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21:26:26

연령군

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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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숙종의 왕자
연령군 | 延齡君
파일:연령군신도비전경.jpg
연령군 이훤 신도비 전경
출생 1699년 7월 9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집복헌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719년 11월 13일 (향년 20세)
조선 한성부 가회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소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재위기간 조선 연령군
1703년 10월 13일 ~ 1719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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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인수(仁壽) → 훤(昍)[1]
부모 부왕 숙종
모친 명빈 박씨
형제자매 부왕 기준 6남 3녀 중 6남
모친 기준 외아들
배우자 상산군부인 상산 김씨
(商山郡夫人 商山 金氏)
자녀 양자 1남
종교 유교 (성리학)
문숙(文叔)
작호 연령군(延齡君)[2]
시호 효헌공(孝憲公)
}}}}}}}}} ||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가족 관계5. 후손6. 연령군 이훤 신도비

[clearfix]

1. 개요

조선 숙종의 셋째이자 막내 아들. 훗날 영조로 즉위하는 연잉군과 함께 숙종의 귀여움을 받았다. 어찌나 숙종이 연령군을 예뻐했는지 경종의 자리를 위협하던 연잉군의 자리가 연령군에게 위협당했다는 카더라가 있을 정도다. 또한 연령군의 숙배 때 늦은 이조정랑 조도빈은 바로 파직당했을 정도.[3] 하지만 연령군은 그저 정치와 무관한 사랑용 아들이란 주장도 있다.

2. 생애

5세에 그의 생모인 명빈 박씨가 사망하자 숙종은 주상자가 된 연령군을 서둘러 군에 봉했다. 군은 원래 6세 이후에 봉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책봉을 강행하였다.

9세에 판돈령 부사 김동필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변의 맛을 볼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1708년에 출궁하여 사저에 기거했다. 숙종은 연령군을 위해 수만냥의 돈을 들여 저택을 지어주려 했지만, "연잉군에게 2천 냥 썼는데 여기서 돈을 낭비하면 되냐"는 조정의 비판에 그만두고, 선조의 적녀인 정명공주의 200칸 저택을 사서 주었다. 원래 거긴 연잉군이 눈독들였던 집인데 숙종이 택도 없다며 못 사게 했지만, 연령군에겐 대뜸 사주었다. 주춧돌을 보수하는 데만 4가구의 재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을 썼다.

어쨌거나 사저에 기거할 때 민간에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좋은 평이 있다. 숙종이 죽기 직전인 1719년에 고작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숙종은 크게 상심했고 제문과 묘지문을 손수 지었다.

3. 대중매체에서


이복형인 연잉군(영조)에 비해서 존재감이 없다보니 위의 두 사극 모두 정사와는 달리 메인 빌런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4]

4. 가족 관계

  • 아내 : 상산군부인 상산 김씨[5](商山郡夫人 商山 金氏, 1698 ~ 1725) - 김동필(金東弼)의 딸
    • 양자 : 상원군 이공(商原君 李糿, 1715 ~ 1733) - 밀풍군[6]의 차남, 후에 파양됨
    • 며느리 : 군부인 은진 송씨(郡夫人 恩津 宋氏)
      • 양손자 : 이철존(李喆存)
    • 양자 : 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1720 ~ 1737) - 이채[7](李埰)의 아들

5. 후손

연령군이 죽고 18일이 지난 숙종 45년(1719) 음력 10월 20일,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차남 상원군이 연령군의 양자로 지명되었다.# 왕족이 된 만큼 이름을 1자로 개명하였는데, 숙종이 공(糿)이라는 이름을 친히 내렸으며[8] 1727년(영조 3년)에는 상원군으로 봉군되었다.# 그러나 상원군은 생부 밀풍군이인좌의 난에 엮이는 바람에 유배되어 1733년(영조 9년) 사망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양당했다.# 대신 선조의 9남 경창군의 6대손인 낙천군이 연령군의 양자로 입적했지만 그 역시 자식 없이 죽었다. 그래서 낙천군의 양자이자 연령군의 양손자로 덕흥대원군 8대손인 달선군이 1747년(영조 23년)에 들어왔으나# 곧 양어머니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음독 자살하는 바람에 파양당했다.# 그래서 한동안 연령군의 후손은 없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는 이복동생인 은신군을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했다.# 그런데 이게 이미 은신군이 죽은 후인데다가, 연령군의 아들[9]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시킨다고 명확하게 한 게 아니라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항렬을 따지면 은신군은 연령군의 손자 뻘이기 때문에(할아버지 영조의 동생이므로) 연령군의 손자,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한다고만 하고 낙천군과의 관계는 일절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낙천군의 양자로 삼는다'라고 정해야 비로소 낙천군에게 입적되는 것이다. 은신군마저도 자식 없이 죽어서 한동안은 예관들이 연령군의 제사를 맡았다.#

