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9:20:02

정명수

굴마훈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3. 잘못된 정보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같이 보기

1. 개요

鄭命壽
(? ~ 1653(?)년)

정명수는 조선 중기의 인물로 병자호란 당시 한윤과 더불어 청나라에게 가담한 역관이다.

2. 생애

그 이름은 명수(命守)라고도 하는데, 평안도 은산 출신이다. 본래 천례(賤隷)로서 한미한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식 이름은 굴마훈(ᡤᡡᠯᠮᠠᡥᡡᠨ gūlmahūn, 古爾馬渾).[1] 고아마홍(古兒馬紅, 孤兒馬紅), 곡아마홍(谷兒馬洪), 곡아마(谷兒馬) 등으로도 음차되었다.

1619년 광해군의 명을 따라 강홍립명나라후금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할 때에 병졸이 되어 요동으로 종군하게 되었다.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여진어에 능숙하다는 장기[2]를 살려 포로 해방 이후에도 후금에 남았고, 조선 내부의 사정을 후금에 알려 후금 조정으로부터 높은 신임을 얻었다.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용골대[3]를 비롯한 청나라 장수들의 역관 노릇을 하며 금의환향했다. 호란 이후 잠시 조선에 남아있으면서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정에 압박을 가하여 그 벼슬이 영중추부사[4]에 이르렀다. 대표적으로 조선 중기의 권신이자 문정왕후남동생이자 정난정남편윤원형의 벼슬이 영중추부사였는데 보통은 왕족이나 왕실의 인척에게 주어지는 벼슬로 명예직인데 천민 출신인 정명수가 영중추부사 벼슬을 받음은 대단한 특혜를 누린 것이다. 자신이 총애하던 기생을 꾸짖었다는 이유로 병조좌랑 변호길(邊虎吉)을 몽둥이로 폭행하였고, 조정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재산을 불렸으며, 또한 자신의 친척들에게 벼슬을 내려달라고 강요하는 등 온갖 횡포를 부렸다.

청나라로 돌아간 후에도 조선 조정을 계속해서 압박하며 괴롭혔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탄핵을 받아 위기에 처한 김자점이 정명수에게 조선이 북벌을 계획한다는 것과 장릉[5]의 지문에 청나라의 연호를 새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밀고하자, 청나라에서 10차례나 조사단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가 이렇듯 조선에 특별한 반감을 가지고 온갖 행패를 부린 이유는 은산현에서 노비로 있을 때 은산현감이었던 홍집이 정명수에게 곤장을 쳐서 벌을 준 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갈고 있던 정명수는 인조 11년(1633)에 그는 청의 사신으로 왔을 때, 평산현감으로 있던 홍집을 욕보이고 평산현[6]을 약탈하는 것으로 사적인 보복을 하기도 한다.관련기사

어쨌건 이러한 그의 만행으로 많은 조선인들은 정명수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고, 실제로 여러 조선인들이 정명수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꾀하였다.

심양에 있던 시강원서리 강효원과 시강원필선 정뇌경 등이 소현세자봉림대군을 따라 심양에 와있던 재상 박노, 신득연, 보덕 박계영, 필선 신유, 사서 김종일, 정지화 등 여러 명의 조선 관리와 모의하고는 정명수가 부패한 행위를 저지르고 조선에서 보내온 세폐(歲幣)[7]까지 횡령했던 만행 등을 청나라 형부에 고발하여 정명수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명수가 이를 알고는 고발 문서를 빼돌려 불태워버리고는 박노를 협박하여 거짓 진술을 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하여 강효원과 정뇌경 등은 무고죄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조선 조정에서 무신인 이응징을 급히 파견하여 형조좌랑이라고 칭하게 하고 청나라 조정을 속여서 조선의 법으로 처형[8]하겠다는 외교 문서를 보냈다.[9]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많은 금을 뇌물로 바쳐 살리려 했으나 실패했는데,[10] 청나라 조정에서는 처형 직전까지 참수하려다가 이응징이 강하게 어필하여 교형에 그치게 하였다. 이 사건에서 흥미로운 점은 속지주의에 따른 청나라의 법령이 아니라 속인주의에 따른 조선의 법으로 처벌했다는 의의와 정명수를 조선 백성으로 간주하여 '조선 백성을 살해하려 한 한 조선 관리들을 조선의 법으로 처벌하였다.'는 명분을 얻는 것이므로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상당한 외교적 성과인 셈이다.

