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5 08:03:04

효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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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7대 국왕
孝宗
효종
묘호 효종(孝宗)
시호 조선 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
(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충선(忠宣)[1]
본관 전주(全州)
호(淏)
정연(靜淵)
출생 한성부 향교동 경행방 어의궁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부근)[2]
사망 한성 창덕궁 대조전
능묘 영릉(寧陵)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
부왕 조선 인조(朝鮮仁祖)
모후 인열왕후(仁烈王后)
생몰
기간
양력 1619년 7월 3일 ~ 1659년 6월 23일
(39년 11개월 20일, 1만 4,600일.)
음력 1619년 5월 22일 ~ 1659년 5월 4일
재위
기간
양력 1649년 6월 22일 ~ 1659년 6월 23일
(10년 1일, 3,653일.)
음력 1649년 5월 13일 ~ 1659년 5월 4일
파일:attachment/1263947987_126346467293457.jpg
효종의 어필(御筆)

1. 개요2. 생애
2.1. 즉위 과정2.2. 북벌 준비와 군비 확장2.3. 죽음2.4. 후일담
3. 평가4. 인물됨과 일화
4.1. 가정 생활
5. 가족관계6. 대중매체에서
6.1. 드라마 추노에서의 효종6.2.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의 효종6.3. 웹툰 히어로 툰드라쇼 2: 조선왕조실톡
7.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의 제17대 국왕.

송 효종에서 비롯한 이름인 '효종(孝宗)'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당대에 효종이 중흥 군주의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뿐더러, 이 평가는 오늘날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왕비 인선왕후 장씨 사이에서 1남 6녀를 낳았고, 후궁 안빈 이씨에게서 1녀를 낳았다.

2. 생애

2.1. 즉위 과정

광해군 11년(1619), 인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어머니는 인열왕후 한씨, 새어머니는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 비는 우의정 장유의 딸 인선왕후 장씨였다.

인조 4년(1626)에 봉림대군(鳳林大君)[3]에 봉해지고, 병자호란 때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인질)로 잡혀간다. 볼모로 있는 동안 청나라가 산해관과 서역을 치려고 할 때 소현세자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자신이 가겠다고 할 정도로 형을 지키려 했다.

귀국 이후 소현세자가 갑작스레 의문을 남기고 사망한 이후에 그의 뒤를 이어서 세자에 책봉되었고, 인조 27년(1649)에 아버지 인조가 돌아가시자 다음날에 즉위한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는 온 조정의 맹렬한 탄핵을 받았다. 효종은 김자점과 이시백 두 사람을 잘 예우하라는 인조의 유언 때문에 김자점에게 벌을 주진 않았지만, 온 조정이 등을 돌린 김자점은 완전히 실각하고 만다. 김자점병자호란 때 한 짓[4]을 생각하면 당연한 처사였다.

이에 김자점의 아들들이 격노하였고, 친청파 무장과 대신들을 끌어들여 아버지와 함께 역모를 계획하나, 소용 조씨의 행패를 자의대비 조씨[5]가 조사하던 중에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 친청파는 자취를 감추고, 반청(反淸)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뒤에 말한 것처럼 실제로 이들이 북벌을 정말로 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며, 효종은 북벌론을 그리 공공연하게 주창하지 않았다. 천하의 청나라가 버티고 있는데 즉위하자마자 북벌! 북벌! 굿판을 벌이면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할 지 모를 정도로 멍청한 효종이 아니다.

효종은 대놓고 청나라에 거슬리기보다는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했고, 아울러 서양 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하는 등 망가진 조선의 시스템을 정비하고 기강과 기초적 군사력을 다듬는 일에 주력했다.[6] 게다가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는 소리와는 달리, 효종은 청의 문물[7]을 매우 고평가해서 신하들에게 '오랑캐 문물을 숭상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혹자는 '소현세자가 즉위했다면 조선이 근대화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데, 현실적으로 소현세자가 즉위했다고 해도 효종과 별반 다른 결과를 빚기 어려웠을 것이다.

2.2. 북벌 준비와 군비 확장

북벌의 실행을 위해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산당과 손을 잡고 북벌을 추진했다... 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지만, 송시열은 실제로는 북벌에 심히 소극적이었으며, 효종이 북벌의 당위성을 설파할 때도 수신(修身)만을 권할 따름이었다. 송시열이 북벌파였다는 이미지는 사관마저 물러가게 하고 효종과 송시열 둘만이 독대한 기해독대[8]의 내용을 송시열이 후일에 진술한 바에 근거한 것이다.[9] 그래서 지금은 북벌은 군사력을 기르기 위한 훼이크였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학자들은 효종이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북벌을 이용했다고 본다. 반면에 송시열은 북벌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 염두에도 없지만,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열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즉 효종은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은 자신의 기반인 서인들을 등용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효종이 산당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일파를 아우르면서도 왕권 강화를 시도한 모습은 자주 보인다.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산당(山堂)을 제어할 경우, 자신을 인정하여 정통성을 보장해줄 재야 세력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은 뻔한 상황이었다. 당시는 삼전도의 굴욕의 영향으로 조정에서 일하는 것을 오랑캐에 굴복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는 풍조가 강했고, 고질적인 벼슬 기피 풍조가 퍼졌다. 그러니 재야 세력과 조정에서 일하는 사대부들의 세력 차이는 엄청났고, 조정의 일부 한당과 친청파의 지지 수준으로는 정통성 확보는 물론이거니와 국정 운영도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따라서 효종은 오히려 자신의 친위 세력이 될법한 김자점과 친청파는 배제해버리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 같은 산당을 극진히 예우했다. 하지만 이는 왕권 약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었다. 효종은 이를 방지하고자 유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명분, 즉 북벌을 들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당의 수장 송시열도 왕에게 거의 전권을 이양받다시피 하는 권위를 부여받고도 효종에게 엎드렸던 것이다.

