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0:10:49

이구(1931)

회은황태손에서 넘어옴
<colbgcolor=#29176e><colcolor=#fff>
대한제국 고종의 손자
이구 | 李玖
파일:이구1931.jpg
출생 1931년 12월 29일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카사카 별궁
(現 도쿄도 치요다구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구관)
사망 2005년 7월 16일 (향년 73세)
도쿄도 치요다구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묘소 회인원(懷仁園)
재임기간 일제강점기 조선 이왕세자
1931년 12월 29일 ~ 1947년 5월 3일
대한제국 황실 수장 (명목상)
1970년 5월 1일 ~ 2005년 7월 16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29176e><colcolor=#fff> 본관 전주 이씨
구(玖)
부모 부친 영친왕
모친 이방자
형제자매 이진(1921~1922)
배우자 줄리아 멀록 (이혼)
아리타 키누코 (비공식 재혼)
자녀
양자 1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양자 - 이원 (李源, 1962 ~ 현재)
양녀 - 이은숙 (李恩淑, 1959 ~ 현재)
학력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건축학 / 학사)
종교 가톨릭 (세례명: 세례자 요한)
사시 자인온유덕성순수회은황세손
(慈仁溫裕德性純粹懷隱皇世孫)
}}}}}}}}} ||
1. 개요2. 사시(私諡) 관련3. 생애4. 여담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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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royalark.net/korea-Yi%20Ku.jpg
<colbgcolor=#29176e> 종묘 제례에서 황제의 면류관과 곤복 차림인 이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황태자(황태제) 영친왕이방자차남으로, 고종의 적손자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적통 직계손이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최종으로 올린 사시(私諡)는 '자인온유덕성순수회은황세손(慈仁溫裕德性純粹懷隱皇世孫)'이며 줄여서 회은황세손으로도 부른다.

==# 외가 #==
외가 쪽으로 일본 황실이랑 촌수가 가깝다. 아키히토 상황의 6촌이고, 나루히토 천황의 7촌(외재종숙)이다.

쇼와 22년(1947년)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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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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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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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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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라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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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시(私諡) 관련

아버지 영친왕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황태손이나 왕세손에 봉해진 적이 전혀 없다. 아버지 영친왕은 대한제국이 존재하던 시절에 태어났지만 이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백부인 순종황제가 이미 1926년에 승하한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구 출생 당시 아버지 영친왕의 신분은 '이왕(李王)'이었다. 그래서 이구는 처음부터 황태손도, 황태자도 아닌 일제강점기 조선 '이왕세자(李王世子)'로 불렸다.

8.15 광복 이후 왕공족 직제가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 시행과 함께 귀족제가 폐지되면서 이구와 그의 가족들은 무일푼 평민이 되었다. 즉, 이구가 특권층으로서 지녔던 작위는 이왕세자가 유일하다. 하지만 더 이상 왕공족도 아닌데다가, 일제가 부여했던 작호 '이왕세자'를 대한민국, 민주공화제 시대에 계속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하나 뿐인 아들이자[1] 명목상 황실 후계자였던 이구를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구분해서 부르려고 했다. 이때 등장한 호칭이 '황세손(皇世孫)'. 이도저도 아닌 이 명칭이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황태자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황태손(皇太孫)의 '황(皇)'과, 어쨌든 실제로 지녔었던 작위 왕세자(王世子)의 '세(世)'를 합쳐 만들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으나, 의친왕의 장손 이준에 따르면, '황세손' 호칭은 '황실(皇)의 대[世]를 잇는 손자(孫)'라는 뜻으로 지어진 신조어라고 한다. 전통적 작위 개념에서 '황세손'은 나올 수 없는 호칭이 맞으나, 이와 연관짓지 않고 현대식 호칭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하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이구의 명목상 양자 이원도 예전에 한 번도 쓰이지 않았던 호칭인 '황사손'으로 불리지만, 문제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당시 문화재청의 입장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 그 당시 공동장례위원장이자 참여정부의 마지막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은 영결식 식사(永結式 式事)에서 그를 '황세손 이구 저하(懷隱皇世孫 李玖 邸下)'로 호칭했다.

