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4:56:49

강철과 유리의 도시

1. 개요2. 1막3. 2막4. 3막5. 4막6. 5막7. 6막8. 7막9. 8막

1. 개요

자운의 스토리가 개편되면서 공개된 소설이다.

2. 1막

"빨리 좀 와, 윈!” 잰키가 외쳤다. “솟아오르는 포효가 곧 온단 말이야!”

“알아!” 윈이 소리 질렀다. “말 안 해도 안다고!”

윈의 귀에는 기름칠한 쇠의 끼릭대는 소리가 들리고, 입과 치아에서는 금속의 맛이 얼얼하게 느껴졌다. 마법 압력식 엘리베이터인 솟아오르는 포효가 접근함에 따라 윈이 오르고 있는 배기관의 내부가 진동하고 있었다.

윈은 쥐가 나려고 하는 다리를 반대쪽 면에 지탱한 채 철제 경사면에 등을 바짝 붙였다. 위를 올려다보니 배기관의 끝에 보이는 사각형의 빛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였다. 윈의 위로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형 니코[1]였다.

“거의 다 왔어, 꼬마야.” 니코가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서 도와줄까?”

윈은 고개를 젓고는 등을 다시 꼿꼿이 편 채 발에 힘을 주어 밀었다. 다리 근육이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형의 손을 잡았다.

윈의 손목을 잡은 니코는 배기관 밖으로 힘겹게 윈을 끌어냈다. 윈은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그대로 엎어졌다. 자운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곳은 절벽 면에서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동굴이었다. 이 공간의 높이와 넓이는 그들이 겨우 나란히 서 있을 정도로, 가장자리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가장자리에서 10여 야드 떨어진 곳에는 솟아오르는 포효를 지탱하는 2야드짜리 철 기둥 세 개가 서 있었다.

핀은 선반처럼 튀어나온 바위의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조각조각 기운 핀의 옷이 펄럭거리고 머리는 헝클어졌다. 케즈는 흥분으로 볼이 상기된 채 니코 옆에 서 있었다. 잰키는 초조하게 손바닥으로 자기 다리를 두드리며 윈을 노려보았다.

“너 때문에 놓칠 뻔했잖아.”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놓치긴 뭘 놓쳐.” 윈이 쏘아붙였다.

잰키는 윈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니코가 있었으므로 감히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고아를 위한 희망의 집에서 잰키는 불량한 깡패 같은 아이였지만, 질 나쁜 화공 남작들의 패거리가 주먹을 쓰며 돌아다닐 때면 주변에 그런 아이가 하나쯤 있는 것이 유용했다.

케즈가 윈을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별말을.” 케즈가 시끄러운 주변 소리 때문에 몸을 앞으로 기울여 큰 소리로 말했다.

윈은 케즈가 아침에 씻을 때 쓴 산성의 비누 향을 맡을 수 있었다. 화학 레몬주스 같은 향이었다. 이번 모험의 특성을 고려해 케즈는 옷에도 신경을 썼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작아진 옷이나 나이가 들어 고아원을 떠나면서 두고 가는 옷을 모으는 옷 보관함에서 낡은 옷을 찾아 입은 것이다. 윈도 자기 옷에서 먼지가 타고 더러움이 심한 부분을 털어낸 후 입고 왔지만, 케즈 옆에 서 있으니 갑자기 자신이 너무 꾀죄죄한 기분이 들었다.

“난 포효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 케즈가 윈의 손을 꽉 잡은 채 말했다. “너는?”

끼릭대는 굉음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동굴의 이끼 덮인 녹색 벽에 엘리베이터의 기계장치에서 덜커덕거리며 나는 소리가 메아리쳐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핀은 뒤로 윈을 쳐다보고 있었고, 잰키는 만면에 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윈은 멍청하게 보이기 싫은 마음에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나? 엄청 많이 타 봤지!” 윈은 말하는 순간 실수했음을 알았다. 그는 어깨너머로 뒤를 흘깃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바람에 맞서 다리에 힘을 단단히 준 채 가장자리에 모여 있었다.

윈은 케즈의 귀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미안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어. 나도 포효를 타 본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그래서 겁나.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케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어서.”

3. 2막

솟아오르는 포효 타기는 자운 아이들의 수많은 통과 의례 중 하나였다. 팔다리에 다친 자국 하나 없이 올드 헝그리 꼭대기에 오르기, 남작의 부하에게서 소매치기하기, 죽마를 탄 지하동굴 채집꾼 넘어뜨리고 도망가기 등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자운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거리의 소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위험한 시험을 끝없이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절벽 끝의 바위 선반에서 뛰어내릴 용기를 모으고 있는 지금, 윈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미친 시험인 것처럼 여겨졌다. 다가오는 엘리베이터의 비명 같은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금속의 끼릭대는 마찰음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기어의 쿵쿵 소리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니코는 선 채로 밖으로 몸을 기울여 아래를 바라보더니, 뒤로 돌아 입을 비틀며 씩 웃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그리고 무릎을 굽힌 후 벼랑에서 몸을 날렸다.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은 잰키가 그 뒤를 따라 큰 소리로 기합을 넣으며 뛰어내렸다. 뒤이어 핀이 광인처럼 웃으며 친구의 뒤를 따랐다.

“준비됐어?” 윈이 소리 질렀지만 그의 말소리는 솟아오르는 포효의 소음에 묻혔다.

