해서 교회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교황 수행원들이 오만하게 굴자 반감을 품고 루체라에 거주하는 아랍인들과 손을 잡고 교황청에 대항했다. 1254년 11월 인노첸시오 4세가 나폴리에 입성하여 전쟁을 선도하자, 그는 포자로 진군해 12월 2일 교황의 조카 굴리에모 피에스키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을 섬멸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은 큰 충격을 받고 1254년 12월 7일 나폴리에서 선종했다.
이후 만프레디는 투스카니 지방, 특히 시에나의 기벨린(친 황제파) 파벌에 독일 기사단을 지원해, 그들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구엘프(친 교황파) 파벌이 지배하는 피렌체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인노첸시오 4세의 뒤를 이어 새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4세가 만프레디를 또다시 파문하자, 남부 이탈리아 각지에서 친 교황 세력이 준동했다. 하지만 1257년에 모든 반란이 제압되었고, 알렉산데르 4세는 만프레디의 후원을 받은 기벨린 세력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로마에서 비테르보로 피신했다.
1258년 콘라딘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자, 만프레디는 그해 8월 10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나중에 콘라딘이 파견한 사절들이 콘라딘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했지만, 만프레디는 강력한 왕이 시칠리아를 다스려야 한다는 민중의 호소를 빌미삼아 퇴위를 거부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아랍인들과 손잡은 만프레디를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주변 국가들에 십자군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만프레디는 입지를 강화하고자 마침 기벨린 파벌의 지도자 에셀리노 3세 다 로마노가 사망하자 대리자의 자격으로 토스카나, 스폴레토, 마르체, 로마냐, 롬바르디의 시장을 지명했으며,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토스카나의 수호자이자 로마인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262년에는 자신의 딸 쿠스탄차를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1261년 선종한 알렉산데르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를 세번째로 파문한 뒤 1263년 영국의 헨리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의 샤를 1세에게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만프레디를 토벌해달라고 청했다. 이중 샤를이 교황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프레디는 로마에 선언서를 보내 자신이 왕국을 통치할 권한이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권리도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샤를에 맞서기 위해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1265년 하반기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수많은 기벨린 요새들을 공략한 샤를은 1266년 1월 로마에 입성하여 기벨린파를 몰아낸 뒤 1월 20일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인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1266년 2월 26일, 샤를의 프랑스군과 만프레디의 시칠리아군이 베네벤토에서 격돌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하들은 일단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적에게 돌진하다가 전사했다.
2.4. 카를루 1세의 압제와 시칠리아의 만종
앙주의 샤를은 만프레디를 처단한 뒤 팔레르모에서 카를루 1세로서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콘라딘은 만프레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야말로 시칠리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슈바벤 공국을 담보로 삼아 군자금을 마련한 뒤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1268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카를루 1세에게 참패한 뒤 생포된 후 10월 29일 반역죄로 재판을 받은 뒤 나폴리에서 참수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의 유일한 군주가 된 카를루 1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들과 추종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시칠리아 백성들에게 이전보다 30배에 달하는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도시들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또한 시칠리아 정부에 자신과 함께 남하한 프랑스 관료들로 채웠고, 프랑스 군인들을 시칠리아 각지에 배치해 시칠리아 귀족 및 백성들을 엄중히 감시하게 했다.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를 공략한 여세를 몰아 지중해 각지에 세력을 뻗쳐 '앙주 제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고 즉위 직후부터 대외 원정을 잇따라 감행했다. 1277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을 칭했으며, 1278년에 라틴 제국의 최후의 황제 보두앵 2세로부터 아카이아 공국의 주권을 양도받았다. 그는 라틴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발칸 반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1281년 교황 마르티노 4세로부터 "이단인 정교회를 신봉하는 미하일 8세를 타도하고 가톨릭 국가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재건하라"는 교령을 접수받고 십자군을 선포해, 동로마 제국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이렇듯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벌이면서, 이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카를루 1세에 대한 시칠리아 민중의 분노는 갈수록 불거졌고, 프랑스인들이 요직을 장악하는 바람에 정치에 참여할 길이 막혀버린 귀족들 역시 만감을 품었다.
일전에 만프레디의 딸 쿠스탄차와 결혼했던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에서 앙주 왕조에 대한 반감이 극렬해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고, 아내의 설득을 받아들여 시칠리아에서 망명 온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 및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며 장차 카를루 1세를 시칠리아에서 타도하고 왕위를 가로챌 기회를 노렸다. 여기에 카를루 1세가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도모하려 드는 것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도 아라곤 왕국에 군자금을 지원해 함대를 조직하게 하고, 시칠리아에 공작원들을 잠입시켜 귀족과 민중을 선동했다.
이렇듯 아라곤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부추김으로 분위기가 고조되던 1282년 3월 말, 팔레르모에서 일어난 봉기를 시작으로 시칠리아 전역에서 반 앙주 봉기가 발발해 시칠리아에 살던 프랑스 병사와 민간인들이 모조리 학살당했다.(시칠리아의 만종) 시칠리아 도시들은 롬바르디아 동맹을 모델로 삼아 시칠리아 도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오직 교황만이 자신들을 이끌 수 있다며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충실한 동맹자인 카를루 1세와 갈라설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그들은 카를루 1세의 보복을 두려워한 끝에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한편, 페드로 3세는 사라센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튀니스로 함대를 몰고 간 후 시칠리아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렸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자, 그는 시칠리아로 진군해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이후 팔레르모에 입성해 9월 4일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리하여 아라곤 왕국을 이끌던 바르셀로나 왕조가 시칠리아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2.5. 바르셀로나 왕조
2.5.1. 시칠리아의 만종 전쟁
2.5.1.1. 페드로 3세, 쿠스탄차 2세와 카를루 1세의 대결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진압하고자 메시나로 진군해 포위 공격했다. 그러다가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에 들어와서 왕으로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나폴리로 철수했다. 이후 교황청에 "이단인 정교회를 토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십자군을 저지한 아라곤 왕을 정죄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티노 4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선포했다. 카를루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가 이에 호응해 아라곤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페드로 3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 길렘 갈세란 데 카르텔라(Guillem Galceran de Cartellà)를 알모가바르 보병, 석궁병, 창병으로 구성된 육군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를 선임했다. 두 장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세를 개시해 1283년 2월 칼라브리아 해안 지대의 대다수 도시를 장악했다. 이후 페드로 3세는 프랑스군이 아라곤 왕국을 침략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라곤 본토로 떠났고, 아내 쿠스탄차가 여왕 쿠스탄차 2세로서 시칠리아를 지켰다.
