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0:50:41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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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월전쟁
제1차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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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아편전쟁
1856 ~ 1860
청프전쟁
1884 ~ 1885
청일전쟁
1894 ~ 1895
의화단 운동
1900 ~ 1901
영국의 티베트 침공
1903 ~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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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국
ᡩᠠᡳ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國
Q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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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국새[2]
상징
국호 아이신 구룬(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金國)[3]
→ 다이칭 구룬(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大淸國)
국가 송룡기공금구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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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청나라의 최대 강역
1616. 2. 17.[4] ~ 1912. 2. 12.[5]
(총 295년 11개월 26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여진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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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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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 복드 칸국
준가르 티베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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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겅옌 한으로 추대·후금 건국 1616년
남몽골 최종 복속 1635년
대청국(다이칭 구룬)으로 국호 변경 1636년
조선 복속 1637년
남명 정복 1662년
외몽골 복속 1691년
준가르 정복 1758년
제1차 아편전쟁 발발 1840년
태평천국의 난 발발 1851년
제2차 아편전쟁 발발 1856년
양무운동 1861년
청프전쟁 발발 1884년
청일전쟁 발발 1894년
변법자강운동 1898년
의화단 운동 1899년
신해혁명 1911년
선통제 축출, 제국 멸망 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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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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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동아시아, 북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부, 동남아시아 북부, 남아시아 일부
수도 허투 아라(흥경) ,(1583 - 1587, 1603 - 1619),
퍼 아라[6] ,(1587 - 1603),
자이퍈[7],(1619 - 1620),
사르후 ,(1620 - 1621),
랴오양 ,(1621 - 1625),
묵던(성경) ,(1625 - 1644),
버깅[8][9](순천부) ,(1644 - 1912),
면적 8,800,000 km2(1700년 기준)
14,700,000km2 (내수면 비율 2.8%)(전성기, 1790년 기준)
13,400,000 km2(1860년 기준)[10]
}}}}}}}}}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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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인구
(추산)
1790년 3억 100만 명
1820년 3억 8,310만 명
1898년 3억 9,591만 8,000명
민족 지배층 만주족과 몽골족 등과 피지배층 한족
공용어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공용 문자 만주 문자, 한자, 몽골 문자, 티베트 문자, 아랍 문자
종교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용문파, 오류파), 백련교, 이슬람교,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만주 샤머니즘[11]}}}}}}}}}
정치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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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1616 – 1908),
입헌군주제 ,(1908 – 1912),[12]
국가원수 황제[13]·천자(중국식 군호)
(만주식 군호)
카안 (몽골식 군호)
역대 황제 12명
주요 황제
(황제 연호 년도)
초대 태조 천명제 ,(1616~1626),[14]
2대 태종 숭덕제 ,(1626~1643),
4대 성조 강희제 ,(1661~1722),
5대 세종 옹정제 ,(1722~1735),
6대 고종 건륭제 ,(1735~1796),
12대 선통제 ,(1908~1912),
국성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愛新覺羅)
정부수반 내각대학사
영반군기대신
내각총리대신[15]
역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아이신기오로 이쾅 ,(1911),
2대 위안스카이 ,(1911~1912),
}}}}}}}}}
기타
통화 냥 ,(~ 1899),
청 원 ,(1899 ~ 1912) 전체 GDP: 137억 2870만$ (1709년)1인당 GDP:약 600$,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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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틀:국기|]][[틀:국기|]][16]


[[대만|]][[틀:국기|]][[틀:국기|]][17]


[[몽골|]][[틀:국기|]][[틀:국기|]]

[[러시아|]][[틀:국기|]][[틀:국기|]]

[[미얀마|]][[틀:국기|]][[틀:국기|]]

[[카자흐스탄|]][[틀:국기|]][[틀:국기|]]

[[라오스|]][[틀:국기|]][[틀:국기|]]

[[베트남|]][[틀:국기|]][[틀:국기|]]

[[인도|]][[틀:국기|]][[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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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틀:국기|]][[틀:국기|]]

[[파키스탄|]][[틀:국기|]][[틀:국기|]]

[[아프가니스탄|]][[틀:국기|]][[틀:국기|]]

[[키르기스스탄|]][[틀:국기|]][[틀:국기|]]

[[타지키스탄|]][[틀:국기|]][[틀:국기|]]

1. 개요2. 특징3. 상징
3.1. 국호3.2. 국기3.3. 국가(國歌)
4. 역사5. 영토6. 행정구역
6.1. 내지
6.1.1. 총독6.1.2. 동북삼성
6.2. 번부
7. 정치
7.1. 내각7.2. 남서방7.3. 판리군기사무처7.4. 집행기관
8. 군대
8.1. 팔기군8.2. 녹영8.3. 의용군8.4. 신건육군8.5. 해군
9. 민족10. 외교
10.1. 수교국 목록10.2. 대외 관계
11. 인구12. 경제
12.1. 농업의 발전12.2. 산업의 발달12.3. 해외와의 무역
13. 종교14. 문화15. 과학기술16. 평가17. 역대 황제18. 같이보기
18.1. 주요 사건 (시대순)18.2. 인물 (시대순)
1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이자 만주족정복왕조.[18]

2. 특징

296년(1616년~1912년)[19]이라는 근 300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존속한 제국이며, 역대 왕조 가운데 황통의 중단 없이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왕조다.[20] 더불어 역대 중화제국들 중 원나라 다음으로 가장 넓은 강역을 차지한 왕조로, 전성기 기준으로는 그 원나라보다도 넓다. 또한 중화제국들 중에서 드물게 제위의 찬탈이 한 번도 없이, 천명제부터 동치제까지 10세대에 걸쳐 부자 직계 세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21] 또한 단명한 왕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약 400년 동안 29명의 황제[22]가 재위했던 한나라나 약 300년 동안 각각 20명과 18명, 16명의 황제가 재위했던 당나라송나라, 명나라에 비해 황제 수가 적고 황제 1인 당 평균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다. 애초에 단 세 명의 황제가 통치한 강건성세의 길이만 해도 한 세기 반이나 되었고[23], 황제로 재위한 기간이 불과 10년 밖에 안된 초대 황제 누르하치도 여진족추장으로 추대된 기간부터 세면 무려 43년을 지도자로 있었다.

만주족은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렸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 농업을 영위했다.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금(金)[24]이라 하고, 흥경에 도읍했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 또한 21세기 이전 기준 최후의 퉁구스계 주권국가로, 만주족을 중심으로 몽골인, 한족, 티베트인, 위구르인 등 다수의 민족들을 신민으로 둔 다민족국가였다.

시작은 창업주 누르하치의 후금 시기인 1616년부터고, 후금의 2대 군주 홍타이지가 1636년 4월 11일 국호를 '다이칭 구룬(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644년에 이자성의 난남명을 제압하고 중국 베이징에 입관(入關)했으며, 강희제옹정제건륭제라는 3명의 걸출한 군주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불리는 장장 120여 년에 가까운 성세를 누렸다.[25] 티베트신강, 내외 몽골 등 광활한 번부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18세기 내내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며 찬란한 중국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뿌리깊은 부정부패와 만한갈등 탓에 백련교도의 난과 각종 민란들이 터지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하며 모든 면에서 망국의 색이 짙어졌다. 1840년에는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중국은 노골적인 식민열강들의 이권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이후 양무운동(동치중흥)이나 변법자강운동(광서신정) 등으로 근대화 움직임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는 역부족이었고, 19세기 말에 태평천국의 난의화단 운동 등 온갖 시련을 겪다가 결국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이듬해 2월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다만 제국은 1912년에 붕괴했음에도 청 황실은 1924년까지 자금성에 머무르면서 소조정이라는 형태로 존속했다. 또한 1912년에 퇴위했던 선통제가 1917년에 장쉰이 일으킨 장훈복벽으로 복위하여 잠시 복고하기도 했으나, 10여일 만에 진압되면서 북양정부에 다시 귀속되었다. 결국 소조정마저 1924년 핍궁사건으로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쫒겨나면서 청나라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황성(皇姓)은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愛新覺羅). 아이신교로라고 쓰기도 하며, 현대 중국어로는 '아이신줴뤄'로 발음된다. 한국 한자음으로는 '애신각라'이다.

3. 상징

3.1. 국호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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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 만주어 후금 ᠠᠮᠪᠠ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26]
ᠮᠠᠨᠵᡠ ᡤᡠᡵᡠᠨ [27]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28]
ᠠᠮᠪᠠ ᠴᡳᠩ ᡤᡠᡵᡠᠨ[29]
ᡩᡠᠯᡳᠮᠪᠠᡳ ᡤᡠᡵᡠᠨ[30]
몽골어 ᠳᠠᠶᠢᠴᠢᠩ ᠤᠯᠤᠰ[31]
중국어 간체자 [ruby(清朝, ruby=qīngcháo)]
[ruby(清国, ruby=qīngguó)] / [ruby(大清国, ruby=dàqīngguó)]
[ruby(大清帝国, ruby=dàqīng dìguó)]
[ruby(中华大清国, ruby=zhōnghuá dàqīngguó)]
정체자 淸朝
淸國 / 大淸國
大淸帝國
中華大淸國
일본어 [ruby(清, ruby=しん)]
[ruby(大清帝国, ruby=だいしんていこく)]
영어 Qing Dynasty[32]
Great Qing[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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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청나라라고 부르지만 만주어로 다이칭 구룬. '구룬'은 국()이란 뜻의 만주어 독음이다. 한자로는 대청국(大淸國)이다. 19~20세기에는 대외 문서에서 '중화대청국'(中華大淸國)이나 '대청제국'(大淸帝國)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문으로는 '대청'(Great Qing)[34] 또는 '대청제국'(Empire of Great Qing)으로 부르고 현대 중국에서는 '청조'(淸朝)라고 불리고 있다. 다이칭 구룬과 거의 같은 뜻으로 위대하다는 뜻의 '암바'라는 만주어 단어를 써서 '암바 칭 구룬'(Amba Cing Gurun), '암바 다이칭 구룬'(Amba Daicing Gurun)으로 부르기도 했다. 만주족이 지배민족이라 국가라 '만청(満淸)'이라고도 불렸다.

다른 중국 왕조와 달리 국명이 추상 명사이다. (요하), (안출호수), (대재건원), (명교) 등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중국에 자리잡은 역대 국가들은 춘추전국시대의 각 국명에서 유래한 제, 연, 초, 위, 한, 조, 진, 양, 송, 오, 월, 대 등의 전통적 지명에서 나라 이름을 따왔기 때문에 매우 이질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설이 제기된다.
  • 음양오행설에 따라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하겠다는 뜻에서 물 수() 변이 들어간 '청'()을 채택했다.
  • 관자(管子)의 구절 "대청을 비추고 대명을 바라본다(鉴于大清,视于大明)"에서 따왔다는 말도 있다. 여기서 대청은 하늘을 의미하고 대명은 해와 달을 상징하는데, 하늘은 해와 달을 모두 포함하는 상위의 존재이기 때문에 명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국호를 '청'으로 정했다.
  • 청나라의 만주어 원음인 '다이칭'(Daicing)이 몽골어로 '전사'(戰士)를 의미했기 때문에 원래 국명이 '전사의 나라'를 뜻한다.
    다만 이 학설은 별 신빙성이 없는 것이, 이전의 만주 기록에 전사라는 의미로 '다이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기록이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원, 대명에 이어 국호에 대(大)를 집어넣은 세 번째 국가이다.

3.2. 국기

황룡기(黃龍旗)
파일:청나라 국기(1862-1889).svg 파일:청나라 국기.svg 파일:청나라 군주기.svg
1862~1889 1889~1912 황제기
청나라도 원래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정식 국기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1840년 아편전쟁 이후로 서양 열강과의 접촉이 늘어났는데, 문제는 당시 국제해상법에는 무역선은 반드시 국적을 표시하는 상선기를 달아야만 했고 그렇지 않을 시 해적선으로 간주되었다는 것. 국기가 없는 청나라가 상선기가 있을 리가 없었고 중국 상선들은 다른 나라 국기를 달고 다니는 등 엄청난 혼란이 발생했다. 제2차 아편전쟁의 발단이 된 애로호 사건마저도 중국 상선이 영국 국기를 달고 다녀서 생긴 일이었다.

점차 불만이 누적되자 상인들은 조정에 청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 대사 윌리엄 리드도 청 조정에 국기 제정을 요청했으나, 딱히 국기를 제정할 생각이 없던 청나라 조정은 중국 상인들이 외국 상선기를 사용하는 것만 금했을 뿐 새로운 국기를 만들 시도는 하지 않았다.

청나라가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은 1862년 양쯔강 후베이성에서 영국 군함과 청나라 군함이 충돌하고난 이후에서야였다. 청나라 군함이 별다른 깃발을 달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군함은 이를 중국군으로 인정하길 거부했고, 마음대로 청나라 군함에 발포해 침몰시켜버렸다. 당연히 청나라 조정은 거세게 항의했으나 청나라에 국기가 없어서 일반 해적선과 군함을 구별할 수 없었다는 영국의 반론에 할 말도 없었다. 결국 증국번이 1862년 노란 바탕에 용이 그려진 삼각 황룡기를 청나라 해군 전함에 게양하도록 지시했고, 이게 청나라의 첫 공식 깃발이 된다.[35] 굳이 사각기가 아닌 삼각기를 쓴 이유는 팔기군 정황기의 깃발과 혼동될까 우려했기 때문.
실제 사용된 황룡기(黃龍旗)
파일:800px-Imperial_Chinese_naval_ensign_(1866-1888)_RMG_RP_19_31.jpg 파일:800px-Naval_ensign,_Imperial_China_(1888-1911)_RMG_RP_16_26.jpg
삼각기 사각기
이 삼각 황룡기는 1862년에 제정된 이래로 청 해군기와 상선기로만 쓰이다가, 동치 11년인 1872년에 공식적으로 국기 비율과 모습을 다듬고 통일했다. 베이징의 총리아문은 해외 공관들에 통문을 보내 청나라가 국기를 제정했음을 알렸고 푸저우상하이에 있는 모든 관선들에 게양할 것을 명했다. 160피트 미만의 선박에는 길이 2m, 높이 1.2m 짜리 깃발을, 160피트 이상의 선박에는 그보다 1.5배 더 큰 황룡기를 달도록 강제했다. 종종 관리들은 해외에 나가야할 때 이 삼각 황룡기를 국기 대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대용'일 뿐이었고 공식 국기는 아니었다.

광서 7년인 1881년 9월, 영국에서 주문한 함선 2척을 중국으로 인도받아오는 것을 계기로 이홍장은 국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다른 서양 열강들은 국제적인 협상, 서명, 무역, 외교 만남 등을 할 때 다 자랑스레 자국 국기들을 휘날리는 것에 반해 청나라만 국기가 없었기 때문. 이홍장은 이를 '천조의 위엄'을 해친다고 보고 서태후에게 새로운 국기를 만들자고 주청하였다. 이홍장은 팔괘 깃발, 기린 깃발, 표범 깃발, 황룡 깃발 등 다양한 도안을 만들어 올렸고 서태후가 사각 황룡기를 고르면서 마침내 1888년 정식 국기로 제정된다.

용은 황제의 상징으로 용이 그려진 황룡기를 국기로 삼은 것은 곧 황제가 나라의 근간이라는 인식을 드러내며 황색은 예로부터 중앙과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에 있다는 중화사상을 그대로 담아낸 국기로, 조선에 동쪽의 신수 청룡이 들어간 청룡기를 국기로 제정할 것을 요구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국기 디자인이 팔기군의 팔기와도 비슷한 느낌이 나는데, 실제로 팔기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3.3. 국가(國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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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1년까지 비공식으로 있었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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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2년 신해혁명 전까지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쓰였다.[36]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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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588년 누르하치, 건주여진 제패
1606년 누르하치, 쿤두런 한 즉위
1616년 누르하치, 겅옌 한 즉위, 후금 건국
1618년 국호를 '아이신 구룬(대금)'으로 자칭
1619년 사르후 전투 대승, 여진 통일 선포
1621년 요양 천도
1625년 심양 천도
1626년 영원성 전투 패배
1629년 베이징 광덕문 전투
1636년 국호를 '다이칭 구룬(대청)'으로 변경 및 칭제건원
1637년 병자호란 대승
1639년 이자성과 장헌충 재봉기
1640년 - 1642년 송산–금주 전투 승리
1644년 입관, 자금성 함락으로 멸망
1645년 양주 공방전, 남경 입성
1646년 이자성, 장헌충의 난 종결
1652년 - 1659년 이정국, 정성공 복명 운동
1654년, 1658년 1,2차 나선정벌
1659년 정성공의 남경 공격, 실패
1662년 남명 멸망
1663년 사천 무산 전투
1660년 - 1799년 문자의 옥
1673년 – 1681년 삼번의 난
1683년 대만 원정, 동녕 왕국 멸망
1684년 해금 철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711년 지정은제 시행
1716년 강희자전》 완성
1724년 양렴은제 시행
1726년 개토귀류 시작
1727년 캬흐타 조약 체결
1732년 군기처 설치
1735년 명사》 간행, 공포
1747년 원명원 건설
1755년 - 1758년 준가르 원정
1760년
공행 설치
1777년
《흠정몽고원류》 간행, 공포
1778년
흠정만주원류고》 간행, 공포
1782년
사고전서》 완성
1789년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 간행, 공포
1793년
메카트니 사절단, 건륭제 알현
1796년 – 1805년
백련교도의 난
1813년
천리교의 난
1816년
아머스트 사절단, 쫓겨남
1838년 - 1839년
임칙서, 광저우에서 아편 단속
1840년 -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난징 조약
1844년
황포 조약(프), 망하 조약(미) 체결
1851년 - 1864년
태평천국 운동
1853년 - 1868년
염군의 반란
1856년 – 1860년
에로호 사건, 제2차 아편전쟁
1858년
아이훈 조약, 톈진 조약 체결
1860년
영프연합군의 베이징 점령, 베이징 조약 체결
1861년 - 1895년
양무운동 전개
1863년
상해 공공조계 설정
1864년 - 1877년 야쿱 벡, 위구르 점령

1871년 러시아, 이리 계곡 점령
1877년-1878년 정무기황
1881년 이리 조약 체결
1884년 영국, 티베트 침략
1884년 - 1885년 청나라-프랑스전쟁
1894년 - 1895년 청나라-일본전쟁
1897년 독일, 칭다오 점령 1899년 조차 (~ 1919년)
1898년 변법자강운동 전개, 무술 정변
1899년 - 1901년 의화단 운동
1901년 신축조약 체결, 신정 지시
1910년 청나라의 유일한 공항인 난위안 국제공항 개항
1911년 우창 폭동, 신해혁명
1912년 청 멸망, 중화민국 수립

5. 영토

파일:QingEmpire.jpg
18세기 청의 강역
청은 전성기에 북쪽으로는 스타노보이 산맥, 남쪽으로는 난사 군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으며 카슈미르라다크 지역과 길기트 발티스탄 지역, 카자흐스탄 잠발리주와 알마티주, 키르기스스탄, 투바 인민공화국, 와칸 회랑, 타지키스탄 일부, 네팔 일부, 부탄 일부, 인도 아루나찰프라데시, 미얀마 카친주, 베트남 북쪽 끝과 박롱비 섬, 라오스 일부, 외만주, 몽골[37] 청나라가 18세기 중반까지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하면서 중국의 영역은 만주, 내몽골, 동튀르키스탄, 티베트에 걸치는 광범위한 땅에 걸치게 되었다.[다만]

전성기의 청은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보다도 영토가 넓었고 심지어 원나라보다도 영토가 넓었다.[39] 현재 중국의 영토인 내몽골, 티베트위구르 뿐만이 아니라 외만주외몽골 전체, 더불어 대만, 카자흐스탄 동부 지역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19세기 중반 이후로 이미 국력이 쇠퇴하여 각종 조약을 통해 일부 영토를 상실하였다.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사할린과 광대한 연해주 일대가 날아갔고 1864년에는 중아감분서북계약, 1881년 일리 조약으로 서북부의 봉신국들을 또 러시아에 빼앗겼다. 영국에게는 홍콩을, 포르투갈에게는 마카오를, 청일전쟁 이후부터는 뤼순다롄 등 수많은 조차지들을 열강에게 강제로 내주고야 만다. 미얀마, 베트남, 류큐 왕국, 조선 등 조공국들도 하나하나 빼앗겨 나갔다. 다만 연해주와 아무르강 이북 정도를 제외하면 청 멸망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는 현재까지 외몽골 독립 이외에는 큰 변동없이 영토를 보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특히 티베트는 청나라 멸망 이후 독립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직후 한국전쟁 당시 다시 합병되었다.

서양의 여러 열강들과 여러 조약을 통해 일부 영토를 잃었으며, 투바외몽골[40]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인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칭하이성, 마카오, 홍콩은 현재 중국의 영토에 포함된다.

6. 행정구역

파일:789px-청나라_영토.png
19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강역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던 청나라는 일괄적인 행정구역 제도가 아닌, 지역마다 행정구역을 유연하게 정비했다. 옛 명나라가 존재하던 지역에는 그대로 성(省) — 부(府) — 현(縣)의 3급 제도를 유지했다. 동북 지방에는 만주족의 팔기 체제와 한족의 성-부-현 제도, 어업과 수렵부족들의 성장제(姓長制)가 혼재된 상태였다. 신장, 티베트, 몽골 등의 번부에서는 기존의 체제를 인정하되 중앙에 대한 충성만 받아내는 방식을 이용했다. 몽골에서는 기맹제(盟旗制)와 자사그제(札薩克制)를 사용했고, 티베트에서는 종계제(宗谿制)를, 신장에서는 백호제(伯克制)를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는 18개의 성(省), 5명의 주방장군(駐防將軍), 2명의 주차대신(駐劄大臣)이 다스리는 총 25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로 갈수록 서구 열강들의 침략이 빈번해지며 기존 제도로는 더이상 방비가 불가능해지자, 광서제는 신장, 봉천, 헤이룽장, 지린 등에 성을 새로 설치하고 내륙과 똑같은 행정체계를 만들어 일원화했다. 몽골과 티베트에도 똑같이 성을 설치하자는 제안이 있기도 했지만 통과되지 않아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자치적인 행정체계를 유지했다. 청나라가 망하기 직전인 1908년, 제국은 22개의 성과 자치령인 티베트, 내몽골, 외몽골, 칭하이 등 총 25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6.1. 내지

청나라에서는 산해관만리장성 이남, 옛 명나라의 영토를 내지(內地), 관내(關內), 한지(漢地) 등으로 칭했다. 베이징난징의 두 직할령과 13개의 성이 있다고 하여 양직십삼성(两直十三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청나라가 들어서고 나서도 명나라의 기존 성(省) — 부(府) — 현(縣)의 3급 제도를 유지했다. 가장 상위의 행정구역은 '성'으로 포정사(布政使)가 다스렸다. 허나 명 중기부터는 순무총독들이 성의 권력을 차지했고 포정사는 순무의 하위 관직으로 내려갔다.[41] 청나라 때 역시 이를 이어받아 순무가 성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고, 그 상위호환인 총독이 몇 개의 성들을 묶어서 관할했다.[42]

명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도원(道員) 관직은 청나라 시대에도 유지됐다. 이들이 담당하는 구역은 성(省)과 부(府) 사이의 도(道)였다. 분순도, 분수도, 양저도, 염법도, 병비도 따위의 관직이 존재했다. 원래 도는 청 초기까지만 해도 정식 행정구역도 아니었고 그에 따라 도원도 품계가 없었으나, 건륭제 시기에 4품을 하사받았다. 도원들의 권력은 날로 커져갔고 청 말에는 아예 이들이 순무와 총독 대신 지방을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북양정부는 성을 폐지하고 도로 전국을 다시 재편하려 시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지나치게 약한 권력기반과 시간 부족으로 실패했지만.

청나라는 명나라의 2개의 수도와 13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양직십삼성 체제를 그대로 계승해 명의 영토를 산동, 섬서, 하남, 산서, 절강, 복건, 광서, 광동, 강서, 호광, 사천, 운남, 귀주 성으로 나누었다. 순치제 1년인 1644년에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했으며 곧 북직례를 직례성으로, 남직례를 강남성으로 개칭했다. 강희 3년인 1664년에는 호광성을 호북성과 호남성으로 쪼갰고, 3년 뒤에는 강남성을 강소성과 안휘성으로 나누었다. 1년 뒤에는 감숙성을 새로 만듦으로써 마침내 18개의 성 체제가 내지에 영구적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청나라 내지의 18개 성(省)
직례성 섬서성 사천성 강소성 감숙성 복건성
안휘성 절강성 광동성 산서성 강서성 광서성
산동성 호북성 운남성 하남성 호남성 귀주성

광서 11년인 1885년에는 대만부를 복건성에서 떼내어 따로 대만성으로 승격시켰고 2년 후에는 '복건대만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19번째 성으로 인정됐다. 그러나 10년 후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대패하고 대만성이 통째로 일본 제국에게 넘어가면서 대만성은 1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청나라에 딱히 특기할만한 행정구역 변동은 없었다. 1905년에 강소성의 강녕, 회안, 양주, 소주의 4개 부와 통주와 해주의 2개 직예주를 떼내어 강회성(江淮省)을 새로 만들려 했으나 바로 사라졌다. 이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도 중국 내지는 총 18개의 성 체제를 유지했고, 여기에 동북삼성과 신장성까지 더해서 총 22개의 성이 존재했다.