이런 왕권 강화는 효종 본인의 빈약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한 의도 또한 있었다. 효종은 형 소현세자의 자식들(효종의 조카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가로챈 '찬탈자'로 해석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고, 특히 형수 민회빈 강씨의 옥사에 대한 의문점은 사대부 전체에 걸쳐 만연해 있었다. 따라서 효종은 정통성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여, 강빈을 신원할 것을 요구한 신하들을 죽여대고 강빈을 '역강'(逆姜)[10]으로 부르며 "역강에 대해 한 마디라도 꺼냈다간 역당으로 간주하겠다!"라는 강경한 발언을 해가며 입을 막았다.

그런데 사실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에는 소현세자 & 강빈 부부와 볼모 생활을 하면서 관계가 매우 좋았다. 게다가 이후 이석견을 비롯한 소현세자들의 자손들은 귀양지를 계속 옮겨주다가 결국 귀양을 풀고 한양에서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즉, 바꿔 말하면 효종으로선 내심으론 소현세자와 그 가족에게 애정을 가졌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이런 생각을 드러냈다간 당장 본인의 정통성이 무너질 수 있어서, 평생 형수 민회빈 강씨에 대해서만큼은 반드시 강경하게 대응해야 했다는 것. 권력이란 게 아버지와 자식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더니 이래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효종을 북벌에만 매달렸던 이상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꽤 많은데, 그도 청나라의 북경 정복과 천도 과정을 소현세자와 함께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자. 청나라에 대해 복수심은 있어도, 전면적으로 나서서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군비 확장도 임진왜란 - 이괄의 난 - 병자호란에 걸쳐 누더기가 된 군사 편제를 재정비해야 했으므로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대동법의 확대 실시 등 민생을 안정시키면서 진행한 덕에 효종 치세에서 조선은 그나마 안정세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장군인 이완을 등용할 때의 야사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효종은 무신들을 긴급 소집하고, 미리 소집한 군졸들에게 촉이 없는 화살을 해를 입히지 않을 정도로 쏘게 하였다.[11] 이에 놀란 무신들이 죄다 허둥지둥대는데, 오직 이완만이 어명을 받들기 위해서 등에 화살이 꽂힌 채로 그대로 효종의 앞에 나타났다. 또한 당시 그는 임금이 급하게 부를 때는 변고가 있다고 생각하고 갑옷을 의복 안에 갖춰 입어서, 화살을 맞아도 무사할 수 있었다. 효종은 이 모습을 보고 충성심과 준비성에 감탄하여 이완을 북벌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계속하여서 북벌을 위한 군비의 확충을 기하여 군제의 개편, 군사 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청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1654년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충돌 사건이 일어나자 오히려 청의 강요로 나선정벌[12]을 2회 출정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얻은 성과도 소수 있기는 했지만...

1659년 5월 4일 효종이 종기의 악화로 인해 사망하면서 북벌 계획도 흐지부지 끝났다. (음모론적) 야사에 따르면 5월 5일 군대를 출동시키려고 했는데 그 전날 죽었다고.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을 지휘했던 신유 장군은 전리품으로 얻은 플린트락 머스킷 300정 ~ 400정 중 단 1정만 힘들게 빼돌려서 조정에 진상하였고, 시험적으로 양산하였다. 하지만 구조가 복잡해서 생산이 힘들고, 단가는 조총보다 훨씬 비싸면서 성능은 조총보다 약간 앞서는 정도였기에, 효종은 '차라리 같은 값으로 조총 3정 만드는 게 낫겠다.' 하여 수백 정만 소수 생산한 후 백지화했다.

한편 신유 장군이 가져온 것 말고도 하멜머스킷을 진상했지만, 마찬가지로 양산은 되지 못했고, 하멜은 이후 조선에 정착하여 조용히 살다가 나중에 탈출했다.

2.3. 죽음

의료사고로 승하하였다. 당시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머리에 경솔히 침을 놓을 수 없다는 유후성의 의견이 갈린다. 이에 효종이 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 하였으나, 정작 큰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신가귀의 수전증으로 인해 침이 혈락(血絡)을 범하여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 것.[13]

졸지에 왕은 믿었던 신가귀의 의료사고로 인한 과다출혈로 승하하고 책임자인 신가귀는 당초 참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지만,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의 배려로 대신 교수형처해졌다(...) 유후성은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이후에 현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후 다시 어의로 복귀했다.

신가귀는 침을 놓지 못하는 의원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현종 실록 1권 즉위년 6월 4일 3번째 기사를 보면 효종은 과거 신가귀가 수전증이 있음에도 침을 잘 놓았다는 평가를 할 정도로 침 놓는 솜씨는 나빴다고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신가귀를 불러 침을 놓게 했던 것이다.

예전부터 수전증이 있던 신가귀는 당시 효종을 치료할 때 본인 역시 오랜 병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겹쳐 혈락을 범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술된 현종 실록 6년 4일 기사를 보면 "작년에 신가귀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왕(효종)이 애석하게 여겼다" 는 현종의 증언까지 기록되어 있을 정도라, 말 그대로 환자를 데려와 침을 놓게 했다 사단이 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점을 감안했기에 신가귀를 참형이 아닌 교수형에 처한 것. 그리고 조선의 법에서 교수형은 시신을 그나마 보존할 수 있으므로, 같은 사형이라도 참형에 비해 온건한 형벌이었다.[14] 참고로 신가귀의 처형은 조선사에서 국왕이 사망한 후 어의가 직접적으로 처벌받은 사실상 유일한 사례이다. 그 외의 어의들은 책임을 통감하고 단순 사직하거나, 스스로 죄를 칭하여서 잠시 귀양을 갔다가 다시 어의로 복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하간 이 사건 덕분에 산당 독살설이 불거지지만... 송시열의 상경까지 완수한 산당이 무슨 재미를 보겠다고 죽였을까 싶다. 더하여 만일 들통나면 싹 다 대역죄를 입어 능지형 + 친척에게 연좌 + 효수형에 처해져 가문이 씨가 마를 수도 있다. 이런 도박을 하는 쪽은 대개 권력에서 밀려난 쪽이다. 더구나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로운 현종은 산당에 대해 더욱 경계하는 임금이었다. 의학적 관점에서 추론해보면 이는 전적으로 효종의 건강을 책임진 어의 등 의관들의 책임이라고 봐야 한다. 의료사고