효종 4년(1653) 6월 3일자 기록# 기록에는 정명수가 를 받아 버려졌다고 나온다.[11] 외교문서 모음인 《동문휘고》에 의하면 "조선의 뜻과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교수형에 처해 마땅하나 여러 번 조선에 다녀온 공로를 생각해서 죽음을 면케 하였다."고 한 청나라 측의 자문이 남아있다.[12]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자문을 본 효종이 "청의 형법이 많이 어지러워졌구나"라고 은근히 디스를 하면서도 "정명수는 특히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죽지 않는다면 꺼진 재가 다시 불붙게 될 걱정이 있을까봐 염려스럽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정명수는 이 때 죄를 받아 폐서인되었으나 이 시점에선 죽지는 않은 듯하다.

이후 정명수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열하일기》에 의하면 시기는 특정하게 나오지 않고 '정뇌경의 살해 시도 사건 이후에(後) 정명수가 조선에 죄가 많음을 깨닫고 참(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에 남아있던 그의 친족들 혹은 정명수의 청탁으로 면천하고 벼슬을 지낸 자들은 대개 유형에 처해지거나 심하게는 극형을 당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팔기만주씨족통보》의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에 있던 그의 아들 버진쿠이(Bejinkui, 白晉魁)와 그의 손자 망둥기(Mangdunggi, 莽董儀)와 피잔(pijan, 皮占)은 호군교(護軍校)[13]를 맡는 것으로 보아 청나라에서는 연좌제가 적용되지는 않은 듯하다.

채널 A에서 방영한 <천일야사>에서는 1639년 정뇌경 등이 정명수를 모살하려 할 때 정명수의 횡령 사실이 원인이 되어 1653년 숙청당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실제로 정뇌경의 행장에서 '청나라 황제가 죽이려 하고 있으니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하는 당대 시각이나 '조선의 뜻과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패를 부렸다.'는 외교 문서로 볼 때 1639년의 사건은 정명수가 조선어 통번 능력이라는 특수한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당장의 필요성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지만 정명수가 청나라 황실에서 어느 정도 괘씸죄를 얻었고 그 괘씸죄가 이어져서 정명수의 실각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틀린 말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정뇌경의 행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1639년 정뇌경 등의 정명수 모살 시도 사건에 대한 정뇌경 등을 처형하던 시기에 '청나라 황제가 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는 내용이나 '보고 있던 오랑캐들조차도 혀를 끌끌 차며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에서 볼 때 이 시점에서의 정명수에 대한 청나라 지배층의 신임은 사실상 끝난 듯하다.

다만 이것만을 원인으로 단정하기에는 몇 가지 의문이 남는데 횡령 참소 시점과 정명수의 실각 시점이 14년이라는 연도차가 있고 이 14년 동안에도 정명수가 《조선왕조실록》에 조선에 꾸준히 사신으로 오며 그 사이에 청나라 황실도 2번[14]이나 정권이 교체가 된다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순치제가 즉위하고 도르곤이 섭정을 시작하는 1643년에는 정명수가 아예 칙사로 승진까지 하는 것을 볼 때[15] 청나라 황실이 과연 1639년 횡령 참소 건만으로 정명수를 벌한 것일까에 대해서는 확실히 의문이 존재한다. 정명수의 실각을 둘러싼 원인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대륙 정세의 변경이다. 횡령 참소로 정뇌경이 처형된 지 5년이 지나 1644년 명나라가 멸망했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중원의 패자가 된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선과 명나라의 협공 위협이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대(對) 조선 외교 기조(基調)가 협박성 외교를 해야 할 필요성이 적어지고 교린(交隣) 외교로서 대국스러운 관용을 보여줘야 하는 시점으로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인성 문제만 있었다고 판단되고 능력 면에서는 나름 대체 불가의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되는 정명수의 대(對) 조선 트러블 메이킹은 청나라에서도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이제 교린(交隣) 외교를 보여줘야 하는 시점인데 조선에 대한 개인적 원한에 사로잡힌 트러블 메이커인 정명수는 청나라 조정 입장에서는 눈엣가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강력한 반(反) 조선 성향이었던 숭덕제가 살아생전 중원 땅을 밟고 더 나아가 천수를 누리기까지 했다면 정명수는 숭덕제의 반조선 성향에 힘입어 더욱 오랫동안 조선을 괴롭히며 승승장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숭덕제가 중원을 정복하지도 못한 채 뇌출혈로 급사한 탓에 결과적으로 정명수는 자신을 평생 지켜줄 든든한 주군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또 다른 추측은 순치제 시절인 1650년과 1651년 사이에 벌어진 도르곤의 사후에 발생한 도르곤 세력의 몰락 및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의 복귀와 순치제의 친정을 위한 친위쿠데타로 인한 청나라 정권의 교체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친위 쿠데타 직후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당시 형조판서 이시방이 "최근 연경에 갔을 때 정명수의 기색을 보니 그 전과는 전혀 달리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고 효종에 보고한 사실이다.[16]

