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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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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가족,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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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7월 10일 ~ 1944년 8월 20일
프랑스 침공 이전 멸망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군정청
프랑스 임시정부
국가 라 마르세예즈(공식)
원수여 우린 여기에 있습니다[3](사실상)
위치 프랑스 본토 남부 및 해외 식민지
수도 법적 수도 파리
임시 수도 비시
정치체제 독재적 대통령제, 임시정부, 괴뢰국[4]
국가원수 필리프 페탱[5]
정부수반 피에르 라발[6]
언어 프랑스어
민족 프랑스인
주요사건 1940년 건국
1942년 횃불 작전
1942년 독일로의 병합
1944년 멸망
통화 프랑

1. 개요2. 역사
2.1. 망명정부 수립과 멸망2.2. 소멸 이후
3. '국민혁명'과 정치, 사회적 구조4. 비시 프랑스의 지위5. 비시 프랑스에 대한 기억
5.1. 공통된 기억의 시대 (1945년-1970년)
5.1.1. 레지스탕시알리즘5.1.2. '정화'5.1.3. 공식적인 기억의 파급
5.2. 레지스탕시알리즘의 문제화
5.2.1. 로버트 팩스턴의 역사관5.2.2. 대중매체의 역할5.2.3. 유대인들의 기억과 홀로코스트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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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어별 명칭
프랑스어 État français / Régime de Vichy
독일어 Französischer Staat / Vichy-Regime
영어 French State / Vichy France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40~1944년 중 독일과 평화 협정 후 남프랑스에 존속한 나치 독일의 협력국. 기존의 프랑스 공화국에서 프랑스국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표어도 자유, 평등, 우애에서 노동, 가족, 조국으로 바뀌었다. 해외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와 구분하기 위해 비시 프랑스라 부른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비시 정권(Régime de Vichy)이라 통용.

흔히 나치 독일괴뢰국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비시 프랑스는 동시대의 만주국과는 달리 상당 부분 독립성을 갖춘 정부였다. 가령 프랑스의 기술자나 유대인, 정치범, 강제동원노동자를 나치 독일이 필요로 할 때에도 비시 프랑스의 지도층에게 먼저 공문을 보냈지 유대인이나 식민지인마냥 물건처럼 끌고 가거나 하지 않았다.

이름의 '비시'는 임시 수도를 오베르뉴에 소재한 온천 휴양지 비시(Vichy)라는 도시에 두고 있어서 그렇다.[7] 법적 수도는 여전히 파리였다. 국가 수반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던 필리프 페탱이었다.

비시 프랑스의 깃발로 알려진 쌍날도끼[8]가 그려진 깃발은 국가원수기이고, 공식적으로 비시 프랑스는 이전에 쓰이던 삼색기를 그대로 승계했다. 참고로 저 쌍날도끼의 자루 부분은 프랑스군의 원수 지휘봉이다.

2. 역사

프랑스 제3공화국은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전황이 쉽게 풀리지 않고 급기야 겨울전쟁으로 핀란드마저 무너지자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이 붕괴되고 폴 레노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프랑스 침공의 시작으로 프랑스는 참혹하게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했고 레노 내각은 마드리드에 파견되어 있던 84세의 노인 필리프 페탱을 부총리에 임명함으로 국가적 단결을 도모했다. 하지만 전황은 계속 악화되어 6월 10일, 프랑스는 보르도로 천도하고 1940년 6월 13일에 수도 파리마저 함락되었다. 통제력을 상실한 레노는 6월 16일 하야했고 이미 6월, 의회 결의를 통해 전권을 위임받은 페탱이 프랑스의 수반에 등극하게 된다. 페탱은 6월 17일, 정전을 호소했고 독일과의 협상 끝에 매우 가혹한 조건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3/5에 해당하는 북프랑스가 통째로 나치 통치에 넘어가고 나머지 2/5의 남프랑스가 자치권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프랑스에 세워진 친독정권인 비시 프랑스이다.

이후 페탱은 7월 1일, 비시에서 신정부를 수립한 후 7월 10일 개헌에 들어간다. 이 개헌안은 비상대권이라는 명목으로 국가원수에게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안이었다. 그럼에도 상하원은 각각 상원에서 반대 1표. 하원에서 반대 3표만이 나오며 압도적 찬성으로 개헌안을 발의했다.[9] 개헌에 앞서 페탱 정부는 공산당을 불법화하여 공산당 의원들의 입장을 불허하고 국회의원을 소집하여 개헌안을 붙였는데 전시로 인해 많은 의원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된 가운데 재적인원 907명 중 649표의 찬성표로 개헌은 가결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종식을 고하고 7월 11일, 신헌법을 반포, 프랑스 공화국의 명칭을 폐기하고 프랑스국으로 개칭한 후 프랑스국 국가원수에 취임했다. 표면적으로 이 신정권은 노동, 가족, 조국을 기치로 내세우며 은행가와 대지주 등 부르주아 계층의 지지를 얻고 독일과의 공조 하에 나름대로 대전기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등, 패전국치고 그리 나쁘지 않은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주권이 독일에 종속되어 제 입김을 내지 못하고 내적으로도 의회 기능이 멈추는 등, 국가로서 불완전했다.