각 성마다 총독[43]순무[44]가 존재해 지방의 군사, 행정, 인사를 총책하는 최고 관리로 다스렸다. 이들을 봉강대사(封疆大吏)라고 부르기도 했다. 건륭제 이래로 전국에는 총 8명의 총독을 두었고 직례총독과 사천총독이 각각 1개 성, 양강총독이 3개 성을 다스린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총독들은 모두 2개 성씩을 묶어서 총괄했다. 산서성, 산동성, 하남성에는 총독을 두지 않았다. 또한 순무는 전국에 15명이 있었고 직예, 사천, 감숙성에서는 총독이 순무직까지 겸했다. 청 말기에 동북지방과 신장에 새로 성을 설치함에 따라 봉천, 길림, 흑룡강성에도 각각 순무를 하나씩 임명했고, 이들 위에 동북삼성을 총괄하는 동삼성총독(東三省總督)을 두어 관리했다. 신장성의 순무는 섬감총독의 지시를 받게 했다. 이때 관제를 개혁하여 총독이 모두 관할 지역의 순무를 겸하게 만들었기에, 청 말기에는 총 9명의 총독과 14명의 순무들이 존재했다.[45]

총독과 순무 아래에는 포정사와 안찰사를 두었다. 이들은 총독을 보좌해 지방 행정과 사법을 담당하는 가장 핵심적인 관리였다. 옹정제가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는 학정(學政)직을 신설하면서 지방행정은 포정사, 안찰사, 학정 이렇게 3명이 나누어 관리하는 3축 체제로 돌아갔다. 각 성마다 포정사, 안찰사, 학정 1명씩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강소성은 워낙 처리할 일이 많아 특별히 포정사를 강녕과 소주에 1명씩 총 2명을 두었다.

대체적으로 청나라의 지방관료체제는 이렇게 돌아갔지만, 청 말기에 착수한 행정개혁으로 인해 여러가지 바뀌는 것도 많았다. 강소성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들에서 순무직을 총독과 합쳐 일원화했고, 함풍제 때 세운 재정기관들은 모두 사라졌고 대신 총독들이 직속으로 성의 재정을 관리했다. 재판과 사법행정을 분리해야한다는 원칙에 따라 안찰사를 제법사(提法使)로 바꾸어 사법행정을 감독하도록 했고, 재판은 새로 신설된 심판청(审判厅)과 검찰청(檢察廳)이 맡아 근대적인 사법개혁 노력을 시도했다. 기존의 학정은 더 권한이 강력한 제학(提學)으로 바뀌어 신사상과 기술에 대한 교육을 책임졌으며 교섭사를 신설해 외국과의 통상무역을 담당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치안을 담당하는 순경도(巡警道)와 농업, 산업, 무역을 담당하는 권업도(劝业道)를 두기도 했다. 다만 산업이 워낙 낙후된 동북삼성은 관리할 산업조차 없어 도지사와 민정사만을 두는 등 다른 성들과는 약간 다르게 운영됐다.

중국 관료들은 부임지를 더 쉽게 관리하기 위해 각 임지마다 특성을 충(衝), 번(繁), 피(疲), 난(難) 이렇게 4개로 분류했다. 임지에 대로가 놓여있어서 관리할 것이 많으면 충, 업무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번거로우면 번, 돈 문제가 많고 빚이 과다하게 쌓여있는 곳을 피, 민심이 좋지 않고 강도가 많으면 난이라고 했다. 관리들은 임지마다 이 4개의 문자로 등급을 매겼는데, 4개 문자가 다 붙어있으면 '최요결(最要缺)'이라고 해서 최악의 기피 대상이었고 3개면 요결(要缺), 2개면 중결(中缺), 1개나 0개면 간결(簡缺)이라 불렀다. 문자가 적을수록 좋은 임지였고 관리들이 가고싶어했다.

6.1.1. 총독

한편 중국은 넓어도 너무 넓었기에 청나라는 성을 몇개씩 묶어 지방의 군사와 민사를 관리할 황제의 대리인을 임명했다. 그 관직이 바로 총독이다. 총독들과 그 관할지역은 이하와 같다.
지방 총독 순무
직례성 직례총독 총독이 겸직
산동성 없음 산동순무
산서성 없음 산서순무
하남성 없음 하남순무
강소성(+해남) 양강총독 강소순무
(보통 양강총독이 겸직)
안휘성 안휘순무
강서성 강서순무
절강성 민절총독 절강순무
복건성(+대만) 복건순무
(보통 민절총독이 겸직)
호북성 호광총독 호북순무
(보통 호광총독이 겸직)
호남성 호남순무
광동성 양광총독 광동순무
(보통 양광총독이 겸직)
광서성 광서순무
사천성 사천총독 총독이 겸직
윈난성 운귀총독 운남순무
(보통 운귀총독이 겸직)
귀주성 귀주순무
섬서성 섬감총독 섬서순무
감숙성 총독이 겸직
신장성 신장순무
봉천성 동삼성총독 봉천순무
길림성 길림순무
흑룡강성 흑룡강순무

6.1.2. 동북삼성

동북삼성은 만주 왕조가 발원한 '용흥지지'였기에 청나라가 신성하게 여긴 땅이었다. 만주 지방에는 성(省)이 따로 설치되지는 않았으나, 강희제건륭제 시기를 거치면서 이 곳에 주둔한 팔기군이 봉천, 길림, 흑룡강 이렇게 3개의 세력으로 자연스레 분화됐고 이것이 사실상의 행정구역 구실을 했다. 봉천에는 봉천장군, 길림에는 길림장군, 흑룡강에는 흑룡강장군이 부임해 자기 구역 안에서는 거의 왕처럼 행세하고 다녔다. 이 장군들을 '도통'이라 하여 도시와 일대를 관할했고 도통 아래에 총관이 있어 팔기를 통제했다. 다만 한족이 사는 곳에는 중국 내지와 똑같이 부, 주, 현, 청 등을 설치해 관리했다.

바르후족, 다우르족, 에웬키족, 오로첸족, 씨베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헤이룽장성 북부와 중부에 몰려살았는데, 이들은 중국식 행정체계에 속하지 않고 팔기군이 직접 다스렸다. 포특하총관(布特哈總管)과 호륜패이총관(呼倫貝爾總管)이 이들을 관할하는 관직이었다. 헤이룽장성 남부 끄트머리에는 수렵과 어업을 주로 하는 부족들이 몇몇 뿔뿔히 흩어져 있었는데, 이 부족들에는 중앙에서 관리들이 파견되지 않았다. 대신 이 부족들의 족장들이 삼성부총관에게 명령을 받는, 다소 느슨한 지방자치를 얻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느슨한 지방자치제는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러일전쟁 등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휘청거리면서 종결되고야 만다.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이 호시탐탐 동북삼성 일대를 노렸고, 기존의 지방자치로는 도저히 이들을 감당할 수 없자 청나라 조정은 1907년에 기존 3개의 장군아문(將軍衙門)을 폐지하고 내지와 똑같이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설치했다. 1911년 기준으로 봉천성에는 8개의 부, 8개의 청, 6개의 주, 33개의 현이 있었으며 길림성에는 11개의 부, 5개의 청, 1개의 주, 18개의 현이, 흑룡강성에는 7개의 부, 6개의 청, 1개의 주, 7개의 현이 소재했다.

6.2. 번부

6.2.1.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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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대 몽골은 다얀 칸 이래로 수많은 씨족과 부족들이 서로 부장과 칸을 칭하며 사분오열되어 찢어져 있는 판세였다. 청 태종 숭덕제는 만주의 팔기 제도를 몽골에도 적용해서 몽고 8기를 만들었다. 몽골 팔기의 각 수장은 자사그(札薩克)나 총관(總管)이라 불렀다. 몽고 8기 아래에는 '좌(佐)'가 있었는데 중국 본토의 향에 대응되는 개념이었다. 그 이래로 몽골은 점차 기(旗)와 기들이 모여 결성한 맹(盟)을 기반으로 하는 기맹제(盟旗制) 아래에 놓이게 된다. 청나라 치하 몽골은 지리적으로 크게 차하르, 내몽골, 서몽골, 외몽골, 허브드, 탕누 우량카이로 나뉘었다.

청나라는 몽골을 크게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었다. 내몽골은 차하르, 우랑카이, 투메드, 칼간 부족 등으로 이루어졌고 이들은 몽고팔기를 구성하는 부족들로 이미 순치제 시절부터 청나라에 동화되어 완연한 제국의 지배층을 구성했다. 이들은 청나라 조정이 파견하는 관리들의 통제를 받았고 자체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상당한 권력자들이었다. 건륭제 시절 내몽골에는 무려 24개의 부족, 49개의 기, 6개의 맹이 존재했다.

내몽골보다 위에 있는 외몽골은 상황이 달랐다. 이들은 강희제 중반 이후부터 건륭제 시기까지 새로 편입된 부족들로,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내몽골보다 한참 약했다. 기존 세습 가문 출신의 자사그들이 외몽골을 다스렸고 반쯤 중앙정부와 따로 놀았다. 외몽골의 기들은 따로 맹(盟)을 만들어 맹장과 부맹장을 뽑고 스스로 자치를 시행했다. 이 맹은 사실상의 성(省)처럼 1급 행정구역 취급을 받았다. 외몽골에는 북쪽 사막의 4개 할하 부족, 서몽골의 2개 기(旗), 칭하이의 몽골 부족, 허브드, 토르구트 등 잡다한 부족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인근 총독, 주차대신, 지방 군벌 따위에 종속되어 살았다. 나중에 4개의 할하 부족은 따로 독립하여 외몽골, 즉 몽골의 기원이 된다.

6.2.2. 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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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치하 신장과 행정구역 구분
청나라 치하 신장은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북쪽은 후이족, 남쪽은 위구르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 후이족과 한족, 시버족과 만주팔기군, 위구르인과 카자흐와 키르기스 모두 일리장군(伊犁將軍)의 통치를 받았다. 유목지방에는 몽골과 마찬가지로 기맹제도를 도입했고, 위구르, 타지크 등 다른 소수민족이 사는 지방에는 백호제(伯克制)를 도입했다. 본디 '베그', 중국어로 백호란 중앙아시아의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일컫던 칭호인데, 건륭 후반에 이 곳에서 연달아 반란이 일어나자 이 백호들을 공식으로 인정하고 청나라의 행정체계에 편입시킨 것이다. 다만 동치제 때 일어난 동간반란(東干反亂)과 야쿱 벡의 침공으로 백호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1884년에 백호제를 모조리 폐지하고 내지와 똑같은 성(省)으로 편입시켜 버렸다.

준가르 일대에는 우루무치장군아문이 설립되어 우루무치, 쿨칼라 우수, 투르판, 쿠물, 구청, 바르콜 일대를 관할했다. 개중에 우루무치와 바르콜은 감숙성과 우루무치장군아문의 공동통치를 받았다. 타르바가타이 지방은 타르바가타이장군아문이 따로 관리했다. 일리강 근처에 있는 위구르 서부 일리 일대는 일리장군이 다스렸다. 무슬림들이 모여사는 신장 남부 일대는 총리회강사무삼찬대신(總理回疆事務參贊大臣)이라는 특별 관리가 임명되어 다스렸는데, 카슈가르, 야르칸드, 호탄, 아크수, 우쉬, 쿠차, 카라샤르 등 다양한 도시들을 관할했다. 하지만 이 모든 특별 행정체제와 자치 제도는 모두 1884년 광서 10년 폐지되고 신장성이 들어서면서 사라진다.

6.2.3. 칭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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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칭하이성 칭하이호
청나라 치하의 칭하이는 현재의 칭하이성과는 약간 경계가 달라 시닝시, 하이둥, 황난 등 일부 지역은 포함되지 않았다. 청해사무대신(西寧辦事大臣)이 당시에는 감숙성의 일부였던 시닝시에 주재하면서 칭하이를 관리했다. 칭하이의 주민들은 황하를 기점으로 약 40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졌는데 황하 이북에는 주로 칭하이 몽골인들이 코슈, 후이트, 준가르, 토르구트, 할하 이렇게 5개의 대부족을 이루어 살았다. 옹정 3년인 1725년에는 칭하이 몽골인들을 총 27개, 나중에는 29기의 기(旗)로 나누었다. 도광 3년인 1823년에는 이 29개의 기들을 모아 우맹(右盟)과 좌맹(左盟)을 만들어 각각 맹장과 부맹장을 1명씩 뽑아 스스로 자치를 하도록 만들었다.

황하 이남에는 주로 티베트인이 거주했다. 청나라는 40명의 투시[46]들이 이들을 관리하게 만들었고 개중 위수시의 투시가 가장 세력이 강해서 사실상의 대표격으로 행세했다. 최고지도자격인 '투시' 아래에는 '투치안후'와 '투바이후'가 있었다. 가경제도광제 시절부터는 점점 많은 티베트인들이 북쪽 칭하이성으로 이주해오면서 칭하이호를 중심으로 8개의 대부족을 형성한다.

6.2.4. 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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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티베트 서태후를 알현하는 달라이 라마
티베트는 1720년 청나라에 복속된 이래로 '탕구트' 혹은 '투보트'라 불렀다. 주장대신(駐藏大臣)이 라싸에 머물면서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와 함께 티베트를 운영했다. 티베트의 행정부는 '카사그'라고 불렀는데, 달라이 라마가 그 최고 결정권자로 3명의 관리와 1명의 승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인사권을 쥐고 있어 티베트 전역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달라이 라마는 '최왼(མཆོད་ཡོན་, Chöyön) 관계'라고 해서 청 황제의 스승 대접을 받았고, 국사(國師)로 인정받아 황제 바로 아래에 자리할 수 있는 특권도 있었다.[47]

티베트의 기초행정단체는 '종(dzong)'이라 했는데, 중국 내지의 현과 비슷한 개념이었으나 다만 인구는 훨씬 적었다. 종의 지도자는 종뻔이라 불렀고 계의 지도자는 씨두이라고 했고 카사그나 인근 사찰이 임명했다. 사찰과 귀족들의 영지는 '시카'라고 불렀고 이 영지의 크기와 비옥도, 중요도에 따라서 그 주인의 위상이 결정됐다. 대표적으로 타쉬룬포 사원의 경우 직접 인근 일대를 다스렸고 판첸 라마의 직할령이었다.

티베트 북부 일대, 현재의 나취시창두시 일대에는 39개의 부족들이 뿔뿔히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몽골 혈통의 유목민들로 주장대신의 하급관인 '이정장경(夷情章京)'이 이들을 관리했다. 또한 당슝현에는 8개의 몽골 기를 두어 관리했는데, 이들은 통솔하는 총관이 따로 없었고 주장대신이 직접 관리하는 무력 집단이었다.

7.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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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태화전의 옥좌
청나라의 정치 체제 역시 근본은 명나라의 중앙집권제였다. 허나 기존 한족 왕조에는 존재했던 재상직은 폐지됐고 대신 의정왕과 대신들이 모여 황제의 조언자 역할을 하던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 내각, 남서방, 판리군기사무처 등이 황제를 옆에서 보좌했다. 관료들의 직급은 9품으로 나뉘었고 각 품계는 정(正)과 종(從)으로 구분해서 총 18개의 급이 있었다. 모든 관료들이 다 여기에 속하는 건 아니어서, 9품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말단직들도 존재했으며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종9품 대접을 받았다.

청 초기에는 내각을 최고정무기관으로 만들어 그 안에 내국사원(內國史院)、내비서원(內秘書院), 내굉문원(內宏文院)을 만들어 내삼원이라고 불렀다. 내각에는 대학사를 만인 2명, 한인 2명씩[48] 가려뽑아 내각을 총괄토록 했고, 이 대학사들 아래에 2명의 협판대학사를 1명은 만인, 1명은 한인으로 뽑았다. 청나라에도 명나라처럼 내각대학사가 존재는 했고, 명목상으로는 품계도 높았지만 명나라만큼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의정왕대신회의의 경우 후금의 족장체제 시절부터 존재하던 기관으로, 황제와 친왕들이 모여 토론하는 권력의 중심지로 내각이 일상 정무를 담당한다면 여기는 군정을 담당했다. 워낙 강력한 권한 탓에 지속적으로 황제의 견제를 받았으며 홍타이지가 친왕들의 권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며 육부와 내각을 신설하면서 힘을 빼버렸다. 강희제가 1677년에 신설한 남서방 역시 의정왕대신회의의 힘을 빼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관이다.

판리군기사무처는 본디 옹정제가 준가르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임시기관이었는데 이게 상설화되어 나중에는 내각을 제치고 사실상 청나라의 최고정무기관 역할을 하게 된다. 태생이 전시 상황을 대비해서 만들어졌기에 내각에 비해서 훨씬 효율적이고 빠른 결정이 가능했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아편전쟁 이후부터는 양무운동의 영향으로 군기처 대신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과 북양통상대신직이 각각 1861년과 1870년에 신설되어 개혁을 주도했다. 하지만 개혁의 성과는 나오지 않고 나라는 갈수록 망해가자, 결국 청말신정을 통해 1911년 5월 군기처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타 국가들처럼 총리직과 내각제로 전환했다. 이 청나라 최후의 총리가 바로 위안스카이다.

청나라 초창기에 강희제는 만주 귀족들의 힘을 꺾어놓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수를 동원했다. 제일 먼저 기왕(旗王)들이 팔기 내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없애버렸고, 친왕들이 군사를 임의로 동원할 수 있는 권리도 박탈했으며 의정왕대신회의의 권한도 약화시켰다. 강희제는 황제 오롯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1인 독재체제를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이전 왕조들을 멸망으로 몰고간 당파싸움을 지극히 경계하였으며 관리들의 임면권, 상벌권은 오직 황제만 틀어쥐도록 만들었다. 밀지와 밀접 제도를 강화하여 관리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붕당을 금지하여 신하들 사이에 당파가 생기는 것을 차단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명나라 시절에는 사대부들이 단순히 시짓기나 문학놀음에서 벗어나 정계에 깊숙이 관여했다. 청나라는 이런 사대부와 문인들이 제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목소리를 높인 것이 명나라의 멸망을 불러왔다고 여겨, 지방 사대부들의 정치개입을 경계해 금지했다. 그래서 1652년 순치제는 생원들이 함부로 당파와 말싸움을 하지 말 것, 맹과 결사를 조직하지 말 것, 허가없이 공공에 글을 써붙이지 말 것 등을 명령하며 사대부들의 목소리를 찍어눌렀다. 덕분에 청나라는 명나라 시절의 동림당 같은 당파 싸움에서 빗겨날 수 있었다.

또한 황후는 일가가 모두 기인이어야 했으며[49], 공주들도 한족에게 시집보내지 않은데다 한족 후궁의 자식들은 황위계승에서 배제되었다. 대표적으로 건륭제가 있다. 이 경우는 옹정제의 살아있는 아들들 중 건륭제가 유일한 만주족 후궁 소생이었다. 다만 한족 모후의 소생으로 강희제가경제가 있기는 하나, 이들 역시 강희제의 외가는 여진족이 한화했다가 다시 만주족에 편입된 개국공신 집안이었고, 가경제의 외가는 팔기의 포의 출신[50]이라 전혀 아무런 연도 없는 민인 집안은 절대 아니었다.

7.1.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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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회의가 열리던 자금성 문연각과 내부
내각(内阁)은 청나라 초기의 최고 정무기관이었다. 홍타이지가 내삼원을 재조직해 만든 것을 시작으로 1644년 순치제가 만인과 한인으로 구성된 기본 틀을 잡았으며 1911년 청말신정으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존속했다. 청나라의 내각은 명나라의 내각을 본떠서 만들어졌지만, 명나라의 내각에 비해서 훨씬 권한이 약했다. 나름 존중받고 권위도 있는 기관이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모두 황제와 그 직속기관인 군기처, 남서방 등이 가져갔다. 내각은 어디까지나 군기대신들이 행정 권한에 대한 명분을 얻기 위한 겸직성이었지 그 자체로는 권력이 약했던 것이다. 1911년에 기존의 내각이 해체되고 총리와 책임내각이 신설되었으나 1년만에 청나라가 망해버렸기에 큰 자취는 남기지 못했다.

내각은 내각대학사, 협판대학사, 내각학사, 시독학사, 시독, 전적, 내각중서, 첩사중서 등으로 이루어졌다. 내각대학사는 내각의 최고 책임자로 국정 운영, 칙령 제정, 헌법 손질, 대례 논의, 고소고발 여부 논의, 실록 편찬, 강연 주재, 회시와 전시 등 과거시험 감독, 춘추관 관리, 제사 준비 등 대부분의 일상 업무를 맡아서 처리했다. 내각대학사는 만인 2명과 한인 2명 총 4명이었는데, 초기에는 만인은 1품, 한인은 2품이었다가 나중에 둘다 정1품으로 승격했다. 그 아래에 있는 협판대학사(協辦大學士)는 내각대학사를 보좌하는 역할로 종2품의 관직이었으며 만인 1명 한인 1명 총 2명으로 이루어졌다.

내각학사(內閣學士)는 종2품으로 만인 6명, 한인 4명이었다. 본디 만인은 2품이고 한인은 3품이었으나 나중에 둘다 종2품으로 올려준 것이다. 이들 역시 협판대학사와 함께 내각의 잡무를 처리했다. 시독학사(侍讀學士)는 종4품으로 한림원에서 뽑은 만인 4명, 몽골인과 한인 각각 2명씩으로 이루어져 고서를 편찬하고 수정했다. 시독(侍讀)은 정6품으로 시독학사를 도와 조서를 다듬는 역할을 했다. 전적은 정7품으로 창고의 문서와 재화 출납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그 외에 내각중서(內閣中書), 첩사중서(貼寫中書) 따위가 있었으며 이들은 다수가 만인이었고 받아쓰기, 베껴쓰기, 통역 등 내각의 정말 자질구레한 일들을 했다.

7.2. 남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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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방 남서방 내부
1677년 강희제가 설치한 기관으로 한림원 학사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경서를 강의하게 하고 서적편찬을 담당, 비공식적으로는 황제에게 자문을 하는 역할을 했다. 남서방(南書房)은 자금성 건청궁 남서쪽 귀퉁이에 있는 모서리에 위치했는데 자금성 월화문 남서쪽에 있다하여 남서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림원 학사들 중에서도 재능이 가장 뛰어나고 인품이 좋은 자를 가려뽑아 이 남서방에서 일하도록 했는데 이들을 따로 '남서방행주(南書房行走)'라고 불렀다. 1677년 장영(張英)과 고사기(高士奇)가 첫 남서방행주로 임명된 이래로 1898년 폐지될 때까지 황제의 주요 자문기관들 중 하나였다.

남서방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제한이 없었으며, 공식적으로는 황제가 시를 짓고 서예를 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이었으나 칙령을 조율하고 황제의 뜻에 따라 정책을 짜는 일이 주 업무였다. 특히 강희제가 이 남서방을 유용하게 써먹었는데 남서방의 학사들에게 시험문제를 내는 것은 물론 학사들의 가족사, 출생, 학력 따위를 하나하나 친히 물어보며 호감을 얻었다. 또한 워낙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강희제였던지라 학사들과 대등하게 토론하며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고. 이들은 남서방에서 2끼를 먹으며 매일 출퇴근을 했고 황제의 의중을 가장 잘 꿰뚫어보는 핵심 그룹이었다. 그래서 황자들이 일부러 황제의 속뜻을 알아내기 위해 남서방의 학사들에 뇌물을 바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옹정제군기처를 설치한 이후부터는 남서방의 권한이 크게 실추됐다. 여전히 남서방은 한림원 학사들이 드나드는 학문의 장이었으나 정치적인 역할은 모두 박탈당했다. 허나 남서방에 출입할 권한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엄청난 명예여서, 청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도 남서방에 출입권한을 얻었다는 건 곧 당대 최고의 문인 인증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웅사이(熊賜履), 엽방애(葉方藹), 장옥서(張玉書), 손재풍(孫在豐), 서건학(徐乾學), 진정경(陳廷敬), 왕사진(王士禛), 주이존(朱彝尊),사신행(查慎行), 방포(方苞), 심전(沈荃), 하작(何焯), 대재(戴梓), 황월(黄钺) 등등이 있다.

7.3. 판리군기사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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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처 군기처 건물 내부
군기처는 본디 옹정제가 서북의 준가르를 정벌하기 위해 1729년에 세워진 임시기구에 불과했다. 각지에서 들어오는 전쟁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 왕공회의나 내각의 번거로운 절차들을 모두 없앴기에 의사결정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이 곳에서 논의되는 안건은 황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엿들을 수 없었으며 오직 황제와 그 직속 신하들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기밀이었다. 원래부터 매우 임시적인 조직이었던지라 창설 당시부터 형식적 관료제에 발목을 붙잡히지 않는 대단히 자유로운 조직이었고, 권력을 중앙집권화시키고 싶어하던 황제의 입맛에도 딱 맞는 기관이었다.

