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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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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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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2e2e><colcolor=#fff> 부청 소재지 중구 태평통1정목 54 경성부청
([ruby(中區,ruby=チウク)][ruby(太平通,ruby=タイヘイドヲリ)][ruby(一丁目,ruby=イツチヤウメ)]54[ruby(京城府廳,ruby=ケイジヤウフチヤウ)]),
중구 세종대로 110 서울도서관[1]
상위 행정구역 경기도
하위 행정구역 8구
지방 기호
면적 135.36km²
인구 988,537명[A]
인구밀도 7,276.14명/km²
부윤 츠지 케이고
(辻桂五, 18대)
존속기간 1910년 10월 1일[3] ~ 1946년 8월 10일[4]
파일:경성부청 전경.png
1926년 신축 이전한 경성부청
해방 이후 서울특별시청 청사로 쓰였으며, 현재는 서울도서관이 되었다.
파일:혼마치.jpg
1930년대 혼마치(현 중구 충무로)
파일:태평 상공.jpg
경성부의 중심 태평로와 그 일대를 상공에서 찍은 사진
윗부분에 조선총독부 청사와 경복궁의 모습이 보인다.

1. 개요2. 명칭
2.1. 명칭 유래
3. 상징4. 역사
4.1. 인구4.2. 경인통합 계획
5. 특징6. 교통
6.1. 철도6.2. 도로
7. 사법8. 경제
8.1. 상권
9. 생활·문화
9.1. 주거 환경9.2. 교육
9.2.1. 고등교육기관9.2.2. 중등교육기관
9.3. 문화9.4. 언어
10. 행정구역
10.1. 이 시기의 지명
11. 경성부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12. 출신 인물13. 관련 문서14. 틀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인 1910년 10월 1일부터 8.15 광복 이후 경기도 서울시로 개칭되어 폐지된 1946년 8월 10일#까지 만 35년 10개월 10일 간 존속한 경기도에 속한 옛 행정구역으로, 현재 서울특별시의 전신이다. 일본어로 케이조(현대 가나 표기법:けいじょう, 역사적 가나 표기법: ケイジヤウ)라고 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대한제국 수도였던 한성부도 대한제국 수도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10월 1일부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가 발표됨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로 편입되었으며, 경기도청 직할 구역이 되었다. 다만 병합 이전에도 한성부를 행정적으로 경기도 소속으로 처리하는 관행은 존재했다. 가령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여권을 보면 한성부를 경기도 소속으로 표기, 처리하고 있다. 대한제국 여권 일제는 이 관행을 공식화했다.

비록 1910년부터 1946년까지 경기도 관할지역으로 격하되기는 하였지만 식민지 조선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2. 명칭

파일:Gyeongseong.jpg
경성역(현재 '문화역서울 284'로 불리는 전 경부선 서울역 역사이자 현 경의선 서울역 역사)의 역명판이다. 한글 표기는 언문철자법(1930년)맞춤법 통일안(1933년) 제정 이전이라 '경'이고, 가나 표기는 역사적 가나 표기법을 따라 'けいじやう'이다.
공식적인 영문 명칭은 일본어 '게이조'의 헵번식 표기인 Keijo였지만, 일본 제국조선어에서 유래한 Seoul이라는 명칭도 대외적으로 사용하였다.

2.1. 명칭 유래

'경성'이란 표현은 수도(京)+성곽(城)이라는 뜻으로, 고려 시대조선 시대에도 쓰였다. 그러나 이는 지명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임금이 거하는 '서울'이라는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지금의 '서울'이라는 행정구역명도 원래는 도읍을 뜻하는 보통명사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이란 이름도 이 경성의 직역 또는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경성(게이조)'이라는 이름이 일본이 만든 신조어는 아니다. 당대 명백한 성곽도시였던 서울의 모습이 '京+城'으로 개칭을 하는것을 당연시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경성(京城)은 일제가 강제로 한양의 수도 지위를 박탈하고 한양 일부(1936년 이후에는 여기에 근교 경기도 지역도 포함)를 하나로 묶어 '경성부'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조선시대 이전 보통명사 '경성'과 일제강점기 고유명사 '경성'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대한 임시정부 대표 위원장으로 미국 경성 워싱턴에서 말합니다. (중략) 공화를 위하야 피를 흘리는 모든 친구들이여, 저 왜적거짓 선전에 속지 마시오, 낙심 마시오···
1942년 7월 6일 이승만의 연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該使臣)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東京)에 가서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강화도 조약

원 간섭기개경(開京)이란 지명을 두고 원나라 측에서 천자국만 쓸 수 있는 경(京)자를 제후국에서 쓰는 것이 무엄하다 하여 충렬왕개성(開城)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반해 일본은 경(京)자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래 일본인들에게 경성이라는 표현에 익숙해졌고, 그것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경성부로 칭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설도 있다.

3. 상징

파일:제1기 경성부 휘장(1918~1925).png 파일:경성부 휘장(1925-1945).svg
1918년 8월 9일에 만들어진 경성부 휘장. 이 휘장은 도성 주의에 경계선을 두르듯 원을 그렸다. 선에서 튀어나온 모양은 도성 주변이 산에 둘러싸였음을 뜻한다. 그 안에 경성부의 '京(경)'자를 넣었다. 이러한 전체적인 모양은 1996년 이전의 서울시 휘장에 까지 반영되었다. 1926년에 개정되어 해방 이전까지 통용된 경성부 휘장. 다우치 후미쿠라(田內文藏)라는 사람이 제작하여 공모전에 응모한 도안이 활용되었다. 도성에 경계를 두어 둘러 막은 것이 발전하는 경성부의 모습을 상징하기에 부족하고 미술적인 효과도 떨어진다하여 개정하였었다. 전체적으로는 경성부의 '京(경)'자를 도안화한 것으로 위에 있는 山(산)은 북한산을, 아래의 山은 남산을 뜻하며 가운데의 작은 원은 경성부 시가지를 의미한다.

영등포역영중로4~6길 사이 보도에 2021년 현재도 콘크리트 맨홀에 2기 휘장이 새겨져 있다. 파일:경성부2기휘장맨홀뚜껑.png 그리고 2019년 기준으로 서울역사박물관 앞 짧은 횡단보도에 있는 맨홀에도 2기 휘장이 새겨져 있다.

4. 역사

1931년, 일제강점기 중기의 경성부 모습[5]
공식 명칭 한성부(漢城府)(1895년23부로 행정구역을 대개편할 때 한성부 산하 한성군으로 변경되었다가 1년만에 도로 원상복구.)로서 경기도에 소속된 도시가 아닌 오늘날 서울특별시처럼 독립된 도시였던 서울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1일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의 한 도시로 격하되었다. 이듬해인 1911년에 5서(署, 1895년에 개칭)가 다시 5부(部)로 환원, 개편되고, 성저십리 지역의 각 방(坊)은 면(面)으로 개칭되었다.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seoul1910_revised.jpg
1910년 당시 경성부. 1911년과 1914년 사이에 은평면 일부(현재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효자동 일대)가 고양군 신도면으로 편입되었다.[6]