3. 생애

그의 형 이진은 아직 아기였을 때 의문의 병으로 갑자기 요절했고,[2] 그로부터 10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외아들로 성장했다.[3] 태어날 때부터 그는 이왕 은(李王 垠)의 후계자로서 '이왕세자(李王世子)'라 불렸다.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의 시행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왕공족 지위 역시 상실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일본 국적이 박탈되었고, 모든 재산을 국고로 몰수(압수)당한 뒤 거리에 내몰려 무일푼 평민이 되었다. 그나마 영친왕 일가는 살던 집 한 채는 지킬 수 있어서 지낼 곳은 있었지만, 수입은 모두 끊어져서 무척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일본에 있는 재산은 물론이고 한국 내에 있는 재산까지 모두 끊어져서.
파일:external/pimage.design.co.kr/1276972871143.jpg
<colbgcolor=#29176e> 1958년 경 미국에서 촬영한 사진. 가운데의 인물이 이구.
그 외 왼쪽부터
영친왕(의민황태자), 이방자 여사.
그는 8.15 광복 후 가족들과 함께 고국으로 귀국하고자 추진했으나, '돌아오면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정치적인 명분을 내세운 이승만 정부에 의해[4] 영구 귀국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래서 1953년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 공과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해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유학 중 만난 줄리아 리[5]1958년 10월 25일 결혼했다. 유학가려 했을 때 이방자는 도미를 말렸으나 영친왕은 "구(玖)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고 적극 밀어주고 뒤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32세였던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주선 하에 귀국하여[6] 창덕궁 낙선재에서 부모와 함께 살면서 여러 사업을 영위하고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강사 자격으로 출강하여 선진 건축기술을 가르치는 등 나름대로 잘 살았으나,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와 별거하는 등 실의에 빠진 삶을 살다가 1977년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다가 1982년 아내와 정식 이혼했는데, 불임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불명. 일단 이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구의 바람끼와 종친들이 이구더러 줄리아와 이혼하고 한국 여성과 결혼하라고 오랫동안 종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1990년대에 일본인 무녀 아리타 키누코(有田絹子)와 혼인신고를 비공식적으로 올렸다고 한다.

이구는 일본미국에서 지냈는데[7], 사실 그는 대한민국을 자신의 진정한 모국이라 생각하며 애정을 갖고 있었고 어떻게든 잘 살아갈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본인은 한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으며 결혼생활을 물론 일상생활에까지 이래라 저래라 간섭만 해대는 전주 이씨 종친들과 갈등을 겪어 한국 생활을 포기했다고 한다. 결국 모친 이방자 여사가 별세한 이후에는 종묘제례가 있을 때가 아니면 거의 한국에 오지를 않았다. 어쨌든 마지막 황태자의 하나뿐인 아들이므로 대한제국 황실의 적손(직계손)으로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명예 총재' 직책을 갖고 있었다.

말년에는 가족 하나 없이 일본에서 홀로 지냈는데, 가끔씩 미국을 오고가는 등 나름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2005년 7월 16일, 과거 자신이 살던 저택을 개조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 묵고 있을 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향년 73세에 사망했다.[8] 그런데 일본 황족들 중에서 이구의 친손이라며 구 한국 황실가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구는 일본 황실로부터 약간의 연금과 생활 보조비를 지급받기는 했다. 이방자를 통해서 모계로 아키히토6촌 관계[9]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구의 시신 유품 일부를 몰래 일본에 가져가기도 해 대한제국 황실 복원 관계자들을 격분하게 했다.(2008년 《월간 중앙》 참조) 알려진 바로는 그에게 슬하 친자식은 없으며 양녀 이은숙은 사실 이구가 아니라 줄리아 리가 이구와 이혼하기 전 한국에 살고 있을 때 입양했다고 한다.[10] 그의 사후 회사원 이상협(이원)[11]이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사후 양자로 지명받았다. 이는 공식적(주민등록상)인 양자가 아니라 호적상(전주 이씨 족보)의 양자일 뿐이다. 현행 민법상 사후 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서는 생전 이구가 이상협을 양자로 지명하는데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라 하더라도 법적 절차는 이구의 사후에 이루어졌으니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이석은 황실 인사들과 전혀 상의도 없이 종약원 회장과 이구가 일방적으로 이상협을 양자로 지명했다는 것, 대동종약원 자체가 황실과 혈통상 거리가 한참 멀다는 것 등으로 인해 이 양자 지명을 강력 반대했다고 한다. 이원은 이구의 후손(양자)으로서 현재 조선왕릉 제례나 종묘대제에 대한 총괄, 전반적인 제향(기신 제향)을 맡고 있다.
파일:남양주_홍릉과_유릉_회인원 문화재청.jpg
<colbgcolor=#29176e> 이구의 원(園), 회인원(懷仁園)[12]
당시 YTN 보도, 마지막 황세손 이구 씨 영결식