그래서 준가르가 정복된 이후에도 군기처는 폐지되기는커녕 오히려 권력이 날로 커져만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의 의정왕대신회의와 내각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청나라의 최고정무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건륭제 즉위 직후 잠시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하였고, 1861년에 함풍제가 총리각국사무아문을 만들면서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나 싶었지만 아이신기오로 이힌이 실각하고 난 이후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1911년 청나라가 총리와 책임내각을 신설하며 군기처를 폐지할 때까지 무려 200년 가까이 청나라의 최고정무기관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진 기관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황제의 보좌이자 조언자 역할일 뿐, 독자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릴 권한은 없었다. 이들은 황제가 발행한 기밀문서를 읽고 주석을 달아 수령하며, 황제의 칙령 초안을 작성했으며 황제의 보관 허가를 받은 기밀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는 업무도 맡았다. 국정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 대안 제시, 관리들의 임면과 평가도 군기처의 몫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평가와 조언에 그쳤을 뿐, 최종적인 결정권자는 황제였다.

군기처는 크게 군궤대신(军机大臣)과 그 보좌관인 군기장경(軍機章京)으로 이루어졌다. 군궤대신들의 수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최소 3명, 최대 10명 정도로 보통은 5~6명 정도에서 왔다갔다했다. 친왕, 대학사, 6부의 상서와 시랑들이 군궤대신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궤대신들도 다 급이 같은 게 아니라서 최고 군궤대신은 '대군기(大軍機)'라고 따로 불렀으며 보통 만주족 황자나 만인 대학사들이 맡았다. 군궤대신은 군기처행주라고 하며, 처음 군기대신으로 군기처에 입직할 경우 군기처학습행주라 하며 시간과 경력이 쌓이면 학습 글자가 떼어졌다. 군기장경은 군궤대신들의 비서역으로, 이들은 소군기(小軍機)라 불렸고 역시 내각이나 6부에서 뽑았으며 실무를 담당했다. 잘하면 군궤대신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군궤대신과 군기장경은 모두 24시간 대기하며 황제가 부르면 그 즉시 입궁했다.

군기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식 작위라기보다는 파트타임에 더 가까웠으며 봉급도 품계도 없었다. 이들은 군궤대신이나 군기장경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겸직하고 있는 6부나 대학사의 지위를 이용해서 권한을 행사했다. 어디까지나 임시직에 불과했기에 황제는 이들을 언제나 내키는대로 아무 행정적 제약없이 군기처에서 쫒아내고 다시 들여올 수 있었다. 내각이나 6부의 관리들은 경질하고 입시하는 데에 훨씬 복잡한 절차와 명분이 필요했던 것에 반해 이렇게 간단히 임면이 가능한 군기처는 황제가 유난히 이 군기처를 선호했던 이유였기도 하다. 군기처는 말이 최고정무기구지 어디까지나 황제의 보좌역이었을 뿐으로 직접 명령을 내릴 권한, 정책을 제정할 권한은 전혀 없었다.

7.4. 집행기관

청나라의 집행기관들과 행정기관들은 대부분이 명나라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들이었다. 다만 약간의 조정이 이루어졌는데, 청나라 행정부는 크게 육부이번원, 5개의 사(寺), 도찰원과 2개의 부(府)로 이루어졌다.

당대에는 육부와 이번원을 묶어서 7부(部)라고 부르기도 했다. 6부에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가 있었고 이번원이 따로 설치되어 청나라의 최고집행기관으로 기능했다. 각 부는 상서가 이끌었고 시랑이 옆에서 보좌했다. 원래 육부의 상서들은 오직 만인들에게만 허락되었지만 순치 원년인 1644년에 만인 상서 1명, 한인 상서 1명을 따로 두는 것으로 바뀌었다.[51] 이번원(理藩院)은 티베트몽골, 칭하이, 신장 일대와 러시아의 문제를 책임지는 기관이었다. 순치연간에 예부에서 독립해서 창설되었고 1906년에 폐지될 때까지 쭉 존속했다. 사실상 청의 외교를 담당한다 할 정도로 막강한 기관이었으며, 한인의 비율을 어느 정도 맞춘 다른 기관들과는 달리 대부분이 만인과 몽골인들로만 구성됐다.

6부의 권한과 독자성은 지난 한족 왕조들에 비해서 크게 약화됐다. 원래는 지방에서 상소를 올려보내면 먼저 6부의 상서들이 이를 검토하고 선별, 수정해서 황제에게 다시 올리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교육과 관련된 문제가 터졌다고 하면 일단 예부상서가 이를 검토한 다음에야 황제가 재가하는 식이었고 황제가 상서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런 전례를 따르지 않았다. 청의 6부는 독자적으로 하위 기관에 명령을 내릴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6부상서들은 행정수반이 아니었다. 6부는 어디까지나 황제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5개의 시(寺)는 대리시(大理寺), 태상시(太常寺), 광록시(光祿寺), 태복시(太仆寺), 홍려시(鸿胪寺)를 뜻한다. 대리시는 형부(刑部)와 도찰원과 함께 형벌과 감옥을 담당하던 사법기구로 이 셋을 묶어서 '삼법사(三法司)'라 불렀으며 마치 대법원처럼 기능했다. 대리시의 수장은 대리시경(大理寺卿)이라 불렀으며 9경(卿)[52]들 중 하나일 정도로 지위가 높았다. 나머지 4개의 시들은 대리사에 비하면 한참 권력이 약했다. 태상시는 종묘제례를 담당했고 태복시는 을 관리했으며 광록시는 탄신연회를, 홍려시는 해외 사절들을 맞는 역할이었다.

도찰원(都察院)은 청나라의 사정기구로 한국으로 치면 감사원이다. 청나라의 도찰원은 명나라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따랐는데, 좌원과 우원으로 나뉘어 좌원은 수도의 업무를 감시했고 우원은 지방의 업무를 감시했다.[53] 그러나 청나라의 6부가 명나라의 6부에 비해 한참 권력이 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도찰원 역시 명나라 시절에 비해 훨씬 약했다. 황제는 도찰원이 멋대로 감찰권을 휘두르는 것을 경계했고 도찰원은 육부를 감독하는 수준에 그쳤다.[54]

2부는 내무부(內務府)와 종인부(宗人府)를 뜻한다. 명나라 말기에는 황제를 뒷배로 업은 환관들이 날뛰어 국정이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환관의 득세를 크게 경계한 청 조정은 내정 규율을 담당하는 내무부를 설치하고 환관들이 절대 국정에 관여치 못하도록 막았다. 15명의 포의좌령(包衣佐領), 18명의 기고좌령(旗鼓佐領), 2명의 조선좌령(朝鮮佐領), 1명의 회자좌령(回子佐領), 30명의 내관들과 기타 포의와 태감들로 구성됐다. 40개의 아문을 통솔하는 거대한 집단으로 이 내무부의 존재 덕에 청나라는 멸망할 때까지도 환관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황족과 왕공들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종인부는 명나라 때에는 그저 황족들의 편의를 봐주는 시설에 불과했지만, 청나라 들어 제국의 실질적인 군사력이자 왕공족인 팔기의 존재로 인해 종인부의 권한이 대폭 늘어나면서 나름 권력있는 기관으로 발전했다.

8.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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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의 모습 건륭대열도에 그려진 정람기
역사는 누르하치가 창건한 만주족의 팔기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누르하치는 팔기제를 확립하여 단순한 군대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할도 겸하게 하였고, 거의 호적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겼다. 러시아 제국이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많은 시베리아의 이민족들이 몽골과 만주족이 있는 만주 지역으로 몰려 갔고 이들은 만주족이 원나라 옥새를 발견한 이후부터 군대에 편입되었다. 이후 홍타이지는 만주팔기를 본떠 몽골족으로만 이루어진 몽골팔기를 새롭게 만들어 군력을 강화하였다.

1644년에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난 이후에 투항해온 투항한 명나라 군인들을 이용해 녹영군을 창설했지만 명나라 한족은 만주족을 이민족으로 폄하했기 때문에 투항한 명나라 군인들 숫자는 많지 않았다. 팔기군 자체가 만주족이 대부분이였지만 몽골족도 포함된 이후 여러 이민족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팔기군에는 조선인들과 소수 한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나라의 한족 가운데 명나라를 버리고 만주족 군대에 투항한 자들은 소수였다. 명나라 한족 입장에서 만주족 군대들은 정복하러 온 이민족 군대였으며 명나라 시절 한족과 한족 군인들은 명나라에 충성하며 만주족에 심하게 대항하였다. 홍타이지는 심하게 대항하는 명나라인들을 전멸시킬 생각으로 대규모의 만주족 군인들을 명나라로 보내 원정 공격을 하였다. 명나라를 공격할 때 당시 만주족 군인 규모는 역사상 최대의 인구대비 군사 규모 비율이었으며 이것은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오현제 시기 정복 군주였던 트라야누스 시기 로마군 숫자보다 많은 것이였다.[55]

청나라 말기 서양 열강에게 두들겨 맞아서 그렇지 청나라 초기의 군대는 명나라 시절에 물려받은 화기를 나름대로 활용, 강희제와 같은 전성기에는 다른 아시아권 최강국인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평화기가 지나치게 오래가자, 팔기군이나 녹영이나 요새에 짱박혀있는 경우가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훈련과 실전 경험이 줄어들며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강희제 때와 옹정제 시기, 그리고 건륭제 시기에도 서부 지역으로 몇 차례 군사 원정이 있기는 했으나, 18세기 말 즈음에 들어서는 청군의 규모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반면 효율성은 거의 바닥을 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가경제 시기에는 낫과 곡괭이 따위로 무장한 한족 반란군에게도 쩔쩔맸고, 태평천국의 난 때에도 반란군들을 제대로 진압하기는 커녕 쫓겨다니기에 급급했다.[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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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청나라 병사들의 모습
청군의 최대 약점은 무기의 열세였다. 명나라를 진압한 이후 청나라의 화포와 무기 등은 거의 진보하지 못했고, 19세기 초가 되면 유럽에서 산업혁명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며 총, 군함, 대포, 군사사상 등이 혁신적으로 발전한 데에 반하여 중국의 군사는 거의 17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 화력의 열세 때문에 수십만 청나라군이 단 2만 명도 되지 않는 서구식 군대에 무너지기도 했다. 단, 오해가 있는 게 1차 아편전쟁때의 서양열강은 나폴레옹 전쟁 시절의 머스킷 소총과 전장식 야포를 그대로 들고왔고 기관총도 없었다.[58] 당연히 전술 역시 나폴레옹 전쟁때의 전열보병이 기본이었고 이 전열보병으로 중동,인도,중국 등의 타 문명권들을 제압한거지 기관총과 속사대포는 생각보다 훨씬 한참 이후에나 쓰였다. 2차 아편전쟁부터 그나마 신무기라 할 수 있는 퍼커션 캡이 쓰였으며 후장식 총과 맥심 기관포, 주퇴복좌기 속사포 등 흔히 '근대의 신무기' 하면 떠오르는 무기들은 의외로 거의 20세기가 가까워진 의화단 전쟁부터 본격적으로 투입됐다.

이렇게 자국 군대 규모에 비해 한줌거리도 안되는 서양군대에게 지는건 물론 패배에 의해 불평등 조약을 맺을 정도로 나라가 망할 기운이 들자 더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청나라 조정은 드디어 노후화된 군대를 개혁하기로 결심한다. 1860년에 베이징이 함락당하고 몇 만도 안되는 서구 열강 군대에게 청군이 농락당하자, 증국번, 이홍장, 만주족 출신 문상 등은 서구식 무기들을 수용하여 서양식 훈련을 받고 제식을 갖춘 신군의 창설을 결정하였다. 이홍장은 지방에서 회군을 조직했고, 문상과 몇몇 청 황친들은 베이징에서 신기영(神機營)을 창설하여 최강국답게 쟁여둔 국고를 열어 막대한 황금과 재물을 통해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최신 무기를 수입했다. 신기영은 대략 2,500여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이 손쉽게 수많은 강도떼를 진압하자 황실도 이에 마음이 움직여 대대적인 서구식 군대 창설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만주족 관료들은 피지배민족인 한족과 힘을 합쳐 서구식 함대와 군대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푸저우에 군항을 설치하여 15척에 달하는 군함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난징, 톈진, 란저우 등에도 새로운 군사기지들이 설치되며 외형상으로는 현대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사실 내부는 아직 구사상 및 구식 전술이 많던 지배층 지휘관들과 서태후의 사치행각으로 당시 중국의 무적함대 위용을 자랑하던 북양함대의 예산 일부분을 빼돌리던 상황이었다.

한편 서구 열강들은 비상이 걸렸는데 중국이 힘을 키우면 자신들이 공을 들이고 있는 아시아 식민지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했고, 동시에 중국에서의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59] 청일전쟁 이후 건설된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이 바로 군대 근대화의 최종 결과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때 혁명군과 타협을 하고 오히려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8.1. 팔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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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의 깃발과 갑주[60]
팔기군은 청나라만의 독특한 군사제도이자 청군의 핵심 조직이었다. 1601년 누르하치가 여진족들을 기(旗)로 구분하는 군단으로 재편하고 1615년에 8개의 기로 나눈 것을 시작으로, 정치와 군사를 하나로 합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홍타이지가 몽골을 정복한 이후에는 몽고팔기를 창설했고 요동 지방 정복 후에는 한인팔기를 창설해 그 규모를 대폭 키웠다. 청나라가 입관해 대륙을 차지한 후부터는 점차 정치에서 분리되어 군사 쪽에만 전념하도록 재편됐고, 한 번 기적에 든 가문은 대대로 이어서 팔기에 속하도록 만들었기에 사실상의 세습 엘리트 지배계급 역할을 했다.

청나라는 팔기군이 한족에 동화되어 소멸하는 것을 막고 각지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지방에 팔기를 주둔시키되 한인 피지배층과는 철저히 분리했다. 팔기는 주로 항저우청두 같은 대도시들에 머물렀지만 팔기주방지라고 해서 함부로 한인들과 섞일 수 없었다. 특히 베이징 내성은 오직 팔기의 영역이었고 한족들은 함부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기적에 속해있는 사람은 농사를 짓거나 무역, 상업에 뛰어들 수도 없었고 황제에게 직접 봉급을 받아 생활했다. 이들은 사회적 특권층이었기에 총독이나 순무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죄를 지어도 일반 관아가 아닌 자체 법정에서 처리하는 등 치외법권까지 누렸다.

팔기군은 청 초기까지만 해도 최고 엘리트로서 취업, 승진, 시험 등 온갖 분야에서 특권을 누렸으며 그 대신에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팔기군도 방만해졌다. 병사 수는 고정되어 있는데 팔기 기적에 올라있는 사람 수는 날로 늘어났고, 현실적 한계 때문에 팔기 중에서도 빈곤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워낙에 특권이 많다보니 규율은 점점 느슨해졌고 전투능력은 땅에 떨어져 나중에는 한족들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팔기군은 서구 열강의 침략과 내부 반란에 완전히 무력했고, 결국 청나라와 함께 1912년 사라졌다.[61]

8.2. 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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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녹영병들의 모습
녹영군순치제가 명나라를 쓰러뜨린 후에 한인 병사들을 모집해 꾸린 군대다. 워낙 팔기군이 소수였고 이들만으로는 정상적인 군사활동이 불가능했기에 물량이 많은 한족에게서 녹영병을 모집해 팔기군을 지원토록 했던 것. 청 초기 팔기군은 화북과 주요 요충지를 방어했고, 녹영병은 중국 중남부를 수비했다. 의외로 삼번의 난을 제압한 것도 바로 이 녹영병의 공이 컸다.

녹영병의 편제는 명나라를 그대로 따라 제(提), 진(鎮), 협(協), 영(營), 신(汛) 순서였다. 15,000명의 제(提)는 제독(提督)이 지휘했고, 그 다음으로 높은 1,000 ~ 3,000명의 진(鎮)은 총병(總兵)이, 협(協)은 부장(副將)이,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단위인 영(營)은 참장(參將), 유격(游擊), 도사(都司)가 지휘했으며 수비(守備)는 지방의 영(營)을 지휘했다. 천총(天總)과 파총(把總)은 신(汛)을 지휘했는데 천총이 주로 주요 거점의 신을 담당했다. 또한 총독, 순무, 제독, 총병은 예하의 각 단위 외에는 직할부대인 표(標)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만 한족의 반란을 우려한 청 조정이 녹영을 최대한 지방에 흩어놓았고, 그 탓에 녹영은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

각 성마다 1만 명에서 7만 명 정도의 녹영병들이 주둔했고, 이들 역시 팔기군처럼 군역을 세습해서 대대로 물려받았다. 팔기군이 점점 향락에 찌들어 물러터져가자 이 녹영병들이 사실상 청나라의 실질적인 군대로 기능했다. 건륭제 말기와 가경제 시절에 이미 전국의 녹영병은 60만 명에 달했을 정도. 허나 녹영병도 지나치게 오랜 평화로 인해 건륭제가 '활을 쏘면 화살이 비었고 말이 달리면 사람이 떨어지는구나'하고 한탄할 정도로 점점 기강이 해이해졌다.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지만 녹영군은 백련교도들의 게릴라전에 쓸려나갔고 아편전쟁태평천국의 난 때는 그냥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녹영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황제들은 점차 녹영군의 규모를 줄여나갔지만 아예 폐지하지는 않았다. 1912년 청나라가 망하자 녹영은 중화민국의 경찰로 이어졌다.

8.3. 의용군

청나라 후기,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관군이 백련교도의 난을 전혀 진압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자, 지방정부들은 각지의 향신들에게 대신 반란을 진압해줄 의용군을 창설하라 장려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자경단과 들이 전국 각지에서 조직됐다. 1799년에는 아예 조정 차원에서 지방의 자치적인 단련[62](团练) 결성을 허가했고 이 의용군은 1800년대 내내 관군과 함께 청나라의 실질적인 주요 군사력들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특히 태평천국의 난염군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의 무능함이 만천하에 폭로됐다. 반군이 게릴라전으로 관군을 괴롭혔지만 비대하기만 하고 느려터진 관군은 반란을 통제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보다못한 지방관료 증국번이 강충원, 호림익, 여택남 등과 함께 힘을 모아 1850년에 상군(湘軍)을 조직했다. 증국번의 상군은 관군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태평천국 군대를 때려잡았고, 특히 난징의 관군 사령부였던 강남대영(江南大營)이 무너지자 사실상 강남에서 유일하게 태평천국과 맞설 수 있는 세력이 되었다. 증국번의 제자인 이홍장안휘성에서 회군(淮軍)을 조직해 염군의 난을 진압하는 등[63]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증국번의 상군과 이홍장의 회군은 모두 서양의 화기를 적극 도입했다. 서양 고문들의 도움으로 창설된 상승군(常胜军)과 상첩군(常捷軍)은 엄청난 성과를 내며 태평천국 군대를 도륙하면서 청나라 조정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홍장은 서양 무기로 무장한 상승군이 타이창 시를 4시간 만에 함락하는 것을 직관하며 서양 무기의 도입이 중국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이는 곧 양무운동의 계기가 된다. 청나라는 이를 교훈으로 신기영(神機營) 등 서양 화기를 운용하는 부대를 따로 만들었으나 여전히 회군의 위치는 절대적이었고, 톈진 학살 때 3만에 달하는 신기영이 이미 수도를 방비하고 있었음에도 회군을 따로 불러 수도를 방어하도록 시키기도 했다.

허나 이런 의용군들의 등장은 청나라 입장에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상군과 회군의 대성공 이후 하남군, 동군, 운남군처럼 지방 각지에서 수많은 의용군들이 할거했다. 이들은 각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고 외세의 간섭을 대항하면서 민심을 얻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갈수록 세력이 커지더니 결국 지방군벌로 발전했다는 것. 이 의용군들은 청 조정이 아닌 군벌 개인에게 복종하기 시작했고, 결국 북양함대와 함께 청나라를 전복한 뒤 중국의 군벌시대를 열고야 말았다.

8.4. 신건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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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육군의 모습
양무운동청불전쟁청일전쟁의 패배를 겪으며 처참하게 그 한계를 드러냈다. 게다가 의화단 운동 때 8개국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당하고 신축조약을 체결한 일은 보수적인 청나라 조정에게도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을 안겼다. 8개국 연합군이 물러난 이후, 청나라는 대대적인 개혁을 결심하는데 이게 바로 청말신정(淸末新政)이다. 이 과정에서 위안스카이의 주도로 북중국에서는 북양군이, 남중국에서는 장지동의 주도로 자강군(自强軍)이 세워졌다. 기존 청군의 주력이던 녹영군은 규모가 축소됐고 무과도 폐지됐다. 각지에 사관학교가 세워졌고 1906년에는 육군부가 설립되어 신군을 통괄했다.

신해혁명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편성을 완료한 신군은 16개 사단, 14개 혼성여단, 4개 독립연대, 금위군 2개 여단 소속 등등 총 30만 1,800여명에 달했다. 각 사단의 병력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1개 사단에 해당하는 1만 2천명 정도였다. 신군은 무기만 현대적인 소총과 중화기를 갖췄다 뿐이지 체계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군대인 이홍장의 회군 등과는 대조적으로 제복부터 편제, 훈련, 전술까지 완전히 서구화된 진정한 근대식 군대였다.

물론 러일전쟁을 거치며 각 사단 총원을 1만 8,400명이 넘게 증원하고 각종 신무기를 국산화한 동시기 일본 육군을 상대하긴 부족했다. 그러나 내부 반란 진압이나 제한적인 국외 개입은 어느정도 가능한 전력이었다. 일본에게 패배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고 의화단의 난 당시 열강 연합군에 또 패전한 청나라 입장에서는 그동안의 한족에 대한 불신감을 떨치고 마지막 쇄신을 시도한 셈이었다. 폐쇄적인 팔기와 대조되는 근대적인 현대 육군을 건설하려면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에게 많은 비중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창 봉기를 시작으로 신군이 결국 이반하면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만다.[64]

청나라의 신군은 그 한계가 명확한 군대였다. 청나라 멸망 직전에 전국에 흩어진 신군의 수가 무려 100만에 달한다 자부했지만, 실상은 고작 60만 명 밖에 없었고 진짜 근대식 화기와 훈련을 받은 병사 수는 17만 5천 명 밖에 안됐다. 특히 모두가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일부는 아예 대놓고 중국국민당 등 혁명세력과 내통했다. 청 조정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위안스카이와 장지동으로부터 군권을 빼앗고 군벌들을 약화시키려 시도했지만 이미 망조가 든 나라였던 탓에 큰 성과는 이루지 못했다.

8.5. 해군

입관 이전부터 청나라는 수전에 약했다. 병자호란 전후로는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의 명나라 항장들이 원래부터 사병처럼 부리던 포병대와 수군을 써먹었고 이들이 팔기한군의 모태가 되었을 정도. 입관 후에도 청나라는 명나라의 사례를 그대로 이어받아 엄격한 해금령을 펼쳤다. 또한 만주족은 주로 말을 타던 기병 위주였기에, 배를 타야하는 수전에는 미숙했고 이때문에 당시 육군 대부분은 만주족이였지만 청나라의 수군은 명나라에서 귀순하거나 흡수한 한족 투항병의 비중이 높았다. 청나라는 항저우와 전장에 수군 기지를 두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이들이 주로 대만 섬으로 도망간 정성공의 약탈 부대나 동남아의 해적들, 그리고 왜구들로부터 청나라 해안가를 방비하는 역할을 했다.

1661년에는 러시아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지린에 해군 기지를 새롭게 세웠으며, 팔기군을 해군에 배치하기도 했다. 1677년에는 푸젠동녕 왕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독자적인 해군 기지를 따로 창설하였으며, 이 덕분에 얼마지나지 않아 동녕 왕국을 꺾고 타이완섬을 청나라의 지배 하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와 비슷하게 해군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유럽과 다르게 대양 해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이 해안가에 주둔하면서 외적들의 침입을 막고 방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강희제는 청나라의 해안을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크게 황해 쪽과 가까운 발해해, 장쑤성저장성 인근 해안, 대만해협 인근 해안, 그리고 광둥성 해안으로 나누었다. 보하이해에는 덩저우 함대, 자오저우 함대, 뤼순 함대, 톈진 함대 등이 주둔했으며, 장쑤성과 저장성에는 장난 함대와 저장 함대, 타이완섬에는 푸젠 함대, 광동 해안에는 광동 총독 직속 함대와 광동 함대가 각각 주둔했다. 강희제 시기의 청나라 해군선에는 각각 대략 40여 명의 수병들이 승선하였으며, 네덜란드 양식으로 만들어진 대포와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청나라 해군은 건륭제 말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백련교도의 난과 묘족의 난 등이 연이어 터지자 청나라 조정은 해군보다 육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안그래도 기강이 날로 무너져가던 해군은 붕괴에 가속도가 붙으며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이때문에 아편 전쟁 때에 이르자 청나라의 해군은 서구식 무기를 갖춘 함선들에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 수병들마저 '이렇게 약했었나?'라고 놀랐다. 나름 한가닥 하는 해군력과 혈전을 각오하고 왔던 서양 해군의 입장에선 의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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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급 장갑순양함의 재현모형 웨이하이시에 정박한 북양함대
양무운동기에는 여러 서양식 전함을 매입하고[65] 수병들을 훈련시켜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4개 함대를 육성했다.[66] 해군력 육성이 어느정도 안정된 성과를 내던 1888년에는 배수량이 2,600톤에 달하는 방호순양함 평원급 장갑순양함을 진수하는 등 자체적인 건함 능력도 갖추었다. 평원 함의 건조비도 52만냥 이하로 억제되어 독일에서 직수입한 비슷한 크기의 방호순양함들에 비해 0.6배 수준의 건조비만 드는 등 무리한 국산화로 건함 비용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양적인 조선 능력에서는 청나라가 양무운동 당시에는 놀랍게도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 제국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당시 북양함대는 세계 8위 규모의 함대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함대였다. 청나라의 거대한 국력으로 당시로선 아시아 최고 수준 함선이던 독일제 정원급 장갑순양함을 구매하는 등 장비들도 나름 괜찮았으나, 어수선한 근대화의 한계와 근본적인 실력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청불전쟁, 청일전쟁으로 모조리 수장되었다. 양무운동 당시 청나라가 건설한 해군의 총 톤수는 8만 3,900톤에 각종 군함 78척에 달했다.

