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05:54:25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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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슈츠슈타펠 문장.svg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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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Erich von dem Bach-Zelewski
파일:external/thefifthfield.com/Von-dem-Bach.jpg

집단지도자(Gruppenführer) 당시의 모습.
본명 Erich Julius Eberhard von Zelewski
에리히 율리우스 에버하르트 폰첼레프스키
출생 1899년 3월 1일
독일국 프로이센 왕국 포메른주 라우엔부르크
(현 폴란드 렝보르크)
사망 1972년 3월 8일 (향년 73세)
서독 바이에른뮌헨
복무 독일 제국군 (1914년 ~ 1918년)
국가방위군 (1918년 ~ 1924년)
친위대 (1931년 ~ 1945년)
최종 계급 독일 국방군 대위
친위대 무장친위대 대장[1]
질서경찰 대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
바르샤바 봉기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진급 내역6. 주요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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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S73507,_Erich_von_dem_Bach-Zelewski.jpg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3a8a51bed35ca6338d5fcd182d7c2ce.jpg 파일:external/www.germaniainternational.com/ultimatechained36modssoffdag17.jpg
▲ 1944년에 찍은 사진. ▲ 컬러 복원한 사진. SS 고위 장교들.[2] 출처.
난 소련에서도 암살당할 뻔한 적이 없는 유일한 SS 지도자였습니다. 어느 곳이건 경호원 없이 걸어다닐 수 있었죠.
(I was the only SS leader in Russia who was not assassinated or upon whom an assassination was never attempted. I could walk anywhere without a bodyguard.)[3] 출처.
첼레프스키 에게는 수많은 별명이 있었다. 동부전선의 도살자, 벨라루스의 도살자, 세바스토폴의 도살자, 그리고 최근에는 바르샤바에 일건으로 바르샤바의 도살자, 호르티 장군이라고 별명이 생겼다. 아무도 호르티와 옆에 있기를 싫어 했고, 말도 걸지 않을 정도였다. 대다수 장성들에게 그는 매우 꺼림칙하고, 재수 없는 존재였다.
알프레트 요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SS 휘하 무장친위대, 게슈타포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상급집단지도자(Obergruppenführer).

동부전선(독소전쟁) 파르티잔 봉기 진압의 총 책임자였던 인물이다.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오스카 디를레방어와 함께 바르샤바 봉기를 악랄하게 탄압한 3인 중 한 명으로 유명하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설립을 하인리히 힘러에게 건의해 수용소가 세워지게 한 원흉이다. 무장친위대에 병사로 입대한 후 장군이 되었으며 동부전선에서 벨라루스 초토화 등 잔혹한 파르티잔 탄압 작전을 주도해 확인한 사망자만 40~50만 명이다. 발트 3국 일대에서 4-5만, 벨라루스 등 러시아 중부 지방에서 20만, 바르샤바 봉기에서 2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저지른 전범 행위만 본다면 사형이 당연한 인물이었으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학살의 책임을 국방군 탓으로 전가한 덕분에 피고 신분이 아닌 증인 신분으로 대우받았다. 재판 후 서독에서도 특별 노역, 가택 연금 등의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사망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 제1차 세계 대전

1899년 3월 1일, 독일 제국 포메른주 라우엔부르크(Lauenburg)[4]에서 몰락한 토착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인 엘주비에타 에벨리나 시만스카(Elżbieta Ewelina Szymańska)는 토룬(Toruń) 출신의 폴란드인이었고, 부친 오톤 얀 폰 첼레프스키(Otton Jan von Zelewski)는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요절했다. 그의 성씨인 '첼레프스키'는 폴란드 내 소수민족인 카슈브인의 성씨 '젤레프스키(Żelewski)'가 어원이다.

독일 제국의 전신 중 하나인 프로이센 공국튜튼 기사단이 동유럽으로 진출하면서 폴란드인을 포함한 슬라브족을 정복-동화시켜 만든 나라였으므로 독일인 중에서도 슬라브계 -스키 성을 가진 가문들이 상당히 많으며, 이런 사람들은 조상들이 대체로 슬라브계 또는 폴란드계로 봐도 무리가 없다.