정명수는 팔기군 중 정홍기[17] 소속이었고 그가 소속되어 있는 정홍기의 경우 숭덕제의 이복형인 다이샨이 기주로 있었으며 다이샨은 순치제 친정 세력의 강한 버팀목이었던 지르가랑의 양람기의 견제 세력이었기 때문에 1648년 정홍기 수장인 다이샨의 사망, 1650년 도르곤의 사망 후 정적 지르가랑의 복귀와 순치제의 친정을 위한 친위쿠데타로 양람기 세력이 강해진 것은 정홍기였던 그를 지지해주는 권력 기반 상실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들은 꼭 1가지만 작용했다기보다는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인데 정리하자면 '정뇌경의 참소에 의한 청나라 조정의 정명수에 대한 불신', '조선에서의 행패, 횡령, 약탈로 인해 외교 마찰을 야기하는 등의 행위로 인한 괘씸죄 획득', '대륙 정세의 변화로 인한 청나라 외교 기조의 변화', '순치제의 친위쿠데타로 인한 정홍기 세력의 약화' 등 복합적 원인이 정명수 퇴출의 명분으로 차곡차곡 적립되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3. 잘못된 정보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이사용이라는 자가 정명수를 주살한 걸로 나오는데, 출전을 알 수 없다. 참조 심지어 2021년 1월 현재 중국어 위키백과에도 이사용에 의해,[18] 네이버에서 기재하는 문화원형백과에서는 강효원, 이사용, 정뇌경에 의해 모살당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19]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명수와 이사용은 관련이 없다. 우선 현종개수실록 19권, 현종 9년 10월 11일 병자 3번째기사를 읽으면 이 강효원과 이사용의 처자에게 휼전을 내린 이 기사에서 강효원과 같이 언급되는데, 이사용은 성주의 포수이며 정명수 주살 시도 사건과는 무관하고, 1641년 금주위 전투에 임경업 휘하로 참전하여 명군과 전투를 벌일때 명나라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포탄을 제거하여 공포를 쐈던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20] 청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강효원과의 공통점 때문에 시대가 많이 지난 현종 때 이 두사람의 처자식에게 동시에 휼전을 내려 위로했는데, 강효원이 "정명수를 모살하려 했다(謀殺鄭命壽也)"는 내용이 나오고, 그 다음의 강효원과는 관계없는 이사용의 일화에서 "이사용이 같이 했다.(士用與焉)"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대한 오독(誤讀)인 듯하다. 이사용이 같이한 대상은 심양에서 징병되어 갔을 때 같이 갔다는 의미이지, 앞의 강효원과 같이 모살하려 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안정복의 순암문집의 정뇌경의 행장에는 이 정명수를 모살하려던 주모자 정뇌경의 시선에서 1639년[21]에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나온다. 여담으로 영조는 이 사건의 주동자였던 정뇌경을 좌찬성 벼슬에 추증했고, 정조는 충정공으로 봉하였다.[22]

이사용의 한문 표기와 관련한 혼동도 있다. 이사용(李士龍)과 이사용(李士用)이 한문 표기가 다르므로 다른 인물일 것이라는 설인데, 이 설은 이사용(李士龍)이라고 기록한 인조 19년의 당대사료, 숙종 7년의 기사와 이사용(李士用)이라고 기록한 현종 9년의 기사, 현종 10년의 기사의 동일한 행적으로 보아 논파될 수 있다. 둘은 동일인임이 확실하다.

