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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영릉 석물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40호 42호 43호
화산군 이연 신도비 구 영릉 석물 연령군 이훤 신도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
구 영릉 석물
舊 英陵 石物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로 56
(청량리동 산 1-157)
분류 유물 / 일반조각 / 능묘조각 / 기타
수량 / 면적 석물 12基, 토지 22.6㎡
지정연도 1980년 6월 11일
파일:구영릉석물전경.jpg
파일:구영릉석물전경2.jpg
<colbgcolor=#ae1932> 구 영릉 석물 전경[1]
1. 개요2. 상세3. 유물 목록

[clearfix]

1. 개요

조선 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이었던 구 영릉(英陵)의 석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 있다.

2. 상세

원래 세종은 아버지 태종헌릉 근처, 즉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및 강남구 개포동, 일원동 일대의 대모산 일대에 묻히고 싶어했다. 그래서 먼저 세상을 뜬 소헌왕후를 태종의 능역 서쪽에 장사지냈고 본인이 승하한 후에는 그곳에 합장되었다.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589881_image2_1.jpg
<colbgcolor=#ae1932> 여주로 천장한 현재 영릉[2]
그런데 능 자리를 정할 당시, 당대의 풍수가로 이름난 최양선이 이 묏자리를 두고 "여기는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라고 반대해서 논란이 되었다. 정인지 등이 헛소리로 치부하며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는 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세종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렇지만 세종 사후 최양선이 주장했던 것처럼 세종의 장남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했고, 문종의 장남 단종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도 요절했다. 이 때문에 예종은 할아버지 세종 내외를 여주시로 이장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영릉이다.

영릉 천장 이후 구 영릉의 석물들은 땅에 묻혔다. 원래 여주시로 같이 옮기려 했으나 운반하기 힘들어 묻었다고 한다.[3] 그렇게 500여 년을 땅 속에 있다가 1973년 ~ 1974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발굴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A] 1980년 6월 11일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 구 영릉을 조성했을 때와 1970년대에 발굴했을 당시의 석물들이 다 남아있지는 않다. 각각 4기씩이었을 석양상과 석마상은 지금 각가 2기씩만 현존하고, 2기였던 망주석은 1기만 있다. 장명등과 석인상은 다 남아있는데 장명등의 덮개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병풍석은 없고, 세종대왕신도비는 이수와 비신만 있을 뿐, 받침돌은 사라진 채 발견되었다. 난간주석은 7기 중 2기가 나머지와 모양이 크게 달라서 다른 곳의 난간주석이 섞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호상 2기는 여주 영릉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2기는 발굴 전에 도굴(...)당했다가 다시 찾아서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두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죽석인 듯한 유물도 있는데, 발굴할 때 구 영릉 터에서 죽석을 찾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유물과 구 영릉과의 연관성 역시 확인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석물은 확실하게 구 영릉 유물인 것들과 서울 밖에 있는 석물을 뺀 것들로서 총 13기이다.[A]

현재 완전하게 유물들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 남아있는 구 영릉 석물들은 조선 초기 왕릉 석물의 형태와 제작 방식을 알게 하고, 그 때의 척 단위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유물이다.[A] 특히 세종대왕신도비는 조선 초기 왕릉 양식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비석이다. 왜냐하면 신도비는 세종의 차남 세조의 능인 광릉부터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3. 유물 목록[7]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 구 영릉 석물의 유물 목록
번호 사진 이름 수량 크기 재질
42 - 1호세종대왕신도비
(世宗大王神道碑)
1기 비신 높이 5.7m, 두께 50cm,
너비(하단 1.55m, 상단 1.78m)
대리암
42 - 2호문관석인상1
(文官石人像1)
1기 높이 3.15m, 어깨 너비 1.04m,
두께 1.07m
화강암
42 - 3호문관석인상2
(文官石人像2)
1기 높이 2.84m, 어깨 너비 1.06m,
두께 96cm
42 - 4호무관석인상1
(武官石人像1)
1기 높이 3.12m, 너비 1.07m
42 - 5호무관석인상2
(武官石人像2)
1기 높이 3.23m, 너비 1.06m,
두께 1m
42 - 6호석양상1
(石羊像1)
1기 대석 포함 높이 1.21m, 길이 1.47m
42 - 7호석양상2
(石羊像2)
1기 대석 포함 높이 1.22m, 길이 1.45m
42 - 8호석마상1
(石馬像1)
1기 대석 포함 높이 1.66m, 길이 1.52m,
너비 60cm
42 - 9호석마상2
(石馬像2)
1기 대석 포함 높이 1.7m, 너비 61cm
42 - 10호장명등
(長明燈)
1기 지대석 포함 높이 1.8m, 지름 86cm
42 - 11호망주석
(望柱石)
1기 길이 77cm,
지름(원수 40cm, 운도 55cm)
42 - 12호혼유석
(魂遊石)
1기 길이 2.236m, 너비 1.73m,
높이 44cm
42 - 13호고석
(鼓石)
1기 높이 45cm, 지름 65cm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3] 조선왕조실록[A]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 구영릉 석물 (舊英陵 石物)〉.[A] [A] [7] 출처 - 위키백과: 《구 영릉 석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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