훗날 바르샤바 봉기와 같이 동족을 잔혹하게 밟아 죽이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꽤나 놀랍지만, 이미 무장친위대에 들어가 장군까지 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이 중요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5]. 본명은 부친의 성씨를 따른 '폰 첼레프스키(von Zelewski)'였으나, 1925년부터 '개울가에서'라는 의미의 독일어 '폰 뎀 바흐(von dem Bach)'라는 접두어를 붙였고, 1940년부터는 아예 '폰 뎀 바흐(von dem Bach)'라는 성씨로 갈음하였다.

귀족 가문 태생이었으나 바흐첼레프스키의 유년 시절은 그렇게 유복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인 1914년 11월에 독일 제국군에 최연소 훈련병인 15세로 입대하여 복무하였다. 이 기록은 24년 뒤에 자신보다 한참 하급자였던(단 직속 부하는 아니었다.)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이어가게 된다. 참고로 브루네거는 바흐처럼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나 고위 장군까지 올라간 그와는 다르게 친위대 중사에서 진급이 끝났다.

독일 제국군 복무 당시 큰부상을 2번 입었는데 한번은 독가스 흡입으로 인해 내장 질환을 앓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전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중위가 되어 있었는데 이때 나이가 고작 19세였다.

2.2. 전간기: 나치당 입당

종전 후에는 자유군단에서 가입해 슐레지엔 지방의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군에 남아 복무하다가 1924년에 강제로 전역당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밝힌 이유는 여동생 2명이 유대인과 결혼한 것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사실은 그 당시부터 나치당을 홍보하고 유세하는 데 앞장섰던 것 때문에 쫓겨난 것이라고 한다. 출처. 이후에는 국경수비대(Grenzschutz)에서 1930년까지 복무했다. 1925년부터 이름을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von dem Bach-Zelewski)로 바꾸었다.

국경수비대에서 전역한 후에는 1930년에 나치당의 당원이 되었고(당원 번호 480101) 1년 뒤인 1931년 슈츠슈타펠에 가입하였다(대원 번호 9831). 나치당 가입 후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아돌프 아이히만, 쿠르트 달루게 등과 친분을 맺었다. 1932년에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여 나치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력도 있다. 슈츠슈타펠 가입 당시에는 훈련병에 불과했으나 초고속 승진 코스를 밟아 2년 만에 여단지도자(Brigadeführer)가 될 정도였다. 1934년에는 장검의 밤에 가담해 에른스트 룀을 처단하고 개인적인 정적을 숙청하기도 했다. 3년 뒤인 1937년에는 동프로이센, 폼메른 지방의 무장친위대 부대, 게슈타포를 통솔하는 권한이 쥐어졌고 1939년에는 집단지도자(Gruppenführer)로 진급하였고, 자신의 출신을 모르게 하기 위해 "첼레프스키"라는 이름을 없애 버렸다.

2.3.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당시 바흐의 휘하 부대들은 폴란드군 포로와 유대인을 학살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다만 그는 직접 폴란드 침공에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폴란드 침공이 끝난 후 SS 최고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그에게 슐레지엔 지방에 거주하던 폴란드인의 재산을 빼앗고 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여 1940년 8월까지 슐레지엔 지방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2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1939년 연말에는 힘러에게 폴란드 오시비엥침 지방에 포로를 수용할 대규모 수용소를 설립해 줄 것을 건의하였고, 힘러는 처음에는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곧 허가해 주었으며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였다. 아우슈비츠의 설립에는 어느 한 사람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나치당의 여러 인물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일단 알려져 있는 정보로는 에리히 폰 뎀 바흐가 아우슈비츠의 설립을 청했고,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아우슈비츠의 건설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로 독소전쟁이 발발하던 때 바흐는 페도어 폰 보크 원수의 중부집단군 휘하로 참가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진행 중이던 7월에는 SS 대원 1만 1천 명, 일반 경찰 6천 명을 지휘하였고 이때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유대인 3만 5천 명을 처형하도록 아인자츠그루펜에게 명령했다. 9월에는 파울 블로벨 대령을 시켜 바비야르 학살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벨라루스민스크와 모길료프에서도 똑같은 학살을 저질렀다. 바흐첼레프스키는 벨라루스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에 종사하면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고[6], 힘러가 직접 바흐첼레프스키를 찾아 유대인 처형을 참관하기도 하는 등 힘러는 유대인 처리 작업에서 그를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 발트 3국에서 유대인을 몰살한 후 힘러에게 "이제 에스토니아에 남아 있는 유대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보고할 정도였다. 1941년 말에 바흐첼레프스키의 휘하에는 5만여 명이 있었다.(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 197)