효종의 무덤은 영릉(寧陵)으로, 건원릉 서쪽 능선으로 정해진 후 10월 말 계획대로 안장되었다. 10월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므로 한창 추울 때 능이 조성되어 왕릉 조성 작업은 처음부터 부실하게 이뤄져 다음 해 장마 때 석물에 균열이 온다. 곧바로 석물을 고치긴 했으나,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다시 석물이 무너져 이듬해 능을 다시 대대적으로 고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현종은 재위 15년 내내 거의 매년 아버지 무덤 수리를 해야 했다. 결국 현종은 사망하기 1년 전인 1673년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여주시 능서면으로 이장을 한다. 그 당시 천장의 이유로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들어 갈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막상 여주의 영릉 곁으로 옮기기 위해 영릉을 개봉하니 깨끗하여 영릉 대감의 책임자들이 면직되기도 했다.

2.3.1. 사망 플래그?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효종은 죽음에 대한 징조가 정사야사에 유난히 많이 남았단 거다. 효종이 승하하기 2달 전에 거사를 자처하는 한 노인이 창덕궁 돈화문 앞에 엎드려 소리치기를, "5월에 나라에 큰 화가 있을 것이니 경복궁 옛터[15]에 초옥을 짓고 그곳으로 옮겨 화를 물리치는 굿을 하소서!"라고 외쳤으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미친 노인 취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어떤 노인 하나가 스스로 거사(居士)라고 일컬으면서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 밖에 와서 엎드려 말하기를,
"금년 5월 국가에 재화가 있게 될 것이니, 경복궁(景福宮)의 옛터에 초옥(草屋)을 짓고 즉시 이어(移御)하여 재화(災禍)를 물리치는 굿을 하소서."
했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요망한 것이라고 하였다.
時有一老人, 自稱居士, 來伏于昌德宮 敦化門外言曰: "國家今年五月, 當有災禍, 請作草屋于景福宮舊基, 趁卽移御, 以禳其災。" 聞者咸以爲妖。
효종실록 21권, 효종 10년 윤3월 26일 병술 3번째기사 <어떤 노인이 경복궁의 옛터에 초옥(草屋)을 짓고 이어할 것을 아뢰다>
또한 야사에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남았는데, 이는 모두 효종의 부마인 정재륜[16]이 저술한 공사견문록과 한거만록에 남은 이야기다. 공사견문록에는 왕이 승하하던 해 4월에 세자(현종)학질에 걸려 10여 일이 되도록 침과 약의 효력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놀라게 하면 학질을 뗄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효종이 이를 듣고 세자를 징광루(澄光樓) 아래에 있게 하고, 세자를 놀라게 하려고 궁녀를 시켜 몰래 질기와를 가지고 누각 위로 올라가서 내던져 깨뜨리게 하고는, "궁녀 아무개가 누각에서 낙사했다."고 일제히 외치게 하였다. 그러자 궁중에 난리가 났으며, 이를 본 늙은 궁녀 김씨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4대 조정(4代朝政)[17]을 받들었다. 궁중에 일이 있더라도 마땅히 조용히 진정시킬 것인데 이제 일도 없이 일부러 일이 일어난 것처럼 하였으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결국 5월에 효종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야사 기록이긴 한데 이것은 어느 정도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게, 세자 또한 효종이 죽기 직전에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효종 자신도 아픈데 자신보다 세자의 병을 더 신경 썼다는 기록도 실록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효종의 사위가 쓴 기록이다.

그리고 효종 본인도 어느 정도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는지 사망 1달 전에 창덕궁 후원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고 한다(출처는 한거만록).
비 개인 뒤 맑은 빛에 온갖 초목이 새로운데 / 雨後晴光萬綠新
한 자리의 늙은이와 젊은이는 임금과 신하로다 / 一堂長少是君臣
꽃 속의 대(臺)와 버들에 싸인 정자는 마치 그림 같은데 / 花臺柳榭渾如畫
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누나 / 時有鶯聲喚主人

이걸 다 읊고 나서 효종은 "가을 9월에 단풍이 들면 다시 부르겠다"고 하며, "뒷날 다시 만날 것을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2.4. 후일담

승하한 후 장례 절차에도 문제가 생겼는데, 효종의 시신을 넣기 위해 관을 준비해 왔는데, 어깨가 너무 넓어(...) 관이 맞지 않았던 것. 조선 시대에는 왕의 관을 미리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왕의 장례 절차는 왕이 즉위하자마자 관을 짜고, 왕이 승하하기 전까지 매년 옻칠을 덧칠해서 보관하는 절차로 시작한다. 효종의 재위 기간인 10년 동안 어깨가 더 굵고 넓어졌던 듯. 실록에 의하면 송시열이 "효자는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부모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효심을 보이는 법"이라고 주장,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시신이 부패하면서 부풀어 올라 관이 맞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송시열은 사관에게 대차게 까였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널빤지를 잇대어서 왕의 관을 늘리는 초유의 일이 생겼으며, 옻칠을 더하여 널빤지를 이은 자국을 감추도록 했다. 왕의 몸에 맞는 관을 만들 널판이 없어 덧댄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기 힘든 일이지만, 왕이 즉위하자마자 미리 관을 만드는 당시 절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효종이 죽은 뒤에는 조선 역사상 최대의 대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파일:external/t1.daumcdn.net/3Rax2t3bKfcEwELUvm99yFc2x6o.jpg

능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영릉(寧陵)[18]. 세종대왕이 묻힌 영릉(英陵)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처음 장지로 예정된 곳은 수원[19]이었지만, 공력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동구릉에 묻혔다. 그런데 왕릉 석물에 금이 가고 파손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하자 현종 14년인 1673년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다. 인선왕후 장씨도 효종 능 뒤편에 묻혔다. 효종의 능이 될 뻔했던 수원의 예정지에 들어선 능이 바로 사도세자정조의 능인 융건릉이다. 참 재밌는 것은, 민간에서도 피하는 파묘[20] 자리가 영조원릉이 되었다는 것. 사도세자와 정조의 묫자리는 효종의 장지로 물망되었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능의 구조가 좀 특이하다. 릉이 앞뒤로 있는데, 이런 구조를 상하 이원봉(上下異原峰)이라고 부르며, 경종의 릉도 이런 구조로 만들어진다. 두 왕릉 모두 왕비 쪽의 곡장이 없으며 왕 쪽에만 곡장이 있다. 차이점은 효종의 릉은 쌍릉의 위치가 대각선이지만, 경종은 말 그대로 완벽한 앞뒤다.

