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6:32:34

청송 심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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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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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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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경상북도 청송군
시조 심홍부 (沈洪孚)
집성촌 경기도 파주시, 연천군, 화성시
강원도 인제군 남면 관대리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추산리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전라남도 곡성군, 장성군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파천면
경상남도 산청군, 합천군
인구 240,768명(2015년) | 국내 37위
링크 청송심씨대종회

1. 개요2. 역사3. 항렬4. 인명
4.1. 계보 불명
5. 다른 가문과의 인연
5.1. 신천 강씨(信川 康氏)5.2. 반남 박씨(潘南 朴氏)5.3. 파평 윤씨(坡平 尹氏)5.4. 남양 홍씨 당홍계(南陽 洪氏 唐洪系)
6. 순위
6.1. 조선 왕비 배출 가문 순위6.2. 조선 왕세자빈 배출 가문 순위6.3. 조선 국구 배출 가문 순위6.4. 조선 부마 배출 가문 순위6.5. 영의정 배출 가문 순위6.6. 정승 배출 가문 순위
7. 관련 문서

1. 개요

경상북도 청송군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심홍부(沈洪孚)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했다. 그의 생몰연대나 사적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어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심(沈)씨의 발상한 사적[發蹟]의 사실을 증거할 만한 문헌은 없지만, 원류보(源流譜)의 청송심씨 장(章)에 이르기를, 심충(沈忠)은 고려조에 벼슬이 중윤(中尹)에 이르렀고, 그 아들 공좌(公佐: 또는 현좌(賢佐)라고도 함)는 국자진사(國子進士)[1]이며, 또, 그 아들 수정(守貞)도 국자진사이고, 그 아들은 홍부로 문림랑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종인(宗人) 심동제(沈東濟)의 집 고첩(古牒)에 역시 3세의 휘함(諱啣)이 있으며 고려초에 진사 현좌(賢佐)가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건너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의 종인 심상윤(沈相允)의 가승(家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沈忠 高麗所尹 配南陽洪氏 墓中臺山亥龍乾坐 合封
子 公佐(一云 賢佐) 國子進士 配坡平尹氏 墓上同 合封
子 守貞 國子進士 配礪山宋氏 墓上同 合封
子 洪孚 文林郞 配咸安趙氏 墓普光山 合封
子 淵 閤門祗侯 配坡平尹氏 墓南堂山辰坐 上下封
심충은 고려의 소윤이며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묘지는 중대산 해룡의 건좌에 합봉하였다.
자 공좌(일명 현좌) 국자진사이며 배위는 파평윤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 곳에 합봉하였다.
자 수정 국자진사이며 배위는 여산송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 곳에 합봉하였다.
자 홍부 문림랑이며 배위는 함안조씨이다. 묘소는 보광산에 합봉하였다.
자 연 합문지후이며 배위는 파평윤씨이다. 묘소는 남당산 상하분이다.

원류보와 청송 심씨 종인들의 가첩들을 종합해 보면 심홍부 이전에 심충, 심공좌(심현좌), 심수정 3명의 인물이 더 존재하며, 이들은 1100년대 금나라의 침략을 받던 송나라에서 고려로 건너와 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2]

청송 심씨는 막상 찾아보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드물지도 않다. 쉽게 말하면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수준이다. 본관에 따라서는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에 가장 인구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에 가장 많다. 전라도 지역에도 많은 수가 살고 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인구 비율로만 보면 강원도 영서 지방이 가장 높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도 심씨가 많은데 이곳은 대부분 삼척 심씨이다. 인구가 상당히 적은 제주도를 제외하면 다른 본관에 비해 특정 지역에 편중되는 현상 없이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세도가문으로서 역사에 자주 거론이 된다. 특히 조선조에 들어와서 종묘 배향 인물 1명을 배출했다. 이외 왕비 3명, 부마 4명, 상신 13명, 문형 2명, 청백리 2명, 호당 2명, 공신 8명, 장신 1명, 문과 급제자 194명을 배출했는데 확실히 인구 순위를 감안하면 놀라운 강세다. 다만 문묘 배향공신은 배출하지 못했다.