1942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프라하에서 암살된 후에는 하이드리히의 직위였던 보헤미아-모라바 총독 직책이 바흐첼레프스키에게 수여될 예정이었으나 아돌프 히틀러가 반대하고 대신 쿠르트 달루게에게 돌아갔다. 쿠르트 달루게는 에리히 폰 뎀 바흐의 최종 계급보다 한 단계 높은 최상급 집단지도자(SS-Oberstgruppenführer)까지 진급하였으며, 보헤미아-모라바 총독으로 임명된 후에는 하이드리히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프라하 근처 마을인 리디체(Lidice)에서 학살을 지시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6년 10월 24일 프라하의 판크라츠 감옥(Pankrác Prison)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II-Weiss-047-37%2C_Russland%2C_Minsk%2C_Ordnungspolizei%2C_Bach-Zelewski.jpg
▲ 1943년 민스크에서 무장친위대 부대에게 연설하는 장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II-Weiss-047-31,_Russland,_Minsk,_Ordnungspolizei,_Bach-Zelewski.jpg
▲ 1943년 민스크에서 질서경찰들을 사열하는 모습.[7]

1943년에는 아예 파르티잔 진압 부대(Bandenkampfverbände)의 총 책임자가 되어 나치 독일이 점령한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일어나는 파르티잔 운동을 진압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정작 죽이고자 했던 파르티잔 토벌 성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민간인 피해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는 수치상으로 전과를 올리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Bundesarchiv_Bild_101III-Alber-096-34,_Arthur_Nebe.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J08517%2C_Otto_Ohlendorf.jpg
아르투어 네베오토 올렌도르프

바흐-첼레프스키 아래에서 학살을 전담한 주요 인물로는 아인자츠그루펜 B의 지휘관 아르투어 네베(Arthur Nebe), 아인자츠그루펜 D의 지휘관 오토 올렌도르프(Otto Ohlendorf) 등이 있다. 두 인물 모두 집단지도자까지 진급했으며 아르투어 네베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1945년 3월 21일 교수형에 처해졌고, 오토 올렌도르프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51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2.4. 바르샤바 대학살

파일:쿠체라 첼레프스키 골츠.jpg
왼쪽부터 프란츠 쿠체라[8], 폰 뎀 바흐-첼르프스키, 헤르베르트 골츠[9]이다.
1944년 8월 1일에는 폴란드(당시 나치 독일 치하) 바르샤바에서 바르샤바 봉기가 발발하였다. 하인리히 힘러는 바흐에게 봉기 진압 임무를 위임했고 봉기군을 모두 죽여 버리라고 지시했다.

처음에 바흐는 독일군에 항복하는 포로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인도적인 대우를 해 줄 것이라는 선전 방송을 하며 봉기군을 회유하였고, 9월에는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도시를 떠나라는 포고문을 살포하는 등 다소 온건책을 펴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곧바로 돌변하여 자신이 내건 평화 협정 조건을 모두 무효화하고 폴란드인은 전투원,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고 모두 사살하고 바르샤바 시내의 모든 건물을 없애 버리라고 강력히 지시하였고,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카민스키 여단, 오스카 디를레방어의 디를레방어 여단 같은 아인자츠그루펜 뺨치는 인간 쓰레기 집합소격 부대들을 시내로 투입해 폴란드인을 학살하는 참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카민스키를 굉장히 싫어했다. 카민스키 여단이 범죄자, 인간백정만 모여 있어 제대로 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데다 부녀자 강간, 전리품 약탈에만 눈이 멀어 정작 진압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으며 카민스키 여단의 막장 실태가 아군인 독일군 부대의 사기마저 망쳐 놓는 역효과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거기다 카민스키는 자신이 힘러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다고 자만하여 힘러의 부하인 바흐첼레프스키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같은 무장친위대 장교에게도 미움을 샀다.