국가 수반인 페탱은 본래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망 높은 영웅이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를 구원한 구국의 영웅이었고, 뛰어난 활약상에 힘입어 원수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34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격렬한 항전주의자였던 부하 샤를 드골 등에 반해, 페탱은 나치 독일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주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총리였던 폴 레노(Paul Reynaud)가 페탱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사임하면서 1940년 7월 10일 페탱이 입법과 행정 전권을 쥐고 통치하는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개전 다음날 입대한 페탱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제2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란 틀로 이해했다. 당시 프로이센 왕국군에게 참패하면서 나폴레옹 3세와 20만의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히자, 새로이 수립된 임시정부는 항복을 선언했고, 결사항전을 주장한 파리 코뮌을 독일군과 함께 공격하여 진압했다. 이후 50억 프랑의 엄청난 배상금을 조건으로 강화협정을 체결하고 프랑스의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이끄는 비시 프랑스는 전후 재건을 위한 발판이고 샤를 드골자유 프랑스는 현실을 무시한 몽상가들로 본 듯하다. 이탈리아 왕국까지 참전하면서 영국이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영국이 그대로 함락되고 독일이 전 유럽을 장악한다는 쪽에 베팅한 것이다.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페탱에게, 비시 정권은 평소에 페탱이 바라던 프랑스의 상을 실현할 기회였다. 독일군이 휴전협정을 폐기하기 이전의 비시 내각진을 보면 태반이 테크노크라트, 즉 관료들과 교수들로 전쟁 이전부터 활동하던 파시스트는 보이지도 않으며 기껏해야 왕당파 정도나 듬성 듬성 보인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 대해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부정적인 입장이 팽배한 터여서, 패전을 기회로 프랑스를 개혁하자는 여론이 매우 강했다. 여기에 패전 책임을 공화정에 떠넘기려는 프랑스 군부의 의도는 덤. 페탱에게 프랑스 민주 정치의 몰락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결국 페탱 정권은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정권이 되었다. 페탱의 노력으로 비시 프랑스 지역 거주민들이 독일군에게 살육당하거나 전쟁 수행에 징발당하는 사태는 일단 모면할 수 있었지만 물자를 빼앗겼다. 독일군 점령 이후인 1943년에는 독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일할 노동자들을 선발해서 독일로 보내는 강제 노동 제도(STO)가 시행되었다. 그나마 독일은 200만의 노동자를 요구했는데, 협상을 통해 프랑스 전쟁포로 11만명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60만의 노동자를 보내는데 그치긴 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숫자가 징용된게 사실이라 이 때문에 비시 정부의 인기는 더 떨어지고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도 있었는데 다른 나치 점령지들보다 비교적 덜하기는 했다. 비시 프랑스는 유대인의 사회참여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페탱은 이것은 독일이 명령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비시 정부의 자발적인 법령이라고 증언했다. 다만 유태인들이 해외로 탈출하는 것 자체는 막지 않았고 유대인의 가슴에 부착하는 노란 별은 금지했다. 영문 위키피디아 비시 프랑스 부분을 참조하여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이미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프랑스 '국내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보호를 하려 했으나,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이후로 프랑스로 망명을 신청한 '외국 유대인' 등에 대해서는 별로 보호할 의지가 없었다. 결국 75,000명 정도의 유대인은 잡혀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 중 대부분이 살해당했다. 어쨌든 타 독일 점령지들 중에서는 그나마 상식적인 정부가 남아있는 셈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도 학살보다는 공직추방 등이 주가 되었고, 주민들도 대부분 유대인들을 게슈타포와 독일군으로부터 숨겨주는 데 협조했다.[10] 결과적으로 75%의 유대인이 살아남아서 유럽 내 독일 점령지에서 가장 적은 유대인 희생자를 낸 지역 중 한 곳이다. 비교하자면 네덜란드 같은 경우 유대인의 75%가, 폴란드는 90%가 희생당했다.[11][12]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고 자유 프랑스는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본토를 통제하고 있었고, 프랑스 군대 대다수가 비시 프랑스 정부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지 관료 중에는 파시즘 사상에 호의적인 인물도 적지 않았고, 다당제 폐지·노동 3권 부정·엄벌주의 등 비시 프랑스 정부의 강력하고 억압적인 사회 통제 정책에 호의적인 사람도 많았다.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이 현지 식민지 관료에게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13] 1940년 8월 차드 총독 펠릭스 에부에가 자유 프랑스 지지를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1942년까지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일부 식민지가 자유 프랑스 측으로 넘어왔을 뿐이다. 이런 상황은 1942년 연합군이 알제리를 탈환하고 알제가 자유 프랑스 수도가 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한편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프랑스인들은 나치 독일이 이끄는 반공 십자군에 참여하기 위해 민병대인 LVF(Légion des Volontaires Français)에 가담하기도 했고 비시 정부가 레지스탕스를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친독 반공 민병대(Milice)에 가담하기도 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전후에 숙청당한다. 특히 수장인 조제프 다르낭은 전후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아예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 프랑스인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인 기 사예르라는 사람이 '잊혀진 병사'라는 회고록을 남겼는데 어머니가 독일계이며, 알자스 로렌에 살던 사람이다. 그는 후일 포로로 잡혀 연합국에 조사받을 때 징집이 아니라 자원입대라고 하자 프랑스 조사관들이 배신자라며 광분하다가 독일계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듣고 대충 이해해주었다. 순수 프랑스인이었다면 전후 처리에서 크게 피를 봤을 듯하다.[14]

비시 프랑스 정부는 1942년 2월부터 1943년 5월까지 리옹(Lyon)에서 특별 재판을 벌였다. 이는 1940년 패배의 책임을 죄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 떠넘기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 것이다. 가믈랭을 제외하면 군인 신분으로 피고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15] 전 총리인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앙드레 레옹 블룸(André Léon Blum), 폴 레노, 전 내무장관 조르주 망델(Georges Mandel), 전 항공장관 기 라상브르(Guy La Chambre), 전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귀스타브 가믈랭(Maurice Gustave Gamelin) 등이 '피고'가 되었다. 한창 재판을 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재판은 중단되고 피고들은 독일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버렸는데 조르주 망델은 예외였다. 이 사람은 휴전협정 당시 프랑스령 모로코로 피신했다가 결국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어 재판에 넘겨졌는데 재판이 중지된 이후 레지스탕스가 친독 인사들을 연이어 암살하자 인질로서 총살당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이 유대인이었다.