쿠스탄차는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아풀리아,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등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던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최대한 포섭하려 노력했다. 칼라브리아의 몇몇 도시들이 카를루 1세의 폭정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청하자 지체없이 군대를 파견해 이들의 독립을 도왔다. 또한 유능한 제독인 라우리아(Lauria)의 루지에로를 시칠리아 함대 총사령관으로 삼아 적 함대가 시칠리아에 접근하는 것을 막게 했다. 루지에로 제독은 나폴리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카를루 1세와 필리프 3세 휘하 프랑스 함대를 격멸하고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훗날 카를로 2세)를 생포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를로를 처형하자고 주장했지만, 쿠스탄차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쿠스탄차가 베아트리체 외의 다른 형제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은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확실하지만, 그들이 돌아오면 남편의 시칠리아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에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베아트리체가 돌려보내졌지만, 카를로 왕자는 1285년 카를루 1세가 사망한 뒤 몸값이 지불되지 않았기에 옥고를 계속 치러야 했다.
2.5.1.2. 페드로 3세와 카를루 1세 사후의 시칠리아 만종 전쟁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하고 장남 알폰소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접한 쿠스탄차는 시칠리아 왕위에서 물러나 아라곤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아라곤으로 가기 전에 먼저 로마로 가서 새 교황 호노리오 4세를 만나 양자의 화해를 요청했다. 호노리오 4세는 그녀의 제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프랑스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화평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쿠스탄차가 떠난 뒤 호노리오 4세는 입을 싹 닦고 시칠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1287년 봄, 교황과 앙주, 프랑스 귀족들이 소집한 원정군이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해 6월 23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 제독이 이끄는 시칠리아 함대가 원정군을 섬멸했고, 많은 프랑스와 프롱방스 귀족들이 체포된 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1287년 7월,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를 통해 울로론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라곤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해 10월, 카를로 2세는 막대한 몸값, 인질을 제공하고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마침내 석방되었다.
1289년,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카를로 2세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시키고 전쟁을 이어가라고 독촉했다. 이후 1291년 2월,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그리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브리뇽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의 파문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은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았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게 더 이상 군사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1291년 6월 18일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하이메 2세는 즉각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해 7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위를 동생인 페데리코에게 물려주라는 형의 유언을 무시하고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위를 겸임했다. 페데리코는 그저 총독 자격으로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해야 했다. 또한 일전에 프랑스와 손잡고 페드로 3세에 대항했다가 알폰소 3세에게 축출된 후 앙주에 피난가 있던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발레아레스 제도를 넘긴다고 합의했던 브리뇽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필수적인 영토이니 절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는 하이메 2세를 재차 파문했고 전쟁이 재개되었다.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 사이, 카를로 2세는 1293년 말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중재를 통해 아라곤 궁정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들을 보내주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1294년 오랜 공백기 끝에 비로소 선출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카를로 2세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고, 뒤이어 선출된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하이메 2세와의 평화 협약을 지지했다.
그 결과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앙주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1300년 6월 1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폰자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재차 격파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302년, 샤를 드 발루아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로 내려와서 시칠리아에 상륙했지만, 역병이 도는 바람에 군대가 궤멸되다시피하자 시칠리아군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왕이 사로잡혀 있던 시칠리아군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8월 19일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카를로 2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으로 자처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면 시칠리아 왕위는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다. 1303년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공물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비준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3세와 카를로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만종 전쟁은 종결되었다.