서태후가 사망하고[67] 의화단의 난 역시 청나라의 참패로 돌아간 이후인 섭정 짜이펑의 집권 기간에는 어느정도 복구는 시도된다. 이를 위해 유럽과 미국에서 현대적인 구축함과 방호순양함 10척 등을 수입해 전체 인원 8,500명에 달하고 총 배수량 4만 5,000톤의 함대를 급하게 재건했다. 전근대 수군의 면모가 많이 남아있었던 양무운동 시기 북양함대에 비해 철저히 구미와 일본의 군사사상과 체제를 모방한 완전한 신식 군대였다는 점에서는 북양 신군과 같다.

그러나 청나라가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 패배 충격에 헤롱거리는 동안 일본 해군은 드레드노트급에 포함되는 2척의 카와치급 전함 가와치와 셋쓰를 1912년에 건조하는 등 압도적인 전력으로 부상했다. 그래서 재건된 청나라 함대는 서류상으로라도 일본 해군을 압도하던 북양해군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중국인 수병들의 주도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해군 함선이 세계 일주를 도전하는 등 청일전쟁에 완패한 청나라로서는 어느정도 자존심은 세웠다. 둥사 군도를 놓고 일본과 분쟁이 벌어지자 군함을 파견하는 등 구색만 갖춘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중앙정부가 붕괴하며 청나라의 해군 재건 계획 역시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68]

9.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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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발 일반적인 청나라 남자들의 모습
청나라는 '키메라의 제국'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로 구성된 다민족제국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명나라의 국가체계를 본떠서 나라를 이루었지만, 지역마다 그 통치 기법과 가면을 바꾸어가며 극도로 유연한 국가를 완성했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한족의 천자이자 몽골과 만주의 칸, 티베트의 법륜성왕이자 위구르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그 어떠한 중화 황제들도 가져보지 못한 칭호를 겸했고 관용적인 민족정책을 베풀었기에 제국 내에는 수많은 민족과 문화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존재했다.

청나라는 초기에 피정복민인 한족에게 육대폐정(六大弊政)이라고 해서 만주족의 변발 강요, 만주족의 복식 강요, 무주지 강제 압수, 가옥과 저택 강제 압수, 한족의 강제 노예화, 도망 및 이주 금지 등 대단히 가혹한 정책을 펼쳤다. 특히 5개의 폐정들은 명청교체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자연스레 폐지된 것에 반해 도망 및 이주를 금지하는 법은 강희제 초기까지 갔다. 청나라는 만주족의 중국 이주를 장려했고 한족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이들에게 뿌렸다. 당연히 탄압을 피해 도망치는 한인들이 부지기수였으나 청 조정은 이마저도 허락치 않아 함부로 도망치는 한인들과 이를 도와주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죽였다. 강희제가 즉위하고 나서야 이러한 극심한 탄압정책이 어느 정도 완화된다.

원래 변발도 처음부터 강제한 것은 아니었다. 한족은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으로 만주족의 변발을 혐오했고, 워낙 반감이 엄청난 수준이라 청나라의 도르곤마저도 입관 직후 바로 강제변발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변발을 한 한인들을 더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러나 1645년 남명의 홍광제 정권이 무너지고 더이상 청에 맞설 세력이 없다고 여겨지자, 도르곤은 마침내 모든 복식과 머리 모양이 만주족의 것을 따라야한다고 강제 선언했다. 10일 안에 모든 남자들이 강제로 머리를 깎아야했고 이를 따르지 않은 사람은 즉결처형당했다. 당연히 수많은 한족들이 크게 반발했고, 그 악명높은 양주대학살도 바로 이때 일어났다.

청나라는 100년도 가지 못한 원나라에서 교훈을 얻었다. 청 조정은 과거제 등 옛 한족 왕조들의 제도들을 그대로 본받았고, 유교를 숭상했으며 한족 사대부들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또한 먼저 청나라로 투항해온 옛 명나라 관리들을 크게 기용하여 한족팔기로 편입시켜주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오삼계경중명, 홍승주가 있다. 이 명나라 항장들은 청나라의 집권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남명 정권의 목숨줄을 끊어버린 것도 이 명나라 항장들이었고, 강희제 시절 대만을 정벌한 장군 기랑도 명나라 항장 출신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한족들은 조정에서 점차 요직을 차지해나갔다. 아편 폐기로 유명한 임칙서, 태평천국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증국번좌종당, 근대화에 앞장선 이홍장, 장지동, 원세개도 모조리 이 한족 출신 관료들이다.

한인들에게도 '한인팔기'라고 해서 팔기제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물론 만주팔기나 몽고팔기에 비하면 뒤떨어졌지만 팔기에 들어간다는 것은 큰 특혜였다. 1633년에 태종 홍타이지가 해방된 한인 포로들로 구성된 한인 10가구 중 건장한 장정 1명을 가려뽑아 팔기를 만들었고 1642년에는 만인팔기와 똑같이 8개의 기로 나뉘었다. 명목상으로는 한인팔기 역시 만인팔기와 동등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치외법권, 세습권을 누렸다. 1723년에 한인팔기는 무려 44만 명, 전체 팔기군의 72%에 달했다. 그러다가 건륭제가 대대적으로 칼질을 해서 한인들을 기적에서 방출하는 바람에 1796년에는 전체의 43%로 줄어들었고, 이후 계속 비율이 줄어 선통제 시기에는 6%에 불과한 21,596명까지 추락했다.

만주족들이 가장 경계한 것은 바로 만주족들이 한족에 동화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북위금나라, 원나라 등등 하나같이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 흡수되어버렸기 때문. 그래서 만주족은 철저히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받아들였고 나머지는 거부하며 철저한 분리 정책을 폈다. 청나라의 동화속도는 이전 이민왕조들에 비해 확연히 느렸다. 모든 공문들은 중국어와 만주어 둘다로 작성됐고, 1902년까지도 만한 결혼은 금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해도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만주족들은 유교와 경서를 필수적으로 읽어야만 했고 절대다수의 만주족들은 중국어를 모국어로 익혔다.[69] 만인과 한인 사이의 통혼은 날로 증가했고 나중에는 유전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어졌다.

청나라는 존속 기간 내내 만인 우선 정책을 펼쳤다. 물론 강희제처럼 세심하게 만인과 한인의 등용 비율을 조정하고 심지어 북부와 남부의 지역갈등까지 챙겼던 황제도 존재했지만, 대체적으로 만인은 한인보다 우월하게 대접받았으며 출세나 조세, 군역 등 모든 면에서 나은 대우를 받았다. 옹정제는 대놓고 '만일 만인에 좋은 인재가 있고 한인에도 좋은 인재가 있다면, 나는 만인을 선택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70] 만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교육도 따로 받았고 한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구역에서 살았으며 죄를 지어도 따로 재판을 받았다. 만주는 황실의 성지로서 한족이 이주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됐다. 만주족 황제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풍을 중시하며 만주족의 정신을 보존하려 애썼다.

청나라는 전성기에도 한족과의 차별이 상당히 심했다.[71] 물론 시간이 흐르며 만주족이 한족화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만주족과 한족 간의 차별이 완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청나라 초기에 처음 한족 대신을 임명했을 때 같은 직책이라 하더라도 팔기인이 한족보다 품계가 더 높았다가 나중에 동급으로 조정되지만, 만한차별은 청이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가 않았다. 애초에 인구비율을 보면 만한병용제부터가 한족에 대한 차별이었다. 청조 말기 한족(漢族)들에 의해 사용된 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킴을 의미하는 멸청흥한(滅淸興漢)이니 청을 돕고 서양인을 멸함을 의미하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이니 하는 구호와 쑨원의 삼민주의의 민족의 뜻이 만주족의 청조를 타도하고 한족의 국가를 회복한다는 것만 봐도 한족과 만주족은 청 말기까지 엄격히 구별되었고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적개심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만주족 입장에서도 건륭제 때부터 한족에 동화되는 현상이 심각해지자 한족의 풍습을 금하는 조치가 내려지고 의도적으로 만주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소수민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고 살아가던 서남 지역에는 토사(土司) 제도를 실시했다. 기존에 부족을 다스리던 부족장을 토사로 인정하고 자치를 허용했던 것이다. 이들은 거의 중앙조정과 동떨어져 살았고 심지어 마음대로 군대를 일으켜 인근 현을 침범하기까지 했다. 이런 토사제는 강건성세 때 종식된다. 옹정제는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을 시행해 토사직을 폐지, 조세와 부역, 행정제도를 모두 통일하고 중앙에서 파견한 유관이 하여금 일대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같은 청의 동화정책은 서남지방의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한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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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 달라이 라마를 접견하는 청 대신 청 갑주를 입은 위구르인
몽골은 특별 대접을 받았다. 외몽골에는 기맹제와 자사그 제도를 적용해 자기들끼리 어느 정도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기존의 부족 제도는 해체됐고 대신 기(旗)와 기들이 모인 맹(盟)으로 재편했다. 이 맹의 지도자들을 '자사그'라 부르고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몽골인들은 한인에 비해 훨씬 특별대접을 받았고 몽골족들은 왕공에 임명되기도 했다. 덕분에 청나라는 역대 중화 왕조들의 최대 골칫거리였던 북방 유목민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했다. 또한 티베트 불교의 몽골 전파에 힘써 정신적으로도 몽골인들을 복속시켰다. 청나라의 황제가 티베트의 보호자임을 앞세워 몽골의 대칸임과 동시에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라는 점을 강조한 덕에 몽골에서는 거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티베트의 지방정부는 '카사그'라고 불렀다. 청은 티베트를 편입시킨 뒤 정교분리를 실시했고 주장대신을 임명해 티베트의 영토와 군사, 행정을 재잡는 등 영향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1751년에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카사그의 정무권을 박탈하고 티베트의 주장대신과 달라이 라마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1793년에는 주장대신의 권한을 더욱 강화해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와 그 직급을 동등하게 했고, 황제에게 직통으로 상주할 권한을 부여했으며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외 여러 활불(活佛)의 환생을 감독하기도 했다.[72] 청 조정은 티베트의 우편, 통화, 무역, 고리대금 문제를 개혁했고 관보 발행, 학교 설립, 농업과 목축업 장려, 도로 개축 등 다양한 개선 작업을 펼쳤다. 티베트에 대한 관심도는 서양의 위협이 거세진 후반기에 더 강해진다. 영국이 인도를 통해 티베트 남부에 손을 뻗치자 개토귀류를 실시한 뒤 내지와 똑같은 현을 설치하고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신장 일대는 톈산산맥을 기준으로 톈산북로와 톈산남로로 나뉜다. 개중 톈산남로에 위구르족들이 살았다. 건륭제는 가장 먼저 복속된 하미와 투르판의 지도자들을 신장의 자사그로 임명했으나, 1757년에 이 곳에서 반란이 일어난 뒤에는 자사그직을 폐지하고 대신 기존의 위구르인 토후들을 '벡'으로 인정하는 백극제로 전환했다. 그의 임무와 지위에 따라 무슨무슨~ 벡 이런 식으로 불렸고 약 30여명의 벡이 있었다. 3~6품의 아키무 벡, 4~6품의 이쉬한 벡 등이 주요 벡들이었고 나머지 벡들은 4~7품이었다. 청 조정은 벡 이외에도 일리 장군을 임명해 다른 장군과 대신들과 함께 신장을 관리토록 했다. 건륭 말기 수십만의 한족과 회족들이 점차 톈산북로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1775년부터 1808년까지 우루무치의 한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10배로 증가했다. 이때문에 청 조정에서는 이참에 신장을 아예 중화의 내지(內地)로 만들어서 훗날 독립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소리도 나왔다.

10.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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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각국사무아문 아이신기오로 이힌[73]
청나라는 근대 이전까지도 공식적인 외교 기관이 없었다. 항상 자국을 천조(天朝)으로 여겼으며 그나마 러시아 정도를 제외하면 청나라의 국력에 비등한 세력이 하나도 없었기에 조공과 속국을 제외한 외교가 불필요했던 것이다. 청나라는 타국을 자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하지 않았고 그나마 예부, 이번원, 내무부, 공행(公行) 제도를 통해 외국과의 관계를 맺었다. 6부 중 예부는 일본, 조선, 류큐와 동남아 국가 등과의 조공 관계를 책임졌고, 이번원은 외몽골, 준가르, 티베트,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 등을 처리했으며 대부분이 만인과 몽골인으로 구성됐다. 내무부는 유럽의 선교사들과 해외 무역 감독, 관세 수집 등을 담당했고 공행 제도를 통하여 광저우 한정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 제한적인 무역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적인 외교정책도 아편전쟁의 패배로 종결된다. 중국의 빗장이 강제로 열어젖혀졌고, 톈진 조약으로 수도 베이징에 외국 외교관들이 주재하기 시작했다. 1861년에는 총리각국사무아문이 설립되어 외국과의 관계를 책임졌고 1870년에 신설된 북양통상대신이 총리각국사무아문을 대신해 외교정책을 총괄했다. 1901년에는 청말신정 개혁과정에서 총리각국사무아문 대신 새로 만들어진 외무부가 외교 일체를 모조리 전담했다. 청나라는 망하기 직전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20개가 넘는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청나라 초중기 외교의 핵심은 당연히 조공국들이었다. 강희제 초기에는 조선류큐 왕국이 가장 대표적인 조공국이었고 건륭제베트남, 라오스, 태국, 미얀마, 난방공화국 등 동남아 국가들이 대거 입조했다. 뿐만 아니라 네팔의 구르카 왕국, 시킴 왕국, 부탄 같은 남아시아 국가들, 카자흐 칸국, 불루트 칸국, 코칸트 칸국, 부하라 칸국, 아프가니스탄바다흐샨, 라다크 등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일대와도 교류하며 조공을 받았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해금령(海禁令)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특히 타이완으로 도망간 정성공의 군대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동남 해안가에 더욱 엄격한 해금령을 선포했던 것이다. 청나라는 무려 5번이나 해금령을 선포했고 3번이나 천해령(遷海令)[74]을 내려 백성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그러다가 1683년 동녕국이 무너지고 대만이 평정되자 그제서야 강희제가 해금을 풀어주었다. 강희제는 광동관, 푸젠관, 저장관, 강남관 등 4개의 관(關)을 설치해 해외와의 교류를 이 안에 한정시키고 세금을 걷었다. 이 4개의 관을 담당하는 관관(關官)들은 각 성(省)의 모든 세관을 책임지며 각기 수십여개에 달하는 세관항들을 관리하곤 했다.[75] 그러다가 1757년 건륭제가 강쑤, 저장, 푸젠의 3개 항을 폐쇄하고 오직 광저우에서만 교역하도록 하면서 '칸톤 체제'가 수립되었고 이는 1840년 아편전쟁까지 약 80년 동안 지속된다.[76]

의외로 아편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청나라의 선박 수와 총 배수량은 영국과 미국을 가볍게 능가했다. 당시 청나라 해안가에는 1만 척에 달하는 상선들이 돌아다녔고 이들을 다합치면 150만 톤에 달하는 배수량을 자랑했다. 내륙의 하천, 그리고 기타 선박까지 더하면 청나라에는 총 20만 척에 달하는 선박들이 있었으며 총배수량 400만 톤에 달했다. 반면 영국은 1814년 기준 21,500척에 달하는 선박을 보유했으며 다 합쳐봤자 240만 톤에 그쳤고 미국 역시 다 합쳐봤자 총배수량이 1809년 기준 135만 톤 밖에 되지 않았다. 청나라의 무지막지한 물량 덕에 찍어눌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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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를 알현하는 매카트니 경 1805년 광저우의 모습
일각에서는 청나라의 폐쇄적인 쇄국정책이 청나라의 몰락을 불러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허나 이게 전적으로 옳은 말은 아니다. 서구 열강들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며 오스만 제국이 이끄는 이슬람권과 청나라가 이끄는 동아시아권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청나라가 유별나게 외국인을 혐오했다거나 폐쇄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 서구 열강들 역시 자국 항구에는 오직 자국 선박만이 드나들 수 있게 했고, 자국에서 생산된 상품들은 오직 자국 선박으로만 운송하게 강제하는 보호무역을 펼쳤다. 청나라의 해금령과 서양의 보호무역은 일정 비슷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유럽 열강들이 자국에서는 보호무역을 내세웠던 주제에, 청나라에는 억지로 무제한의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이중잣대를 들이밀었던 데에 있었다.

건륭제가 조지 매카트니의 개항 요구를 거절한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매카트니 경은 영국 상선의 저장, 톈진의 자유로운 통행 보장, 베이징에 영국 은행 설립, 영국에게 영토 할양, 마카오와 인접한 광저우 일대에 영국인들의 자유로운 정착과 통행 보장, 광저우 내륙 일대에서의 자유무역, 관세 대폭축소 및 폐지 등 하나같이 청나라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불평등한 조건들을 내걸었다. 건륭제가 조지 매카트니의 요구를 거절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청 조정이 세계정세에 무지했다는 편견과도 달리, 건륭제는 영국이 인도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사이의 국제관계도 이해하고 있었다.

근대 이전까지 청나라는 별다른 근대적 조약을 맺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네르친스크 조약캬흐타 조약 정도로 그마저도 둘다 러시아와 맺은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서는 수많은 근대식 불평등 조약들을 봇물터지듯이 강제로 체결하게 된다. 청나라는 멸망하기 직전까지 총 343개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했고 개중 40개는 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 치외법권은 물론 각종 자원 및 이권 수탈, 영토 할양, 내지 개방 등 웬만한 이권들은 죄다 빼앗겨나갔다. 특히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에는 아예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망한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허나 동시에 이 시기는 양무운동 등 서양의 발전된 기술을 받아들이고 중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대였기도 하였으며, 이같은 자강(自强)의 목소리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그 꽃을 피운다.

10.1. 수교국 목록

조공 및 책봉 체제로 대표되던 전근대적 외교가 아닌, 근대적 의미로서 체결된 세계 국가들과 외교 관계 수립일이다. 중국어 위키백과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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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 1842년 8월 29일

10.2. 대외 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대외 관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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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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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축하하는 청나라의 시내 풍경
명청교체기에는 반군과 화적 떼들의 난립, 청나라의 침공, 삼번의 난 등등 각종 대재난이 겹치면서 중국의 인구가 수직감소했다. 기근이 돌고 역병이 창궐했으며 숭정제 재위기간 동안 중국 인구의 20%가 호적에서 사라진 것을 시작으로 명청교체기 동안 무려 호적에 등록되어있던 인구의 40%가 사라졌고 순치제 때 최저를 찍었다. 물론 이들이 전부 죽어버린 것은 아니며, 상당수가 전쟁을 피해 달아나고 숨어버리는 바람에 정부가 찾아내지 못한 것에 더 가깝긴 하지만 명청 교체기 동안 엄청난 인구감소가 일어났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다가 강희제를 시작으로 한 옹정제건륭제의 태평성대, 소위 강건성세가 뒤따르며 중국의 인구는 다시 폭증했다. 당대 중국의 정확한 인구는 알 수 없지만, 이미 강희 19년인 1680년에 1억 인구를 회복했다는 연구가 있고 다른 연구에서도 1685년 즈음에 인구가 다시 1억 명을 돌파했다고. 건륭제 시절에는 100년만에 호적에 등록된 인구가 공식적으로 2억 명으로 증가, 2배 넘게 뛰었고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도광제 시절인 1833년에는 4억 명으로 치솟았다. 역대 중화 왕조들의 인구가 파동함수를 그리며 증감을 반복했던 반면, 청나라의 인구는 초창기때 한번 저점을 찍고 그때부터 쭉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만 했다.

그러나 19세기 중후반부터는 청나라도 상당한 인구 감소에 시달려야만 했다. 특히 중국 역사상 최악의 민란이라 하는 태평천국의 난2천만 ~ 3천만 명이 죽었으며 염군의 난, 둥간혁명 등으로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쓸려나갔다. 게다가 연이은 가뭄도 한몫했다. 광서 1년인 1875년부터 3년 동안 하남, 산서, 섬서, 직예, 산동 등에 어마어마한 가뭄이 닥쳤는데 피해가 어찌나 심각하던지 타이위안시에서만 1백만 명이 죽었다. 이걸 정무기근(丁戊奇荒)이라 부르며 대략 청나라 인구의 2~4%에 달하는 950만 명에서 2천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추정될 정도. 광서 13년인 1887년에는 황하의 둑이 터져 2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고 사회는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때문에 청나라의 인구는 증가세를 멈추고 보합에 접어들었으며, 청나라 멸망 직전의 인구는 약 4억 3천만 명으로 유지됐다.

청나라 내지가 지옥으로 변해버린 탓에 한족들은 살만한 곳을 떠나 국내국외를 가리지 않고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청나라 조정도 이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권장했다. 지나치게 밀집된 인구를 흩어놓고 개척되지 않은 영토를 개간함과 동시에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지방을 한족들이 동화시켜주길 바랬기 때문. 아편전쟁 전후로 약 700~8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관내 지방을 떠나 신장, 티베트, 만주 등 국경지대나 섬 일대로 이주했다.

청나라 조정은 쓰촨성 일대에 한족들을 정착시키려 노력했다. 명말청초에 워낙 많이 학살이 일어난 곳이라 인구가 사라져버렸고 이 자리를 한족으로 채우려 시도했던 것. 청나라 조정은 100년 동안 인근의 호광성과 산서성에서 막대한 인구를 유입시켜 쓰촨성의 중화 편입을 가속화했다.

만주의 동북삼성 일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 조정은 만주를 성역이라 여겨 공식적으로는 한족의 이민을 막았지만, 뒤에서는 '봉양불금(封而不禁)'이라 하여 사실상 한족의 이주를 눈감아줬다. 그러다가 건륭제 사후부터는 공식적인 이주도 허용, 동몽골과 만리장성 이북 일대로의 이주를 장려하자 동북삼성과 만주의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1792년의 가뭄 이후 10년 만에 만주로 탈출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청 조정이 만주에 4개의 행정구역을 더 설치해야할 정도였다고. 1780년 만주의 인구는 95만 명에 불과했지만 1820년에는 247만 명으로 늘어났고 매년 24.2%라는 어마어마한 증가율을 기록했다. 1백만 명에 달하는 대부분의 이민자는 관내에서 왔고, 개중 30%는 직예성 출신었다. 1873년에는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이 만주에 관심을 기울이자 미리 알박기를 해놓기 위해 아예 이민 제한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몽골도 이같은 이민의 흐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원래 청 조정은 몽골인과 한족들이 절대 섞이지 않도록 엄격하게 분리했지만 강희제 연간에 한족의 몽골 이주 제한을 완화한 덕에 몽골의 한족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한족들은 만리장성을 넘어 몽골 이남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를 주서구(走西口)라 불렀다. 20세기 초에는 청 조정이 대놓고 가열차게 한족의 몽골 이민을 재촉했다. 러시아가 내몽골 일대에 큰 관심을 보이자 불안해진 청나라가 한족들의 대폭 이민을 실시했던 것이다. 당연히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땅이 한족의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세게 반발했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지역적인 분쟁에 그쳤고 대대적인 반란에는 이르지 못했다.

남서 일대는 워낙 지형이 험난하고 중앙정부로부터 독립되어 따로 살아온 탓에 통제가 어려웠다. 그래서 청나라는 옹정제의 개토귀류 정책 이래로 수많은 한족들을 서남 지방에 들여보내 한족화를 시도했다. 광시성윈난성에서 무려 250~3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서남 지방에 정착했고 이 일대는 완벽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된다. 신장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신장 일대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 다양한 세력들이 충돌하는 곳이었고, 이 곳의 전략적인 중요도 때문에 청나라는 한족들을 정착시켜 알박기를 했다. 청나라 초기부터 도광제 중기까지 50만 명에 달하는 한족들이 땅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신장에 정착했다.

