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9:17:13

오미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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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현장, 증언 등을 토대로 재현한 오미야 사건의 미니어쳐
1. 개요2. 전개3. 남은 증거에 입각한 추론4. 오미야 사건에 대한 다양한 설들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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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近江,ruby=おうみ)][ruby(屋,ruby=や)][ruby(事件,ruby=じけん)]

게이오 3년 11월 15일(1867년 12월 10일) 일본 교토의 여관 '오미야'에서 도사 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나카오카 신타로암살된 사건. 현재 건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건이 있었다는 증거로 비석만 있다.[1] 위치는 카와라마치역 근처.

2. 전개

사카모토 료마는 그간 숙소로 쓰던 사쓰마 번의 데라다야가 좌막파로부터 급습을 받자(데라다야 사건) 산죠 카와라마치 인근의 목재상 스야(鮓屋)를 가이엔타이의 교토 지부 및 은신처로 삼았다. 10월 무렵 대정봉환 이후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무쓰 무네미쓰에게 알선받아 간장 가게 오미야(近江屋)로 숙소를 옮겼다. 이후 사쓰마의 요시이 도모자네[2]가 료마에게 사쓰마 번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라고 권유했으나 료마는 응할 수 없었다. 11월 13일에는 이토 카시타로가 '신센구미가 주목하고 있으니 바로 건너편의 도사 번 저택으로 숙소를 옮기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지만 료마는 신센구미 출신인 카시타로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오미야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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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야 은신처
사건 당일인 11월 15일 나카오카 신타로가 오미야를 방문해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신센구미가 도사 번 무사들을 살해한 산조제찰사건(三条制札事件)[3]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밤이 되자 누군가가 '토츠카와 향사'라고 자칭하며 료마를 만나기를 청하였다. 료마의 경호원 역할을 하던 스모 선수 출신 야마다 토키치가 그를 사카모토 료마에게로 안내하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토치키를 등 뒤에서 칼로 내리쳤다.

토키치가 칼에 맞아 "으악!"하고 비명을 지르자 료마는 방 안에서 상황도 모르고 "조용히 하랑께!"[4]고 하였는데 자객은 이 말을 듣고 료마의 위치를 파악하였다. 자객은 소리 없이 료마가 있는 방으로 가서 문을 열고 이마를 칼로 내리쳤다.

료마도 가지고 있던 소도로 자객의 칼을 막긴 했지만 자상을 입었다. 이때 료마는 나카오카 신타로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이시카와, 칼은 없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객은 료마의 이마를 재차 깊게 베었고 뒷통수와 등, 가슴 등도 수차례 찔렀으며 나카오카 신타로에게도 중상을 입혔다. 그러다 자객 일당 중 누군가가 "이제 됐다. 이제 됐다."고 말하자 무리들이 모두 도주했다. 료마는 즉사했고 토키치는 이튿날 사망했다. 그나마 목숨이 붙어있던 나카오카 신타로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공격받은 지 사흘째 되는 날 크게 구토를 하더니 죽었다.

오미야와 도사 번의 저택은 길을 놓고 마주 볼 정도로 가까웠지만 워낙 갑작스럽게 사건이 일어난 탓에 도사 번 사람들이 도울 방법이 없었다. 도사 번 사람들은 사건이 끝난 뒤에야 료마가 암살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5]

암살이 워낙 갑작스러운 데다 목격자들도 전부 사망한 탓에 오늘날까지도 누가 암살범인지 설이 분분하다. 다만 도사 번 출신의 타니 다데키가 자객이 "이런 쓰벌!(こなくそ!)"이라는 'このくそ'의 이요 방언[6]을 썼다고 증언했으므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7] 등이 사주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있었다.

사건 현장을 조사하여 나온 칼집의 흔적이나 료마가 죽고 사흘 후에 암살된 이토 카시타로가 한 증언 때문에 신센구미가 배후로 의심을 받았다. 이요 방언을 쓰는 하라다 사노스케나 북진일도류에 능숙한 사카모토 료마를 살해할 만한 실력을 지닌 사이토 하지메가 범인으로 거론되었지만 료마를 죽인 범인이 왼손을 썼다고 보였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하라다 사노스케는 창술사였고 사이토 하지메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왼손잡이가 아니라는 게 중론이었기 때문이다. 신센구미의 오오이시 쿠와지로가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했다.