카민스키가 바흐첼레프스키의 눈 밖에 벗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일이 하나 있었는데 8월 중에 바흐첼레프스키는 여성, 어린이에 대한 학살을 중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을 프루슈쿠프(Pruszków)에 소재한 수용소로 이송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카민스키 여단은 이 명령을 씹고 학살을 지속했던 것. 그러나 카민스키는 자신의 부대를 전혀 통제할 수도, 통제할 의지 자체가 없었고 결국 카민스키는 무장친위대에게 살해당했다. 살해 명령을 내린 건 바흐첼레프스키라고 추정된다.

바르샤바 대학살에서는 심지어 빈약한 무장 수준 탓에 대공 방어력이 전무하던 폴란드군을, 심지어 부상병들이 모인 병원조차 슈투카 폭격기를 동원해 공격하는 악마같은 행동을 저질렀다. 바흐는 폴란드군을 때려잡기 위해 화염방사기, 골리아트 무선전차, 600mm 자주박격포 칼, 800mm K(e)까지 동원하였다. 그나마 칼은 여기저기 옮겨 다닐 수 있었고 수도 10대 이상 되었지만 구스타프는 당시 단 1문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독일이 당시 보유한 무기 중 단순 화력만으로는 최강의 무기였다. 세바스토폴을 간단하게 때려잡은 무기를 바르샤바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쓴 것이다! 이 결과로 일어난 것이 민간인 5만 명이 무참히 죽어간 일명 "볼라 학살(Wola Massacre)"이다.

잔혹하고 무자비한 진압 작전 끝에 바르샤바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바르샤바는 황폐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사망한 폴란드인은 양 군 사이의 교전, 일방적인 학살을 포함해 20만 명에 달했다. 바흐는 이 공적으로 1944년 9월 30일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봉기 후에는 바르샤바 시내에 독일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조치했으며 이후에도 계속 파르티잔 억압 작전의 담당자로서 활동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0px-Tadeusz_Bor_Komorowski_and_Erich_von_dem_Bach_in_Ozarow.jpg
▲ 봉기 진압 후 항복한 봉기군 사령관 타데우시 코모로프스키와 악수하는 바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rsaw_Uprising_signing_the_act_of_surrender.jpg
▲ 바르샤바 인근 오자로프 마조비에츠키에 위치한 바흐첼레프스키의 사령부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봉기군 지휘관들. 좌측부터 카지미에시 이라네크오스메츠키 대령, 바흐첼레프스키, 지그문트 도브로볼스키 중령.

바르샤바 봉기를 제압한 후에 10월에는 부다페스트로 이동하여 헝가리를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오토 스코르체니가 자서전에서 기록한 바에 따르면, 호르티 미클로시가 총통을 따르지 않으니 붙잡아야 한다는 자기 설명을 듣고 바흐첼레프스키는 내가 바르샤바에서 가져온 토르를 가지고 그놈(호르티)을 관저인 부다 성과 함께 통째로 날려버리면 간단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고 한다. 스코르체니는 이 바보 같은 소리에 대해서 이 작전의 책임자는 납니다라는 간단한 한마디로 묵살했다고.

1945년 1~2월 동안에는 제10SS군단의 군단장을 맡았으나 해당 부대는 서류상으로만 제대로 편제되어 있었을 뿐 실제로는 없는 부대나 마찬가지였고,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기간 중 소련군에 의해 궤멸당해 2주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5.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파일:external/www.uwazamrze.pl/0ce77ab9a0f79a44117b6d6e3211f90a.jpg
▲ 뉘른베르크 재판에 출두한 바흐첼레프스키.
Nuremberg Day 28: Telford Taylor direct examination of Erich von dem Bach-Zelewski[10]

제3제국이 멸망하고 바흐는 고향에서 은둔하던 중 해외로 망명하려 했으나 1945년 8월 1일 미군에게 체포되었고 악질적인 파르티잔 탄압 작전의 주모자로서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인리히 힘러를 비롯한 자신의 상관들에 대하여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이 때문에 전범 취급은 면하여 피고 신분이 아닌 증인 신분으로 출두하였고, 잔혹한 학살을 당한 당사자인 폴란드나 소련에 인도되어 최고 국가 재판 등에 회부되는 것도 피할 수 있었다.