2.5.2. 쇠락하는 왕국
2.5.2.1. 프리드리히 3세와 페트루 2세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된 후, 시칠리아 왕국은 몇 년간 평화를 누렸다. 그러다가 1312년 룩셈부르크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남하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그와 동맹을 맺고 나폴리 왕국과 재차 전쟁을 벌여 레지오를 공략했다. 그는 나폴리로 남하하려는 황제와 합세하고자 토스카나 지방으로 이동했지만, 하인리히 7세가 1313년 8월 24일 부온콘벤토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시칠리아로 철수했다.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는 이에 보복하고자 시칠리아를 여러 차례 급습해 많은 피해를 입혔다. 1317년 양자간에 휴전이 맺어진 후, 프리드리히 3세는 북이탈리아 분쟁에 개입해 기벨린파(친 황제파)가 제노아를 공격하는 것을 돕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회 세입의 일부를 몰수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이를 응징하고자 1321년 프리드리히 3세를 파문하고 시칠리아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1325년, 나폴리 왕 로베르토의 아들 카를로 휘하의 앙주 육군과 함대가 시칠리아로 쳐들어왔지만 조반니 데 키아라몬테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에게 팔레르모 인근에서 패배했다. 1326년과 1327년에 앙주군이 시칠리아를 잇따라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그러다가 루트비이 4세가 이탈리아에 개입하자 나폴리군이 더 이상 시칠리아에 신경쓰지 않으면서, 프리드리히 3세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334년에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권리를 보장할 의사를 표명했지만,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실패했다. 그 사이, 조반니 데 키아라몬테가 왕과 사소한 일로 불화를 벌인 끝에 나폴리로 귀순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앙주 가문에 대한 시칠리아인들의 증오를 끌어내 이를 토대로 단합된 국가를 건설하기를 희망했다. 초기에는 시칠리아를 잇따라 침략하는 앙주 가문에 대한 시칠리아인들의 분노가 극렬했기에 그의 의도대로 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앙주 가문의 편을 드는 교황을 견제하고자 기벨린 파(친 황제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자, 구엘프 파(친 교황 파)에 속한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시칠리아에 대한 무역 거래를 크게 줄여버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많은 시칠리아인들이 무역으로 먹고 살았기 때문에, 무역 거래에 저해되는 정책을 벌이는 왕에 대한 시선이 갈수록 나빠졌다. 게다가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가 시칠리아 항구들을 끈질기게 봉쇄했기에, 시칠리아의 경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333년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면서 기후가 악화되고 시칠리아에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이가 목숨을 잃자, 시칠리아인들은 신이 프리드리히 3세가 저지른 죄를 묻기 위해 이런 재앙을 내렸다고 여겼다. 이렇듯 민심이 악화되던 1337년 6월 25일, 프리드리히 3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사망했고, 아들 페트루 2세가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이것은 프리드리히 3세 사후 시칠리아 왕위가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던 칼타벨로타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기에, 나폴리 왕 로베르토는 이를 보복하고자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단행하여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에 속했던 리파니(1339년), 밀라초(1342년)를 잇따라 공략했다.
설상가상으로, 시칠리아에 전염병이 돌면서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귀족들은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고자 강력한 사병을 거느리고 서로 충돌했다. 페트루 2세는 이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아내 엘리자베타에게 국정을 위임했다. 엘리자베타는 국정 운영을 마테오와 다미아니 팔리지 형제에게 맡겼고, 자연히 권력은 두 사람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러다 1340년 아테네와 네오파트리아의 공작이자 페트루 2세의 동생인 조반니가 두 사람을 몰아내고 권력을 쥐었다. 이후 시칠리아의 정국은 엘리자베타 왕비와 조반니간의 알력다툼으로 점철되었다.
2.5.2.2. 루이지와 프리드리히 4세
1342년 8월 15일, 칼라시베타 별궁에 지내던 페트루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후 4살 밖에 안 된 아들 루이지가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고, 엘리자베타와 조반니가 섭정을 맡았다. 1343년 1월 20일, 프리드리히 3세 대부터 시칠리아 왕국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던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가 사망했다. 사후 나폴리 왕위에 오른 조반나 1세는 여왕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통제하느라 시칠리아와의 전쟁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시칠리아 왕국 역시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고 흉흉한 민심을 달래야 했다. 그리하여 1347년 11월 7일, 양국은 카타니아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시칠리아 왕국의 독립은 유지되었지만, 루이지는 시칠리아 왕이 아니라 시칠리아의 고대 이름인 트리나크리아(Trinacria)의 왕을 칭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교황청과 여러번 갈등을 벌인 시칠리아 왕국을 이대로 끝장내고 싶었기에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1347년 겨울 중세 흑사병이 시칠리아를 강타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때 섭정을 맡고 있던 조반니 역시 흑사병에 걸려 1348년 4월 3일에 사망했다. 이후 조반니의 부관이자 카탈루냐 귀족이었던 블라스코 2세 데 알라고나가 섭정직을 맡았고, 조반니의 아들 페데리코는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해 6월 초, 엘리자베타 왕비의 신임을 얻어 정국을 좌지우지했다가 조반니와의 정쟁에서 패한 뒤 피사로 망명했던 마테오 팔리지 백작이 엘리자베타의 소환령을 받들어 시칠리아에 돌아왔다. 이후 마테오는 시칠리아 내 카탈루냐 출신 귀족들을 규합해 요직에 임명하고 토착 귀족들을 축출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토착 귀족들이 연말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칠리아는 내전에 휘말렸다.
루이지는 엘리자베타 왕비와 마테오에 의해 밀라초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무력하게 지냈고, 귀족들은 두 패로 나뉜 채 자신의 권익을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사병을 동원해 상대방을 공격했다. 한편 흑사병이 섬 전역에 확산되면서 인구가 크게 감소했고, 세입은 20691 온즈(onze)에서 14405 온즈로 떨어졌으며, 수확량 역시 급감하면서 굶주림이 만연했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던 지배층은 이 문제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민중은 절망과 비탄에 사로잡혔다. 14세기 역사가 가브리엘 드 무시스(Gabriel de Mussis)는 시칠리아인들이 폭우, 샴쌍둥이의 탄생, 메시나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말 등 일련의 징조를 근거로 하느님이 시칠리아와 자신들을 저버렸다며 매일 무기력하게 지냈다고 기술했다.