다른 변경 지방들은 한족들의 자유로운 이주에 제한이 걸려있었던 것과는 달리, 타이완 일대는 처음부터 쭉 한족들의 이주를 적극장려했다. 1685년 강희제가 칙령을 반포한 이래로 일정 재산과 부양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식솔을 데리고 타이완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건너갔던지 건륭 55년인 1790년에는 개인 이주를 막기 위해 관항을 만들어 이 곳에서만 넘어갈 수 있도록 제한했을 정도. 청 초기부터 중기까지 무려 15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타이완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1895년에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타이완이 일본에게 넘어갔을 때, 타이완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에게는 떠날 것인지 남을 것인지 선택권이 주어졌다. 결과적으로 99.75%의 중국인들이 잔류를 선택했고 타이완은 명실상부한 중화권의 일부로 남았다.

해외 이민도 빼놓기 어렵다. 원래 푸젠성과 광동성은 인구는 과잉인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육로로 이주하기가 어려웠던 대신 바다가 가까웠다. 그래서 푸젠성과 광동성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타이완으로 가장 많이 이주를 갔다. 허나 타이완이 일본에게 넘어가고 타이완 이주가 사실상 금지되자 푸젠, 광동인들은 그보다 더 먼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미 15세기와 16세기 이래로 중국인들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일대로 진출해오고 있었는데 이 스케일이 몇십배로 커졌던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로 수백만 중국인들이 해외로 빠져나가 동남아, 미국 서부, 카리브해 일대에 정착해 화교가 되었다. 청나라의 몰락 직전, 해외에는 무려 7백만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존재했다.

12.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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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당시 세계 GDP 비교 그래프.[77] 당시 인도 제국 경제력의 두 배일 정도로 청나라의 경제력은 엄청났다.[78]
전근대 중국의 경제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지역 간 사치품, 필수품 교류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송나라 시대고, 두 번째는 1550년~1800년대의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다. 이 시기들을 거치며 교환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점진적인 전환이 이루어졌고,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해나갔다. 특히 청나라 때는 서양과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엄청난 부를 쌓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매디슨의 연구에 따르면 청나라의 경제규모는 중국 역사상 최대 수준이었으며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역사상 가장 높았다. 1820년 청나라의 경제 규모는 5,486억 4천만 달러, 한화 약 760조 원에 달했으며 당시 세계 GDP의 32.9%를 차지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송나라 때도 총 gdp가 637억 2천만 달러, 세계 GDP의 22.7%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다만 1인당 gdp는 송나라 때가 세계적으로도 압도적이어서 621달러의 아바스 왕조보다 약간 낮은 450달러였고, 서유럽의 427달러보다 높았다. 반면 청나라의 1인당 gdp는 600달러 정도로 당시 산업혁명 영국의 1,706달러에 비하면 한참 낮았다.[79]

다만 1인당 GDP의 관점으로 보면, 개인이 가장 풍요롭게 살았던 때는 북송 시대다. 1340년 기준으로 26.5테일이었으나, 명나라 시기 들어 19테일로 줄어들었고 청나라 들어서는 14테일 수준에 이르렀다. [80] 1840년 기준 청나라의 1인당 GDP를 당시 초강대국인 대영제국과 비교했을 때, 중국의 1인당 GDP는 영국의 14.95% 수준이었다. 물론, 중국의 물가가 영국보다 훨씬 저렴했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청나라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17세기 말쯤이면 명청교체기에 발생한 경제적 피해가 어느 정도 복구됐다. 청 정부가 대대적인 농업 진흥책을 실시한 영향으로 경작지가 늘었고, 인구는 명 말기에 비해 거의 2배 수준인 3억 명으로 증가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땅콩, 고구마 등이 유입됐고, 해금령을 통해 무역을 차단했던 명나라에 비해 해외교역량도 증가했다. 다만, 교역에 있어서는 '광동 체제'라는 시스템에 입각해 오직 광저우에서만 해외 교류가 허가됐다. 광저우에서도 조정의 허가를 받은 공행들만이 서양 상인들과 무역을 할 수 있었고, 공행 가입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국가에 거금을 납부해야 했다.

강희제 시기에는 황하를 치수하고 대운하를 건설했다. 이 대운하를 이용해 남쪽에서부터 북부의 베이징으로 밀, 소금, 비단 등의 필수품과 사치품들을 운송할 수 있었고, 그러한 거래를 통해 남부의 상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81] 황제들이 직접 치수와 경제를 책임지고 떠맡은 덕택에 청조 때는 중국 전역에서 상품작물 재배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단순한 자급자족을 넘어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농사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장들의 활성화는 중소형 도시들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도시들 중에는 그 역사가 청나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청나라는 광산 산업의 사유화도 장려했다. 명나라 시기에 광산 사업가들은 사업으로 얻은 이익의 15분의 1을 나라에 바쳤고, 그 외에도 상당수의 이익이 보호비나 뇌물 등의 형태로 관료들의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래서 개인 사업가들은 광산 산업을 기피했고, 나라가 광산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생산력이 낮아졌다. 그러나 청조는 광산업에서 손을 뗐고, 무기나 동전 따위를 주조하는 데에 필요한 철, 금, 은 같은 금속들을 대부분 시장에서 사들이는 방안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광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광둥성을 중심으로 광산업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전세계에서, 특히 유럽 지역의 상인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어 비단, 차, 도자기 등의 고급 상품들을 사가면서 중국에는 은이 쏟아졌다. 스페인 제국이 아메리카 광산에서 채굴한 은의 20~30%가 필리핀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통계 자료가 있을 정도다.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강남 지방에서는 멕시코에서 흘러들어온 은을 이용한 무역이 가능했다. 옹정제 시기에는 유입된 은을 이용해 은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82] 이같은 조세 제도는 곧잘 유지되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서양의 침탈이 본격화되어 은의 유출이 심각해지며 무너졌다. 그에 따른 사회 불안정이 청나라의 멸망을 촉진한 한 이유였다.

청 중반기에 들어서부터는 초기 형태의 은행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무역이 발전하면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상인들의 수가 늘었다. 이 상인들은 무거운 금과 은 따위를 계속 가지고 다니기가 힘드니 돈을 모아 상단을 설립했고, 출발 전에 미리 은을 맡겨놓고 차용증을 받은 후 목적지에 도착한 뒤 해당 상단 지점을 찾아가 증서를 보여주고 은을 받았다. 18세기 즈음에는 이런 식의 은행 네트워크가 전국적으로 확대됐고, 자본의 유동성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 대륙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 정부는 늘 재정난에 시달렸다. 이는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낙후된 행정과 부정부패가 원인이었다. 토지세인 전세만 하더라도 청 멸망 직전 시기를 기준으로 3,500만냥이었는데, 10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조세제도가 100년 동안의 경제상황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토지는 토지 대장에서 누락되거나 실제와 맞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국의 토지와 수확량을 체계적으로 정확히 조사해야 했다. 그렇지만 영토가 워낙 광대해 조사사업을 실시했다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서 실행되지 못했다. 만성적인 부패로 세리들과 고위관리들이 착복하는 세금도 엄청났다. 무작정 세금을 인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농민의 반발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말기 청나라의 재정 시스템은 멸망할 때까지 개혁되지 못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1873년 7월부터 지조개정법을 실시해 해마다 모든 토지에서 토지가격의 3%에 해당하는 세금을 걷어 근대화와 군비에 쓰일 재정을 마련했다.[83] 청나라 말기에 일본보다 재정 근대화가 뒤쳐진 것은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다.[84]

12.1. 농업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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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1644년 입관한 직후, 도르곤은 권지령(圈地令)을 내려 주인이 있는 땅이든 없는 땅이든 모조리 만주족의 땅으로 선포하고 이를 나라의 땅인 관장(官莊)이라고 선포했다. 기존의 한족 농부들은 남쪽으로 도망가거나 새 만주족 지주들의 노비로 전락했다. 권지령은 무려 3차례에 걸쳐서 시행됐고 1685년 강희제가 폐지하기 전까지 베이징 인근 순천부, 보정부, 영평부, 하진부 일대에서 가장 극심하게 수탈이 자행됐다. 강희 이후부터는 다시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해서, 명나라 황자나 명 귀족들에게 속했던 땅들은 '개명전(更名田)'이라고 하여 20만 헥타르 이상의 농지를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해줬다. 뿐만 아니라 신장, 칭하이, 하이난, 대만 일대 등 변경에 대규모 간척 사업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동북삼성도 공식적으로는 한족의 이주를 틀어막긴 했지만 말기에는 제한을 풀어주었다.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농업 생산량과 효율이 좋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진한 시대 중국의 곡물 생산량은 1무 당 264근(斤)이었고 당나라 때에 1무 당 334근이었다. 청나라 이전까지 가장 농업 효율이 높았던 왕조는 직전의 명나라로 1무 당 346근의 곡물을 생산해냈다. 그러나 청나라 들어서는 1무 당 무려 374근의 곡물을 생산했다. 진한 시대에 비하면 41.6%, 당나라에 비하면 11.9%, 명나라에 비하면 8%씩이나 증가한 수치였다. 청나라 때 편찬된 농경서의 수는 청나라 이전에 편찬된 모든 농경서를 합친 것의 2.09배에 이른다. 또한 청나라 때 편찬된 양잠서가 무려 155권에 달하는데, 이전 왕조들이 편찬한 양잠서를 다 끌어모아봐야 고작 4권 밖에 안된다는 사실은 청나라 때 얼마나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나라 초기, 강희 연간에는 전국에서 대대적인 치수 사업이 이뤄졌다. 명나라 말기에는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며 황하회하 하류가 막혔고 베이징항저우를 잇는 대운하도 쌓인 퇴적물을 치워줄 사람이 사라지며 아예 막혀버렸다.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던 강희제는 진푸(金富)를 하도총독으로 임명하고 제방 건설, 하천 준설 등 치수작업을 일임하여 홍수의 위협을 줄였다. 1713년에는 베이징 인근의 영정하를 성공적으로 준설해 강 양둑의 염지(鹽地)를 비옥한 옥토로 바꾸었으며, 옹정 연간에는 장쑤성과 저장성의 방파제를 지어 농지를 보호했다. 이러한 황제들의 꾸준한 노력 덕에 가경제 시기 청의 총 경작지 면적은 10억 5천만 에이커에 이르러 만력제 시기 수준을 회복했다. 도광제 때는 무려 14억 에이커를 넘겼고, 강남, 쓰촨, 호광성의 광대한 옥토에서 쏟아져나오는 곡물이 중국의 엄청난 인구를 먹여살렸다.

청나라의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가 경작지 면적이 증가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이 엄청난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작물들을 들여와야만 했다. 이때 큰 공을 세운게 바로 인디카 품종 쌀이었다. 1년에 2, 3번도 수확할 수 있었고 일찍 익다보니 가뭄에 강해 고원이나 산비탈 지역에서도 재배할 수 있었다. 송나라 초기부터 도광제 시기까지 인디카 품종을 재배하는 면적과 생산량은 무려 2배로 늘어났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된 작물들 덕분에 이전에는 농사를 짓지 못하던 땅도 써먹을 수 있었다. 건조한 고원에 옥수수고구마를 심었고, 험준한 산지에는 감자를 심었으며 강변의 모래밭에는 땅콩을 심었다. 이 덕에 강희 연간 청의 곡물 생산량은 무려 2,040억 kg에 달했으며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농업 생산량과 효율을 자랑했다.[85]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면적도 차츰 확대되어 상품경제를 촉진했다.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은 면화로 강소성(江蘇省), 절강성(浙江省), 하북성(河北省), 하남성(河南省), 호북성(湖南省), 산동성(山东省)에서 재배했다. 어찌나 면화 산업이 발전했던지 농업이 늦게 발달한 동북삼성의 봉천마저도 빠른 속도로 면화산업을 개발해 주요 수출지로 급부상했을 정도. 양쯔강 하류와 상하이가 면화 산업의 중심이었다.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담배는 명나라 중엽 때 처음 재배되기 시작해 산시성, 산둥성, 후난성 등지에서 주로 생산했으며 매우 수익성이 높았다. 그 외에도 강남, 쓰촨, 대만에서 사탕수수 산업, 쑤저우, 후저우, 항저우, 광저우에서 양잠업 등이 발전했다.

12.2. 산업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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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쑤저우의 번화한 모습을 담은 '소주번화도(姑蘇繁華圖)'
명청 시대에는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과 함께 상업도 크나큰 진보를 이룩했으며 상품화폐경제도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았다. 농업의 상업적 생산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산물이 점차 생필용에서 벗어나 상품화되었으며, 수공업 생산을 위한 원자재 제공이나 소비자들에게 직접 공급하기 위해 기르는 특화된 환금작물들을 재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를 들어 양잠업 분야에서는 뽕잎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청상행(青桑行)'이나 '엽시(葉市)'가 등장했을 정도. 설탕과 같은 환금작물들은 국내외로 판매됐고 18세기에는 수출이 급증했다.

청대에는 명대에 비교해서 장인과 수공업자들의 지위가 훨씬 향상됐다. 명나라 시대에는 장인들이 국가에 강제적으로 소속되어 나라에서 의뢰한 작품들만을 생산하는 장인제가 존재했는데, 청나라는 이를 폐지하고 자유시장에 공급을 맡겼다. 개인 도자기 가마, 직물 공장, 개인 소유의 광산 등 개인산업에 대한 규제가 대폭 완화되었고, 그 덕에 개인 사업이 크게 번창했다. 이렇게 발전한 쑤저우와 항저우의 견직산업, 쑹장의 면직산업, 징더전의 도자기 제조업, 포산시의 주철 산업 등은 세계적인 규모에 이르렀다.

상업 생산의 발전과 상품 유통 범위의 확대에 따라 새로운 신도시들이 대거 등장했다. 예를 들어 한커우나 주씨엔 같은 도시들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급속도로 발전했고, 포산시징더전은 비단, 도자기 등 고부가산업에 특성화하여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가경제 시절에는 이 4개의 도시들을 묶어서 '4대 명진'이라 일컬었을 정도였다. 이같은 산업의 발달에 힘입어 베이징, 쑤저우, 난징 등 기존의 대도시들은 더더욱 번영을 누렸다. 수도 베이징의 인구는 100만이 넘어갔고 전국에서 조달된 물자들이 베이징으로 유입되어 막대한 인구를 먹여살렸다. 무역이 없는 날은 없었다. 이 당시에는 전국이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결되어 '천하에 물자가 모이는 4개 자리가 있으니, 북쪽의 베이징, 남쪽의 포산, 동쪽의 쑤저우, 서쪽의 한커우가 바로 그 것이다'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86] 양저우, 쑤저우, 난징, 항저우, 광저우, 포산, 한커우, 베이징이 천하 8대 상업도시로 떠올랐고 전국 각지의 중소도시들이 번성했다.

이렇게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상인들도 지역에 따라 서로 뭉쳐서 끼리끼리 도와주는 조직 '방(幫)'을 형성하곤 했다. 청나라의 상인들은 총 10개의 무역 집단으로 나뉘었다. 산시성의 산서상방, 안후이성의 회족상인, 절강성의 용유상방, 저장성의 저파상방, 장쑤성의 동정상방, 강서성의 강서상방, 광둥성의 광동상방, 산시성의 섬서상방, 산둥성의 산둥상방, 푸젠성대만의 푸젠상방 등이 바로 그것. 청나라의 금융산업은 산서상방과 회족상인이 장악했으며, 해외무역은 복건상방과 조주상인이 장악했다. 광저우의 홍상과 양저우의 염상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들이었으며 산시상인은 전국의 은행을 휘어잡고 위세를 과시했다.

청나라는 통화로 은과 동을 함께 사용하는 은동이원제를 사용했다. 하지만 은이 압도적으로 더 중요한 자원이었고, 작고 자잘한 거래들은 동전으로 처리하되 중요한 거래들은 모두 은을 사용해서 거래했다. 해외 무역의 발전으로 중국은 전세계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을 빨아들이는 은의 블랙홀로 작동했고,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걸친 강건성세에는 포르투갈, 베네치아, 네덜란드, 프랑스의 은화들도 중국에서 유통됐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편전쟁 이후부터 통일된 형태의 청나라 은화가 등장했고, 아편전쟁 직후부터 은화를 주조하는 기계가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화폐의 통일성을 갖추게 된다. 허나 아편전쟁 전후 영국이 어마어마한 양의 아편을 중국에 수출함에 따라 막대한 양의 은이 해외로 유출되면서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경제악화가 나타났다. 그 결과 국내의 은이 부족해지자 함풍제가 1853년에 경제안정책으로 청보보, 궁내부어음 등 종이로 만든 지폐를 발행하기도 했다.

12.3. 해외와의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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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에서 물건을 파는 영국 상선과 상인들
아직 명나라동녕국의 세력이 잔존하고 있던 청나라 초기에는 강력한 해금 정책을 실시해 민간 해외 무역도 모조리 틀어막았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조공 시스템을 이어받아 조공 무역을 실시했지만, 조공 무역 기간도 빡빡하게 규제했고 철저하게 조공무역을 감시해 함부로 과도한 양의 무역이 이뤄지지 않도록 차단했다. 그 조공무역마저도 대부분이 동남아 국가들이었으며 서양 국가들과의 교류는 더 단절된 상태였다. 중국을 찾아오는 서양 상인들은 오직 마카오에서만 교역할 수 있었고, 매년 중국에 출입이 허용된 서양 상선은 25척을 넘을 수 없었다. 1685년에야 외국 상인들이 미리 지정된 항구에서만 교역하는 것이 허용됐을 정도로 대단히 폐쇄적이었던 것.

그러나 명나라의 잔존세력들이 모두 흡수되고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오자, 청 조정도 닫아두었던 바다의 빗장을 서서히 풀어나갔다. 마카오에 광동세관, 장저우시에 복건세관, 닝보시에 절강세관, 양쯔강 하류 윈타이산 인근에 장쑤세관 이렇게 4개의 세관들을 설치했다. 이 4대 세관들은 각각 해당 성(省)의 10~12개의 세관항들을 관할했다. 이 세관들은 지정된 항구에서 외국상인들과의 무역을 인가하고 공행(公行) 등 중국의 대외무역 관리 시스템을 책임졌다.

해외 무역의 중심지는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등 남부 해안가의 성들이었다. 일본, 류큐, 동남아 국가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이 주 무역 대상이었다. 18세기부터는 영국, 프랑스, 미국과도 교역을 텄는데 개중에 영국이 압도적인 아편 거래량을 바탕으로 대중국 무역 대부분을 먹어치웠다. 서방 국가들은 중국의 비단, 차, 사탕수수에 환장했지만, 반대로 중국은 서양의 물건들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결국 초대형 흑자가 계속 쌓였고 대량의 은이 청나라로 유입되며 화폐 유통 증가, 물가 상승, 상업 번영 촉진 등 선순환이 일어났다. 중국 연안을 따라 취안저우, 장저우, 샤먼, 푸저우, 광저우 등이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고 청의 국내외 무역량이 최고조였던 시절에는 유럽 전체의 무역량을 다 합쳐도 중국에 비비기 어려울 정도였다.

중국은 그 막대한 영토 덕에 지역별로 산업을 특성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호광성과 장시성은 을 생산하지 않는 나머지 모든 성들에 쌀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비옥한 곡창지대였고, 저장성은 최고급 품질의 비단을 생산했으며 강남성은 염료, 먹, 수공예품에 특출났다. 윈난성, 산시성 등은 구리, 철, 청동 등 광산 지대가 깔려있었고 품종 좋은 노새, 가죽으로도 유명했다. 푸젠성은 최고급 설탕를 만들었고, 쓰촨성은 대황 같은 약재, 허브, 이국적인 물건들로 이름높았다. 청나라 관료들은 적극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어 경제발전에 이바지했고 청대의 시장은 매우 번창한 수준이었다. 당대 서양 상인들이 청 시장의 번성과 풍요로움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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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각국의 무역소가 주재하던 광저우의 모습
강희제 시절에 청은 일본에 각종 약재, 설탕, 물소 뿔, 자수, 목재 따위를 수출했으며 대신 진주, 구리, 일본도, 무늬가 그려진 종이, 도자기, 금, 일본 수공예품 따위를 수입했다. 마닐라와는 다량의 비단과 각종 자수, 카펫, 차, 도자기, 약재 따위를 주고받았다. 바타비아, 즉 당시 네덜란드 아래의 인도네시아로부터는 은과 향신료, 대모갑, 목재, 마노, 옥, 호박, 유럽산 직물 등 원자재들을 사들였고 대신 유럽으로 고급 약재, 각종 찻잎, 황금 면사, 사향, 보석, 옥, 수은, 도자기 따위를 판매했다. 당시 중국의 대유럽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은 차, 도자기, 비단과 일본 수공예품이었고, 청나라 역시 유럽에서 들여온 옷감을 일본에 판매하며 짭짤한 수입을 남겼다.

외국 상인들의 약탈과 불법 무역이 상시로 일어나자 건륭 22년인 1757년에 10년 간 '남해금지령'과 푸젠, 저장, 장쑤성에 대한 외국 상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초강수를 내렸다. 오직 광저우만을 남겨두고 모든 해외 무역은 광저우에서만 이뤄지도록 강제했는데 이를 '칸톤 체제'라고 한다. 그러나 푸젠, 저장, 장쑤의 세관들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되려 발전을 거듭해 이후 10년간 4개 항구의 총 무역량이 36,571,777냥을 달성, 그 규모와 무역액이 명나라 시절의 5배를 가뿐하게 능가했다. 특히 광저우의 경우 명나라 시절 교역량의 10배를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이러한 18세기 중국 무역의 번영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위기감을 불러왔을 정도였다. 다만 이같은 번영도 건륭제 사후, 아편의 수입으로 서양과 중국의 무역 관계가 역전되고 아편전쟁의 패배, 수많은 불평등조약의 체결로 끝장났고 청나라 후반의 무역은 서구열강 이권 침탈의 역사로 점철된다.

13.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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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최대의 티베트 불교 사찰인 옹화궁
청나라에서 가장 주류였던 종교는 불교유교였다. 불교의 경우, 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 역대 황제들은 티베트 불교를 제외하면 불교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불교 특유의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능은 인정했기에 딱히 견제하거나 때려잡지 않고 놔두었다. 청나라의 모든 황제들은 종종 승려들과 교류했고 특히 순치제는 본인이 아예 머리를 깎고 출가했으며, 그의 후궁이었던 효헌단경황후 역시 순치제를 따라 불가에 귀의했을 정도로 연이 깊었다. 강희제는 남순을 떠날 때마다 유명한 고찰을 방문해 특별히 절에 친필을 써주었으며, 옹정제는 스스로를 선사로 여겨 금강경을 읽고 그 글귀를 인용해 책 만들기를 즐겼다.

그러나 청 황실이 무조건적으로 불교의 뒷배를 봐주었던 것도 아니다. 불교의 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국가 입장에서 좋을 것이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출가해 승려가 되면 정부의 과세 대상이 줄어들고, 사찰의 입김이 세졌다. 범법자들은 공권력을 피해 사찰로 숨어들고선 훗날 더큰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때문에 청 조정은 불교를 지원하는 동시에 올가미를 씌워 불교를 통제했다. 청나라는 승관(僧綱)을 두어 불교를 관의 통제 아래에 두었고, 도첩(度牒)을 발행해 승려의 수를 통제했으며 무허가 사찰을 폐쇄했다. 불교는 정부의 관리 아래에서 점차 세속화되었고 종파 개념도 쇠퇴해 정토종과 율종 정도를 빼면 모조리 원형을 잃어갔다. 건륭제 때는 새 사찰을 짓는 것을 금지해버렸고 승려의 수도 가혹하게 제한을 걸었다. 학자 관료들은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지만 어디까지나 그 원리에 대한 사상적 토론이었을 뿐 불교 자체를 진흥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다.

허나 티베트 불교는 청대 들어서 다시 흥성해졌다. 청나라가 내몽골, 칭하이, 티베트 일대를 안정화하기 위해서 일부러 티베트 불교를 그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순치 8년에는 베이징에 100명 이상의 라마승들이 머무는 거대한 티베트 불교 사찰이 지어졌고, 옹정제는 라마승들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올라 자신의 궁인 옹화궁을 티베트 불교 사찰로 바꾸기까지 했다. 옹정제는 즉위 5년만에 몽골의 활불인 젭춘담바 후툭투를 위해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고 은 10만냥을 하사했다. 그는 젬춘담바 후툭투를 크게 신임해 티베트 본토의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와 동격으로 대접했다. 다만 건륭제 시기 들어서는 그 대접이 조금씩 떨어졌다. 건륭제도 여전히 겉으로는 티베트 불교를 숭상하고 달라이 라마를 왕의 격으로 대우했으나, 한편으로는 이번원을 세워 고삐를 단단히 채웠으며 쓰촨의 교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부터는 점차 대우가 소홀해졌다. 티베트 불교의 지위는 높았으나 원나라에 비하면 약했다.

