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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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七政算세종 26년(1444)에 만든 한국사 최초의 역법이다. 기본적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사에서 태양력을 기준으로 계산한 역법은 칠정산이 최초이다.
사서에 고려시대에 십정력(十精曆), 칠요력(七曜曆), 견행력(見行曆), 둔갑력(遁甲曆), 태일력(太一曆)과 같은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었다는 기록들이 있지만 이후의 수 많은 외침때문에 소실되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최초의 역법은 칠정산으로 친다.
조선 세종대왕 때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 정인지가 만들었다. 칠요(七曜: 해ㆍ달ㆍ수성ㆍ금성ㆍ화성ㆍ목성ㆍ토성)의 운행을 계산하는 방법이라 하여 칠정산이라 이름 붙였다. 칠정(七政)은 칠요를 뜻하는 다른 표현이다.
역법에 더 아쉬움이 없다 하겠다(曆法可謂無遺恨矣) - 세종실록 156권
2. 내용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칠정산내외편 원문[1]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칠정산내외편 해제
칠정산내편 번역본(한국고전종합DB)
한민족은 삼국시대 이래로부터 조선이 들어설 때까지 대외적으로 중국에서 만든 역서를 수입해서 사용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당의 선명력, 고려 충선왕 때 원의 수시력, 조선 초 명의 대통력. 역법을 만들 기술력 부족도 있지만 오직 천자만 하늘을 주관할 수 있다는 중화주의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했다.
이에 세종대왕이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라고 지시, 국내에서 대간의, 소간의 등 천문기구들을 제작하여 수도 한양ㆍ백두산ㆍ강화도 마니산ㆍ한라산 등 주요 지점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각지의 북극고도를 측정하고, 별을 관측하여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는 시간과 오성 운행시간을 알아내는 노력을 기울여 처음으로 독자적 역법인 칠정산을 만들었다.
이후 명나라 원통이 편찬한 대통통궤(大統通軌)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원나라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대통통궤의 신기술을 적용하여 세종 24년(1442) 정인지와 정흠지, 정초 등이 칠정산을 만들고 세종 26년(1444)에 칠정산내편을 편찬했다. 또한 이순지와 김담 등이 (정확한 편찬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라비아의 역법인 회회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교정하여 칠정산외편을 편찬했다.
3. 의의
한반도에 정확하게 맞춘 역법으로, 우리나라 내에서의 일식ㆍ월식 등 천문현상을 실제에 가깝게 예측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칠정산으로 구한 한양의 동짓날 낮의 길이는 39.13각(刻)인데, 기존에 사용하던 중국 역법으로 구한 연경의 동짓날 낮의 길이가 38.14각으로 약 1각이 차이 난다. 당시 역서에서는 하루를 100각으로 나누었으므로, 현대의 시간체계로 따지면 1각은 약 14분 24초쯤 된다. 한양은 북경보다 위도가 낮으므로 동짓날 낮의 길이가 연경보다 길어야 한다. 2018년 기준으로 동짓날 서울과 베이징의 낮의 길이를 계산하면, 서울은 9시간 33분, 베이징은 9시간 20분으로 거의 14분에 가깝다. 또한 39.13각이란 값도 현대의 계산과 비교하여 겨우 3분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칠정산으로 계산한 값이 한양의 실제 값과 거의 같다.정묘년교식가령(丁卯年交食假令)에서는 칠정산을 이용해 세종 29년(1447)에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식을 미리 예고했는데 확인 결과 동일한 상황 하에서 인공위성을 통한 현대의 기술로 계산한 값과 1분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아라비아 역법인 회회력이 중국에는 우리나라보다 일찍 들어왔지만 1444년에 이미 칠정산에 적용해 사용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70년 뒤에야 패림(貝林)이 계산법을 발견하여 겨우 사용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세종은 칠정산을 편찬할 때 기존 회회력에는 없던 태양최고행도와 일중행도표 등을 추가하여 편찬했다. 이런 점 때문에 근래 중국 천문학자들은 조선의 칠정산 외편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일본은 1643년 조선통신사 사절중 독축관(讀祝官) 박안기에게 칠정산 계산법을 전수받고 연구하여, 1682년 시부카와 하루미(澁川春海)가 일본 최초의 역법인 정향력(貞享曆)을 완성하였다.
칠정산으로 계산한 1년은 실제 지구 공전일과 오차가 -1초밖에 안 나기로 유명하다. 그레고리력보다도 오차가 작다! 이에 비견되는 것으로는 마야력(실제 지구 공전일과의 오차가 1.15초)이 있다.
4. 기타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하늘을 관측하는 것은 천자만의 특권이었다. 전통적으로 하늘의 명을 받아 임금으로서 정당성을 부여받고 왕조의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여 독자적인 역법을 만드는 행위는 중국 황제가 천명을 받았음을 부정하는 의도로 보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만든 역법을 외국에 내려주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명나라 조정이 알면 외교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었다.이 때문에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연합군이 조선으로 들어오자 선조는 독자적으로 칠정산을 사용함이 들킬까 봐 매우 우려했다. 그리하여 "제후국에 두 가지 역서가 있으니 매우 떳떳치 못한 일이다. 대국을 보기에 부끄러울 따름이다."라며 자체적으로 달력을 제작하는 것을 금지했다.
단, 명이 조선이 칠정산을 따로 만들어 쓰는 것에 대해 먼저 외교적 압박을 가한 적은 없다. 조선이 명이 발표한 역서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한양을 기준점으로 삼아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어 시행한다는 사실을 명나라 조정이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를 빌미로 명이 공식적으로 압력을 가한 적은 없다. 정말로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이 명나라의 대표적인 제후국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조정에선 요동정벌로 갈등이 있던 극초기를 제외하고는 조선의 상황에 어두웠거나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유정난, 중종반정 등으로 인해 명에게서 직접 책봉받은 조선의 왕이 폐위되고 다른 왕이 즉위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거짓말로 상황 보고를 했는데도 명은 이에 시비를 건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의 사정을 말 그대로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어쨌든 명에 대항하려는 게 아닌 이상 다 눈감아 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효종 4년(1653)에 이 금지를 냅다 풀고 당시 청나라에서 사용하던 시헌력을 조선 기준에 맞추어 자체적으로 달력을 제작하였다.
육십갑자의 원년 즉, 갑자년이 칠정산 편찬년도부터 시작한다.
[1]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부분은 국역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