서인의 태두 심의겸(沈義謙)을 위시로 노론의 중핵 가문 중 하나.

2. 역사

4세손인 심덕부(沈德符)는 고려 우왕진포대첩에서 도원수로서,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과 함께 왜구의 침입을 물리쳤고,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으며, 창왕 때에는 판삼사사, 공양왕 때에는 중흥 9공신으로 충근양절익찬좌명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시중(忠勤亮節翊贊佐命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이 되어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봉해졌다. 1392년 조선 건국 직후 회군 1등 공신에 책록되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지고 판문하부사, 영삼사사, 좌정승을 지냈다. 이후 후손들이 청송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조선의 세도가문이 되었다.

반면에 심덕부(沈德符)의 아우 심원부(沈元符)는 고려 말에 여러관직을 거쳐 전리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경파인 심덕부는 조선 개국 후에 좌정승을 지내고 그의 후손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지냈으나, 향파인 심원부의 자손들은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심원부의 유훈을 지켜 대대로 고향에 살면서 벼슬을 멀리하였다. 경(京)파는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도총제공파(都摠制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지성주사공파(知成州事公派)·인수부윤공파(仁壽府尹公派)·안효공파(安孝公派)·청원군파(靑原君派)·동지총공파(同知摠公派)의 7파로 갈라진다. 그중에서 가장 번창한 파는 안효공파로 청송 심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3].

그의 아들 심온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에게 딸을 시집보냈는데 (소헌왕후) 다들 아시다시피 나중에 충녕대군은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태종에게 외척 경계의 일환으로 철퇴를 맞아 한동안 가문의 위세가 위축되었다가[4][5] 외손자 문종 때 심온 사건의 재조사를 벌여 복권된다[6].

심온의 둘째 아들인 심회가 심온의 외손자 세조영의정을 역임하게 되어 가세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중에 폐비 윤씨의 일로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를 당하고 손자 심순문은 연산군의 어의에 대하여 크기를 논하다가 갑자사화참형을 당하는데[7] 폐비 윤씨는 파평 윤씨의 분파인 함안 윤씨라 나중에 아래에서도 설명할 산송을 생각하면 악연이라 하겠다.

어쨌거나 심순문의 손자 심강(沈鋼, 영의정 심연원의 아들)의 딸이 명종인순왕후, 아들이 심의겸이라 이 사람은 외척이면서도 권신들로부터 사림을 지킨 공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참고로 이전의 외척 이미지는 문정왕후 참고.

이 가문에서 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 총 세 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거기다 이 왕비들의 이른[8] 죽음은 최소 근미래에 큰 나비효과를 일으켰다는 공통점들이 있는데 소헌왕후의 죽음은 계유정난을, 인순왕후의 죽음은 붕당 정치의 등장과 선조의 빠른 왕권 강화를, 단의왕후의 죽음은 경종의 왕권 약화로 인한 영조와의 계승스캔들로 시작하여 탕평책->척신->세도정치를 불러일으켰다.

정유재란에 일본에 끌려간 도공 중에 유명 도예가 가문인 심수관 역시 청송 심씨이다.

일제강점기창씨개명을 할 때, 이 가문은 대체로 아오키(青木)로 창씨한 것으로 알려졌다.[9] 그 외에는 본관인 청송을 일본어로 읽어서 아오마츠(靑松)로 하기도 하였다.

