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0:20:06

가렌/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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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전사와 할멈 #3. 데마시아를 위하여 #4. 구 설정
4.1. 구 배경 14.2. 구 배경 2

1. 장문 배경

가렌과 그의 여동생 럭스는 지체 높은 크라운가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가렌은 언젠가 자신도 목숨을 다해 데마시아 왕위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군 장교로서 화려한 전공을 세운 아버지 피테르와 불굴의 선봉대 검대장이었던 고모 티아나는 국왕 자르반 3세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고, 사람들은 언젠가 가렌 역시 왕자 자르반 4세를 섬기게 되리라 믿었다.

룬 전쟁 이후 세워진 데마시아 왕국은 건국 이후 수 세기 동안 온갖 갈등과 불화로 몸살을 앓았다. 데마시아군의 기동대 기사였던 가렌의 숙부는 어린 가렌과 럭스에게 성벽 밖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바깥세상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성벽이 없으면 백성들을 지킬 수 없다고 숙부는 말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어떤 존재가 비교적 평화로운 이 시기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존재가 추방된 마법사일지, 심연에서 기어 나온 피조물일지, 아니면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의 존재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숙부는 전투 중에 마법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가렌이 11살이 채 되기 전의 일이었다. 가렌은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어린 동생의 눈에 비친 공포를 보았다. 그리고 맹세했다. 마법이야말로 데마시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며, 다시는 마법이 데마시아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고. 확고부동한 긍지를 가지고 데마시아의 이념을 철저히 따라야만 마법으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었다.

12살이 되던 해, 가렌은 하이 실버미어의 크라운가드 저택을 떠나 군에 입대했다. 수습 기사로 군 생활을 시작한 가렌은 밤낮없이 훈련과 전술 연구에 매진했다. 시간이 갈수록 가렌의 정신과 육체는 데마시아산 강철로 만든 무기처럼 날카롭고 단단해졌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주군이 될 왕자 자르반 4세를 만났다. 급속도로 친해진 두 사람은 곧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 수년간 가렌은 데마시아의 전사이자 방벽 부대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전장을 휘저으며 활약하던 가렌은 곧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18살이 되던 해, 가렌은 프렐요드 국경을 향한 출정에 참여했다. 이때 가렌은 침묵의 숲에서 부패한 광신자들을 축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화이트록의 용맹한 수호자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국왕 자르반 3세는 가렌이 속한 부대를 위대한 도시 데마시아로 소환했다. 용기의 전당에서 모든 궁정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그 공을 치하하려는 생각이었다. 근래에 대원수 자리에 오른 티아나 크라운가드는 그 자리에서 불굴의 선봉대 선발 시험에 자신의 조카를 추천했다.

가렌은 시험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과 여동생 럭스, 그리고 영지에 거주하는 평민들이 가렌을 반겨 주었다. 지적이고 역량 있는 여성으로 자란 동생을 보고 기뻐한 것도 잠시, 가렌은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럭스에게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희미하게 피어올랐던 의심이 이제는 뚜렷한 불신이 되어 가렌을 괴롭혔지만, 가렌은 이내 의심을 떨쳐 냈다. '크라운가드' 가문의 일원이 숙부를 죽인 원수들과 같은 힘을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용맹하고 능숙하게 시험을 치른 가렌은 불굴의 선봉대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왕세자가 보는 앞에서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럭스와 어머니는 수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빛의 사자 수도회 일원으로 왕가를 섬겼지만, 가렌은 여동생을 최대한 멀리했다. 가렌은 세상 누구보다도 동생을 사랑했지만, 가까이하기에는 마음속에 꺼림칙한 뭔가가 있었다. 만약 동생에 대한 의심이 사실로 밝혀지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렌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신 전보다 더욱 전투에 몸을 던지고 훈련에 힘을 쏟았다.

불굴의 선봉대 신임 검대장이 전사하자, 동료 선봉대원들은 가렌을 그 후임으로 추천했다. 다른 후보자는 없었다.

확고한 의지로 데마시아를 수호하는 가렌은 어떤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가렌은 데마시아 최강의 군인이자 데마시아가 추구하는 위대하고 고결한 이념 그 자체이다.

2. 전사와 할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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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마녀는 데마시아 병사의 목에 밧줄을 감아 팽팽하게 조여 맸다. 병사는 목소리를 내 보려 했지만 그건 마녀가 정한 규칙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한 번만 더 규칙을 어기면 마녀는 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군모를 요강으로 쓸 것이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마녀는 계속해서 밧줄을 조이면서 기억의 덩굴이 그의 머리에서 새어 나와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녀는 언제든 병사의 머리를 베어버릴 수 있었다. 허나 그러면 합당치 않을 것이다. 잿빛 피부의 점쟁이 마녀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그녀에게 원칙이 없다는 말은 그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다. 마녀에겐 규칙이 있었다. 규칙이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분명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병사가 규칙을 어길 때까지 마녀는 자리에 앉아 그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이다. 그의 행복, 그의 기억, 그의 정체성까지 전부 다. 그러고 나면 댕강, 요강이 생길 것이다.

별안간 동굴 입구 언저리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마녀의 보초병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연달아 들려오는 두 번째, 세 번째 비명소리.

일이 흥미진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묵직한 군홧발로 미끄러운 동굴 바닥 위를 한참 동안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으로 보아 포기를 모르는 자인 것 같았다. 사방을 울리는 군홧발 소리가 잠잠해지자 딱 벌어진 어깨와 수려한 용모의 남자가 맞은편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굴 속 횃불이 그의 진중하고 단호한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흉갑 위로는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녀는 동굴 뒤켠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갑옷에서 풍겨오는 시큼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을 억제하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이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널찍한 검을 손에 들고 돌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그녀가 만든 왕좌를 향해 올라왔다.

마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칼날을 치켜들어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길 기다리며. 제아무리 용맹한 군사라도 그 이후의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지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남자는 칼집에 검을 꽂고 자세를 낮추어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마녀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마녀와 시선을 맞대고 한참이나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옆에 목 매어 있는 병사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나를 이겨 먹으려는 수작인가? 내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려고?’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재미가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마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종되거나 버려진 자들의 기억을 먹고 사는 마녀시죠. 동네 아이들 말로는 이 동굴만큼이나 나이가 지긋하시다고요. 일명 동굴부인이라 불리시더군요.” 남자가 호기롭게 말했다.

“하! 내 진짜 별명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다니. 돌할멈. 이게 내 별명이야. 왜? 돌할멈이라 부르면 두드려 맞을까 봐 겁이라도 났나? 아부라도 떠시게?” 마녀가 켈켈거리며 웃었다.

“아닙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그저 무례한 별명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남의 집에 찾아와서 주인을 모욕하면 안 되니까요.”

켈켈거리던 마녀는 남자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웃음을 멈췄다.

“그러는 넌?” 마녀가 물었다. “넌 누구냐?”

“데마시아의 크라운가드, 가렌입니다.”

“그래, 데마시아의 크라운가드 가렌. 이제부터 규칙을 설명해 주지.” 마녀가 말했다. “넌 실종된 병사를 찾으러 왔어. 맞지?”

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 죽일 생각인가?” 마녀가 물었다.

“전 거짓말은 못 합니다. 오늘 당신과 나, 둘 중 한 명은 죽게 되겠죠.”

마녀가 켈켈 웃었다.

“패기가 마음에 드는군. 갑옷으로 무장했으니 가능할지도 모르지.” 마녀는 늙고 늙은 자신의 얼굴 옆으로 손을 올리더니 병사의 목을 맨 밧줄을 더욱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래도, 규칙은 지켜야 해. 규칙을 지키기도 전에 검을 휘두르면 이 밧줄을 확! 잡아당겨 버릴 거야. 그러면 전우의 목이 뚝 부러지는 소리가 들릴 테고, 넌 죽을 때까지 그 소리에 시달리겠지.”

마녀는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보였다.

가렌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마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럼, 이제 규칙을 알려주지. 만일 네 녀석에게 이 병사 놈의 머릿속에 있는 그 어떤 기억보다 달콤한 기억이 하나라도 있으면 내게 넘겨. 그럼 이놈을 양보하지.” 마녀는 가렌의 생각을 읽기 위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만일 못하겠다면…” 밧줄을 잡은 마녀의 손에 힘이 실렸다. “우리 중 한 명이라도 계약을 어기려고 하면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무조건 대가를 치러야 해.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가렌이 말했다.

“그럼 네 얘기부터 들어보자고. 이 병사 놈의 목숨을 구하려는 이유가 뭐지? 병사 놈이라니 내가 너무 무례했나? 이름을 알면 이름을 부를 텐데 벌써 잊어버렸지 뭐야.” 마녀가 말했다.

“이름은 저도 모릅니다. 제 부대에 합류한 지 얼마나 안 되었으니까요.” 가렌이 답했다.

마녀는 가렌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풋내기 녀석,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릴 적 기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가렌이 말했다. “여동생과 함께 삼촌의 등에 탔던 기억입니다. 삼촌은 녹서스의 용 사냥개처럼 짖는 흉내를 내셨죠. 몇 시간 동안이나 함께 웃었습니다. 좋은 기억입니다. 당신 같은 인간이 벌인 그 이후의 일 따위엔 전혀 물들지 않은 기억이죠.”

마녀가 쭈글쭈글한 눈꺼풀을 긁었다.

“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군.” 마녀가 말했다. “내가 즐거운 기억을 원하는 줄 아나?” 마녀는 목 매인 병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그의 머리에서 자신의 머리로 흘러들어오는 기억 줄기를 음미했다. “난 모든 것이 들어있는 기억을 원해. 고통, 혼란, 분노. 난 그런 기억을 먹을 때 회춘하거든.”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자신의 주름진 볼을 훑으며 마녀가 웃었다.

“그럼 삼촌의 부고를 받고 슬퍼했던 기억을 드리죠.” 가렌이 말했다.

“그것도 별로야. 참 재미없는 친구로군.” 마녀가 밧줄을 더 팽팽하게 당겼다.