케즈는 들리지는 않았지만 윈의 의도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 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윈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녀와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갔다. 윈의 심장은 입에서 뛰는 듯했고, 망치처럼 갈비뼈를 때려대고 있었다. 발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제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는 벼랑 끝에 다다라 공포와 허세가 섞인 도전적인 소리를 지르며 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윈 아래의 땅이 사라졌다. 그와 수백 야드 아래의 자운 사이에는 공허한 공기가 있을 뿐이었다. 윈은 희석되지 않은 순수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공포는 그를 대장장이의 바이스에 조이듯 숨 막히게 조여왔다. 다음 순간 윈은 땅을 향해 떨어지며 새처럼 나는 법을 갑자기 배우기라도 하려는 듯 팔을 바람개비처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아래를 보았다. 타원형의 유리와 철로 된 솟아오르는 포효가 아래에서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니코, 잰키, 핀은 벌써 포효의 위에 올라 바로크 양식의 격자 세공 무늬나 뼈대에 매달려 있었다. 윈의 몸은 두꺼운 유리에 세게 부딪혀 굴렀다. 그는 유리창 바깥의 곡면부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며 필사적으로 잡을 것을 찾았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발은 지지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낙하 속도를 줄여줄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데.

아무것도 없다.

“안 돼, 안 돼, 안 돼…” 윈은 꼭대기의 곡면에서 가장자리로 미끄러지며 숨이 턱 막혔다. “잔나 님, 제발!”

바람의 상승기류가 윈의 앞면을 치며 지나갔다. 윈은 이 거대한 엘리베이터의 옆에 위풍당당하게 달려 있는 청동 갈고리를 보았다. 윈은 갈고리 쪽으로 몸을 날렸다. 마침 등 뒤에서 부는 바람이 갈고리에 다가가기에 적당하게 그를 밀어주었다. 윈의 손가락이 금속에 단단히 걸리고, 끝없는 하강도 멈추었다.

긴 낙하가 끝나고 위험을 피하자 윈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케즈를 찾았다. 그는 위쪽에서 케즈가 살아남은 것을 기뻐하며 히스테리 상태로 웃어대는 것을 보았다. 윈도 웃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경사가 완만한 솟아오르는 포효의 위쪽 표면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윈은 입꼬리가 미치광이처럼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니코가 윈을 보고 환성을 지르며 잰키를 팔로 찔렀다.

“봐! 윈이 해낼 거라고 말했잖아!”

윈은 형 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의 다리는 밤샘파티 후의 시머 중독자의 다리처럼 고무 같이 느껴졌다. 윈은 깨끗한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질감이 느껴지는 저 아래 지하동굴 지역의 공기와 달리 위쪽의 공기는 청명하고 깨끗해 머리가 기분 좋게 가벼워졌다.

“나쁘지 않았어, 꼬마. 나쁘지 않아.” 니코가 말하며 윈의 등을 탁 쳤다. 니코는 기침을 하고 유리에 잿빛 가래를 뱉었다. 니코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닦았는데, 윈은 그 손에 거무스름한 자국이 남은 것을 보았다.

“별거 아니네, 뭘.” 윈이 말했다.

니코는 윈의 허세에 웃음을 터뜨렸다. “해볼 만하지, 응?”

“너무나 아름다워.” 케즈가 말했다.

윈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아래, 자운이 계곡의 바위 바닥 너머로 반짝이는 암녹색의 불빛과 색채를 띠고 펼쳐져 있었다. 팩토리우드 위로 안개 속에 무지개가 걸쳐 있고 화학공학 공장단지 위로는 연기가 굽이치며 올라가고 있었다. 위쪽에서 보니 지하동굴 연못은 에메랄드빛 신기루처럼 일렁였고 난로에서 나오는 불빛은 희망의 집에서 드문드문 보았던 별처럼 어둠 속에 빛나고 있었다.

윈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매서운 바람 때문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저 멀리 위쪽에는 상아, 청동, 구리, 금으로 만든 여러 탑에 둘러싸인 필트오버가 보였다. 이 역시 아름다웠지만, 자운의 아름다움은 삶 자체에 있었다. 자운의 거리에는 생명력과 활기가 가득했고, 누구에게나 따뜻한 인간미가 가득했다. 윈은 자운을 사랑했다. 결점이 많은 도시이지만, 예측 불가능함과 충만한 에너지 덕분에 자운에는 필트오버에서 찾기 힘든 활기가 있었다.

윈의 발아래 유리 너머의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솟아오르는 포효의 승객들은 엘리베이터의 히치하이커들을 보는 것이 익숙했지만, 익숙하다는 것이 그들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승객 중에는 자운 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유한 필트오버인들로서, 자운의 가스등이 켜진 상업지구 아케이드나 유리 천장이 있는 음식점, 쿵쿵 울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연장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오는 사람들이었다.

“망할 필트오버인들.” 잰키가 말했다. “형편없는 조건을 감수하고 기꺼이 자운에까지 오시다니. 자기들이 위험을 꽤 즐기며 사는 줄 착각하나 본데. 밤이 되면 필트오버로 급히 돌아가면서.”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자운에 도는 돈이 훨씬 적었을 거야.” 케즈가 말했다. “필트오버인은 자운에서 이득을 얻고 우리는 필트오버인에게서 이득을 얻는 거지. 그리고 필트오버에서 우리가 즐겁게 보낸 날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번 진보의 날에 태양 관문에서 했던 불꽃놀이 기억나지? 네가 반했던 그 필트오버 여자애는 기억나? 잰키, 너는 큰소리는 뻥뻥 치지만 사실 위로 가자고 하는 건 항상 너잖아.”