11월 26일, 곤도 이사미는 에도 막부에 소환된 자리에서 료마가 암살된 사건에는 신센구미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특히 나카오카 신타로가 료마와 같이 공격받고도 이틀 더 살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전문가요. 만약 우리가 했다면 나카오카 씨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신센구미는 오랫동안 사카모토 료마를 추적했으므로 직접 료마를 죽였다면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인데도 부정하였으니 정말 개입하지 않은 듯하다.

신정부군이 심문한 자리에서도 곤도 이사미와 오오이시 쿠와지로로는 범행을 줄곧 부인했다. 특히 오이시는 지독한 고문에 견디다 못해 잠시 범행을 시인하기도 했지만 이내 부인하면서 "사건 이후에 미마와리구미의 이마이, 와타나베가 사카모토를 해치운 것은 회자될 만한 일이라고 곤도 국장이 말하는 것만 들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도사 번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신센구미의 범행으로 단정짓고 독단적으로 곤도 이사미와 오오이시 쿠와지로를 참수했다.

세간에는 대정봉환 이후 료마가 막부를 유연한 태도로 대하자 사쓰마가 반감을 품고 죽였다는 설도 나돌았다. 사카모토 료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각지의 영주들을 소집한 회의에서 신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는데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인물들은 막부를 무너뜨리려 했기 때문에 료마를 막기 위해서 막부 쪽에 그의 행방을 몰래 흘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카모토 료마와 사쓰마 번 사이에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한 처리를 놓고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양측이 철저하게 자기네 입장만 관철하려고 하진 않았다는 것이 일본 사학계의 중론이다.

가이엔타이와 기슈 번 사이에서 벌어진 이로하마루 사건으로 인해 도사 번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어 기슈 번이 암살했다는 설도 있었다. 그래서 기슈 번의 공용인 미우라 큐타로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아이즈 번을 통해 신센구미에게 경호를 요청했고 1868년 1월 1일에 무쓰 무네미쓰를 비롯한 15~16명의 가이엔타이 대원들이 습격, 가이엔타이와 신센구미 간에 칼부림이 벌어진 '덴마야 사건'이 발생했다.

1869년 에조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포로 심문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오미야 사건에 대한 중요한 진술이 나왔다. 후루야 사쿠사에몬과 함께 쇼호다이를 이끌었던 이마이 노부오는 사사키 타다사부로가 이끄는 교토 미마와리구미가 막신 에노모토 미치아키의 지령을 받아 료마를 암살했다고 밝혔다. 노부오는 당시 사건 현장에 사사키 타다사부로, 와타나베 키치타로, 와타나베 아츠시, 가츠라 하야노스케, 다카하시 야스지로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료마를 직접 살해한 인물로 가츠라 하야노스케와 다카하시 야스지로가 거론되었다. 일부 작가들은 현장 상황을 들어 여기에 의문을 표했다. 나카오카 신타로를 문병한 도사 번의 타니 다데키는 "사카모토 씨가 겨우 너희 같은 놈들에게 돌아가셨을 리가 없다."라고 말하며 미마와리구미 배후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소수이긴 하지만 영국 배후설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사학자들 중에는 범인이 노린 목표가 사카모토 료마가 아니라 나카오카 신타로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료마는 중요한 인물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저명도가 높지 않았고 오히려 나카오카 신타로가 훨씬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카오카 신타로를 죽이려다가 사카모토 료마까지 덤으로 죽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사카모토 료마가 나카오카 신타로를 보호하려고 그를 이시카와라고 불렀으므로 이런 추측이 맞을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암살당하던 날 저녁에 료마가 혼잣말로 "갑자기 샤모(軍鶏)[8]가 먹고 싶은 걸 보니 오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겠는걸."이라고 하자 오미야의 미네키치라는 사람이 샤모를 사러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오미야 사건의 진범은 [age(1867-12-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았다.

