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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고창희 (高昌熙) |
이명 | 고창희 (高昌凞) |
출생 | 1887년 8월 2일 |
평안남도 평양시 신양리 (現 평양시) | |
사망 | 1942년 1월 5일 (향년 54세) |
경상북도 봉화군 |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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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고창희는 1887년 8월 2일 평양 신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정찬도(鄭燦道), 백기환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으로 건너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사령서를 받고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에 종사했다. 이후 1920년 중국 유하현의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으로부터 군자금 모집 및 한인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귀국했다. 그는 곧바로 근수(李根洙)를 만나 다이나마이트를 입수하여 일본 관청 폭파와 친일관리 처단을 논의한 후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비밀결사 모험청년단(冒險靑年團)을 조직했다.1920년 5월 8일, 그는 정찬도 등 동지들과 함께 평양 죽전리의 부호 김남호로부터 군자금 모집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5월 9일에 체포되었다. 1920년 10월 27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및 강도, 총포화약류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12월 16일 평양복심법원과 19821년 1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1년 3월 옥중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가 독방에 감금되기도 했다. 출소 후 각지를 전전하며 지내다 1942년 1월 5일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고창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고창희의 장남 고광순 씨는 일본에서 유학한 뒤 원산에서 수산물 관련 회사를 다녔고, 1.4 후퇴 당시 남한으로 건너와 제주도에서 수산물 관련 사업을 하다가 1960년대에 브라질로 이민해 한민회에서 활동하며 브라질 한인 사회에서 큰 어른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는 2006년 9월 25일 재외동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독립활동을 하면서도 우리한테 그런 것을 세세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며“아버지가 10년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한 이후에도 각종 독립운동 때문에 도피생활을 했었다”고 밝혔다. 그의 기억에 남은 아버지는 다름아닌 편지였다고 한다. 어느날 <경상북도 봉화분 척곡리>에서 <전상일>이라는 이름으로 편지가 집으로 왔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편지였다. 어머니에게 편지를 읽어드리자 “편지를 봉투채 아궁이에 넣고 태워라 그리고 주소와 내용만 머리에 기억해라”라고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