1914년 3월 1일 일제는 대대적인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였는데 이 때 옛 한성부 성저십리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키고, 옛 도성 안쪽(흔히 말하는 '사대문 안') 및 용산, 신용산의 일본인 거류지만을 경성부의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참고로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경성부 관할로 남게된 곳은 동대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숭인동과 창신동, 서대문과 서소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무악동, 천연동, 만리동 등, 그리고 마포나루가 있던 마포동과 도화동 등이었다.
1914년 3월 1일 고양군에 편입된 경성부 8면 (옛 한성부 성저십리 10방) 지역
구 행정구역 신 행정구역 비고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龍山面), 서강면(西江面) 및 연희면 여의도계(汝矣島系)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용산에서 '용'을, 서강에서 '강'을 따와 명명. 현 서울시 마포구 서강, 공덕 일대 및 여의도, 밤섬
경기도 경성부 한지면(漢芝面), 인창면 일부(왕십리 일대), 두모면 일부(성동구 대부분, 중구 신당동·황학동 일대)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옛 한강방(漢江坊)에서 '한'을, 둔지방(屯芝坊)에서 '지'를 따와 명명. 현 서울시 용산구 동부, 중구 일부, 성동구 대부분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崇信面), 인창면(仁昌面) 각 대부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 숭신에서 '숭'을, 인창에서 '인'을 따와 명명. 현 서울시 성북구, 강북구, 동대문구 일대
경기도 경성부 연희면(延𥛶面, 여의도계 제외) 고양군 연희면(延𥛶面) 현 서울 서대문구 대부분 지역
경기도 경성부 은평면(고양군 신도면에 편입된 현재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효자동 제외) 고양군 은평면 옛 연은방(延恩坊)에서 '은'을, 상평방(常平坊)에서 '평'을 따와 명명. 현 서울시 은평구 대부분, 서대문구 일부, 종로구 구기동과 부암동 등
경기도 경성부 두모면 일부(현 서울시 광진구 일부), 양주군 고양주면 잔여 지역 고양군 뚝도면 뚝섬에서 따와 명명. 성동구 성수동·송정동, 광진구, 동대문구 장안동, 송파구 잠실동·신천동


1926년, 부청을 본정1정목에서 태평통1정목 문화일보 사옥 자리로 이전했다. 종전 경성부청 자리는 미츠코시백화점이 되었고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되었다.

경성부가 성벽을 벗어나 동서로 크게 확장된 것은 병참기지화와 민족성 말살을 획책할 목적으로 1936년 조선총독부가 한 '대경성계획(大京城計劃)'을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북쪽은 정릉천,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홍제천, 남쪽은 안양천과 대방천을 자연경계로 확장된 경성부 경계를 결정 지었고, 인구 60만을 돌파하여 일본 제국(만주국, 대만 등 해외 영토를 포함) 7대 도시 반열로 올라섰다. 이때부터 1949년 서울특별시 확장 이전까지 경성부 시가지였던 곳은 동네 이름에 '~가'가 붙는 경우가 많다 (보문동1가, 한강로2가, 문래동3가 등)

1936년에 경성부가 확장될 당시에 시흥군 영등포읍에서는 일본인들이 편입을 반대하였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 유지들은 경성부 편입이 아닌 영등포부 승격을 주장했다. 영등포 지역 일본인들의 주장이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인천권을 경성부에 추가 편입을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영등포 지역의 경성부 편입을 추진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에도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이 고려되기는 했지만 경성부 편입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이 강했었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사태로 사실상 편입 계획이 무산된 적이 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경성부 확장 초안에 노량진과 흑석동이 포함되었다가 갑자기 영등포도 경성부 편입 대상 지역에 포함되었다. 만약에 일본인들들 의견대로 경성부 편입대신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지금 서울 서남부와 광명시 일대는 지금 인천광역시마냥 서울특별시와 접하는 광역시급 서울 근교 위성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내용은 영등포구/역사 참조.
1936년(소화 11년)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굵은 글씨 처리된 곳은 경성부에 재편입된 옛 한성부 지역)
구 행정구역 신 행정구역
경성부 정동, 서계동, 중림동, 합동, 미근동, 평동, 송월동, 교남동, 냉천동, 천연동, 옥천동, 관동(官洞), 교북동, 홍파동, 행촌동, 현저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신교동,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동(通洞), 통의동, 체부동, 필운동, 사직동, 내자동, 적선동, 도렴동(都染洞), 수창동(需昌洞), 당주동, 서린동, 청진동, 수송동, 중학동, 사간동(司諫洞), 송현동, 소격동, 화동, 팔판동, 삼청동, 가회동, 제동, 안국동, 경운동, 관훈동, 견지동, 공평동, 관철동, 인사동, 낙원동, 돈의동, 익선동, 운니동, 계동, 원동(苑洞), 와룡동, 권농동, 수은동(授恩洞), 봉익동, 훈정동, 관수동, 장사동, 예지동, 인의동, 원남동, 연지동, 효제동, 연건동, 숭사동(崇四洞), 숭삼동(崇三洞), 숭이동(崇二洞), 숭일동(崇一洞), 혜화동, 동숭동, 이화동, 충신동, 이촌동, 도화동, 마포동, 창신동, 숭인동 경성부 정동정, 서계정, 중림정, 합정, 미근정, 평동정, 송월정, 교남정, 냉천정, 천연정, 옥천정, 관동정(官洞町), 교북정, 홍파정, 행촌정, 현저정, 누상정, 누하정, 옥인정, 신교정, 청운정, 궁정정, 효자정, 창성정, 통인정, 통의정, 체부정, 필운정, 사직정, 내자정, 적선정, 도렴정(都染洞), 내수정, 당주정, 서린정, 청진정, 수송정, 중학정, 사간정, 송현정, 소격정, 화동정, 팔판정, 삼청정, 가회정, 제동정, 안국정, 경운정, 관훈정, 견지정, 공평정, 관철정, 인사정, 낙원정, 돈의정, 익선정, 운니정, 계동정, 원서정, 와룡정, 권농정, 수은정(授恩町), 봉익정, 훈정정, 관수정, 장사정, 예지정, 인의정, 원남정, 연지정, 효제정, 연건정, 명륜정사정목, 명륜정삼정목, 명륜정이정목, 명륜정일정목, 혜화정, 동숭정, 이화정, 충신정, 이촌정, 도화정, 마포정, 창신정, 숭인정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 신공덕리, 공덕리, 염리, 토정리, 동막상리(東幕上里), 동막하리(東幕下里), 신수철리(新水鐵里), 구수철리(舊水鐵里), 현석리, 신정리, 하중리, 창전리, 상수일리(上水溢里), 하수일리(下水溢里), 여율리(汝栗里), 당인리 아현정, 신공덕정, 공덕정, 염리정, 토정정, 용강정, 대흥정, 신수정, 구수정, 현석정, 신정정, 하중정, 창전정, 상수일정(上水溢町), 하수일정(下水溢町), 여의도정, 당인정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 노고산리, 창천리, 동세교리(東細橋里), 연희리(남가좌리 중 홍제원천 좌안 지역을 포함), 신촌리, 봉원리, 아현북리(兒峴北里), 서세교리(西細橋里), 합정리, 망원리 대현정, 노고산정, 창천정, 동교정, 연희정, 신촌정, 봉원정, 북아현정, 서교정, 합정정, 망원정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弘濟內里, 홍제외리(弘濟外里) 중 홍제원천(弘濟院川) 좌안 지역을 포함), 홍지리, 신영리, 부암리 홍제정, 홍지정, 신영정, 부암정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돈암리(정릉리 일부 포함), 신설리, 용두리, 안암리, 종암리, 제기리, 청량리, 회기리, 이문리, 휘경리, 전농리, 답십리 성북정, 돈암정, 신설정, 용두정, 안암정, 종암정, 제기정, 청량리정, 회기정, 이문정, 휘경정, 전농정, 답십리정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 둔지리(屯芝里), 한강리(漢江里), 보광리, 주성리, 동빙고리, 서빙고리, 사근리, 마장리, 행당리, 신촌리, 수철리(水鐵里), 하왕십리, 상왕십리, 신당리, 두모리(豆毛里) 이태원정, 둔지정/한강통(현 용산동4가·6가), 한남정, 보광정, 주성정, 동빙고정, 서빙고정, 사근정, 마장정, 행당정, 응봉정, 금호정, 하왕십리정, 상왕십리정, 신당정, 옥수정
시흥군 영등포읍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안양천 좌안 지역을 제외) 영등포정, 당산정, 양평정
시흥군 북면 동작리, 흑석리, 본동리, 노량진리, 번대방리(番大方里, 상도리천(上道里川; 대방천) 우안 지역), 신길리, 도림리(상도리천 우안 지역) 동작정, 흑석정, 본동정, 노량진정, 번대방정, 신길정, 도림정(현 도림동, 문래동)
시흥군 동면 상도리 상도정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와 염창리(각기 안양천 우안 지역), 목동리(안양천 우안 지역) 양화정, 양평정
(변동 없음)경성부 태평통 일정목, 태평통 이정목, 서소문정, 남대문통 사정목, 남대문통 오정목, 어성정(御成町; 오나리마치), 길야정(吉野町; 요시노초) 이정목, 길야정 1정목, 고시정(古市町; 후루이치초), 봉래정 사정목,
봉래정 삼정목, 봉래정 이정목, 봉래정 일정목, 화천정(和泉町; 이즈미마치), 의주통 이정목, 죽첨정(竹添町; 다케조에마치) 삼정목, 죽첨정 이정목, 의주통 일정목, 죽첨정 일정목, 서대문정(西大門町) 이정목, 서대문정 일정목, 광화문통(光化門通), 종로 일정목, 종로 이정목, 종로 삼정목, 종로 사정목, 종로 오정목, 종로 육정목, 방산정, 주교정(舟橋町; 후나하시초), 임정(林町; 하야시마치), 입정정(笠井町; 가사이마치), 수표정, 장교정(長橋町; 나가하시초), 수하정, 삼각정, 남대문통 일정목, 다옥정(茶屋町; 자야마치), 무교정, 황금정(黃金町; 고가네마치) 일정목, 황금정 이정목, 황금정 삼정목, 황금정 사정목, 황금정 오정목, 황금정 육정목, 황금정 칠정목, 광희정 이정목, 광희정 일정목, 초음정(初音町; 하쓰네마치), 화원정(花園町; 하나조노마치), 앵정정(櫻井町; 사쿠라이초) 이정목, 앵정정 일정목, 약초정(若草町; 와카구사마치), 영락정(永樂町) 이정목, 영락정 일정목, 명치정(明治町) 이정목, 명치정 일정목, 남대문통 이정목, 장곡천정(長谷川町; 하세가와마치), 남대문통 삼정목, 본정(本町; 혼마치) 일정목, 본정 이정목, 본정 삼정목, 본정 사정목, 본정 오정목, 병목정(竝木町; 나미키마치), 동사헌정(東司憲町), 서사헌정(西司憲町), 신정(新町), 대화정(大和町; 야마토마치) 삼정목, 대화정 이정목, 대화정 일정목, 일지출정(日之出町; 히노데마치), 왜성대정(倭城臺町), 수정(壽町; 고토부키초), 남산정 삼정목, 남산정 이정목, 남산정 일정목, 욱정(旭町; 아사히마치) 삼정목, 욱정 이정목, 욱정 일정목, 북미창정(北米倉町; 기타요네쿠라마치), 남미창정(南米倉町; 미나미요네쿠라마치), 삼판통(三阪通; 미사카토리), 강기정(岡崎町; 오카자키초), 한강통, 청엽정(靑葉町; 아오바초) 일정목, 청엽정 2정목, 청엽정 삼정목, 경정(京町; 미야코마치), 영정(英町; 사카에마치), 원정(元町; 모토마치) 일정목, 원정 이정목, 원정 삼정목, 원정 사정목, 암근정(岩根町; 이와네초), 산수정(山手町; 야마테마치), 청수정(清水町; 시미즈마치), 미생정(彌生町; 야요이마치), 대도정(大島町; 오시마초), 금정(錦町; 니시키마치)
* 고양군 연희면과 시흥군 북면의 잔여 지역은 각각 고양군 은평면과 시흥군 동면에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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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경성부 내 회색 점선과 괄호는 1943년 설치된 7개 구(區). 1944년 신설된 마포구는 표현되어있지 않다.

