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20:47:32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

1. 개요2. 상세3.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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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가톨릭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인 안셀무스 대주교가 고안한 하느님 존재증명의 한 가지. 본체론적 증명이라고도 한다.

2. 상세

안셀무스는 하느님을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어떤 것"이라고 정의했다.[1] 그런데,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그 본성상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안셀무스의 하느님 존재증명의 대략적인 논의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도식화한다면,
  • 전제1: 하느님은 가장 위대한 것이다.
  • 전제2: 가장 위대한 것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 결론: 따라서 하느님은 존재한다.

3. 비판

안셀무스의 증명이 나오자마자 안셀무스와 동시대의 사람인 프랑스 마르무티에의 수도자 고닐로(Gaunilo)는 다음과 같이 안셀무스의 증명을 패러디해서 비판하기도 했다. 이 논증은 '완벽한 섬' 논증이라고 불린다.
  • ① 그보다 더 근사한 섬을 상상할 수 없는 가장 근사한 섬을 상상해 보라.
  • ② 그런 섬은 상상할 수 있으므로 적어도 상상 속에 존재한다.
  • ③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근사한 섬'보다 '실제로 존재하는 근사한 섬'이 더 근사하다.
  • ④ 그렇기 때문에 그보다 더 근사한 섬을 상상할 수 없는 가장 근사한 섬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 ⑤ 따라서 가장 근사한 이 섬은 실제로 존재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섬이란 것이 섬에 들어가는 순간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나무에 고기가 열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섬이라도, 안셀무스의 논리에 따르면 그런 터무니없는 섬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것은 존재해야 한다는 말부터가 문제라 보기도 한다. 여러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들은 기준에 따라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가장 위대한 것이 존재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생각은 상상도 포함되기 때문이다.[2][3]

당시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해 비판을 종종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조차 사람들이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기독교의 하느님을 육화하시는 하느님임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추상적 개념으로 하느님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는 설혹 우리가 안셀무스의 논증을 논리적으로 수용한다 해도 이렇게 증명된 신이 정말 기독교의 하느님일까라는 물음이 떠오르게 한다.[4]

은 존재를 선험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며 비판했고, 러셀의 경우 잘못된 걸 찾아내는 것보다 틀렸다는 걸 알아채는 게 빠르다고 비꼬았다. 칸트의 경우 '존재'는 실체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 자체가 넌센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5] 이후 고틀로프 프레게가 이를 이어받아 언어학적으로 넌센스임을 재차 증명한다. 다만, 근대 철학자들 중에서도 데카르트라이프니츠 같은 대륙 합리론 철학자들과 헤겔 같은 경우는 안셀무스의 논증을 지지했다. [6]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자 더글라스 개스킹은 '가장 위대한 존재가 하느님이라면, 존재하면서 천지를 창조하는 하느님보다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천지를 창조하는 하느님이 더 위대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1] 여기서 '위대하다'라는 말은 '우월하고 좋은 속성과 능력을 가졌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2] 하지만 이 비판에 다음과 같은 반박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무리 완벽한 섬을 생각해도, 그것보다 더 완벽한 섬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섬은 완벽함이 부여될 수 없는 대상이고, 거기서는 존재를 끌어낼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정의상 더 이상 완벽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완벽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으로부터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속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아무리 완벽한 섬을 상상해도, 완벽한 섬을 상상해낼 수 없다는 말 자체부터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문제. 정의를 가장 완벽한 섬이라 정의했기 때문에, 실존하지 않는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이미지적으로 상상을 못해도 그 개념은 나타낼 수 있다. 즉, '완벽함'이 섬에도 동일하게 부여될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1의 제곱근인 허수는 -1의 제곱근인 것을 상상할 수 없기에 비존재하지만, 애초에 그 비존재를 가장하고 만든 개념으로 수학 체계상에서는 실재할 수 있다.[3] 반박: 그러나 현실에서는 허수 길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개념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현실에 존재하란 법은 없다. 또한 하느님이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알아야 하므로 순환 모순에 빠진다. 또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정 대상인 것은 아니다. 위의 논리는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가 존재함을 나타내지 그것이 신임을 보여주진 않는다.[4] 『처음 읽는 중세철학』 p.174[5] 많은 경우 이 중 칸트의 비판을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본다. 중세시대에는 존재를 속성에서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으며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부활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 존재를 속성처럼 취급했다. 다르게 말해 칸트의 비판은 그때까지 상식적으로 통용되던 철학적 개념을 논박한 것으로 철학사적 의의또한 크다.[6] 현대에도 이 논증을 지지하거나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소수이기는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