그 때 가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빼 들었다. 마녀는 무모한 젊은 전사를 죽일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가렌은 마녀를 공격하는 대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숙이고 칼날 끝이 마녀의 복부를 향하도록 마녀의 무릎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제 머릿속을 뒤져 보시죠. 원하시는 기억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전 아직 젊지만 많은 것을 보았고, 당신이 좋아할 만한 상류층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하나 이상의 기억을 가져가시면 이 검이 당신을 찌를 겁니다. 그러나 단 하나뿐이라면 어떤 기억이든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마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건방진 애송이 같으니! 고작 제 기억 하나가 평생에 걸쳐 쌓은 동료의 기억보다 나을 거라고?

이 젊은이의 용기, 그리고 무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마녀는 혀로 입술을 적시며 몸을 숙이고 가렌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의 기억을 한 겹씩 벗겨냈다.

백석 전투에서의 승리가 보였다. 상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맛본 라이어버크 고기의 풍미가 입속을 감돌았다. 브래시모어 들판에서 숨을 거둔 전우를 붙들고 오열하던 때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동생이 보였다.

동생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느껴졌지만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두려움? 불쾌함? 아니면 불안감?

마녀는 가렌의 의식 속 기억을 지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갔다. 손가락으로 기억을 골라내며, 함박미소를 짓는 금발 머리 소녀와 관련 없는 생각은 모두 옆으로 치워 버렸다. 갑옷 때문에 그 과정이 수월하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기억을 골라냈다.

한참을 골라낸 끝에 어린 시절의 기억에 당도했다. 남매는 작은 인형을 갖고 놀고 있었다. 가렌의 군인 인형이 동생의 마법사 인형을 죽일 기세로 좇고 있었다. 동생은 가렌에게 불공평하다고 투덜댔다. 마법사 인형이라면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면서. 가렌은 비웃으며 군인 인형으로 마법사 인형을 넘어뜨리고 옆으로 치워 버렸다. 화가 난 동생은 소리를 지르더니 손가락 끝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렌은 눈이 부시고, 혼란스럽고, 또 무서웠다. 어머니가 와서 동생을 데려가긴 했지만 방을 나서기 전 동생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없던 일로 해 달라고 간청했다. 진짜가 아니라 장난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가렌은 넋 나간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장난일 뿐이다. 동생은 마법사가 아니다. 마법사일 리가 없다. 가렌은 무의식 속 깊은 곳으로 기억을 숨겨 버렸다.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마녀는 비슷한 기억을 계속해서 찾아냈다. 모두 하나같이 눈 부신 빛이 쏟아지며 끝이 났다. 무의식 속 깊은 곳에 사랑과 공포, 부정과 분노, 배신감과 보호 심리가 뒤섞인 불협화음 같은 감정이 묻혀 있었다.

가렌의 말이 맞았다. 좋은 기억이었다. 목 매인 병사의 기억을 모두 합쳐도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마녀는 미소를 지었다. 가렌이 그녀의 복부를 향해 검을 올려놓은 것은 똑똑한 처사였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빼앗긴 기억은 그 존재조차 망각되므로 원하는 만큼 기억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뻗으며 마녀는 빛의 소녀와 관련된 기억을 찾아 가렌의 머릿속을 샅샅이 뒤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을 골라낸 후에야 가렌의 머릿속에서 빠져나왔다.

“좋아.” 마녀가 눈을 뜨며 말했다. “이거면 되겠어.” 마녀가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거래는 성사됐어. 하나의 생명을 위한 하나의 기억. 이제 이놈을 데리고 당장 나가.”

가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 매인 병사에게로 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병사를 일으켜 세우고 마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동굴 밖으로 뒷걸음질 치며 걸었다.

‘별난 놈. 내가 계약을 어길까 봐 걱정되나 보군. 이미 어긴 줄도 모르고.’

불현듯 가렌이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부축하고 있던 동료에게서 손을 떼고 순식간에 진격해 왔다. 시선은 그녀의 두 눈에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즉흥적인 도발에 마녀는 전율을 느꼈다. 가렌은 너무 크고, 너무 굼뜨고, 너무 느려서 거추장스러운 검을 겨누기도 전에 그녀의 공격을 받을 것이었다. 가렌의 기억에 목마른 마녀는 손가락 끝에서 어둠의 에너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네 눈에선 수년에 걸쳐 모인 감미로운 기억들이 보여.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내가 전부 마셔 버…’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녀의 몸속에서 느껴졌다. 쇠였다. 가렌의 갑옷에서 풍겨오던 시큼한 악취가 종전보다 더 진하게 그녀의 기도를 타고 올라왔다.

마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꽂힌 가렌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희미해진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가렌의 갑옷 위로 검붉은 피가 떨어졌다.

녀석은 생각보다 빨랐다.

“무슨 짓이야?” 입안에 무언가 차오르는 듯 불분명한 발음으로 마녀가 물었다.

“계약을 어기셨습니다.” 가렌이 답했다.

지저분해진 이를 드러내며 마녀가 미소 지었다. “어떻게 알았나?”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짐을 덜어낸 듯이.” 가렌이 답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뭔가 잘못된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돌려주십시오.”

차가운 동굴 바닥 위의 진흙에 피가 섞이는 동안 마녀는 생각에 잠겼다.

가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억을 되돌려 놓으며 마녀는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가렌은 고통 속에서 눈을 감고 이를 꽉 깨물었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녀는 그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의 지친 두 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불쌍하고도 어리석은 녀석이었다.

“애초에 거래는 왜 한 거야?” 마녀가 물었다. “생각보다 세던데. 훨씬 더 세던데. 밧줄이고 뭐고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전에 나를 산산조각 낼 수 있었을 텐데. 머릿속은 보여줄 필요도 없었잖아?”

“남의 집에 와서 기회도 주지 않고 피부터 흘리게 하면… 무례하기 때문이죠.”

마녀가 켈켈거리며 웃었다.

“그게 데마시아의 규칙인가?”

“제 규칙입니다.” 가렌이 말했다. 그리고 마녀의 가슴에서 검을 빼냈다. 상처가 드러나며 피가 흘러나왔고, 마녀는 쓰러지자마자 숨을 거뒀다.

가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우를 일으켜 세워 데마시아로 돌아가는 먼 길을 떠났다.

‘규칙이 없다면…’ 가렌은 생각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3. 데마시아를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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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머나먼 북쪽 땅, 포스배로우에 마지막으로 왔던 게 언제였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7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오빠 가렌이 훈련 차 불굴의 선봉대를 이끌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럭스와 나머지 가족들은 증조부 포시안의 묘지에 참배를 하기 위해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묘지로 향하는 숲속 길은 끝도 없이 구불구불했고 양옆은 바위투성이의 가파른 협곡이었다. 게다가 쉴새 없이 비가 내리는 바람에 럭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럭스는 증조부의 묘지가 용기의 전당 같은 웅장한 대리석 건물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깎아지른 듯 높은 절벽을 배경으로 풀 덮인 봉분이 달랑 하나 솟아 있는 광경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봉분 앞에 세운 대리석 묘비에는 럭스의 증조부가 왜 전설 속 영웅인지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포시안은 절벽에서 내려온 악마와 싸웠고, 악몽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듯한 무시무시한 악마의 시커먼 심장에 데마시아의 검을 찔러넣어 치명상을 입혔다.

그때도 비가 내렸고,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음물처럼 차가운 북쪽의 폭우가 짐승의 송곳니처럼 뾰족뾰족한, 데마시아와 프렐요드를 가르는 산맥을 적셨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 일어난 폭풍우가 봉우리 반대편에서 넘어와, 혹독한 바람에 줄기가 구부러진 데마시아의 파릇파릇한 소나무 숲을 덮쳤다. 서쪽과 동쪽에 솟은 산맥은 푸르스름한 안개에 싸여 윤곽이 희미했다. 어두컴컴한 하늘은 자못 위협적이어서, 오빠가 화를 낼 때의 분위기가 생각났다. 북쪽은 나무가 무성한 고원 지대로, 험준한 바위투성이 절벽과 날카로운 각도로 패인 협곡이 가득했다. 게다가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온갖 포악한 괴물과 야수가 들끓는 위험한 땅이었다.

럭스는 2주일 전에 데마시아를 떠나 에데사로, 다시 피나라와 리서스를 거쳐 벨로루스를 지나 칼날부리의 도시 하이 실버미어에 도착했다. 기사의 바위 아래에 자리 잡은 집에서 가족과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말을 몰아 데마시아의 북서쪽 국경 지대로 들어섰다. 마치 깃대에서 깃발이 찢어져 나가듯, 데마시아의 중심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마을과 주민들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옥한 땅이 완만한 구릉 지대를 이루던 평원은 가시금작화와 엉겅퀴 덤불만 드문드문한, 바람이 몰아치는 척박한 땅으로 바뀌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구름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은색날개 칼날부리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며 내는 새된 울음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다. 프렐요드의 두껍디두꺼운 얼음이 내뿜는 냉기를 실은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고, 북쪽으로 나아갈수록 도중에 만나는 정착지의 방어벽은 점점 더 높아졌다. 포스배로우까지의 여정은 길었고 또 피곤했다. 하지만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럭스는 짧게나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곧 사원에 들어갈 거야, 불꽃별이." 그녀는 타고 있는 말의 갈기를 쓸어 주었다. "거기 가면 따뜻한 마구간에서 곡물을 먹을 수 있어. 약속할게."

먼 길에 피곤해진 말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코를 힝힝거리더니, 조급하게 발을 굴러댔다. 럭스는 박차를 가해 바퀴 자국이 깊이 패인 도로를 따라 말을 몰았다. 포스배로우의 정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포스배로우는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뱀자리강 강변에 자리 잡은 도시였다. 강물은 세찬 기세로 산맥을 지나 서쪽 해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매끈매끈한 화강암을 쌓아 올린 도시의 성벽이 산을 따라 늘어섰고, 성벽 안에는 돌과 잘 건조시킨 목재로 만들고 암녹색 기와로 지붕을 덮은 건물이 즐비했다. 빛의 인도자 사원은 동쪽에 우뚝 솟은 첨탑이었다. 어스름이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탑 안에 피워놓은 화로에서 나오는 불빛이 마치 환영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럭스는 파란 망토의 후드를 젖히고 머리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황금빛 긴 머리카락이 젊음이 넘치는 고귀한 얼굴을 감쌌다. 바다처럼 파란 눈은 단호한 의지를 담고 반짝였다. 럭스는 안장에 지팡이를 묶어두었던 가죽 끈을 풀고, 황금과 흑단으로 만든 지팡이 자루를 가볍게 잡았다. 테두리를 강철로 두른 정문 위 감시 망루에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물푸레나무와 주목나무로 만든 강력한 장궁을 들고 있었다.