3. 평가

군사력 확장이라는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보기도 했고, 전란 이후의 민생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던 등 여러 가지로 의욕이 강하였으며,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효종을 '문약에 빠진 조선을 무(武)의 기치를 내세워 개혁하려 한 현실적인 개혁 군주'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1] 효종은 서울 근처의 방어 기지인 남한산성을 보강했으며, 내부 방어 체계를 재정비했다. 다른 국방력 강화도 쌍령 전투 등으로 드러난 조선군의 한심한 전투력을 재정비하고, 군의 자질을 높이기 위한 훈련 강화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북벌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중국을 점령한 청나라의 국력이 융성하던 시기였으니,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 시절 황제는 바로 그냥 황제가 아닌 중국 역사상 백전백승의 먼치킨 황제 강희제였다. 게다가 청은 과거 명을 정복하는 데 최후의 걸림돌이었던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갖고 있었다. 조선군이 아무리 강력해졌다 해도 조총병을 잘 이용해 야전에서나, 만주 일대에서 청군과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지, 청나라 자체를 정벌하는 건 사실상 힘들었다. 당장 강희제 - 옹정제 시절 중국을 탐방한 서양의 학자들이나 선교사들조차도 유럽 국가들이 이 시대 청나라를 만만히 봐선 안 된다고 했으니... 청나라를 끝장낸 이들도 결국 중국의 다수 민족인 한족들이었는데, 이들도 청나라의 쇠퇴를 틈타 청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거다.

그래서 북벌이 기득권 세력(서인 노론)의 세력 유지를 위한 변명에 가까웠었다는 의견도 있다. 병자호란에 대한 국정 운영 실패를 무조건적인 청 비판으로 몰고 가 효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송시열은 신권 강화를 위해 써먹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면 북한이라는 공공의 적과 그에 대항하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권력을 유지했던 독재 정권의 선조뻘 된다는 소리다. 역사는 반복된다

일각에서는 당시 삼번의 난이 벌어지고 대만에서 정성공(정경)이 활약한 점을 들어, 삼번의 반란군이 청을 공격하고 바다에서는 정성공 정경의 협조를 받은 상황에서 강습하면 가능했을 거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번은 스스로도 명분이 없는 막장 집단인 데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정경도 세력상 한계는 명백했기에 효종으로서는 왜란 - 호란 시기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력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효종이 사망하자 북벌 계획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연암 박지원허생전 등을 통해서 이완을 찌질이로 만드는 등 북벌 계획을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소현세자의 일 때문에 아무래도 정통성 문제에 관해서 그토록 매우 민감해 했다. 군비를 확충하고 신인 무반들을 발탁하는 등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는 강단을 보였긴 해도 개인적인 성정 면에서는 흡사 성직자와 같다는 월단평이 있을 정도로 정갈하고 모범이었던 효종이었지만, 민회빈 강씨와 조카들, 그들을 추숭하자는 신료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단호했던 모습 등은 이 때문이다. 과연 효종의 정통성 문제는 아들 대인 현종 시대에 제대로 논란이 불거지게 된다.

10년에 불과한 재위 동안, 본인의 정통성 관련 부분 사건이 잇달았다.

효종 2년 윤방의 시장 문제가 불거졌다. 전 영의정 윤방이 인조 18년에 죽자 그 아들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이식[22]에게 청해 시장[23]을 받았다. 그런데 하필 심기원의 옥사, 소현세자의 죽음, 세자 책봉, 강빈의 옥사가 연이어 터져 시장을 청할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어 차일피일 시간만 축내버렸고, 그 사이 이식은 죽어버렸다. 그리고 이 시기에 다시 시장을 올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문장이 좋아도 시장을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올릴 수는 없어서 대신 조익에게 청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익은 이식의 문장이 워낙 좋으니 고쳐 지을 건 없다며 몇몇 구절만 좀 고쳐서 지었는데, 하필이면 역강이라 표현해야 할 것을 강빈이라 표시해버려서 효종의 분노를 단단히 사 버렸다. 결국 조익은 삭탈관직당했다. 억울하게 처벌 받았네

그리고 그 해 김자점의 옥사가 터진 후 저주 행위로 무당 '앵무' 등이 처형당한 후 사헌부에서 "같은 죄를 저지른 '신생'이란 애는 왜 살아있나요?" 라고 딴죽 걸자 "왜 '신생'이란 애 가지고 이 난리냐?" 라고 반응하기도 했다. 왜 사헌부에서 '신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걸고 넘어졌냐면, 신생은 강빈 옥사 당시 강빈을 배반한 인물로, 강빈이 죽고 1년 뒤 강빈이 묻은 저주물을 발굴하는 작업이 벌어졌을 때 저주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 결과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유배되었고 효종이 왕이 될 수 있었기에, 신생을 처벌한다는 것은 자신이 왕위에 있을 명분을 없애버린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효종은 아예 "시간이 지나더라도 역강을 옹호하려는 새끼는 닥치고 역적!" 이라고 선언해버린다.[24]