3. 남은 증거에 입각한 추론

료마가 지냈던 오미야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메이지 시대에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고 한다. 다만 교토에는 오미야와 형태가 흡사한 건물이 남아있어서 료마 암살의 정황을 추론할 수 있다. 료마가 머무르던 곳은 2층 안쪽 깊숙한 곳이었는데 천장이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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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의 혈흔이 묻은 족자
교토국립박물관은 료마가 암살되었을 때 오미야에 걸렸던 그림을 소장하였다. 세로로 긴 족자인데 족자의 맨 끝 하단에 혈흔이 몇 방울 남았다. 대부분은 이 혈흔이 료마의 피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방 안의 구조나 족자의 혈흔 등으로 판단해 보면 료마는 살해될 당시에 서있었을 리가 없는 듯하다. 화로를 사이에 두고 료마와 신타로가 마주보고 앉았고 자객도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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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의 유품들
특이한 부분은 료마의 유품이다. 료마는 평소에도 S&W M1 22구경 리볼버를 휴대하고 다녔고 데라다야 사건 때는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도주한 적도 있다. 오미야 사건 이후 촬영한 료마의 유품 사진에도 분명히 권총이 있으나 총알이 발사된 흔적이 전혀 없다. 료마가 소지하고 있던 카타나의 칼집이 칼로 베인 듯한 흔적이 있다. 권총이 발사되지 않았음을 미루어 본다면 료마가 경계태세를 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리하자면 료마와 신타로가 앉아있던 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함께 자리에 앉았는데 료마와 신타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사람이 갑자기 앉은 채로 칼을 빼서 료마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료마의 리볼버로 미루어 보아 자객은 료마가 전혀 경계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공산이 크다. 료마는 불시에 공격을 받고 총을 쥐지도 못하고 손에 잡히는 와키자시를 들어 암살자의 칼날을 막다가 결국 살해된 듯하다.

료마를 암살한 자로 지목되기도 한 가츠라 하야노스케는 특이한 검술을 익혔다고 한다. 이도류 같은 검법을 썼다고 하는데 특히 코다치의 명수였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사사키 타다사부로가 오미야의 좁은 구조 등을 감안해서 좁은 곳에서 접근전에 유리한 코다치의 명수인 가츠라를 암살 실행자로 선택한 듯하다.

4. 오미야 사건에 대한 다양한 설들

교토 미마와리구미가 진범이라는 게 거의 명백해졌지만 그 배후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뒷이야기가 나돈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바로 미마와리구미의 료마 살해를 실토한 이마이 노부오에 대한 것으로, 이마이 노부오는 료마를 직접 살해한 인물로 가츠라 하야노스케와 나카하시 야스지로를 거론했으나 실제로는 이마이 노부오가 실행범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마이 노부오는 료마를 죽인 범인임에도 사형되기는커녕 오히려 근신 처분을 받고 시즈오카현으로 갔고 그곳에서 한 마을의 촌장까지 지냈다고 한다. 문제는 그가 간 곳인 시즈오카. 시즈오카는 슨푸를 개명한 곳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따라 슨푸로 이동한 막부의 가신 중에 하필이면 오다 이즈미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다 이즈미가 이마이 노부오를 사주해서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오다 이즈미가 료마를 암살한 이유에 대해서는 더 복잡한 뒷이야기가 있다. 일설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조상이 바로 도사로 도망친 아케치 사마노스케이며 아케치 가문의 거성인 사카모토를 성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즉, 이 이야기대로라면 오다 이즈미가 료마를 암살한 것은 혼노지의 변의 복수가 된다. 물론 이는 믿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오다 가문이 아케치의 후손을 추적해서 살해하는 전통이 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주장으로는 카츠 카이슈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있다. 료마는 대정봉환 이후 신정부의 내각 명단을 짜면서 희한하게도 내대신(內大臣), 즉 신정부의 실권을 쥐는 직위에 이름을 쓰지 않고 동그라미만 3개 그려넣었다고 한다. 신정부의 내각 명단에는 카츠 카이슈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그 동그라미에 들어갈 이름의 정체는 바로 도쿠가와 요시노부. 동그라미 3개는 바로 '德川公(도쿠가와 공)'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었고 이를 알고 카츠 카이슈가 격노해 이마이 노부오를 사주해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카츠 카이슈와 이마이 노부오는 같은 검술 유파의 면허를 가진 인물로, 이런 인연으로 이마이 노부오를 통하여 미마와리구미를 움직여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기껏 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는데 요시노부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죽 써서 개준 꼴이고 도루묵이 되기 때문에 카츠 카이슈는 료마가 배신했다고 여긴 것이다.