1350년 9월 10일, 시칠리아 토착 가문과 카탈루냐 출신 가문들은 루이지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들은 왕이 성인이 되어서 분쟁을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1352년 2월 23일, 마테오는 이제 14살이 된 루이지에게 카타니아 사람들에게 통치를 시작할 의사를 밝히라는 편지를 쓰도록 강요했다. 아라곤 출신의 시칠리아 귀족이자 마테오의 정적이었던 블라스코 2세 데 달라고나는 8월 22일 궁정에 사절을 보내 이 서신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마테오를 규탄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흑사병이 만연한 상황에서 이 이상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10월에 평화 협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1352년 어머니 엘리자베타가 사망한 후 누나 에우페미아가 섭정을 맡았다. 1353년 6월 9일, 루이지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토착 귀족들을 진압하는 군대에 이끌려 메시나를 출발했다. 이후 타오르미나에서 엔리코 로소 백작의 영접을 받았고, 밀라초 평원에서 반군과 정부군이 대치하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타오르미나로 돌아갔다. 그해 6월 말에 사망한 동생 조반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메시나로 돌아갔으나, 7월 17일 민중이 폭동을 일으킨 후 엔리코 로소와 시모네 치이라몬테가 이끄는 토착 귀족들이 메시나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루이지에게 카탈루냐인들을 멸시한 마테오 팔리지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루이지는 이 요구를 거부했지만, 7월 19일 폭도들이 궁궐에 침입하여 마테오를 살해하자 궁궐을 탈출했다. 이후 카탈루냐 함대에 승산한 뒤 7월 29일 카타니아에 이동하여 블라스코 2세 데 알라고나가 이끄는 군대와 합세했다.
10월 2일, 루이지와 블라스코 2세는 반란군과 밀라초에서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이후 두 사람은 10월 24일 카타니아로 후퇴했고 11월 8일 마테오를 살해한 자들을 반역자로 규탄했다. 이후 카타니아 외곽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반란군 역시 카타니아 공략에 실패했다. 이렇듯 내전이 장기화되어가던 1354년 4월, 조반나 1세가 파견한 나폴리군이 루이지에게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손잡고 시칠리아로 침투해 팔레르모 등 시칠리아 내륙 대부분을 장악했다. 오직 카타니아와 메시나 만이 루이지를 여전히 왕으로 받들었다. 이후 조반나 1세의 남편이었다가 공동 왕이 된 뒤 여왕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 루이지 1세가 추가 병력을 보내기를 거부했기에, 루이지는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루이지는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치아라몬테 가문의 오랜 라이벌인 벤티미글리아 가문을 시종직으로 복직시키며 그들을 회유하려 했다. 11월에 군대를 친히 이끌고 시칠리아의 사장 서쪽에 있는 발 디 마자라 지방에서 캄마라타와 트라파니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1355년 5월 13일 렌티니 공성전을 벌였지만 6월 중순에 공략을 포기하고 카타니아로 철수했고, 7월 카타니아에서 흑사병이 또다시 유행하자 메시나로 피신했다. 이후 팔레르모를 상대로 공세를 벌였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 1355년 10월 16일 흑사병에 걸려 17세의 나이에 사망했고, 동생 프리드리히 4세가 시칠리아 왕으로 등극했다. 당시 왕의 나이가 14세에 불과했기에, 누나 에우페미아가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실권은 블라스코 2세 데 알라고나에게 있었다. 당시 시칠리아는 귀족들의 내전과 중세 흑사병으로 인해 피폐해졌고,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는 나폴리 왕국의 수중에 있었다.
1357년 에우페미아가 사망한 뒤 통치를 직접 맡은 프리드리히 4세는 아라곤 국왕이자 누이 엘레오노르의 남편인 페드로 4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봉신인 아테네 공국과 네오파트리아 공국을 아라곤 왕국에 넘길 테니 시칠리아에 군대를 보내 나폴리 왕국군을 축출하고 반란군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 페드로 4세는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들과의 전쟁이 급했기에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한편, 아테네 공국에서는 아테네 총독 레이먼드 베르나르디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켜 베르나르디를 축출했다. 그들은 프리드리히 4세에게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 왕가의 사생아인 아라곤의 올랜도나 디에고 페데리코를 새로운 대리자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디에고 페데리코를 아테네 공국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아테네와 네오파트리아 공작의 칭호를 취한 최초의 시칠리아 군주였다.[4]
1360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의 남편이자 공동 국왕인 루이지 1세가 이끄는 나폴리군이 메시나에 상륙해 시칠리아 내륙으로 진격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카타니아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나폴리군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였다. 얼마 후 카탈루냐 출신 귀족들이 동원한 용병대가 나폴리군을 격파했고, 루이지 1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나폴리로 철수했다. 그러나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에 합의된 대로 시칠리아를 앙주 가문의 통치로 되돌려야 한다고 여긴 귀족들이 여전히 건재했고, 프리드리히 4세는 이들을 상대로 긴 내전을 벌였지만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했다.
1373년 3월, 오랜 내전에 지친 양자는 아베르사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자신을 교황과 조반나 1세의 가신으로 칭하면서도 트리나크리아(Trinacria: 시칠리아의 고대 지명)의 왕으로서 시칠리아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용인되었으며, 자기가 죽으면 유일한 자식인 마리아가 왕위에 오르고 앙주 가문의 왕족과 결혼하도록 하겠다고 약조했다. 교황청은 프리드리히 4세와 화해하고 1321년부터 바르셀로나 왕조에 가해지던 파문을 해제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 때처럼 프리드리히 4세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이 묵살해버리면서 이행되지 않았다.
2.5.2.3. 마리아 여왕의 비극
1377년 7월 27일, 프리드리히 4세가 사망했고 유일한 자녀였던 마리아가 시칠리아 여왕에 등극했다. 그러나 실권은 아르탈 달라고(Artal d’Alagó), 만프레도 치아라몬테(Manfredo Chiaramonte), 페랄타의 굴리에모(Guglielmo di Peralta), 프란체스코 벤티밀리아(Francesco Ventimiglia)에게 있었고, 여왕은 우르시노 성에 연금된 채 아무런 권력도 행사하지 못했다.프리드리히 4세는 생전에 마리아와 밀라노의 군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아들인 안토니오 비스콘티의 결혼을 주선했다. 아르탈 달라고는 선왕이 생전에 추진했던 비스콘티 가문과의 결혼 협상을 지속했다. 1377년 가을,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조카인 베르투스 백작 조반니 갈레아스 비스콘티와 마리아의 약혼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아라곤 왕국이 이 소식에 분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력권에 속한다고 여긴 시칠리아가 밀라노와 결혼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행보를 걸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요르카 남작 길라베르 드 크뤼엘레스(Gilabert de Cruïlles)가 이끄는 아라곤 함대는 시칠리아로 항해하려는 모든 배를 공격해 불태워버렸고, 베르투스 백작은 그런 그들을 두려워해 시칠리아로 감히 가지 못했다.
