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6C6A6><colcolor=#000000> 갈리에라 공작부인 스페인의 인판타 에우랄리아 Infanta Eulalia de España | |
이름 | 마리아 에우랄리아 프란시스카 데 아시스 마르가리타 로베르타 이사벨 프란시스카 데 파울라 크리스티나 마리아 데 라 피에다드 데 보르본 이 보르본 (María Eulalia Francisca de Asís Margarita Roberta Isabel Francisca de Paula Cristina María de la Piedad de Borbón y Borbón) |
출생 | 1864년 2월 12일 |
스페인 마드리드 | |
사망 | 1958년 3월 8일 (향년 94세) |
스페인국 이룬 | |
배우자 | 갈리에라 공작 안토니오 왕자 (1886년 결혼 / 1930년 사망) |
자녀 | 알폰소, 루이스 페르난도 |
아버지 |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
어머니 | 이사벨 2세 |
형제 | 이사벨, 알폰소 12세, 마리아 델 필라르, 마리아 데 라 파스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에울랄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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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이사벨 2세의 4녀. 알폰소 12세의 막내 여동생이자, 알폰소 13세의 고모이다.2. 생애
2.1. 성장
어린시절의 에우랄리아 |
1864년 2월 12일에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2세와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당시 프란시스코는 성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사벨 2세는 여러 애인을 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에우랄리아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같이 프란시스코의 자식이 아니라는 의혹을 받았다. 에우랄리아는 키가 작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으며, 어머니 이사벨 2세와 매우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1868년에 9월 혁명으로 스페인 왕가는 파리로 망명했다. 에우랄리아는 언니들과 함께 수녀원에서 성장했다. 1874년에 왕정이 복고되고 오빠 알폰소 1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에우랄리아와 가족들은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훗날 에우랄리아는 이러한 급격한 지위 변화를 겪으면서 사회적 지위에 대해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특권의식과 상류계급의 벽을 완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에우랄리아는 왕족답지 않게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매우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립심이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했던 에우랄리아는 스페인의 말괄량이 공주로 성장했다.
2.2. 결혼
에우랄리아 공주와 갈리에라 공작 안토니오 |
1886년 3월 6일에 갈리에라 공작 안토니오와 결혼했다. 안토니오는 이사벨 2세의 동생인 루이사 페르난다와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의 아들로, 에우랄리아의 사촌이었다. 몽팡시에 공작은 혁명 이전부터 왕위를 노렸기에 왕가에서 이미지가 안 좋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알폰소 12세가 몽팡시에 공작의 딸인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와 결혼했기에 에우랄리아와 안토니오의 혼담은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결혼식 전에 알폰소 12세가 사망하면서 약혼이 취소될 뻔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 말이 많은 가운데 진행된 결혼을 무르고 싶지 않았던 에우랄리아는 슬픔 속에서 결혼식을 그대로 진행시켰다.
부부는 두 아들을 두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에우랄리아는 결혼 후에도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했고, 변덕스럽고 사치스러운 남편을 경멸했다. 가톨릭에선 이혼을 인정하지 않기에 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은 각각 애인을 두고 생활했다. 1901년, 부부는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다.[1]
2.3. 활동
1893 시카고 엑스포에 참석한 에우랄리아 |
에우랄리아는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왕정 유지를 지지하는 보수파가 아닌 그 반대선상에 있는 자유주의를 지지했다. 왕가에서는 껄끄러운 존재였지만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에우랄리아를 좋아했다. 다만 에우랄리아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데 있어서 계급을 신경쓰진 않았지만 자산의 규모는 따졌던 것으로 보인다. 에우랄리아는 백만장자들을 사귀면서 그들을 자신의 친척인 왕족들과 연결시켜 주고 그 대가로 비싼 선물을 받곤 했다.
에우랄리아는 필명을 만들고 작가로써 활동했다. 에우랄리아는 주로 왕족들과 평등, 여성 권리, 전통 등 사회에 대한 자신을 생각을 주로 집필했다. 1912년, 첫 저서인 'Au fil de la vie'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모로코를 두고 진행 중이던 협상을 비판적으로 저술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고, 에우랄리아의 조카 알폰소 13세는 분노해 에우랄리아에게 책의 출판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에우랄리아는 이 기회에 스페인 왕실 생활에 작별을 고한다고 말하며 조카의 요구를 쿨하게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이 검열 시도가 뉴욕 타임스의 1면에 실리면서 에우랄리아의 책은 프랑스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세계를 여행하고 책을 쓰며 살던 에우랄리아는 1958년에 94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스페인의 에우랄리아 (Infanta Eulalia of Spain) | <colbgcolor=#fff3e4,#331c00>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Francisco de Asís, Duke of Cádiz) | <colbgcolor=#ffffe4,#323300>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Francisco de Paula of Spain) | |
카를로스 4세 (Carlos IV) | |||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of Parma) | |||
양시칠리아의 루이사 카를로타 (Luisa Carlotta of the Two Sicilies) | |||
프란체스코 1세 (Francesco I) | |||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Infanta Maria Isabel of Spain) | |||
이사벨 2세 (Isabel II) | |||
페르난도 7세 (Fernando VII) | |||
카를로스 4세 (Carlos IV) | |||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of Parma) |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of the Two Sicilies) | |||
프란체스코 1세 (Francesco I) | |||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Infanta Maria Isabel of Spain)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갈리에라 공작 알폰소 (Infante Alfonso, Duke of Galliera) | 1886년 11월 12일 | 1975년 8월 6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베아트리체 공녀[2] 슬하 3남 |
2남 | 루이스 페르난도 데 오를레앙 이 보르본 (Luís Fernando de Orleans y Borbón) | 1888년 11월 5일 | 1945년 6월 20일 | 마리 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