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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5대 총통 장제스 [ruby(蔣, ruby=ㄐㄧㄤˇ)][ruby(介, ruby=ㄐㄧㄝˋ)][ruby(石, ruby=ㄕˊ)](장개석)[1] | Chiang Kai-shek | |||
출생 | 1887년 10월 31일 | ||
청 절강성 영파부 봉화현 계구진 (現 중국 저장성 닝보시 펑화구 시커우진) | |||
사망 | 1975년 4월 5일 (향년 87세) | ||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스린 관저 | |||
묘역 | 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 | ||
재임기간 | 초대 총통 | ||
1948년 5월 20일 ~ 1954년 5월 20일 | |||
제2대 총통 | |||
1954년 5월 20일 ~ 1960년 5월 20일 | |||
제3대 총통 | |||
1960년 5월 20일 ~ 1966년 5월 20일 | |||
제4대 총통 | |||
1966년 5월 20일 ~ 1972년 5월 20일 | |||
제5대 총통 | |||
1972년 5월 20일 ~ 1975년 4월 5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95><colcolor=#ffffff> 본관 | 계구 장씨 | |
본명 | 장중정(蔣中正)[2] | ||
부모 | 아버지 장조총, 어머니 왕차이위 | ||
형제자매 | 이복형 장제친 동생 장루이칭 | ||
배우자 | 마오푸메이 (毛福梅, 1번째 부인, 기간: 1901 ~ 1921) 야오예청 (姚冶誠, 첩, 기간: 1913 ~ 1921) 천제루 (陳潔如, 2번째 부인, 기간: 1921 ~ 1927) 쑹메이링 (宋美齡, 3번째 부인, 기간: 1927 ~ 1975) | ||
자녀 | 아들 장징궈, 장웨이궈[3] 딸 장젠화, 장야오광 | ||
학력 | 봉록학당 금천공학 용진학당 일본육군사관학교 산하 진무학교 (중퇴) | ||
종교 | 불교 → 개신교 (감리회) | ||
신체 | 169cm[4], 59kg, O형[5] | ||
소속 정당 | |||
자 | 개석(介石) | ||
군사 경력 | |||
임관 |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1기) | ||
복무 | 국민혁명군 | ||
1911년 ~ 1952년 | |||
최종 계급 | 특급상장 (중화민국 육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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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년기의 장제스 |
중화민국의 제1-5대 총통.
2. 약력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사상과 성격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의 학설 문서 참고하십시오.6. 타 정치인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7. 가족 관계
- 증조부 장사증 (1783 ~ ?)
- 조부 장사천 (1814 ~ 1894)
- 부 장조총 (1842 ~ 1895) 청 저장성 출신 / 모 왕차이
- 본인 장제스 (1887 ~ 1975) 제1~5대 총통
- 장남 장징궈 (1910 ~ 1988) 제6, 7대 총통 / 며느리 장팡량(1915 ~ 2004)
- 손자 장샤오원 (1935 ~ 1989)
- 손녀 장샤오장 (1937 ~ )
- 손자 장샤오옌 (1940 ~ )
- 증손자 장완안 (1978 ~ ) 정치인
- 현손자 3명
- 손자 장샤오츠 (1940 ~ 1996)
- 손자 장샤오우 (1945 ~ 1991)
- 손자 장샤오융 (1948 ~ 1996)
- 증손자 장여우보 (1976 ~ ) 디자이너
- 현손자녀 1남 1녀
- 차남 장웨이궈 (1916 ~ 1997) 군인, 정치인 / 며느리 스징이 (? ~ 1953) / 며느리 추아이룬
- 손자 장샤오캉 (1963 ~ )
- 당조카 장정인
- 당조카손자 장샤오셴 (1900 ~ 1936)
8. 이름 표기법
구분 | 명자(名字) | 설명 |
족보명 | 저우타이(周泰, 주태) | 장제스의 족보 이름. |
초명 | 루이위안(瑞元, 서원) | 초명 |
학명(學名) | 즈칭(志淸, 지청) | 학생 시절 이름. |
본명 | 중정(中正) | 본명 |
자 | 제스(介石, 개석) | 자. 실제 이름인 중정보단 장제스로 유명하다. 한국에선 자를 그대로 읽은 장개석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
별명 | 라오장(老蔣, 노장) | 어린 아들 장징궈[7]와 구별되는 존칭. |
중국 근현대사 인물 중 본명보다 자로 더 잘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명은 장중정(蔣中正), 자(字)가 개석(介石)인데 한국에서도 장개석으로 알려져있다.