연합국이 횃불 작전을 발령하여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프랑스군이 항복하자 빡친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2년 11월 독일군이 비시 프랑스 관할 지역을 점령하면서, 비시 프랑스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2.1. 망명정부 수립과 멸망

페탱과 정부 요인들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국의 진격을 피해 도망치다가 결국 비시 프랑스 정부를 해산한 뒤[16] 1944년 8월 독일의 지그마링엔(Sigmaringen)으로 압송되었다. 게슈타포는 지크마링엔 성에 살고 있던 구 호엔촐레른 공가를 다른 성으로 내쫓고 이 성에다가 페르낭 드브리농(Fernand de Brinon)을 수반으로 한 망명정부를 세우게 했다.

망명정부는 약 7개월간 존속했지만#, 사실상 기능정지가 되어 버린다.[17] 이 망명정부 영역의 인구는 6,000명이었으며, 병력 500명 외에 프랑스인 슈츠슈타펠 700명이었고 자체 라디오 방송과 신문까지 운영했다. 그리고 이 성채에 추축 3개국(나치 독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일본 제국) 대사관도 있었다.

페탱은 망명정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한 채 억류 내내 아돌프 히틀러에게 조국으로 보내줄 것을 청원했지만 묵살당했다. 1945년에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면서 비시 프랑스는 완전히 소멸했다.

2.2. 소멸 이후

당신이 실제로 적의 선전에 봉사하지 않고 또한 당신의 글이나 연설, 행동이나 제스처를 통하여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런 패배 뒤에 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고약한 점령기간 중에, 협력을 가장하여 우리나라를 타락시키고 우리 국민들을 굶기고 우리의 생각과 문화, 자유를 질식시키고, 우리의 동족을 고문하고 인질을 총살하고 우리의 천재들과 문명의 지독한 적에 대항하여,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당신은 우리 국민들이 준 신뢰에 기초한 프랑스의 지성으로서 당신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거나, 진실로 가슴속 깊이 우리가 지켜야 할 애국적 위엄에 부합하는 언동을 했다고 느끼는가?
1944년 해방 직후 프랑스의 '작가 및 극작가 협회'가 그 회원들에게 답변을 요구한 다음과 같은 질문서의 일부

전범 재판에서 페탱은 조국에 남아 어떻게든 국가와 민족을 보전하고 국민을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페탱은 국가 반역죄(제75조)와 '의회제도를 멸시하고 히틀러에 협조한 간첩죄(제87조)'로 기소되었으나, 육군 원수 정복을 입고 재판정에 서는 등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재판정에 입장하기 전까지 방청객들은 "반역자 페탱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으나, 재판장에 입장한 페탱이 그가 청중을 향해 경례를 하자 청중들이 모두 일어서서 답례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소식을 들은 드골은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어쩌다가..."라고 촌평. 영관급 시절 드골의 직속상관이 페탱이었고 페탱은 드골을 매우 아꼈으나, 결국 두사람은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판결은 끝내 사형으로 났다. 일설에는 14대 13이라는 간발의 차로 났다고 한다. 한편 페탱은 판결을 듣고 기절했다는 야사가 있으나, 실제로는 의자에 앉아서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무덤덤한 반응을 보여서 사람들은 그가 과연 판결을 알아듣긴 했는가 의심스러워했다고. 판결문 낭독이 끝난 후 경위들이 페탱을 잡고 퇴정시켰다.1차 대전에서 구국의 영웅이고 고령인 점 등을 감안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페이드라루아르 지방 방데 주 서쪽에 위치한 절해고도인 일드외 섬으로 유형에 처해졌다. 그곳에서 페탱은 1951년에 95세의 고령으로 생을 마감했다.

비시 프랑스가 무너지고 임시정부를 거쳐서 성립된 제4공화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시 정권에 대한 숙청을 시작했다. 우선 페탱을 비롯해 독일에 부역한 중죄가 있는 인사들이 가차없이 처단당했다. 비시 정부의 총리이자 2인자였던 피에르 라발, 내무장관이자 반공 민병대장 조제프 다르낭, 점령지 정무관 페르낭 드브리농이 총살당했다. 이때 피에르 라발은 조국의 총탄에 죽을 수 없다며 사형을 거부하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중태에 빠진 상태에서 총살장으로 끌려갔다.

프랑스의 권위있는 연감인 퀴드(Quid) 2003년판의 조사에 따르면 사형이 선고된 나치 협력자 6,763명,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나치 협력자가 782명, 징역형(강제노동형, 징역형, 금고형을 포함)을 선고받은 나치 협력자는 89,779명에 실제 징역형이 부과된 자는 38,000여 명에 이른다.

전후의 열악한 경제, 군사적 상황과 몇달마다 내각이 갈려나가는 정치적 혼란, 식민지 전쟁으로 힘들었던 제4공화국에게 비시 프랑스의 멍에는 그 어떤 명분보다 강력한 당위성이었다.