4. 기타

  • 당시에 정명수에 대한 평가는 천하만고의 역적이자 간신배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하면 어김없이 그가 저지른 각종 만행도 함께 언급되고는 하며 모두가 그를 한마음으로 두려워했다. 이는 특히 <효종실록> 4년의 기록에서 이와 같은 점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정명수가 청나라에서 죄를 받고 폐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효종은 이에 대하여 "명수는 특히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죽지 않는다면 꺼진 재가 다시 불붙게 될 걱정이 있을까 염려스럽다."고 했을 정도였다. 정명수가 처벌을 받게 된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가 혹시라도 목숨을 부지하여 조선에 위해를 가하려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말이다. 특히 그의 사후에도 효종은 마치 정여립처럼 '정적(鄭賊)'이라는 멸칭, 정조는 김돌(金突)과 함께 정명수를 '부노(俘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 정명수와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살면서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이 바로 충무공 정충신이다. 정충신 또한 천민의 계급에서 시작하여 사망한 후에는 충무공 시호를 받을 정도로 출세한 인물이었지만 이와 같은 영예는 모두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의 숱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큰 일을 이뤄낸 끝에 성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명수는 나름대로 총명한 머리를 조국을 핍박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쓰다가 결국 자신을 거두어준 청나라에 의해 버림을 받았고 일족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조선사에서 만고의 역적으로 남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역사 속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자점으로 대표되는 조선 내 친청파는 효종에 의해 숙청을 당했고,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북학파조차 정명수 등 청나라에 투항한 조선인들을 옹호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청나라가 멸망한 현 시점에서 정명수의 매국행위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줄 강력한 세력은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
  • 오늘날 중국에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명수의 후손들은 조상의 정씨 성을 쓸 것으로 보인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족 대다수가 만주식 성을 버리고 한자식 성을 쓰게 되었는데, 이 때 한족 조상이나 조선계 조상을 둔 만주족들은 도로 조상의 한자식 성을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정명수 후손이요 해봤자 좋아해줄 사람은 없다. 조선족을 포함한 한민족의 입장에서는 민족의 배신자 그 자체이고,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투항하여 출세했다가 이후 지속적으로 어그로를 끌어 몰락을 자초한 이민족이며, 한족(특히 한족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청나라로 붙은 간사한 조선인이니 당연하다.

5. 대중매체에서

대중매체에서는 자신이 천한 신분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조선을 괴롭힌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역사적 사서에서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콤플렉스 같은 건 안 보인다.
  •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는 냉철하면서도 총명한 느낌의 인물로 비중있게 묘사된다. 다만 정명수가 강홍립을 따라 종군하기 이전에 그 가족이 비참하게 몰살되었다는 묘사는 소설 내의 픽션에 불과하다.
  • 2008년 SBS 드라마 일지매에서 배우 정진기가 연기했다. 조선 출신의 청나라 사신관 정명수 역할로 매국노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 드라마에서는 아들인 정치홍과 함께 나오나 아버지인 정명수와는 달리 정치홍은 실존인물이 아니다.[23]
* 2013년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배우 조덕현이 연기했다.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어가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나오자 청나라 장수가 가마에서 내릴 것을 명했고 이를 통역한다. 이후에도 계속 출연하는데 역사 기록대로 조선을 깔보거나 조정을 압박하며 왕실막장 가족사를 즐기는듯 하다. 청나라 황제의 명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인조도 함부로 하지 못하며 청나라에서는 조선 소식통으로 대접받는다. 정치적 감각은 있는지 인조나 조선 조정에 숙이는 모습이나 이용 가치가 있으면 어울리는 모습도 나온다.
파일:1280e3b3a3462c189e083f87973a7a7f6a7556ce.jpg*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배우 조우진[24]이 연기했다. 역관이라는 캐릭터상 본인의 대사보다 용골대홍타이지의 대사 통역이 더 많지만, 통역의 내용이 주는 압박감과 배우의 무게감있는 연기로 적지 않은 존재감을 보여줬다. "너희 조선 사람들은 어찌 저리 아둔한가?"란 용골대의 물음에 "저는 대청국 사람입니다."라고 응수하거나, 김류[25]에게 "당신들의 임금이 숨어있는 작은 성벽도 홍이포 몇발이면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오."라고 인조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등, 철저한 매국노로 그려진다. 하지만 조선의 노비로 태어나서[26] 고통받은 과거가 암시되면서 관객들에게 동정표를 얻기도 했다.
파일:칼부림_정명수.jpg* 웹툰 칼부림에서도 등장. 작품의 주역 중 하나인 덕만과는 사르후 전투에서 함께한 전우 사이이며, 주인공 함이에겐 어머니를 강간하고 살해한 원수로 나온다. 초반부터 간접적으로 언급되다가[27] 3부 13화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심양에서 변발하고 호복을 입어 나라를 배신하고 통역으로서 출세했음을 드러내고, 한때 상관인 김경서가 포로 생활을 하자 그를 비웃고 무시하다가 한방 거하게 두들겨 맞는다.[28] 4부에서 후금으로 건너온 함이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소인배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후금에서의 이름은 '굴마훈(토끼)'. 함이가 누르하치에게 중용되자 불안에 떨며 능률이 극히 저하된 듯 하다. 자신이 직접 구출해서 데려온 덕만을 시기할 정도. 이처럼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모습에 직속상관인 잉굴다이로부터 일갈을 당하기까지 한다. 극이 진행되면서 누르하치가 함이에게 직접 "굴마훈 죽여줄까?"라는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이게 거절당해 목숨은 건졌다.[29]홍타이지가 즉위한 후에는 동강진에서 향응을 접대받은 사실이 들통나 홍타이지 면전에서 잉굴다이에게 복날 개패듯이 쳐맞는다.[30] 하도 맞아서 토사물을 뿜을 뻔했는데 가까스로 다시 목으로 넘긴다.[31]이후 투옥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다가 정묘호란의 발발로 석방되어 종군하게 된다. 잉굴다이를 통해 함이를 죽이라는 홍타이지의 밀명을 받은 정명수는, 호시탐탐 함이를 살해할 기회를 노린다. 나중에 한윤의 사주를 받아 막사에 들어오던 함이를 죽이려 했으나 역으로 제압당하고 두들겨맞으며 칼에 찔리고 만다. 그나마 함이가 내버려 두고 친구 홍덕만이 치료를 해주어 목숨을 건지나 상처가 심하여 후금군이 철수할 때 들것에 실려간다. 후금에 귀국한 이후, 사실상 사면을 받게 되자 기쁨과 안도의 눈물을 흘린다.

