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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타오


<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종군왕(鍾郡王)
자이타오
載濤(재도) | Zaitao
파일:자이타오.jpg
△ 쌍룡훈장을 달고 있는 자이타오
이름 자이타오
성씨 아이신기오로
ᠠᡳᠰᡳᠨ ᡳᡴᡠᠸᠠᠩ | 愛新覺羅 | 애신각라 | Aisin Gioro
경숙(景肃)
성암(省庵)
별명 필마온(弼马瘟)
출생 1887년 6월 23일
청나라 베이징
(現 중국 베이징시)
사망 1970년 9월 2일 (향년 83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묘소 바바오산 혁명 묘지
가족 아이신기오로 이후완 (아버지)
광서제 (형)
푸이 (조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프랑스 솜 기병학교
직업 군인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궁핍한 삶2.3. 인민공화국에 등용되다2.4. 말년과 사망
3. 여담4.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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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신기오로 자이타오는 청나라의 만주족 왕자로 푸이의 숙부였다.

2. 생애

2.1. 초기

1886년, 아이신기오로 자이타오는 순친왕부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이등 진국장군에 봉해졌고, 이후 보국공으로 승진했다. 자이타오는 십 대부터 기마와 활쏘기를 연습했는데, 비록 승마 실력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좋은 말을 알아보는 재능이 있었다. 어떤 말이든 단 몇 번만 훑어봐도 그 말의 나이, 품질, 내구성 등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8개국 연합은 베이징을 공격하여 궁 안의 소중한 문화재들이 불타버렸다. 서태후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개혁을 묵인하여 보국공 자이타오는 금위군대신에 임명되었고, 근위군 창설 준비를 위해 독일·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지로 군사 시찰을 떠나게 되었다. 프랑스 솜 기병학교에서 유학하며 기병 전술을 심화 연구했고, 귀국 후 본격적으로 금위군을 훈련·편성하려 했지만, 귀국 하자마자 신해혁명이 터지게 된다.

융유태후(隆裕太后)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자이타오에게 군대를 이끌고 혁명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재타오는 한 번도 전쟁을 지휘해 본 적이 없었고, 겁이 많고 신중한 성격이라 선뜻 출정을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융유태후에게 생각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융유태후는 그를 한심하게 여겼지만 크게 꾸짖지는 않았고 결국 위안스카이에게 출정을 명령하게 된다. 이 소식이 궁 밖에 알려지자, 자이타오는 체면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결국 조정에서 물러나 오랫동안 칩거했다.

청나라는 멸망을 피할 수 없었고 자이타오는 다른 황족들과 함께 종사당(宗社党)을 결성해 푸이의 퇴위를 반대했지만, 자이타오 본인부터가 청의 상황에 대해 아는게 없었던[1] 탓에 청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후 자이타오는 정계를 떠나 칩거하며 매일 새를 기르고 꽃을 가꾸거나,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의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가끔은 경마장을 찾아 경마를 관전하며 나름대로 한가로운 생활을 보냈다. 이 시기 가문의 주요 수입원은 청황실우대조건에 따라 지급되는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2.2. 궁핍한 삶

핍궁사건으로 푸이자금성에서 쫒겨나자 황실 친척과 귀족에 대한 모든 특혜는 폐지되었다. 장쉰이 장훈복벽으로 선통제를 복위시키자 황실 경비대신직을 지냈으나 12일만에 끝나버리고 1925년이 되자 약 서른 명에 달하는 대가족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재타오는 어쩔 수 없이 황실 대대로 내려오던 베이러 저택(贝勒府)을 타인에게 임대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산라오후퉁(山老胡同) 2번지에 있는 작은 민가로 이사하여 임대료 수입으로 겨우 생활을 이어나갔다. 1929년, 재타오는 다시 한 번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혔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베이러 저택(贝勒府)를 푸젠 가톨릭 대학(辅仁大学)에 매각하였고, 그제야 가까스로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자이타오가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쭤린은 자이타오를 등용하려 했으나 그는 번번히 거절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제의 지원을 받은 푸이는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을 건국했다. 그 소식에 청왕조의 신하들은 족족 푸이에게 투항했고 푸이는 자이타오 역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설득하거나 직접 편지를 써서 포섭하려 했으나 하지만 재타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결국 완전히 절연하고 서로 왕래를 끊게 되었다.

1936년, 베이징 시장이었던 쑹저위안은 자이타오를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그가 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정성스럽게 몇 마리의 준마를 골라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자이타오는, 그 의도를 간파하고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 우리 집에는 마구간이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말을 기르고 싶은 생각도 없네요……”

또한 적의 정권이었던 화북 정권의 위원장 왕이탕(王揖唐)이 선물을 들고 직접 찾아와 설득을 시도했다. 나는 결코 매국노의 개가 될 수 없다며 왕이탕이 가져온 선물을 대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탕은 일본군을 대동하고 재타오의 집을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공식 임명장을 내밀며 자이타오를 협박했고 자이타오는 죽을지언정 매국노가 되지는 않겠다며 여전히 거절했다. 화가 난 왕이탕은 암살을 계획했지만, 자이타오가 전 청나라 왕족이라는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하여 여론의 반발을 우려한 끝에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1945년이 되자, 자이타오는 더 이상 하인을 둘 경제적 여유조차 없어 집안일을 스스로 챙기고 직접 가계부를 정리했다. 매일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지만 그래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가족의 오래된 물건과 골동품을 팔기 시작했으며 노점상을 열기도 했다. 때때로 베이징 거리를 돌아다니며 리어카를 끌고 폐품을 주워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2.3. 인민공화국에 등용되다