반면 같은 증인 자격으로 출두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는 과거 같이 근무했던 독일 국방군 장교들인 빌헬름 카이텔, 알프레트 요들에 불리한 증언을 하기를 거부하여 소련에서 1953년까지 억류되어 있어야만 했다.

에리히 폰 뎀 바흐는 이때 학살 같은 전쟁 범죄 혐의를 전적으로 국방군 탓으로 돌리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고, 헤르만 괴링, 알프레트 요들 등 전직 국방군 장성들이 그의 비열한 태도에 분노해 욕설을 퍼부었다.

다음은 그 상황을 기술한 기록이다.
"스컹크 같은 놈!" 피고석에 앉아 있던 헤르만 괴링이 소릴 질러 뉘른베르크 법정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돼지 새끼야!" 이전까지 동료였던 에리히 폰 뎀 바흐가 증인으로 나타나 증언한 것을 듣고 난 후 괴링은 분노가 폭발했다. "저놈은 이 개같은 조직에서 가장 잔인한 살인마였다고!" 괴링은 주먹을 내지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폰 뎀 바흐는 입을 닫고 있었다. "저 역겨운 모가지 안 잘리려고 영혼까지 팔아먹는 놈 같으니." 괴링은 계속해서 비난을 퍼부었고 갈수록 시끄러워졌다. 요들도 열받기는 마찬가지였고 맞장구를 쳤다. "저 '증인' 나리한테 물어봐라, 히틀러가 저 새낄 파르티잔을 때려잡는 모범적인 전사라고 우리한테 추켜세워 주던 걸 알기나 하냐고. 저 더러운 돼지새끼한테 물어보란 말이야!" 폰 뎀 바흐가 증언대에서 내려오자 괴링은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은 붉어지고 호흡은 가빠졌다. "개돼지 같은 새끼야!(Schweinhund!)" 괴링은 고함을 질러댔다. "배신자놈!(Verräter!)"
Warsaw 1944: Hitler, Himmler, and the Warsaw Uprising p.31

재판정에서 괴링이 그 난리를 쳐댔는데도 딱히 제지받지 않았던 걸 보면 판검사들에게도 이 작자의 행태가 얼마나 답이 없어 보였는지 알 만하다.

다음은 소련 측 수석검사 유리 포크롭스키(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Покровский) 대령이 바흐를 심문한 내용이다. 출처. 바흐첼레프스키에 대한 재판 기록 전문에서 "7 Jan. 48"에 해당하는 부분부터 인용된 단락이다. 참고로 위 영상에서 들을 수 있는 테일러 검사와 바흐첼레프스키의 대화 기록도 있는데 이건 ctrl + F를 누르고 "Afternoon Session"을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 테일러 검사는 영어로, 바흐첼레프스키는 독일어로 말하고 있는데 기록에는 모두 영어로 번역되었다.
포크롭스키: 준동하는 파르티잔 부대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를 감금하거나 마을에 방화를 일으키도록 명령한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Do you know of any order prescribing the seizure of hostages and the burning of villages as a reprisal for abetting partisan units?)

바흐첼레프스키: 모릅니다. 그런 명령을 내리는 문서가 발행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면으로 된 명령서가 없다는 건 제 실수입니다. 예를 들어 그 명령에는 1명, 혹은 10명의 독일군 병사가 죽은 데 대한 앙갚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야 하는지 확실히 설명되었는데 말입니다.
(No. I do not think that written orders to that effect were ever issued, and it is precisely this lack of orders which I considered a mistake. It should, for instance, have been definitely stated how many people could be executed as a reprisal for the killing of one, or of 10 German soldiers.)

포크롭스키: 그렇다면 어떤 특정 지휘관이 지역 주민을 응징하는 수단으로서 마을을 불태웠다고 한다면, 그 지휘관들이 행동한 것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것입니까?
(Am I to understand that if certain commanders burned villages as a punitive measure against the local population, they, the commanders, would be acting on their own initiative?)