대한제국 시절 예법에 따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과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13], 유홍준 문화재청장 겸 공동장례위원장의 주도 하에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장례[14]를 치르고 종묘 앞에서 노제(路祭)를 지낸 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유릉 권역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의장대에 의해 친히 운구된 후에 아버지 영친왕의 묘역인 영원 인근에 마련된 조선 왕조 최후의 왕실 묘역[15] 회인원(懷仁園)에 안장되었다. 이구의 장례는 조선 왕조 왕실 예법으로 거행된 마지막 '진짜 장례식'으로 사실상 그가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직계손이기 때문에 이후로는 무형국가유산 전승 차원에서 재현 행사로서 할지는 몰라도 '진짜 장례식'으로 거행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관련기사

4. 여담

  • 최근 재건축을 위해 허문 서울 새문안교회가 이구의 작품으로 알려졌었다. 구 예배당 보존을 검토했으나 이 경우 필요한 면적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고 도면에 기재된 설계자가 이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어 결국 철거가 확정되었다. 다만 재건축 과정에서 옛 예배당의 흔적을 남겨 로비에 검은 선의 형태로 구 건물의 위치와 형태를 표시했으며, 지상 2층 로비에 들어서면 축소된 형태로 구 건물의 외형과 본당의 형태를 복원해두었다.
  • 덕혜옹주가 죽기 전 사실상 유언장이나 다름없는 자필 원고에서 조카인 이구를 보고 싶다고 언급했다. 그만큼 우애가 각별했던듯 하다.
  • 아내 줄리아 리는 이구가 평상시 예의 바르고 점잖은 사람이었지만 의외의 모습도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프로포즈할 때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나랑 결혼해 줄래?' 이렇게 청혼하는 식의 뉘앙스가 아니고 "우리는 결혼할 거야(We'll get married)" 라고 결정짓는 어투에 조금 놀랐다고 한다. 이혼 역시 본인에게 어떠한 입장을 표명할 기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정해졌다고.
  • 한국 여성 화랑계의 1세대 대모로 평가받는 유위진(1931~2010, 경남 양산 출신, 이화여대 졸업) 여사와 1970년대부터 연인(불륜) 사이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꽤나 애틋하게 사랑했으나 이구가 일본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다른 여자와 재혼하면서 연락이 끊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여사는 이구를 잊지 못하여 편지도 보내보고 일본에도 여러번 찾아갔지만 헛수고였다고 한다. 유위진 여사도 줄리아 리와 마찬가지로 이구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은 셈. 그러나 막상 일본으로 떠난 이구는 또 사업에 실패하여 사기 혐의로 피소되고 재혼 역시 파경을 맞는 등 그곳에서도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 사망 전해였던 2004년에 종묘에서 국내 모 언론과 영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따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후회는 없습니다(I have no regrets).” 라고 답하였다.

5. 대중매체에서


파일:왕조의 세월 이구.png}}} ||
<colbgcolor=#29176e> 〈왕조의 세월〉의 이구
1990년 KBS1 8.15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송승환이 연기했다.
  • 2015년 젊은 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소설에서 이구의 삶을 다룬 바 있다.

