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스턴-소머스 원정 Preston–Somers expedition | ||
| 시기 | ||
| 1595년 5월 29일~7월 29일 | ||
| 장소 | ||
| 베네수엘라와 서인도 제도 | ||
| 원인 | ||
| 엘도라도를 찾아내려는 월터 롤리의 원정을 지원하려는 잉글랜드 사략선 함대의 공세.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선박 8척, 선원 500명, 군인 300명. | 민병대 500명, 기병 100명, 선박 여러 척. | |
| 피해 | ||
| 80명 사망. | 민병대 다수 사망, 선박 11척 파괴. | |
| 결과 | ||
| 쿠마나, 라 과이라, 카라카스 파괴. | ||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95년 5월 29일 ~ 7월 29일,아미아스 프레스턴과 조지 소머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원정대가 스페인 제국의 영토인 베네수엘라와 서인도 제도를 공격한 원정.2. 상세
1595년 초, 아미아스 프레스턴과 조지 소머스는 사략선 '승천(Ascension)', '선물(Gift)', '줄리안(Julian)', '달링(Darling), '천사(Angel)', '기쁨(Delight)' 호를 이끌고 플리머스 항에서 출전했다. 이들의 목적은 같은 해에 월터 롤리의 엘도라도를 찾아내기 위한 원정을 지원하고 누에바에스파냐 내 스페인 정착지들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군인 300명을 동원했는데, 그 중 다수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위그노 전쟁에서 스페인군과 맞서 싸운 전문 군인이었다. 프레스턴은 1588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소머스는 플립코트를 지휘해 다른 3척의 선박과 함께 스페인 해안을 습격하여 8,000파운드 이상의 전리품을 확보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3월 12일, 프레스턴과 소머스는 모세스 윌리스 선장의 '아크엔젤' 호와 사우샘프턴에서 온 다른 2척의 선박과 바다에서 합류했다. 그들은 군인들을 훈련하기 위해 마데이라 군도의 포르토 산토에 있는 포르투갈 정착지를 공격했고, 작은 마을들을 성공적으로 약탈했다. 5월 18일 도미니카 섬에 도착해 6일간 휴식한 후, 남쪽으로 항해하여 로스 테스티고스 제도로 향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재정비한 뒤 남서쪽으로 계속 항해해 5월 28일 마르가리타 섬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5월 29일, 그들은 코체 섬을 탐험하면서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스페인 캐러빌과 진주를 수집하던 어부 몇 명을 붙잡아서 정보를 캐냈다.
6월 1일, 잉글랜드 사략선 8척과 스페인 노획선이 스페인령 베네수엘라 앞바다의 쿠마나에 나타나 카라벨 3척을 더 나포했다. 이후 주민들에게 몸값을 내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했고, 주민들은 이에 굴복해 적당한 양의 식량을 바쳤다. 잉글랜드인들은 카라벨을 불태운 후 다음 날 저녁에 평화롭게 떠났다. 그 후 주요 해안을 따라 더 나아가 마쿠토 인근 해변에서 라 과이라에서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곳에 정박했다. 그들은 소규모 병력을 상륙시킨 뒤 바다와 평행하게 내륙으로 이동한 끝에, 내륙에 자리 잡은 산티아고 데 레온 데 카라카스 시의 주요 관문을 보호하는 엘 비히아 요새를 발견했다.
소머스는 나머지 병력을 해안에 내린 뒤 육로로 군대를 이끌었다. 잉글랜드군은 엘 비히아 요새를 조사한 뒤 즉시 기습 공격해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했다. 간신히 탈출한 수비대는 잉글랜드의 존재에 대해 다른 스페인군에게 경고했다. 다음 날 오후에 산에서 내려온 스페인 기병 순찰대 50명이 잉글랜드군이 요새를 점령한 걸 확인했다. 로버츠 대휘 휘하의 여러 머스킷 병사가 요새에서 나온 뒤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스페인군은 불응하고 즉시 철수했다. 그 후 스페인군은 적이 카라카스 시를 곧 공격할 것이라 여기고, 이를 막기 위해 카라카스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따라 병력을 집중했다.
잉글랜드군이 카라카스에 진군하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도전이었다. 카라카스는 해발 2,500~3,000피트(800~900m)에 달하는 고도에 있는 고원에 건설되었고, 베네수엘라 해안 산맥의 중앙부를 따라 있는 엘 아빌라 산맥으로 보호되는 계곡 내 6마일(10km)에 있었다. 또한 카라카스로 향하는 도로가 지나가는 피코 나이과타 고도의 정상은 해발 9,072피트(2,765m)에 달했으며, 지형적으로 고립되었다. 카라카스 자체에는 주지사 디에고 오소리오 발레가스가 조직한 민병대 500명이 있었다.
프레스턴과 소머스는 야간에 기습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요새에서 몰래 빠져나갔다. 스페인군은 잉글랜드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감시하지 않았기에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 잉글랜드인들은 밤에 비를 맞으며 행군했으며, 안내자로 삼은 원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주요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의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울창한 숲이 우거진 경사면을 올라갔고, 때때로 길을 뚫어야 했으며, 시냇물에서 잠시 멈춰 간식을 먹으며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피코 나이과타 정상 부근을 가까이 걸어간 뒤, 이른 아침 안개 속으로 행군했다.