3. 항렬

항렬자를 철저히 지키는 가문으로 유명하며 2024년 현재 생존해 있는 청송 심씨의 대부분은 23~28세손 사이에 있다.
19세○지(之)
20세능(能)○
21세의(宜)○
22세○택(澤)
23세상(相)○
24세섭()
25세재()
26세보()
27세규()
28세용()
29세영(寧)○
30세○기(起)

인수부윤공파와 효창공파는 다른 항렬을 쓴다.
  • 인수부윤공파[10]
19세○영(永)
20세낙(樂)○
21세노(魯)○
22세원(遠)○
23세종(鍾)○
24세○구(求)
25세○식(植)
26세우(愚)○
27세기(基)○
28세○석(錫)
29세태(泰)○
30세○수(秀)
  • 효창공파
19세계(啓)○
20세학(學)○
21세우(雨)○
22세승(承)○
23세○래(來)
24세○섭(燮)
25세○규(圭)
26세○호(鎬)
27세영(永)○
28세정(楨)○
29세○열(烈)
30세○기(基)

4. 인명

이름 생몰년도 비고
20세 이전
심온(沈溫) 1375 ~ 1419 안효공파 부원군
심의겸(沈義謙) 1535 ~ 1587 안효공파 병조판서
심환지(沈煥之) 1730 ~ 1802 안효공파 온양공파 영의정
21세(宜)
심의환(沈宜渙) 1927 ~ 1979 악은공파 증참판공파 장관
22세(澤)
심순택(沈舜澤) 1824 ~ 1906 안효공파 온양공파 대한제국 공작
23세(相)
심상우(沈相宇) 1938 ~ 1983 안효공파 훈도공파 국회의원
심상명(沈相明) 1942 ~ 지성주사공파 감찰공파 장관
심형래(沈炯來) 1958 ~ 안효공파 문정공파 코미디언
심상은(沈相恩) 1972 ~ 안효공파 대학 교수
24세(燮)
심훈(沈薰) 1901 ~ 1936 안효공파 온양공파 독립유공자, 소설가, 언론인, 본명 대섭(大燮)
심완구(沈完求) 1938 ~ 2020 인수부윤공파 충의위공파 국회의원
심규섭(沈奎燮) 1958 ~ 2002 안효공파 정언공파 국회의원
심승한(沈勝韓) 1978 ~ 지성주사공파 감찰공파 성우
심현섭(沈賢燮) 1970 ~ 안효공파 훈도공파 코미디언
심윤섭(沈潤燮) 1977 ~ 봉익공파 전서공파 응원단장
심희섭(沈熙燮) 1986 ~ 안효공파 부평공파 배우
25세(載)
심재설(沈載卨) 1910 ~ 1971 안효공파 온양공파 배우, 친일파
심광식(沈光植) 1911 ~ 1960 인수부윤공파 안악공파 독립유공자
심재인(沈載仁) 1918 ~ 1950 안효공파 좌의정공파 독립유공자
심재홍(沈載鴻) 1933 ~ 안효공파 도사공파 정치인
심재덕(沈載德) 1936 ~ 2009 안효공파 정언공파 정치인
심재권(沈載權) 1946 ~ 인수부윤공파 참봉공파 정치인
심재원(沈載元) 1953 ~ 1994 안효공파 풍덕공파 체육인
심재철(沈在哲) 1958 ~ 안효공파 훈도공파 정치인
심재권(沈載權) 1963 ~ 인수부윤공파 안악공파 교육인
심재영(沈載榮) 1996 ~ 안효공파 도사공파 아이돌
심자영(沈자영) 1998 ~ 도총제공파 용담공파 인터넷 방송인
26세(輔)
심명보(沈明輔) 1935 ~ 1994 악은공파 판관공파 정치인
심대평(沈大平) 1941 ~ 안효공파 온양공파 정치인, 일명 용석(勇錫)
심창민(沈昌珉) 1988 ~ 인수부윤공파 참봉공파 아이돌
심으뜸(沈으뜸) 1990 ~ 악은공파 석촌공파 유튜버
심창민(沈昌玟) 1993 ~ 안효공파 수사공파 체육인
심우준(沈佑俊) 1995 ~ 안효공파 훈도공파 체육인
27세(揆)
심기준(沈基俊) 1961 ~ 인수부윤공파 참봉공파 정치인
심규태(沈揆泰) 1967 ~ 인수부윤공파 과천공(금)파 가수
심규혁(沈揆赫) 1982 ~ 안효공파 여주공파 성우
심서연(沈藇姸) 1989 ~ 안효공파 풍덕공파 체육인
심문규(沈彣奎) 1991 ~ 인수부윤공파 학생공(황)파 희극인
심규범(沈揆範) 1991 ~ 안효공파 풍덕공파 체육인
28세(用)
심진화(沈珍華) 1980 ~ 악은공파 목사공파 희극인
심선경(沈善敬) 1995 ~ 인수부윤공파 과천공(금)파 아이돌
심혜원(沈寭園) 2004~ 인수부윤공파 과천공(금)파 아이돌[11]