전쟁 중 자유 프랑스가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한 점을 들어 '나치의 압제에 용감히 저항한 프랑스 인민들과 레지스탕스' 이미지를 선전하는 프랑스를 까는 사람들도 있다. 당장 자유 프랑스와 레지스탕스가 수를 불리고 활발하게 군사 작전을 하기 시작한것도 독일이 패퇴해가고 '프랑스가 확실히 해방될 조짐'이 보이고 나서부터였지, 그 전까지 레지스탕스는 좌파 성향 공산주의[18]사회주의[19] 또한 친(親) 파시즘 성향 비시 프랑스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고 탄압받았기 때문에 같은 좌파 성향인 공산당[20]과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21]

사실 비시 프랑스 외에도 나치 치하의 프랑스인들은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보다는 역사에 기록된 것과 같이 점령군인 독일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 노력하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독일 군인들과 어울려 한자리에서 파티를 하는 프랑스인들의 사진이 공공연히 발견되는 판. 그것이 전후에는 자존심 강한 프랑스의 상당한 굴욕이자 불편한 진실이 되었기에 비시 프랑스 관련 인물들을 일종의 희생양 삼아 가혹할 정도로 처벌했다는 주장이다.[22] 이는 전쟁 중 똑같이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슈츠슈타펠만 희생양 삼아 군적 말소를 비롯해 큰 처벌을 내리고 독일 국방군은 '나치에 이용당한 정직한 군인들' 정도로 정상참작하다시피 했던 독일에 대한 비난과 비슷하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비시 정부의 하급 관료였고 심지어 페탱에게 훈장까지 받았다는 것이 그가 죽기 직전인 1994년 밝혀졌으나, 그 자신은 1943년부터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페탱의 무덤에 꽃을 두는 관례를 폐지하는 등 다른 면모를 보였다. 언론플레이에 노련한 미테랑은 "청년 시절 실수할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전력이며, 젊은 시절의 작은 일탈이 대통령 직무 수행에 차질을 빚을 만큼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의연한 태도를 취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의 지지자들도 이 점을 강조했다.

3. '국민혁명'과 정치, 사회적 구조

기존 공화정과의 단절을 위해 프랑스 혁명 이래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가 폐지되고 '노동, 가족, 조국'이라는 새 구호가 등장했으며[23], 프랑스를 민족과 권위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로서 재탄생시켜야 한다며 '민족혁명'[24]이라는 표어가 등장하였다. 혁명과 공화국을 상징하는 마리안도 각종 상징에서 사라졌다. 반영국 정서를 고양시키기 위해서인지 잔 다르크 숭배 열풍도 불었다는데 웬일인지 우리가 잘 아는 갑옷입고 칼 든 모습이 아니라 농가 처녀처럼 차려입은 모습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이는 점령자인 나치 독일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여자는 집에 있어야지'라는 고루한 사상의 짬뽕이었으며, 이는 전쟁 이전 우파 진영에게 광범위하게 공유되던 외국인 혐오 사상과 가부장제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군이 포함된 연합군이 루앙을 폭격하자 영국에게 화형당하는 잔 다르크가 그려진 포스터를 붙이며 잔 다르크를 죽인 그들이 또 온다면서 반영감정을 부추겼다. 영국으로 망명한 자유 프랑스 측도 프랑스 국기에 잔 다르크의 십자가를 넣어서 잔 다르크를 숭배했다. 자유 프랑스측은 잔 다르크가 영국에 맞선 건 영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했을 뿐이며 지금의 프랑스에 쳐들어온 적은 백년전쟁 때처럼 영국이 아니라 독일임을 강조했고 비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적에게 팔아넘긴 부르고뉴파와 똑같다고 주장했다.

페텡이 주장한 민족혁명이란 가톨릭과 민족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계급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며, 프랑스 혁명이 주장한 평등주의 이념을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계급이나 위계질서를 긍정하는 것을 넘어 아예 그것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말한다. 대신 이 계급은 기존의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처럼 경제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갈등적 요소를 품은 분열적 계급이 아닌 국가에 대해 얼마나 공헌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공동체 원리에 기초해 서로 협력하는 상보적 계급이자 위계질서였고, 이를 위해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공산주의, 사회주의로 인해 야기된 계급갈등과 사회적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기본으로 한 경제적, 사회적 재조직을 주장했다. 또 노동을 신성시하는 관점에서 자유방임주의로 대표되는 기성 자본주의를 강하게 비난하고, 국가에 의한 강한 통제와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계획경제, 통제경제를 시행함으로서 경제를 기업들의 탐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대로 시행했다. 결론적으로 페텡이 주장한 새로운 국가의 비전이란, 자연공동체[25]에 기초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페텡은 제3공화국의 의회주의와 민주주의가 프랑스를 나약하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프랑스 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공유되는 인식이었으며, 심지어는 자유 프랑스를 이끄는 드골마저도 어느정도 동의한 인식이었다.