"멈춰라, 여행객이여." 경비대원 하나가 말했다. "성문은 내일 아침에나 열릴 거다."

"내 이름은 럭산나 크라운가드입니다." 럭스가 말했다. "늦었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내 증조부께 예를 표하고 싶어 이렇게 먼 길을 왔답니다. 그러니 들여보내 준다면 고맙겠어요."

남자는 눈을 찡그려 뜨고 어둠 속 럭스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그녀를 알아보고는 휘둥그레졌다. 럭스는 포스배로우에 오지 않은 지 꽤 되었으나, 가렌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럭스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절대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레이디 크라운가드 아니십니까!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황급히 외치고는 성벽 아래쪽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성문을 열어라."

럭스는 불꽃별이를 앞으로 몰았다. 묵직한 강철 사슬이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며 단단한 목재로 만든 성문을 감시 망루 안으로 들어 올렸다. 럭스가 열린 성문을 통과하자 의장대 열 명이 황망히 뛰쳐나와 그녀를 맞았다. 가죽 흉갑 위에 날개 달린 검 모양의 은핀으로 여민 파란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모두 긍지 가득한 데마시아 군인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어깨는 축 늘어졌고 눈빛은 기진맥진했다.

"포스배로우에 잘 오셨습니다." 아까 망루에서 내려다보던 경비대원이 말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께서 오신 걸 알면 지젤 치안판사님도 안도하실 겁니다. 치안판사 댁까지 모셔다드리도록 호위대를 편성하겠습니다."

"고마운 말이지만 사양할게요." 럭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가 왜 '안도'라는 표현을 썼는지 의아했다. "빛의 인도자 사원에서 묵기로 퍼닐 님과 미리 약속해 두었어요."

럭스는 말을 몰아 가려다가, 경비대원이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낌새를 채고는 불꽃별이의 고삐를 살짝 당겼다.

"크라운가드 님..." 경비대원이 말했다. “...저희의 악몽을 끝내 주시려고 오신 겁니까?"



빛의 인도자 사원은 따뜻하고 쾌적했다. 럭스는 불꽃별이를 마구간에 넣어준 다음 본관에서 퍼닐 여사제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포스배로우 부근의 숲과 협곡에 어둠의 마법이 깃들었다는 소문은 데마시아 수도에 자리한 빛의 인도자 사원에도 전해졌다. 그래서 광휘단의 카히나가 럭스에게 조사를 청한 것이었다.

럭스는 도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암암히 흐르는 어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림자 속에 숨은 존재가 줄곧 지켜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다 마주친 주민 몇 명은 피로에 젖은 기색으로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포스배로우 전체에 두려움이 짙은 먹구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게다가 럭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않았다.

"지젤 치안판사 님의 아드님도요." 퍼닐이 말했다. 아마빛깔 머리카락에 빛의 인도자 치료사가 입는 희끄무레한 로브를 걸친 여성이었다.

"아드님이 왜요?" 럭스가 물었다.

"이틀 전에 실종되었어요. 어둠의 마법사가 뭔가 끔찍한 목적 때문에 그 아이를 납치해 갔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나요?”

“그 질문은... 내일 아침에 다시 물어봐 주세요.” 퍼닐이 말했다.



럭스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쿵쿵거렸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바람에 목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머릿속은 공포로 가득 찼다. 악몽 속에서 짐승의 발톱 같은 갈고리가 럭스의 몸을 땅 밑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진흙이 입속을 가득 채웠으며, 어둠이 그녀의 빛을 꺼뜨리려 했다. 럭스는 눈을 깜빡여 악몽의 마지막 잔상을 몰아냈다. 눈 한 켠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스르르 물러나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입속에서 썩은 우유 맛이 났다. 마법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럭스는 손바닥에 광채를 피워올렸다. 빛이 방 안을 밝히면서 질기게 남아 있던 악몽의 흔적이 사라졌다. 럭스의 온몸에 따스함이 번져나갔다. 익숙한 진줏빛 광휘가 그녀의 피부를 감싸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럭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던 빛이 사라졌고, 이제 방 안을 밝히는 것은 덧문을 닫아놓은 창으로 비어져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살뿐이었다. 럭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마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끔찍한 환상을 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조금 전 꾸었던 악몽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려 했지만,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시큼한 악취가 진동하는 숨결을 내뿜으며 온몸을 짓누르던 얼굴 없는 어둠뿐이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럭스는 얼른 옷을 꿰입고 방구석에 세워놓았던 지팡이를 들었다. 사원 주방으로 내려온 그녀는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빵과 치즈로 아침을 준비했다. 하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입 안에 무덤 속 흙 같은 맛이 퍼지는 바람에 접시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이제 답을 아시겠죠?" 퍼닐이 그렇게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와 럭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퍼닐의 눈 밑은 수면 부족으로 자줏빛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고, 어젯밤에는 난로 불빛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누르께한 피부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이제야 럭스는 퍼닐이 생기 하나 없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슨 꿈을 꾸셨나요?” 럭스가 물었다.

“남에게 털어놓고 위안을 얻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꿈이죠."

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 전체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럭스가 마구간에 들어서자 불꽃별이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양쪽 귀를 머리에 바싹 붙을 정도로 내려뜨리고 눈은 휘둥그레져 있었다. 말은 럭스에게 코를 마구 비벼댔다. 럭스는 진주처럼 뽀얀 녀석의 목과 어깨를 쓸어주었다.

"너도니?" 럭스가 묻자, 녀석은 갈기를 마구 흔들었다.

럭스는 얼른 말에 안장을 얹고 포스배로우의 북쪽 성문으로 향했다. 동이 튼 지도 한 시간이 지났지만, 도시는 여전히 아침의 활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간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고, 빵집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풍기지 않았으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뚱한 표정의 상인 몇 명만이 느릿느릿 가게 문을 여는 중이었다. 데마시아 인은 규율에 충실하고 근면성실한 사람들이었기에, 국경 지대 도시가 이렇게 하루를 늦게 시작하는 것은 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포스배로우 주민들이 럭스가 보냈던 것과 같은 밤을 보냈다면 일찍 일어나지 않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럭스는 성문을 통과하여 널찍한 들판으로 나갔고, 불꽃별이의 근육이 풀릴 때까지 달리게 해준 다음 진흙투성이 도로로 들어섰다. 불꽃별이는 오래전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으나 전속력으로 달리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 녀석, 너무 용쓰지 마." 럭스는 숲으로 들어서며 한마디 했다.

소나무와 들꽃의 향이 공기 중에 차올랐다. 럭스는 북쪽 지역 특유의 그 강렬한 자연의 향취를 마음껏 들이켰다. 울창한 나뭇잎 지붕 틈새로 비스듬한 햇살 줄기가 내리꽂혔다. 젖은 흙냄새 때문에 잠시 지난 밤 악몽이 떠오르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럭스는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길은 구불구불거리며 북쪽으로 이어졌다. 럭스는 한 손을 들어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살 줄기로 뻗었다. 햇살이 닿자 그녀 몸속의 마법이 요동쳤다. 럭스는 내면의 빛이 영약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마법의 힘이 오감을 가득 채우자 그녀 주변의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숲의 온갖 빛깔들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지며 생명력으로 충만해졌다. 빛이 눈 부신 입자가 되어 공기 중으로, 나무의 숨결 속으로, 땅이 내쉬는 탄성 속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흐르는 에너지를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가냘픈 풀잎 한 줄기에서부터 강철처럼 올곧은 자작나무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이 세계의 심장에 닿아 있다는 모든 존재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숲속을 달린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길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럭스의 기억이 맞다면 동쪽으로 가는 길은 나무꾼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이어졌고, 서쪽으로 가는 길은 매장량 많은 은광을 둘러싼 정착지로 이어졌다. 럭스의 아버지가 그 은광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럭스가 제일 좋아하는 망토 핀도 그 은광의 깊숙한 갱도에서 캐낸 은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두 길 사이에는 좁다란 오솔길이 하나 나 있었다. 말을 타든 걷든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아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럭스가 7년 전에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당장 저 길로 들어서지 않는 거지?' 사실 럭스가 그 길을 택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증조부의 묘지에 예를 표하러 왔다는 말은 그냥 해본 소리일 뿐이었다. 럭스는 눈을 질끈 감고 양팔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마법의 힘이 손가락과 지팡이 끝에서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고, 숲속의 빛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 속에는 빛과 그림자의 상반된 어조가 뒤섞였고, 섬광 같은 색깔과 강렬한 빛이 혼재했다. 럭스는 아득한 저편의 별빛, 다른 세상과 사람들을 적시던 빛이 안개처럼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데마시아의 빛이 어둠 속으로 떨어질 때, 럭스는 움찔했다. 데마시아의 빛이 살아 있는 존재에게 내리는 순간, 럭스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안장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온몸의 감각이 다른 필멸의 존재들을 넘어 멀리까지 뻗어 나가며, 저주처럼 이 땅에 파고들어 있는 힘을 찾아 나섰다. 해는 이제 거의 하늘 꼭대기에 떠 있었다. 럭스는 숲속의 빛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그림자도 깃들지 못하는 곳에 깃들어 있는 그림자가 느껴졌다. 빛만이 존재해야 하는 곳에 어둠이 숨어 있었다. 숨이 콱 막히면서 누가 움켜쥐기라도 한 듯 목이 갑갑해졌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면서 무겁게 내리눌렸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고 싶은데 깨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숲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도 자취를 감추었고, 살랑거리던 풀잎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은색날개 칼날부리들도 침묵을 지켰고, 동물들이 내던 소리도 사라졌다. 수의를 단단하게 여밀 때 나는 듯한, 사그락거리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잠들어라...

"싫어." 럭스는 힘주어 말하며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권태가 그녀의 온몸을 보드라운 담요처럼 감싸 안았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럭스의 머리가 앞으로 수그러졌다. 그리고 눈이 감겼다.