1378년 가을,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의 맏아들이자 지로나 공작인 추안 왕자의 아내 마르타가 사망했다. 이에 카탈루냐 출신 시칠리아 귀족들은 마리아를 후안과 결혼시키자고 주장했다. 아라곤 왕국이 언제 시칠리아에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했던 다른 시칠리아 귀족들도 동의했고, 시칠리아 사절단은 1380년 봄에 아라곤 왕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후안은 같은 바르셀로나 왕가끼리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여기고 바르 공작의 딸 욜랑드와 약혼했다. 페드로 4세는 그 대신에 이제 갓 4살된 손자 마르틴과 마리아를 짝지어주기로 했다. 이 약혼은 1380년 7월 24일 시칠리다 사절단 대표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와 엔리코 로소가 바르셀로나 대성당에서 여왕을 대신하여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아라곤 왕 페드로 4세는 마리아와 마르틴 모두 어리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이자 마리아의 남편 마르틴의 아버지인 마르틴의 섭정을 받게 했다.
한편, 마리아 여왕은 우르시노 성에서 아르탈 달라고의 감시하에 있다가 1379년 1월 23일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에 의해 성에서 빠져나와 아우구스타로 이송되었다. 이후 리카타로 인도되었다가 다시 아우구스타로 옮겨진 그녀는 그곳에서 예전보다 훨씬 안 좋은 환경에서 억류된 채 아르탈 달라고와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의 내전을 지켜봐야 했다. 아우구스타가 아르탈 달라고의 군대에 포위되자, 굴리에모는 1382년에 여왕을 샤르데냐의 칼리아리로 옮겼다. 원래대로라면 아라곤으로 가서 신랑과 대면해야 했지만, 아라곤까지 가는 데 필요한 자금과 물자가 부족해서 칼리아리의 성채에 머물러야 했다. 게다가 칼리아리 총독 조반니 드 몽부이가 샤르데냐 섬의 주군이자 아라곤 왕인 페드로 3세로부터 그녀를 여왕이 아니라 수감자로 취급하라는 지시를 따르는 바람에, 그녀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얼마 안 되는 수행원과 함께 지내야 했다.
1386년 봄, 마리아는 비로소 칼리아리를 떠나 마요르카로 옮겨졌고, 얼마 안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미래의 남편과 대면했다. 이후 바르셀로나의 페드랄베스 수도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억류 생활을 하다가 1390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마르틴과 마리아의 결혼을 허가하면서 비로소 결혼식을 치렀다. 그녀가 이렇듯 아라곤에 억류된 사이, 시칠리아 왕국은 아르탈 달라고, 만프레디 치아라몬테, 굴리엘모 디 페랄타, 프란체스코 벤티밀리아의 네 섭정의 지도를 받았다. 1392년 3월 22일 마리아가 장인 마르틴, 남편 마르틴과 함께 시칠리아에 돌아오자, 이 네 명은 마리아에게는 여왕으로서 충성을 맹세했지만 두 마르틴 부자를 섬길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마르틴은 그들이 자신과 아들의 집권을 받아들이게 하고자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고, 시칠리아는 수 년간 아라곤 왕국군과 시칠리아 귀족 사병대간의 전쟁에 시달렸다.
1398년 반란을 최종적으로 진압한 마르틴은 반란을 이끈 귀족 가문을 숙청하고 그들의 영지를 자신과 함께 한 카탈루냐 귀족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한 시칠리아 토착 귀족들에게 나눠줬다. 이후 1398년 초 아들 마르틴이 마르티누 1세로서 마리아와 함께 공동 왕으로 등극했고, 마리아는 1398년 11월 17일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프리드리히로 지었지만, 아이는 1399년 성 요르요스의 날에 우르시노 성 예배당에서 프리드리히 대신 피에트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마리아는 갓난아기를 직접 기르고 싶어했지만, 아이의 성격을 강인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에게서 떨어뜨려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녀는 아이를 친히 기르지도 못하는 현실에 깊은 충격을 받고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1400년 11월 8일, 시칠리아 왕실이 마상창시합을 지켜보던 중 창 하나가 날아오면서 피에트로의 머리를 가격했고, 피에트로는 이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아들이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마리아는 절망에 빠져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1401년 봄 카타니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렌테니 성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역병에 걸려버린 그녀는 독방에 갇혀 지내다가 5월 25일 새벽 2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2.6. 트라스타마라 왕조
마리아 사후 시칠리아의 단독 군주가 된 마르티누 1세는 1402년 나바라 왕국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블랑슈(수리아 1세)와 재혼했다. 1409년 사르데냐가 아라곤 왕 마르틴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해 그 해 6월 30일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드 나르본이 지휘하는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해 7월 25일 칼리아리에서 사망했다.마르티누 1세는 시칠리아 귀족 타르시아 리자니의 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페데리코를 두었고, 또다른 시칠리아 귀족 여성 아가투치아 페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비올란테를 두었다. 아라곤 왕 마르틴 1세(시칠리아 왕으로는 '마르티누 2세')는 아들이 죽자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내세우고 아라곤 왕위 후계자로 계승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생아라는 점 때문에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410년 5월 31일 마르틴 1세 마저 사망해버리면서, 바르셀로나 왕조는 단절되었고, 2년 후인 1412년 페르난도 1세가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수립되었다.
