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미 준 유동룡 | 伊丹潤 Itami Jun | |
<colbgcolor=#82c6fd> 본관 | 무송 유씨[1] |
출생 | 1937년 5월 12일 |
일본 도쿄도 | |
사망 | 2011년 6월 26일 (향년 74세) |
일본 도쿄도 | |
본적 | 경상남도 거창군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건축가, 화가 |
학력 | 무사시 공업대학 (건축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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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훌륭한 건축은 압축된 음악이며 빛과 그늘의 조화.
이타미 준은 재일 한국인 건축가로, 한국 이름은 유동룡(伊丹潤)이다.하지만 한자 성인 '유(庾)'가 일본에 없는 한자라 건축가로서의 활동에 제약이 생기게 되자 한국을 올 때 이용했던 '오사카 이타미 공항'과 절친한 음악가 길옥윤의 예명 '요시야 준'에서 이름을 따와 '이타미 준'이라는 예명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2. 생애
일제강점기 기간이던 1935년 5월 12일 일본 도쿄도에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시즈오카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에 긍지를 가지고 살아온 부모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평생을 일본에 살면서도 죽을 때까지 '유동룡' 본명으로 한국 국적[2]을 유지하며 살았다. 때문에 일정기간마다 외국인 등록을 위해 열 손가락의 지문을 날인하는 수고를 겪었다고.. 무사시 공업대학(현 도쿄도시대학) 건축학과를 다니는 중, 혼자서 한국 여행을 하며 한국의 고건축, 조선 민화,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고 이를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이 때의 연구로 〈이조 민화(1975)〉, 〈이조의 건축(1981년)〉, 〈조선의 건축과 문화(1983년)〉, 〈한국의 공간(1985년)〉 등의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그는 2003년 세계적인 동양박물관인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에서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 때의 개인전 제목 역시 '이타미 준, 일본의 한국 건축가'로 기메박물관은 '현대미술과 건축을 아우르는 작가, 국적을 초월하여 국제적인 건축 세계를 지닌 건축가'라고 극찬을 보냈다.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이타미 준이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에 갇히지 않고 세계인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 개인전을 계기로 일본건축가협회 정회원, 2005년 프랑스 예술훈장 슈발리에와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06년 한국의 김수근 건축상,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2010년 일본 최고의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수상했다. 아시아권 건축가중에서 주요 국가에서 탈 수 있는 상들은 대부분 수상한셈.
이타미 준은 건축물이 세워질 장소의 고유한 지역성을 살려서 인간의 삶에 어우러지는 건축을 추구했다. 국내에서는 충남 아산의 '온양미술관'(1982)을 설계했으며, 제주도의 '포도호텔'(2001), '수·풍·석 미술관'(2006), '방주교회'(2009)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사실, 동북아시아에서만 작품을 남긴것만은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뉴욕에서도 작품활동을 했었고, 굵직한 강연 역시 진행한 바 있으나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일관된 필모를 구축하기 위해 언급을 줄인것으로 판단. 또한, 생전 화가로도 활동해 이우환, 곽인식 등 모노하(物派) 화가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타미 준이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프랑스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들에서 초대형 규모의 수상을 연거푸 달성하면서 부터였다. 이를 계기로 지역을 존중하는 그의 작업방식과 동시에 특정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색체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그의 독특한 세계관은 한일 양국을 떠나 2000년대 초반 되려 유럽에서 그에 대한 개념화에 먼저 성공한 편.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국에서 구축되고 있는 그에 대한 해석은 다소 지엽적인 편이며, 과거에도 그를 영토주의적인 시각에서 극복되지 못한채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다뤄졌거나, 단순히 모더니즘과 지역주의 건축의 대립구도의 연장선상에서만 그를 다루려는 표상적인 해석이 주였다. 또한, 근래 상영되었던 다큐멘터리에서조차 그의 작품들은 두서없이 파편화되는 식으로 조명되어 평론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제주도에 남긴 그의 유작들에 대한 영상의 비중이 너무 커서 대중적으로 그를 제주도에 박제시켜버린 결과를 낳고 말았다.
전반적으로 본국인 한국에서 되려 그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 무엇보다도 그를 단순히 한국을 그리워하던 지역주의 건축가로만 단순하게 한정짓기에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의외로 입체적인 면모가 많으며, 작업 접근방식 또한 의외로 유연한 구석이 많아서 장르적인 측면에서도 그 각이 상당히 넓은편에 해당하는 건축가. 물론, 이론적으로 명료하게 개념화 시키기에 까다로운 구석이 많은 건축가임에는 틀림없기에 그간에 이뤄졌던 그의 해석이 표면적 수준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가 되는 부분. 왜냐하면, 개념적인 측면에서의 그의 필모는 일관성이 뚜렷한 편이지만, 작품의 물리적인 일관성이 표면적으로 관찰되기 어렵기 때문인데, 사실 이는 그와 비슷한 정서를 지니고 있는 건축가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다. (예를들면, 스위스의 건축가 듀오인 헤르초크와 드뮈롱) 이와 같은 부류의 건축가들은 특히 사후에 그들의 일대기를 단권화 시키는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작업 중간 중간에 지속적인 아카이빙 작업과 출판이 실시간으로 다뤄져야 한다. 다시말해서 작품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물리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건축가 부류.
3. 작품
3.1. 제주 방주 교회
제주도 방주교회의 전경 |
4. 관련 동영상
- 2019년에 이타미 준의 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가 개봉했다.
5. 여담
- 사람의 생명, 강인한 기원을 투영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태어날 수 없다. 사람의 온기, 생명을 작품 밑바탕에 두는 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맥, 에센스를 어떻게 감지하고 앞으로 만들어질 건축물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일이다.
- 경주타워의 설계 공모전에 참가해서 우수상[3]을 타고 당선작에 채택되지 않았는데, 이후 조직위에서 이타미 준의 설계 아이디어를 그대로 배껴 경주타워를 지었다. 이후 소송에서 이겨, 원 저작권자가 유동룡임을 명시한 표지석이 설치되었다. 단, 승소 판결은 이타미 준의 사망 1개월 후에 나왔다.
- 재일교포로서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경계인의 삶을 살았던 그는 일본에 몸을 두면서도 한국을 그리워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딸이름도 한국의 이화여대에 들어가라는 뜻에서 유이화라고 지었다. 소원대로 그의 딸은 초등학교 때 한국을 건너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건축사무소를 냈다.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