이렇듯 비시 정부는 공화국과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를 근거로 삼아 정부를 구성했음에도, 정작 반포된 신헌법에는 여전히 공화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잔존해 있었다. 비록 국민의회가 바뀐 전국평의회는 전쟁과 독일의 간섭으로 인해 제대로 된 기능을 사실상 하지 못했지만, 1941년 소집된 전국평의회의 의원 구성에는 심지어 제3공화국 시절보다도 더 다양한 정치적 다양성을 보여주며, 특히 생디칼리스트나 공산주의자 등 좌익 진영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진다. 또 헌법 상에는 전국평의회가 여전히 대중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정치적 통로로서의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또, 비시 정부의 교육정책 역시 가톨릭민족주의,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국민을 통합하고 뛰어난 학생들에게는 엘리트 교육을 실시한다는, 공화국 시절부터 이어져온 그 방식을 계승한 정도에 불과했다. 특히, 비시 정부의 엘리트 교육은 공화정 시절부터의 그랑제콜 문화를 계승한 것이지만 국가와 민족을 부흥시킬 강력한 지도자의 양성이라는 측면을 강하게 띄어, 해방 이후의 프랑스 정치권, 특히 샤를 드골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 프랑스의 정치 엘리트를 양성하는 그랑제콜인 국립행정학교의 창립은 비시 정부의 엘리트 교육 이념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애초에, 비시 정부의 탄생 자체가 정부의 이양과 의회의 결정이라는 공화제적 프로세스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므로, 즉 비시 정부는 비록 반공화주의를 표방하고 강력한 국가를 외치며 등장했음에도, 실상은 공화제적 요소가 꽤나 잔존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던 국가였던 것이다. 여기에 한술 더떠, 비록 마리안이나 프랑스 혁명의 표어는 사라졌지만 삼색기, 프랑스 혁명 기념일, 자연권 사상 등은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오히려 국민 통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동원되기까지 했다. 오히려 페텡은 자연법 사상을 이용해 '자연공동체'가 기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전쟁이전 공화주의 우파 진영 일각에서 나온 주장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었다.

또한, 비시 정부를 대통령 위주의 권위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페텡의 구상과는 달리 비시 정부에 참여한 테크노크라트 그룹은 민족혁명이라는 슬로건을 거부하고 모든 사회를 협동조합과 공동체원리에 기초한 모든 사회와 경제의 현대화를 추진하는 '사회혁명'을 주장하였고, 공화주의 전통을 계승하여 계급주의에 기초한 권위적인 공화정체를 건설하고자 했다. 또 상술했듯 프랑스 제3공화국 시절부터 좌우파를 막론하고 기존 공화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으며, 특히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공화주의 대신 '공동체' 개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인기를 끌었던 사회적 배경이, 비시 정부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기 복잡하게 만든다. 이들 중 대다수가 비시 정부에 참여했으며 비시 정부의 국가 개혁 시도에 그들의 의도를 다양하게 투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유대인에 대한 탄압정책 역시, 비시 정부 수립이후 갑자기 나타난게 아니라 제3공화국 말기 시절 이미 쿠쟁-나스법과 외국인 경찰법을 통해 맹아가 보이고 있었다.

한편 비시 정부는 독일과도 유사하게, 패전을 극복하고 국가주의를 고취해 분열을 막기 위해 역사를 동원했다. 나치가 인도유럽어족 가설을 뒤틀어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여 확장주의로 나아갔다면, 비시 프랑스는 당시 프랑스의 상황을 로마에게 패배한 골족에 비유했다. 골족은 비록 로마에게는 패배했지만 그 덕분에 문명을 얻게 되어 갈로-로만 문화를 꽃피웠고 로마 제국이 몰락하자 곧 갈리아 국가(프랑크 왕국)을 형성한 것처럼, 전쟁이 끝나고 유럽이 민족국가의 연합체로서 재탄생하면 프랑스 역시 골족처럼 다시금 독일을 제치고 유럽의 중심국가가 될 수있으리라 선전했다. 이는 다분히 현실에 대한 낙관적 인식을 기반으로 한 민족주의였다.

상술된 것처럼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사상으로 제3공화정 후반기에 그나마 향상되었던 여성의 노동 조건을 도로 악화시켰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었다고 한다. 왜냐면 수백만의 포로들이 그대로 독일에 남아 있었으니 가정을 먹여살리려면 누군가는 나와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 그게 바로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노동 조건이 매우 악화되었으니 여자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점령국인 독일군 밑에서 부역해야 할 때가 많았다. '정상적인' 직업을 얻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독일군을 상대로 매춘을 해야 한 사례도 많았다. 이는 전후 처벌한 ‘나치 부역자’ 중 여성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페텡은 프랑스 사회를 개조하면서, 계급혁명론적 관점에 기초한 노조의 활동을 비난하고, 협동조합에 기초한 적절한 노동환경 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협동조합은 차후 새로 개조되는 프랑스 사회의 기본적 요소로서 자리잡을 예정이었다. 가장 먼저 구성된 협동조합은 농민을 대상으로 한 농민 협동조합으로, 이는 당시의 전쟁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이 농업 협동조합은 이미 기존에 존재하는 농업 지구 노동조합과 각각 개별의 농민 가족들을 결합해 구성되는 농협 지역 노조를 기반으로 하며, 이 농협 지역 노조가 지방 협동조합 연맹을 상위로 구성하고, 이 지방 협동조합 연맹은 최상위의 전국 농협 평의회를 구성한다. 이 전국 농협 평의회는 지방 협동조합 연맹의 구성원을 결정하며 또한 일반 농민, 민중을 정부와 연결시켜 주는 대의기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국가의 개입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불만을 받자 1942년 12월 구조를 개혁해 노조와 대의기관을 분리, 지역 노조와 별개로 노조 평의회를 각 지역별로 설치하고 상위 조정기관을 세개로 쪼갰다. 이 세개의 상위 기관은 서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이렇듯 신정부의 협동조합 정책 역시 기존에 존재하는 지역 노조와 지역 자치조직을 기반으로 협동조합에 결속시키려는 계승적 시도에 가까웠다. 이 정책은 해방 이후 농업총연맹의 결성과 조직 결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비시 정부의 농업 협동조합 조직과 유사했다.