왕이 2년간 세워지지 않는 동안, 시칠리아는 마르티누 1세의 미망인인 나바라의 블랑슈와 사생아인 페데리코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페르난도 1세는 4명의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시칠리아로 파견하고 군대를 별도로 보내 상황을 진정시키게 했다. 1415년 위원회가 시칠리아의 평화를 이뤄내자 둘째 아들인 추안 2세를 시칠리아 총독으로 보냈다.
1416년 4월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한 후 장남 알폰소 5세가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을 맡았다. 시칠리아인들 사이에서 아라곤 왕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알폰소 5세는 즉각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한 뒤 여세를 몰아 사르데냐 공략에 착수했다. 1420년 5월 24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친히 샤르데냐로 진군해 그곳의 주민들을 복속시켜서 샤르데냐의 지배권을 온전하게 가져간 뒤 코르시카 섬으로 분견대를 보내 칼비 시를 공략하고 보니파치오 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애를 먹었다. 그러던 1421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가 앙주 공작 루이 3세의 맹공에 시달린 끝에 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알폰소 5세는 보니파시오 시 포위를 풀고 나폴리로 진군해 그곳을 포위하던 루이 3세를 몰아냈다. 당시 아들이 없었던 조반나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칼라브리아 공작에 지명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5세가 나폴리 국왕을 자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 후 알폰소 5세는 아라곤 통치를 아내 마리아에게 위임한 뒤 나폴리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를 용병대장으로 고용해 경쟁자인 앙주의 루이 3세와 밀라노 귀족 아텐돌로 스포르차의 연합군을 상대하게 했다.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스포르차를 지원하자, 그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진정한 교황으로 받들기로 하고, 당시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파문된 뒤 입지가 위태롭던 베네딕토 13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얼마 후 전세가 불리해진 스포르차 가문이 루이 3세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하면서, 알폰소 5세의 입지는 굳건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갈수록 커지자 위협을 느낀 조반나 2세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을 철회하려 했다. 그는 낌새를 눈치고 1423년 5월 여왕의 연인이자 나폴리 궁정의 유력한 인물인 잔니 카라촐로[5]를 체포하고 여왕 역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아텐돌로 스포르차에게 아라곤인들을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스포르차는 군사를 일으켜 아라곤군을 기습공격해 크게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의 요새인 카스텔 누오보로 피신했다.
그 후 조반나 2세는 카스텔 누오보를 포위 공격했지만 아라곤군의 반격으로 패배한 뒤 아베르사 요새로 퇴각했고, 알폰소 5세를 양자로 들였던 것을 취소하고 앙주의 루이 3세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 알폰소 5세는 라퀼라에서 조반나 2세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던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카스티야 내전이 동생 후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일단 귀국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로 귀환하던 중 루이 3세가 소유한 마르세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1432년, 나폴리 왕국의 권신 잔니 칼라촐로가 조반나 2세가 고용한 암살자에게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나폴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시가 군사 동맹을 맺고 그를 압박해오자, 어쩔 수 없이 1433년 조반나 2세와 10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이후 예르바 섬에 대한 군사 원정을 감행했고, 1434년 트리폴리 공략에 착수하는 등, 한동안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기울였다.
1434년 앙주의 루이 3세가 사망했다. 조반나 2세는 루이 3세의 형제인 르네를 나폴리의 새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승인하지 않았고, 여왕은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가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인 1435년에 사망했다. 알폰소 5세는 드디어 나폴리 왕국을 공략할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동생 후안, 엔리케, 페드로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를 공략한 후 가에타를 포위했다. 그러나 1435년 8월 4일 폰차 해전에서 제노바 함대가 아라곤 함대를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후안, 엔리케와 함께 포로로 잡혀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넘겨졌다.
알폰소 5세는 밀라노에서 교양있는 태도를 보여 비스콘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아라곤 세력이 나폴리를 공략하는 것을 막는 것은 밀라노에 어떠한 이득도 안 된다고 설득했다. 때마침 아라곤에서 남편을 대신해 통치를 행사하던 마리아 왕비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며 남편을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비스콘티 공작은 1436년 알폰소 5세와 형제들을 풀어주고 앞으로는 아라곤 왕국과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1436년 2월, 알폰소 5세는 시칠리아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남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카푸아를 탈환하고 가에타에 군사 기지를 세웠다. 1438년 5월 19일 조반나 2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르네가 나폴리에 도착하여 '레나토 왕'으로서 나폴리 왕을 자처했다. 알폰소 5세는 1439년 9월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동생 페드로가 전사했다. 그 후 르네가 이끄는 앙주 용병들이 맹공을 가하자 아라곤군은 점점 밀려났다. 그러나 르네가 고용한 용병대장 야코포 칼도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앙주 용병대의 기세는 약화되었다. 알폰소 5세는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해 아베르사, 살레르노, 베네벤토, 만프레도니아, 비톤토를 공략했다. 르네는 교황으로부터 1만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알폰소 5세는 교황군 지휘관인 조반니 비텔레스 추기경을 매수해 교황령으로 돌아가게 했다.