1941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꼬여 버린 지번을 정리할 목적으로 한강통( 둔지정, 이촌정 중 옛 둔지면 사초리 지역)을 한강통 일정목~삼정목, 용산정 일정목~육정목, 연병정 등으로 분할했다. 1943년 최초로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중구([ruby(中, ruby=チュウ)][ruby(區, ruby=ク)]; 추구, 당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종로구([ruby(鍾, ruby=ショウ)][ruby(路, ruby=ロ)][ruby(區, ruby=ク)]; 쇼로구, 원래 서울 중심지), 동대문구([ruby(東, ruby=トウ)][ruby(大, ruby=ダイ)][ruby(門, ruby=モン)][ruby(區, ruby=ク)]; 도다이몬구), 성동구([ruby(城, ruby=ジヤウ)][ruby(東, ruby=ドウ)][ruby(區, ruby=ク)]; 조토구), 서대문구([ruby(西, ruby=セイ)][ruby(大, ruby=ダイ)][ruby(門, ruby=モン)][ruby(區, ruby=ク)]; 세이다이몬구), 용산구([ruby(龍, ruby=リウ)][ruby(山, ruby=ザン)][ruby(區, ruby=ク)]; 류잔구), 영등포구([ruby(永登, ruby=エイドウ)][ruby(浦, ruby=ホ)][ruby(區, ruby=ク)]; 에이도호구) 7개 구가 설치되었고, 도림정에서 사옥정(絲屋町)이, 여의도정에서 율도정(栗島町)이 분리되었다. 1944년 11월에는 서대문구 일부를 분리하여 마포구([ruby(麻, ruby=マ)][ruby(浦, ruby=ホ)][ruby(區, ruby=ク)]; 마호구)를 신설하였다.(8구)아카라이브 도시·지리채널 같은 해에 종로구 성북정이 동대문구에 편입되였다.[7]

4.1. 인구

파일:경성부 휘장(1925-1945).svg 경성부 인구 추이
(1910년 ~ 1944년)
1910년 278,958명
1914년 8개 면 고양군 편입
1915년 241,085명
1920년 250,208명
1925년 302,711명
1930년 394,098명
1935년 444,098명
1936년 경성부 확장
1940년 935,464명
1944년 988,537명

한성부조선 후기부터 대략 20만명 전후에서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였고, 1910년에 경성부로 개편될 당시에는 약 278,958명이었다. 1912년 통계에서는 266,131명으로 집계되는 등 소폭의 감소세를 보였다.

1914년성저십리 지역 대부분이 고양군으로 편입되며 한양도성과 용산 일대의 인구만 집계됨에 따라 약 2만여 명이 감소하기는 했으나, 경성부의 인구는 1920년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1920년에 250,208명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302,711명으로, 1930년에는 394,098명으로 늘어나고, 1936년 경성부 확장 직전에는 부내 인구가 444,098명으로 집계되었다.

경성부의 인구가 이렇게 증가할 때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던 성저십리 지역도 시가화가 되며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1936년 경성부 확장 이후 다시 경성부로 합쳐지고 거기에 더해 영등포를 편입하게 되면서 전년도에 444,098명으로 집계되었던 데에 비해서 약 15만 명이 늘어난 6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1937년에는 거기서 10만 명이 더 증가한 706,396명, 1940년에는 3년 만에 거의 23만 명이 더 증가한 935,464명으로 집계되며 말 그대로 미친 듯한 성장세를 보여 준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이 공업도시로 전환되며 일자리가 많아지고 본격적으로 근대 도시로서의 시가지가 계획됨에 따라 경성으로 유입되던 인구가 상당히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최종적으로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무렵인 1944년에는 988,537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이 증가세는 해방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만주일본 등지로 갔던 동포들이 돌아오고, 1949년에 주변 경기도 지역을 편입하면서 인구가 대폭 늘어 1950년에 무려 약 70만 명이 늘어난 1,693,224명으로 집계되기에 이른다.

