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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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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a650><colcolor=#ffffff> 현대그룹 제2대 회장 정세영 鄭世永|Chung Se-yung | |
출생 | 1928년 8월 6일 |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現 북한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1]) | |
사망 | 2005년 5월 21일 (향년 76세) |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 |
장지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447-2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하동 정씨 (河東 鄭氏)[2] |
직업 | 기업인 |
학력 | 보성중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정치학 / 학사) 마이애미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 |
부모 |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
형제자매 | 형 정주영, 정인영, 정순영 누나 정희영 남동생 정신영, 정상영 |
배우자 | 박영자[3] |
자녀 | 장녀 정숙영 장남 정몽규 차녀 정유경 |
별명 | 포니 정 |
경력 | 현대자동차 사장 (1967~1986) 현대그룹 제2대 회장 (1987~1996) 현대자동차 회장 (1987~1996)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1999~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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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그룹 초대 회장 정주영의 넷째 동생이다.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 회장, HDC그룹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별명은 포니 정으로 현대자동차의 설립과 성장의 주역이다.
2. 생애
1928년 8월 6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4]에서 태어나 보성고등학교(39회)와 1953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하였다.6.25 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영어 실력이 좋은 편이다.[5]
1957년 현대건설에 입사하였다.[6] 1965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였다.[7]
2.1. 현대자동차
1967년 정주영 회장은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후 동생 정세영에게 사장을 맡겼다.1968년 첫 자동차 코티나를 생산했다. 코티나는 대한민국 도로여건에 맞지 않아 악평을 받았다.
1974년 한국 최초의 국산 모델 현대 포니를 생산했다. 1976년 포니를 에콰도르에 최초의 국산 자동차로 수출하였다. 현대자동차는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고유 자동차 모델을 개발, 출시하는 사례로 기록되었다. 이 때부터 '포니 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수고 때문인지 탈모가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1987년 형 정주영 회장이 정계 진출을 위해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자 현대그룹 2대 회장이 되었다. 이후 1996년까지 현대그룹 회장 겸 현대자동차 회장을 맡았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한 정주영이 3위로 낙선하는 결과가 나온 뒤, 현대그룹을 대표해서 당시 당선인 신분이던 김영삼을 찾아가 용서를 청한 것도 정세영 회장이었다.[8]
하지만 90년대 후반, 정세영은 자신의 외아들인 정몽규에게 현대자동차를 물려주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일단 1996년 당시 불과 34세에 불과하던 아들 정몽규에게 현대자동차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당시 언론과 대중들은 이를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재벌이라 하더라도 30대 초반의 아들에게 곧바로 회장을 물려주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정몽규는 정주영 회장의 아들도 아니고 조카에 불과했다. 회장을 물려 받기 전 정몽규는 세간에 거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일단 정주영의 아들이 아니었기에 세간의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어렸고[9] 경력도 짧았다. 반면 정주영의 아들들은 정몽규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는데, 정몽규의 사촌형 정몽구만 해도 정몽규보다 24살이나 많아 사실상 아버지 뻘이었고, 정몽규의 아버지인 정세영과 나이 차이도 10살 밖에 나지 않아서 거의 같은 세대였다. 정몽구를 비롯하여 정주영의 장성한 아들들은 당시 이미 50대를 넘어서서 충분히 경영 경력을 쌓았고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정주영 입장에서는 현대그룹의 간판인 현대자동차를 자식이 아니라 동생에게 넘겨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현대정공의 자동차 산업 진출은 이런 분위기를 보여준 일화라고 볼 수 있겠다. 정주영은 실질적 장남인 차남 정몽구가 경영하던 현대정공의 자동차 산업 진출을 도왔는데, 장차 정몽구가 자동차를 물려받게 하려는 포석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다급함을 느낀 정세영은 34세 밖에 되지 않은 아들 정몽규를 무리하게 회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리고, 정세영은 현대자동차의 덩치가 너무 커지면 오히려 자신에게 경영권이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기아자동차 인수에도 반대했다.