그런데도 이 문제는 가라앉지 않아서 효종 5년 '구언의 명'을 내리자[25] 황해감사 김홍욱[26]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호소했는데[27] 효종이 직접 친국(왕이 친히 국문함.)했는데, 구언의 전교에 응해서 올린 거뿐인데 이런 방식으로 대하자 심사가 뒤틀렸는지, 당시 참석해 있던 영상과 좌상을 보며 '왜 말을 하지 않냐'고 타박하고, 대사헌 보고는 '언로(言路)를 막고도 망하지 않는 나라를 들어본 적 있냐'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끝내 자신이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오자서가 남긴 유언을 복붙한 듯한 유언을 남기고는[28] 형장 아래 죽었다. 김홍욱이 이렇게 죽자 다들 쫄았는지 대놓고 강빈 사건 재조사를 요구하는 등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결국 김홍욱 사건은 효종의 최대 흑역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실제로 신하들의 반발도 심했는데, 김홍욱이 죽고 몇 년 뒤도 아닌 같은 해에 김홍욱을 죽인 건 잘못이라는 상소[29]가 올라오는가 하면, 다음 해부터는 아예 '김홍욱의 자손에게까지 죄가 미치게 한 건 잘못이다', '김홍욱이 말을 잘못했지만 죽인 건 너무 가혹했다' 같은 상소가 올라왔고, 심지어 몇 년 뒤에는 '김홍욱을 역적죄로 벌한 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지나치다고 한다', '전하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인심을 잃은 적이 없는데, 김홍욱의 일만은 모두가 원통하다고 한다' 는 상소가 올라오거나, 왕 면전에서 신하들이 아뢸 정도였다. 효종 본인도 분노를 못 이겨 김홍욱을 죽인 게 실수라고 여겼는지, 김홍욱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하를 처벌한 사례는 없으며, 불과 5년 뒤에 김홍욱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정통성 문제에 민감한 왕이었지만, 예송논쟁 문서에 상세히 적혀 있듯이 당대 대신이라는 자들도 대행대왕 효종이 대통이냐, 소통이냐를 두고 첨예하게 다퉜다. 왕조 시대에, 그것도 부왕이 장자 국유론을 내세워 비정상적인 보위 승계를 한 효종에게 정통성 시비는 대단히 큰 문제였을 것이다.[30]

4. 인물됨과 일화

체구가 크고 힘이 강했던 모양. 일이 끝나면 말을 타고 청룡언월도나 철퇴를 가지고 무예를 닦았다고 하며, 영조 때 효종이 쓴 청룡언월도와 철퇴가 저승전에 남아 있어서 당시 힘이 쎄다고 한 무사들이 들어 봤는데 모두 못 들었다고 했다. 정조가 지은 사도세자 지문에 "사도세자가 16세 때 효종의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는 언급이 있다.

얼굴이 상당히 잘생겼다고 한다.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나르시즘에 빠지기도 하였다고. 관의 크기가 맞지 않아서 널빤지를 이어붙여 관을 만들었을 정도이니 키도 크고 어깨도 넓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 인조도 꽤 미남이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긴 한데, 인조의 아버지이자 효종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원종의 초상화를 보면 미묘하긴 하다.[31]

효종에게는 '팔장사(八壯士)'라는 8명의 호위 무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박배원, 신진익[32], 오효성[33], 조양[34], 장애성, 김지웅, 장사민, 박기성 이렇게 8명이다. 이들은 효종이 왕자 시절 청나라에 끌려갔을 때부터 효종을 호위했고, 귀국 후 효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가까이에서 왕을 보필하였다. 일명 용만 팔장사라고 한다. 용만(龍灣)은 평안북도 의주 일원의 지명인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로 갈 때 이곳에서 호위대를 선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뭔가 이름이 야사나 민담에나 나올 법한 이름들이지만 이들은 분명히 실록에서도 그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이름이다. '팔장사'라는 표현은 실제로 실록에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효종 / 현종 실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영조 실록, 정조 실록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가 아니라 후대의 일이며, 기록이나 전승에 따라 8명이 아닌 경우도 있고, 간혹 이름도 다르다.[35]

이들 중 오효성이라는 사람과는 야사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겼다. 효종이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4세였던 아들 현종을 교자에 태울 수 없어서 팔장사가 번갈아가며 어린 현종을 등에 업고 걸었는데, 어린 현종은 다른 장사들이 안으면 계속 울었지만 오효성이 안으면 얌전해져서, 심양에서 한성에 도착할 때까지 결국 오효성이 현종을 계속 업고 걸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아기가 물거나 침을 하도 흘리는 바람에 어깨에 상처가 생기고 옷의 등이 많이 닳아 버렸다. 뒷날 효종은 팔장사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그들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오효성은 현종을 업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게 했다고 한다.

그 후 효종이 오효성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취기가 오른 효종이 오효성을 총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팔을 잡고 이야기하려 하자 오효성은 이를 사양했다. 그러자 빈정 상한 효종은 갑자기 거문고를 들어서 오효성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쳐 버렸다! 당연히 오효성은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결국 다음 날 술에서 깬 효종은 이 사실을 알고 오효성에게 크게 사과하면서 더욱 총애했다는 야담이 남아 있다. 효종의 울컥하는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하지만 공식 기록인 실록에는, 효종은 세자가 된 이후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화의 출처는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36]인데, 이덕무는 여기서 "이거 오효성의 후손이 기록한 것에서 뽑아 기록해 둔 거임"이라고 언급해 두고 있다. 따라서 야사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세조의 경우에는 워낙에 술을 좋아했고, 술자리 정치까지 했던 양반이니까 신숙주가 취해서 왕이 시키는 대로 팔을 꺾어버렸다는 야사가 남아도 없잖아 신빙성이라도 있는데, 정통성 콤플렉스로 거의 구도자 수준의 생활을 유지한 효종이 술에 취해서 거문고로 신하를 두들겨 팼다는 것은...