4. 비시 프랑스의 지위

흔히 만주국과 더불어 괴뢰국의 대명사격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비시 프랑스의 법적인 지위, 그리고 나치 독일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만주국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휴전 이후 비시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괴뢰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견해부터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대독협력을 수행했으나 괴뢰국은 아니었다는 의견, 그리고 프랑스 해방(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전까지는 프랑스의 합법적인 정부라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당장 페탱 원수가 국가수반이 된 것부터가 나치 독일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망국이 확실해진 제3공화국이 자발적으로 페탱에게 권한을 위임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합중국이 중립국이던 시절에는 비시 정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했으며, 대부분의 식민지들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다.

1976년의 여론조사에서 "1940~1944년의 국가 수반이 누구였는지 아는가?"라는 물음에 "모른다"고 답변하여 판단을 유보한 여론의 비율이 40%에 달했다[26]는 점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점은 비시 프랑스 기간 동안 발생한 인권 탄압이나 전쟁범죄, 특히 프랑스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문제의 책임 소재가 갈리기 때문이다. 비시 정권은 명확한 반유대주의 노선을 취했으며 독일이 점령하지 않은 상태[27]에서 자발적으로 자국 유대인을 독일로 보낸 유일한 국가였다.[28][29] 또한 비시 정권의 지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프랑스의 '부역자'들이 당시의 합법적인 정부인 비시 정권의 방침을 따랐던 것이냐 아니면 추축국인 독일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고 국가반역죄를 지은 것이냐가 갈릴 수 있다.

비시 정권의 수립은 나치 독일이 관여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의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독일과 휴전하고 협력한 것은 페탱 정부가 결정한 일이었다. 물론 휴전 이후 독일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말이다. 국제적으로도 일부 추축국에 승인받은 만주국과 달리 비시 정권은 미국, 소련 등으로부터 프랑스의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고, 드골의 자유 프랑스를 후원하고 협력했던 영국 역시 비시 프랑스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으며 협력 가능성을 계속 고려했다. 그러나 캐터펄트 작전으로 영국에게 악감정이 쌓일대로 쌓인 비시 프랑스는 영국과 국교를 단절해버렸다.
비시 정부는 독일의 괴뢰 정부가 아니었고 프랑스인의 합법정부였지만 태생부터 분명 대독협력 정부였다.
이용우, 프랑스 초기 레지스탕스의 비시-페탱 인식(1940-1942)[30]
실제로 그 당시 독일에 의한 점령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비시 정부는 전쟁 전에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아프리카아시아 식민지를 그대로 유지했고, 독일도 이를 묵인하고 오히려 자율권을 주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독일 점령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입장을 식민지 관계로 볼 수 없는 구체적인 근거가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새로운 유럽 건설”의 이데올로기는 점령자가 비점령자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선전문구나 정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수용가능한 정책방안이었다는 것이다. 즉 독일과 프랑스 비시정부의 관계를 한국일본이 겪은 식민지관계, 즉 점령자와 피점령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박지현, '유럽중심주의'에 투영된 오리엔탈리즘:독일점령과 프랑스 비시정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31]

따라서 비시 프랑스의 합법성이나 지위, 나치 독일과의 관계를 괴뢰국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화이다.

5. 비시 프랑스에 대한 기억

비시 프랑스의 역사는 프랑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굉장히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다. 현대적 사건이고, 나치 정부에 협력했다는 워낙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까, 단순히 사건의 전개를 배우는 것보다 "역사가 비시 프랑스를 어떻게 기억했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배운다.[32]

이원복 교수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33]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자면, 프랑스 국민들 입장에선 부끄러운 역사로 여기기 때문에 이때의 이야기는 사적으로도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5.1. 공통된 기억의 시대 (1945년-1970년)

5.1.1. 레지스탕시알리즘

비시 프랑스 이후 정권을 잡은 드골파 우익들[34]은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들이 모두 나치 정부에 맞서 싸웠다는 생각을 밀기 시작한다. 이로써 한 국가에 한 시기에 대해 다른 기억을 묵살하면서 유일한 공통된 기억을 가지게 되고, 이 기억을 레지스탕시알리즘(Résistancialisme)[35]이라 명명한다. 프랑스가 레지스탕스로 똘똘 뭉쳐있었다는 생각으로, 이 생각 덕분에 1945년에 프랑스는 패전국의 협력국에서 승전국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엄연히 살아있음에도 이런 기억의 변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국민, 정부와 역사가들의 암묵적인 동조 덕에 가능했다. 참고 역사가 로베르 아롱은 레지스탕시알리즘을 변호하기 위해 책 "비시의 역사"(L'histoire de Vichy, 1954년)에서 방패의 설(Théorie de bouclier et de fer)를 정립한다. 페탱은 프랑스를 보호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방패 역할을 했고, 실제 프랑스는 레지스탕스의 이념으로 뭉쳐있어 프랑스 국민과 레지스탕스는 창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섣부르게 프랑스인들이 로베르 아롱의 견해를 공유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1966년의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의 51%만이 페탱의 결정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보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페탱을 두둔하는 인구가 절반이었고 비난하는 쪽이 절반이었다는 것이다.