4.2. 경인통합 계획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1939merger.jpg

1939년에 일제는 병참기지화의 목적이 짙었던 '경인(京仁) 일체화'로 당시 시흥군 동면(현 서울 금천구, 구로구 동부,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관악구 대부분), 서면(현 경기 광명시 일부(지금의 광명시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일대 및 소하동 북부), 부천군 소사면/부내면/오정면(현 경기 부천시, 서울 구로구 서부, 인천 부평구, 계양구 남부), 계양면(현 인천 계양구 북부), 서곶면(현 인천 서구), 문학면(현 인천 미추홀구 관교동/문학동, 연수구, 부평구 십정동), 김포군 양서면/양동면(현 서울 강서구, 양천구), 고촌면(현 경기 김포시 고촌읍) 일대를 경성부에 편입시키는 방안(이른바 제2차 대경성계획)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만일 이러한 경성부 추가 대확장이 단행되었다면 지금의 부평, 부천, 양천 일대는 드넓은 평지를 기반으로 강남급의 어마어마한 번화가로 개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大擴張(대확장)되는京城府域(경성부역)[8]

경성부 추가 확장이 무산됨에 따라 경성부 추가 편입 검토지역 중 현재의 부평구 및 계양구 남부, 서구 지역은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경인시가지계획지구와 별개인, 인천부 시가지계획구역(현재의 인천광역시 도시계획구역)으로 변경되었고, 기타 지역은 경인시가지계획지구로 잡혀 경인선을 따라 공업, 주거지역으로의 개발이 계획되었다. (추가 참고 논문 : 염복규. (2007.2). 1930-40년대 인천지역의 행정구역 확장과 시가지계획의 전개. 인천학연구, 6, 83-105.)

5. 특징

경성은 피지배국의 고도(古都)임에도 식민지의 행정 중심지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데, 식민지의 중심은 철도망의 핵심이 되는, 새로 건설된 항구도시로 선정되는 것이 구미 식민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경성은 근린 식민지로써 조선을 경영한 일본 제국의 식민지 경영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비록 경성부는 경기도 소속이었으나, 일본의 조선 지배정책에서 경성부는 언제나 특수성을 인정받았다. 적어도 조선후기부터 서울이 곧 조선이었고, 일제강점기에도, 현재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경성부 내 일본인 거주지로는 남촌과 용산을 꼽을 수 있다. 남촌은 남산 북쪽 구릉으로 조선 후기 이미 상인들의 거주지였으나, 1883년 이후 일본인 상인들이 경성에 이주하면서 일본인 거주지가 되었다. 당시 한성의 중심지는 북촌인 정동이었는데 청나라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이권을 쥔 청국인들이 정동을 선점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남촌, 그것도 끝자락에 거주하였다. 일본인들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서 패권을 잡으면서 남대문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러일전쟁 시기에 이르러 남촌을 장악하였다. 용산은 크게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이 한강변 모래톱이었던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지대를 간척하여 거주지로 삼았고,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여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결과 20년대 이전 경성부는 북촌과 동대문 일대의 조선인 거주지와 남촌+용산+명동의 일본인 거주지의 이중 도시적 모습을 띄었으며, 식민 행정부 당국은 기반 인프라 건설에 있어서 일본인 거주지에 대한 노골적인 특혜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 신축, 경성부청 신축, 경성역 신축, 조선신사 신축 등 경성 및 식민지 조선의 행정중심이 종로일대로 이전하면서 경성의 이중 도시적 측면은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특히 기존 북촌의 동(洞) 행정체계, 남촌의 정(町) 행정체계로 이원화되었던 경성의 행정구역이 정(町)으로 일원화된 것은 식민지 당국이 조선 경영의 중심축을 이화(異化)가 아닌 동화(同化)에 두었다는 상징적 행위였다. 행정중심의 북상은 1925년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로 용산 등 한강변의 일본인 거주지가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도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는 1930년 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일본 제국향락을 담당하기도 했다. 특히 현 명동, 충무로, 남촌 일대의 중심가는 혼마치(本町)라고 불리며 중심 시가지를 이루었는데 모던보이(modern boy)와 같은 서구적 스타일을 고수하는 소비현상이 나타났다. 때문에 본토에서는 각종 유흥 문화가 정부의 통제로 거의 씨가 말라 즐길 거리가 없어졌던 데 비해 식민지 조선과 그 중심인 경성에서는 유흥 문화가 전쟁 전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한반도에는 연합군의 공습이 거의 없어 전전의 유흥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본토에서 출장을 오면 한번 질펀하게 즐기고 돌아갔다고 한다.[9]

하지만 대다수 조선인의 거주 환경은 이와 크게 대비됐는데 만년 적자였던 총독부의 예산 부족으로 도시 개발이 지지부진해지고 공공 인프라 보급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인해 대다수의 경성 조선인의 삶은 병합기 이전과 크게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수도 시설이나 발전소 같은 사회 인프라는 남촌 일대에 집중적으로 지어지고 공급가격도 높았으며 부족한 급수시설로 인해 1927년 기준으로 한국인은 전체 가구의 29%, 일본인은 89.9%, 기타 외국인은 99.9%가 급수 혜택을 받았다.

특히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 이후 북한 지역의 공장 건설이 우선순위가 되면서 경성의 도시 인프라 구축은 더욱 지연되었는데 독립 직후 한반도의 88.5%의 발전시설이 북한 지역에 산업 발전 목적으로 집중돼 있었다.

당시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은 본토의 평균을 훨씬 넘는 소득 수준을 지녔고 통신, 전기, 수도 요금 부터 조선인 보다 적은 금액을 지출하였다. 그에 반해 조선인에게 근대 인프라는 지주나 영세업자가 아닌 이상 누릴 수 없는 것이었고 이 중에서는 외곽으로 밀리면서 토막민으로 불리는 도시빈민이 되기도 하였다.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서울 내 조선의 유적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서울 한양도성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훼손되어 왔고, 숭례문은 도로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철거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민족의식을 꺾기 위해 원구단을 철거하고, 국사당을 강제로 이전시켰다. 특히 조선총독부 청사경복궁 복판에 건축함으로 기존 궁궐을 훼손하자 당대 양식 있는 일본인들에게도 지나친 행위라 비판 받았다.