갑자기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와 금속이 긁히며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럭스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차디찬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허파에 스며드는 냉기에 다시 한 번 졸음이 날아갔다. 럭스는 눈을 깜빡여 그림자의 잔상을 몰아내고 몸에 들어온 차디찬 공기가 내면의 마법을 일깨우도록 기다렸다. 말을 탄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굴레가 잘랑거리고,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며 짤깍거렸다.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탄 사람들이었다. 최소한 네 명이고, 어쩌면 더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럭스는 두렵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특히 사람이라면 더욱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지금은 이 숲속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 모를 어둠이 훨씬 더 생생하게 두려운 존재였다. 그 힘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고, 그 능력은 마치 사람의 한계를 시험해 보는 듯했다. 럭스는 불꽃별이의 고삐를 당겨, 다가오는 사람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프렐요드 사람들일까?' 하지만 이곳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프렐요드의 약탈자들이 여기까지 진출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산악지대 요새가 그들의 손에 떨어졌다면 럭스에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럼 무법자들?' 그렇다면 럭스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럭스는 언제라도 강력한 빛을 쏘아낼 수 있도록, 마법을 손으로 집중시켰다.

앞쪽의 나뭇잎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말을 탄 사람 다섯 명이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이는 방어구로 감싼, 완벽하게 전투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타고 있는 말은 하나같이 가슴팍이 떡 벌어진 회색 준마에 키는 180센티미터가 족히 넘어 보였고, 짙은 파란색 천으로 호화롭게 치장을 했다. 다섯 명 중 넷은 검을 뽑아 들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자루가 금으로 된 검을 파란색 칼집에 넣어 등에 메고 있었다.

“럭산나?” 남자가 말했다. 얼굴을 가린 투구 때문에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렸다.

남자가 투구를 벗고 짙은 빛깔의 머리칼과 화강암으로 깎아놓은 듯한 얼굴을 드러내자, 럭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자의 얼굴은 그야말로 데마시아의 정신을 형상화해 놓은 듯한 생김새여서, 왜 데마시아가 아직도 그 얼굴을 동전에 새겨넣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가렌 오빠." 럭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들은 럭스의 오빠와, 불굴의 선봉대 네 명이었다.

부대라고 하기에 네 명은 너무나 적은 숫자이지만, 불굴의 선봉대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영웅이자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날에는 갖가지 무용담이 깃들어 있었고, 그들의 용맹은 데마시아 방방곡곡의 술집과 난로 곁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로 전해졌다.

검은 머리칼과 예리한 눈매, 수염을 기른 남자는 디아도로라는 검사로, 혼자서 꼬박 하루 동안 무장한 트리파르 군단을 상대로 애도의 성문을 지켰던 일화로 유명했다. 그 옆의 남자는 잔델의 사바토르라는 이름으로, 100년마다 한 번씩 깨어나 피의 향연을 즐기는 흉측한 용지렁이를 처치한 것으로 명성을 떨쳤다. 덕분에 용지렁이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놈의 송곳니는 지금 자르반 왕의 알현실에 걸려 있고, 그 옆에는 그의 아들정체불명의 여인이 함께 가져온 용의 해골이 걸려 있었다.

사바토르보다 체격은 작지만 위압감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는 쪽은 바리야라는 여전사로, 던홀드에서 바다늑대 함대 습격 작전을 지휘했다. 바리야는 놈들의 배를 불태우고 함대를 거의 궤멸시켰을 뿐 아니라 광전사 우두머리를 베었다. 바리야의 쌍둥이 형제인 로디안은 먼 북쪽 프렐요드의 항구인 프로스텔드까지 배를 타고 나아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그 누구도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와 행패를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럭스는 그들 하나하나를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 밤 식탁에서 그들의 무용담을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진력이 났다. 물론 그들은 데마시아의 영웅이었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바토르가 용지렁이의 목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거나, 바리야가 쪼개진 노로 그렐몬을 후려쳐 죽였다는 얘기는 열 번도 넘게 들어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럭스와 불굴의 선봉대는 포스배로우로 향했고, 가렌은 여동생과 나란히 말을 몰았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는 해가 중천을 넘어설 때까지 도시를 돌아다니며 행방불명된 치안판사의 아들의 행적과 더불어 무언가 사악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수색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했다. 하기야 이토록 요란하게 행차했으니 그 어떤 악마의 종복이라도 일찌감치 달아나 어디론가 숨어버렸을 것이었다. 묵직한 갑옷을 걸친 다섯 명의 전사가 기척 없이 돌아다니기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으니까. 럭스 또한 마법의 힘이 돕지 않았더라면 아까 갈림길에서 어둠의 힘이 덮쳐드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너 진짜로 포시안 증조부님의 무덤에 가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그렇게 말했을 텐데?"

"그랬지." 가렌이 대꾸했다. "놀랍지는 않은데, 어머니께서 네가 전에는 여기 오는 걸 싫어했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아서."

"어머니가 별 걸 다 기억하시네."

"그러게 말이야." 가렌은 여동생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고귀하신 럭산나 크라운가드께서 무언가를 안 좋아하시면 하늘은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퍼붓고, 숲속 동물들도 모두 자취를 감추지 않던가?"

"내가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애 같다는 소린데."

"전에는 그랬잖아." 가렌은 싱긋 웃었지만, 말 속의 뼈를 다 감추지는 못했다. "네가 무슨 일을 벌이면 그 뒷수습을 하는 건 내 몫이었지. 어머니께선 항상,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르든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럭스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절대 오빠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사람들은 가렌이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성격이며 전술과 계략에 밝은 건 전쟁터에서만 그럴 뿐이라고 여겼다. 가렌이 예민하다거나 교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럭스는 그것이 사람들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가렌이 저돌적인 전사라는 것은 옳았다. 하지만 저돌적이라고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오빠는 그 아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럭스가 물었다.

가렌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굳이 말하라면, 그냥 가출한 것 같은데. 아니면 모험이라도 떠났다가 숲에서 길을 잃은 거겠지."

"어둠의 마법이 그 아이를 납치했다고는 생각 안 하는 거야?"

"그것도 가능한 얘기지만, 바리야와 로디안이 불과 반 년 전에 여길 지나갔었는데 수상한 마법 같은 건 찾아내지 못했어."

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스배로우에서 하룻밤 자고 왔어?"

"아니." 가렌이 대답했다. 그들은 도시가 보이는 쪽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건 왜 물어봐?"

"그냥 궁금해서."

"저기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사바토르가 일몰의 햇빛을 가리느라 한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말했다.

가렌의 시선이 부하가 말하는 곳으로 향하더니,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셨다. 몸가짐도 일순간에 달라졌다. 온몸의 근육이 당장이라도 무슨 행동을 취할 듯 팽팽히 긴장했고, 정신을 집중하느라 눈빛이 매서워졌다. 불굴의 선봉대는 즉각 가렌의 옆에 늘어서며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럭스가 말했다.

화가 잔뜩 난 군중이 비틀비틀 걷고 있는 어떤 남자의 뒤를 따라 시장 광장으로 몰려가는 중이었다. 군중이 뭐라고 외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외침이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선봉대! 전속력으로." 가렌이 박차를 가하며 말했다.



불꽃별이도 아주 빠른 말이었지만 곡물을 먹여 키우는 데마시아의 군마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럭스가 성문을 통과할 무렵, 성난 외침 소리는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불꽃별이의 옆구리는 땀으로 흠뻑 젖었고, 말굽은 연신 자갈과 부딪치며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럭스는 시장 광장에 이르자 불꽃별이를 억지로 멈춰세우고는 말등에서 뛰어내렸다. 눈앞에는 데마시아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안 돼, 이건 안 돼..." 럭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경비대원 두 명이 흐느껴 우는 남자 하나를 질질 끌어 보통 때는 가축을 사고팔 때 쓰는 경매용 단 위로 데려가고 있었다. 남자가 걸친 옷은 피에 절었고, 애처로울 정도로 울부짖고 있었다. 사법관을 상징하는 흰 족제비 털로 가장자리를 두른 로브를 입고 데마시아 치안판사의 청동 날개핀을 꽂은 여자가 남자 앞에 섰다. 치안판사 지젤인 듯했다. 포스배로우 주민 수백 명이 광장을 메운 채 남자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그들의 증오심이 어찌나 강렬한지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럭스의 몸속에서 마법의 힘이 솟아나 피부 표면으로 올라왔다. 럭스는 내면의 빛을 애써 억누르며 군중을 헤치고 남자 쪽으로 나아갔다. 가렌이 단 위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알도 다얀." 지젤 치안판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격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그대를 살인자이자 어둠의 마법사에게 협조한 자로 부르겠다!"

"아니에요!" 남자가 울부짖었다. "당신들은 몰라요! 그것들은 괴물이었어요!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요! 놈들의 진짜 얼굴을! 어둠, 오로지 어둠뿐이었다고요!"

"어서 자백해라!" 지젤이 외쳤다.

군중이 화답하듯 소리를 질렀다. 복수를 갈망하는 먹먹한 외침이 모두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당장에라도 경매 단으로 돌진하여 알도 다얀의 몸뚱이를 산산조각낼 기세였다. 아니, 연단의 각 모서리에 검을 뽑아든 채 서 있는 불굴의 선봉대 네 명이 아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냐고?" 럭스는 겨우 오빠 곁으로 와서 물었다.

가렌은 여동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단 위에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놈이 잠들어 있던 자기 아내와 아이를 죽였어. 그러고는 집 밖으로 뛰쳐나와 거리에 있던 이웃 사람들에게 도끼를 휘둘렀지. 세 명이나 희생당한 끝에 간신히 붙잡았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제야 가렌은 시선을 돌려 럭스를 보았다. "왜 그랬겠어? 이 부근에 마법사가 있는 게 틀림없어. 어둠이 이 지역에 스며들어 있는 거야. 선량하고 충실한 데마시아 인을 부추겨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할 수 있는 건 어둠을 퍼뜨리는 마법사뿐이겠지."

럭스는 잔뜩 화가 나서 쏘아붙이려다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리고 가렌을 밀어붙이고 계단을 올라가,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레이디 크라운가드? 왜 이러십니까?" 지젤이 말했다.