아라곤 해상 제국
1441년 11월 10일 나폴리를 포위한 아라곤군은 수개월간 맹공을 퍼부은 끝에 1442년 6월 2일 공략에 성공했다. 르네는 앙주로 도피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에 입성한 뒤 나폴리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이래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은 아라곤 왕국에 의해 통합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알폰소 5세가 스포르자 가문과 맞서고 있는 교황군을 지원하는 대가로 나폴리의 왕으로 인정했다. 알폰소 5세는 마요르카의 건축가 기옘 사그레라(Guillem Sagrera)에게 카스텔 누오보 요새에 궁정을 세우게 한 뒤, 다시는 아라곤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폴리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알폰소 5세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나폴리에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1443년 나폴리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카스텔 누오보 정문에 웅장한 개선문을 세웠다. 또한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를 즐겨 읽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로마사를 매일 읽는 등 고전 문학을 탐독했다. 또한 시칠리아 최초의 대학인 시치랄레 스투디움 제네날레(Siciliae Studium Generale)를 설립하는 등 교육에도 신경썼다. 그리고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조반니 폰타노(Giovanni Pontano), 안토니오 베카델리(Antonio Beccadelli) 등 인문주의자들을 보호하는 등 이탈리아 문인들을 후원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던 알바니아 지도자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를 주목하고, 자신의 봉신으로 삼고 막대한 지원을 해줬다. 여기에 보스니아 공작 스테판 부치치 코사차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고 그가 보스니아의 지배를 확고히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는 이렇듯 발칸 반도의 군소 세력을 봉신으로 끌여들이고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장차 발칸 반도로 영역을 확장할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1454년 제노바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4년간의 전쟁을 치렀지만 승패가 쉽사리 가려지지 않자, 알폰소 5세는 1458년 6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해 제노바를 향한 공세에 착수하려 했다. 그러나 돌연 중병에 걸렸고, 6월 27일 나폴리의 카스텔 누오보에서 사망했다. 동생 추안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아라곤,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고, 알폰소 5세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가 나폴리의 왕이 되었다. 후안 2세는 형과는 달리 오로지 아라곤에 전념했고, 시칠리아에는 총독을 보내 알아서 통치하게 했다.
2.7. 합스부르크 왕조(스페인)(1516~1713)
1494년의 이탈리아
1492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이사벨 1세의 결혼으로 트라스타마라 왕조 스페인 왕국으로 재탄생했다. 이후 스페인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에게로 계승됨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압스부르고 왕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발루아 왕조 프랑스 왕국은 이탈리아의 패권을 위해 샤를 8세부터 앙리 2세때까지 줄기차게 8차에 거쳐 이탈리아에 개입했지만(이탈리아 전쟁) 별 소득없이 물러났고, 남이탈리아의 패권은 스페인이 쥐게 되었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팔레르모의 인구는 1600년에 110,000명으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2.8. 사보이아 공국(1713~1720)과 합스부르크 제국(1720~1735)
이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의 결과로 시칠리아가 사보이아 공국에게 넘어가면서 사보이아 공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1718년 이탈리아 영토의 탈환과 프랑스 왕위를 주장한 펠리페 5세가 시칠리아를 침공해 스페인이 다시 시칠리아를 차지했고, 이를 본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가 개입해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사국 동맹 전쟁이 사국 동맹의 승리로 끝난 후 사보이아 공국이 시칠리아를 돌려받았으나 카를 6세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게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를 맞교환하자고 제안해서[6] 이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자가 되었다.(1720~1735)2.9. 보르본 왕조(스페인)(1735~1816)
1735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펠리페 5세가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재탈환하여 자신의 5남인 카를로스(훗날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를 시칠리아와 나폴리와 시칠리아 국왕으로 임명했고, 다시 스페인 왕가와의 혈연관계가 이어졌다. 카를로스는 이복형 페르난도 6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떠나면서 3남 페르디난도에게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물려주었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2차 이탈리아 원정으로 나폴리 왕국이 무너지자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시칠리아로 대피해 영국군의 보호를 받았다.[7]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에는 잠시 영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1816년, 남이탈리아 본토의 나폴리 왕국과 1282년 이래 다시 법적으로 합쳐져[8]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재탄생했다.
3. 관직
왕국으로 승격된 1130년부터 시칠리아 또한 고위 관직들을 신설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 국왕이 된 루제루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반기를 든 귀족들을 제압한 후 왕국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1140년, 루제루는 팔레르모에서 의회를 소집 했으며, 여기에 시칠리아 왕국의 가장 중요한 7개의 직위가 설립해 집정관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시칠리아의 고위 관직 제도는 후술할 대제독을 제외하면 오트빌 왕가의 고향인 프랑스 왕국의 것을 그대로 모망한 것이다.- 대무관장(Gran Connestabile)
집정관으로도 불리며, 두 가지 중요한 업무가 있었다. 하나는 왕의 검을 수호하는 것, 다른 하나는 지방의 군대를 지휘하는 것으로 군의 지휘관이자 군사 관련 사건을 심판할 책임이 있었고 왕국의 최고 관직이였다.
- 대제독 (Grande Ammiraglio)
시칠리아 해군의 총지휘와 함께 항구와 선착장을 수비하는 업무를 맡았다. 참고로 시칠리아의 대제독직은 서방 교회 최초의 해군 지휘관의 칭호이기도 했다.
- 수상(Gran Cancelliere)
법률 문서 관리 및 왕에게로 오는 모든 청원서 및 외교 문서를 검수할 업무를 관장했기에 현대의 법무부 장관+외교부 장관으로 볼 수 있다.
- 대심문관(Gran Giustiziere)
“대법정 판사와 함께 사법 집행을 주재하고 다른 모든 사법관을 감독했다. 수상의 임무를 수행했다. 아라곤 왕국의 바르셀로나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 사법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와 정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실제로 당시 이 직책을 맡은 법률가는 없었고, 왕국의 유력 귀족이 처음에는 종신으로, 그 후는 페트루 2세때에 이르러서는 왕족들이 상속했다. 차이메 2세의 통치 중 이 직책의 소유자는 몬테 산 줄리아노의 성주의 지위를 누렸다. 1569년 개혁 이후 1816년까지 대법관의 직무는 대위 자격을 가진 대민사 법원의 법원장이 실시했다.
