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의 증손 화산군 花山君 | ||
봉호 | 화산부정(花山副正) → 화산도정(花山都正) → 화산군(花山君)[1] | |
본관 | 전주(全州) | |
이름 | 연(渷) | |
양부 | 해양군 이희(海陽君 李僖) | |
생부 | 해원군 이건(海原君 李健) | |
생모 | 군부인 풍산 심씨(豐山 沈氏) | |
부인 | 군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군부인 상주 황씨(尙州 黃氏) | |
자녀 | 3남 7녀[2] | |
생몰 기간 | 음력 | 1647년 1월 15일 ~ 1702년 윤 6월 11일 |
양력 | 1647년 2월 19일 ~ 1702년 8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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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연(李渷). 선조의 10남 인성군의 손자이다. 원래는 인성군의 3남 해원군 이건(海原君 李健)의 3남인데, 아들이 없던 막내 숙부 해양군 이희(海陽君 李僖)의 양자로 출계했다.2. 생애
화산군은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를 효성으로 지극히 섬겼다고 한다. 1661년(현종 2년)에 '화산부정(花山副正)'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에 친아버지 해원군이 49세로 사망하자, 삼년상을 철저하게 치러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그리고 탈상 후에도 제사 때마다 직접 제기를 씻는 등 정성을 보여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이는 1687년(숙종 13년)에 생모 풍산 심씨의 사망 때에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때는 생가 동생들과 함께 묘를 맴돌며 통곡했다고 한다.1674년(현종 15년)에 현종이 승하했을 때 혼전 향관으로 제수받았고, 그 공로로 명선대부(明善大夫) 품계를 받았으며 '화산도정(花山都正)'이 되었다. 1680년(숙종 6년)에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승하했을 때에도 혼전 향관 직을 맡았는데 인경왕후의 삼년상이 끝나기도 전인 1682년(숙종 8년)에 양아버지 해양군 상도 당했다. 탈상 후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해졌다. 1690년(숙종 16년)에는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받았다.#
3. 사망과 이후
1700년(숙종 26년) 경부터 신경통으로 고생하다가 2년 뒤인 1702년(숙종 28년) 윤 6월 11일에 사망했다. 향년 56세.[3]1726년(영조 2년)에 아들 낙창군의 건의로 현록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직을 추증받았고, 1746년(영조 22년)에는 경연관 송인명이 건의하여 시호 '효간(孝簡)'을 받았다.
4. 가족과 후손
혼인을 두 번 했다. 첫 번째 정실 부인은 밀양 박씨 박지(朴誌)의 딸이고, 두 번째 정실 부인은 상주 황씨 황유서(黃有瑞)의 딸이다. 박씨 부인은 1651년(효종 2년)에 태어나 1680년(숙종 6년)에 사망했고, 황씨 부인은 1662년(현종 3년)에 태어나 1734년(영조 4년)에 세상을 떠났다.자녀는 총 3남 7녀이다. 장녀는 은진 송씨 송택상과, 차녀는 한양 조씨 조면과, 3녀는 의령 남씨 남태승과, 4녀는 안동 권씨 권세륭과, 5녀는 여흥 민씨 민덕환과, 6녀는 안동 권씨 권심과, 7녀는 청송 심씨 심용과 혼인했다.
장남은 밀창군 이직(密昌君 李樴)이고 차남은 낙창군 이당(洛昌君 李檔)이며 3남은 능창군 이숙(綾昌君 李橚)[4]이다.
밀창군은 박씨 부인의 소생으로, 생가 큰아버지 화선군 이량(花善君 李湸)의 양자가 되었다.
낙창군과 능창군은 황씨 부인이 낳은 아들이다. 능창군은 생가 작은아버지 화릉군 이량(花陵君 李洮)에게 입적했다. 그래서 화산군의 법적인 자손들은 낙창군의 후손들이다. 낙창군은 두 아들을 두었고 이들의 후손이 현재까지 다수 남아있다.
5. 화산군 이연 신도비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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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사 석불입상 | 화산군 이연 신도비 | 구 영릉 석물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호 | |
화산군 이연 신도비 花山君 李渷 神道碑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75-122 |
시대 | 1747년(영조 23)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수량 / 면적 | 신도비 1基, 토지 9.3㎡ |
지정연도 | 1980년 6월 11일 |
<colbgcolor=#94153E> 화산군 이연 신도비[5] |
낙창군이 아버지 화산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가좌동에 있다. 화산군의 생애와 덕행, 효행이 적혀있다.
1747년(영조 23)에 세웠으며 비문은 당시 좌의정이었던 송인명(宋寅明)이 지었다고 하는데 송인명은 그 1년 전인 1746년(영조 22)에 사망했으므로, 송인명이 죽기 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는 화산군의 조카 서평군 이요(西平君 李橈)[6]가 썼으며 글씨체는 조선 초기부터 유행했던 조맹부 풍 서체이다. 비의 명칭은 아들 낙창군 이당의 친필이다.[7]
받침돌이 굉장히 큰 거북 조각이라서 일명 '거북비'로도 불린다.[8] 앞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조각의 머리는 거북보다 용과 비슷하게 생겼다. 입에 여의주도 물고 있다.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 비의 몸체)을 세웠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지붕돌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신도비는 보통 무덤가에 세운다. 거기에 비 옆에 문신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화산군의 묘가 있었던 듯 하다.[9] 하지만 지금 주변이 전부 주택가로 변해서 화산군의 묘가 없어졌지만, 여주의 화산군 묘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에 여주의 선산으로 이장 한 것으로 보인다.
1980년 6월 1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1] 봉호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화산(花山)에서 유래했다.[2] 후술하겠지만, 2남은 다른 곳으로 출계했다.[3]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이며, 만으로는 55세이다.[4]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과 봉호가 같다. 이 능창군과는 6촌 재종조부 - 재종조손 관계이다.[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6] 화산군의 생가 동생 화천군 이정(花川君 李㵾)의 아들.[7] 화산군 이연 신도비명 원문[8] 이 때문에 이 신도비가 있던 주변 마을 이름을 거북골, 거북굴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9] 전주 이씨 인성군파 족보인 선계인성군파속보(璿系仁城君派續譜) 제3권 615쪽에는 화산군 이연의 묘소가 '양주(楊州) 가좌동(嘉佐洞) 정토(淨土) 간좌(艮坐)라고 적혀 있다.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경티말'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은 박촌말 위에 있었으며, 마을에 정토사(淨土寺)라는 절이 있어서 정토말이라고 하던 것이 나중에 경티말로 변했다고 하므로, 양주 가좌동 정토란 바로 이 경티말을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