모두가 웃음을 터뜨린 가운데 잰키는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저들에게 구경거리를 보여주지!” 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라깽이 핀은 멜빵을 벗더니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유리 천장에 갖다 댔다. “필트오버인들이여, 오늘 밤엔 새 달이 떴다!”

그러더니 핀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즐거운 감상을 위해 땅에 등을 댄 채 끌려가는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유리에 철썩 붙인 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승객들의 충격 받은 표정에 한바탕 웃어댔다. 남자들은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이 추잡한 자운 인들을 항해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우린 꼭대기까지 가지는 않을 거야.” 니코가 호흡을 가다듬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바베트는 자운 중간층에 있어.”

“마마 엘로디가 거기 있을지 확실하지 않잖아.” 잰키가 말했다.

“거기 있을 거야.” 윈이 말했다. “엘로디의 책상에서 극장 전단을 봤는데, 엘로디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 잿빛 대기가 끝나면 해가 뜨는 것만큼이나 확실해. 그렇지만 서둘러야 해. 8시 종이 울리면 무대에 설 텐데 벌써 6시가 지났어!”

마마 엘로디는 희망의 집의 원장으로, 희망의 집은 자운을 산산조각 냈던 참사 때문에 생겨난 수많은 고아들의 복지를 위해 세워진 고아원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후에 필트오버의 명문가가 된 가문들이 자금을 제공했으며, 200명이 넘는 고아들이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문을 연 지 1세기 남짓이 지난 지금은 신생도시 필트오버에서 보내는 자금이 끊김에 따라 재정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부유한 윗동네의 가문들은 이 정도면 자신들의 죗값을 금으로 충분히 보상했다고 생각했고, 그걸로 끝이었다.

마마 엘로디는 고아원 자금이 바닥났을 때 끝까지 남은 유일한 교사였다. 어두운 피부색을 지닌 그녀는 자신이 아이오니아의 공주였다고 말하곤 했다. 윈은 이 이야기는 화공 남작들로부터 기부를 받기 위해 그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럼에도 궁전에서 따분하게 사느니 세상을 보기를 택했다고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부유한 삶으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것은 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는 다른 아이오니아인은 만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부두에서 선원들의 심부름을 할 때조차도 말이다.

희망의 집의 모든 고아와 부랑아들은 마마 엘로디가 요리하고 청소하면서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특별했고, 아기였던 윈은 그녀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윈은 마마 엘로디에게 허브티를 가져다주면서 바베트 극장의 전단이 접힌 채 모서리가 접힌 편지 다발 아래에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전단을 잠깐 스쳐보기만 했지만 윈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노래하는 전단의 인물이 마마 엘로디였다는 것을 황금 기어 상자를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마마 엘로디는 윈의 표정을 보고는 귀를 찰싹 때리고 시끄럽게 군다고 매섭게 꾸짖으며 그를 내보냈다.

윈은 다른 아이들에게 그가 본 것을 얘기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아원을 몰래 빠져나가 마마 엘로디가 노래하는 것을 구경하러 갈 계획을 세웠다.

“저것 봐!” 윈이 니코의 옆구리를 찌르며 외쳤다.

니코는 아래를 보더니 제복을 입은 차장이 통화관을 통해 소리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쪽의 직원한테 무임승차한 자운 인이 있다고 알리는 거야.” 니코가 말했다. “그렇지만 상관없어. 우린 플랫폼까지 가는 게 아니니까.”

“그럼 우린 어디에 내리는 거야?” 핀이 자비롭게도 바지를 다시 입으며 물었다.

“탑승 플랫폼 바로 아래에 오래된 윈치 기계 장치가 하나 있어.” 니코가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계에 씌워진 지붕이 넓고 평평해. 그리고 옆에는 배관이 있는데 뚜껑이 빠져 있어.”

“그럼 또 뛰어야 하는 거야?” 윈이 물었다.

니코가 빙그레 웃음 지으며 윙크했다.

“맞아. 너는 노련한 프로니까 문제없겠지?”

4. 3막

윈은 몸서리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윈치의 녹슨 지붕을 잡았던 손바닥에는 피가 났다. 이번에 허공 속으로 뛰어내릴 때도 역시 속이 뒤틀릴 듯 무서웠지만, 적어도 이제는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뛰어서 다행이었다. 솟아오르는 포효는 그대로 위로 올라갔고, 포효가 가 버린 것을 보자 윈은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자운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 쉬울 것이었다. 그들은 가파른 바위 군데군데 깎아 놓은 단에 발을 디디기도 하고 양쪽 절벽에서 대들보로 지탱해 놓은 돌출형 구조물들의 가운데를 빙글빙글 돌아가며 내려가는 어지러운 나선형 계단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하면서 내려갔다.

윈치의 지붕 바로 옆의 배관은 니코가 말한 대로 열려 있었다. 내부에는 유출된 유독 물질의 냄새가 났지만 거의 마른 상태였다. 다행히도 배관은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컸는데, 이는 엄청난 양의 오물이 이 관을 통해 자운으로 버려졌다는 의미였다.

