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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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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정책 시행(전분 6등법, 연분 9등법)4. 의의5. 출저6. 관련 문서

1. 개요

貢法.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이 시행했던 지세(地稅) 제도.

2. 배경

호조에서 아뢰기를,
"매양 벼농사를 답험(踏驗)할 때를 당하면, 혹은 조관(朝官)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감사(監司)에게 위임하기도 하며, 또 많은 전답(田畓)을 기한 안에 모두 조사하여 끝마치고자 하므로, 향곡(鄕曲)에 늘 거주하는 품관(品官)으로 위관(委官)을 삼았는데, 위관(委官)과 서원(書員) 등이 혹은 보는 바가 밝지 못하고 혹은 사정에 끌리어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며, 덜기도 하고 채우기도 하며, 또 마감(磨勘)할 때에 당하여는 문서(文書)가 호번(浩繁)하여 관리들이 이루 다 살필 수가 없는 틈을 타서 간활한 아전(姦吏)들이 꾀를 부려서 뒤바꾸어 시행하게 되오매, 비단 경중(輕重)이 적중(適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지대(支待)하는 비용과 분주(奔走)히 내왕하는 수고 등 폐단이 적지 않사오니, 청하건대 이제부터는 공법(貢法)에 의거하여 전답(田畓) 1결(結)마다 조(租) 10말(斗)을 거두게 하되, 다만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만은 1결(結)에 7말(斗)을 거두게 하여, 예전부터 내려오는 폐단을 덜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할 것이며, 그 풍재(風災)·상재(霜災)·수재(水災)·한재(旱災)로 인하여 농사를 완전히 그르친 사람에게는 조세(租稅)를 전부 면제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 3월 5일 을사 4번째기사
고려 말 ~ 조선 초 과전법하에 수조권을 받은 관리는 답험손실법을 기준으로 추수기에 직접 논밭에 나가 수확량을 보고 주관에 따라 토지 비옥도, 풍흉 정도를 판단하여 세액을 정할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행정적 비용이 과도하게 발생할뿐더러 관원의 부정행위가 자행되고 세금 액수에 대한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답험손실법을 폐지하고 5개월 동안 중앙 관료부터 일반 백성까지 무려 17만명이 넘는 찬반 여론조사를 거쳐 본격적으로 공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다.[1]

3. 정책 시행(전분 6등법, 연분 9등법)

이후 공법상정소(公法詳定所)와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정하고 등급에 따라 각기 다른 자를 사용해 1결당 면적을 달리하여 연분 등급이 같으면 1결당 동일한 조세를 부과하는 전분 6등법을, 농사의 풍흉에 따라 최고 상상년 20두에서 최저 하하년 4두까지 징수토록 하는 연분 9등법을 통해 세액을 정하는 공법이 실시되었다.[2]

4. 의의

공법 시행으로 답험손실법보다 더욱 예측가능하고 효율적인 조세체계가 확립되었고 백성들의 실질적인 세부담도 줄어들게 되었다. 공법과 관련한 더욱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기사를 참조하자.

5. 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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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1] 한편, 공법에 대해 일찍부터 세종과 그 뜻을 함께했던 정인지는 공법 시행 논의를 부활시키고 실제 실무책임자가 되어 삼남지방의 토지 등급을 정하는 등 공법 시행에 실무적 일익을 담당하였다.[2] 비육풍구로 외우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