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8 12:53:58

심영택

파일:심영택.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심승택(沈承澤)
영수(永秀)
본관 청송 심씨[1]
출생 1869년 8월 2일
경기도 김포군 노장면 당하리
(현 인천광역시 서구 당하동)
사망 1949년 11월 8일[2]
경기도 김포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심영택은 1869년 8월 2일 경기도 김포군 노장면 당하리(현 인천광역시 서구 당하동)에서 아버지 심의근(沈宜瑾, 1852 ~ 1937. 10. 17)과 어머니 여흥 민씨(1849 ~ ?) 민영도(閔泳圖)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5월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계획을 세웠는데, 동지 장응규중국 상하이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녀온 뒤 구체화되어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기로 했다.

이에 1920년 6월 경기도 경성부 경신학교 교정에서 이규승(李奎承)·장응규·여준현(呂駿鉉) 등과 함께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고 초대 사령장을 맡았고, 그 아래에 부사령장·참모장·재무부·교통부 등의 부서를 두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군자금 모집을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그 뒤 임시정부 발행의 독립공채권을 이용해 6천여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했다.

그러나 주비단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1921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취재, 강도미수, 살인강도교사 등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김포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9년 11월 8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심영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안효공파(安孝公派)-도사공(都事公) 우인(友仁)파 22세 ○택(澤) 항렬.[2] 음력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