6월 8일 정오, 잉글랜드군은 카라카스 외곽에 도착했다. 병사들은 6마일을 밤새 행군하면서 피로했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도시 민병대 일부가 급히 그들 앞에 전투 대형을 펼쳤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주요 도로에 배치되어 있었다. 프레스턴과 소머스는 중앙에 주력 전투 부대를 배치하고 양쪽에 두 개의 소규모 측면 부대를 배치해 3개의 부대를 형성했다. 이후 민병대를 향해 돌진해 한 명을 사살하고 여러 명을 상처 입혔고, 민병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공격군의 사상자는 없었다. 주요 도로를 지키던 나머지 민병대는 기습 소식을 듣고 동요한 끝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리하여 잉글랜드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카라카스 시에 입성했다. 알론소 안드레아 데 레데스마라는 이름의 노병이 말을 몰아서 그들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했지만, 이내 총에 맞아 죽었다. 프레스턴은 이 노병의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고, 레데스마의 유해를 방패에 태워서 영웅으로 예우한 뒤 정중하게 묻으라고 명령했다. 이후 스페인 민병대가 도시 외곽에서 재조직되어 도시를 탈환하려 했지만 격퇴당했다. 잉글랜드군은 5일간 카라카스를 점유했고, 스페인군이 협상을 시도하자 30,000두카트의 몸값을 요구했다. 스페인군은 2,000두카트, 그다음에는 3,000두카트를 제안했지만, 프레스턴과 소머스는 턱없이 적다고 여기고 카라카스 시를 약탈해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았다.
스페인군은 4,000두카트를 줄 테니 마을에서 물러나달라고 애원했지만, 프레스턴과 소머스는 곧 원주민으로부터 스페인군이 도움을 요청했고,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협상을 지연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에 분노한 두 사람은 아침에 카라카스와 주변 정착촌을 모두 불태운 후 길을 떠났다. 스페인 민병대는 지원군과 합세한 뒤 도시에 들어왔지만, 그때는 이미 대다수 집이 황폐해져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6월 14일 정오에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라 과이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프레스턴과 소머스는 요새에 불을 지르고 방어 시설을 파괴한 뒤 떠날 준비를 했다.
6월 15일 아침에 라 과이라를 출발해 서쪽을 향한 잉글랜드군은 16일에 치치리비체 외곽에 도착했다. 소머스는 보트 부대를 이끌고 정박해 있던 스페인 선박 3척을 나포하고 일부 전리품을 확보한 후 불을 질렀다. 치치리비체 마을은 거의 저항 없이 접수했지만, 몸값을 받기에는 너무 작았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좀 더 서쪽에 있는 산타 아나 데 코로로 향했다. 6월 20일, 해안을 따라 이동하던 잉글랜드군은 코로 만을 발견했다. 프레스턴은 그곳에서 부대를 이끌고 오후 11시까지 모든 병력을 해안으로 수송했다. 그들의 목표는 파라과나 반도 남쪽 끝 해안 평야에 건설된 코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후안 데 리베로스 주지사가 지휘하는 소규모 수비대가 있었다. 소머스는 정박지를 지키기 위해 병사 50명과 함께 남았다.
잉글랜드군은 밤에 코로 마을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스페인 민병대는 바리케이드를 쳐서 격퇴했다. 이후 바리케이드를 돌아 측면을 공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더 많은 민병대가 몰려오자, 잉글랜드군은 다시 공격을 개시해 길을 뚫고 수비대를 몰아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스페인 민병대와 격려한 전투를 벌인 끝에 코로 마을을 다음 날 아침에 확보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귀중품을 가지고 내륙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건물들을 비어 있었다. 이에 프레스턴은 마을을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후 이틀간 도시에 머물며 주민들에게 몸값을 요구할 준비를 하던 프레스턴은 폭우가 잉글랜드 정박지를 강타했으며, 피나스의 케이블이 끊어져서 소머스와 병사 50명이 바다로 떠밀려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에 코로 마을을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우게 했고, 이 때문에 교회와 예배당을 포함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이후 프레스턴은 부대를 서둘러 해안으로 돌려보냈고, 떠내려간 소머스 일행을 찾기 위해 돛을 올렸다. 다음 날 저녁, 프레스턴은 마라카이보 호수 입구 바로 앞에 피신해 있던 소머스 일행과 재회했지만, 바람이 불자 둘 다 떠나기로 했고, 6월 26일 후풍을 타고 히스파니올라로 향했다.
6월 30일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한 잉글랜드 함대는 다음 날 티뷰론 반도에서 정박하여 새로운 식량을 수색했다. 7월 8일 바람에 불자 다른 배들은 잉글랜드로 귀환했지만, 프레스턴의 '승선' 호와 소머스의 '선물' 호는 남았다. 4일 후, 두 사략선은 자메이카 앞바다에 정박하여 케이멘 제도로 향하기 전에 며칠간 머물렀다. 그들은 7월 22일까지 쿠바의 카보코리엔테스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스페인의 선박을 나포하기 위해 아바나 앞바다를 일시적으로 봉쇄하기로 했다. 그러나 작은 배 2척만 나포되어 전리품이 부족했고, 이질이 배 전체에 퍼지면서 80명이 사망했다. 두 사람은 원정을 중단하고 철수하기로 했다.
이후 엘도라도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월터 롤리와 재회한 두 사람은 8월에 뉴펀들랜드에 방문하여 대서양을 건너기 전에 생선을 비축했고, 9월 10일에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도착하여 약탈품을 계산했다. 원정대가 얻은 이익은 투지 비용을 간신히 충당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던 길을 통해 산을 돌아가서 카라카스 시를 공략한 것은 드문 업적이었고, 질병으로 인한 손실을 제외하면 사상자는 상당히 적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소머스와 프레스턴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한편, 디에고 데 오소리오 주지사는 카라카스로 돌아온 후 라 과이라 방어 시설 구축을 명령했으며, 카리브해 연안의 해안 방어 시설 또한 향후 잉글랜드 해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구축되었다. 또한 여러 개의 상설 수비대와 카라카스로 통하는 주요 도로의 요새화도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