마오쩌둥 역시 룬즈(潤之, 윤지)라는 자(字)가 있지만 그냥 본명인 쩌둥(澤東, 택동)으로 더 유명하다. 대부분의 중국 근현대 인물이 본명으로 더 유명한데 비해 유독 장개석만 동서를 통틀어 언급될 때 자로만 불린다.[8]
장개석의 본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생소한 편이다. 대만의 중정기념당, 중정국제공항 (현 타오위안 국제공항)을 통해 그나마 일반인들이 장제스의 본명을 알고 있는 정도. 당시 중정국제공항은 영문으로는 Chiang Kai-shek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의 국민들이나 간간히 안다.
- 장제스의 학명은 '장즈칭(蔣志清, Jiǎng Zhìqīng)'이며 그의 두 번째 이름이 1913년경 바꾼 '중정([ruby(中, ruby=ㄓㄨㄥ)][ruby(正, ruby=ㄓㄥˋ)])'이다. '제스([ruby(介, ruby=ㄐㄧㄝˋ)][ruby(石, ruby=ㄕˊ)])'는 본래 191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었으나 이후 자(字)로 사용했다.
- 이 문서 표제로도 올라와 있는 '장제스'는 '장개석(蔣介石)'의 표준 중국어 발음을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옮겨 적은 것으로, 한어병음의 표기를 따르면 'Jiǎng Jièshí'가 된다. 병음을 보면 알겠지만, 스는 권설음이라 한국어 '스'와 다른 발음이다. 만약 온갖 표기 원칙을 무시하고 근사치 표기를 하면 [tɕjàŋ tɕjê.ʂɻ̩̌](지앙지에시으) 정도일 듯.
- 영어권을 비롯해 대부분의 서양 언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창카이섹, 'Chiang Kai-shek'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표기는 광동어 발음 '쬥가이쎅(표기법 기준) / Zoeng2 Gaai3-sek6 (홍콩 언어학 학회(LSHK) 표기법 기준)'의 변형이다. 성씨 '蔣'은 표준 중국어 발음 기준 웨이드식 표기법인 'Chiang'이고, 나머지는 광동어 발음 표기의 변형. 초기에 중국국민당의 본진은 광둥성에 있었고, 장제스가 두각을 나타낸 때가 광동 국민 정부 시절이었기에 광동어식 발음으로 서구에 알려졌다. 영어 위키백과 해당 항목명도 'Chiang Kai-shek'. 드물게 표준 중국어 발음을 웨이드 식으로 옮긴 Chiang Chieh-shih도 쓰이기는 한다.
2008년 칭화대 교수 왕치(王奇, 왕기)가 Chiang Kai-shek이 장제스임을 알지 못하고 창카이선(常凱申, Cháng Kǎishēn, 상개신)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번역하여 크게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 이후 '창카이선'과 '창공(常公, 상공)'이 중국 내에서 장제스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 한국의 경우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서 신해혁명 이후 중국 인물에 대해서는 한자 인명을 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옮겨 적는다는 원칙을 두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장제스'라는 표기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한국 한자음 그대로 표기해 '장개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문서가 장개석으로도 리다이렉트된다.
- 대만에서는 '蔣介石'보다도 본명을 적은 '蔣中正'이 더 널리 쓰이며(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ㄐㄧㄤˇ ㄓㄨㄥ ㄓㄥˋ', 한어병음 Jiǎng Zhōngzhèng. 한국 한자음과 비슷한 '장중정'으로 읽는다. 중국어 위키백과 문서명이기도 하다.), 대만 내 영어 표기에서는 'Chiang Kai-shek'을 쓴다. 대만어 발음으로는 Chiúⁿ Kài-se̍k. 간단하게는 중정/C.K.S.으로 쓴다.
- 일본에서는 '蔣介石'을 자신들 방식으로 읽어 'しょうかいせき(쇼카이세키)'라고 한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중국어 인명을 표준 중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있고, 그나마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활약한 인물은 거의 그렇게 표기하지 않는다. 박완서의 저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가 선전한 적들의 이름 중 일본어 독음 '쇼오가이세끼'가 언급된다.