4.1. 계보 불명

5. 다른 가문과의 인연

5.1. 신천 강씨(信川 康氏)[20]

심온의 아들 중 나중에 영의정이 된 심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온이 화를 입을 때 다른 자식들은 다 죽고 유모가 아직 젖먹이이던 심회만을 업고 달아나 경상도 선산(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편입된 구 선산군 일대) 땅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자 인근 삼밭에 들어가 잠들었다. 이 때 꿈 속에서 삼밭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꾼 강거민(康居敏)이라는 사람이 달려와 이들을 거두었다. 강거민 슬하에서 자란 심회는 세종 말기에 아버지 심온의 억울함이 밝혀져 신원되자 도성으로 올라가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올라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나중에 강거민과 그 부인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선산으로 내려가 6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에 자신들의 선조를 보살펴준 은혜를 생각해 청송 심씨는 지금도 신천 강씨(信川 康氏)와는 혼사를 맺지 않는다고 한다. 즉, 이 둘은 서로 같은 혈족이나 다름없게 여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 과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5.2. 반남 박씨(潘南 朴氏)

세종께서 새로이 즉위하셨을 때 태종께서는 상왕의 자리에 있었다. 박은(朴訔)[21]이 총애를 받아 태종 곁에서 일을 맡고 있었는데, 심온(沈溫)[22]이 세종의 장인인 것을 시기하여 마침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간 틈을 타 백방으로 근거 없는 비방을 퍼뜨리고는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상왕(태종)은 심온이 돌아오는대로 압록강에서 그를 잡아 사사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세종과 소헌후께서도 막을 수 없었다. 박은은 사사로이 자신의 병사를 내어 심온의 집을 포위하고 그 자손들을 남김 없이 잡아 죽였다.

(중략)

출처: 홍한주 - 지수염필

위의 이야기는 청송 심씨 집안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반대로 반남 박씨의 집안에는 이런 이야기는 한 조각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실록 등에도 박은이 태종의 명을 받아 심온의 집안을 멸문시킨 것에 대한 내용이 있으나 박은이 사적으로 심씨 집안을 몰락시키려 했다고는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실록에는 그의 동생인 심정이 박습, 강상인과 함께 상왕인 태종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선위한 태종의 군권을 축소시키다 태종의 노여움을 사 참수되는 과정에서 심온이 배후로 지목되어 자결을 명받고 죽었다가 세종때 무고로 밝혀졌다고 기록되어있다[23].