5.1.2. '정화'

전쟁 직후에, 프랑스의 당면과제는 프랑스를 물질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정치계와 긍정적 이미지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드골주의자들은 비시 정부와 나치와 관련된 사람들을 공개 모욕, 죽이는 "민간 정화"(épuration sauvage)를 방치하고, "법적 정화"(épuration légale)에 착수한다. 총 35만명 이상의 나치 관련 인사들이 이런 "정화"정책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중 관공서 근무자들, 독일인 연인을 둔 프랑스인(특히 여성)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독일인 연인을 둔 프랑스 여성에 대한 대규모 강간과 창녀 낙인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정당화되었다. 이런 정화 작업은 경제 부문에도 미친다. 일례로 정부와 협력했던 자동차 기업 르노는 국영화된다.

5.1.3. 공식적인 기억의 파급

신문과 사진, 교과서 등의 비시 정부에 관련된 부분은 검열당하고, 장 물랭 등 레지스탕스에 앞장섰던 인물들은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되어 팡테옹(위인들의 묘지 격)에 안치된다. 책과 영화 등 미디어는 이런 레지스탕스를 추모하는 성향을 많이 보인다. 몇 가지 예로, "La bataille du rail", 그림자 군단[36], "La Grande Vadrouille" 등의 영화가 있다.

이때 의무 노동 수용소(STO)에 징집됐던 젊은 프랑스인들과, 전쟁 당시에는 독일령이라 독일 군대로 징집되었던 알자스-로렌 지방 거주민들(Malgré-nous)의 기억은 묵살된다.

5.2. 레지스탕시알리즘의 문제화

국민들의 세대와 정치인들의 세대가 바뀌면서(조르주 퐁피두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등 전쟁 시기에 미성년이었던 대통령들의 취임) 역사가들은 국민들의 공통된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의 파급은 68운동 때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드골에 반감을 갖고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을 고루하고 부르주아적이라 판단한 새로운 진보 좌파계층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이 시기에 독일에서도 제대로 나치의 역사를 반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37]

5.2.1. 로버트 팩스턴의 역사관

로베르 아롱의 역사 저술 "비시의 역사"(Histoire de Vichy, 1954)가 1세대 기억에 있어 표상적이라 볼 수 있다면, 2세대의 기억은 로버트 팩스턴(Robert Paxton)이란 미국 역사가의 "비시의 프랑스"(La France de Vichy)라는 책으로 대표된다. 당시 프랑스의 정의 검열과 감독으로 비시 프랑스에 대한 자료가 불충분했던 탓에, 팩스턴은 독일 기록보관소의 자료들을 연구해, 레몽 아롱의 역사관의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우선 비시 프랑스 정부는 확실히 나치 정부와 협력했고 비시 프랑스 소재 유대인들의 계획적 말살에 중심에 있었다는 점을 밝힌다. 팩스턴은 이러한 연구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는데, 정부가 팩스턴의 새로운 역사관을 수용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5.2.2. 대중매체의 역할

"슬픔과 동정(원제: Le Chagrin et la pitié, Marcel Ophüls작, 1969년)은 전쟁을 겪은 증인들(병사, 정치인)들의 증언을 다큐멘터리로 내보낸다. 이 증언들은 레지스탕시알리즘의 환상과 상반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 영화 "루시앙 라꼼브"(루이 말, Louis Malle 작, 1974년)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공통적으로 책임("Tous des salauds": 모두 쓰레기였다)이 있었다는 주장을 앞세운다.

5.2.3. 유대인들의 기억과 홀로코스트

이런 풍향에서 유대인들의 발언은 점점 주목받게 된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유대인 생존자 협회들은 미래 역사학자들이 연구하길 소망하는 의도로 증언을 기록해놓았다. 게슈타포 수장이었던 클라우스 바르비(1987년), 나치 지지 민병대의 수장이었던 폴 투비에(1994년), 1,700명의 유대인을 수용시켰던 공무원이었던 모리스 파퐁(1997/1998년)의 재판은 TV로 생중계된다. 1993년에서야 처음으로 정부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프랑스의 지분을 언급한다.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는 "프랑스 정부 (1940년-1944년) 하에 행해진 인종차별적 반유대주의적 박해를 추도하는 기념일"을 지정하고, 자크 시라크는 1995년 7월 16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몽주의와 인권의 조국이자, 이민 수용국이자 피난처인 프랑스가, 이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38] 2005년에는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기념비를 세운다.

6. 기타

제2차 세계대전을 추축국이 승리하고 미-독-일의 냉전을 다룬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독일의 입김을 받아 국제적으로 적법한 프랑스로 나온다. 또한 파리와 브르타뉴를 수복한것으로 나온다.하지만 완전한 프랑스의 영토를 수복하지는 못했으며 일부 영토는 부르군트 기사단국의 영토로 나온다.

프랑스-태국 전쟁에서 나중에 같은 추축국이 되는 태국과 쌈박질을 벌인 전적이 있다. 막바지에 코 창 해전에서 승리하여 태국 해군을 박살냈지만, 이내 일본이 개입하고 인도차이나의 영토 일부를 태국에 양도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은 1941년부터 비시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들에 군대를 보내 눈독들였지만, 비시 프랑스가 동맹인 나치 독일의 반괴뢰국인지라 대놓고 공격하진 못했다. 대신 비시 프랑스와 일제는 협정을 맺어 프랑스 총독부와 관료를 유지하면서 일본군이 주둔하고 뒤에서 일본이 실질적인 통치만 한다는 기묘한 공존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멸망하고 나치 독일도 멸망을 앞두자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관료들은 자유 프랑스에 붙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1945년 3월에는 일본이 대놓고 프랑스 총독부를 해체하고 베트남 제국 등의 괴뢰 정부를 직접 세우게 된다. 물론 이들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1년 정도의 짧은 기간만 존속하게 된다.