왠지 욕 같다show guy 새끼 - 베트남에서는 '蔣介石'을 베트남어식 한자 독음으로 읽어 Tưởng Giới Thạch(뜨엉 저이 타익)으로 부른다. 베트남은 중국어 인명을 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고 거의 일괄적으로 베트남어식으로 읽고 쓴다. 따라서 마오쩌둥 역시 Mao Trạch Đông(마오 짜익 동)이 된다.
9. 어록
일본인들은 피부병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심장병이다.[9]
The Japanese are a disease of the skin. The Communists are a disease of the heart.
1941년, 시어도어 H. 화이트와의 인터뷰에서.
The Japanese are a disease of the skin. The Communists are a disease of the heart.
1941년, 시어도어 H. 화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중화민국을 설립한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기 동안 소위 대중집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나 헌정주의는 없었습니다. 또한 불행히도 이런 초기 집회들이 몰고 온 수많은 부패 관행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나라를 혼란과 허약한 상태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의 적들로부터 억압과 굴욕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정치위원회는 의회가 아니지만 여러분은 정당정치가 빚어낸 과거의 실수들이 지속적인 경고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동시에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굳건한 기반을 세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동포 여러분. 구악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선을 배푸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지고지귀(至高至貴)의 특성이며 우리가 일관되게 성명한 '우리는 일본 군벌은 적으로 삼되 일본 인민은 결코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폭(暴)으로 폭을 갚고 능욕을 가지고 그들의 지금까지의 잘못된 우월감에 대응한다면 원통함과 원통함은 서로 앙갚음하여 영원히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인의의 스승이 가르친 목적이 아닙니다.[10]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충칭에서 한 연설 중 일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충칭에서 한 연설 중 일부.
강대국의 압박에 맞설 수 있는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는 강한 것이다.
나는 중국이다. 중국은 나 없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신생활운동을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신생활운동을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10. 여담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여담 문서 참고하십시오.11. 갤러리
장제스의 초상 | 1940년 군복을 입은 장제스 |
1937년 연설하는 장제스 | 1945년 노년의 장제스 |
1927년 쑹메이링과의 결혼 기념 사진 | 앉아있는 장제스 |
훈장을 단 장제스 | 1926년 제1차 북벌 당시 군마를 탄 장제스 |
12. 한국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한국과의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13.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3.1. 역사서
- 장제스의 저서라 알려진 중국의 운명이 1946년에 한국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고서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다.
- 1970년대 말부터 대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일본의 산케이신문에서 연재 후 출판한 '장개석 비록'이 있다. 한국에선 1976년, 1부에 해당하는 분량이 6권으로 출판되었으나 2부는 끝내 정발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들어온 것도 옛날에 절판되어서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후 장개석 비록의 주요 필진이었던 후루야 켄지지의 주도로 영어 번역 버전도 나와서 세인트 존스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하였으나 이 역시 현재는 조너선 펜비와 제이 테일러의 장제스 평전에 밀려서 흔적도 찾기 힘들다. 현재도 판매되는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가 장개석 비록의 짭퉁인지라 정히 보고 싶다면 이쪽이 있다. 원래 1986년에 출판되었다가 2014년에 재판되었는데 재판을 대충했는지 곳곳에 오탈자가 많으며 문체나 편집 스타일 자체도 좀 예스럽고 장징궈가 아직도 현 대만 총통이라고 되어 있는 등옛날에 나온 책이라는 티를 좀 낸다. 이후 산케이 신문에서는 마오쩌둥 비록 역시 내놓은 바가 있다.
- 장제스는 1915년부터 1973년까지 57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붓으로 일기를 썼다. 1917년에 푸젠성 지역의 전투에 휘말리면서 1917년 이전의 자료는 일부 망실되었다.'제요(題要)'라는 제목 아래 그날 있었던 주요 사건과 알게 된 과정을, '예정(豫定)'이라는 제목 아래 급히 해야 할 일을, '주의(注意)'라는 제목으로 정세 평가와 판단, 유념할 일을 적고 '기사(記事)'라는 제목 아래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매주마다 반성할 점과 다음 주에 할 일을, 매달마다 반성할 점과 그달 있었던 사건들을 적었으며, 매년마다 반성할 점을 적어두고 빠진 기록들을 보충해 놓았다. 주위 인물에 대한 평이나 쌍욕, 또는 성행위 관련 기록을 적어두기도 했다. 미국 후버 연구소가 유족으로부터 이걸 빌려와 2006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일기를 공개했다.
