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9:59:10

코시크

kor seek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
2.1. 설립 동기2.2. 설립 후 영향과 그 의의2.3. 코시크와 리눅스2.4. 폐쇄
3. 특징4. 여담5. 외부 링크

1. 개요

파일:hkorseek.jpg

코시크는 1995년 12월 5일에 당시 충남대학교 화학공학과 4학년이던 김영렬 씨가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검색 엔진이자 세계 최초한글 검색 엔진이었으나 현재는 폐쇄되었다.

폐쇄 전에 쓰던 도메인은 맨 처음에는 kor-seek.chungnam.ac.kr이었다가 1998년 초 부터 www.kor-seek.com으로 바뀌었다.[1] www.koseek.com을 도메인으로 쓰던 (주)코시크와는 관련이 없다.

2. 역사

2.1. 설립 동기

한글 검색엔진이 없던 시절에는 검색엔진에 사이트를 등록하기 위해 영문으로 웹 페이지를 만들어야 했다. 이 때문에 일반 이용자나 사이트 운영자 모두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었다. 이 때는 한글로 정보가 적혀있는 사이트를 검색하려면 한글 표기 로마자로 음차해서 검색해야 했다. 이런 방식은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로마자 표기법은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기반의 표기법이었는데, 한국어 모어 화자에게는 변이음에 불과한 무성음과 유성음을 구별했던 한편, 반달표, 어깻점 등의 변별 기호가 많았던 데다 이런 기호들이 생략까지 가능했던 고로 너무나 복잡하여 교통 표지판 표기 정도에서만 지켜지고 민간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과장 좀 보태면 공식 로마자 표기법이라는 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이었으며 이 때문에 대충 비슷하게만 들리면 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영어 발음 등에 기댄 자의적 표기가 범람하던 상황이었다.[2] 그래서 같은 단어 하나를 검색하려 해도 가능한 로마자 음차 표기를 여러 개 사용하여 검색을 해야 했다.(예: 철수 → Ch'ŏlsu, Cholsu, Chulsoo...) 이런 애로사항 때문에 미봉책으로 전화번호부처럼 당시 대한민국의 웹페이지의 주소를 나열한 목록을 만들어서 배포했으며[3] 메인페이지는 그냥 영어로 작성하고 본문은 한글로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불편함은 대한민국에서 인터넷 환경이 형성되기 전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였다.

2.2. 설립 후 영향과 그 의의

위의 문제는 코시크가 나오면서 해결되었다. 한글로 검색을 할 수 있는 것이 2010년대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것을 넘어서 거의 모든 대한민국 웹사이트 이용자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준, 마른 하늘의 단비같은 존재였다. 이후 ADSL이라는 가정용 인터넷망 보급과 맞물리면서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인터넷 강국으로 성장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한글 검색엔진이 꽤 생긴 1997년에도 당시 IT를 소개하는 기사의 부제 중 하나가 '인터넷, 한글로도 검색가능'이었을 정도다.[4]) 한글로 된 사이트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자 한글로 적힌 웹페이지의 수 역시 크게 늘어나 대한민국의 초기 인터넷 환경의 형성이 더 빨라지기도 했다. 코시크의 등장은 다른 한글 검색엔진의 등장도 촉진하여 1996년 이후 미스다찾니, 까치네, 심마니 등 90년대 말 한글 검색엔진의 춘추전국시대의 서막을 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후발 검색엔진의 폭발적인 등장은 코시크의 선두주자의 자리를 위협하기도 했다.

2.3. 코시크와 리눅스

1990년대는 인터넷이 폭발적으로 확장하던 시기였다. 그 배경에는 인터넷과 웹기술의 등장이 있었는데 리눅스의 출현과 오픈소스의 확장 역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인터넷 서버에 사용되던 전통적인 유닉스는 상당히 고가였기 때문에 컴퓨터 분야의 전공자 조차도 개인적으로 서버를 소유하기 쉽지 않았다.

1990년대 초 개발된 리눅스는 인터넷 확장에 크 기여를 했다. 리눅스는 무료로 배포되었고 누구나 PC에 설치하여 유닉스와 동일한 라이브러리를 갖춘 서버를 구현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었다. 당시 대학생 중심으로 리눅스가 널리 사용되는데 반해 공공기관이나 대학의 전산실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들은 리눅스를 신뢰하지 않았고 여전히 높은 비용을 치르며 유닉스를 사용하기를 원했다.

