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직후 수립된 중화민국의 임시정부에 대한 내용은 중화민국 임시정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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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괴뢰국 | ||
국기[1] | ||
新民主義 신민주의[2] | ||
초록색 부분 | ||
1937년 ~ 1940년 | ||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 통합 이후 | |
중화민국 | 왕징웨이 정권 (화북정무위원회) | |
지둥방공자치정부 | ||
<colbgcolor=#b0313f><colcolor=#ffffff> 국가 | 경운가[3] | |
수도 | 베이핑 | |
정치 체제 | 공화제 | |
국가원수 | 행정위원회 위원장(왕커민) | |
통화 | 중국연합준비은행권(中國聯合準備銀行券, 일명 연은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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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7년 12월 14일, 일본 제국에 의해 설립된 괴뢰국이며, 화북 지역을 통치했다. 훗날 왕징웨이 정권에 통합되었지만, 그 기관은 화북정무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계승되어 왕징웨이 정권하에 복속되지 아니하고 사실상의 정부의 기능을 했다.2. 역사
1937년 7월, 일본군 북지나 방면군[4]은 이른바 평진[5] 치안위원회를 구성하여 점령지를 다스리는 행정기관을 개설하려 했고, 12월 14일에 평진 치안위원회를 중화민국 임시정부로 개칭하고, 베이핑과 톈진에 한해있던 관리구역을 중국 하북지역 전역으로 확대했다. 일본은 중화민국 4대 대총통을 지낸 쉬스창이나 6대 대총통을 지낸 차오쿤, 중의원 의장을 지낸 우징롄을 수괴로 삼으려 했으나 쉬스창과 차오쿤, 우징롄 모두 거부하자 차오쿤 정권에서 재정총장을 지냈던 반국민당 성향의 왕커민을 정부수반의 직책인 행정위 위원장에 앉혔다. 왕커민은 무척이나 꼬장꼬장한 성격에 일본군인들을 싫어하는 반일성향까지 있는 인물이었지만 화북에서 국민당의 통치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구 북양군벌의 잔여세력들을 규합했다.중화민국 임시정부 내각진의 모습 |
임시정부는 주로 북양정부에서 일했었던 관리들 중 친일 관료들이 입각했고, 그들은 이른바 신민주의라는 이념을 만들어 임시정부가 일본에 협조하기 효율적으로 만들려고 했다. 또한 일본군과 임시정부는 그 지역의 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중국연합은행준비권(연준권)을 발행하여 그 지역의 경제를 일본이 통제하려고 했다. 임시정부는 화북보안군이라는 군대를 양성하여 만주군과 같은 역할을 행했다.
왕징웨이 공작의 결과 왕징웨이 정권이 성립하자 그 산하의 화북정무위원회로 개편되었으나, 1945년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사실상 독립 정권으로서 역할을 계속했다.
천안문 광장에서의 수립 기념식 | 중난하이에서의 정부청사 출범식 |
3. 군대
경찰 5천 명 외에 군사력은 없었으나, 1938년 5월 기동방공자치정부의 훈련소, 교도대에서 양성 중이던 인원들을 바탕으로 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39년 2월에는 임시정부를 위한 정식 부사관을 양성하고자 6개월짜리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9월에는 군대 창설을 공식 선언했다. 처음에는 군대의 사관과 부사관 대부분을 전직 국민혁명군 출신 장교들로 채워야만 했다.주로 육군으로 구성된 군대는 각 연대당 1650명씩 총 8개 보병 연대, 1만 3200명이었다. 6개 연대는 각각 2개씩 묶어서 3개 여단으로 조직했고, 일본군인의 자문을 받는 중국인 장교가 이끌었다. 또한 왕커민의 일본인 경호원이 암살된 이후에는 친위대 4백 명도 만들었다. 1939년 9월의 통계에서는 기존 3개 여단과 신설 2개 독립연대가 있다고 나와 있으며, 1940년까지 화북에는 2만 6000명의 병력이 있었다.
- 1939년 12월의 전투 서열
- 제1여단 '베이징'
- 제1연대 '베이징'
- 제2연대 '퉁저우'
- 제2여단 '바오딩'
- 제3연대 '바오딩푸 (보정부)'
- 제4연대 '첸팅푸'
- 제3여단 '카이펑'
- 제5연대 '카이펑'
- 제6연대 '탕산'
- 제7독립연대 '톈진'
- 제8독립연대 '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