바흐첼레프스키: 그렇습니다. 그런 조치는 지휘관 스스로에 의해 결정된 겁니다. 그 지휘관의 상관들도 그런 행동을 거스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파르티잔 구역 내에서 지역 주민에게 피해가 가는 불법적인 행동이 자행된다면 어떤 징계 조치나 사법적 조치도 취해져서는 안 된다고 최고사령부에서 분명히 지시를 내렸기 때문입니다.[11]
(Yes. These steps would be taken by a commander on his own initiative. Nor could his superior officers do anything against it, since orders emanating from the highest authorities definitely stated that if excesses were committed against the civilian population in partisan areas, no disciplinary or judicial measures were to be taken.)

포크롭스키: 그렇다면 인질 체포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됩니까?
(And can we assume that the same applied to the seizure of hostages?)

바흐첼레프스키: 인질 문제는 파르티잔 진압 과정에서는 제기된 적이 없습니다. 인질에 대한 건 서부전선에선 자주 논의되었지만, 대게릴라 전투 과정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인질'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Well, I think that the question of hostages did not arise at all in the anti-partisan struggle. The hostage system was more common in the West. At any rate the term “hostage” was not used in anti-partisan warfare…)

포크롭스키: 제가 그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고 가정하면, 당신은 내 동료인 미국 검사가 질문한 내용에 대해 "게릴라 진압전은 슬라브, 유대인 공동체 파괴의 전조였다"고 응답한 것이 맞습니까?
(If I understood you correctly, you replied to a question of my colleague, the American Prosecutor, by saying that the struggle against the partisan movement was a pretext for destroying the Slav and Jewish population?)

바흐첼레프스키: 그렇습니다(Yes).

포크롭스키: 독일군 사령부는 게릴라 진압 과정, 유대인 공동체 파괴에 어떤 수단이 동원되었는지 알고 있었습니까?
(Was the Wehrmacht Command aware of the methods adopted for fighting the partisan movement and for destroying the Jewish population?)

바흐첼레프스키: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군 수뇌부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힘러가 짜낸 계획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The methods were known generally and hence the military leaders as well. I do not, of course, know whether they were aware of the plan mentioned by Himmler.)

포크롭스키: 당신은 독일은 슬라브 공동체를 파멸시켜 인구를 3천만까지 줄여 버리려 했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 내용과 이러한 명령을 어디서 들었습니까?
(You have told us that the Germans intended to destroy the Slav population in order to reduce the number of Slavs to 30 million. Where did you get this figure and this order?)

바흐첼레프스키: 정정하겠습니다. 3천만까지 줄인다는 게 아니라, 3천만을 죽여 없앤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나온 건 힘러가 베벨스부르크[12]에서 연설한 것이었습니다.
(I must correct that: Not to reduce to 30 million, but by 30 million. Himmler mentioned this figure in his speech at the Wewelsburg).

포크롭스키: 당신은 소련 내 독일 점령 지역에서 독일 지도층과 군 수뇌부가 행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3천만 명의 슬라브, 유대인을 학살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실행되었단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까?
(Do you confirm the fact that actually all the measures carried out by the German commanders and by the Wehrmacht in the occupied Russian territories were directed to the sole purpose of reducing the number of Slavs and Jews by 30 million?)

바흐첼레프스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독일군이 슬라브 인구가 3천만 명 감소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질문을 다시 해 주십시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The meaning of that is not quite clear to me. Did the Wehrmacht know that the Slav population was to be diminished by 30 million? Would you please repeat the question, it wasn’t quite clear?)

포크롭스키: 다시 묻겠습니다. 독일이 점령한 각 행정 구역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부가, 슬라브, 유대인 3천만 명을 죽여 없애겠다는 목적을 위한 조치를 시행했다는 것을 진정으로 확신하냐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하십니까?
(I asked- Can you actually and truthfully confirm that the measures taken by the Wehrmacht Command in the district administrative areas then occupied by the Germans were directed to the purpose of diminishing the Slavs and Jews by 30 million? Do you now understand the question?)