“이 끝에는 뭐가 있어?” 케즈가 배관의 움푹한 곳에 고인 끈적한 녹색 물질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레 걸으며 물었다.

“아마 본스커트 펌프장 뒤쪽이 나올 거야.” 니코가 대답했다.

“정확히 몰라?” 잰키가 물었다. “전에도 가 본 줄 알았는데?”

“가 봤지만 그건 거의 1년 전이야. 배관의 배치가 그때와 똑같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

그들은 바위를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구부러지기도 하는 배관을 따라 걸었다. 금속 재질의 배관은 벼랑의 움직임에 따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벼랑이 또 중얼거리고 있어.” 케즈가 말했다.

“뭐라고 그래?” 윈이 물었다.

“아무도 몰라.” 케즈가 대답했다. “마마 엘로디가 얘기해 준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운하를 만들려고 땅을 갈랐을 때 일어난 일 때문에 바위가 아직도 슬픈 거래. 바위가 많이 슬플 때는 한 번씩 우는데, 그래서 지진이 나는 거래.”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배관 끝이 바위벽이나 우그러진 금속 벽으로 막혀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잰키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니코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아닐 거야. 봐.”

니코가 앞쪽의 가느다란 빛줄기를 가리켰다. 먼지와 티끌이 허공에 빙빙 돌고 있었고, 윈은 배관에 사각형으로 뚫린 수로로 올라가는 녹슨 사다리를 볼 수 있었다.

“나갈 길을 찾은 것 같군.” 니코가 말했다.

5. 4막

윈이 자운의 중간층까지 가 본 것은 평생에 몇 번 되지 않았지만, 갈 때마다 그는 매우 특이하고 생생한 인상을 받았다. 중간층은 유동적인 선 하나에 불과한 필트오버와 자운 사이의 명목상 경계에 있었으며, 국제적인 상업지구 아케이드와 고급 클럽, 연주홀, 사창가 등이 모여 있어 여러 도시 중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중간층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 지역이야말로 자운의 진짜 중요한 일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들은 배관에서 나와 재빨리 위치를 확인한 후, 중간층의 주 도로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필기체로 쓰인 도로의 이정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은 윈과 케즈 뿐이었다. 케즈가 그들을 이끌고 나간 넓은 도로는 윈이 생전 처음 보는 멋진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필트오버와 자운에서 온 남녀들이 색색의 화려한 옷과 깃털로 장식한 모자로 치장하고 즐겁게 한데 어울려 자갈이 깔린 길을 걷고 있었다. 여자들은 목이 둥글게 파이고 밝은색의 허리띠로 장식한 주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긴 프록코트를 입고, 광택을 냈지만 진흙 때문에 하루를 가지 못할 장화를 신은 남자들은 늠름해 보였다.

“사람들이 다 미소를 띠고 있어.” 윈이 그 표정을 흉내 내느라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리고 웃고 있네.”

“먹고 살 걱정할 일 없으면 너도 저렇게 웃을걸.” 잰키가 말했다.

윈은 그 말에 대꾸하려고 했지만 니코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고아들보다 희망의 집에 늦게 들어온 잰키는 곧 고아원을 떠나 세상에서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처지였다. 저런 까칠한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윈은 그 까칠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됐건 간에 이미 가진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능하다면 좀 더 나은 곳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세상의 가혹한 현실은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누리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대한 전체의 틀 안에서 자기의 위치에 만족하며 살아가지만, 윈은 원할 때면 언제든 아름다운 여자와 손잡고 걷고, 공연을 보고, 달빛 아래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기를 열망했다.

충동적으로 윈은 케즈의 손을 잡았다. 케즈는 손을 빼지 않았고, 윈의 심장은 포효를 향해 처음 뛰어내릴 때보다 더 쿵쾅거렸다. 아이들은 니코를 앞세운 채 자기들도 그곳을 다닐 권리가 있다는 듯 거리의 중심부를 거닐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권리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때 묻은 옷차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비록 아무도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별로 환영받을 만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윈은 잠시나마 이곳에 영원히 머무르는 환상을 품었다. 화학공학 조명이 은은히 밝히고 있는 거리를 걸어 다니고, 주위의 사람들이 크림처럼 부드러운 최고의 오리 콩피를 파는 식료품점을 알려주거나 이 연극은 꼭 보아야 한다고 조언해 주는 그런 환상. 윈은 멋지게 차려입고 동료 시민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이곳을 찾은 각 가문의 대표들에게 모자를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저거 수정 온실이야?” 윈이 벼랑 가장자리 쪽에 격자세공으로 장식된 반투명 유리 돔이 설치된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 것 같아.” 케즈가 대답했다. “아래에서만 봤었는데.”

유리 돔은 철교와 팽팽한 케이블로 바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돔 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유리 안쪽에서는 민 머리에 문신을 하고 로브를 입은 정원사가 나뭇가지가 마치 지붕처럼 우거진 키 큰 활엽수 숲을 손질하고 있었다. 붉은색, 금색, 푸른색의 다채로운 꽃들이 녹색 나뭇잎에 대비되어 도드라져 보였다. 윈은 일생에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정원사에게 손을 흔들면서, 윈은 꽃향기를 맡고 발아래의 부드러운 잔디를 느끼며 케즈와 저 숲을 거닐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원사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종이 울렸다. 윈은 종소리를 세었다. 총 일곱 번이었다.