또,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 대북 사업에 진심이었던 정주영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를 개성공단에 진출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 개성공단에 현대자동차의 소형차 공장을 입주시키겠다고 김정일로부터 직접 약속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세영은 이 사업 계획 역시 반대했다. 정세영이 대북사업을 반대하자 정주영 회장은 꽤나 마음이 상했는지, "그럴려면 정몽구에게 현대자동차를 넘겨라" 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10] 이익치에 따르면 정주영이 현대차를 정몽구에게 넘기라고 하자 정세영은 "현대차를 형님의 다른 아들에게[11] 넘기라면 그러겠는데 몽구에게만은 안된다" 라면서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몽구가 부족한 게 있으면 내가 뒤를 봐주겠다.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 시키는 대로 해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
결국 1998년 12월, 정몽구가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취임했고, 정세영의 아들 정몽규는 부회장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정세영은 은밀히 형님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모의했다. 물밑에서 우호 지분을 끌어모은 정세영은 1999년 2월에 열린 주주총회에서 정몽구 측 인사들의 이사 선임을 저지하고 자신의 심복들로 모조리 임원들을 채워넣었다. 언론에서는 이를 정세영의 쿠데타라고 보도했다. #
당연하겠지만 이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심기를 건드렸고, 곧바로 정주영은 정세영을 직접 불러내서 "야. 몽구가 우리 집안의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 게 뭐가 잘못됐어?" 라면서 불호령을 내렸고[12] 그 말인즉 정세영-정몽규 부자로 하여금 자동차 사업에서 즉시 손을 떼고 알아서 나가라는 지시였다. 현대그룹의 총수이자 왕회장이라고 불렸던 정주영의 한마디는 정세영에게 곧 법처럼 들렸고, 이 한마디로 현대자동차 경영권은 정몽규의 품에서 정몽구의 품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정세영의 쿠데타는 나흘만에 무위로 돌아갔으며 정세영은 아들과 함께 현대자동차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난다는 발표를 해야만 했다. 정주영은 대신 현대그룹의 다른 간판 계열사인 현대산업개발을 정세영 부자에게 넘겨주었다.[13]
결국 1999년 3월 5일, 기자회견에서 정몽구의 현대산업개발 지분과 정세영-정몽규 부자의 현대자동차 지분을 맞바꾸기로 했다고 전격 발표한 뒤 32년 만에 자동차 업계를 떠났다. 정세영은 "형님이 현대산업개발을 주신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한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정세영-정몽규 부자의 현대자동차 퇴진 기자 회견때의 모습이다.[14] |
이임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 |
위의 사진은 훗날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부분이기도 한데, 정세영 회장은 현대자동차 회장 이임식에서 회사 사가(社歌)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렸는데, 그만큼 억울했던 모양이다. 현대차를 떠나면서도 형님이 현대산업개발이라도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고, 정주영 회장에 대해 여전히 "존경하는 분입니다" 라고 했다. 하지만 뒤에서는 울분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사실, 정주영의 헌신과 희생으로 평생 학력이 소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정주영과는 다르게 동생들은 형의 뒷바라지로 대학교에 입학했을 정도로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는 정주영이 동생들에게 식사를 모두 양보해줬고 자신은 언제나 굶었던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이처럼 냉혹하게 보이는 큰형 정주영의 승계 결정에 동생 정세영이 꼼짝도 못하고 물러났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산업개발을 물려받게 된 것도 정세영의 입장에서는 크게 불만을 가질만한 이유도 없었다. 나중에 아들 정몽규가 물려받은 후 현대산업개발이 사세가 많이 축소되어서 그렇지, 원래 현대산업개발은 현대그룹에서도 알짜배기 계열사였다. 