그러나 식민지 행정부가 도시계획에서 피지배민의 반응을 전적으로 무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례로 총독부는 오늘날 율곡로인, 혜화로 나가는 직선로가 경성의 격자 도로망을 구성하는 데 핵심이 되기 때문에 부설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했다. 그러나 이 도로가 창덕궁종묘를 분리하였기에 창덕궁에 거주하던 순종이 완강하게 거부해서 착공에 들어가지 못했다. 사망 후에 공사를 할 수 있었지만 전주 이씨 종친의 압박에 의해 창덕궁-종묘 간 구름다리를 설치하여야 하였다.(2020년대 초에 지하차도가 설치되어 현재는 창덕궁과 종묘가 이어져 있다.) 총독부의 이런 소극적 태도는 3.1 운동의 경험에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6. 교통

6.1.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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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기 경성부와 인근의 철도 노선도
19세기 말엽부터 한성을 중심으로 놓이기 시작한 전국의 철도망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거의 그 완성을 보게 되었고, 현대까지도 서울 간선철도망은 이때 완성된 것에서 큰 변화가 없다. 많이들 착각하는 것이, 경인선이나 경부선 같은 노선명이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데 사실은 성-천, 성-산이 아니라 그냥 수도를 뜻하는 서울 자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한참 뒤인 2016년경강선이 개통되었을 때도 이름을 듣고 반발이 상당히 많았었다. 정작 경인선이나 경부선은 당시 서울의 이름이 한성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선명이 한인선이나 한부선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경인선과 경부선, 경의선은 경성부 출범 이전부터 개통되어 있었고, 경성부 외곽을 한 바퀴 도는 경원선은 경성부 출범 이듬해인 1911년에 개통되었다. 본래 경의선은 시점이 용산역이었기 때문에 경부선과도 용산역에서 연결되도록 만들어졌으나, 경성부민들의 편의를 위하여 1919년신촌역을 경유하여 서울역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선로가 지어졌고, 기존선은 용산선이 되었다.

본래는 서대문역(폐역)이 경성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경성의 중앙역 노릇을 했으나 경의선이 연장되면서 경성의 중앙역 역할을 남대문역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1923년에 남대문역이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1925년에는 본래의 역 건물을 헐고 지금의 서울역 구 역사에서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즈음의 경성역은 한반도의 중간 기착지로서, 선양시, 창춘시로 향하는 국제열차가 운행했다.

1939년에는 경춘선중앙선이 개통되며 청량리역이 동부 경성의 관문이 되었고, 동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며 중요도가 늘었다. 이 시기에 전국의 철도망이 경성으로 연결되며 상경하는 사람도 확연히 늘어나게 되었고, 경성의 거대화를 더욱 가속화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며 일제는 만성 물자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1944년에는 아예 철길과 역 건물까지 뜯어가게 되면서 역들이 무더기로 폐역을 당하게 된다. 이때 폐역을 당한 곳들은 광복 후인 1974년부터 지하철 시대가 시작되며 어느 정도 부활했지만, 끝내 부활하지 못 한 역들도 있다.

기존 간선철도망을 이용하여 운행하던 경성순환노선이라는 것도 있었다. 경의선용산선을 따라 서울역 - 용산역 - 신촌역을 거쳐 경성 서부를 한 바퀴 도는 노선이었는데, 이것도 1944년 물자공출로 인해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1930년대에는 최초의 서울 지하철 계획이 나오기도 했는데, 지금의 서울 지하철 1호선과 선형이 유사했다.# 크게 종로를 지하로 통과하는 안과, 아예 청계천 물을 막고 복개하여 그 밑에 지하철이 다니게 하는 기상천외한 안도 존재했으나, 이 또한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계획으로 남았다가 30년이 흐른 1960년대에나 가서 다시 논의되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1974년 개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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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성부 전차 노선도
시내 궤도교통으로는 경성전차경성궤도가 있었다. 경성전차는 해방 후에도 서울전차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왕성하게 운행하다가 1968년에 '불도저 시장' 김현옥 서울시장이 폐선을 단행해 역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당시의 노선들은 대부분 서울 지하철을 건설할 때 부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대문에서 왕십리를 거쳐 광장동으로 향하던 경성궤도는 끝내 사라져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6.2.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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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성부의 심장이었던 태평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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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황금정(현 을지로)의 모습
현재는 세종대로에 통합된 태평로는 종로구와 중구를 이어주는 곳으로서 각종 근대적 건물들과 관청이 몰려있는 경성부의 심장이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부터 시작해 경기도청사, 경성부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 경성부청사 등 행정 건물 뿐 아니라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성일보 등 각종 언론사의 본사와 덕수궁 등 궁전들, 우체국, 이왕가 미술관, 조선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메리츠손해보험 전신) 사옥 등 각종 전근대적인 궁전부터 시작해 근대적인 건물들까지 말그대로 경성의 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초반만 하더라도 화물의 운송을 대부분 철도로 했고, 자동차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도로교통은 미비하기 그지없었다. 한강철교1900년에 개통된 데에 반해 한강인도교는 그보다 17년이나 늦은 1917년에나 개통되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고종 대에 대한제국은 한성에 서구 열강처럼 대각선 도로망을 갖출 예정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자동차가 늘어나게 되면서 경성부의 도로도 개수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1930년대에 이르면 대대적으로 토목사업을 벌이며 도로를 닦았다. 삼일대로한남대로, 이태원로 등이 다 이때 생긴 도로였다. 1940년대에도 도로 건설은 부지런히 이루어지다가, 이 또한 물자공출로 인해 공사가 무기한 중단되었고, 6.25 전쟁 직후에나 겨우 완성을 본 경우가 많다.

철도와 마찬가지로 전국에서 경성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개·보수할 필요성도 높아지면서 1930년대를 전후하여 현재의 경인로가 되는 경인산업도로가 개수되고, 경수가도, 경춘가도 등이 개수되거나 신설되었다.

7. 사법

7.1. 법원 / 재판소

파일:재판소(1928).jpg
1928년 완공된 경성고등법원/복심법원/지방법원 건물(현 서울시립미술관 터)
대한제국의 사법 체제인 구재판소/지방재판소/공소원/대심원 체제를 일제가 1912년에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을 통해 구재판소를 지방법원지청으로, 지방재판소를 지방법원으로, 공소원을 복심법원으로 개칭해 그대로 이어 경성부에는 지방법원, 경성복심법원, 경성고등법원 3개 법원이 들어섰다. 고등법원 자리는 을사조약 이후인 1908년에 완공된 현재 공평동 100번지 종로1가 sc제일은행 본점 근처였고, 이전인 1907년에 개정된 법을 따라 구재판소와 지방재판소, 공소원도 같은 건물에 들어섰다. 참고로 이 건물이 이후 그 유명한 종로경찰서 청사로 사용되었다.

무려 네개 법원이 한 건물에 몰려있으니 공간부족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고, 이에 고등법원을 현 중구 정동인 구 대한제국 탁지부 청사로 이전했다. 한편 1912년에 법제 개편으로 지방법원지청(구 구재판소)이 경성에서 사라지며 공평동에 위치한 법원 공간이 확보되었다.

이후 1928년에 남은 세 법원이 다시 서소문동 37번지 현 서울시립미술관 건물로 이전했다. 해방 이후 1995년까지 이 청사를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었다.

7.2. 헌병대

  • 경성헌변대
    • 경성제1헌병분대
    • 경성제2헌병분대
      • 용산헌병분대

7.3. 일본 제국 경찰 경찰서

경기도경찰부(현 경기남부경찰청, 경기북부경찰청) 소속

8. 경제

8.1. 상권

파일:미쓰코시 경성.jpg
1930년 개장한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
한성부 시절부터 전통적인 중심 상권은 육의전이 있던 종로였으나, 남촌에 일본인들이 점차 늘어나며 명치정(明治町, 지금의 명동)과 본정(本町, 지금의 충무로) 등이 크게 성장하였다.

파일:제2기 경성부 휘장_White.png 경성부의 5대 백화점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점
히라타
백화점
조지아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
화신
백화점
신신
백화점

1930년 10월 24일, 조선 최초 백화점인 미츠코시(三越)백화점이 본정에서 개업하였고, 뒤이어 원래부터 경성에 있었던 히라타(平田), 미나카이(三中井), 조지야(丁子屋)가 백화점이 되었다. 미츠코시백화점은 훗날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되었고, 히라다 백화점은 1947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1969년 그 자리에 대연각호텔이 세워졌으나 화재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고 현재는 고려대연각타워로 바뀌었다.