“서둘러. 공연이 곧 시작하겠어.” 윈이 급하게 말했다.

잰키는 니코를 돌아보았다. “어디 있는지 진짜 알아?”

“바베트 극장? 응, 알아.” 니코가 또 기침을 하며 입을 가렸다. “알리자를 데리고 한 번 갔었어. 벨준에서 온 그 상인이랑 술 내기를 해서 이겼을 때 딴 돈이 좀 있었거든.”

윈은 그 날 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형이 쿠악시를 연거푸 마시는 것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쿠악시는 독주로, 슈리마에서 온 그 상인의 말에 따르면 염소 젖을 발효시켜 만든다고 했다. 그들이 스무 잔을 마시고서야 상인은 마침내 나가떨어졌다. 니코는 상금을 따고도 그 후 일주일 동안은 숙취 때문에 돈을 쓸 정신이 없었다.

“바로 이 위쪽이야.” 벼랑을 파낸 동굴 같은 광장에 들어서며 니코가 말했다.

개방된 넒은 공간에서 모인 군중이 말하고 협상하며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광장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에는 금속 증강체를 갖추고 화공 남작의 문장을 지니고 있는 이들도 몇 있었다. 이들은 수가 적어서 눈에 잘 띄었고, 사람들은 이들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광장의 끝에는 화려한 색과 시끄러운 소리의 웅장한 건물이 서 있었다. 호객꾼들이 들어오라고 외치며 전단을 나눠 주었다. 세로로 길게 홈이 나 있고 가느다란 금맥이 퍼져 있는 검은 대리석 기둥이 거대한 극장 현관의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현관 지붕 위에는 야생 동물, 용, 무장한 전사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녹색의 화학 공학 조명이 조각상을 비추었으며, 일렁이는 불꽃 때문에 조각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분, 바베트 극장입니다.” 니코가 허리를 깊이 굽혀 절하며 불이 환하게 밝혀진 건물을 가리켰다.

6. 5막

"입장 불가라니 무슨 말이에요?” 니코가 말했다.

두 문지기는 옷은 잘 차려입었지만, 어떤 훌륭한 옷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그들의 본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꿈틀대는 문신이 목과 손목을 덮고 있었고, 둘 중 한 명은 한쪽 팔이 기계 팔이었는데, 동력원이 있어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전기 충격 곤봉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위험한 것? 아니면 그냥 작동이 잘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돈 있어요.” 케즈가 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아가씨.” 첫 번째 문지기가 말했다. 윈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화학공학 입 냄새’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그럼 뭐가 문제예요?” 케즈가 따졌다.

“복장이 틀렸어.”

“그렇지.” 윙윙대는 기계 팔의 두 번째 문지기가 맞장구를 쳤다. “바베트 부인은 손님들에게 의상 선택에 있어서 어떤 수준 이상의… 위생을 기대하거든. 미안하지만 너희의 의상은 그 기준에 못 미치는구나.”

“그래, 그러니까 너희 동네로 썩 기어들어 가시지.” 첫 번째 문지기가 말했다.

“우리 동네라고?” 케즈가 못 믿겠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 자운 아니에요? 우리는 다 자운에서 왔다고요, 이 멍청한 아저씨야!”

“꺼져, 꼬맹이들!” 입 냄새가 말했다. “같은 자운이지만 이쪽 지역은 너희 자운과 달라.”

“알았어요.” 니코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가자.”

“잠깐만, 뭐라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니코를 쫓아가며 윈이 말했다. “그냥 집에 가는 거야?”

니코는 두 문지기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그리고 입구의 인파 덕분에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후에야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니코가 말했다. “내가 멍청했어. 지하동굴의 첫 번째 규칙을 깜빡했군. 오직 표시가 있는 사람만 앞문으로 들어간다.”

7. 6막

그들은 10분 동안 광장을 가로질러 마침내 찾던 것을 찾았다. 윈은 극장 문을 계속 확인했다. 사람들이 아직도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연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저기.” 핀이 근처의 지붕에서 갑자기 피어오른 에메랄드빛 연기 기둥을 가리켰다. 핀은 그레이 스크레이프 말케브라는 배관설비 관리업자에게 고용되어 일했는데, 그는 통풍관이 심하게 막히면 말라깽이 핀에게 기어 몇 개를 주고는 좁은 배관 속을 들어가 찌꺼기를 청소하도록 시키곤 했다.

연기가 나는 곳은 자운의 길거리 음식과 필트오버의 고급 음식의 퓨전 요리를 파는 식당이었다. 나른해 보이는 예술가 유형의 손님들이 앉아 있었고, 음식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 코가 맞다면 저건 공용 배관이 틀림없어.” 핀이 말했다. “맡아 봐. 주방의 음식 냄새와 바베트 극장의 수정 버너의 재 냄새가 섞여서 나지.”

“네가 쓸모 있을 줄 알았다니까, 핀.” 니코가 말했다. 그는 식당과 극장 사이의 바위를 잘라 만들어진 골목으로 아이들을 이끌었다. 부두에서 수송된 무거운 상자들이 벽을 따라 쌓여 있었고, 머리 위로 늘어진 배관들은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기합을 넣으며 상자를 안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무도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핀은 배관의 배치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따라가면서 배관의 수를 세고, 배관 속에서 쏴 하고 흐르는 소리나 덜거덕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공기의 냄새를 맡더니 씩 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이군.” 그는 바위 표면 속으로 들어가는 가느다란 배관을 가리켰다.

