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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교 본부

증산교 대법사에서 넘어옴
甑山敎本部 大法社
1. 개요2. 창립 이전3. 창립4. 여담5. 관련 문서

1. 개요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1945년에 창립한 증산계통 신흥종교

2. 창립 이전

이상호(李祥昊)는 호를 청음(靑陰)이라고 하며, 1880년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26세에 중국을 유람하다 귀국하여 28세에 선도교(仙道敎)에 입교한다. 뒤에 선도교를 차경석이 접수하고 본격적으로 보천교로 창교하자, 1919년[1] 중앙 최고 8교령(敎領)의 한 명으로 임명되었으며, 보천교경성진정원장(普天敎京成眞正院長)과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의 경영을 맡는 등 최고위급 인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 교직을 파면당하자[2] 동료 간부였던 이종익(李鍾翊), 동생 이정립(李正立) 등과 함께 서울에서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8년에 차경석이 점점 혹세무민으로 가는 것을 보고 탈퇴한다. 이상호는 임경호(林警鎬), 이정립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이름의 종교를 창립하였다. 그 뒤, 이상호는 도조道祖 증산 강일순의 행적과 언행을 수집하여 , 1929년에는 대순전경(大巡典經)이라는 증산교단 최초의 교전들을 간행하는 업적을 세웠다.

1931년 동화교는 고판례(高判禮)의 선도교(仙道敎)와 통합하였으나 1937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증산계 모든 종단의 해산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해체되고 말았다

3. 창립

1945년 이상호는 서울에서 최위석(崔偉錫)ㆍ안세찬(安世燦)[3]ㆍ이정립과 함께 많은 신도들을 모아 대법사(大法社)를 창건하였다. 1961년 민족종교단체 통합정책에 따라 동도교증산교회(東道敎甑山敎會)로 바꾸고, 1968년에 다시 증산교본부로 바꾸었다. 1967년 이상호가 사망하자, 친동생이며 창립 초기부터 같이 교단을 이끌어왔던 이정립이 대를 이어 교주가 되었으나, 이듬해인 1968년에 사망하였다.

증산교 본부는 단군최수운강증산을 동시에 모시는 신앙체계이다. 즉 홍익인간, 인내천, 상생이념을 모두 중시한다. 교단조직은 선거제에 기초한 민주적인 종령제를 체택하고 있어 증산법종교와 유사하다.

현재에도 소규모 단체의 형태이지만 교단이 유지가 되고 있으며 치성마다 도인들이 모인다.

4. 여담

과거 증산교단 사이에서 증산법종교의 집 자랑과 함께 증산교본부 대법사의 글 자랑이 유명하다고 하였다. 증산교본부 대법사의 청음 이상호는 여러 종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대순전경을 편찬하였고 남주 이정립은 대순철학ㆍ종교학신론 등을 편찬하여 증산교의 사상을 정립하였다. 종령을 역임하였던 홍성렬의 증산교 역사를 총 망라한 범증산교사,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등 다양한 도서들이 편찬이 되어있다.

5. 관련 문서


[1] 보천교의 조직이 방주제로 개편되었다.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 조직으로 묶고, 간부 55만 7700명을 임명하였다.[2] 이유인즉 '증산천사공사기'라는 교전을 편찬할 때에 교주 차경석의 언급이 적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3] 나중에 증산도로 분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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