개발자 역시 개인용 PC에 리눅스를 설치하여 서버로 사용했고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었다. 코시크를 개발한 이후에 서버를 확장할 때도 리눅스를 사용했기 때문에 금전적인 부담이 크게 느끼지 않고 검색엔진을 서비스를 지속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개발자에 따르면 1997년에 농림수산정보센터에 공급된 검색엔진은 리눅스 서버라는 이유로 전산실 설치조차 거부당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뒤 농림수산정보센터는 리눅스를 잘 사용하는 기관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고 한다. 공공기관이나 대학의 전산실에서 웹서버나 네임서버 설치 자문을 요청받았을 때 리눅스를 제안하면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코시크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하면 생각을 바꿔 리눅스를 도입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현재 리눅스는 인터넷서버를 구축에 있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터넷, 리눅스, 오픈소스가 코시크의 출현의 배경이 되었다면 한글 사용으로 홈페이지 서버가 폭발적으로 늘게 했다는 점에서 코시크의 출현은 리눅스와 인터넷 서비스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2.4. 폐쇄

코시크는 기세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1998년에 폐쇄되기 전까지 한글 검색엔진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5] 폐쇄된 이유는 인기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금전적 요인이 컸다. 코시크의 운영자는 대학원생이었고, 결국 별다른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도 검색엔진을 운영해야 했다.[6] 개설 초기에 폭증하는 사용때문에 개인용 서버로 운영하기 어려워졌고 서비스가 중단 위기에 처한 일도 있었다. 이때 전국적인 웹서비스의 확대를 이끌어가던 WWW-KR의 지원으로 서버를 확장하면서 추가적인 개발과 운영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97년에 농림수산정보센터에 검색엔진을 납품하기는 했지만 결국 코시크는 장기 기간 유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상업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운영이 중단되게 된다.

3. 특징

처음에는 홈페이지 정보를 관리하여 디렉토리 검색및 키워드 검색을 제공했다.

초기에는 자동문서 수집기능을 보유하지 않았다. 홈페이지 등록신청란을 별도로 운영했으며, 신규 홈페이지 내용을 요약한 DB를 검색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웹문서를 자동으로 수집하는 로봇기능은 출범 다음해인 1996년에 추가되었다.

디렉토리 검색, 키워드 검색 말고도 HTML 사용법 등 기본적인 웹페이지 만드는 법, 코시크 이외에 라이코스, 야후! 디렉토리 검색, 알타비스타 등 다양한 다국어 검색엔진 모음, '뽀송게시판'이라는, 문의 게시판, 건의 게시판, 채팅 등 기초적인 커뮤니티를 제공했다. 뽀송게시판은 아파치 웹데몬에 설치할 수 있는 솔루션형태로 공개되었으며 2000개 이상의 웹사이트에서 설치되어 사용되었다. 홈페이지가 급성장할 때 무료로 배포되는 게시판이 큰 역할을 했는데 무료게시판의 시작은 뽀송게시판이었다. 코시크의 개발 이유가 누리꾼들이 인터넷 사용을 돕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의 코시크는 크롤러를 사용하지 않고 검색등록을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채워나갔는데, 코시크에 등록이 된 홈페이지를 등록된 순서로 정리해서 볼 수 있었다.[7]

4. 여담

코시크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약 3년간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런 장기적인 운영은 본래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개발자의 발언에 따르면 개발 당시 코시크의 목적은 한글 검색엔진에 대한 관심을 키운 후 코시크보다 더 나은 검색엔진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으로 시범적으로 한 달 정도만 운영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글 검색엔진의 편리함에 열광한 많은 사람들의 요구가 있었고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제안을 반영하다보니 거의 3년 동안 운영하게 되었고 2년 동안 대한민국 1위의 검색엔진이 되었다고 한다.

설립자 김영렬 씨는 코시크의 서비스를 종료한 후 1998년에 웹 서비스 및 기업 네트워크 솔루션 제공 업체인 케이시크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각종 양방향 방송에 기술 지원을 하는 등 2020년 현재에도 운영 중이다.[8][9]

5. 외부 링크


[1] http://web.archive.org/web/19980117054153/http://kor-seek.chungnam.ac.kr/[2] 한국인들의 어문 감각과 직관에 부합하는 현행 표준 표기법은 2000년에야 국립국어원에 의해 정해졌다. 표기법이 어느 정도 자리잡은 지금도 혼란이 있는데, 당시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3]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웹페이지 수는 수백 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했다.[4] 1997년 4월 11일 한겨레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5] 1등의 자리는 1997년에 심마니에게 내줬지만, 여전히 인기 있는 검색엔진 중 하나였다.[6] 김영렬씨에 따르면 중단한다고하자 여기저기서 돈이 들어왔는데 일부러 거절했다고 한다.[7] http://web.archive.org/web/19971221172909/http://kor-seek.chungnam.ac.kr/cgi-bin/regist[8] 양방향 스마트과학퀴즈쇼 성황[9] 대전 SW선도기업 케이시크 KBS와 양방향 방송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