게다가 정세영, 정몽규 부자가 물려받던 시점을 기준으로 현대산업개발은 국내 최대의 건설사였다. 특히 현대산업개발은 돈되는 아파트 건설 사업을 담당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정주영은 그룹의 대표 계열사인 현대건설은 자존심 때문에 아파트 건설 대신 대형 토목공사를 맡으라고 했고, 대신 현대산업개발에 아파트 건설을 몰아주었다. 게다가 정주영 회장은 미리 아파트 개발로 돈이 될만한 금싸라기 땅들을 매입하면서 현대산업개발에 쌓아두었다. 나중에 정몽구가 현대산업개발을 물려받고 나서 이 금싸라기 땅들을 차례로 개발하면서 현대산업개발은 엄청난 시세 차액을 얻게 되었다. 때문에 정몽규가 축구에 빠져서 회사 일을 등한시한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현대산업개발은 지금도 그렇저럭 잘 굴러갈 수 있었다.[15]
정세영은 고령에 인터뷰를 할 때도, 현대 포니가 시범 운행에서 처음 산길을 올라갔을 때를 이야기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신나했다. 현대자동차의 개인 주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30년간 사실상 독자적으로 현대자동차를 경영해 왔기 때문에, 정세영이 현대자동차를 조카 정몽구에게 넘기지 않고 버텼다면 현대그룹은 한바탕 홍역을 치렀을 판이었다. 그 다음해인 2000년 세칭 '왕자의 난'이라 불린, 정몽구-정몽헌 사이의 그룹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다. 2001년에 정주영이 사망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룹이 공중분해가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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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사망
이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2005년부터 폐렴 증세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어[16] 서울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2005년 5월 21일 사망했다.[17]
그가 사망한 2005년 아들 정몽규 및 지인들이 그의 별명을 딴 '포니정 재단'을 설립했다. 정몽규가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주로 국내외 장학 사업, 사회 각 부문의 혁신가들을 선정, 시상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2008년에는 강남 삼성동의 현대아이파크 타워 1층에 포니정 홀이라는 강당을 마련, 연주회나 세미나를 열고 있다.
2.3. 불법 분묘 조성
자세한 내용은 정몽규/비판 및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그의 사망 이후 아들 정몽규가 양평군 그린벨트 상수원보호구역 내에 선친의 불법 분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2023년 현재까지 양평군청, 경찰, 검찰, 법원의 이장 시정명령, 행정명령을 모조리 무시하며 벌금만 납부하는 것으로 대응해 논란이 되고 있다.
3. 기타
정주영의 형제들 중에서 특히 탈모가 심해서 대머리이다. 사실 정순영, 정상영도 탈모가 좀 있었고 정주영 역시 80년대 후반부터 머리숱이 빠지기 시작했다가 2000년 왕자의 난 들어 스트레스와 지병이 극심해져 갑자기 머리가 확 빠지긴 했지만 # 이들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 머리숱이 자연스레 빠진 것이고 대머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세영은 젊었을 때부터 탈모가 심해져 완전한 대머리가 되었다.정주영을 비롯해서 정세영을 제외한 현대가 1~2세대 중에 대머리가 거의 없어서 잘 부각되지는 않지만 탈모 유전자는 내재되어 있는지 손자 세대에서도 정의선 등이 30대의 젊은 나이에 벌써 탈모가 진행되고 있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정주영의 동생들이 물려받거나 창업했던 대부분의 범현대가 방계 기업들이 죽을 쑤고 있는 반면, 정세영이 받았던 HDC그룹은 동생인 정상영의 KCC그룹과 함께 꽤나 선전하고 있는 축에 속한다.[18] 이는 현대산업개발 자체가 형제들이 받았던 다른 계열사들보가 규모가 크고 현금자산, 부동산이 많아서 사세확장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정세영과 정상영의 자녀들이 정인영, 정순영의 자녀들보다 경영능력이 나은 것도 한몫했다.[19]