료마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려고 했음은 사실이지만 과연 저런 이유로 카츠 카이슈가 격노하여 료마를 암살하려고 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같은 검술 유파의 면허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정치적인 입장이 달랐던 카츠 카이슈와 이마이 노부오가 접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다양한 시각으로 이 사건을 조명하고 있는데 료마전에서는 료마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9]을 대표해서 미마와리구미[10]가 습격해 살해당할 때 (드라마에서 창작된) 유언인 "어째서 알아주지 않느냐"는 외침과 함께 죽는다. <신센구미!>에서는 사쓰마가 미마와리구미에게 료마의 거처를 흘려 암살이 일어났다고 묘사했다. 사쓰마의 입장(나는 듯이, 아츠히메)에서는 사쓰마가 끝까지 료마를 비호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 사건이 훗날 구 일본군의 역사에도 어느 정도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쿠게 아네가코지 긴토모 암살 사건으로 시작된) 그 악명 높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이 사건을 기점으로 다시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조슈 번사쓰마 번 사이를 다시 갈라두기 위해 한 명을 제물삼아 벌인 이간질이라는 설도 있다. #

일본 현지에서는 실행범은 미마와리구미이지만 흑막은 미쓰비시 그룹의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극소수 존재한다. 왜냐하면 료마는 암살 전에 카이엔타이 교토지부가 있는 목재소 스야 등 여러 은신처를 전전했기 때문에 료마의 소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그럼에도 암살당한 것은 내부에서 배신자가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같은 도사번 출신이자 카이엔타이의 회계를 맡았던 이와사키가 사업적 야심을 위해 료마의 소재를 미마와리구미 측에 흘려 보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와사키는 료마 사후 카이엔타이를 인수해 미쓰비시 창업에 발판을 마련하는 이익을 거두었다.

임용한 박사는 본인의 유튜브 채널 임용한TV에서 <세기의 암살 시리즈>를 하면서 이 사건을 다뤘는데 이 목록에 서술된 주장이나 설과 달리 료마는 암살 배후를 찾을 정도의 거물은 아니라고 평했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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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 이 사진에서 입은 옷을 암살당할 때에도 입었다. 암살당한 후 료마의 혈흔이 묻은 채로 현재도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교토 에이잔 역사관에 암살자로 지목된 가츠라 하야노스케의 칼이 전시되었다.

후쿠이 번사 미쓰오카 하치로[11]는 료마와 매우 가까운 사이여서 대정봉환 후 찾아온 료마에게 건네받은 편지[12]를 품고 다녔는데 어느 날 편지가 바람에 날아가 끝내 찾지 못했고 편지가 바람에 날아간 때가 오미야 사건으로 료마가 절명한 때였다는 풍문이 있다.
[1] 한국어로도 상세한 설명을 달아두었다.[2] 사쓰마 번 출신 관료, 일본철도회사의 초대 사장.[3] 1866년 (음)9월 12일, 에도 막부에서 조슈 번을 역적이라고 선포한 포고문(제찰)을 도사 번 무사들이 떼어내 버리자 신센구미가 이들을 추적해 8명 중 3명을 살해한 사건. 산죠 대교에는 당시에 칼이 부딪힌 흔적이 남아있다. #[4] 도사 사투리로 ほたえな![5] 오미야 점장 이구치 신스케가 곧바로 도사 번 저택 사람들에게 알린 뒤에야 알았다고 한다.[6] 에히메현 일대의 방언[7] 하라다 사노스케는 이요 마츠야마번(에히메현) 출신이다.[8] 투계용으로 개량된 . 현재 일본의 샤모 음식점들 상당수가 료마 관련 물품들로 꾸민다.[9] 막부, 신센구미, 료마의 입장이 높아지며 무시당했던 도사 번의 상급무사들, 일본 최초의 해양 추돌사건을 일으켜 망신살 & 배상금을 물게 된 기슈 번, 대정봉환으로 의견이 갈라선 사쓰마, 조슈 등등[10] 극 중에 이름은 나오지 않으나 사사키 타다사부로, 이마이 노부오, 와타나베 아츠시의 배역이 있었다.[11] 후에 유리 기미마사(由利公正)로 개명했다.[12]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에서는 사진이라고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