확실히 술꾼들이 많았던 조선 시대 왕 중에서 그래도 술은 자제했던 임금으로, 조선의 술 문화에 대해서 한 마디 하기도 했다. 이는 효종행장에 나온 기록이고 조선 시대 관리들의 음주 문화를 비판한 말이지만, 오늘날의 술 문화에도 시사할 바가 많은 말이라 하겠다. 실제로 효종 실록을 보면 관리들에게 술을 줄이라고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으며, 1658년에는 아예 금주령을 내린 기록도 있다.
크게는 천하와 국가를 잃고 작게는 필부의 일신을 망치는 것이 술에서 생기는 일이 많은데, 관직에 임한 사람의 경우는 본래 말할 것도 없다. 술로 인해 말을 실수하는 데에서도 화를 자초하기에 이르기 일쑤이니, 이보다 더 심한 해로움이 어디 있겠는가. -<효종실록> 효종 대왕 행장
볼모 시절부터 매우 아낀 신하 중 하나로 장현이 있다. 장현은 본래 역관으로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수행하면서 역관 신분을 이용해 청나라의 정보를 모으고 화약 및 무기를 몰래 반입하는 위험한 일을 자발적으로 행했다. 효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고 1657년(효종 8년)에 장현을 정2품 자헌대부로 올려줄 정도로 총애했다. 이 장현에겐 이후 궁녀로 입궁한 5촌 조카딸이 있는데, 바로 희빈 장씨다.

사족으로 효종이 심양 생활을 할 때 그려진 어진이 있었는데, 1900년 경복궁 선원전에서 화재가 나는 바람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4.1. 가정 생활

가정 생활에서는 상당히 다정한 아버지면서도 아내에게 쥐여 사는 애처가 + 공처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효종은 정실 왕비인 인선왕후 장씨에게서 훗날의 현종인 세자를 얻고,[37] 공주들도 여러 명 낳았다. 후궁에게서 낳은 아이는 안빈 이씨(安嬪李氏) 소생의 숙녕옹주(淑寧翁主)가 유일했다. 효종은 어느 날 세자와 공주들을 불러서 선물을 주었는데, 숙녕옹주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었으나 정실 인선왕후의 눈치를 보며 선뜻 주지 못하였다. 그러자 인선왕후는 나중에 숙녕옹주를 불러서 선물을 따로 주었다. 부부가 둘 다 마음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때부터 조선 왕실에서 전반적으로 아들 보기가 힘들어진다.[38] 거기에다 기껏 태어나도 요절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결국 철종의 승하로 인해 효종의 (남자) 후손은 완전히 단절된다.[39] 효종의 여계 후손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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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시집에 가 (정성을) 바친다고는 하거니와 어이 괴양이는 품고 있느냐?[40] 행여 감기나 걸렸거든 약이나 하여 먹어라.
ㅡ 효종이 딸 숙명공주에게 쓴 언문(한글) 편지.
이 편지는 숙명공주가 친정(왕실)의 어른들과 주고받은 서찰을 모은 '숙명신한첩'(보물 1629호)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주의 부모인 효종 내외 뿐만 아니라 남동생인 현종명성왕후 김씨 내외, 양할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편지도 수록되어 있다. 당대 왕족 등의 고위층 생활상과 왕실 가족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사료이기도 하거니와, 한글 서예 쪽에서도 조선 초의 판본체에서 조선 후기의 궁체로 변해가는 과도기의 자료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상당히 희귀한 자료라고 한다. 그리고 효종의 왕비이자 숙명공주의 어머니인 인선왕후도 편지를 보냈는데, 인선왕후는 "네 여동생은 벌써 임신해서 아기 베개에 수 놓는다고 수선 떨고 있는데 너는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식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이 편지들이나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보면 효종의 가족들은 왕실 가족답지 않게 서민적이고 훈훈한 가족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게 특징.

5. 가족관계

6. 대중매체에서

6.1. 드라마 추노에서의 효종

이인이 연기했다. 형인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 생존한 조카 석견을 제치고 세자에 오른다. 그에게 있어 석견은 가엾은 조카이자 어쩔 수 없는 정적이다.

석견의 사면을 요청하기 위해 송태하가 동궁전 내관을 통해 은밀히 연락하자 잠행을 핑계로 만나게 되는데, 석견을 왕으로 옹립하려던 자가 이제 와서 석견의 사면을 요청한다고 일갈하며 돌아간다. 이전 문서에서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석견과 송태하를 죽이려는 음모에 가담하게 된다'고 작성되었지만, 효종은 송태하를 추적하는 황철웅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여대며 송태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황철웅마저도 훈련원 관원을 동원하여 세자인 효종의 주변을 감시하고 미행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효종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송태하와 이대길을 잡으려 했지만, 눈치 빠른 이대길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아마 이대길이 송태하에게 말한 대사 때문에 착각을 한 듯. 하지만 끝내 독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석견의 죄를 사면해 달라 인조에게 간청하나 인조가 거부하고[42], 결국 마지막회 나래이션을 통해서 즉위 후 10여 년 뒤에 석견을 사면해주었다고 언급된다.

형과 조카를 제치고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죄책감과, 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욕심 때문에 항상 속으로 괴로워 하는 인물이다.

6.2.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의 효종

탤런트 김주영이 연기 했다.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지만, 신문물에 관심을 갖고 예친왕과 친구로 지내며 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을 기울이는 형과는 달리 그곳에서 청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더욱 갈고 닦은 인물. 이런 경향이 인조와 코드가 맞았는지 소현세자보다 인조에게 더 총애 받는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독살을 당한 후 조카들을 지켜야겠다는 숙부로서의 마음과 그래도 한편으로 보위에 오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적어도 경선군민회빈 강씨가 죽지는 않도록 노력하는 마음은 진심이라 강빈에게 충고를 해주기도 하고, 경선군 석철을 지키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한다.

하지만 강빈은 석철이 죽으면 가장 유리해지는 시동생 봉림대군을 믿지 않는 데다가, 소용 조씨의 계략을 막으려고 한 일들은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 경안군 석견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임을 당한다. 안습...