“확실해?” 잰키가 물었다. “네가 잘못 짚어서 우리 모두 물에 쓸려 자운을 돌아다니는 꼴이 안 났으면 좋겠는데.”

“안 틀렸거든, 멍청아.” 핀이 말했다. “나만큼 검댕이랑 진흙을 뒤집어쓰고 기어 다녀 봐, 그럼 너도 뭐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알 수 있는 코를 가지게 될 테니.”

8. 7막

그들은 식당 직원들의 휴식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쌓여 있는 상자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핀은 곧 기어 들어갈 수 있는 해치를 찾아내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윈은 해치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거 안전한 거야?” 윈이 물었다.

“지하동굴 출신 고아에겐 충분히 안전해.” 핀이 말했다. “날 믿어. 저 안의 연기를 마시는 것보다 블랙 레인을 걸을 때 폐로 들어가는 돌가루 양이 훨씬 많을 테니.”

윈은 그 말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핀은 어쨌든 안으로 기어들어갔고 그 뒤를 잰키와 케즈가 따랐다. 잰키가 사라지자 니코가 배관을 가리켜 보였다.

“꼬마, 네 차례야.” 니코가 말했다.

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치 안으로 기어 들어가 앞쪽의 무릎이 긁히는 소리, 욕하는 소리, 기침 소리를 따라갔다. 핀의 말에 옳은 점도 있었다. 안의 공기는 고약한 냄새는 났지만 잿빛 대기가 가까워 올 때 매 호흡이 전투처럼 느껴지는 데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니코가 윈의 뒤를 따라왔고, 윈은 팔꿈치와 무릎이 움직이는 리듬에 익숙해졌다. 배관이 갈라지는 부분에서 틈을 통해 빛이 새어 나왔지만, 배관이 절벽을 따라 급격히 경사지자 빛은 사라졌다.

“얼마나 더 가야 돼?” 니코가 뒤에서 외치자 배관 안에서 소리가 이상하게 울렸다. 대답은 없고 니코의 목소리가 메아리칠 뿐이었다. 윈은 앞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온갖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잰키가 두려워했던 대로 배관 끝이 절벽이어서 모두 떨어져 버린 것인가? 앞쪽에 유독 가스가 모여 있어서 아이들이 기절하거나 질식한 것인가? 아니면 이 주변의 바위도 슬퍼서 그 속으로 기어가는 작은 형체들을 으스러뜨린 것인가?

우울해 하는 벼랑이 모두를 으스러뜨리는 상상이 윈을 공포로 마비시키기 직전, 위에서 손이 내려와 윈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잡았다!” 어둠 속에 보이지 않는 해치를 통해 윈을 끌어올리며 목소리가 낮게 말했다. 윈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버둥거렸지만 곧 그를 끌어올리는 것이 잰키라는 것을 알았다. 윈은 빛줄기 하나 없는 방의 나무 바닥에 앉혀졌다. 아니, 빛이 없지는 않았다. 가까운 문의 밑에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윈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수없이 많은 공연 소품이 방 안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여러 선반에는 가면, 화려한 무대 의상, 배경막, 소품 등이 가득했다.

핀은 말의 앞쪽 반 의상을 머리에 쓰고 방을 돌아다니며 웃고 있었다. 케즈는 가장자리에 인조 보석이 빙 둘러 박혀 있고 눈부신 빨간 보석으로 중앙을 장식한 금관을 쓰고 있었다. 잰키는 검날이 번쩍이는 은빛으로 칠해진 나무 칼을 휘둘렀다.

윈은 니코가 그의 뒤를 이어 배관 밖으로 기어 나오자 미소를 지었다. 그는 머리가 몽롱했지만, 배관 안의 연기 때문인지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는 환희 때문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잘했어, 핀.” 니코가 먼지를 털어내고 기침을 하면서 회색 가래를 뱉어냈다.

핀은 말 의상을 벗고 익숙하지 않은 칭찬에 활짝 웃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뗐지만, 그 순간 북을 치는 소리와 백파이프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작한다.” 케즈가 말했다.

9. 8막

바베트 극장의 내부 장식은 바깥쪽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중앙 홀은 여러 색의 천과 도금된 발코니로 꾸며져 있었고 아치형의 높은 천장에는 넓게 펼쳐진 숲과 높이 솟아오른 산, 그리고 푸르디푸른 호수의 아름다운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 반짝이는 크리스털로 장식된 엄청나게 큰 샹들리에가 천장 중앙에 매달려 공간 전체에 반사광을 보내고 있었다.

이 공간을 채운 수백 명의 사람들은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술에 취해 즐기고 있었고 외투와 자제력을 모두 벗어버린 무용수들도 눈에 띄었다. 한쪽 끝에 설치된 높은 무대에서는 연주자들이 피를 떨리게 하고 발이 절로 춤을 추게 하는 빠른 비트로 쿵쿵 울리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은 전염력이 있었고, 윈은 케즈가 자신을 이끌고 댄스 플로어로 올라가자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곳이라면 이목을 집중시켰을 다섯 지하동굴 고아의 모습은 여기서는 빙글빙글 도는 무용수들과 가수들 속에 섞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달리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필트오버 보안관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줄 아는 이들의 날렵함으로 움직였다. 핀은 미친 사람처럼 발을 쿵쿵 구르고 팔꿈치와 무릎을 마구 흔들었다. 잰키는 자신만의 음악의 세계에 빠져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머리를 흔들어 댔다. 니코는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부드럽게 춤추다가 한 번씩 멈춰 예쁜 소녀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윈은 케즈와 함께 댄스 플로어를 누비며 서로의 주위를 돌면서 꿈꾸듯 행복감에 도취되어 춤을 추었다.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서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윈은 상관하지 않았다.