1950년 마오쩌둥으로부터 공직 임명장을 받고 만주족의 특별 대표로서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다. 저우언라이는 자이타오가 중국에 기여하기를 원했고 중앙위원회에 "군사용 말 품종 개량"이라는 제안을 제출했다. 그의 제안은 군사정치그룹에서 재빨리 승인을 받은 뒤, 마오쩌둥에게 검토를 위해 제출되었다. 마오쩌둥은 이 아이디어에 동의하였고 중앙위원회가 자이타오를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 사령부 말 관리국 고문으로 고용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지역은 지형이 복잡하고 산길이 험난해 수송로가 적의 집중포격을 자주 받았고, 이로 인해 후속 포병부대에 큰 피해가 발생하여 전진이 어려웠다. 그러자 주더는 마정국(馬政局)에 명령을 내려 전국에서 말을 수급하여 북한으로 보내 수송하라고 긴급히 명령했다. 자이타오는 이에 25,000마리의 군마를 선택하여 전선으로 배치시켰다.

재타오는 전국 각지의 군마 농장의 구체적인 상황을 익히기 위해 동북부, 서북부 및 기타 지역을 자주 방문하여 조사했다. 자이타오는 각 군 지역의 말 관리 기관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임을 발견하고는 정신차오와 함께 "각종 오래된 말 농장의 통합 및 통합"에 대한 요청 보고서를 공동으로 작성했다. 말 행정국의 논의와 승인을 거쳐 중앙 군사 위원회에 제출되었다. 그후, 마방국은 군마농장 26곳을 통합, 정비, 통합, 확장하였고, 국가적으로 개량된 군마 사육장 50여 곳을 설립함으로써 역량 강화를 꾀했다.

1955년 7월 5일, 자이타오는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 참석했다. 휴식 시간에 그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다정하게 악수를 나누며 담소를 나눴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그를 마오쩌둥 주석에게 소개했다. 마오쩌둥은 자이타오에게 지금도 푸이와 연락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자이타오는 순간 멈칫하며, 푸이가 전범이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에 연락이 끊겼다고 답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그가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그의 숙부이니, 시간이 되면 한 번 만나보세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고치기만 하면 좋은 동지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이타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마오쩌둥의 부탁을 받아 푸이의 두 여동생과 함께 푸순 전범관리소를 찾았다. 푸이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일곱 번째 삼촌'을 보고 깜짝 놀란 그는 순식간에 달려와 자이타오를 꼭 껴안고 '일곱째 삼촌'을 부르며 몹시 흐느끼는 감동적인 재회를 맞았다.

2.4. 말년과 사망

1966년, 재타오는 고령이 되어 한가로운 노년을 즐기며 종종 호숫가에서 경극을 부르곤 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경극 애호가로, 베이징의 유명한 '자쯔화롄(架子花臉)' 배우 첸진푸(錢金服)에게 사사하며 무생(武生) 역할을 전문으로 익혔다. 그의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경극 애호가들 사이에서 자주 갈채를 받았다. 어느날, 문화부 장관 션옌빙(沈雁冰)이 지나가다가 그의 경극 공연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션옌빙은 그에게 경극 강의를 요청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이타오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반신불수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의사는 그가 전립선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내렸다. 경극 교육은 무산되고 말았다.

1970년, 베이징 베이징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 후 그의 유해는 저우언라이의 지시에 따라 바바오산 혁명 묘지에 매장되었다.

3. 여담

  • 푸이가 마오쩌둥과 만나기 전에 자이타오와 만나 대화한 내용이 남아있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그날, 자이타오는 그를 집으로 초대해 황양고기를 대접했다. 식사를 하던 중, 그가 물었다.
"듣자 하니, 모주석을 직접 뵌 적이 있다고요?"
"그럼, 당연하지."

자이타오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때 주총리도 옆에 있었어. 모주석께서 미소를 지으며 총리를 가리키며 그러시더군. '나는 《홍루몽》에 나오는 노부인 같은 존재라, 크게 관여하지 않아. 이 사람이 집안을 맡아 꾸려 나가고 있지.'"

푸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야기에 푹 빠졌다. 젓가락을 들고 있던 오른손이 공중에서 멈춘 채, 황양고기를 입에 넣는 것도 잊고 있었다.

자이타오는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 얼굴에 신비로운 기색을 띠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아느냐? 나는 모주석 앞에서 직접 의견을 건의한 적도 있다네! 나는 '만청(滿清)'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를 바꿔야 한다고 말씀드렸어. 그러자 총리께서도 동의하시면서 '청나라는 그냥 청나라지, 왜 원(元)나라는 몽골이라고 하지 않으면서 유독 만청만 강조하는가?'라고 하셨지. 모주석께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 있는 말이오.'라고 하시더군."

그는 안경을 벗고 황양고기를 큼지막하게 씹으며 덧붙였다.
"사실 그때 의견을 낼 때, 속으로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

푸이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이타오에게 했던 마지막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모주석이 이렇게 민주적이셨다니……"

그 생각이 스치자, 불안하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4. 서훈


[1] 당장 청나라 군대 상황이 어떤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