바흐첼레프스키: 그 조치가 계속되었더라면 3천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때 어떤 새로운 사태가 상황을 뒤바꾸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I believe that these methods would definitely have resulted in the extermination of 30 million if they had been continued, and if the developments of that time had not completely changed the situation.)

포크롭스키: 이상으로 증인에 대한 심문을 마치겠습니다.
(I have no further questions to put to the witness.)

2.6. 최후

파일:external/www.holocaustresearchproject.org/bach-zelewski%20in%201961.jpg
▲ 1961년의 모습.
바흐첼레프스키의 말로는 비참했다. 1951년에는 탈나치 정책을 추진하던 서독 정부에 의해 1930년대 초 정적 살인 혐의로 강제 노동 10년형에 처해졌으나, 1958년까지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다가 이 시기에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에 가담한 것이 다시 문제가 되어 4년 반동안 징역형에 처해졌다. 1961년에는 1930년대 초 독일 공산주의자를 살해한 혐의로 가택연금 10년형이 더해졌다. 처벌 사유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동부전선에서의 파르티잔 학살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받지 않았다. 그의 전범 행위가 문제가 되었던 건 뉘른베르크 재판이 유일하다. 그마저도 처벌받지 않았으니.. 그 후 1972년 뮌헨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3. 평가

아돌프 아이히만이 절멸 수용소 대학살의 실질적 책임자라면, 이 자는 동부전선의 민간인과 파르티잔 학살의 책임자였다. 즉 동부전선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등)에는 전부 이 인간이 연루되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바르샤바 봉기에서의 대학살만이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 이전부터 발트 3국,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지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을 동원해 유대인, 파르티잔 등을 잡아 죽이는 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물론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이 사람을 죽인 건 역시 바르샤바에서 5만여 명을 죽인 볼라 학살이 가장 크다.

워낙 악질적인 학살자여서 뉘른베르크 재판을 전후해 이 사람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꽤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를 다룬 서적에서 공통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바로 기회주의적이고 야비하다는 것. "거짓말을 병적으로 일삼는다", "항상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원했다"고 표현된 것에서 잘 드러난다.

폴란드계 태생인데도 폴란드인을 죽이는 데 앞장서고 재판에서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고 피고로 취급받지 않았던 걸 보면 히틀러나 힘러의 명령을 우직하게 따르기보단 지능적으로 행동하고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항상 만들어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더욱 악질인 인물이 틀림없다. 재판에서 괴링과 요들에게 대놓고 비판을 받았지만 일말의 반성조차 없었다.