미나카이백화점은 훗날 명동 밀리오레로, 조지야백화점은 미도파백화점이 되었다가, 1997년 외환 위기로 도산하고 롯데백화점에 인수되어 현재는 롯데백화점 영플라자가 되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때 명치정을 중심으로 세워진 일본인 자본의 백화점들은 해방 이후에 적산으로 몰수되었다가 대부분 활용 중인데, 히라다만 제외하면 여전히 모두 백화점 건물로 쓰이고 있다.

종로에는 순수 조선인의 자본으로 세워진 화신백화점이 있었는데, 오랜시간 종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 왔다. 적산으로 몰수된 나머지 백화점들과는 다르게 소유주가 조선인이라 미군정 이후에도 살아남았으나 1970년대부터 몰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1978년 종로 확장 계획과 맞물려 건물이 철거되었다. 그러나 화신백화점이 사라진 이후에도 보신각 앞은 한동안 화신앞이라는 지명으로 불려지다 서서히 잊혀진다. 현재는 그 자리에 종로타워가 세워졌고, 특이한 외양과 높이 때문에 옛 화신백화점처럼 종로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9. 생활·문화

9.1. 주거 환경

파일:북촌.jpg
일제강점기 조선인 거주지였던 북촌(현 종로구)의 한옥 거주지
파일:남촌.jpg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주지였던 남촌(현 중구)의 일본식 거주지
구한말부터 남촌 일대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일본식 주택과 문화주택(文化住宅)이라 불리던 서양식 주택이 경성에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이에 한옥은 감소하던 추세였다. 이에 경성에 살던 정세권이라는 사업가는 북촌서촌 일대에 남아 있던 99칸 저택들과 조선왕조의 별궁이었던 누동궁 등을 매입하여 서민들을 위한 소형 한옥으로 개조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집'이라는 건축 양식이다.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이나 익선동 한옥마을이 당시 조선집 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1930년대에 들어 전국의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시가지를 재개발하고 근교에 새로운 택지지구를 마련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발표한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온 좁고 난잡한 도시의 구획을 정리함과 동시에 제반시설을 위한 용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경성에서는 시범적으로 무교동, 장사동 등의 지역이 재개발에 착수하였고, 새로 돈암지구, 영등포지구, 대현지구, 한남지구 등이 조성되었다. 이 구역들은 재개발과 재건축을 거듭하며 현재로서는 당시 모습이 모두 사라졌으나, 도로망 자체는 당시에 지어진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현대 서울의 틀을 다진 사업이라 하겠다.

이후 용두, 사근, 번대방, 청량리, 신당, 공덕의 6개 지구가 추가로 지정되어 삽을 떴으나 본격적인 공사는 시작도 못 하고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잠정 중단되었으며, 이 사업들은 모두 대한민국 정부서울특별시청이 떠안았다. 해방 이후에도 6.25 전쟁 등의 일을 겪으며 사업을 마무리 짓지 못 하다가, 서울 환도 이후 제1공화국 때 서울을 복구하기 위하여 삽을 떴고, 이 사업들은 삽을 뜬지 거의 30년 만인 1960년대에 가서 그 끝을 보게 되었다.

이런가 하면 도시 빈민 문제도 심각했다. 총독부가 용산의 일본인 부촌이나 병참기지화 발표 이후 영등포 일대에 공장 인프라를 구축한 것과 반대로 동대문 지역의 조선인 주거지는 외면 받기 일수 였다. 독립 이전까지 경성내 조선인 중 상하수도를 이용할수 있는 인구는 전체의 30%도 안되었고 대다수는 재래식 빨래터나 우물을 이용하였다. 특히 토막민이라고 해서 도시에서나 밀려나 흙으로 만든 움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히 신석기 시대 수준의 생활이었던 것이다. 이런 토막촌은 당시 고시정(현 후암동)과 도화정, 신당리, 북아현리 등에 형성되어 있었고, 1940년 말 경성부 사회과 자료에 의하면, 공식적인 토막민의 숫자는 1만 6,344명, 비공식적으로는 3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토막민이 계속 증가해서 경성부는 교외지역인 홍제정·돈암정·아현정 등에 토막 수용지를 설정해 부내에 산재하는 토막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이후 달동네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9.2. 교육

9.2.1. 고등교육기관

1927년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어 일본 제국대학 체계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는 조선 내 유일한 대학교였다. 다른 학교들도 대학교로의 승격을 희망했지만, 총독부에서는 번번히 퇴짜를 놓아 전문학교(專門學校)로 남았다가 해방 이후에나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해방 이후에 경성대학으로 개칭된 뒤에 서울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전문학교가 있었는데,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공),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법전), 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고상), 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광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는 모두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의 각 학부로 통합되었고, 이외에도 현재의 인서울 대학교의 모태가 되는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이화여자전문학교(現 이화여자대학교),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명륜전문학교(現 성균관대학교), 동아공과학원(現한양대학교),혜화전문학교(現 동국대학교), 숙명여자전문학교(現 숙명여자대학교)가 있었다.

9.2.2. 중등교육기관

구한말부터 신식 교육이 도입되며 한성에는 우후죽순 학교들이 생겨났고,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때 설립되었던 학교들은 대부분 현재까지 남아 오래된 역사를 가진 명문이 되어 한 번 쯤 이름은 들어 봤다 싶은 학교들이 되었다.

당시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와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가 가장 명문으로 손꼽혔는데, 지금의 경기고등학교경복고등학교이다. 당시 경성부가 경기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고등보통학교구제중학교로 변환할 때 경성제일고보를 경기중학교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 학교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수재들만 가던 학교였으나, 1980년대에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가 실시되며 위상이 그만큼은 못 하게 되었다. 현재도 경복고는 그 자리에 있고, 경기고는 도심공동화로 인하여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였다. 옛 경기고 교사(校舍)는 서울특별시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이외에도 옛날 서울의 명문 공립고라고 하면 서울고, 경동고, 용산고 등을 꼽았는데, 서울고등학교는 일본인 전용 학교인 경성중학교로 존재하였다가 해방 이후에야 일반 학교로 전환되었다.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이고보의 여자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경성여고보)였다. 현재의 경기여고이다. 그 외에 경성제2고등여학교(경성제2고녀)가 수도여고로, 경성제3고등여학교(경성제3고녀)가 창덕여고로 바뀌었다.

사립으로는 배재고보, 이화여고보, 양정고보, 휘문고보, 보성고보, 중앙고보, 숙명여고보, 중동고보 등이 있었다.

9.3. 문화

경성은 인천, 부산 평양 같이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되던 곳이었고, 상류층을 중심으로 외국 문물이 가장 빨리 유행하던 곳이었다. 이 영향으로 의복도 한복에서 양장으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모던걸과 모던보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경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우리나라 최초 실내극장이자 관립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1903년 정동 야주현(夜珠峴), 지금 새문안교회 자리에 세워졌고, 1910년에 영화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했다. 이어 1912년 종로에 우미관, 1915년을 전후하여 황금관, 대정관, 유락관 등이 문을 열었다. 중앙극장, 동양극장, 단성사 등도 유명했다.

9.4. 언어

한성부 시기부터 써온 서울 방언은 경성부에서도 계속해서 썼다. 이 시기의 경성은 일본을 거쳐 들어오는 여러 신문물을 통해 일본어나 혹은 일본어식으로 발음하는 외래어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노년층이나 중장년층이 구사하는 말 중에서는 이러한 어휘들이 일부 남아있다.

외래 어휘와는 별개로 이 지역의 방언을 토대로 하여 해방 이후에는 현대 표준어를 제정하였고 평양을 수도로 삼은 북한서북 방언이 아닌 서울 방언을 기준으로 문화어를 제정했다.