6. 같이 보기


[1] 토끼라는 뜻이다.[2] 국경 지역에 살면서 틈틈히 익힌 것으로 보인다. 서북 지방은 안 그래도 농사가 어려운 데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차별까지 받았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여진족들과 밀무역을 하는 백성들이 많았다.[3] 용골대는 조선에 횡포 부리는 정명수와 정 반대로 자기 할 일을 꿋꿋히 하고, 조선에 횡포도 부리지 않았고, 인조와 대신들에게 거만하게 굴지 않았으며 뇌물 요구까지 하지 않았고 예의바르게 대했다.[4] 정1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동품계.[5] 인조릉[6] 현 황해도 평산군[7] 조선 시대에 해마다 음력 10월에 중국에 보내던 공물.[8] 사대부이기 때문에 참수가 아닌 교형[9] 근거[10] 출처[11] 단지 廢했다고만 나와서 말 그대로 폐서인된 것으로만 보인다.[12] 동문휘고 기록[13] 호군교는 팔기 내의 하급 무관이다. '바야라이 주완이 다(bayara-i Juwan-i da, 巴牙喇壮达)'라는 만주어 명칭에서 1660년 중국식 관제 이름인 호군교라는 이름이 붙었다.[14] 숭덕제도르곤(섭정)→순치제[15] 관련 기사[16] 근거:1651년 조선왕조실록 기사[17] 팔기만주씨족통보에서의 기록.[18] '1653年,他在瀋陽被星州砲手李士用謀殺。' 중국어 위키백과 2020년 9월 '鄭命壽' 최종 수정 기록.[19]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원형백과 정명수 기록[20] 조선왕조실록 이사용 사망관련 기사(출처:인조실록 42권, 인조 19년 5월 4일 무인 1번째기사)[21] 근거[22] 시법에 따르면 신하는 '忠'을 쓰는 것을 가장 높은 것으로 여긴다.[23] 정명수의 아들은 정진괴(白晉魁)로 청나라에서 태어나 청나라에서 벼슬을 했다.[24] 2011년 개봉한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단역으로 청나라 측 인물을 1번 맡았었다.[25] 김류는 당시 영의정이었다. 그런 그가 '정 대인'이라며 치켜세웠는데도 이 정도 대답이었다.[26] "이보시오 영상(領相), 나는 부모가 노비라 태어날 때부터 노비였소. 조선에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오. 다시는 나를 조선 사람이라고 부르지 마시오."[27] 1부에서 함이와 서아지가 그토록 찾던 원수가 정명수 본인임이 밝혀졌다.[28] 누르하치에게 조선말로 오랑캐새끼라 조선말로 떠들고 그의 말에 조목조목 대드는 태도를 따졌다.[29] 함이의 진짜 속내는 당연히 죽이고 싶지만 공적으로서 굴마훈은 한의 노비이기에 함부로 죽일 수 없다 간언했다.[30] 잉굴다이가 굴마훈을 패는 동안 홍타이지는 가만히 앉아 장전(긴 화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이는 홍타이지가 칸이 됨으로써 화살이라는 뜻의 니루(여진족 팔기 300명의 단위부대)를 모두 손에 쥔 칸이 되었음을 작가가 은유한 것이라 볼 수 있다.[31] 만약 정말로 한 앞에서 토를 했다면 목숨이 남아나질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