화학공학 조명이 샹들리에에 무지갯빛을 던지자 샹들리에는 눈부신 온갖 색채의 빛을 마름모꼴 문양으로 폭발하듯 반사해냈다. 윈은 빛을 잡아보려는 듯 손을 들었다. 케즈도 윈의 목에 팔을 두르고 빛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는 케즈의 비누와 땀 냄새, 머리의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끝이 났다.

육중한 손이 윈의 어깨를 붙잡자 윈은 그 순간을 빼앗겨 다시는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크나큰 실망을 느꼈다. 윈은 방해꾼에게 욕을 하고 싶었으나, 그가 쏟아부으려던 욕설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문지기 ‘입 냄새’를 보는 순간 사라졌다.

“내가 지하동굴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나?”

윈은 케즈를 흘깃 바라보고는 그녀의 가슴이 흥분으로 들썩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윈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질문에 손을 뻗어 대답했다.

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외쳤다. “뛰어!”

그는 꿈틀대며 입 냄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고, 둘은 댄스 플로어 중간으로 뛰어들어갔다. 케즈는 크게 고함을 질렀고, 그들은 마치 지하동굴에서 갈고리 피하기 놀이를 하듯이 무용수들 사이를 누볐다. 그들은 손을 잡고 달렸고, 입 냄새는 그들을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입 냄새는 무용수들을 밀어제치며 돌진했지만, 케즈와 윈은 걷는 법을 배운 순간부터 자운의 거리를 뛰어다니며 자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보안관, 화학공학 깡패, 괴수단을 늘 따돌렸었다.

뚱뚱한 문지기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입 냄새가 분노에 차 지르는 소리가 심지어 음악을 뚫고 나와, 마치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윈과 케즈는 빙빙 도는 무용수와 가수들 사이에 숨으면서 문지기와 즐거운 추격전을 했다. 케즈는 윈의 손을 꽉 잡았다. 윈은 입 냄새가 가까이 오고 있는데도 저절로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입 냄새가 드디어 윈의 어깨를 잡으려는 바로 그때, 입 냄새는 핀의 펄럭이는 팔꿈치에 얼굴을 가격당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들은 입 냄새가 땅에 뒹굴도록 두었다. 윈은 이렇게 중독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모든 춤추는 발걸음, 뛰는 발걸음은 음악의 리듬에 맞춰져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가수들의 합창은 이 순간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음악처럼 들렸다. 그들은 조명과 음악 소리 속에서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가 되어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때 음악이 멈추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학공학 버너 하나만이 무대를 비추었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무용수들은 한 여자가 무대 중앙에 오르자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마법인지 연출 기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윈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참으로 감명 깊은 입장이었다.

“마마 엘로디야.” 케즈가 말했다.

윈도 마마 엘로디인 줄은 알았지만, 엄격한 중년 부인인 희망의 집의 원장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여신이 같은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우아하게 땋아 올렸고,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자개와 옥으로 만든 구슬은 새로 막 탄생한 별들처럼 반짝였다. 그녀가 입은 빛나는 녹색 드레스는 풍성한 주름이 잡혀 있었고 비단 같은 광택이 났다.

그녀는 윈이 지금껏 본 여자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마마 엘로디가 머리를 들기 시작하자 음악이 천천히 시작되더니 심장 박동을 흥분시키는 템포로 빨라졌다. 그녀의 머리는 음악에 맞춰 들려졌고, 어두운 피부는 다이아몬드 가루로 빛났다. 눈은 혼이 담긴 시선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베트 극장에 잡아두려는 듯이 관중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어 놀랐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고, 아몬드 모양의 눈에서 나오는 따스함은 그녀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윈은 마마 엘로디의 선량함이 그를 감싸 안는 것을 느꼈고, 자신이 채 알지도 못하고 지고 다녔던 짐들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듯이 느꼈다.

마마 엘로디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가사는 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마치 꿀처럼 반은 말하듯, 반은 노래하듯 윈에게 흘러들어왔다. 모든 음은 따뜻한 여름밤의 나뭇잎처럼 방 안에 소용돌이치듯 흘렀다. 음정이 높아지고 목소리가 커지자, 그 소리에 윈의 피부는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윈은 마마 엘로디의 노래가 자신을 뒤덮고 통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윈은 자신과 케즈가 연결된 듯한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윈의 눈은 케즈의 눈과 마주쳤고, 그는 그녀도 같은 감정을 느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이상이었다.

윈은 청중 모두와 자신이 연결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전에는 결코 몰랐던, 가능할 것이라고 꿈꾸지조차 못했던 하나됨과 화합의 느낌이었다. 마마 엘로디의 강력한 목소리가 피부와 뼈를 관통하는 화음으로 방을 채우고 청중의 모든 날카로움을 부드럽게 만듦에 따라 그녀의 손은 공기를 조각하듯 움직였다. 그녀의 피부는 땀에 젖어 빛났고, 푸른 핏줄이 목에 튀어나왔다.