1815년(순조 15년),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애매한 문제 때문인지 남연군과 그의 후손들은, "비록 연령군의 제사와 생일은 챙겨도 우리는 엄연히 영조사도세자의 후손"이라고 인식했었다. 1792년에 펴낸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사도세자의 아들로 적혀 있었고, 고종이 즉위한 뒤에 편찬한 《선원보》에서도 은신군을 사도세자의 자녀로 기록했으며, '출계(出系)'라는 단어를 넣지도 않고 사도세자의 아랫부분에 은신군의 이력을 적었다. 1892년(고종 29년)에 발행한 《선원계보기략》에도 역시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등재되었고, 뿐만 아니라 1899년(광무 3년)에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그의 후손들을 황족 자격으로 봉군할 때, 은신군의 자손들도 포함시켰다. #

그러나 1900년(광무 4년)에 제작한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 : 연령군파》(1면)에는 은신군연령군의 후계로 나와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낙천군을 건너뛴 채 바로 은신군이 연령군의 대를 잇는 것으로 나왔다는 점이다. 낙천군은 본가인 《선원속보 - 선조대왕 자손록 권3 : 경창군파, 경평군파보》 (25면)에 이름이 올라와있으며 '정조 때 특명으로 파양당한 뒤 본가로 돌아왔다(正廟朝特命罷歸本宗)'라고 쓰여있다.

그러니 남연군의 자손들은 항렬을 건너 뛴 채 연령군의 후손도 되고 사도세자의 후손도 되는, 족보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에 놓였다. 이렇게 복잡한 연령군가의 계보는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남연군의 후손들이 정식으로 연령군과 낙천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인정하고, 연령군 - 낙천군 - 은신군 - 남연군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립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참고로 이 남연군에게는 아들 4명이 있었는데, 그중 넷째가 바로 흥선대원군, 다시 그 차남이 고종이다.[10] 즉, 위 문단에서 말한 은신군의 후손들은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일가인 것.

어머니 명빈 박씨 옆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일대인 금천에 묻혔다가 나중에 양증손자인 남연군의 묘가 충청남도 예산군에 조성되자, 후손들이 같은 대방동에 묻힌 양고손자 흥녕군 이창응의 묘와 함께 예산군 덕산면으로 이장했다.

6. 연령군 이훤 신도비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42호 43호 48호[11]
구 영릉 석물 연령군 이훤 신도비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3호
연령군 이훤 신도비
延齡君 李昍 神道碑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574
(공릉동 1-1)
시대 1720년(숙종 46년)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 면적 신도비 1基, 토지 10.2㎡
지정연도 1980년 6월 11일
파일:연령군신도비.jpg
파일:연령군신도비전경.jpg
<colbgcolor=#94153E> 연령군 이훤 신도비[12]
[clearfix]
숙종이 아들 연령군을 그리워하며 세운 비석.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경내에 있다. 원래는 연령군묘가 있던, 지금의 동작구 대방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다. 상술했듯, 나중에 연령군묘를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옮겼지만 신도비는 원래 자리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1967년 8월 3일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720년(숙종 46년)에 세웠으며 비문은 당시 좌의정이었던 이이명이 지었고, 글씨는 예조판서 조태구가 썼으며, 비의 명칭은 우참찬 민진원의 친필이다. 비의 내용은 건립 이유, 연령군의 일생과 품성, 효행 등이다.

받침돌이 굉장히 큰 거북 조각이라서 일명 '거북비'로도 불린다. 앞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조각의 머리는 거북보다 과 비슷하게 생겼다. 입에 여의주도 물고 있다.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 비의 몸체)을 세웠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지붕돌은 팔작지붕 형태인데, 무지개처럼 몸을 휜 채 양 끝을 바라보고 있는 이무기 2마리 조각이 있다.

1980년 6월 1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받았다.

[1] 훈은 "밝다"이며 영조의 휘의 뜻과 같다. 참고로 경종의 휘의 뜻은 “햇빛”이다.[2] 봉호는 황해도 연안군(延安郡)에서 유래했다.[3] 다만 조선 시대 벼슬살이에서 파직은 그리 큰 벌이 아니고 곧 동급의 다른 벼슬에 제수되곤 한다.[4] 대박의 이인좌, 해치의 밀풍군.[5] 임해군의 양자 양녕군 이경(陽寧君 李儆)의 손자인 임원군 이표(林原君 李杓)의 외손녀[6] 소현세자의 증손자[7]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의 5대손[8] 1719년에 태어난 효장세자의 휘가 행(緈)이었기 때문에 같은 항렬로서 실사 변을 공유하였다.[9] 물론 양자.[10] 그니까 쉽게 말해서 최종적으로는 연령군 - 낙천군 - 은신군 - 남연군 이렇게 계통이 확립된다.[11] 44호 상봉동오층석탑부터 47호 상봉동전수덕사사리탑까지는 충청북도 음성군 한독약품박물관으로 이전되어 1993년 4월 3일에 일괄적으로 해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1~100호 문서 참조.[12]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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