장제스가 당대 중국의 1인자였던 만큼 중국 근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기에 중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와 연구자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부천대 이후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공개가 되어있지 않은데 대만 현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부분인 만큼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는 시안 사건 때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체포했지만, 장제스의 일기를 읽어본 후, (항일을 기피하던) 장제스가 아주 애국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제스를 처형하려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장제스가 집권자였던 시절의 일기가 공개되었다 한들 절대로 웹 공개를 허락하지 않으며 보고 싶으면 후버 연구소에 열람을 신청하고 다시 후버 연구소가 장제스 유족들에게 허락을 받는 식으로 진행하여서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보기 복잡했다. 게다가 이후 저작권 문제가 복잡해져서 장제스의 남은 유족들이 누구 맘대로 일기를 후버 연구소에 기증했냐고 소송을 걸어서 현재는 읽기가 좀 복잡해진 상태다. 즉,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가 힘들다.
한편, 1917년 이전의 일기의 일부는 장제스가 쑨원을 따라 광둥성으로 떠나면서 장제스의 은사가 맡아 보관하고 있다가 문화대혁명 시기에 발견되어 용케도 파괴되지 않고[11] 현재 중국대륙에서 전시하고 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일기지만 자기검열이 아주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장제스는 이 일기를 부하들에게 보여주며 자기 의지나 애국심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자주 활용했기 때문. 동시대인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일기가 사후 회고록 출간을 전제로 씌여져 100% 신뢰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레이 황 교수가 1930년대과 70년대에 일부 공개된 일기를 바탕으로 <장제스 일기를 읽다>(從大歷史的角度讀蔣介石日記)란 책으로 내놓은 바가 있다. 이 사람은 본명은 황런위(黄仁宇)로 중일 전쟁에도 참전했던 중화민국군 장교 출신이다. 1950년대 미국으로 유학한 이후, 2000년에 타계할 때까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전공은 중국 근현대사는 아니고 명나라 경제사다.
이는 위에 언급한 공개된 일기가 아닌 일기의 공개 이전에 나온 부분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레이 황 교수는 2006년의 일기 완전 공개가 있기 전인 2000년에 타계했다. 그래서 장제스 일기를 읽다의 역자의 말을 보면 번역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스럽다는 역자의 말이 남아있다. 2004년에 원고를 받았는데 중국어판과 영어판이 너무도 다른 등 번역에 애로 사항이 꽃피어 2009년에야 완성됐다고 한다. 타이완 출판 버전과 미국 출판 버전이 다른데, 미국 버전은 미국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스틸웰-장제스 불화나 카이로 회담 등에 관한 내용을 더 많이 넣었다고 한다.
이는 위에 언급한 공개된 일기가 아닌 일기의 공개 이전에 나온 부분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레이 황 교수는 2006년의 일기 완전 공개가 있기 전인 2000년에 타계했다. 그래서 장제스 일기를 읽다의 역자의 말을 보면 번역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스럽다는 역자의 말이 남아있다. 2004년에 원고를 받았는데 중국어판과 영어판이 너무도 다른 등 번역에 애로 사항이 꽃피어 2009년에야 완성됐다고 한다. 타이완 출판 버전과 미국 출판 버전이 다른데, 미국 버전은 미국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스틸웰-장제스 불화나 카이로 회담 등에 관한 내용을 더 많이 넣었다고 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조너선 펜비 경이 저술한 장제스 평전이 있다. 한국에선 2014년 민음사에서 정발했다. 원서가 나온 시점이 장제스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인 2000년대 초반인데 이를 감안하면 꽤나 전향적인 장제스 재평가를 이뤄내서 '공정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대 언론 보도나 편향된 일부 자료를 사용하고 사실 관계에서도 일부 오류가 발견되는 등 지금 보기엔 좀 비판점이 있으나 그래도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유일한 장제스 평전.[12]
- 미국의 외교관 출신인 제이 테일러가 집필하고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장제스 평전(The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Struggle for Modern China)이 있는데 이건 국내에 정발되지 않았다. 조너선 펜비의 책보다도 전향적인 장제스 재평가를 시도한 책 중 하나다.