도교는 청나라 대 들어서 가장 많이 쇠퇴한 종교들 중 하나다. 송나라 때 가장 성행했던 도교는 원나라와 명나라 때도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다. 청나라 황실도 도교를 믿었으나 이전 왕조들만큼 인기는 없었고 도교는 명나라 멸망 이래로 점차 세가 줄어들었다. 겔룩파 불교를 믿던 황실은 도교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고, 청나라 조정은 반란을 막기 위해 충과 효를 중시하는 성리학을 부활시켰다. 이렇게 부활한 성리학자들은 미신에 가까운 도교를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중국에 진출하며 도교는 설 자리가 날로 좁아졌다. 청대 중국 도교가 쇠락한 가장 큰 원인은 결국 시대의 변화다. 상품경제의 발전, 세계화, 과학 기술의 도입과 진보, 신문화와 신사상의 등장이라는 거대한 대격변 속에서 도교의 사상과 교리는 정체되어 있었다. 도교 상층부는 부패해 대중들의 신망을 잃었고, 도교는 점점 불교와 유교 등과 합쳐지며 도교만의 특색을 잃어갔던 것이다. 게다가 정통 도교가 점차 민속신앙 수준으로 추락해 원형을 보존하지 못했던 것도 원인이 컸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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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크 호자의 무덤 천문을 관측하는 예수회 선교사
이슬람교는 원나라 이래로 서부의 무슬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량유입되면서 세를 넓혀나갔다. 무슬림들은 주로 간쑤성, 산시성, 쓰촨성, 산시성, 즈리성, 광둥성, 윈난성 등지에 거주했다. 청나라 조정은 무슬림들에 대해 종교의 자유와 자유방임주의를 내세우며 이슬람 신앙을 존중하고 국법으로 다스렸다. 허나 청나라는 원나라, 명나라에 비하면 무슬림들에 가혹한 편이었다. 청나라는 무슬림들의 귀환을 막았고 죄를 저질렀을 때에도 일반인에 비해 더 세게 처벌했다. 또한 가족이 죄를 저질러도 무슬림은 부양가족으로 인정될 수 없었다. 신장 지방에서도 차별이 두드러져서 무슬림들과 한족이 사는 곳은 엄격하게 분리되었고 통혼도 금지됐다. 무슬림들은 청나라 사회에서 일반인과 다른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명말부터 가톨릭 역시 예수회 등의 선교로 유입되었다. 아담 샬이나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진천옥의 관리로 임명되어 천문 등 학문을 연구하는 동시에 설교를 펼쳤다. 천문과 역법,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강희제가 이들의 유용함을 알아채고 이들의 설교를 용납했던 것. 뿐만 아니라 이들은 통역사 역할을 맡아 외교분쟁을 해결했으며 네르친스크 조약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점이 많았던 덕에 청나라는 초기에 중원에 정착한 서양 선교사들에 대해 꽤나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그중에서도 순치제는 아담 샬을 크게 신임해 그를 만주어로 '할아버지'라는 뜻의 '마파'라 부른 것으로 유명하다.

허나 좋았던 관계도 강희제 중후반부터 안좋아졌다. 100년 동안 중국에 뿌리내리며 현지화가 되어버린 예수회는 중국의 풍습을 존중해 제사나 조상 숭배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는데, 문제는 17세기 말 등장한 도미니코회가 이들을 비난하며 모든 제사와 공자 숭배를 금해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 이는 마테오 리치 이래 모든 예수회 선교사들이 견지해온 현지화 정책과는 전혀 반대되는 강경한 주장이었다. 당연히 청 조정은 격노했고 1700년 강희제는 '공자와 조상을 공경하는 것은 조상과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지 종교적 미신이 아니다'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양측의 갈등은 날로 악화되어 청 정부는 선교사들이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국 내 포교를 금지시킨다는 명을 내렸고, 1722년 옹정제는 아예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으며 도광제는 진천옥에도 선교사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다만 아예 융통성 없게 꽉 틀어막았던 건 아니라서, 1807년에도 영국 개신교 선교사가 광저우에서 개인적으로 포교를 하는 등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정부는 공식적으로 기독교 금지령을 해제하지는 않았으나, 이때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기독교 선교의 자유는 인정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몰려와 곳곳에서 포교를 벌이며 빠르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이들은 선교 사업 외에도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며 중국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허나 일부 서양 선교사들은 인종적 우월감과 선민사상을 띠며 토지를 강제로 압수했고 제사 중단을 강요하는가하면, 기독교도 범죄자를 무조건적으로 보호하고 중국 내정에 대놓고 간섭하는 등 분란을 일으켰다. 이에 분노한 청 조정은 가톨릭 선교를 통제하려고 들었고 청나라 민간사회에서도 1870년대 천진 교안 등의 사건이나 의화단의 난 등으로 반기독교 박해가 일어나는 등[88] 불교나 이슬람교에 비해 교세 확장에 어려움이 많았다. 홍수전이 기독교에 기반한 사상을 내걸고 봉기한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면서 결국 기독교 역시 청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4.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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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태화전의 전경
청 시기의 문화는 가히 중국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기들 중 하나였다. 특히 청나라 조정은 한족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목적으로 문화를 진흥시켰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 시기의 《강희자전》, 옹정제 시기의 《고금도서집성》, 건륭제 시기의 《사고전서》 등이다. 청나라는 강희제 이후로 유교로 대표되는 한족 문화 보급에 앞장섰으며 만주족 지배계급은 오히려 앞장서서 중국 고전과 유교 사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초기부터 중국어만주어를 병행해 공문을 작성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만주인과 만주 문화는 점차 중국에 동화되어갔다.

청나라 때도 사회적으로는 일단 기본적으로 유교식 이념들을 깔고 들어갔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중화의 합법한 계승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유교를 더더욱 강조했고, 어떤 면에서는 명나라보다도 엄격한 경우가 잦았다. 당연히 부계중심적인 사회였고,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남성과 함부로 이혼할 수 없었으며[89] 사회적으로 그 제약도 상당히 심했다.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재산을 소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 제사를 지내거나 재산을 상속받는 문제들에도 남자에 비해 훨씬 하등한 대접을 받았다. 나중에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러한 남녀불평등을 타파한다고 했으나, 이 오랜 폐해는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되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홍등가, 동성애, 매춘 등 성 관련 풍습들은 청나라 초기에 들어서 크게 탄압받았다. 강희제나 옹정제 등은 황제가 주도해서 이들을 때려잡았고, 이때문에 중국의 매춘 산업은 청나라 초기에 쇠퇴하였다. 허나 인간의 욕망을 억누를 수는 없었던지, 건륭제 시기 말에 이르자 홍등가가 다시 대대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톈진, 충칭, 항커우 등의 대도시들에는 거대한 규모의 매춘굴들이 자리잡았으며 고위 관료들부터 평민들까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상하이는 19세기 들어 서양 교류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매춘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18세기 들어서는 젊은 과부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당시 청나라 사회에서는 어린 여성들이 나이 많은 고위급 남성들에게 시집을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는데, 이 남편들이 결혼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버림에 따라 이 어린 신부들이 과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여성들은 가문 내에서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가 없었는데, 만일 남편이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평생 아이를 낳아 기를 희망도 없이 홀과부로 늙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대를 이을 아이를 낳은 몸도 아니니 가문 내에서 잘해줄 리도 없었다. 청나라 조정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지해서 함부로 어린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는 집들에게 상을 내리며 이 풍습을 없애보려 노력하였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나이 많은 남편이 죽으면 함께 죽어 정조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열녀다'라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청나라 사회는 갈수록 타락의 길로 빠져들어갔다.

다만 이 내용들을 보고 청나라 시대에 여성 인권이 바닥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에도 문제가 있다. 청나라 시기에는 무역과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가문의 남성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이때 남자들이 사업 등의 이유로 집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집에 남아있던 아내가 집안의 경제권을 쥐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여성들은 남아도는 시간과 돈으로 사회적 활동에 참가하거나 사찰의 법회 등에 참석하고는 했다. 경우에 따라 달랐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한편 청대에는 수많은 한족 여성들이 만주족 남성들의 첩이나 노리개가 되었다. 태평천국 격문에도 언급될 정도이다. 만주족 여성과 한족 남성의 통혼은 청나라 후기 때까지 법률적으로 엄격히 금지된걸 생각하면 청나라의 피지배 민족에 대한 위계질서는 원나라 이상으로 엄격했다고 간주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과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 및 수명성(隨名姓)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만주족의 성씨를 참고하자.

한국에서 "너 왜 그런 (노출심한)옷을 입고다니냐?"같은 유교적인 말에 "지금이 조선시대야?"라는 표현을 쓰듯 현대 중국에선 "정신 좀 차려라, 청나라는 이미 망했어."라는 표현이 종종 쓰인다.[90] 한국의 조선처럼 가장 가까운 전통적인 전근대 시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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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방이지 주지유
청나라는 이전 왕조들의 모든 학문과 고서들을 집대성해 재편찬하며 중국 학문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렇게 옛 왕조들의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학자들은 명나라가 망한 원인을 성리학의 위선과 공허함에서 찾았다. 그랬기에 청나라 학계는 더 실용적인 학문에 중점을 두었고,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양명학성리학에서 탈피해 실용주의를 기반으로 한 고증학이 등장했다. 고증학은 객관적인 실천을 강조하고 검증을 추구하는 과학성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문자, 음운, 훈고를 기반으로 하며 한나라의 영향을 받았다하여 한학(漢學)이라고도 한다.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이 3명은 명말청초의 3대 유학자로 불리며 방이지, 주지유를 더해서 청초오대사(清初五大師)라 부른다.

고염무는 명나라의 성리학을 실학으로 대체하고 학자들에게 육경을 직접 연구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만인이 세상 흥망성쇠에 관여한다'라 주장하며 《일지록(日知錄)》, 《음학오서(音學五書)》를 저술, 이론을 발전시켜 건가학파(乾嘉學派)를 창시했다. 황종희는 《명유학안(明儒學案)》, 《송원학안(宋元學案)》 등을 저술했다. 그는 기존의 성리학을 거부하고 양명학을 옹호하며 성실과 주의를 중요시했다. 황종희의 사상은 훗날 저동학파(浙東學派)로 이어진다. 한편 왕부지는 실천이 곧 지식의 기초임을 강조하여 역사적 흐름에는 규칙성이 없으며 이(理)와 세(勢)는 서로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후일 선산학(船山學)으로 발전했고, 《선산유서(船山遺書)》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펴내지기도 했다.

의외로 '천하의 주인은 인민'이라는 민주주의적인 사상이 등장하기도 했다. 명말청초의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이 이 민권사상을 옹호했고 특히 황종희는 전제군주정을 비판하는, 천하가 주인이며 황제는 그저 손님일 뿐이라는 내용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를 쓰기도 했다. 이는 청말 혁명당에서 큰 지지를 받았고 일부 학자들은 황종희를 중국 민주주의의 선각자라 부를 정도다. 이 분야의 끝판왕인 학자 당견(唐甄)은 《잠서(潛書)》를 지어 청나라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청나라가 들어선 이래 50년간 천하가 빈곤해졌고 이상기후가 일어났으며 기근이 연이었다고 조목조목 비난했다. 특히 황제가 모든 악의 근원이며 진시황 이래로 모든 황제는 군주이자 도둑이다라는, 당시로서는 언급도 힘든 주장을 대놓고 적은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청대의 실용적인 학풍도 한계가 있기는 했다. 청 중기 들어서 청 학자들은 천문, 지리, 금석, 석문에 이르기까지 옛 사람들이 남긴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해석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학계는 크게 오파(吳派)와 환양파(皖兩派)로 나뉘었는데, 혜동(惠棟), 단옥재(段玉裁), 왕인지(王引之), 왕염손(王念孫) 등이 이끄는 오파는 지식과 옛것을 숭상했으며 대진(戴震)이 이끄는 환양파는 오직 사실에 근거해서 진리를 탐구했고 '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라는 이념을 받들어 문헌 연구와 사물에만 집중했다.[91]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청나라 학계는 점차 지엽적인 것에 매몰되었고, 형식적인 배움에 치우쳐졌으며 과거에 빠져 현재를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이때문에 역사가 장학성(章學誠)은 육경 역시 역사의 일부라 주장하며 육경의 원리를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는 현실적인 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아편전쟁 이후부터는 대량의 서양 학문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고증학과 비평학은 점차 쇠퇴했다.[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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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시대에 탄생한 경극
중국의 상징 중 하나인 경극도 청나라 시대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명나라 시절의 곤극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경극은 대강 건륭제가경제 시절에 현재의 모습을 갖췄으며 경극(京劇)이라는 명칭은 광서제 2년인 1876년에 처음 거론됐다. 건륭 55년인 1790년에 안후이성 4대 극단이 베이징에 입성한 이래로 50~60년 간 기존의 곤극, 한극 등 다양한 연극들과 합쳐지며 우리가 볼 수 있는 '경극'이 중국 최고의 연극 장르로 탄생한 것이다. 줄거리의 풍부함, 배우의 규모, 극단의 수, 인기, 영향력의 깊이 모두 중국 역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경극은 중국의 종합 공연예술로, 노래, 낭송, 연기, 격투, 춤을 모두 활용하여 캐릭터의 희로애락을 드러낸다. 역할은 생, 단, 정, 축의 4가지로 나뉘며 충성과 배신,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등 이분법적이고 생생한 이미지가 특징이다.

이 시대의 문학 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대륙에서는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하며,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로서 다양한 사회적 상황과 캐릭터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내어 중국 고전소설의 정점이라 평가받는다. 《홍루몽》 외에도 《요재지이》, 《유림외사》도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청나라 문학 작품이다. 특히 《요재지이》는 중국의 판타지 소설 모음집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귀신들이 인간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그 특징이며 믿거나말거나 식의 구전 이야기[93]들이 많이 실려 있다. 당대 청나라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구조는 느슨하나 훌륭한 풍자소설 《유림외사》와 이에 영향을 받아 지어진, 공직사회의 추악함을 폭로한 《노잔유기》도 유명하다. 허나 이 자유로운 분위기는 오직 순수 문학이나 소설에 한정되어서, 만주족의 권위를 침범하거나 청나라에 반대되는 내용들은 얄짤없이 검열받았다. 건륭제 시기에 특히 문자의 옥이 많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중국 문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기도 했다.

는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는 문학 장르로 청대에 크게 번성했다. 황제나 조정에서 직접 시들을 가려뽑거나 창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어정전당시(御定全唐詩)》, 《어선당시(御選唐詩)》, 《어선송금원명사조시(御選宋金元明四朝詩)》, 《어정패문재영물시선(御定佩文齋詠物詩選)》, 《어정역대제서시류(御定歷代題畫詩類)》, 《어선당송시순(御選唐宋詩醇)》,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 등이 있으며 이렇게 황제가 친히 가려뽑은 시집들을 '《어제시집(御製詩集)》'이라 불렀다. 특히 건륭제가 이 시짓기를 즐겨서 일생동안 5권의 어제시를 지었으며 총 10만 수가 넘는 작품을 남겼다.[94] 황제 뿐만 아니라 친왕들도 시를 즐겨 친왕들이 지은 시들을 모아 《신악집(宸萼集)》이라는 책으로 펴내곤 했다. 청대에는 황제, 고관대작, 평민, 심지어 여성들까지 사회 각계각층에서 모두 시짓기를 즐겼다. 청나라는 시 문학수집과 비평의 시대로 현대 중국 고전시 대다수가《전당시(全唐詩)》,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같은 시집들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파됐다.

청 초기에는 전겸익(錢謙益), 오위업(吳偉業), 왕사정(王士禎) 등이 청대 시문학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강희제 중후반부터는 강남 지방에 왕식단(王式丹)、왕정정(吳廷楨)、궁홍력(宮鴻曆)、서앙발(徐昂發)、전명세(錢名世)、장대수(張大受)、궁륜(管棆)、오사옥(吳士玉)、고사립(顧嗣立)、이필항(李必恆)、장정석(蔣廷錫)、무원(繆沅)、왕도병(王圖炳)、서영정(徐永宣)、곽원서(郭元𨥤) 이렇게 15명이 등장해 빼어난 재능을 자랑했는데 이들을 묶어 강좌십오자(江左十五子)라 불렀다. 건륭제 시대에는 원매(袁枚), 장사전(蔣士銓), 조익(趙翼) 이렇게 3명을 묶어 강좌의 3대 시인이라 일컬었으며 동시대에 황경인(黃景仁), 정섭(鄭板橋) 등도 이름을 날렸다. 가경과 도광 연간에는 문인들이 모여 학회를 만들었고, 특히 수도 베이징양저우를 중심으로 학회가 번성했다. 이 시기의 대표 문인으로는 고채(顧蓴), 하수서(夏修恕), 정은택(程恩澤), 도주(陶澍), 주천(朱珔), 오춘(吳椿), 양장거(梁章鉅), 호승공(胡承珙), 이언장(李彥章), 유사관(劉嗣綰), 주지기(周之琦), 임패서(林則徐), 서보선(徐寶善), 탁병염(卓秉恬) 등이 있다.

변법자강운동의 격동을 거치면서 청나라 사회의 시풍도 크게 바뀌었다. 이 시대의 대표 문인이 바로 황준헌(黃遵憲)으로 당대 사회를 반영한 사회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담사동(譚嗣同), 당재상(唐才常), 강유위(康有為), 장지유(蔣智由), 구봉갑(丘逢甲), 하종우(夏曾佑) 등도 이때에 이름을 남긴 시인들이다. 청 말기에 이르러서는 진삼립(陳三立), 진연(陳衍), 심회식(沈曾植)이 이끄는 시체인 동광체(同光體)가 발전해 두각을 드러내어 1911년 신해혁명 이후까지도 지속됐다. 청나라의 시론은 심덕잠의 격조설(格調說), 왕사정의 신운설(神韻說), 원매의 성령설(性靈說), 옹방강의 기리설(肌理說) 등이 있다.

운문의 일종인 도 유행했다. 사(詞)는 당나라 시대에 만들어져 송나라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원나라, 명나라 때 계속 쇠퇴한 문학 장르인데, 청 초기에 이 사가 다시 부흥을 맞이했다. 강희제 시절에는 나라 싱더(納蘭性德), 주이존(朱彝尊), 진유숭(陳維崧) 이렇게 3명을 묶어서 '청사삼대가'라 불렀다. 나중에는 진유숭이 이끄는 양선사파(陽羨詞派)와 주이존이 이끄는 저서사파(浙西詞派)로 분화되며 '사(詞)'에 대한 연구가 하나의 갈래로 자리잡았다. 만수(萬樹)는 사의 가락과 음을 정리해 사율로 정리했으며 사에 관심이 많던 강희제는 말년에 왕혁청(王奕清)을 시켜 《어정사보(御定詞譜)》를 편찬했고, 이는 청대 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건륭제가경제 때에는 상주사파(常州詞派)가 기존의 저서사파에 반발해 새로 생겨났고, 유명한 시인들이 계속 등장해 청말까지 사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갔다. 이때문에 청나라는 송나라에 이어 '사의 제2의 전성기'라 불릴 정도로 사의 인기가 많았다고.

산문도 있었다. 청대 초기에는 장대(張岱), 이어(李漁), 원매(袁枚)를 중심으로 솔직하고 낭만적인 수필들이 주류였고 후방역(侯方域), 위희(魏禧), 왕완(汪琬)을 묶어 '청초산문삼대가'라 일컫는다. 허나 도학자들은 이런 자유로운 풍조의 수필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반발로 당송 시대의 문체인 동성파(桐城派)를 부활시켰다. 방포(方苞), 유대괴(劉大櫆). 요내(姚鼐) 이 3명이 동성파 부활을 주도했는데, 특히 요내는 동성파를 이끌며 내용이 합리적인가(의리), 자료가 정확한가(고증), 발음이 정확한가(사장), 이 3가지 요소를 최우선으로 꼽으며 형식적인 요소를 중시했다. 이들은 형식과 양식을 최우선시해 저속함과 속어를 기피하고 우아하고 깨끗한 언어를 미덕으로 여겼다. 이 이후 청 산문계는 증국번의 상향파(湘鄉派), 윤정과 장회언 등의 양호파(陽湖派)로 분화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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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종승사원 이화원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열하피서산장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한족의 양식이 많은 것에 반해, 청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기본적으로 한족의 건축방식을 답습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동군연합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나 티베트 등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다. 또한 화려함과 정교함을 숭상하여 이전보다도 거대한 크기의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고,[95] 색유리를 사용하여 건물을 꾸미는 것이 유행했다. 다른 민족들의 문화에 대하여 야만적이라고 배척했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 비하여, 자신들 또한 이민족이었던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다른 문화에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앞서 말한 열하의 피서산장이다. 피서산장에 있는 보타종승사원(普陀宗乘之庙)은 티베트포탈라궁을 본떠 지었는데, 다른 민족들의 문화를 천시하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사례였다.

청 대의 의복은 만주족의 전통의상인 챵꽈(남성)와 치파오(여성)이다. 물론 한족의 전통 의상인 한푸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기는 하였으나, 청 황실이 만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만한차별을 엄격히 하면서 아무래도 한족의 영향보다는 만주족의 의복과 더 닮아있다. 만주족의 기본 의상인 치파오는 기본적으로 원피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허리 아래쪽에 옆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족의 한푸는 기본적으로 하늘하늘하고 소매가 넓으며 품이 커서 여유가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치파오는 상대적으로 더 몸에 딱 붙어 굴곡을 강조하고 몸매를 더 잘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특히 현대의 치파오는 1910~20년대 서양식 의복의 전래에 따라 근대적으로 개량된 것으로, 청나라 말기에 가서야 등장한 것이기에 청나라 대의 보편적인 의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청나라는 입관 이후 한족 이후 원나라의 선례를 밟지 않기 위하여 피지배계급이었던 한족의 의복 문화를 근절하고 만주족의 전통 복식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중화 사상을 중심으로 하던 한족에게는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청나라 조정도 할 수 없이 타협,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 원칙을 내세워 남성의 경우에는 무조건적으로 만주족의 복식을 답습하되, 여성과 도사, 승려 등의 경우에는 일부 한족의 복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청나라가 오래 이어지며 만주족의 통치가 당연시되기 시작하자, 점차 여성의 복식 역시 만주족의 복식을 자연스레 닮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청 말에는 명나라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였다.

청나라 일반 남성의 경우, 장삼이나 장포(長袍)를 기본적으로 걸친 후, 그 위에 조끼 형태의 마과나 마갑 등을 덧대어 입는 경우가 흔했다. 참고로 장삼은 긴 원피스 형태의 남성용 치파오라고 할 수 있는 옷으로, 옆트임이 존재한다. 또한 마과나 마갑의 경우 본디 만주족이 말을 탈 때 보온용으로 위에 걸치던 조끼 형태의 단상의였는데, 청 초기에는 만주족의 특권으로 여겨져 함부로 입을 수 없었으나 옹정제 연간에 한족 일반 백성들도 입는 것이 허가되었다.[96] 한편 청나라 여성이 입었던 것이 그 유명한 치파오인데, 양옆에만 트임을 주며 허리를 매지 않는 형태였다. 소매끝과 옷깃, 밑단 등에 다양한 색의 천을 달아 포인트를 주었으며, 특히 목선의 경우 둥근 형태가 기본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깃이 올라가는 형태를 띠며 점점 화려해졌다. 또한 그 위에 비갑이나 피풍이라고 하여 소매가 없는 조끼 비슷한 방한용 겉옷을 두르기도 하였으며, 보통 신분이 높을수록 이 비갑과 피풍의 무늬가 화려한 경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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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민중들의 복식
청나라 시대 여성들의 독특한 머리 모양은 '양파두'라고 부른다. 정수리에서 머리를 길게 두 갈래로 가른 다음, 편방이라는 비녀에 감아 만든 것이다.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시간과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머리 모양이라서 평민들보다는 귀족층이나 돈많은 세가들의 여인들이 주로 하던 머리 스타일이었다. 한편 남성이 쓰고 있는 원뿔 모양의 모자는 '양모'라고 부르며, 말꼬리털 등을 붉은색으로 염색한 실을 등나무처럼 가벼운 재질로 만든 원뿔모자에 늘어뜨린 것이다. 관리가 입고있는 의복은 '조복'이라고 부르며, 현대에서의 군대 예복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종묘제례, 즉위식, 조회 등 중대사에서만 간간히 입고 나오는 의식용 복장이었다. 청나라 관리들이 어깨에 두르고 있는 독특한 모양의 장식도 청나라 시대 인물들이 굉장히 많이 입고 다니던 것인데, 이를 '피령'이라고 부르며, 길복이나 조복 등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걸치고 다니는 일종의 예식용 칼라 정도로 보면 된다. [97] 관리들이 매는 목걸이의 경우, '조주'라고 따로 구분해서 부르며 108개의 구슬로 이루어져 있다. 구슬들 사이사이에 '불두'라고 하여 좀더 크고 재질이 다른 구슬들을 정확히 4개를 끼우며, 이는 1년의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조주의 뒤에는 탑모양의 장식과 구슬들을 꿰어만든 기다란 끈을 늘어뜨렸는데, 이를 '배추'라고 불렀다. 신분과 관직에 따라 조주의 품질 역시 달라졌으며, 만인지상의 황제의 경우에는 상아로 만든 조주에 황금을 장식하여 사용했다고도 한다.

또한 현대까지도 중국의 오랜 악습으로 남아있는 전족의 경우, 만주족의 전통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한족의 전통양식이다. 강희제는 오히려 이 전족이 여성의 노동력을 하락시켜 국가에 손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전족을 금할 정도였으나,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만주족 가문들이 이 풍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근대 시기까지 전해져 왔던 것이다.