옛 경성부 지역인 지금 종로구중구 일대에서 오래 산 서울 토박이들은 더러 구한말 때부터 쓰던 서울 사투리를 지금도 구사하는 편이며, 1963년 이후 서울로 편입한 지역에서 살던 주민들 같은 경우는 서울 방언보다 경기 방언을 사용하지만 표준어표준화한 현대 수도권 방언을 섞어 말한다.

10.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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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4월 1일에 행정구역을 개편(동·리를 통폐합)하면서 기존 5부(部)와 방(坊), 계(契)가 폐지되었고, 현재 중구 지역과 용산구, 서대문구 일부 지역의 동(洞)을 합쳐 (町)으로 바꿨다. 그러나 조선인이 많던 지금 종로구 일대는 기존 동을 짜깁어 신설 하였을 뿐 동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36년 경성부를 확장하면서 기존의 동을 모두 정으로 바꾸었고, 1943년부터 구제를 시행하여 총 7개 구가 되었고, 이듬해에 마포구서대문구에서 분리 설치되며 최종 8구가 되었다.

1946년 10월 1일에 일제식 지명을 폐지하고 한국식 동명으로 바꿀 때 정은 모두 동이 되었고, 정목(丁目)은 모두 가(街)로 바뀌었다. 동명이 '~동n가', '~로n가'로 되어 있으면 일제 때 지명이 바뀐 곳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몇몇은 아니다. 전주시 외곽 지역 같이 동명을 통일한 경우도 있고 (전주시가 따라한 것이지만) 서울이 확장될 때 편입된 지역이나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가로 분리된 동이 있기 때문이다. 중구 장충동1가, 장충동2가는 개정 전까지 각각 동사헌정, 서사헌정이었다. 성동구 금호동1가~4가1964년 2월 15일에 금호동에서 나뉘어졌다. 성동구 성수동1가, 성수동2가1949년에 재편입된 곳으로, 1950년 3월 15일까지 서뚝도리(성수동1가), 동뚝도리(성수동2가)였다. 성북구 안암동1가~5가1946년1949년 사이에 안암동에서 나뉘어졌다. 성북구 삼선동1가~5가, 동선동1가~5가, 동소문동1가~7가1963년 1월 1일돈암동에서, 성북동1가1963년 1월 1일성북동에서 나뉘어졌다.
영등포구 영등포동 및 영등포동1가~8가, 문래동1가~5가, 양평동1가~6가 및 양평동, 당산동1가~5가는 각각 영등포동, 문래동, 양평동, 당산동에서 나뉘어졌다.

10.1. 이 시기의 지명

종로구 지역은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현재 지명과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일대는 일본인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일본식 지명이 붙었다. 지명은 일본어 낱말이나 일본 연호 또는 일본 전통 지명, 인명 등에서 따왔다.

지명을 바꾸면서 아예 행정구역을 전체적으로 새로 짰다. 이 시기에 새로 만들어진 정(町)이 광복 이후에 그대로 (洞)으로 바뀌었고, 관할구역도 약간 달라졌다. 1946년에 일본식 동명을 한국식 지명으로 바꾸면서 전부 사라졌다.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 표기했다.
당시 지명 현재 지명
한국어 일본어
경정(京町) [ruby(京町, ruby=キョウチョウ)]
(교초)
용산구 문배동
관동정(館洞町) [ruby(館洞町, ruby=カンドウチョウ)]
(간도초)
서대문구 영천동
광화문통 [ruby(光化門通, ruby=コウカモンドオリ)]
(고카몬도리)
종로구 세종로
남미창정 [ruby(南米倉町, ruby=ミナミコメクラチョウ)]
(미나미코메쿠라초)
중구 남창동
다옥정 [ruby(茶屋町, ruby=チャヤチョウ)]
(자야초)
중구 다동
대화정1정목 [ruby(大和町一丁目, ruby=ヤマトイッチョウメ)]
(야마토초잇초메)
중구 필동1가
대화정2정목 [ruby(大和町二丁目, ruby=ヤマトチョウニチョウメ)]
(야마토초니초메)
중구 필동2가
대화정3정목 [ruby(大和町三丁目, ruby=ヤマトチョウサンチョウメ)]
(야마토초산초메)
중구 필동3가
동사헌정 [ruby(東四軒町, ruby=ヒガシシケンチョウ)]
(히가시시켄초)
중구 장충동1가
명치정1정목 [ruby(明治町一丁目, ruby=メイジチョウイッチョウメ)]
(메이지초잇초메)
중구 명동1가
명치정2정목 [ruby(明治町二丁目, ruby=メイジチョウニチョウメ)]
(메이지초니초메)
중구 명동2가
미생정 [ruby(彌生町, ruby=ヤヨイチョウ)]
(야요이초)
용산구 도원동
병목정 [ruby(竝木町, ruby=ナミキチョウ)]
(나미키초)
중구 쌍림동
본정1정목 [ruby(本町一丁目, ruby=ホンマチイッチョウメ)]
(혼마치잇초메)
중구 충무로1가
본정2정목 [ruby(本町二丁目, ruby=ホンマチニチョウメ)]
(혼마치니초메)
중구 충무로2가
본정3정목 [ruby(本町三丁目, ruby=ホンマチサンチョウメ)]
(혼마치산초메)
중구 충무로3가
본정4정목 [ruby(本町四丁目, ruby=ホンマチヨンチョウメ)]
(혼마치욘초메)
중구 충무로4가
본정5정목 [ruby(本町五丁目, ruby=ホンマチゴチョウメ)]
(혼마치고초메)
중구 충무로5가
북미창정 [ruby(北米倉町, ruby=キタコメクラチョウ)]
(기타코메쿠라초)
중구 북창동
산수정 [ruby(山手町, ruby=ヤマテチョウ)]
(야마테초)
용산구 산천동
삼판통 [ruby(三坂通, ruby=ミサカトオリ)]
(미사카도리)
용산구 후암동
서사헌정 [ruby(西四軒町, ruby=ニシシケンチョウ)]
(니시시켄초)
중구 장충동2가
암근정 [ruby(岩根町, ruby=イワネチョウ)]
(이와네초)
용산구 청암동
앵정정1정목 [ruby(櫻井町一丁目, ruby=サクライチョウイッチョウメ)]
(사쿠라이초잇초메)
중구 인현동1가
앵정정2정목 [ruby(櫻井町二丁目, ruby= サクライチョウニチョウメ)]
(사쿠라이초니초메)
중구 인현동2가
약초정 [ruby(若草町, ruby=ワカクサチョウ)]
(와카쿠사초)
중구 초동
연병정 [ruby(鍊兵町, ruby=レンペイチョウ)]
(렌페이초)
용산구 남영동
영정 [ruby(榮町, ruby=サカヘチョウ)]
(사카에초)
용산구 신계동
영락정1정목 [ruby(永樂町一丁目, ruby=エイラクチョウイッチョウメ)]
(에이라쿠초잇초메)
중구 저동1가
영락정2정목 [ruby(永樂町二丁目, ruby=エイラクチョウニチョウメ)]
(에이라쿠초니초메)
중구 저동2가
왜성대정 [ruby(倭城臺町, ruby=ワジョウダイチョウ)]
(와죠다이초)
중구 예장동
욱정1정목 [ruby(旭町一丁目, ruby=アサヒチョウイッチョウメ)]
(아사히초잇초메)
중구 회현동1가
욱정2정목 [ruby(旭町二丁目, ruby=アサヒチョウニチョウメ)]
(아사히초니초메)
중구 회현동2가
욱정3정목 [ruby(旭町三丁目, ruby=アサヒチョウサンチョウメ)]
(아사히초산초메)
중구 회현동3가
원정1정목 [ruby(元町一丁目, ruby=モトマチイッチョウメ)]
(모토마치잇초메)
용산구 원효로1가
원정2정목 [ruby(元町二丁目, ruby=モトマチニチョウメ)]
(모토마치니초메)
용산구 원효로2가
원정3정목 [ruby(元町三丁目, ruby=モトマチサンチョウメ)]
(모토마치산초메)
용산구 원효로3가
원정4정목 [ruby(元町四丁目, ruby=モトマチヨンチョウメ)]
(모토마치욘초메)
용산구 원효로4가
일지출정 [ruby(一之出町, ruby=ヒノデチョウ)]
(히노데초)
중구 남학동
임정 [ruby(林町, ruby=ハヤシチョウ)]
(하야시초)
중구 산림동
장곡천정 [ruby(長谷川町, ruby=ハセガワチョウ)]
(하세가와초)
중구 소공동
주정 [ruby(鑄町, ruby=チュウチョウ)]
(주초)
중구 주자동
죽첨정1정목 [ruby(竹添町一丁目, ruby=タケゾヘチョウイッチョウメ)]
(다케조에초잇초메)
중구 충정로1가
죽첨정2정목 [ruby(竹添町二丁目, ruby=タケゾヘチョウニチョウメ)]
(다케조에초니초메)
서대문구 충정로2가
죽첨정3정목 [ruby(竹添町三丁目, ruby=タケゾヘチョウサンチョウメ)]
(다케조에초산초메)
서대문구 충정로3가
청수정 [ruby(淸水町, ruby=シミズチョウ)]
(시미즈초)
용산구 신창동
초음정 [ruby(初音町, ruby=ハツネチョウ)]
(하츠네초)
중구 오장동
화천정 [ruby(和泉町, ruby=イズミチョウ)]
(이즈미초)
중구 순화동
황금정1정목 [ruby(黃金町一丁目, ruby=コガネチョウイッチョウメ)]
(고가네초잇초메)
중구 을지로1가
황금정2정목 [ruby(黃金町二丁目, ruby=コガネチョウニチョウメ)]
(고가네초니초메)
중구 을지로2가
황금정3정목 [ruby(黃金町三丁目, ruby=コガネチョウサンチョウメ)]
(고가네초산초메)
중구 을지로3가
황금정4정목 [ruby(黃金町四丁目, ruby=コガネチョウヨンチョウメ)]
(고가네초욘초메)
중구 을지로4가
황금정5정목 [ruby(黃金町五丁目, ruby=コガネチョウゴチョウメ)]
(고가네초고초메)
중구 을지로5가
황금정6정목 [ruby(黃金町六丁目, ruby=コガネチョウロクチョウメ)]
(고가네초로쿠초메)
중구 을지로6가
황금정7정목 [ruby(黃金町七丁目, ruby=コガネチョウナナチョウメ)]
(고가네초나나초메)
중구 을지로7가

