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04:56

앨런 핑커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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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앨런 핑커튼
Allan Pinkerton
파일:1000118910.jpg
본명 앨런 J. 핑커튼
Allan J. Pinkerton
출생 1819년 8월 21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사망 1884년 7월 1일 (향년 64세)
일리노이주 시카고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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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경찰, 탐정, 기업인
자녀 3명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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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경찰관, 탐정. 사설탐정회사인 핑커튼의 설립자이다.

2. 생애

영국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8살때 아버지를 잃은 후 학교를 그만두고 배럴 제조 견습공으로 일하던 도중 노동자 운동에 참여하게 되나 1839년에 감옥에 갇힌 동지를 구출하려다 실패하여 체포령이 떨어지자 1842년 미국 시카고로 도주하였다.

이후 경찰에 들어가 쿡 카운티의 최초의 형사가 되었고 맥주통을 만드는 가게를 열어 당시 흑인 노예들이 북부로 도망치는 것을 돕던 도중에 위조업자들이 동전을 위조하는 것을 목격하게되었다. 이에 동전 제조자들을 일망타진하는 성과를 이루면서 일리노이주 케인 카운티의 보안관의 요청으로 부보안관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에드워드 러커라는 변호사와 만나 함께 규합하여 1850년에 본인의 이름을 건 핑커튼 사립 탐정 사무소를 설립한다.

앨런 핑커튼은 이 사무소를 기점으로 직원들을 고용하여 범죄 수사와 철도 경비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어느날 철도와 관련된 사건을 수사하던 도중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아채게 되고, 그 공으로 당시 발생한 남북 전쟁중에 남북 각 주에 대한 군사 정보를 수집해 연방 정부에게 전달하는 태스크포스를 설립하게 된다.

조지 B. 매클레런 장군과 친분을 가져 그의 정보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 정보원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나쁜 편인데, 남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과대평가해서 보고함으로서 매클레런이 남군을 지나치게 경계하고 소극적으로 나오는 데 영향을 미쳤다. 물론 매클레런은 핑커튼의 보고가 아니었더라도 상대 규모를 터무니없이 뻥튀기하는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핑커튼만의 잘못은 아니긴 하다. 남북전쟁 역사학자 T. 해리 윌리엄스는 핑커튼의 정보를 형편없다고 평가했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핑커튼의 정보는 그런대로 정확했는데 매클레런이 잘못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본연의 임무인 노동자 파업을 저지하는 용역 업무를 맡게되었다. 파업에 대한 과격한 진압으로 인해서 악명이 높았다. 그 뒤엔 정부와 대기업이 있었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했다. 거기에 참전 용사들을 적극적으로 특채로 채용하고 성능좋은 장비, 말들을 장착해 이전보다 준군사조직 수준으로 거대해졌다. 한때는 미군, 경찰보다 세력이 강했고 와일드 번치와 같은 여러 악명높은 무법자들을 철저하게 추격해 사살하는데에도 기여했다.

1884년 7월 1일 시카고에서 목뼈가 부러졌고 이후 피부가 괴사하며 고통스럽게 사망했다.[1] 그의 시신은 시카고의 그레이스랜드 묘지에 묻혔다.

그가 사망한 후인 1893년에 핑커튼 사립 탐정 사무소가 노동자에 대해 과격한 진압을 우려한 미국 정부에서 반 핑커튼 법이라는 것을 제정, 탐정을 고용하는 행위를 금지하게 하여 핑커튼의 현장 요원들은 설자리를 잃어버렸고 FBI가 1908년 만들어지면서 범죄 수사의 업무도 상당수 FBI쪽에 뺏기고 말았다.

3. 여담

머그샷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형사시절 현상수배지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1] 확실한 사망 원인은 아니다. 아내가 기르던 개의 목줄에 걸려 넘어지며 혀를 깨문 것으로 인해 발생한 괴저가 사망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죽기 1년 전부터 앓았던 뇌졸중이 원인이라고도 하며, 미국 남부를 여행하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 의하면 1884년 7월 1일 시카고에서 사망한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