- 대시종관(Gran Camerario)
왕의 궁정에서 왕의 몸을 돌보고, 왕의 잠자리를 정돈하고, 왕과 그 후계자들, 그리고 가족 모두를 돌보며, 시종과 보초를 지휘하며, 왕의 보석과 다른 귀중한 물건을 지키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밖에도 왕국의 세입징수관, 세관직원들을 비롯한 기타 하급 관리에게 관할권을 행사하였고, 지출의 관리를 감독했다.
이 지위는 곧 세습제가 되어, 제라치 백작의 칭호를 가지는 벤티밀리아 가문이 군주에게 반란을 일으킨 기간에만 이어졌고, 이 지위는 왕국의 다른 대봉건 영주에게 종신직으로 주어졌고, 그 후, 군주의 사후, 그 사이에 복권한 벤티밀리아 백작으로 이어졌다. 1569년 개혁 이후 1816년까지 왕실유산재판소 의장이 대시종관을 맡았다.
- '대서기관(Gran Protonotaro)
국왕을 보좌하고 국왕에게 상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의무가 있었고, 국왕으로부터 유효하고 합법적인 형식을 부여받은 모든 면장의 발행을 그의 손으로 실시하는 등 국왕의 공증인의 기능을 수행했다. 신성한 왕실 회의, 왕국 대표단, 의회의 비서인 서기관은 행정 문제에서 광범위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왕국의 공증인과 주와 남작의 공무원은 서기관에게 의지했다. 서기관은 의식과 봉건적 서임 문제로 특히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직책은 관방과 마찬가지로 왕실 문서를 등록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개인 기념물 심사와 같은 특정 기술에 대해서는 왕국 비서라는 특별한 직책의 지원을 받았다. 이 직책은 1842년 11월 15일에 폐지되었다. 1819년 7월 20일, 관련 책임은 사법성 중장의 관할하에 있는 국무성 및 국무국으로 이관되었다.
- 대궁내관(Gran Siniscalco)
왕궁을 돌보는 것은 왕궁에 식량을 제공하고, 숲을 감독하고, 사냥을 예약하고, 법원의 모든 가족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며, 왕실과 그 공식 하급자들의 판사였다.당초는 군주의 승인을 얻어 주어진 이 지위는 나중에 종신의 세습이 되었고, 키아라몬테가, 특히 모디카 백작의 칭호를 가진 일족의 특권이 되었다. 키아라몬테가가 군주에게 반항하고 있던 기간에만 이 지위는 왕국의 다른 대영주에게 종신연금 기준으로 주어졌고, 모디카 백작의 사후, 복권한 키아라몬테 백작으로 반환되었다.
4. 종교적 관용
귀부인 안나의 묘비석. 라틴어, 그리스어, 아랍어, 히브리어의 네 언어로 적혀 있다.
킹덤 오브 헤븐 영화에서도 십자군이 거쳐가는 항구 앞 해변에서 무슬림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이 잠깐 나왔듯, 시칠리아는 매우 다문화적인 모습을 띈 곳이었다. 노르만 인들은 반란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슬림,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였고 그들을 고위직에 등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칠리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 라틴인, 무슬림들은 정기적으로 교류했고,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서로의 삶에 관여했으며 서로간의 통혼은 흔하게 일어났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사는 가톨릭 신자들이 무슬림식 이름을 채택하는 일도 흔하게 일어났다.
많은 도시에서, 각 종교 공동체는 그들만의 행정적, 사법적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팔레르모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이 모스크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들의 법적 문제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하는 판사인 카디스에 의해 해결되었다. 이집트의 사절 파크르 앗 딘은 시칠리아가 기독교 지배를 받는데도 이슬람 예배를 알리는 아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고 시내에 많은 모스크가 있어 놀라웠다고 기록했다.
호엔슈타우펜 정부가 수립된 이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특권을 유지했지만, 무슬림 인구는 점점 억압받았다. 이에 반발한 무슬림 공동체들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시칠리아 산악 지역에 재정착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무슬림들을 통제하기 위해 아풀리아의 루체라와 칼라브리아의 기리팔코로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세금을 내고 왕의 이익을 위해 농업 노동자, 장인, 석궁사 등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무슬림이 시칠리아 왕국의 치하에 복종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에 무슬림들로 구성된 군대가 편성되기도 했으며, 이들 무슬림 부대는 신성 로마 제국을 도와서 같은 종교를 믿는 중동의 다른 무슬림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도 참가할 만큼 충성을 바쳤다.
루체라의 무슬림 공동체는 1300년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에 의해 해체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노예로 팔렸다. 유대인 공동체는 1493년부터 1513년까지 시칠리아에 스페인 종교재판소가 설립된 후 추방되었다. 남은 유대인들은 점차 동화되었고, 그들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5.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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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같이보기
[1] 로베르 기스카르의 조카[2] 삼남 엔리코는 요절했다.[3]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216만 전의 금화를 이 원정에서 소모했다고 한다.[4] 이전까지는 바르셀로나 왕조의 어린 왕자가 이 칭호를 획득했다.[5] '조반니 카라촐로'라고도 하는데, 잔니(Gianni)는 조반니(Giovanni)의 애칭이다.[6]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국력차를 앞세운 반 협박에 가까웠다.[7] 이 때 시칠리아까지 호위한 사람이 다름아닌 호레이쇼 넬슨이었다.[8]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칠리아에서 카페계 앙주 왕가가 쫓겨나고부터, 남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 섬은 다시금 같은 군주 밑에 있었던 적도 상당히 길었지만, 법적으로는 별개의 동군연합 상태였다가 1816년에야 그게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