11. 경성부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

일제강점기 문화를 통틀어 경성시대(京城時代)라고도 부르며 아직 경성부가 되기 전인 구한말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모던걸모던보이로 대표되는 당대의 풍조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당시 경성도 부유층이나 양장을 입었지 서민들은 한복 차림이 대부분이었으며, 기껏해야 갓 대신 중절모를 쓰고 짚신대신 구두를 신는 정도였다. 물론 중상류층도 경우에 따라 양복 위에 코트 대신 두루마기를 걸치기도 했다.

꼭 경성부가 배경이 아니더라도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여기에 분류되기도 하나, 이 단락에서는 1910년에서 1945년까지의 경성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만 기재하였다. 그 시대를 다루는 창작물이 십중팔구는 경성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긴 하다.

12. 출신 인물

1910년에서 1945년 사이 경성부에서 출생한 인물만을 기재하며, 당시 경성부에 속하지 않았던 지역 출생자는 목록에서 제외합니다.

1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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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 이후 현재까지 폐지된 대한민국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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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1=본 틀에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 12일) 이후 폐지된 행정구역만 등재한다.,
토론주소2=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2=대한제국 선포부터 광복(1945년 8월 15일) 전까지 폐지된 행정구역 가운데 현재 휴전선 이남에 위치했던 행정구역만 등재한다.,
토론주소3=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3=휴전선 이북에 위치한 행정구역을 원칙적으로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주소4=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4=단 광복 이후 6.25 전쟁 전까지 38선 이남에 위치했으나 휴전 후 북한 치하에 들어간 경우와 일부 영역을 수복했으나 인접 시군에 편입시켜 휴전선 이남에 실효지배하는 영역이 없어진 경우에 한해 등재한다.,
토론주소5=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5=명칭 변경 사례를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주소6=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6=폐지된 행정구역의 소속 도(道)는 폐지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단 제주도에 소재했던 행정구역에 한해 제주특별자치도 소속으로 표기한다.,
토론주소7=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7=폐지된 행정구역이 행정구역 명칭과 단위가 같은 행정구역으로 다시 설치된 경우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주소8=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8=단 1995년 대규모 도농통합 뒤에 폐지된 동명의 행정구역은 등재할 수 있다.,
토론주소9=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9=폐지된 동·읍·면은 원칙적으로 등재할 수 없다. 단 1995년 대규모 도농통합 뒤에 동으로 승격되어 폐지된 읍·면은 등재할 수 있다.,
토론주소10=YouthfulTangibleDryClam, 합의사항10=1995년 이전에 폐지된 읍·면이라도 2개 이상의 행정구역에 분할 편입되어 폐지된 경우는 등재할 수 있다.,
토론주소11=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11=1995년 후 동으로 승격되어 폐지된 읍·면이라도 군 전체가 시로 승격하면서 관할 읍·면이 동으로 승격되어 폐지된 경우는 등재할 수 없다.,
토론주소12=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12=1995년 이후에 군이 폐지되고 해당 지역에 동명의 새로운 시를 설치한 경우 이전의 군을 틀에 등재하지 않는다.(따라서 틀에서 경기도 광주군을 제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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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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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부 부산부 마산부 진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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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예성 → 부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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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1] 해방 이후에도 서울특별시청으로 쓰이다 서울도서관이 되었으며, 그 뒤에 서울특별시청 신청사가 들어섰다.[A] 1944년 5월 1일 기준 간이국세조사 추계 인구[3]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을 따라 한성부를 경기도에 편입 및 개칭[4] 경기도 서울시로 개칭.[5] 미국 프로그램인 '세계의 목소리(The Voice of the World)'의 '시암(태국)에서 한국으로'편에서 한국 부분만 잘라낸 영상이다. 1910년에서 불과 22년밖에 흐르지 않았음에도 조선신궁이나 일본어 간판, 기모노 등 많은 일본의 문화요소들이 경성 사람들의 생활 속에 침투해 있음을 볼 수 있다.[6] 1911년 즈음에 발행된 '경성부전도'에 따르면 두모면 지역 중에 구한말에 성저십리로 신규 편입된 지역(광진구 서부 지역)은 양주군 고양주면과 통합하여 뚝도면으로 개편되었고, 문제의 은평면 일부가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관되고, 난지도가 경성부 행정구역에 슬그머니 포함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우이동, 장위동, 수색동(지금의 은평차량기지 자리)쪽에 미세한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7] 이후 1975년에 창신동숭인동종로구로 편입될 당시 성북동도 다시 종로구로 편입하려 하였으나, 성북구 이름이 유래한 곳이기 때문에 종로구 환원이 무산되고 성북구에 잔류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8] 이러한 과감한 시역 확장 떡밥은 해방 이후인 1970년에도 거론된다.[9] 이는 2차 대전기 비시 프랑스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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