극 초창기에는 심약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날더러 어쩌라고' 하며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으나, 극이 계속될수록 점점 소용 조씨의 계획에 태클을 걸면서도 미꾸라지처럼 위험에서는 빠져나가는 노련함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발톱을 숨긴 범. 43화에서는 아예 소용 조씨는 "송충이보다 징그러운 봉림대군"이라고 하며 치를 떨 정도.

48화에서는 조씨의 처소로부터 인조를 데려오기 위해 내관 김인을 위시한 병력을 보내는 한편, 조씨를 중전 책봉 교지를 미끼로 꾀어내는데 이때의 모습이 그야말로 끝판왕 포스가 풍긴다. 계획대로 인조 구출 작전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43] 조씨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다과상을 차려오라는 모습은 이 드라마에서 봉림대군의 진짜 모습을 단적으로 요약해 보여주는 장면. 김자점의 역모를 처리하는 장면 역시 폭풍간지.

결국 인조도 빼앗기고 첩지도 빼앗긴 조씨를 처단할 기회가 왔지만, 그래도 묘호처럼 효자라서 그런지 조씨를 살려주라는 인조의 고명을 어길 수 없기에, 또 조씨를 죽여 분을 풀고 주도권을 가지려는 장렬왕후를 견제하기 위해 조씨를 목숨만은 살려주려고 한다. 그러나 성은이 망극함을 느끼기는커녕 자신에게 역으로 죽으라고 저주를 하는 조씨를 용서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결국 사형시키기로 하는데, 현실보다 더 가혹한 처분이 내려졌다.

장렬왕후 조씨와 더불어 이 드라마 최후의 승자 중 하나. 또 조 귀인, 민회빈 강씨 등 여성 캐릭터들의 개성이 강해 상대적으로 남성 캐릭터가 묻히는 감이 없지 않았던 이 드라마에서 김자점, 내관 김인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 남성 캐릭터들 중 하나다.

6.3. 웹툰 히어로 툰드라쇼 2: 조선왕조실톡

손진영이 연기하여 벨테브레가 만든 총을 쏘며 "나이쓰"를 외치며 벨테브레를 칭찬한다.