럭스는 지젤을 무시하고, 남자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남자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맞았는지 한쪽 눈이 부어올라 거의 감겨 있었다. 코에서는 피와 콧물이 섞인 액체가 흘러내렸고, 찢어진 입술 위로는 침이 여러 줄기 늘어져 있었다.

"나를 봐요." 럭스가 말하자, 선해 보이는 남자의 눈이 럭스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려 기를 썼다. 흰자위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고 눈가는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어 며칠 동안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선량한 시민 다얀이여, 왜 가족을 죽였는지 내게 말해 주세요. 왜 이웃을 습격했는지 말해 보세요." 럭스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가족, 이웃이 아니었어요. 내 눈으로 봤습니다. 놈들은... 괴물이었어요..." 남자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둠이 덮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우리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놈들의 진짜 얼굴을 봤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그래야만 했어요! 죽여야만 했다니까요!"

지젤 치안판사가 다가왔다. 럭스는 고개를 들었고, 치안판사의 얼굴에 영혼이 찢길 듯 괴로운 슬픔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지난 이틀 동안 십 년은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치안판사는 역겹다는 눈길로 알도 다얀을 내려다보았다. 양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네가... 우리 루카를 죽였나?"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에 사무쳤다. "네가 내 아들을 죽인 거냐? 그 애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복수를 요구하는 외침 소리가 군중을 휩쓸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알도 다얀의 친구와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지금 당장 다얀을 죽이라며 고함을 쳤고, 진흙과 똥덩어리 몇 개가 다얀에게 날아들었다. 다얀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경비대원의 손을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입가에는 침과 피가 섞인 거품이 일었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니까!" 다얀은 사람들을 똑바로 노려보며 외쳤다.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 그냥 어둠이었다고. 어둠뿐이었어. 당신들 중에도 그 괴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럭스는 지젤 치안판사를 돌아보았다.

"루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지젤의 얼굴에는 슬픔 외의 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럭스는 그 아래에 말 못할 수치심이 언뜻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치안판사의 눈은 충혈되었고 피로 때문에 눈가는 짙은 그늘이 드리웠지만, 그래도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럭스가 어릴 때, 내면의 마법을 통제하지 못해 겉으로 그 힘이 드러날 때면 어머니의 눈에서 항상 보이던 그 표정이었다. 또한 오빠 가렌이, 여동생은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떠올리던 그 표정이기도 했다.

"무슨 뜻이었죠?" 럭스는 다시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지젤이 말했다. "아무 뜻도 없었어요."

"다르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점에서 다르죠?"

"그냥... 달라요."

럭스는 전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돌리는 상황을 겪어 보았기에, 문득 치안판사의 아들이 어떤 면에서 다르다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됐어." 가렌이 말했다. 그는 단으로 올라오며 검집에서 커다란 장검을 뽑아들었다. 석양을 받아 검신이 번득였다. 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리했다.

"오빠, 안 돼." 럭스가 말했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내가 이 사람하고 얘기를 좀 더 해볼게."

"그놈은 괴물이야." 가렌은 검을 돌려 어깨 위로 치켜올렸다. "악마의 종복은 아닐지 몰라도, 살인자인 건 확실해. 살인을 저지른 자가 받을 처벌은 하나뿐이지. 치안판사님?"

지젤은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을 럭스에게서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도 다얀, 그대에게 유죄를 선언한다. 또한 불굴의 선봉대인 가렌 크라운가드로 하여금 데마시아의 정의를 시행할 것을 요청한다."

다얀은 고개를 쳐들었다. 럭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무언가 껄끄러운 감정이 다얀을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속삭이는 느낌. 그 느낌은 럭스가 미처 확신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지만, 차디찬 바람 한 줄기가 휙 지나가는 듯한 감각 때문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다얀의 팔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정신 나간 방랑자가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목이 잔뜩 쉰 채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기절해 버렸다. 가렌은 검을 높이 치켜들고 사형집행인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다얀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사형 집행을 독촉하는 군중의 고함 소리에 거의 묻혀 버렸지만, 가렌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럭스는 간신히 몇 마디를 이어맞출 수 있었다.

"빛이 사라지고 있다..."

"잠깐!" 럭스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가렌의 검은 이미 할 일을 다한 뒤였다. 포스배로우 주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다얀의 몸뚱이가 풀썩 주저앉았고 피가 흘러나왔다. 무덤 구덩이에서 시커먼 즙이 흘러나오듯 연기가 그의 몸에서 나선을 그리며 피어올랐다. 갑자기 머리에서는 흉측한 발톱과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눈을 지닌 망령이 튀어나왔다. 지젤 치안판사는 충격을 받고 움찔했다.

어둠의 망령은 사악하게 낄낄거리더니 치안판사에게 달려들었다. 지젤은 비명을 질렀다. 망령은 그녀의 몸을 통과하더니 바람에 재가 흩어지듯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럭스는 망령이 사라지며 남긴 숨결을 느꼈다. 그 에너지는 불쾌하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감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지젤 치안판사는 그대로 쓰러졌다. 안색은 잿빛이 되었고 극심한 공포로 흐느끼고 있었다.

럭스도 주저앉다시피 한쪽 무릎을 꿇었다. 머릿속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형상화된 환상이 무수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산 채로 무덤에 매장당한 갑갑함, 오빠의 손으로 데마시아에서 쫓겨나는 먹먹함, 느리고도 고통스럽게 죽는 천 가지 방법이 한꺼번에 엄습하며 숨통을 조였다. 럭스의 내면에 자리한 빛이 공포스러운 환상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럭스는 입속에 가득 찬 죽음의 맛을 침으로 뱉어냈다. 그녀의 숨결에서 빛의 입자가 희미한 빛을 냈다.

"럭스..."

가렌이 속삭이듯 말했다. 한 순간, 럭스는 미친 듯이 환성을 지르는 군중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오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럭스는 울고 있는 치안판사에게서 돌아섰다. 마법의 힘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온몸을 휩쓸었다.

군중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럭스, 이게 무슨 일이지?" 가렌이 말했다.

럭스는 눈을 깜박여 아직도 머릿속을 맴도는 끔찍스러운 환상을 쫓아냈고, 가렌이 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불굴의 선봉대 네 명이 단 위로 뛰어올라와 가렌의 곁에 섰다.

그 순간, 포스배로우 주민들이 하나씩 둘씩 땅바닥에 쓰러졌다. 마치 갑작스레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이.

럭스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태양은 포스배로우의 서쪽 성벽 너머로 막 사라지려는 참이었다. 럭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시커먼 수증기로 만들어진 것 같은 형상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주민들의 몸뚱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똑같은 형상은 하나도 없이 제각기 다른 모습이었다. 녹서스 갑옷을 걸친 악마,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미, 머리가 여럿 달린 뱀, 탑처럼 우뚝 솟은 몸집에 서리 도끼를 든 악마의 전사, 흑요석 단검 같은 송곳니가 입 안 가득 나 있는 거대한 비룡, 그 외에도 제정신으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갖가지 끔찍스러운 형체들이었다.

“사악한 마법이군." 가렌이 단언했다.



살아 있는 그림자 같은 형체들은 단으로 다가왔다. 마치 허공 속을 미끄러지듯,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무시무시한 악몽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저것들은 대체 뭐죠?" 바리야가 물었다.

"포스배로우 주민들이 꾸었던 악몽 속에서도 가장 사악한 존재들이에요." 럭스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사바토르가 물었다.

"그냥 알아요." 럭스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곳에서 저것들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럭스가 익힌 능력은 다른 곳에서 더 유용하게 쓰이리라는 것을. 그리고 불굴의 선봉대는 이곳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럭스는 엄지와 검지로 아랫입술을 쥐고 길게 휘파람을 분 다음, 가렌에게로 돌아섰다.

"내가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어."

"어떻게 하려고?" 가렌이 악마들의 형상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물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죽지 말아 줘."

휘파람 소리를 들은 불꽃별이가 악마들을 뚫고 달려왔고, 럭스는 단 가장자리로 향했다. 악마들은 녀석을 공격하지 않았다. 지금 포스배로우를 엄습한 사악한 힘은 말 한 마리의 꿈과 악몽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럭스는 단에서 뛰어내리며 불꽃별이의 갈기를 붙들었고, 가뿐한 동작으로 단번에 말등에 올라탔다.

“어디 가는 거야?”가렌이 물었다.

불꽃별이는 뒷다리로 버티며 일어섰고, 럭스는 안장에 앉은 채 몸을 틀며 오빠에게 답했다.

“아까 말했잖아. 포시안 증조부님께 예를 표하러 갈 거라고!”



가렌은 여동생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쓰러진 주민들과 악몽의 형상들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신중하게 지켜보았다. 악마들이 연신 발톱으로 럭스를 움켜쥐려 했지만, 그녀와 불꽃별이는 용케도 매번 공격을 피했다. 악마 군단을 벗어난 럭스는 짧은 순간 멈춰서서 황금으로 끝을 감싼 지팡이를 오빠 쪽으로 들어올리며 외쳤다.
"데마시아를 위하여!"

불굴의 선봉대는 검으로 방패를 치며 화답했다.

"데마시아를 위하여!" 그들도 한 목소리로 외쳤다.

럭스는 말을 돌려 다시금 전속력으로 도시를 빠져나갔다. 가렌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곧 시작하게 될 백병전에 대비하여 근육을 풀었다. 그러고는 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위치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사들은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바리야와 로디안은 가렌의 왼쪽에, 사바토르와 디아도로는 오른편에 섰다.

"우리는 불굴의 선봉대다." 가렌은 검을 수직으로 치켜올렸다. "불굴의 용기와 예리한 눈으로 검을 인도하라."

맨 처음 도달한 것은 칠흑처럼 새까만 악마 사냥개들이었다. 놈들은 칼날 같은 송곳니와 번뜩이는 이빨을 내세우며 단 위로 뛰어올랐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는 방패를 맞대고 검을 들어 적을 맞았다. 강철 방패의 벽이 놈들을 튕겨냈다. 그림자와 악의로 만들어진 형상임에도, 적의 힘과 능력은 더할 나위 없이 완강하고 포악했다. 가렌은 한 발을 딛고 나와 괴물의 허리께에 검을 찔러넣었다. 척추가 있을 법한 위치였다. 놈은 귀를 찢을 듯 새된 비명 소리와 함께 폭발하더니 검은 먼지로 변했다.