그녀가 이 음악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일종의 타격을 준다는 것은 확실했다.

마마 엘로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짐에 따라 방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음은 봄에 눈이 녹듯이, 겨울 바다에 해가 지듯이 녹아내렸다. 윈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십 명의 남녀가 울면서 마마 엘로디를 향해 팔을 뻗고 노래를 계속하기를 애원하고 있었다. 마마 엘로디는 무대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노래는 끝나가고 있었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마마 엘로디는 무대 바닥의 문을 통해 내려가며 사라졌다.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마지막에는 속삭임처럼 들렸다.

곧 그마저도 사라졌다.

방은 이제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다. 객석의 조명이 점차 들어오기 시작하자 윈은 헉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불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빡였고, 화학공학 조명이 타 버려 매우 낮아진 것을 보았다. 마마 엘로디는 얼마나 오래 노래를 한 걸까? 몇 시간? 몇 분? 알 도리가 없었다. 윈은 완전히 진이 빠졌지만, 동시에 새로 힘을 얻었다. 머리는 가벼워지고 폐는 근래 느낀 것 중 가장 깨끗한 느낌이었다. 그는 케즈를 향해 돌아섰고, 그녀 역시 똑같은 원기회복의 느낌을 받았음을 알았다. 청중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원래 친했던 이들, 낯선 이들 가릴 것 없이 방금 함께 경험한 마법을 만끽하고 있었다.

니코, 핀, 잰키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똑같이 깊은 계시를 경험한 상태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윈은 알 수 없었지만, 각자가 모두 변화를 경험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형도…?” 윈이 말했다.

“맞아.” 니코가 말했다.

자운의 다섯 고아는 그들이 앞으로 다시는 알지 못할 소속감을 잠시 나누며 서로 얼싸안았다. 안았던 것을 풀었을 때는 두 문지기 입 냄새와 윙윙대는 기계 팔이 주먹을 쥔 채 그들 뒤에 서 있었다. 입 냄새의 코는 비뚤어져 있었다. 보기에 훨씬 나은데, 윈은 생각했다.

“집에 가라고 했을 텐데.” 기계 팔이 말했다.

“쥐새끼 같은 놈들.” 입 냄새가 아직도 피가 나는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우리한테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그는 커다란 주먹을 손바닥에 두드렸다.

“여길 떠나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아프지 않을 거라고는 보장할 수 없군.” 기계 팔이 거의 사과하듯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뒤에서 아름다운 음악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마마 엘로디가 윈의 목 뒤에 손을 얹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따뜻했고, 윈은 그 감촉에 온몸에 진정되는 느낌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과 함께 온 아이들입니까?” 입 냄새가 물었다.

“그렇답니다.” 마마 엘로디가 대답했다.

두 문지기는 이를 좀 더 문제 삼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극장 최고의 가수의 공연에 매혹된 청중 앞에서 그녀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듯했다. 그들은 이번에는 맞는 것을 용케 피했지만 바베트 극장에 다시 올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알려주려는 듯 아이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물러났다.

윈은 마마 엘로디에게 돌아섰으나, 무대에서 그녀를 감쌌던 마법은 그게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오니아 공주는 사라지고 자운의 고아원 원장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완고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너희한테 교훈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저들한테 때리라고 했어야 하는데.” 마마 엘로디가 그들을 극장 정문으로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녀의 분노를 인정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윈은 재미있어하며 반짝이는 마마 엘로디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윈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잡일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대단했어요.” 마마 엘로디가 그들을 데리고 극장에서 나와 터미널 길로 들어서자 케즈가 말했다. 이곳에 자운으로 내려가는 야간 하강기 역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엘리베이터 위로 뛰거나 엄청나게 많은 계단을 내려가거나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니코, 핀, 잰키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집으로 가도 될 만큼 나이가 들었으므로 손을 흔들고 도망갔다. 윈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케즈와 마마 엘로디와 함께 있었고, 달빛을 받으며 희망의 집으로 가는 이 여정을 즐겼다.

“그렇게 노래하는 법을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케즈가 물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한테서 배웠지.” 마마 엘로디가 대답했다. “어머니는 고대 아이오니아 혈통이었는데, 목소리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좋으셨어.”

“노래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윈이 말했다.

“바스타야의 노래는 모두 아름다워.” 마마 엘로디가 말했다. “그렇지만 슬프기도 하지.”

“왜 슬퍼요?” 윈이 물었다.

“진정한 미가 아름다운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지.” 마마 엘로디가 말했다. “그래서 바스타야의 몇몇 노래는 이제는 부르기에는 너무 슬퍼.”

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부르기에 너무 슬픈 노래가 있을까? 그는 더 묻고 싶었지만, 바베트 극장에서 멀어질수록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윈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절벽을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으니 화학공학 조명과 별들이 강철과 유리의 도시 위에 반짝였다. 윈은 구름 뒤에서 달빛 한 줄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한동안은 이게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하며 깨끗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너희는 이번 주 내내 바닥과 냄비를 닦아야 해. 알고 있지?” 마마 엘로디가 말했다.

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케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바닥과 냄비를 닦는 것쯤은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다.

“그럼요.” 윈이 대답했다. “좋아요.”

[1] Nico이다. 챔피언 니코(Neeko)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