7. 관련 문서


[1] 원나라고려 충선왕에게 내린 시호한자까지 똑같다. 효종이라는 묘호청나라 몰래 쓴 것이다. 인조부터 철종까지 모든 왕이 다 그랬다.[2] 인조와 효종의 잠저인 어의궁은 2개가 있는데, 인조가 즉위 전에 살던 '상어의궁(上於義宮)'과 왕자(대군) 시절 효종이 살던 '하어의궁(下於義宮)'이다. 효종이 태어난 곳은 상어의궁. 하어의궁 터는 오늘날 혜화동 쪽에 표석이 남아 있다.[3] 군호는 황해도 봉산군에서 유래했다.[4] 당시 인조가 발 빠른 기동대에 쫓겨 남한산성에서 힘겹게 항거하고 있는데, 도원수 김자점은 인조의 명령("신은 평안도에서 침입하는 청군을 막으라")대로 평안도에 틀어박혀 싸우려고 막으려 했지만, 의외로 청군은 여러 평안도 성들을 지나쳐서 압록강을 건넌 지 10일도 안 돼서 한성 부근에 이르렀다는 전갈을 받자, 패닉 상태에 빠져 응원군을 보내는 커녕 술잔치에 여자 끼고 놀았다고 한다.[5] 훗날 장렬왕후 조씨.[6] 이 시헌력이 바로 오늘날 한국에서 쓰이는 음력이다.[7] 엄밀히 말하자면 중국의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유산을 청나라가 계승한 것에 가깝다. 물론 중원 입관 전에도 청나라의 만주족은 마냥 야만족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애초에 금나라가 급하게 세워진 나라인 것과 달리, 청나라는 충분한 준비를 거쳐 기틀을 다진 나라다.[8] 효종이 사망하는 효종 10년 3월 11일.[9] 이 독대의 내용을 공개한 시점은 숙종 1년으로, 예송을 잘못 이끈 죄로 유배된 데다 남인에게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공격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송시열은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야 할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당시의 독대 내용을 공개한 것인데... 과연? 내용을 보면 효종은 실질적인 군사적 내용을 이야기해야 할 터인데, 반대로 유교적인 수신책만을 얘기하고 있으니 뭐(...)[10] '반역자 강씨'라는 뜻의 비칭.[11] 활을 제대로 쏘면 아무리 촉이 없더라도 자상(뾰족한 물건 등에 찔리는 상처)을 입을 수 있다.[12] 일본에게 당했던 조총으로 조총 부대를 편성해 물리치는데 효과적인 승전보를 울릴 수 있었다.[13] 현대 의학으로 해석하면 치료 전 종기가 악화되면서 혈관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침이 세동맥을 손상 시켜서 과다출혈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14] 반대로 서양에서는 참형이 교수형에 비해 온건한 형벌이었다.[15] 당시 경복궁임진왜란 때 불타 뒷날 흥선대원군이 재건축할 때까지 폐허가 되어 있었다.[16] 숙정공주의 남편으로 영의정 정태화의 5남으로 작은 아버지인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갔다.[17] 선조 때부터 궁중 생활을 했을 것이다.[18] 1990년대에는 세종대왕영릉과 구별하기 위해 '녕릉'이라고 표기했었다. 오늘날에는 어법대로 '영릉'이라고 써 놓고 한자를 함께 달아 놓았다.[19] 오늘날에는 화성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20] 무덤의 원래 주인의 관을 옮겨 생긴 빈 묫자리.[21] 그리고 작품을 보면 효종 미남설을 반영한 것인지 외형도 제법 준수하게 묘사되었다. 딱 봐도 무능하게 생긴 아버지나 어째 뚱뚱하게 묘사된 아들에 비한다면.[22] 중종 때 권신 이행의 후손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행도 문장가로 이름이 높아 그의 형인 이기(이쪽은 명종 때 권신)가 "내 무재는 누구보다 뛰어난데 형에 가려서 빛을 못 보고 내 문장도 누구보다 뛰어난데 동생에게 가려졌다." 라고 푸념하기도 했다.[23] 시호를 청하는 글.[24] 아이러니한 건 그 '역강'(逆姜)을 신원 복권시켜준 게 손자인 숙종이었다(...) 뭐 숙종은 단종을 복권시킴으로써 먼 조상인 세조의 정통성도 사실상 부정해버린 인물이니...[25] 구언(懼言)이란 재변이 일어났을 때 신하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에게 쓴소리를 해보라고 하는 것으로, 임금이 쓴소리를 잘 들어야(나아가 실행해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보통 구언의 명을 내려서 나온 말들은 보통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은 있을지언정 그것 때문에 처벌받는 일은 다른 때보다는 적었다.[26] 효종 초 당시 최강 파워의 권력자였던 김자점을 탄핵한 인물.[27] 주요 내용은 이렇다. 1:흉물(앞서 말한 강빈이 묻은 저주물을 말함)들의 발굴 위치와 시점이 맞지 않고(이 저주 행위는 강빈 옥사의 주 근거와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유배된 원인이 되었다.) 2:어선의 복(강빈이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도 당시 강빈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후원에 단단히 감금된 처지였다. 이래가지고서는 독을 넣고 싶어도 못 넣을 지경) 3:소현세자의 세 아이들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실제로 실록에서도 의혹을 살 만한 구절이 보인다). 결론: 이 재변은 강빈이 억울함을 호소해서 벌어진 것이니 강빈 좀 용서해주자.[28]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뽑아 도성 문에 걸어두어라.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보겠노라![29] 당시 원로 대신 정두령의 상소문인데, 실록 원문을 발췌하면 '김홍욱이 죽은 이후 모두들 두려워하며 크게 의혹하여 언로가 끊기려 하니 어찌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닙니까.'[30] 효종은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기에 유학자들이 만족할 만한 군주의 태도를 갖추려고 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강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사람은 저렇게 매정하게 죽여버렸으니(...)[31] 과거에는 현대와는 달리 큰 키와 후덕한 체구, 발달한 골격을 부와 건강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특히 남자라면 건장한 체구 자체가 하나의 미덕으로 칭송받는 경향이 있었다. 왕후 간택시 턱과 볼살이 두드러져 복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선호했던 것도 이 때문. 게다가 무예 연마에 힘쓴 왕이었으니 활력이나 근육도 발달했을 터, 지금 식으로 분류하자면 짐승남 같은 터프가이미남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외모를 떠나 조상인 태조 이성계부터 거의 먼치킨 무인인 데다가 그 아들인 정종도 (사극에서 이미지는 유약하지만) 체구가 건장한 무골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태종도 사냥을 즐기는 무골 기질이 있는 데다가, 유약한 이미지가 있는 문종 역시 체구가 크고 수염이 길었다는 걸 보면, 조선 왕가의 남자들은 대대로 기골이 장대했던 것일 수도 있다.[32] 후에 무과에 급제. 근데 그게 효종 시절이라[33] 효종 재위 10년 중 대부분을 별군직 행수로 일했다.[34] 효종 2년 칠원 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왕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사를 처리한다며 볼맨소리 또한 있었는데, 효종은 재위 내내 이들 팔장사만큼은 각별하게 챙겼다.[35] 나중에 덕천 군수를 지낸 김여로 등이 포함되기도 하는 등, 전승하는 멤버 수를 모두 합치면 이미 8명이 넘는다. 초기 별군직이었던 인물들이 뒤섞여 전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효종은 즉위 후 별군직을 신설해 이들을 자신의 가까이에 뒀고, 주로 왕의 가벼운 행차나 습사 등에 동행했고, 평시에는 왕의 침소를 경호했다. 다만 이들이 봉록으로 받는 결수가 같은 급의 다른 관리들보다 높아 당대에도 여러 번 논의가 이뤄졌었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별군직청을 신설코자 했으나 대신들의 견제가 있어 효종 7년에야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별군직청 자체는 이후 시대에도 유지되다가 고종황제 시절에 폐지됐다.[36] 정확한 출처는 청장관전서 제57권 <양엽기> 4의 '팔장사'편.[37] 얼마나 아꼈는지 당시 세자는 허리를 숙여서 땅바닥에 책을 놓고 수업을 받았다(스승은 존경하란 의미로). 그런데 효종은 세자 허리 나갈까 봐 꼼수까지 써가며(핑계인즉슨 세자 수업에 쓰이는 교재는 논어공자님 말씀을 적어놓은 책인데 어찌하여 바닥에 두고 하는가?) 책상에 책을 올려놓고 수업하려 했다가 실패했다.[38] 오죽하면 효종 이후 대군으로 봉해진 왕자가 전무할 정도.[39] 실제로는 철종의 승하 이후에도 철종의 이복 형 영평군 이경응은언군의 증손자이자 익평군의 친자 경은군 이재성, 이렇게 두 명이 있긴 했는데 영평군은 실제 후손을 남기지 못해 이 쪽도 실제 혈통 단절, 경은군이 아들 둘을 낳긴 했는데 이쪽도 후손이 알려진 게 없다. 이 두 아들의 후손이 없을 경우 정말 효종의 실제 남계 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봐야 한다.[40] "너 시집 갔으면 시가에 정성을 다해야지, 고양이만 품고 있으면 어쩌니?"라는 의미다. 여담으로 효종의 손자이자 숙명공주의 조카인 숙종도 애묘가였다.[41] 생전에는 승은 상궁 이씨. 사후 추존됨.[42] 여기서 명대사를 날려주신다.[43] 사실 이 시점에서는 조씨도 끝판왕 포스를 내뿜던 시절이라, 봉림대군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은 계산하고 있었다.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없는 사이 인조 구하려고? 그게 잘 될 것 같냐?" 라고 일갈한 게 증거. 실제로 조씨는 인조를 꽁꽁 숨겨놓은 것으로 모자라 인조 주변에 무장 병력을 왕창 깔아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기 아들이 자기를 배신할 것과 내관 김인이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인간흉기라는 것은 계산하지 못했고, 그것이 조씨의 결정적 패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