가렌은 검을 후퇴시켜 비스듬히 들었다가 방향을 바꾸어 다른 악마의 입속으로 찔러넣었다. 가렌이 손목을 비틀며 어깨 힘으로 검을 내리꽂자 악마는 뒤로 밀려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가렌은 놈의 가슴팍을 짓밟았고, 놈은 으르렁거리다가 폭발해 버렸다. 이번에는 탑처럼 거대한, 프렐요드 전사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가렌을 덮쳤다. 가렌은 검을 위로 치켜들어 공격을 막아냈지만, 엄청난 기세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 가렌은 이를 악물며 내뱉고는 고함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그러고는 머리가 있을 법한 그림자 부분에 칼을 밀어넣듯 꽂았다. 전사의 형상이 폭발하며 어김없이 재 같은 먼지가 피어올랐고, 가렌은 곧장 검을 돌려 이번에는 다른 악마의 배를 노렸다.

사바토르는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사냥개의 목을 쳤고, 디아도로는 연신 쉬익거리는 거대한 뱀을 방패로 내리쳐 두동강이냈다. 바리야가 얼굴 형체도 없이 송곳니만 잔뜩 난 악마 전사를 칼자루로 내리치자, 쌍둥이인 로디안의 검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그림자 형상의 악마들은 치명타를 입는 순간 폭발하며 재인지 먼지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가렌의 검이 번뜩이더니 은빛 날이 전갈처럼 생긴 괴물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전갈이 꼬리 끝 갈고리로 가렌의 머리를 노렸지만, 사바토르의 방패가 막아냈다. 곧이어 바리야의 검이 괴물의 다리를 잘라냈고, 놈은 폭발하며 사라졌다. 이제는 흉측하게 생긴 절름발이 괴물이 로디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로디안은 형체 없는 놈의 얼굴 부분에 검을 찔러넣었고, 괴물은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그림자 괴물을 하나 처치할 때마다 곧장 다른 놈이 빈 자리를 메웠다.

"등 맞대기 진형!" 가렌이 외쳤다. 다음 순간 다섯 전사들의 어깨 갑옷이 서로 맞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불굴의 선봉대는 순식간에 등을 마주댄 원형 대열을 만들었다. 마치 어둠에 맞서는 빛의 요새 같았다.

"데마시아의 힘을 보여주리라!"



럭스는 숲속을 내달렸다. 양옆을 스쳐지나가는 나무들이 희미해 보일 정도로 맹렬한 기세였다. 벌어진 지팡이 끝에서 발산되는 빛이 오솔길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아무리 빛의 인도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숲을 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가 맞서야 하는 악몽은 끝도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악몽이라는 물을 무한정 공급하는 샘물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의 공포, 질병의 공포,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공포...

럭스는 바로 오늘 아침에 택했던 길을 따라 달렸다. 마법의 힘이 불꽃별이를 이끌었고, 녀석이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주었다. 그렇게 밤의 숲길을 질주한 끝에, 럭스와 불꽃별이는 마침내 갈림길 바로 앞까지 왔다. 불꽃별이는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는 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사리가 우거져 잘 보이지도 않는 중간 길로 곧장 뛰어들었다.

증조부 포시안의 무덤으로 향하는 북쪽 길이었다.

길은 갈수록 구불거렸고, 양옆은 가파른 협곡이거나 바위투성이 경사가 이어졌다. 마법의 빛이 앞을 비춰주고 불꽃별이도 자신만만했음에도, 럭스는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무덤이 가까워질수록 풍경도 변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어린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나무에서는 불쾌한 느낌의 찐득한 검은 수액이 흘러내렸고, 기괴하게 비틀리고 옹이투성이인 가지들은 구부러진 갈퀴손 같은 끝으로 럭스의 머리칼과 망토를 잡아당겼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은 마치 송곳니가 늘어선 거대한 입처럼 보였고, 높직한 가지에는 독을 잔뜩 품은 거미들이 거미줄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발밑의 땅은 기묘하게 물컹거렸고, 기분 나쁜 금속 냄새가 나는 물 웅덩이가 곳곳에 패여 있었다. 마치 숲속 요정이 가꾸다가 버린 과수원 같았다.

불꽃별이는 그림자가 가장자리를 빙 두르고 있는 공터 입구에서 멈춰섰다. 녀석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두려움에 코를 부르르 떨었다.

"괜찮아, 진정해." 럭스는 애마를 달랬다. "포시안 님 무덤이 바로 앞이야. 조금만 더 가면 돼."

하지만 말은 한 발짝도 더 가려 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나 혼자 갈게."

럭스는 말등에서 내려 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공터로 들어섰다. 지팡이 끝에서 나오는 빛은 마치 폭풍우 속 홀로 빛나는 초롱불 같았지만, 간신히 앞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포시안의 무덤 봉분은 어둠 속에서 보니 풀이 난 야트막한 언덕 같았고, 꼭대기에는 돌을 대충 쌓아 만든 이정표 같은 것이 얹혀 있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로 올라갔고, 고대의 공포스러운 형상들이 소용돌이처럼 빙빙 돌며 자신들의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시안의 업적을 새긴 거대한 묘비는 꿈틀꿈틀거리는 검은 끈 같은 것이 휘감고 있었다.

묘비 앞에는 열두 살이나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다리를 꼰 자세로 앉아 있었다. 무아지경 상태에 빠진 듯, 야윈 상체가 느릿느릿 흔들리고 있었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촉수들이 무덤에서 뻗어나와 마치 덩굴처럼 소년의 목을 휘감아 조르고 있었다.

"너, 루카니?" 럭스가 말했다.

럭스의 목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소년의 상체가 딱 멈췄다.

소년은 럭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공허하고 시커먼 눈이 럭스를 응시했다. 럭스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소년은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었다. 웃는다기보다는 얼굴에 틈이 생긴다고 표현해야 맞을 듯했다.

"이젠 아냐." 소년이 말했다.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날선 갈고리 같은 다리로 가렌에게 다가왔다. 불룩한 배에는 튀어나올 듯한 눈과 연신 닫았다 벌렸다 하는 입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가렌은 거미의 가슴팍을 검으로 찌르는 동시에 발로 차서 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거미의 몸통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다.

가렌은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검은 발톱 하나가 어깨갑옷을 치자 어깨 근육에 뼛속까지 저린 냉기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갑옷의 금속은 갈라지지 않았고, 이음매도 풀리지 않았다. 발톱은 그대로 갑옷을 통과했다. 가렌의 온몸에 소름 끼치는 역겨움이 퍼져나갔다. 코에서는 습기찬 묘지의 흙냄새가 풍겼다. 몇 백년이나 된 무덤에서 파낸 듯한 썩은 흙의 악취였다. 가렌은 늘 훈련했던 대로 그 사악한 고통을 떨쳐냈다.

그때 갈고리 검 하나가 로디안의 갑옷 아래를 파고 들며 로디안을 옆으로 거꾸러뜨렸다. 그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방패를 내려뜨렸다.

"자세 유지해!" 가렌이 소리쳤다. "고통을 떨쳐내야 한다."

로디안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림자 형상들은 더욱 미쳐 날뛰며 불굴의 선봉대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이 끝도 없이 몰려옵니다!" 바리야가 외쳤다.

"그럼 우리도 끝까지 싸울 수밖에!" 가렌이 대답했다.



럭스는 오로지 이 으스스한 공터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소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년의 눈 속에서 어둠의 힘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인간의 취약한 마음을 풍부한 자양으로 삼는 악몽들이 깨어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냉정한 지적 존재가 럭스를 요모조모 평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루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끄러운 동작으로 일어섰다.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는 그림자들이 공터 가장자리로 모여들었다. 온갖 괴물과 공포스러운 형체들이 럭스 주변으로 몰려들며 그녀의 눈이 닿지 않는 바로 바깥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고 머리통 속에 악몽이 잔뜩 들어 있구나." 소년이 말했다. "돌멩이로 네 머리를 치면 그것들을 꺼내줄 수 있겠는데."

"루카, 이건 진짜 네가 아니야." 럭스가 말했다.

"그럼 뭔데? 네가 말해 봐."

"저 무덤 속의 악마지. 사람들이 포시안 증조부님을 매장할 때 악마도 죽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거야."

루카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양 입꼬리를 너무 치켜올린 나머지 피가 작은 개울처럼 흘러 턱으로 떨어졌다.

"그래, 죽지 않았지. 그냥 잠들었던 거야. 스스로를 치료하면서, 부활시키면서, 대비했던 거지."

"뭘 대비했다는 거야?" 럭스는 억지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소년은 쯧쯧 소리를 내더니 경고를 하듯 한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럭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가 없었다.

"그래, 거기까지야." 소년은 몸을 숙여 모서리가 날카로운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 악몽들을 내가 꺼내줄게."

"루카..." 럭스는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말을 할 수는 있었다. 아직까지는. "네가 싸워서 이겨내야 해. 넌 할 수 있어. 네 속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으니까. 나는 알아. 그래서 포스배로우에서 도망친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여기로 온 거고. 악마를 물리쳤던 사람 곁에 있고 싶어서 말이야."

소년의 육신을 걸치고 있는 존재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자 그 웃음 소리에 주변의 풀들이 시들어 버렸다.

"요놈의 눈물이 마치 사막에서 만난 물 같았지." 소년은 앞으로 다가와 럭스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두개골의 어느 쪽을 부수는 게 좋을까 가늠하기라도 하듯. "그 눈물 덕분에 내가 깨어나서 양분을 얻을 수 있었거든. 너무 오랫동안 잠들었던 바람에, 필멸의 존재가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달콤하고 맛좋은 것인지 잊어버리고 있었다니까."