야사에 따르면, 심온의 인덕으로 인해 그의 죽음의 후폭풍을 두려워한 태종은 심온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대려가 자결하게 만들라고 박은에게 명한데다 난리통 속에서 유일하게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심온의 자식은 갓난아기였다. 지수염필에서는 심온의 몸종이 자기 자식을 심온의 자식이라고 속여 포졸에게 넘겨 죽게 한 후 심온의 자식을 빼돌려 선산 지역의 강씨 집안으로 피신하였는데, 아이는 자라서 강씨 성을 따라쓰며 감히 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생을 마쳤다. 심온의 손자 대에 이르러 마침내 심씨 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박은 자신이 양심고백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심온이 남긴 유언이 정상적으로 자손에게 전달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근데 이 이야기는 그냥 전해져오는 이야기이고, 손자 대까지 갈 것도 없이 심온의 첫째 아들 심준(沈濬)은 세종때 영중추원사를 지냈고, 둘째 아들 심회(沈澮)는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세째 아들 심결(沈決) 역시 세조 때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더해서 굳이 박은이 양심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박은이 혼자서 심온을 데려간 것은 아닐테니 박은이 데리고 간 군사들이나 당시 심온을 모시던 노비들이 살아남아 자식들에게 전했을 수도 있다.
태종의 외척 견제로 억울하게 죽었지만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선왕인 태종을 욕할 수도 없어 애꿎은 박은만 원망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24]

5.3. 파평 윤씨(坡平 尹氏)

윤관과 심지원 묘는 파주에 있다. 윤씨가 먼저 이곳에다가 묘를 썼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그에 대한 기록을 잃어버리게 되니 심씨가 그 산을 점령하고는 심지원의 묘로 썼다.

출처: 영조실록

파평 윤씨 가문의 윤관 장군은 함흥평야에 9성을 쌓아 여진족과 싸운 고려시대 명장으로 1111년 사망하였는데 이때 예종이 친히 그의 묘를 정해주었다.

양 문중 사이의 묘지 다툼은 조선 중기인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 바로 위에 부친 묘를 조성한 뒤 일대 땅을 하사받아 문중 묘역을 조성하면서 비롯됐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년이 지난 1763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발전했다. 파평 윤씨-청송 심씨 400년 묘지 다툼 종결

두 문중은 조선시대 왕비를 4명(파평 윤씨), 3명(청송 심씨)씩 배출한 외척 가문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영조조차도 손을 쓰기 힘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도 산송을 반복하다보니 영조도 빡쳐서(...) 대표자들을 귀양보낸 적도 있고 귀양 도중 윤씨 집안 사람이 죽기도 하는 등 정말 살벌하게 산송이 진행되었다. 두 가문의 산송은 일제강점기 때도 법원 재판으로 이어졌다.[25]

첫 산송이 있은 지 무려 392년 만인 2006년 원래 묘지로부터 120m 떨어진 장소의 땅을 파평 윤씨 집안의 재산으로 장만하여 청송 심씨 집안에 넘기고 심지원과 일가의 묘를 그 쪽으로 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청송 심씨 집안에서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두 가문의 살벌한 산송 다툼은 막을 내렸다.

5.4. 남양 홍씨 당홍계(南陽 洪氏 唐洪系)

1963년 11월 16일 김의창, 최재호, 김영빈, 김봉렬, 김헌 씨 등 재야 체신인들은 친목 단체로 대한 체우회를 만들고 64년 우정 80년 기념사업으로 홍영식이 청병의 칼 아래 쓰러진 창덕궁 안 옥류천 상류에 동상을 세우기로 결의, 이 사실을 신문에 실었다.

이 기사를 본 오류 우체국 교환원 이우금 씨가 홍영식의 증손 홍석호 씨(27)와 묘소가 있는 곳을 재야 체신인 이응주 씨에게 전화로 연락해 온 것이다. 이응주 씨는 석호 씨의 어머니 심재봉 씨를 만나 갑신정변 실패 이후 홍 선생 가문의 참혹했던 일을 들을 수 있었다[26].

심씨에 의하면 갑신정변이 실패되자 홍영식은 역신으로 몰렸고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것이다. 수구파들의 강권으로 어명이 내려 홍영식의 5세난 아들은 조부의 손에 독사 당했다. 선생의 동생 정표는 그때 2세,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유모가 수구문 밖 공동묘지에서 유아시체를 가져다 죽은 것처럼 꾸며 화를 면했지만 16세 때 요절하고 말았다.