흔히 '중국 모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사발 모양의 모자는 청나라의 관모(官帽)인데, 명나라의 사모, 복두 등과 그 형태가 확연히 달라 '청대관모(清代官帽)라고 따로 부른다. 겨울에는 벨벳으로 안을 덧댔고, 여름에는 등나무나 비슷한 가벼운 재질로 삿갓형 관모를 만들어 사용했다. 모자 위에 있는 단추나 꼭지 부분은 공식적인 석상이거나 예식 상에서만 달았고, 사적인 자리거나 일상에서는 떼고 모자만 썼다. 특히 고위 관료들은 모자 위에 공작새 깃털이나 붉은 술 장식도 달았는데, 이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대단한 명예였다. 공작새 깃털은 1-3개까지 달 수 있었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공작 깃털을 달 수 있었다.

모자의 꼭지 부분의 색깔과 장식은 계급에 따라 달라졌다. 고위급 관료들은 흔히 진주를 즐겨썼고, 1품 관리들은 루비 등 붉은색 투명 홍옥을, 2품은 산호 등 불투명한 붉은 홍옥을, 3품은 사파이어 등 투명한 푸른 옥을, 4품은 불투명한 푸른 옥을, 5품은 수정 같은 투명한 백색 보석을, 6품은 진주 등의 보석을, 7품부터 9품까지는 종종 황금이나 자줏빛 보석을 즐겨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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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도] [하화수조도] [방왕유강산운제] [묵죽석화도] [송매두학도] [합마선인도]
청대의 회화는 주로 문인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산수화와 수묵화가 성행했다. 청나라의 가장 유명한 산수화가로는 '정통파(正統派)'의 왕시민(王時敏)、왕휘(王翬)、왕감(王鑒), 왕원기(王原祁)가 있는데, 이 넷을 합쳐서 사왕(四王)이라 일컫는다. 이 사왕에다가 오력(吳歷), 윤수평(惲壽平)을 더해서 청초 6대 거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중 특히 윤수평은 먹선을 사용하지 않고 윤곽선 없이 색채나 수묵을 그리는 기법 '몰골법(沒骨法)'을 계승해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이름이 높다. 윤소평은 옛 북송 시대의 대가 서숭사(徐崇嗣)의 몰골법을 이어받아 추일계(鄒一桂) 등과 함께 상주서파(常州畫派)를 이끌기도 했다.

다만 청나라 시대의 그림들은 원나라와 명나라 시절에 비하면 대체적으로 평범한 수준에 그쳤고, 특히 독창적인 화풍을 만든다기보다는 기존의 화풍을 따라하거나 복제하는 풍조가 있어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강희제건륭제 시기까지 청 초중기까지는 색다른 시도를 하는 화가들이 존재하긴 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청 초기 사승이라 불리는 팔대산인(八大山人)、석도(石濤)、점강(漸江), 곤잔(髡殘) 등의 유민파(遺民派) 화가들이나 '금릉팔가(金陵八家)'의 8명의 화가들, 정섭과 진농이 이끄는 양저우의 양주팔괴(揚州八怪)로, 자유롭고 독창적인 화풍으로 유명했다. 청의 궁정화원들 중에서는 주세페 카스틸리오네가 가장 유명했고 초병정(焦秉貞), 영매(冷枚) 등의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서양식 그림을 그렸다. 청말에는 임백년(任伯年)、오창석(吳昌碩)、거염(居廉)이 그린 사여화조화, 양류청(楊柳青)、도화(桃花)가 그린 연생귀자(蓮生貴子), 어약용문(魚躍龍門) 같은 민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청나라의 금서(禁書)는 이전 왕조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많은 수준이었다. 청나라 시대 중국에는 고대 진시황분서갱유에 버금갈 정도로 촘촘하고 살벌한 규제가 가해졌다. 청나라의 위서 수는 명나라와 비교하면 29.2배 많았고 금지된 과거시문은 27.2배, 소설은 10.2배, 요서로 지정된 책은 8배, 금서의 총 규모는 무려 12.6배 더 많았다. 이를 문자의 옥이라 부른다. 청나라가 금서를 규제한 기간은 홍타이지부터 건륭제 시절까지 약 170년 정도로 명나라의 277년에 비하면 훨씬 짧은 수준인데, 명대에 비해 그 금서의 규모가 거의 10배게 이르렀던걸 생각해보면 청나라가 얼마나 강력한 사상 단속에 나섰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15.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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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흠천감의 재현모형
전반적으로 청나라의 과학기술은 서양에 뒤처졌고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더욱 심해졌다. 청나라 초창기까지만 해도 청의 지배계급과 일부 학자들이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과 서양의 문화교류에 활발히 참여했고, 청 조정은 이렇게 얻어낸 새 지식들을 사회에 도입할 수 있었다. 허나 서양과의 교류는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유입을 불러왔고, 청나라가 기독교의 전래를 막기 위해 선교사들의 출입을 금지하며 서양과 중국의 학문 교류는 점점 단절됐다. 유럽이 눈부신 과학발전을 성취하고 있던 와중 중국의 과학기술은 낙후된 상태로 남았다. 허나 아예 발전이 없다거나 암흑시대였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수학, 천문학, 역법 등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는데, 중국 5천년 역사에 기록할만한 수학, 천문학, 역법학자들의 44%가 청나라 출신이다.[104]

청 초기 과학기술은 서양 선교사들이 주도했다. 청군이 베이징에 입성한 이후에도 아담 샬과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기독교를 포교하는 동시에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전파했다. 이들은 뛰어난 지식을 인정받아 황실의 천문관측기관인 흠천감(欽天監)에 임명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학문을 연구했다.[105] 천문, 미적분, 포병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강희제는 서구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황제는 선교사들을 시켜 10년에 걸쳐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제작토록 했고 이는 위도와 경도 등 서구식 측량법을 사용한 최초의 중국 지도였다.[106] 달력 역시 선교사들의 공이 컸다. 새 달력이 필요해지자 청 조정은 아담 샬이 만든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을 바탕으로 새 달력을 만들어 반포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시헌력이다.

서양 선교사들은 순치에서 건륭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명령을 받아 적도와 경도, 위도, 황도, 경도 등의 개념을 확립하고 수많은 천문관측도구들을 제작했다. 이와 동시에 천문학 관련 서적들이 대거 편찬되며 중국의 천문학 수준은 크게 발전했고 역법은 갈수록 정교하고 정확해져갔다.[107] 물리학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명말부터 서구의 물리학 지식이 서서히 퍼지고 있었는데 강희제 시대의 학자 대진이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관한 책을 썼고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는 '희조정안(熙朝定案)'을 집필해 다양한 원리들을 소개했다. 페르비스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험기도설《驗氣圖說》과 형성이추《形性理推》를 집필하여 서양의 광학을 소개했으며, 이에 자극받은 중국 학계는 손운구(孫雲球)의 경사(鏡史)나 정복광(鄭復光)의 경경령치(鏡鏡詅痴) 등 다양한 연구서를 펴냈다. 이 과정에서 발달한 서구의 도구에 매료된 황이장(黃履莊), 황이(黃履), 손현구(孫玄球) 등의 학자들이 중국 물리학 실험과 기계 도구 제조를 상당한 경지로 올려놓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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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화기를 사용하는 청군의 모습
청나라는 화기를 장려한 국가였다.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벨기에 출신 선교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에게 남중국에서 쓰기 용이하고 전장에서 기동성이 좋은 대포를 만들라 명령했다. 페르비스트는 황제의 뜻에 따라 신통도설(神威圖說)이라는 책을 지어 바쳤다. 강희제는 40년 동안 신위무적장군, 금룡포, 제승장군, 위원장군 등 수많은 화기들을 만들어 보급했다. 청나라는 지속적으로 화기를 개량하여 건륭 21년인 1756년에 편찬된 '흠정공부패예조화기식(欽定工部則例造火器式)'을 보면 무려 85종의 화기가 소개되어있으며 같은해에 홍이포, 불랑기포, 조총 이렇게 3개의 무기를 표준으로 삼았다. 청군의 화기 무장 비율은 명나라보다도 높았으며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때까지 조총과 선철, 청동포를 중심으로 기동했다. 청군의 총기 무장률은 무려 50~60%에 달했다.

청나라가 초반을 지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한족에게도 냉병기 소지는 허용되었으나 총기, 특히 중화기만큼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청 조정은 법적으로 총기류의 민간 제조를 엄격히 금했으나 실제로 그 광활한 대륙에서 몰래 제조하는 것까지 다 단속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청나라 말엽으로 갈수록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더 공공연히 총기를 볼 수 있었고 대놓고 제조 및 판매하는 모습도 흔해졌다. 민간인들은 사냥용 혹은 호신용으로 총기를 구비했고 수도 베이징에는 개인적으로 총기를 제조하는 대장장이까지 있었다. 청나라 조정은 말기로 갈수록 총기를 갖춘 자경단이 무능한 관군을 대신해 치안을 유지해주기를 바랐지만, 반대로 민간의 무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썩 달갑잖게 여겼기에 멸망할 때까지 총기 허용과 금지 사이의 딜레마 사이에서 갈등해야만 했다.

농업 분야에서도 기술의 발전이 이뤄졌다. 역대 왕조들의 농경서를 모아 다시 정리해 편찬한 '정사통고(授時通考)', 식물들을 정리해 분류한 광군방(廣群芳譜), 부농서(補農書) 등 다양한 농경서들이 이때 만들어져 각종 작물의 재배와 농업생산기술을 구체적으로 논했다. 청나라 시대는 중국의 전통 농업이 최고조로 발전했던 시기였다. 중국의 모든 왕조들을 통틀어 총 714권의 농경서가 편찬되었는데 개중 483권의 책이 청나라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청대 이전 왕조들의 농경서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무려 2.09배나 많은 수준. 뿐만 아니라 메뚜기의 침략을 방제하는 기술 역시 활발히 연구되는 등 청나라의 농업 기술은 큰 발전을 이룩했다.

청대의 의술은 명나라의 것을 계승해 더 발전시킨 느낌이었다. 약학, 처방, 진단 및 치료, 문진 등 모든 분야에서 명나라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룩했다. 청나라 의학의 가장 큰 진보라면 '온병학파'의 등장으로 온열병에 관한 연구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변화는 서양 의학의 본격적인 유입이다. 강희제는 해부학 지식을 가르치는 실험실을 만들어 중국인들을 가르치도록 했고 서양의학에서 들어온 선진적인 지식들은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청말과 민국 초에는 서양의학의 도입이 심화되며 깨끗한 병실, 서구식 약, 근대식 수술도구 등이 들어와 중국 한의학의 생존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중국인들의 뿌리깊은 한의학 선호와 양의학을 배운 의사들의 태부족 때문에 중국 전통 한의학 역시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고 여전히 세를 크게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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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정온 화학원감
고대 중국의 수학적 성취는 한때 세계적인 수준이었으나 명나라 시대 들어서 이미 쇠퇴했고 유럽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명나라 말 서광계가 '기하학' 6권을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동양 수학사에서 가장 방대한 수학서 '수리정온(數理精蘊)'까지 서양 산술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소개됐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대 수학을 되살리기 시작하자,[108] 서양 수학의 유입과 고대 중국 수학의 부활 덕분에 중국 수학계도 다시 발전을 거듭했다. 청나라 수학자들은 기존의 수학서에 주석을 다는 쪽으로 수학을 발전시켰다. 진사인은 고차수열의 합에 대해 연구했고, 자오쉰은 산수구장을 논평해 덧셈과 뺄셈, 곱셈과 나눗셈의 교환법칙을 제안하였으며 왕라이와 리루이는 방정식의 근의 특성과 근과 계수의 관계를 논했다.

아편전쟁 이후부터는 중국에 근대적인 화학 지식들이 유입됐다. 독자적으로 현대 화학의 발전에 기여하거나 세계 화학계를 선도하지는 못했지만, 무엇보다도 서구 화학 지식들을 들여와 중국어로 번역하고 화학 용어, 개념들을 정립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1855년에 영국 의사, 화학자들이 함께 중국어로 '신박물학'을 출판해 자연과학 지시들을 소개한 이래로 1868년에는 미국인 선교사가 화학 지식을 담은 '오학개론'을 출판하며 본격적인 화학 지식들의 계몽이 이뤄졌다. 1871년에는 해외 서적을 바탕으로 원소들의 이름을 중국어로 번역한 '화학초계(化學初階)'가 만들어졌고 같은 해에 화합물 사이의 관계와 화합물 명명법, 화학반응 등이 정리된 화학원감(化學鑒原)이 나왔다. 이후에도 원자량 목록 같은 여러 서구 지식들이 서수(徐壽)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중국어로 옮겨졌다.[109]

건축 및 인프라 기술은 청나라 대에 그 틀이 잡힌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철도 기술. 중국 철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첨천우(詹天佑)가 바로 이 청나라 시대의 사람이다. 뛰어난 철도 기술자였던 첨천우는 베이징장자커우를 잇는 철도 공사를 총괄했는데, 이때 원가를 절감하고 경사를 완만하게 하기 위해 '해링본' 트랙을 도입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현대 중국에서도 쓰고 있는 4피트 8인치짜리 준표준 레일, 자동 후크 같은 가장 기초적인 표준들도 이 첨천우가 정한 것. 그는 철도 인재 양성에 중점을 두고 엔지니어 승진을 위한 규정을 제정했으며, 엔지니어의 평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마련하고 평가 결과가 봉급에 연결되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베이징-장자커우 철도는 많은 공학 인력을 양성했으며, 첨천우가 제정한 평가규칙들도 다른 중국 철도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 평가

만약 청 제국의 직성 지역에서만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청나라 황제는 한화에 성공한 '중국'의 수명천자(受命天子)처럼 보이지만 직성 이외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내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대칸의 이미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불법(佛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라는 이미지, 타림 분지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라는[110] 이미지를 각각 갖게 된다. 그리고 기인의 세계에서는 누르하치의 계승자인 한(汗)으로 표상되었다.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중

지배층은 대부분 만주족이었지만 소속 민족이 다양했던 만큼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민족마다 청 군주의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만주에선 금나라를 계승한 한[111]으로, 북방의 몽골 지역에선 원나라를 계승한 칸으로, 중원에선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로, 티베트에선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으로, 신강영하에선 이슬람의 수호자로[112], 서남 지역에서는 토사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졌다. 청나라의 황제는 이러한 위치를 이용해 국가를 통치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의 칸으로서 얻은 군사력을 중원의 엄청난 재력으로 유지, 통솔했다.

청나라의 정치는 문자의 옥과 화기 연구 및 제조 금지[113] 등으로 비판을 받는다. 특히 청이 유럽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청의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잘 봐줘도 명나라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가경 4년에 명나라 화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해전에서도 명나라는 청나라만큼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예가 랴오뤄 만 해전/요라만 해전(料羅灣海戰). 명나라가 다른 문명권과 다르게 유럽 세력과 해전에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르네상스가 진행되면서 다른 문명들을 압도적인 속도로 능가하기 시작하던 유럽 문물을 따라가고 있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나라 지배층은 비판받을 점이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전 6권이 간행되어 중국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게 명나라 때의 일이고 군사학, 농업, 천문학 등에서의 서적이나 훈련 방법 등에서 유럽 문물이 의외로 이미 인정을 받고 있었다. 망조가 들어서 어이없게 날아가기는 했지만 명나라는 유럽식 훈련으로 수학과 과학이 동원된 사격술 등을 익힌 군대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정예병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다만 명나라와 싸웠던 당시 네덜란드는 전근대 시절이었고, 독립을 위해 온 힘을 유럽에 쏟던 30년 전쟁 와중이었다는 점에서 청이 만난 영국과 차원이 달랐다. 특히 영국은 당대 최강대국 중 하나인데다 산업 혁명을 일으킨 근대 국가인지라 청나라와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당시 네덜란드도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로 나아가던 국가라 해전에서 비유럽은 물론 유럽까지 아주 탈탈 털고 다녔으나, 세계 제국인 대영제국과 결국 중소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네덜란드는 체급 자체가 다르다.

특히 건륭제는 평생에 걸쳐 전제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위해 반청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별별 시덥잖은 이유로 트집잡아 목숨을 앗아갔다. 이에 중국 학계는 자생능력을 잃은 채 오래되고 오래된 고문을 다루는 고증학에만 치중하며 망해가고 있었다. 말기에도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 황족은 대부분 황제국의 최상위 지배 계급으로서 누리는 권력에 탐닉할 뿐 근본적인 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청나라의 지배는 독자적으로 창시한 제도도 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유교를 필두로 하는 한족의 사상과 문화가 기반이었고, 인문학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자연과학은 원래 관심 밖이었다. 명나라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명나라 시절부터 이미 기술력이 뒤쳐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며, 청나라 역시 압도적인 격차를 맞닥뜨린 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것은 명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애당초 여진족은 유목민족이 아니라 농경, 어업, 수렵, 채집 등 다양한 경제 활동을 해왔고, 청나라도 유목 제국이 아니라 엄연한 농업국이었다.

객가를 비롯한 장강 이남의 대한족주의자들은 청나라를 매우 싫어하여 "명망지후무화하(明亡之後無華夏, 명나라가 망한 뒤 화하(중국)는 없다)"라며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114]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 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라고 생각하며, 19세기 중국이 근대화에 실패하고 열강에게 밀린 것도 만주족의 통치 때문이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편 이런 대한족주의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만주족중국산타클로스’라는 말도 있다. 사실 명조까지 중국의 강역이 아니었던 만주,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등은 전부 만주족이 정복하여 중국에 붙인 지역이기 때문. 만주족 왕조가 한족 왕조보다 유능했다고 돌려까는 것이다. 맞기만 한 말은 아니지만 틀리기만 한 말도 아닌 게, 청나라는 명나라 등 한족 왕조들에 비해 영토가 매우 넓고 민족도 더욱 다양한 데다 지배민족이 다수의 한족이 아니라 소수의 만주족인 상황에서 한족 왕조와 같은 중앙집권제를 추구했기에 통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만주족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비단 한족뿐만 아니라 동시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외몽골몽골족에게도 보이는 경향[115]이 있는데, 외몽골 입장에선 청나라의 지배로 인해 같은 알타이계에 뿌리를 둔 내몽골탄누투바, 위구르를 잃었기 때문이다.[116] 물론 투바위구르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고 위구르는 10세기부터 이슬람화되어 몽골인들과 문화적 이질감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언어도 같고 원래부터 함께 살아온 내몽골이 분리된 것은 외몽골 할하인들 입장에서 정말 뼈아프다.

이 때문에 유튜브 등지에서 만주족은 중국인과 몽골인들 사이에서 자주 다굴당하는 편인데, 처음엔 원나라vs송나라 떡밥 논쟁에서 시작했다가 갑자기 청나라가 끼면 합심해서 청나라를 까는 재밌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117] 중국인은 만주족이나 몽골족이나 다 같은 주변 오랑캐로 치부해버리고 몽골인은 만주족이 중국 좋은 일만 시켜놓았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중국 영토는 청나라 때 확정된 것이고 적어도 외몽골인 입장에선 같은 알타이계인 내몽골이나 튀르크 등을 잃었으니 화날만 하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로,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가 후금 칸인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대원진국옥새를 바치면서 항복을 선언하자 천명이 대원에서 대청으로 계승되었다며 에제이를 배신하고 후금에 합류했다. 그리고 후금은 스스로를 중국 황제국으로 선포해 국호를 청으로 바꾼다. 특히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후금 때부터 만주에 합류한 데다 청나라 치하에서 우대를 받기까지 해서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강한 할하인과 달리 만주족을 되려 친척 민족이라고 생각하며 청나라는 한족 왕조가 아니며 한족은 만주-몽골의 신민이었음을 강조한다. 실제로도 청나라는 사실상 만몽 연합정권이라 보는 분석이 자주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현재 중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한족 왕조인 송나라명나라 뿐만이 아닌 몽골족 원나라, 만주족 청나라 등 이민족에서 비롯된 것도 많다. 우선 변발이라는 특유의 머리 스타일부터 해서, 우리가 흔히 UFO 모자로 아는 모자는 사실 몽골인들의 전통의상 델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치파오 역시 만주족 복식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춘절 때 거는 재복을 비는 민화 역시 관우와 함께 나오는 동자의 헤어 스타일이 몽골족 변발이다. 사실 칭기즈 칸의 임팩트와 서구와 접촉한 마지막 중국왕조가 청인 연유 등으로 외국에 이들 유목민족의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 버린고로 이민족의 왕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러시아어 등에서 중국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이 거란이 기원인 키타이일 정도.[118]

반면 서양에서는 신청사라는 사조를 이룰 정도로 청나라가 가졌던 만주족 중심 세계제국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쪽이 국제 중국사학계의 주류 시각이다. 영미권, 구미 출신 중국사학자가 쓴 청사 대중서가 시중에 많이 소개될 정도인데, 비슷한 시기를 다룬 중국 학자들의 서적과 함께 읽다 보면 미묘하게 다른 태도를 많이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국내 중국사학계와 중앙아시아사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국어였던 만주어 문헌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만주어의 학술적 위상이 서양사에서 라틴어가 차지하는 위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매우 높아졌고, 급기야는 한국의 여러 대학들이 역사 전공자들을 위해 만주어 강좌를 열고 만한사전을 내거나 한국의 여러 대중매체에서 만주어 고증을 시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중국의 어용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이 보이는 반응도 몹시 흥미로운데, 청나라를 중화민족이 이룩한 중화제국이 아닌 만주족의 세계제국으로 평가하는 신청사를 하나의 중국을 깨부수려는 서양 반중주의자들의 분탕질이라며 분개한다거나, 조선 배경의 한국 사극에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강조하며 청나라에게 무릎 꿇는 것을 치욕스러워하는 현상에 혼란스러워하거나, 그러면서도 청나라가 중국의 판도로 확보한 신강, 영하, 청해, 티베트, 내몽골, 만주 등의 지역은 원래부터 중화민족의 무대였다며 역사왜곡을 시도하는 등의 다채로운 반응을 엿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은 만주족의 중원 정복으로 세워진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를 마냥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편이지만 사실 중국 입장에서 청나라는 매우 고마운 나라인데, 그 이유는 현재의 만주, 내몽고, 신장, 티베트 등 중화 문명과 별개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지역들이 청나라 때 중국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이다.[119] 현 중화인민공화국이 전통적인 중국 영역보다 2배 이상 넓은 강역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청나라 시기 영토 확장의 성과 덕분으로, 만약 청나라가 없었다면 만주, 신장, 티베트 등 현재 중국이 지키려고 하는 소수민족 지역들은 모두 독립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명청전쟁의 진정한 승전국은 청나라가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한국에서는 한때 환빠들의 맹목적인 찬양에 따른 영향으로 같은 침략자였던 일본 도요토미 정권일본 제국과 달리 조선의 주권을 보존해준 관대한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강해져 그야말로 찬양 수준의 호평을 받았으나, 최근에는 환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평가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여러모로 인도의 무굴 제국과 공통점이 많았던 나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두 나라의 지배층은 몽골의 영향을 받고 몽골 제국의 계승을 지향한 소수의 유목민족이었고 피지배민을 배려해주는 위대한 성군을 배출했다는 점이 유사하다.[120] 강대했던 무굴 제국이 후기에는 토후들이 지배하는 느슨한 연합체에 마라타 동맹에게 하대당하는 등의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에 비해 청나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중국의 부정할 수 없는 지배자였다는 차이는 있다.[121] 또한 대영제국에 의해 멸망 원인을 제공받은 것도 공통된 점이다.[122]