[1] 장남 이진은 1살도 안 되서 요절했기 때문에 이구가 실질적인 장남이나 외동아들 역할을 했다.[2] 1921년 8월 출생 ~ 1922년 5월 사망. 한일혼혈인 황손이 다음 황실(이왕가)의 최고 수장 직위를 계승한다는 것에 반발하여 반대파가 아기 먹는 음식(이유식, 또는 우유 등)에 이상한 잡다한 것을 풀어 결국에는 죽었다는 설이 있다.[3] 이방자 여사 회고록에 의하면 그 사이 유산을 2번 했다고 한다.[4] 이승만은 대한제국 황가를 무척 증오해서 자신이 물러나기 전까지 이들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얼마나 싫어했으면 “나라가 망한 뒤 하나 좋았던 건 왕가가 없어진 것”이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이다.[5] 1923년 3월 18일 출생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결혼 전 이름은 줄리아 멀록이며 한국명은 이주아(李珠娥). 이구보다 8살 연상으로, 합의이혼 후에도 개명하지 않고 줄리아 리로 살았다. 이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마침 줄리아 여사는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 제작 때문에 한국에 와 있었다. 장례식에 찾아갔지만 초대를 받지 못하여 먼 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창덕궁 낙선재에 살던 때 줄리아 여사와 이방자 여사 간에 불화가 있었지만 화해했고, 이혼 후에도 이방자 여사가 종종 찾아가 생활비도 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줄리아 여사는 애증의 연 때문인지 몰라도 많이 슬퍼하기도 했었다. 낙선재에서 살다가 그곳을 떠나 1995년까지 서울특별시의 외국인 아파트(이태원 인근)에서 살다가 하와이이민 가서 2017년 11월 26일 숨을 거두었는데 너무 조용하게 살다보니 사망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부고기사[6] 박정희가 집권한 뒤 이승만의 색깔을 지우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이 거의 없는 사람 취급했던 김구에 대한 명예적 복권도 진행해주었다. 물론 이는 5.16 쿠데타에 함께 참여했던 김구의 아들 김신을 생각해서 행한 면도 있지만.[7] 이구는 줄리아 리 여사와 결혼하여 취득한 미국 시민권을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이중국적자였다. 사망 당시에도 그의 품에서 미국 여권이 나왔다고 한다.[8] 정확히 말하면 옛 이왕가 저는 구관(철거된 신관과 달리 지금도 남아 있다.). 그가 머물다 사망한 곳은 신관.[9] 아키히토의 어머니인 고준 황후가 이방자와 사촌 관계이며 부계로는 이방자와 아키히토는 7촌이다. 우연이지만 이방자는 아키히토의 아버지 쇼와 덴노와 1901년 같은 해에 태어나 1989년 같은 해에 사망했다.[10] 이 때문인지 몰라도 이은숙이 이구와 관련한 일로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줄리아 리는 하와이에서 이은숙과 같이 살았다고 한다.[11] 의친왕의 9번째 아들 황손 이갑(이해룡)의 장남, 본명은 이상협.[12] 사진 출처 - 문화재청.[13]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파로 촌수는 정말 멀지만, 이구와 같은 항렬이다.[14] <哀> 大韓帝國 皇世孫 李玖 邸下 永結式 <悼> (애) 대한제국 황세손 이구 저하 영결식 (도)라는 명칭으로 당시 을사늑약 체결 100년, 광복 60주년인 상황 속에서 2005년 7월 24일 장례식을 치렀다.[15] 조선의 예법상 왕과 왕비의 묘역은 능(陵), 왕의 사친(왕의 생부 중 왕이 아니었던 자와 왕의 생모였던 후궁)과 왕세자(손)·왕세자(손)빈의 묘역은 원(園)으로 칭하는데 황실이 부활하지 않는 한 '원'으로 칭할 묘역을 가질 황족은 황세손(이왕세자)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외는 희빈 장씨의 대빈묘, 폐비 윤씨의 회묘, 공빈 김씨의 성묘와 소현세자의 소경원이 있다. 희빈 장씨는 취선당에서 인현왕후를 굿을 하며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죄목을 쓰고 사사되었고 폐비 윤씨는 투기 때문에 용안에 손톱 자국을 냈다가 성종과 시모 인수대비의 분노를 사 폐서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 연산군폐주였기 때문에, 공빈 김씨도 아들 광해군폐주였기 때문에 원호를 끝내 되찾지 못했다. 소현세자는 비정한 부왕 때문에 복권되지 못하고 소현묘로만 불리다가 고종황제 대에서야 '소경원(昭敬園)'으로 승격되었다. 연산군은 생모를 '제헌왕후'로 복위시키고 능호를 '회릉', 광해군도 생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능호를 '성릉'이라 하였으나 후 그 관작이 모두 삭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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