소년은 한 손을 뻗어 럭스의 뺨을 쓸었다. 악마의 손길이 닿는 순간, 럭스의 몸에서 서늘한 공포의 불꽃이 튀었다. 소년이 손가락을 떼자, 연기 같은 실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왔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공포가 럭스의 전신을 덮쳤다. 럭스는 숨이 막혀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난 녀석을 잠재웠지. 그랬더니 녀석의 꿈에서 공포가 자라나 형상을 갖추었지 뭐야." 소년이 말했다. "물론 힘은 약해. 네 몸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용광로에 비하면 그냥 작은 불씨 수준이지. 그 정도 힘으로는 내 형상을 갖출 순 없었지만, 어린아이의 공포심은 내겐 만찬이나 다름없어.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데마시아는 이제 공포의 악몽의 세계가 될 거야. 요 꼬마나 너 같은 인간들에게 말이지."

럭스의 내면의 마법이 이 악마의 힘에 밀려났다. 어둠이 공터를 가득 채우면서, 럭스의 빛은 이제 희미한 불꽃 정도로 약해져 버렸다. 하지만 단 하나의 불꽃이라도 숲 전체를 집어삼키는 대화재가 될 수 있는 법.

"사람들은 요 루카라는 꼬마를 증오했지. 요놈도 그걸 알고 있었어. 너희 필멸의 존재들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걸 보거나 접하면 일단 겁부터 먹거든. 그 정도 두려움이면 충분해. 그때부터는 부채질만 살살 해주면 아주 정교하고도 공포스러운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럭스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통스럽다는 것은 그 힘을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럭스는 몸속으로 파고든 공포와 멀찍이 떨어진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불꽃을 피워올렸고, 그 불꽃의 따스함이 온몸으로 조금씩 번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루카, 제발." 럭스는 안간힘을 쥐어짜내 힘겹게 말했다. "이건 네가 싸워서 이겨내야 해. 그놈이 너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요 꼬마놈은 네 말을 못 듣는다니까. 설령 들을 수 있다 해도 무서워서 아무 짓도 못할 걸. 사람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요 꼬마놈에게 무슨 짓을 할지는 꼬마놈이 잘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 증오해 마지 않는 것, 저 끔찍한 환상이 바로 요 꼬마놈의 작품이라는 것 말이야. 그 끔찍한 악몽을 모두들 뼈저리게 맛보지 않았나?"

럭스의 양팔에 고통이 퍼져나가더니 가슴께로 옮아갔다. 마법의 힘이 커지고 있음을 눈치챈 듯, 소년의 새까만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그 두려움은 내가 너무나 잘 알아." 럭스가 말했다. "하지만 난 두려움에 굴복하진 않아."

럭스는 지팡이를 소년 쪽으로 내뻗었다. 지독한 통증 때문에 비명이 새어나왔다. 팔다리가 마치 불이 붙은 듯 아팠기에, 공격은 어설펐다. 소년은 껑충 뒤로 피했지만 한 발 늦었다. 지팡이 끝 부분이 아슬아슬하게 소년의 뺨을 스쳤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불굴의 선봉대는 잔인할 정도로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검술과 어떤 타격도 막아내는 방패술로 전투를 이어갔지만, 그들이라고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림자 형상들이 다섯 전사들에게 가까이 다가들었다.

무기를 잔뜩 움켜쥔 사람 떼 같은 형상이 왼쪽에서 덤벼들었고, 디아도로는 놈의 몸통을 내리쳤다. 하지만 놈의 공격이 디아도로의 방패를 맞고 튕겨나오며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디아도로는 앓는 소리를 한 번 내고는 검을 들어 용의 머리가 달린 시커먼 괴물의 배에 찔러넣었다.

"정신 차려! 놈들이 다가오기 전에 해치우라고!" 사바토르가 질책했다.

가렌은 일격을 맞고 몸을 뒤트는 악마의 배를 찔러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깊숙이 찔러넣고 손목을 비틀 것. 멈추지 말 것.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큼지막한 곤충 같은 머리통에 단검 같은 송곳니가 잔뜩 난 괴물이 포효했다. 가렌은 놈의 눈을 베었다. 놈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연기와 재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두 놈이 더 그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휘두를 여유가 없었다. 한 놈을 검자루로 후려쳐 다른 놈의 가슴팍으로 밀어붙인 다음 검으로 놈의 배를 찔렀다가 빼냈다. 괴물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가렌은 한 발짝 물러나 바리야와 로디안과 나란히 섰다. 다들 투구에서부터 정강이받이에 이르기까지 재를 흠뻑 뒤집어쓴 상태였다.

"여기서 이대로 싸운다." 가렌이 말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디아도로가 물었다.

가렌은 북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먼 숲속에서 빛 한 점이 아련히 빛나고 있었다.

"럭스에게 필요한 시간만큼." 가렌은 각오를 다진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림자 악마들이 다시 다가왔다.



럭스는 내면의 빛을 모아 루카에게 던졌다. 눈이 멀어버릴 듯 환한 빛이 폭발하며 공터를 비추었다. 소년의 몸속에 깃들었던 악마가 떨어져나왔다. 놈은 격노와 절박함에 사자후 같은 비명을 토해냈다. 새하얀 빛이 럭스를 감싸더니 곧이어 주변의 모든 것이 그 빛 속으로 들어갔다. 럭스의 어마어마한 힘 앞에 어둠의 악마는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다. 그녀의 작열하는 빛 앞에서 그림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빛은 점점 커지면서 무덤 주변과 숲속을 채웠고, 그 광휘 속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직 순백의 끝없는 공간만 존재할 뿐이었다. 럭스의 앞에는 양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자세로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은 작고 겁먹은 아이의 눈이었다.

"저를 도와주려 오셨어요?"

"그럼." 럭스는 앞으로 걸어가 소년의 곁에 앉았다. "하지만 나하고 같이 돌아가야 해."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못해요. 너무 무서워요. 저 밖에 악몽을 몰고 다니는 아저씨가 있어요."

"맞아. 하지만 우리가 그 남자를 물리칠 수 있단다. 내가 도와줄게."

"정말요?"

"내가 널 도와주게 해준다면 말야." 럭스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 알아. 사람들이 네 능력을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무서운 거지? 나도 너와 똑같은 일을 겪었어. 하지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네 안에 있는 힘, 그건 사악한 게 아니야. 어둠의 마법도 아니고. 그건 빛이야. 그 빛을 통제할 수 있도록 내가 너를 도와줄게.”

럭스는 한 손을 내밀었다.

“정말요?” 소년이 말했다.

“그럼, 약속할게. 넌 혼자가 아니야, 루카."

소년은 물에 빠진 사람이 밧줄을 잡듯 럭스가 내민 손을 덥석 붙들었다.

빛이 다시 한 번 커지면서 눈이 멀 정도로 광채를 발산했다. 잠시 후 광채가 가라앉자, 공터는 럭스가 7년 전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봉분을 덮은 풀은 맑은 초록색이었고, 돌을 쌓은 이정표와 묘비에는 포시안의 업적이 새겨져 있었다. 숲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던 어둠의 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야수의 발톱 같은 가지를 달고 있던 나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무들로 돌아왔고, 암청색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밤에 깨어나 사냥을 다니는 새들이 내는 소리가 나뭇잎 천정에 반사되어 돌아왔다.

루카는 여전히 럭스의 손을 꼭 붙든 채, 럭스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악몽을 몰고 다니는 아저씨는 사라졌나요?"

"그런 거 같아." 어둠의 힘이 내뿜던 역겨운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당분간은. 무덤 속으로 들어간 건 아닐 테고, 적어도 이 근방에는 없어.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이제 집에 가도 되나요?" 루카가 물었다.

"그럼. 이제 집에 갈 수 있단다."



온몸이 마비될 것 같은 냉기가 가렌을 엄습했다.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팔다리에 어둠의 괴물들이 발톱을 박아넣었다. 핏속으로 들어온 얼음장 같은 기운이 심장과 영혼을 파고들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사바토르와 디아도로는 이미 쓰러졌고, 안색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로디안은 무릎을 꿇은 채 목에 갈고리발톱이 달린 그림자 손이 휘감겨 있었다. 바리야는 여전히 싸우는 중이었다. 방패를 든 손은 힘없이 옆구리에 축 처져 있었지만, 검을 든 손은 여전히 적을 베어넘기고 있었다.

가렌의 입속에 재와 절망의 맛이 배어났다. 그는 패배를 모르는 전사였다. 적어도 이런 패배는... 자르반 4세가 죽었다고 믿었을 때에도 가렌은 싸움을 계속해야 할 의지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숨을 한 번 몰아쉴 때마다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탑처럼 거대한 그림자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둠의 도끼를 들었고,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달린 악마였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처치했던 야만인 전사의 모습 같기도 했다. 가렌은 검을 들어 올렸다. 데마시아 전사답게 전투 함성을 지르며 죽음을 맞이할 작정이었다.

어디선가 기분 좋은 여름의 미풍이 불어왔다. 마치 해가 뜨기라도 하듯, 북쪽 하늘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림자 악마들은 태풍에 바짝 마른 낙엽이 날아가듯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바람과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채가 마을 광장을 한바탕 휩쓸자 어둠의 그림자는 그 기세에 밀려 물러났다.

가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버텨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로디안은 허파 가득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고, 쓰러져 있던 사바토르와 디아도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불굴의 선봉대는 주변을 돌아보며 마지막 남은 어둠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포스배로우 주민들도 정신이 들어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바리야가 헐떡이며 물었다.

"럭스 덕분이지." 가렌이 말했다.



루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빛의 인도자 사원의 퍼닐에게 루카를 지도해 줄 것을 신신당부한 후, 럭스와 가렌은 불굴의 선봉대를 이끌고 포스배로우의 남쪽 성문으로 향했다. 도시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고, 길에서 마주치는 주민들은 하나같이 손에 잡힐 듯 무거운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포스배로우 주민들 중에 처형 이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한 남자의 죽음에 한몫 거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베일의 여신께서 그대를 자신의 품 안에 받아들이시기를." 다얀의 시신을 묻은 곳을 지날 때 럭스가 말했다.

“그자한테 그런 자비를 베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가렌이 말했다. “그자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어."

"그래, 맞아. 하지만 그랬는지 오빠도 알잖아?”

“그게 뭐가 중요해? 그놈은 범죄를 저질렀고, 합당한 대가를 치렀어.”