4.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현대가 문서 참고하십시오.[1] 이북 5도 기준으로는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2] 지예부사공파(知禮部事公派) 24세손 순(淳)○, ○영(永), ○해(海) 항렬.[3] 1936년생[4] 정주영의 호 아산은 이 마을 이름에서 따 왔다.[5] 정세영회장의 영어 인터뷰. 영상은 당시 포니의 개발수장으로 영국에서 '모셔 온' 조지 턴불의 다큐멘터리이다.[6] 앞서 언급했듯 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인연 때문에 미8군이 의뢰하는 공사를 현대건설이 쉽게 다 따낼 수 있었다고 한다.[7] 이 공사 현장에 신입사원 이명박이 파견나갔다.[8] 당시 정세영 회장은 여의도 민주자유당 당사를 직접 찾아가 김영삼 당선인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빌어야 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출범 이후 현대그룹은 중진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당하거나 세무조사 및 대출규제 등 사실상 정치보복을 당했고, 이는 훗날 현대가가 김대중을 후원하는 계기가 된다.[9] 당장 정주영의 손녀이자 정몽구의 장녀 정성이와 정몽규는 1962년생으로 동갑내기다.[10] 출처. 이익치 자서전[11] 정황상 정몽헌으로 추정.[12] 그런데, 사실은 현대자동차 또한 정몽구에게 "그냥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라는 식으로 넘겨준 것에 더 가깝다. 정주영은 원래 5남 정몽헌에게 그룹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왔고 실적도 쌓아왔던 차남(실질적인 장남)을 완전히 내치기는 뭣하니까 현대그룹 내에서 이름값이 있던 현대자동차를 물려준 것이다. 이는 결국 왕자의 난의 발단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정몽규와 정몽구가 사업을 운영하는 이후의 결과를 놓고 보면 현대자동차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그리고 정몽구는 결국 현대가의 모태나 다름없는 현대건설까지 손에 넣으며 사실상 현대가의 적통을 이었다[13] 현대건설이 있는데 왜 여기가 간판이냐고 생각하겠지만 이 회사의 수주실적은 당시에도 어마무시해서 사실상 본진인 현대건설을 재치고 현대그룹의 알짜계열사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당장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이 현대건설이 아닌 현대산업개발의 작품이었고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들어선 현대아파트는 모조리 이 회사에서 지은 것이였다. 여기에 IMF 사태까지 겹치면서 부동산이 안정적인 투자 수단으로 각광을 받게 되자 부동산 자산이 엄청나게 많았던 현대산업개발은 계열분리 후 10년도 안 돼서 재계순위 30위권 안쪽에 진입하게 된다. 동시기 현대건설이 공사대금 미수금 등으로 채권단에게 넘어가 버린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수준이다.[14] 정세영은 애써 표정을 유지했지만, 아들 정몽규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15] 다만 정몽규가 축협 회장으로서 역대 최악의 행보를 보여주고 광주 학동 아이파크 붕괴사고 당시 책임 면피 등 좋지 않은 처신으로 문제가 되긴 했지만 애초에 경영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수준으로 평가절하 당할만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과거에 비해 사세가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어쨌든 HDC그룹 자체는 재계순위 30위권에 드는 굴지의 대기업이고 정몽규 역시 서울시내 면세점을 성공적으로 유치시키고 각종 M&A를 성공시키는 등 나름의 성과를 냈기 때문. 현대산업개발의 사세가 줄어든 갓도 정몽규 때문이라기보다 1기신도시 건설 등으로 건설업이 활기를 띄던 90년대에 비해 국내 건설경기 자체가 위축된 것이 한몫 했다.[16] 2003년 조카인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언론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17] 조카인 정몽구 회장이 숙부인 그의 빈소를 찾았을 때 정몽규 회장과의 어색한 분위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18] 예를 들어 정인영 가계의 HL그룹(구 한라그룹)은 IMF 사태 이전까지 재계서열 12위였으나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며 공중분해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사세를 회복 중에 있다. 정순영 가계의 성우그룹은 기업의 모체나 다름없는 현대시멘트를 잃고 사실상 공중분해 되었다.[19] 정세영의 아들 정몽규에 대한 악평을 생각하면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정몽규는 적어도 정인영, 정순영 가계처럼 회사를 부도내는 일은 없었으며 사세확장도 나름 성공적으로 이뤄낸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