17.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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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룡 그림은 국장 역할도 맡았다.[2] 대청제국지새(大淸帝國㞢璽). 청나라 전성기에는 만주 문자와 한자가 모두 새겨진 국새였으나, 청나라 말기 1909년에 만주족 대다수가 정체성을 제외하고 거의 한족화되면서 한자만 새겨진 위의 국새로 바뀌었다.[3] 편의상 후금(後金)이라고 칭하는 것일 뿐, 공식 국호는 ‘아이신 구룬’, 즉 금국이었다.[4] 1616년 누르하치가 나라를 건국했을때 초기 국호는 이었으며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1636년에 국호를 금(후금)에서 청으로 변경[5] 다만 1917년에 장훈복벽으로 잠시 12일 동안 부활하기도 했으며 법적으로는 1993년 3월 23일까지로 볼 여지도 있다. 법적으로 청나라의 영토인 곳이 남아 있었기 때문. 구룡채성 문서 참조.[6] 퍼 아라성은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 용링진 얼다오허쯔촌 남산-하얼사산 북쪽 기슭의 가장 높은 언덕에 그 터가 남아 있다.[7] 자이퍈성은 랴오닝성 푸순시 구 동부 혼허 중상류의 다훠팡 저수지 동남쪽의 톄베이산에 위치한다.[8] ᠪᡝᡤᡳᠩ(Beging)[9] 청나라는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 - 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묵던(지금의 선양시),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문수보살이 강림했다고 여기는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세 도시를 수도로 운용했다. 건륭 27년(1762) 건륭제가 1년 중 자금성(紫禁城)에서 머문 시간은 넉 달에 불과했다.[10] 강동육십사둔을 제외한 외만주 영토를 상실한 후의 면적, 출처[11] 천신 압카이 한을 섬기는 만주족의 고유 종교.[12] 1908년 대청제국의 헌법인 《흠정 헌법 대강》이 발행되었으나 군주의 권력을 보장하는 내용이 많아 그냥 발행 이후에도 전제군주제를 시행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흠정 헌법 대강》은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와 달리, 대놓고 전제군주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은 없었다.[13] 중국 후기로 갈수록 '황제'라는 칭호가 너무 많이 쓰인 나머지 청나라 때에는 외국을 상대로 자국의 황제를 가리켜 '대황제'(大皇帝)라는 극존칭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14] 이 시기 국호는 청이 아닌 금이었다.[15] 입헌군주제로 변경 이후[16] 전신[17] 실질적 승계[18] 만주족이 세운 국가라 한족 왕조와는 구분된다. 게다가 명나라와 달리 몽골 세력 등까지 흡수하면서 황제가 몽골 칸까지 겸해 사실상 소수민족이 우위에 있는 다민족 국가였다.[19] 국호가 청나라로 바뀌기 전 후금 시절까지 합한 시간. 순 국호가 청나라였던 1636년을 기준으로 하면 276년이겠지만 애초에 왕조가 바뀐 게 아닌 단순 국호 변경이므로 당연히 후금까지 포함된다.[20] 참고로 통일 왕조 중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는 한나라고 그 다음이 송나라다. 다만 한은 신나라의 건국으로 세조 광무제가 왕조를 복구하기 전까지 15년간 끊겼었고, 송은 정강의 변으로 황제가 잡혀간 뒤 북송이 멸망하고 이후 남송이 건국되는 바람에 황통이 한 번 끊겼다. 당나라 역시 왕조 존속 기간은 긴 편이지만 중간에 측천무후가 국호를 무주로 바꾸고 본인이 직접 황제가 되어 황통이 끊긴 적이 있었다. 중국사를 통틀어 봤을 때 이민족이 세운 나라가 약 300년이란 장기간 동안 광활한 국토를 지배하며 다스린 것은 가히 특기할 만하다.[21] 부자 직계 세습의 법칙을 깨고 방계로 즉위한 황제는 마지막 두 황제인 광서제선통제밖에 없다. 선통제도 혈통상 그런 거지 호적상으로는 백부 광서제의 양자 자격으로 제위를 받았다. 광서제는 동치제와 같은 항렬이라서 1항렬 1황제의 원칙에 따라 원래는 제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서태후의 강력한 주장으로 함풍제의 양자 자격으로 사촌형의 뒤를 이었다.[22] 촉한 제외[23] 명나라 또한 40년 이상 통치한 황제가 없진 않았으나,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암군 내지 폭군이었다. 현재는 말년의 건륭제가 사치 등으로 아버지 및 할아버지와 비교되어 박한 평가를 받는 편이나, 그런 건륭제조차도 명나라 F4와 비교하면 예전 초기의 건륭제급의 명군인 수준이다.[24] 이전 시대의 금과 구별을 위해 주로 후금(後金)이라 부른다. 태종 시기에 국호를 청으로 변경했다.[25] 참고로 청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전성기를 누린 나라이다. 명나라는 영락제부터 선덕제까지 평화로운 전성기가 40여 년을 채 못 갔고, 이후 토목의 변 등 천재지변과 임진왜란 그리고 외부로는 몽골과 만주 세력들의 침노를 받으면서 점차 몰락의 길을 걷는다. 물론 이 기간 동안 대외원정은 활발했기에 엄밀히 따지면 전쟁이 없는 시대는 아니었다.[26] 암바 아이신 구룬(대금국)[27] 만주 구룬(만주국)[28] 다이칭 구룬(대청국)[29] 암바 칭 구룬(대청국)[30] 두림바이 구룬(중국)[31] 다이칭 울루스(대청국)[32] 칭 다이너스티. 청조(淸朝). 당시에는 현대 중국과 같은 China(차이나).[33] 그레이트 칭. 대청(大淸).[34] Qi 라는 로마자 표기가 상당히 낮설어 보일 수 있는데, 한어병음에서 /ㅊ/ 계열은 q로 표기하게 되어있다. 우정식 병음에서는 'ts'로 표기했었다.[35] 1862년 10월 17일에 총리아문에서 공식적으로 칙령을 반포해 '황룡기를 달고 있는 선박은 중국의 관선이니 외국 선박을 대할 때와 똑같이 대하라, 만일 함부로 깃발을 제거할 시 법 위반으로 처벌될 것이다'라는 내용을 알렸다.[36] 청나라 소조정에서도 쓰였다.[37] 지도상에서 청의 판도를 중국 대륙을 넘어서 사할린쿠릴 열도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간혹 있다.[다만] 위에 서술된 영역 전체가 지방 행정을 통해 제대로 관리된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당장 요동 일대를 제외한 만주부터가 봉금령이라는 이름 아래 반쯤 방치되고 있었으니(...)[39] 대영제국,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 소련에 이어 인류 역사상 5번째로 거대했던 나라로, 우마이야 왕조, 프랑스 식민제국, 스페인 제국보다도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40]대만(중화민국을 독립국으로 볼 경우)[41] 청나라 때는 순무가 1개 성(省)을 지배하게 되어 1~3개 성을 관할하는 총독과 함께 황제에 직속되어 독무(督撫)라 불리며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지 않았으며, 상주권(上奏權)·성례제정권(省例制定權)·문무관 임면권(任免權)·군대절제권(軍隊節制權)·지방 재정감독권·지방 최고재판권 등 그야말로 중세 부중백과 같은 봉건제후에 가까운 권한을 가졌다. 이것의 상위호환이 총독(總督).[42] 이 외에도 소수민족이 모여사는 구역이나 필요한 지방들은 청(厅)으로 따로 묶어서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43] 총독은 초기 정2품이다가 강희, 옹정 연간을 거치며 간혹 병부상서나 형부상서, 도어사 등의 다른 직무를 겸직하는 형태로 종1품이 되었다. 총독은 1개 이상의 성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명나라 때는 비상설직이었으나 명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44] 순무는 종 2품이다가 병부시랑을 겸직하는 형태로 정2품이 되었다. 순무는 1개 성만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총독과 마찬가지로 명 초기에 비상설직으로 설치되어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45] 보통은 과거 출신 한족 관료들이 주를 이뤘지만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천섬, 운귀 등의 일부 지역에는 팔기군 출신의 만주족 군인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품계의 차이는 있으나 직무상 동등, 중첩되어 상호 견제를 유도했다. 총독과 순무는 황제에 직속되었고, 황제에게 밀접을 상주할 권한이 있어 황제는 이를 통해 지방을 명확히 파악하고 감시할 수 있었다.[46] 원, 명, 청대에 기존 남중국과 티베트 일대의 족장들을 칭했던 명칭. 투시들은 자치권을 부여받았고 제 마을 안에서는 왕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47] 특히 티베트달라이 라마는 '황사', 즉 황제의 스승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이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연회상에서도 황제와 동석할 수 있었고, 티베트는 거의 자치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자율성이 허락받았다.[48] 초창기에는 기인들만이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을 임명하는 제도인 만한병용제가 시행된 뒤에는 내각대학사, 6부상서, 6부시랑, 군기대신 등의 직책에 각 1명씩 2명으로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을 따로 임명했다.[49] 청 초기는 만몽연합으로 몽골족이 황후가 되었다. 후기로 가서도 몽골족 출신의 황후가 나타나기도 했다.[50] 만주족이나 기인이라고 전부 금수저 귀족이지는 않았다. 기인 내에서도 귀족과 하층민이 나뉘어졌는데, 이 중 하층민이 보오이라고 불리는 계층이었고, 이들은 만인, 몽골인, 한인, 심지어는 조선인까지 다양한 혈통으로 이뤄져 있었으나 대다수는 만주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절대다수의 민인에 비하면 특권층이었다.[51] 당연히 만주족 왕조였던 청나라답게 언제나 만인 상서가 한인 상서에 비하여 목소리가 더 컸다.[52] 임금이 2품 이상의 신하를 부르던 말.[53] 그래서 지방의 총책임자였던 순무는 지방 도시들의 감찰권을 가진 좌도어사와 지방 교외의 감찰권을 가진 좌부도어사의 직을 모두 맡는 경우가 많았다.[54] 옹정제는 모든 민관과 군관들이 3년마다 인사고과를 평가받고 승진이나 강등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특히 군관과 장수들에 대한 감시는 5년마다 '군정'이라고 해서 병부 주도로 실시했다. 하지만 이 평가체계는 인맥과 뇌물에 찌들어갔고, 청 후기로 갈수록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야 만다.[55] 다만 로마공화국 이래 오현제 시기까지 중 로마군의 숫자가 제일 많았던 시기는 트라야누스 시대가 아닌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 내전기 시대였다. 5.000만명 정도의 인구를 보유했었다고 추정되는 이 시기 로마군은 무려 60개의 군단, 50만명의 군단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25개 군단 30만명 수준으로 군축하였고 해당규모는 오현제 시기때까지 유지되었다.[56] 이 때문에 태평천국의 난 때에는 한족 세력가들이 자치적으로 군대를 모아 반란군을 진압하기도 했다. 국가의 정규군이 무너지니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했던 것이다.[57] 다만 이를 두고 달리 보는 의견도 있는데, 정말로 청군이 쇠약해져서 한족 반란군한테 쩔쩔맨게 아니라, 청군의 장수들이 부패해서 조정한테 더 많은 예산을 받아내어 횡령해 먹으려는 속셈으로 일부러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다.[58]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난 시기가 1839년이다. 이때는 퍼커션 캡이 발명은 되었지만 제식화되고 있던 중이었고, 아직 전장식 대포가 사용되던 시절이다.[59] 미국과 러시아의 대사들은 각국에 중국의 군비 증강에 대비해야 한다고 긴급 전보를 쳤고, 나중에는 심지어 미국과 중국의 군사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백 년을 앞서 예측했다.[60] 왼쪽부터 양황기, 양람기, 양백기, 양홍기, 정람기, 정황기, 정홍기, 정백기이다.[61] 엄밀히 말하면 1912년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청황실우대조약으로 인해 중화민국 육군부 소속으로 이관되어 명목상으로는 봉급을 받았기 때문. 허나 1924년 핍궁사건이 일어나자 그딴거 없이 그냥 깔끔하게 폐지됐다.[62] 청나라 시대의 지방에 존재했던 무장 집단이다. 지방의 유력자가 도적 등으로부터 향진을 자위하는 자발적으로 조직한 민병 조직이다.[63] 특히 염군의 난의 경우 생제친린이 이끄는 만주의 팔기군을 격파해버린 적도 있기에 청나라 조정에게는 어마어마한 위협이었다.[64] 출처는 권성욱 저 중국 군벌 전쟁 1부 4장.[65] 청나라도 자체적으로 전함을 건조하려는 시도를 하긴 했다. 1866년 푸저우에 총리선정사무아문(總理船政事務衙門)을 설립했고, 이홍장은 강남에서 전선 개발에 착수해 1868년 첫 증기 군선인 '염길(恬吉)'을 건조했다. 허나 따라잡을 수 없는 기술력의 차이 때문에 청나라에서 자체건조한 선박의 기능은 비참한 수준이었고 결국 해외 선박을 사들이는 쪽으로 선회한다. 사실 이런 사례는 옆나라 조선에서도 있었다. 바로 평양 앞바다에 침몰했던 제너럴 셔먼호의 부품을 때가서 천(天), 지(地), 현(玄)이라는 이름의 증기선을 3척을 건조한 기록이 그것, 다만 이쪽은 당시 개화를 한 상태도 아니라서 청나라보다 사정이 안 좋았기에 제대로 운용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해체시켜버렸다.(...)[66] 각각 발해만, 동중국해, 대만 해협, 남중국해를 관할했다.[67] 특히 이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하겠답시고 청나라 해군 재건에 들어갈 예산을 죄다 빼돌리는 바람에 1890년대 이후로 북양함대가 제대로 장비를 사들이지조차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68] 출처는 권성욱 저 중국 군벌 전쟁 1부 6장.[69]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는 만주어를 거의 못할 정도였다.[70] 청나라 황제들은 한족 앞에서는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짐의 자식이라고 립서비스를 하면서 만주족끼리만 있을 때는 한족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현대 중화권에서는 만한전석을 재현하는 행사에서 만주족과 한족이 모두 하나의 자식이라는 언급이 나온다.[71] 한족은 군대와 관련된 무관으로조차 임용될 수 없었다. 군대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녹영(청나라)이라는 조직은 있었다만, 이들은 숫적으로는 많았지만 질적으로는 팔기군의 총알받이 내지 하위호환에 불과했다. 물론 청나라의 팔기군이 쇠락하면서 녹영이 더 강력해지기는 했지만, 하향평준화하여 아편전쟁 즈음이 되면 덤앤더머에 불과했다. 무관직책이 한족에게 개방된 때는 태평천국 운동 때에 가서였는데 당시 팔기군과 녹영군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퇴보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었으며, 이때도 만주족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다.[72] 여담이지만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달라이 라마의 환생에 대해 끼어들겠다고 우기는 근거도 바로 이것이다. 중국 정부가 청나라 시절부터 달라이 라마의 환생에 관여해왔다면서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뽑을 권한이 있다고 우기는 것.[73] 총리각국사무아문의 수장으로, 형 함풍제가 열하로 도망간 사이 국치를 감당하고 뛰어난 외교감각을 활용해 양무운동 등 청나라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위인이다.[74] 해안가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강제로 내륙으로 이주하도록 한 명령.[75] 이때부터 이미 서양 상인들이 중국으로 침투하고 있었던지라, 강희제도 신하들에게 이들을 미리 경계하라 지시하는 선견지명을 보여줬다.[76] 흔히 건륭제가 광저우 한 곳만을 '개방'하고 문호를 열었다라는 식의 서술을 찾아볼 수 있는데, 문호를 열기는커녕 기존의 문호도 축소하고 나라의 빗장을 더욱 꼼꼼히 닫아잠근 것에 더 가깝다.[77] 해당 영상[78] 청 건국 초기에는 전란으로 인해 피폐한 상황이라 잠시 무굴 제국에 밀려 2위였었다. 하지만 무굴 제국은 샤 자한 사후 실정을 거듭한 반면 청나라는 착실히 내실을 다져 역전하였다.[79] 다만 일부 학자들은 매디슨의 연구가 지나치게 중국을 과대평가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매디슨이 제시한 1인당 gdp가 600달러는커녕 그 절반 수준인 325달러 정도가 적당하다는 것이다.[80] 이는 도량형의 변화와 원자재 가격의 변동, 인구 증가분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된다. 북송 시기가 중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던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나, 북송의 경제력이 더 강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근대 이전의 도량형은 수백년의 세월 동안 표기상 같은 단위어도 실질적인 측정량이 변할 수 있고 화폐경제의 핵심이었던 금속의 가격은 언제나 유동적이다.[81] 청 조정은 세금을 주로 밀이나 은의 형태로 거두었으며, 이 때문에 운하를 운행하는 선박들은 운송품과 함께 조정에 바칠 세금도 함께 실어날랐다. 이 과정에서 거두는 세입도 엄청났다.[82] 은본위제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려면 기본적으로 은이 충분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실시하기 어렵다. 조선만 해도 19세기까지 은본위제는커녕 물물교환을 벗어나기조차 녹록잖았다.[83] 다만 일본의 근대화는 1895년 청나라와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2억 냥의 배상금을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성사되었다. 이때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받아낸 배상금 2억 냥은 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그나마 이 액수도 원래는 3억 냥이었는데, 당시 청나라측 협상 대표인 이홍장이 일본인한테 습격을 당해 눈에 부상을 입은 사고를 입어서 일본 측이 2억 냥으로 줄여준 것이었다.[84] 출처 : 권성욱 저 <중국 군벌 전쟁> 1부 4장.[85] 이때 중국을 방문한 영국 선교사들은 청나라의 농업 효율이 산업혁명 이전의 유럽보다도 좋았다고 평했다. 당시 청나라의 밀 수확률은 밀 1톨을 뿌리면 15톨을 수확하는 정도였는데, 당대 유럽에서는 평균적으로 밀 1톨을 뿌려서 10톨을 수확하는 수준이었다. 그만큼 당시 청나라의 농업 기술력이 세계적인 수준이었다는 뜻.[86] 다만 동쪽에서 쑤저우의 입지가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우후시, 양저우, 장닝구, 항저우 등이 번성하며 서로 세력을 다투었기에 쑤저우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도시들이 동중국해 연안에서 번성했다.[87] 이렇게 민속신앙화된 도교는 의외로 청의 국력 쇠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변질된 도교 종파들은 미륵 신앙을 내세워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세웠고, 백련종, 천제회 등 다양한 도교 종파들이 사천추의 난, 임쌍문 사건 등 여러 반란을 일으키며 청나라의 국력을 깎아먹었다.[88] 청나라 국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상당한 수준이었던지라 1856년부터 1889년까지 무려 300여 차례에 달하는 반기독교 봉기가 일어났다. 대부분은 교회 불태우기, 선교사 추방 혹은 살해, 선교사들이 강제로 몰수한 토지와 재산 환수 등이 목적이었다.[89] 정말 심각한 상해를 입히거나 여성의 가문이 매우 지위가 높으면 예외다.[90] 가끔씩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사진을 넣어서 푸이가 이 말을 하는식으로 비꼬기도 한다. 실제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푸이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사상개조를 받아서 황제가 아닌 시민으로 살게 되었는지라 묘하게 현실성과 설득력이 있는 부분.[91] 동성파의 거두 요내(姚鼐)는 의리, 고증, 사초 이 3가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증국번이 후일 이 3개에 경제(經濟)를 추가했다.[92] 이후 19세기 청나라 말엽에 서구 열강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찾으면서 그 일환으로 다시 유교의 한 분파인 공양학이 등장해 잠시 세를 누렸다. 양무운동이 실패한 후 변법자강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된 학문이기도 하다.[93]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간을 하다가 찢겨 죽은 여자와 개 이야기다. 《요재지이》에 따르면 이 여자가 관청으로 압송되어가던 중에, 민중들이 이 여자가 수간을 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자 간수가 돈을 받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간을 시켰다고 한다.[94] 건륭제는 시를 쓴 뒤에 신하들에게 비평받기를 좋아했는데, 황제의 시가 난해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고전을 참고해 이해할 때까지 붙잡고 있다가 시의 속뜻을 이해하면 그제서야 집에 보내줬을 정도라고. 다만 건륭제는 딱히 시에 재능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95] 당장 자금성만 보아도 명나라 시절과 비교해 청나라 때에 훨씬 많은 석조 건물들이 지어졌다. 게다가 청동릉처럼 모든 황제들의 무덤에 거대한 석조 묘실과 지하궁을 만든 것도 청대 이전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설계다.[96] 한편 중국 청나라 대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것이 이 마과인데, 이 마과도 아무나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황제의 색이던 황색마과의 경우,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가 친히 하사한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던 것으로, 일반인이 입었을 경우 곧바로 끌려가 경을 쳤다.[97] 청나라 황제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저 피령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모란도] 윤수평의 '모란도《牡丹圖》'. 묵선이 없는 무골화법을 이용해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 특징. 윤수평이 새로 만들어낸 화풍은 당대 화가들도 즐겨 모방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하화수조도] 팔대산인의 '하화수조도《荷花水鳥圖》 '. 소박하고도 미묘하면서도 슬픔과 분노가 가득하고 차갑고 강렬한 느낌이 특징이다.[방왕유강산운제] 왕시민의 '방왕유강산운제《仿王維江山雪霽》'. 경사진 바위가 기이하고 장엄한 산의 형상을 이루며 기세가 넘친다.[묵죽석화도] 정섭의 '묵죽석화도《墨筆竹石圖》'. 난초와 대나무가 십자가형으로 교차되어 자연 그대로의 비밀을 드러내며 우아함,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강인함이 느껴진다.[송매두학도] 심권의 '송매두학도《松梅雙鶴圖》'. 꼼꼼하고 깔끔한 붓놀림, 생생하고 정확한 형태, 풍부한 입체감이 특징이다.[합마선인도] 민전의 '합마선인도《蛤蟆仙人圖》'. 자유롭고 힘찬 붓놀림을 구사하면서도 풀어지지 않았고, 기교와 해학이 엿보이는 그림으로 손꼽힌다.[104] 뿐만 아니라 고대 기술의 복원과 부흥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니 청대의 과학기술이 이전보다 퇴보한 것은 아니었던 셈. 그저 유럽의 속도가 너무 빨랐을 뿐이었다.[105] 순치제는 아담 샬로부터 천문, 달력, 역법은 물론 국가통치기법까지 배웠으며 아담 샬은 흠천감의 수장으로서 국가의 천문을 책임졌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무려 100년 넘게 흠천감을 운영했을 정도로 나라의 핵심 인력이었다.[106] 프랑스의 선교사 피에르 자르투, 청나라 학자 하국종, 명안도 등이 제작에 참여한 지도로 서양의 경도 및 위도 측위는 물론 사다리꼴 투영법 등 당대 세계 선두를 달리던 기술을 사용해 만들어낸 지도였다.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강희 시대에 편찬된 청대 수학의 걸작 '수학정수'도 큰 역할을 했다.[107] 관이 먼저 나서서 천문을 연구하고 장려했기 때문에 민간 수준에서도 활발히 역법 연구가 진행됐다. 소안신법《曉庵新法》, 오성행도걸《五星行度解》 등을 집필한 왕석천(王錫闡)이 대표적.[108] 특히 송나라 시대의 수학서와 명나라 영락제 시기의 산술서들이 이때 다시 빛을 보았다. 영락대전에 포함된 수학서들과 송나라 때 편찬된 장추전수경, 기고수안경 따위가 그 주인공. 그 덕에 명나라 이래로 침체되어 있었던 중국 수학계는 다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109] 그 외에도 화형방(華蘅芳)도 유명한 편이다. 수학, 물리학, 화학, 공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889년에는 천진군관학교에서 수소 풍선을 제작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청대 화학 선구자들의 노력은 왕경, 임홍준, 진위광, 진가충 등 후대의 화학자들의 양성에 큰 도움이 되어 근현대 중국의 화학발전에 큰 보탬이 되어주었다.[110] 이리장군(伊犁將軍, ili jiyanggiyūn)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자. 다만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는 호자들과 위구르인회족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111] 칸의 만주어 발음이다.[112] 물론 청나라 황제는 티베트 불교를 더욱 선호했으며,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113] 중원의 천자로서 청나라 황제들 가운데 화기 연구 및 제조에서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긴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 뿐이며, 이쪽도 치세 후기부터는 화기 연구 및 제조를 금지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리고 강희, 옹정 연간의 문자의 옥은 건륭제 때마냥 막나가지는 않았다.[114] 또한 몽골족이 세운 중화제국도 매우 싫어하여 "애산지후무중국(崖山之後無中國, 애산 전투 이후 중국은 없다)"이라 하기도 한다.[115] 사실 몽골인들도 청나라가 들어서기 전에는 여진족을 하찮은 족속이라 무시하던 역사가 있었다. 특히 이 경향은 외몽골의 할하 부족이나 오이라트가 심했다. 북원은 여진족이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어서 딱히 신경쓰진 않았다.[116] 청나라는 몽골족의 일파인 준가르부의 씨를 말리기도 했다. 물론 오이라트 계열도 몽골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현 외몽골에서 할하인과 함께 두 번째로 많은 부류가 이 오이라트인들이다.[117] 물론 몽골 제국의 중국 정복에 대해서는 반대로 대한족주의자들과 만주족이 합심해서 몽골 제국을 까기도 한다. 전자는 남송의 멸망과 관련해서, 후자는 금나라의 멸망과 관련해서 몽골 제국을 깐다.[118] 홍콩캐세이퍼시픽항공의 캐세이는 거란이고 퍼시픽은 잘 알다시피 태평양으로, 굳이 뜻을 해석하면 중화태평양항공 내진 중국태평양항공이라는 뜻이다. 남방의 홍콩에 소재한 회사에 거란 이름이 붙은 건 중국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키타이가 거란에서 유래해서이다. 이 표현은 미국은 원래 아메리카라 일컫지만 시적으로 일컬을 땐 컬럼비아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 Warhammer(구판)에 등장하는 세력 캐세이 역시 중국을 모티브로 했지만 이름은 거란족에서 유래하였다.[119] 청나라의 최대 강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보다 훨씬 넓었다. 현재의 중국이 가지지 못한 대만, 몽골, 연해주 및 서부 영토 일부를 더 가지고 있었다.[120] 악바르 대제강희제. 무굴 제국은 제국의 국명부터 몽골 제국의 계승을 지향했고, 청나라도 대원제국 전국옥새를 장악하고 몽골 제국의 정통성을 주장했다.[121] 물론 청나라 소조정과 만주국을 멸망하기 직전의 무굴 제국에 빗댈 수는 있다.[122] 청나라는 아편전쟁, 의화단 운동. 무굴 제국은 세포이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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