이처럼 홍영식의 후손이 끊기자 문중에서 선생의 4촌형 홍만식의 2남 성겸을 선생의 양자로 입양시켰다. 그러나 홍만식도 을사 때 자결하고 말았다. 성겸에게서 현기·응기 두 아들이 태어나고 현기도 아들을 두었으나 이들은 모두 6·25 때 실종되고 지금은 응기의 아들 석호 씨와 딸 해진 양이 홍영식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게되었다. 또한 응기가 서울서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중학교·중앙고등학교)에 다닐 때 박영효가 뒷바라지를 했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었다. 6·25 때 심씨는 친정 심호섭 씨 집(충청남도 당진군 합덕면 운산리)으로 내려가 석호 씨와 해진 양은 외조부 손에서 커왔다.

6. 순위

6.1. 조선 왕비 배출 가문 순위

순위성씨왕비
1위청주 한씨6인
2위파평 윤씨5인
3위여흥 민씨4인
4위청송 심씨, 경주 김씨, 신 안동 김씨3인

6.2. 조선 왕세자빈 배출 가문 순위

순위성씨왕세자빈
1위청송 심씨, 여흥 민씨, 청주 한씨, 청풍 김씨, 풍양 조씨, 광산 김씨2인
7위부유 심씨, 문화 유씨, 경주 김씨, 안동 권씨, 반남 박씨, 무송 윤씨, 진주 강씨, 덕수 장씨,
함종 어씨, 대구 서씨, 풍산 홍씨, 해평 윤씨, 안동 김씨, 하음 봉씨, 거창 신씨
1인

6.3. 조선 국구 배출 가문 순위

순위성씨국구
1위청주 한씨, 파평 윤씨5인
3위여흥 민씨4인
4위청송 심씨, 경주 김씨, 신 안동 김씨3인

6.4. 조선 부마 배출 가문 순위

순위성씨부마
1위파평 윤씨7인
2위청주 한씨5인
3위청송 심씨, 안동 권씨,
반남 박씨, 남양 홍씨 당홍계
4인

6.5. 영의정 배출 가문 순위

순위성씨영의정
1위전주 이씨11인
2위청송 심씨9인
3위신 안동 김씨8인
4위대구 서씨7인
5위청주 한씨6인

6.6. 정승 배출 가문 순위

순위성씨정승
1위전주 이씨22인
2위동래 정씨16인
3위신 안동 김씨15인
4위청송 심씨13인
5위청주 한씨12인
6위파평 윤씨, 여흥 민씨11인
8위대구 서씨, 연안 이씨9인
10위안동 권씨, 경주 이씨,
청풍 김씨, 문화 류씨,
양주 조씨, 남양 홍씨 당홍계
8인
16위평산 신씨, 덕수 이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7인
20위의령 남씨, 연안 김씨,
해평 윤씨, 경주 김씨
6인
24위창녕 성씨, 광주 이씨,
풍산 홍씨, 광산 김씨,
진주 강씨, 양천 허씨,
연일 정씨
5인