“당연히 중요하지. 알도 다얀은 친구이자 이웃이었어." 럭스가 말했다. "포스배로우 사람들은 주막에서 다얀과 같이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만나면 농담을 주고받았어. 아들 딸들은 다얀의 아이들과 같이 놀았고 말이야. 그렇게 판결을 서두르는 바람에 왜 다얀이 그런 살인 행위를 저질렀는지를 이해하고 납득할 시간이 전혀 없었잖아.”

가렌은 시선을 눈 앞의 땅에 고정한 채였다.

“사람들은 이해 같은 건 원하지 않아."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럭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자잘한 감정을 용납하지 않아. 데마시아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어. 북쪽은 야만족이 드글드글하고, 동쪽은 탐욕스러운 제국이 우릴 넘보고 있지. 게다가 어둠 마법사의 힘이 바로 우리 발밑까지 파고들어와 있다고. 우리는 만사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어. 우리의 판단에 의심이 깃든다면, 데마시아는 약해지겠지. 난 데마시아가 약해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야.”

“이런 대가를 치르더라도?"

“물론.” 가렌이 대꾸했다. "그게 내가 행동하는 이유야.”

“데마시아를 위해서?”

“데마시아를 위하여.” 가렌이 말했다.

4. 구 설정

4.1. 구 배경 1

데마시아 군대의 꺾이지 않는 의지는 발로란 전역에 잘 알려져 있다. 그 올곧은 의지를 칭송하는 사람도 있고 질색하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도 감히 그들을 얕보지는 않는다. 데마시아의 무관용 윤리 강령은 병사가 됐든 시민이 됐든 상관없이 엄격하게 적용되며 전투 중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치거나 항복할 수 없다. 지휘관들이 앞장서서 귀감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원칙은 자연스레 병사들에게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데마시아의 힘'이라는 칭호를 받은 전사 가렌은 특히 군 장교들의 모범으로서 전형적인 명장의 본보기였다.

데마시아와 그 숙적 녹서스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웅을 탄생시켰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영웅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렌이 처음으로 사악한 칼날 카타리나와 검을 맞댄 것도 양국 군대의 사납게 휘날리는 깃발 아래였다. 무용담이나 후일담이란 본래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것. 그 둘의 전투를 바로 앞에서 목격하고도 살아남은 병사들은 무기와 무기, 무기와 뼈가 수없이 부딪히며 아우성치는 전장의 교향곡 속에서 가렌과 카타리나만이 둘만의 치명적인 왈츠에 깊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 싸움이 끝난 후 가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데마시아군의 자랑이며 불굴의 선봉대를 이끄는 그 가렌이? 아무리 격렬한 전투를 겪어도 단 한 번도 호흡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그 가렌이? 병사들의 놀란 눈빛 뒤로 공공연한 소문이 퍼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피로 때문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가렌은 그날 이후 사악한 칼날 카타리나와 맞붙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앞장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곤 했고, 그럴수록 문제의 소문에도 힘이 실렸다. 그러나 데마시아 윤리 강령의 화신인 가렌은 한 번도 해명하지 않았다. 평범한 이들은 호적수를 만나는 전사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렇게 아름다우면서도 모든 면에서 자신과 정반대인 상대와 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가렌에게는 살아가는 이유까지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적을 처치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그 옆의 적과 함께 한 칼에 베어버리는 것이다.[1] - 가렌, 야전 전략에 관한 토론에서

4.2. 구 배경 2

"이 왕국과 이 민족이 내게 모든 것을 주었다. 그 은혜에 온전히 보답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내 도리다."

데마시아의 전사 가렌은 조국과, 조국의 이상을 수호하는 데에 몸 바치고 있다. 마법 저항력을 갖춘 방어구와 대검으로 무장한 그는 나라와 전우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다.

크라운가드(왕의 비호를 담당하는 가문에 주어지는 존칭) 집안 출신인 가렌과 그의 여동생 럭스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데마시아 귀족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아버지 피테르는 자르반 3세 왕의 경호에 헌신했고, 가렌은 그 뒤를 이어 차기 왕 자르반 4세의 근위관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았다. 가렌이 장차 수행할 임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가족들은 데마시아와, 데마시아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불굴의 자부심을 그에게 심어주었다.

데마시아는 마법의 남용으로 세계를 초토화시킨 룬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평화로운 삶을 꿈꾸며 건국한 나라다. 암울했던 전시 상황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가렌의 숙부는 당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전사 중 한 명이었다. 마법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마법의 위협을 근절하기 위해 국경 너머의 온갖 풍파와 맞서 싸웠다. 어느 날 그는 가렌에게 이런 말을 했다. 바깥세상엔 경이로운 것이 수없이 많지만 위험한 것 또한 수없이 많다고. 이 세계에서 평화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마법사나 공허의 생명체, 또는 상상조차 못 했던 무언가가 언젠가 데마시아를 공격해 오겠지만 이에 맞서 싸우면서 평화의 시간을 연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로부터 7개월 후, 숙부는 비극적인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전투 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오래지 않아 가렌은 어른들이 수근거리는 이야기를 통해 진상을 알게 되었다. 출혈을 일으키는 마법사의 주문 공격이 숙부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가렌은 숙부의 죽음을 통해 마법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확인했고, 데마시아 내에 마법이 침범하는 것을 절대 허용치 않겠다고 분노로 다짐하게 되었다. 데마시아의 이상을 추구해야만, 데마시아의 힘을 보여줘야만, 마법의 부패한 영향력으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숙부의 전사 소식이 퍼져 나가자 데마시아의 모든 이가 가렌을 위로해 주었다. 신분의 격차와 빈부의 여하에 상관없이 행인들은 그를 토닥여 주었고, 존경의 의미를 담은 선물을 쥐여 줬으며, 지지의 뜻을 표했다. 그들의 공감을 받으며 가렌은 데마시아야말로 국민들이 서로를 보살피고 서로의 상처를 자신의 상처인 양 치유해 주는 연대의 왕국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 누구도 절대 혼자가 아닌 데마시아의 이상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마법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만큼은 떨칠 수가 없었고, 불길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동생인 럭스가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심도 지울 수가 없었지만 한낱 의심 따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했다. 숙부를 죽인 금지된 능력을 크라운가드 가문의 일원이 갖고 있다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열두 살이 되던 해, 가렌은 집을 떠나 불굴의 선봉대에 입대했다. 입대 후 그는 친구도 만나지 않고 연애도 하지 않으며 밤낮으로 훈련과 전술 공부에만 몰두했다. 훈련 시간이 끝난 후에도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검술을 갈고 닦는 데에 할애했다. 밤에는 상관들이 연습용 검을 압수해 가곤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렌이 몰래 막사를 빠져나와 그림자를 상대로 대련했기 때문이다.

불굴의 선봉대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가렌은 장차 자신의 비호를 받을 데마시아의 차기 왕 자르반 4세를 만났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자르반 4세를 만나고 가렌은 더욱 훈련에 매진하게 되었다. 앳된 왕세자에게서 위대함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서로를 상대로 대련하기를 즐겼다. 모든 훈련이 종결된 후 가렌은 형제 같은 자르반을 언제나 지켜주겠다는 증표로 데마시아의 독수리 인장이 새겨진 핀을 선물했다.

녹서스의 데마시아 침략 전쟁 때 가렌은 아군을 방어하고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지와 목숨을 아끼지 않는 데마시아 최고의 군인이자 무시무시한 전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프렐요드의 마르지 않는 잔을 찾는 수색 작업 중에는 부하를 살리기 위해 석궁 화살을 대신 맞은 적도 있었다. 랜시드 왕의 부패한 신하들을 습격할 때엔 침묵의 숲을 아무런 방어구도 없이 헤치고 다녔다.

이렇게 용맹하고 출중한 가렌에게도 실패는 찾아 왔다. 녹서스의 공격으로부터 왕세자를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가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르반 4세는 후퇴하는 녹서스군의 뒤를 좇으려 부대를 이끌고 나섰다. 젊은 자르반은 무자비하게 학살된 수백 명의 백성을 대신해 복수하겠다는 패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깨닫지 못했다. 녹서스의 후퇴는 일부러 꾸며진 덫이었고, 자르반과 그의 군사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가렌은 자르반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전쟁의 열기 속에서 자르반이 충동적으로 성급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였기에 사태를 진작 예측하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질책했다. 가렌은 파견 부대를 이끌고 왕세자를 찾아 나섰다.

가렌의 부대가 녹서스 군의 기지를 발견했을 때, 자르반의 갑옷은 피가 흥건한 처형대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끈적한 피 웅덩이 속에서 데마시아의 독수리 핀이 가렌을 향해 빛을 발했다. 왕자를 찾아 주변을 샅샅이 뒤지면서도 가렌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수일 동안 가렌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가족과 동료들이 아니라고 말해줘도 가렌은 왕자의 죽음이 자기 탓으로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숙부의 죽음을 온 왕국이 위로해 줬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도 죽은 전우들의 가족을 똑같이 위로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자신의 수입 전액을 전사자 유가족에게 기부하면서 다른 군인들과 함께 허름한 막사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듣고 자르반 3세 왕은 데마시아의 이상을 순수하고 겸허하게 실천하는 가렌의 심성에 탄복했다. 왕은 왕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데마시아의 전 국민을 가족처럼 여기는 전사 가렌의 기상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가렌의 공적을 치하하며 데마시아인은 전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혼자가 아님을 역설했다.

가렌의 여동생 럭스는 오빠의 뒤를 이어 수도에서 왕가를 섬겼으나 남매간의 관계는 가까워지지는 못했다. 가렌은 입대 전 동생에게 품었던 의심을 부정하려 애썼다. 그리고 항상 동생을 사랑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의 무언가로 인해 동생과 친해지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의심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 데마시아의 군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가렌은 언제든 목숨을 바쳐 데마시아를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다 국경 내에서 악질 마법사나 녹서스 첩자가 발견되면 그는 가장 먼저 검을 뽑고 자진해서 나선다. 그는 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며 국경 위에 결연하게 서 있다. 가렌은 데마시아에서 가장 무섭고 강한 군인일 뿐 아니라 데마시아의 근원적 가치인 힘과 용기, 연대를 상징하는 인물, 그 자체인 것이다.

[1] 우간다의 막장 독재자로 유명한 이디 아민의 공식 석상에서의 발언을 본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