-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 평전을 집필했던 알렉산드르 판초프와 스티븐 레빈이 장제스 평전을 2023년에 새로 썼다. 제목은 Victorious in Defeat: The Life and Times of Chiang Kai-shek, China, 1887-1975.
- 대만에서는 장총통전을 비롯하여 장제스를 칭송하는 저작들이 많다. 다만 장제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만 보수 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겸하기도 하기 때문에 저작의 학문적인 질은 장담할 수 없다.
- 중국 본토에서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장제스를 부정부패와 부하 관리 제대로 못해 중공에 대륙을 홀라당 내주고 대만에 도망친 무능한 사람 정도로 비하하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21세기 들어 양안관계가 강조되면서 어느정도 재평가되어 항일 지도자로 평가하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장제스 평전이 출간되는 등 일종의 장제스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장제스를 높여야 그와 맞서 이겨 대륙을 차지한 마오쩌둥을 더 높일 수 있게 되기도 하고….
14. 참고 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의 전반적 생애 관련.
- 중일 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 전쟁 시기와 공업화 관련.
- 중국 혁명사, 서지영, 한울 아카데미 - 장제스의 농업 정책 관련.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 난징 10년 관련
- 덩샤오핑 평전, 벤자민 양, 황금가지 - 국공 합작 결렬과 상하이 쿠데타, 펑위샹 관련.
-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민두기 역.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 출판 삼화 - 초공 작전 관련.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 역사 - 중일 전쟁 관련.
- 중일 전쟁과 중국의 대일 군사 전략, 기세찬, 경인 문화사 - 중일 전쟁 관련.
- 모택동의 사생활 1~3권, 리즈수이, 고려원 - 반우 운동 관련.
-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교양인 - 장칭의 난징 정부 회상 관련
- 학문의 제국주의, 폴 코헨, 순천향 대학교 출판부 - 서양 학계 시각 비판 관련.
- 남경 정부 시기 국가 주도하 국민 경제 건설, 강명희, 한세 대학교 - 장제스 경제 정책 관련.
- 1930년대 농촌 위기와 남경 국민 정부의 농업 정책, 아주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
- 1920~30년대 난징 국민 정부의 농촌 정책: 장쑤 성을 중심으로, 박정현, 고려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
- 중국 군벌 전쟁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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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어병음 : Jiǎng Jièshí[2] 주음부호: ㄐㄧㄤˇ ㄓㄨㄥ ㄓㄥ, 병음: Jiǎng Zhōngzhèng[3] 친부가 다이지타오라는 의혹이 있다. 예전엔 아예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현재는 찬반 여론이 엇갈린 상태.[4] 그 당시 중국인 평균 키보다 컸다.[5] 자신이 청년기에 받았던 신체검사에서 그 정도 체격이였다고 인정했다. 다만 청년기의 자료이므로 국공내전이 끝날 무렵인 1945~1950년에는 167cm 정도로 줄었을 가능성은 있다.[6] 국민정부의 군권 소유자. 이 덕에 사실상의 최고권력자가 되었으며 중일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지도자로 활동했다.[7] 장징궈는 노장인 아버지처럼 샤오장(小蔣, 소장)이라 불렸다.[8] 물론 왕징웨이같은 경우도 있다.[9] 비슷하게 아인슈타인이 한 것으로 알려진 명언 중에서도 "제국주의는 피부병이지만 내셔널리즘은 심장병"이란 말이 있다. 근데 장제스는 국민당(Nationalist Party) 소속이였다[10] 전후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해 일본에 대한 비난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이 두드러지는 연설이다. 실제로 장제스는 패전한 일본 정부에게 중일전쟁에 따른 전쟁보상금을 일체 요구하지 않았으며, 이 연설은 1971년 대만이 유엔에서 쫓겨날 때 일본이 강력히 대만 편을 들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1] 장제스 생가와 모친 묘까지 모든 것이 박살 나던 시기에 이 일기가 발견되어 어떠한 문제도 없이 남아있는 건 그야말로 천운이라 할 수 있다.[12] 다만 타이완 시절의 행적은 다루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