4. 기타

  •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기 전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을 했는데 자신이 그 자살을 도왔다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교도소 간부의 도움을 받아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애초에 법정에서 강도 높은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혐오하던 인물인데 그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 1922년에 결혼하여 2명의 딸과 3명의 아들을 낳았다.
  •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여러 차례 진료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1942년경 한창 파르티잔 탄압에 열을 올리던 때에 발작(seizure), 환각(delusions, hallucinations) 증세를 보였다고 하는데 무장친위대 위생총감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밤마다 소리를 질러대고, 환각에 시달렸는데" 자신들이 죽이라고 한 유대인의 환영을 많이 보면서 괴로워했다고 한다. 일기에 적은 내용에 따르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부상당한 것도 트라우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 때문에 동부전선에서 활동하다가도 독일 본토로 돌아와 치료받고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는 생활이 이어졌다고 하는데 증상만 보면 일종의 PTSD라고 여겨진다. 물론 그런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도 무자비한 학살을 그만두지 않고, 오히려 2년 뒤 바르샤바에서 역대급 학살을 저질렀다. 정신병 증세는 전후까지도 이어져서 최후를 맞은 장소도 뮌헨의 정신병원이었다.
  • 정신병뿐만 아니라 내장 질환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무장친위대 부대는 식수 보급을 소홀히 한 탓에 작전 시작 후 얼마 안 가 식수가 부족하게 되었고, 증류, 정수 장치도 제대로 구비해 놓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위생적으로 좋지 않은 습지의 물을 마셔야 했고, 장성급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흐첼레프스키도 이런 오수를 마셔야 했다. 결국 내장에 이상이 생겨 고통을 호소하게 되고 진통제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모르핀아편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원래 그는 어릴 적부터 변비를 심하게 앓고 있었던 데다가 1차 대전 종전 후 생긴 내장병까지 겹쳐 병원을 자주 방문해야 했고, 소련의 기후 탓에 병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1944년쯤 되면 바흐첼레프스키가 내장병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장친위대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내장 출혈 증세도 보였다고. 진료 기록만 본다면 이 인간이 그런 악화된 상태에서도 대규모 학살을 잘 지휘하고 다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출처 출처 2
  • 중앙러시아 상급친위대 및 경찰지도자(Höherer SS- und Polizeiführer; HSSPF) 직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스크바 경찰지도자로 내정되어있었으나 이는 모스크바 전투의 패배로 무산되었다.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는 주어진 관할 지역 내의 모든 SS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가졌으며 1944년 이후에는 이들에게 무장친위대 장군 계급을 수여하여 무장친위대의 지휘권도 일부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영토에서의 유일한 경찰지도자였으며 이는 종전까지 유지되었다.
  • 그런데 폴란드의 자랑인 음악가 프레데리크 쇼팽의 심장을 무사하게 만들었다는 게 세월이 지나 드러났다. 기회주의적인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쇼팽의 음악을 좋아해 그런지 몰라도 바르샤바 봉기 도중 쇼팽의 심장이 모셔진 성 십자가 성당 측에 개별적으로 방문해 심장을 지킬 테니 건네달라고 정중히 부탁했고 그렇게 가져간 쇼팽의 심장을 정말로 어떠한 손상도 남기지 않고 제대로 보관했다. 덕분에 이렇게 정중히 가져간 쇼팽의 심장은 무사히 지금도 남게 되었다. 출처는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6). 정확히는 보관되어 있던 쇼팽의 심장을 약탈한 후 바르샤바 시민들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시 반환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쇼팽의 심장은 다시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출처

5. 진급 내역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에리히 폰 뎀 바흐 항목

6. 주요 서훈 내역

  • 철십자 훈장 - 1급(1942.05.20.), 2급(1941.08.31.)
  • 전공 십자장 - 1급, 2급
  • 파르티잔 소탕전 기념 은장
  • 기사 철십자 훈장 - 바르샤바 봉기 진압 공로(1944.09.30.)


[1] 정확한 호칭은 '상급집단지도자 겸 경찰과 무장친위대 대장(Obergruppenführer und General der Polizei und Waffen-SS)'이다. 본 계급은 영미권 계급으론 중장에 대응된다.[2] 앞줄 왼쪽부터 바흐첼레프스키, 빌헬름 레디스(Wilhelm Rediess),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파울 모더(Paul Moder).[3]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4] 현 폴란드 포모제주 렝보르크군 렝보르크(Lębork). 현재 독일 땅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라우엔부르크(Lauenburg an der Elbe)와의 구별을 위해 Lauenburg i. Pommern이라고 한다.[5] 비슷하게도 프랑스에서 잔혹한 학살을 저지른 클라우스 바르비는 프랑스계였다. 이와 반대로, 폴란드 제1군을 이끌며 폰 뎀 바흐에 맞서 싸웠던 지그문트 베를링 중장은 독일계였다.[6] 독일군 제707보병사단은 병사 2명이 전사하자 그 앙갚음으로 파르티잔 1만 431명을 잡아 죽이기도 했다(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 203).[7] 첼레프스키의 왼쪽은 무장친위대 대장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이다.[8] 친위대 여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소장으로 폴란드에서 경찰지도자를 지내면서 수많은 학살에 관여했다.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기 전인 1944년 2월 폴란드 저항군에게 암살당한다.[9] 친위대 연대지도자 및 질서경찰 대령[10]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46년 1월 7일 미국 측 검사인 텔퍼드 테일러 준장이 바흐첼레프스키를 심문하는 영상이다.[11] 즉 상술한 합법적, 온건 수단이 아니라 대량 학살 같은 강경책으로 보복하라는 뜻이다.[12] 원래는 1603년경에 지어진 고성이 존재한 곳이었으나 힘러가 이곳을 슈츠슈타펠의 사령부로 삼고 훈련을 시행했으며 오컬트적 취미를 실험하고 개발하는 기지로 변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