7. 관련 문서



[1] 국자감에 소속된 진사를 말하는데 국자감은 조선 때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2] 실제로도 한반도와 가까운 산둥성에는 현재도 심씨 집성촌이 밀집하고 있다.[3] 이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바로 안효공파 벌족이었다.[4] 아래의 반남 박씨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사실 태종이 외척을 경계했다기 보다는 청송 심씨 쪽에서 태종을 경계하다가 분노를 산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그 이전에 자신의 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집안도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 숙청해버린 전례가 있다.[5] 하지만 심온 항목을 보면 그의 아버지 심덕부 때부터 거물 집안이라 초기 왕실에서도 제어하기 힘들 정도였다는 얘기도 있다.[6] 사실 세종도 장인어른을 신원하고 싶었지만 그 처분을 내린 것이 아버지 태종이었기 때문에 자기 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듯 싶다.[7] 일설에는 순문이 아끼던 기생을 연산군이 빼앗아가자 불평을 늘어놓다가 걸러서 형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조부의 연좌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현재는 전자의 내용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편이다.[8] 소헌왕후와 인순왕후의 경우에는 당시 기준으로 요절까지는 아니나 소헌왕후는 시어머니 원경왕후나, 시할머니 신의왕후도 50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도 상대적으로 일찍 사망한건 맞으며 인순왕후는 소헌왕후와 달리 자식이 아예 없는것을 제외하면 안정적인 인생과 말년을 보냈음에도 소헌왕후보다 조금 더 이른 40대 초반에 사망했다. 단의왕후는 30대 초반에 죽었지만 평균 수명이 아무리 적은 18세기 조선인걸 감안해도 요절에 속한다.[9] 대표적인 인물로 아오키 진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심영이 있다.[10] 전라도 공파이다.[11] 심규태의 딸이다.[12] 아버지가 전 남자프로농구 동양 오리온스 단장인 심용섭으로 24세손 섭(燮)자 항렬이다.[13] 안효공파 정낭공파 후손이다.[14] 본명은 심재희(沈載熙).[15] 본명은 심자윤(沈姿潤).[16] 원래는 "보"자가 뒤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보"자가 가운데로 빠졌다.[17] 본명은 심민경(沈守峰). 아버지가 심재덕으로 25세손 재(載)자 항렬이다.[A] [A] [20] 왕건의 먼 조상인 호경의 후손들이며 조선조에는 신덕왕후 강씨 등의 왕후를 배출한 가문이었다.어째 태종한테 철퇴를 맞은 가문들끼리 연이 맺어진건 기분 탓이다.[21]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 조선 개국 후 2번의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책록되었다. 의금부판사 때 신장의 정수를 1차에 30으로 정하여 합리적 형정제도를 시행했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세종 원년 영의정에 오른다. 고려말, 이인임을 탄핵하다가 역으로 매를 맞고 귀양길에서 죽은 신진사대부 박상충의 아들이다.[2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세종의 장인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한 뒤 병조·공조의 의랑을 지내고, 정종 때 대호군, 1411년 풍해도관찰사, 대사헌, 1414년 형조, 호조 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냈다.[23]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에 의하면, 병사의 배치를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죄를 받은 강상인, 박습, 심정은 본래 귀양형을 받게 되었으나, 이후 태종이 심온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비치자 병조좌랑 안헌오가 아뢰길 심정이 박습, 강상인과 함께 사사롭게 말을 나눌때 '지금 명령이 상왕과 주상의 두 곳에서 나오니 이는 한 곳에서 나오는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하여, 태종이 박습, 강상인, 심정을 유배지에서 잡아들여 다시 국문하자 심온이 연루되어있다는 고백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청송 심씨 집안에서는 '고문을 못이겨 거짓증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잡아들인 날짜와 자백을 한 날짜가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27] 급한 김에 형을 방패로 벗어나려 했다 집안을 말아먹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24] 왕조국가에선 흔한 일인 게 기묘사화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남곤이나 기축옥사정철도 그들이 악독해서 정적을 다 죽였다기 보다는 각각 중종선조의 의중을 따른 것이지만, 왕이 충신을 죽였다고 할 수 없어 신하인 그들이 간신으로 규정당했다는 게 중론이다. 청송 심씨가 박은을 원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25] KBS 역사스페셜에서 조선시대 산송 문제에 대한 다큐가 방영됐을 때, 이 두 가문의 산송이 나왔는데, 청송 심씨나 파평 윤씨의 각 어르신들의 회상에 따르면, 매년 제사를 치르러 갈 때면 서로 묘를 파 버리겠다며 땅을 팔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제사에 다녔다고 한다. 청송 심씨도 윤관 묘 위에 위치한 심지원의 묘를 지키기 위해 묘 주위에 담을 쌓았다고 한다.[26] 참고로 심재봉 씨의 직계 6대조는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영수였던 심환지(沈煥之)의 둘째 동생인 심위지(沈煒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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