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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반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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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索泮
(? ~ 385)

전진의 인물. 자는 덕림(德林). 양주(涼州) 돈황군(燉煌郡).

2. 생애

대대로 양주의 잘나가는 호족 집안에서 태어나 협객으로 활동하다가, 장성하여서는 철이 들고 학문에 힘써 세상을 보좌할 재능을 지녔다 칭해졌다.

승평 5년(361년) 9월, 중호군 장옹(張邕)과 중령군 장천석이 보정을 맡게 되자, 삭반은 관군기실참군(冠軍記室參軍)에 임명되었다.

승평 7년(363년) 8월, 장천석이 임금 장현정을 시해하고 서평공을 자칭하자, 삭반은 사병(司兵)으로 옮겨졌다가 금중록사(禁中録事), 집법어연(執法御掾)을 역임하였다. 삭반이 부임하면 주부(州府)가 숙연해졌고, 군과 현도 행동을 조심하였다. 이후 삭반이 우림좌감(羽林左監)으로 승진하였을 때는 근면성실함으로 조정에서 칭찬받았다. 그 뒤에도 중루장군(中壘將軍), 서군(西郡) 태수, 무위(武威) 태수, 전융교위(典戎校尉)에 임명되어 지방을 돌아다니며 여러 지역을 다스렸다. 삭반의 통치는 관대하고 온화하여 이민족, 한족 할 것 없이 나란히 그 은혜를 입었다. 이에 전량의 군주 장천석 또한 삭반을 심히 공경하였다.

건원 12년(376년) 9월, 장천석이 전진의 천왕 부견에게 항복하면서 전량이 멸망하였다. 삭반을 만나본 천왕 부견은
"양주(涼州)에는 실로 군자가 많도다!"
라며 감탄하고는, 그가 하서(河西) 일대에 덕망이 높은 것에 기대어 양주자사 양희(梁熙)의 별가로 배속시켰다. 이후 삭반은 승진하여 건위장군, 서군태수를 역임하였다.

태안 원년(385년) 9월, 비수대전이 벌어지기 전에 서역 원정에 나섰던 여광이 귀환해 선소제 부견의 피살 소식을 듣고, 반란을 일으켜 양주자사 양희를 격파한 뒤 고장(姑臧)을 점거해 독립하였다. 그러자 양주 4산(四山)의 이민족들이 모두 여광에게 복종하였고, 양희는 무위태수 팽제(彭濟)의 배신으로 인해 여광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여광이 스스로 영 양주자사에 오르니, 대부분의 양주의 군현들이 모두 그에게 투항하였는데, 오직 주천(酒泉) 태수 송호(宋皓)와 서군태수 삭반만은 항복을 거부하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에 여광은 곧바로 주천군을 공격해 태수 송호를 살해하고, 이어서 서군도 공격해 성을 함락시켰다. 삭반을 사로잡은 여광은 그를 향해 꾸짖었다.
"과인은 서역을 평정한 뒤, 경사(京師)가 위험에 처했다는 급보를 듣고 장차 구원하러 달려가려 했던 것이다. 하나, 양희가 버릇 없게도 과인의 돌아가는 길을 끊었으니, 그는 조정의 죄인과 다름없다. 경은 어찌 이에 가담하여 군을 굳게 지키고, 길을 막아 양희와 똑같은 원악(元惡)을 범하였느냐!"
이에 삭반은 노여워하며 여광을 향해 말했다.
"장군이 받은 조서는 서역의 오랑캐를 평정하라는 것이지, 어찌 양주(涼州)를 어지럽히라는 것일까! 양공(梁公)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어 장군이 그를 해친 것이오? 이 삭반은 안타깝게도 힘이 부족해 성을 고수하지 못하였고, 임금의 원수도 갚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어찌 저족 역적 팽제(彭濟)와 같은 짓을 하겠는가! 주인이 멸망하면 신하도 죽을 뿐이다. 이는 항상 있어왔던 예(禮)이다."
여광은 무척 노하여 삭반을 저자에서 공개처형할 것을 명하였다. 삭반은 처형당하면서도 안색이 일절 변하지 않았고, 평온한 상태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삭반에게는 아우 삭릉(索菱)이 있었는데, 재능이 준수하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장천석 재위기에 임관하여 집법중랑(執法中郎), 용종우감(冗従右監)을 역임하였다. 이후 전량이 멸망했을 때 전진에 항복하여 복파장군, 전농교위 직책을 역임하였다가, 형 삭반이 여광에게 처형될 때 함께 살해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