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渠彌
? ~ 기원전 694년
1. 소개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대부. 정장공 때 경으로 임명하려 할 때 세자 홀(忽)[1]이 반대했는데, 고거미는 그것에 앙심을 품었고, 정소공이 즉위하고 송나라의 압력으로 쫓겨났다가[2] 복위한 뒤 기회를 노려 정 소공을 죽이고 공자 미(亹)를 세웠으나 제양공에게 거열형을 당해 최후를 마쳤다.2. 생애
기원전 707년, 주나라와 정나라가 수갈 전투를 벌일 때 고거미는 정 장공을 따라 주 왕실의 군대를 무너뜨렸다.[3] 그 공로로 경으로 임명하려 하는데, 공자 홀이 그것을 말렸다.[4] 그 일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는 갈라졌고, 고거미는 그것을 담아 두었다.기원전 701년, 정 장공이 죽고 채중이 세자 홀을 세웠다. 그가 바로 정 소공이다. 채중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송장공의 협박을 받아 채중은 정 소공을 몰아내고 그 아우 돌(突)을 세우니 그가 바로 정여공이다.
기원전 697년, 채중과 정 여공의 사이가 갈라져 다시 정 소공이 복위했다.
기원전 695년, 정 소공이 복위하고 기회를 엿본 고거미는 정 소공을 살해하고 친한 공자이자 정 소공의 아우인 공자 미를 정나라의 군주로 세웠다.
기원전 694년, 제양공은 정나라의 군신에게 회맹을 요청했을 때 공자 미와 고거미가 참여했다. 이때 채중은 병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았다. 제 양공은 고거미와 공자 미를 포박한 뒤 사형을 선고[5]했고 공자 미는 참수 당하고, 고거미는 거열형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1] 훗날 정소공이다.[2] 이 때 그 동생인 돌(突)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정여공이다. 자세한 일은 정소공, 정여공 항목 참조.[3] 이때 고거미가 중군을 맡았다고 하니 정 장공이 그를 신뢰했음을 알 수 있다.[4] 소설 열국지에서는 숫적으로 우세한 천자의 군을 어려진으로 병거들을 이용하여 숫적인 우위를 활용하기 힘들게하여 승리의 원동력이 되게 하는 등 군략이 있으나 교활하고 신뢰성이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5] 소설 열국지에서는 제나라가 이민족에게 침략당했을때 정소공이 세자시절 지휘관으로 출병하여 작전을 입안하여 이민족을 격파한데 대한 호감이 작용했다고 서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