아직도 프랑스에서 비시 정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프랑스의 공화국 전통을 공공연히 부정하며 프랑스에서 나름 오래된 세력이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장 마리 르펜 당수 시절 비시 프랑스를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문란한 공화국을 버리고 돌아가야 할 모델로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후일 성 비오 10세회를 창립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롯한 전통 가톨릭의 모체가 되는 강성 보수 가톨릭 세력 역시 비시 프랑스 붕괴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잘못된 것들을 프랑스에 다시 돌려놓았다는 논리로 비시 프랑스를 두둔했다. 국민연합은 현재 당수 마린 르펜 때부터 비시 프랑스 시절로 돌아가자는 과격한 수사를 거의 쓰지 않고 있지만 내부에 예전의 당당한(?) 활동 방식을 그리워하는 당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리슐리외급 전함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기 전 완성된 1번 함 리슐리외는 탈주해 미국의 도움으로 자유 프랑스의 전함으로 활동했으나 2번 함 장 바르는 비시 프랑스가 건조하던 도중 미완성인 채로 미국의 전함과 교전했다. 2번 함은 비시 프랑스가 멸망한 이후에 겨우 완성되었다.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BC 프랑스로 등장한다.

걸즈 앤 판처BC자유 학원의 전신 BC 학원의 명칭을 여기서 따왔다.

프랑스의 2005년 영화 코러스(Les Choristes)에서 비시 프랑스의 국가가 단원들을 뽑을 때 오디션격으로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잠시 나오는데, 보니파스란 아이가 원수여!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를 부르자 음악 선생님인 주인공이 좀 옛날 노래군라고 평가하면서 보니파스를 소프라노인 왼쪽으로 분류한다.[39]

2015년 프랑스의 애니메이션 길고 긴 방학(Les Grandes Grandes Vacances)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전 디에프에 있던 주인공들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스틸 디비전 2에서 독일군에 참전한 비시 프랑스인 LVF 의용군들이 정예 보병부대로 등장한다.


[1] État(국가)라는 국호는 영어 State(국가)와 같은 의미다.[2] 간혹 몇몇 매체나 게임 등에서 비시 프랑스의 국기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이 기는 비시 프랑스 원수기(Chef de l'État Français)다. 비시 프랑스의 지도자였던 필리프 페탱의 이름을 따 페탱기라고 불리기도 한다.[3] 원수(元帥)는 필리프 페탱을 가리킨다.[4] 논란의 여지가 있음[5] 프랑스국 국가원수(Chef de l'État français).[6] 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7] 생수 브랜드로도 유명하다. 클레르몽페랑 북쪽에 있다.[8] 흔히 파스케스로 알려져 있지만 파스케스가 아니라 고대 프랑크족이 쓰던 프랑시스카다.[9] 휴전 반대파 의원들은 투표에 불참했다.[10]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은 이미 100년도 더 전부터 유대인들이 세속화된 채 섞여살았기 때문에, "격리되어 자기들끼리 살아오던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사회참여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식의 반감이 만연한 중부 유럽보다 반유대주의가 약했다. 영국은 유대인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총리까지 선출된 바 있다.[11] 폴란드는 외국으로 도피한 인구까지 고려하면 유대인 인구가 원래의 1%도 남지 않았다. 참고로 나중에는 독일계 인구도 추방당하고 비폴란드계가 많던 동부 영토도 상실하면서 본의 아니게 단일민족국가가 되어버렸다.[12] 네덜란드는 주민들이 게슈타포와 독일군에 적극 협조한 터라 유대인 희생이 커졌는데, 이는 이원복 교수 시사만화 <현대문명진단> '안네 프랑크를 밀고한 사람들' 편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만 주민 협력도 협력이지만 그 이전에 나치 정권이 이들 국가에 특히 집중적인 행정력을 미친 결과로 볼 수 있다. 유대인의 중심지로서 게토와 절멸수용소가 위치해있던 폴란드는 말할 것도 없고, 네덜란드에서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의 주도로 철저한 유대인 사냥이 벌여졌다.[13] 대표적으로 프랑스령 아프리카 중 서아프리카'에 있는 가봉의 경우가 그랬다. 가봉 총독 마송은 처음에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고자 했으나, 가봉에 있는 프랑스인 가톨릭 성직자들이 총독에게 비시 프랑스에 충성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비시 프랑스 정부는 이전 정부의 정교분리 원칙을 내팽개치고 노골적으로 가톨릭과 유착하는 방침을 택했다. 보수적인 데다가 프랑스 정부의 정교분리 원칙에 부정적이었던 당시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비시 프랑스 정부에 특히 호의적이었다.[14] 당시 자유 프랑스군은 나치와 나치 부역자하면 눈이 돌아가있는 상태였고 프랑스인인데 독일군으로 자원입대하여 복무한 자는 반역죄로 총살을 당했다. 그 중 유명한 사례가 르끌레르 장군이 SS에 자원 입대한 프랑스인 포로들을 보고 왜 나치에 충성했냐는 질문에 '그럼 당신은 왜 미군 군복 입고있소?'라는 식으로 대답하자 1명을 제외하고 재판없이 총살시키고 길가에 방치한 것.[15] 가믈랭도 페텡의 공화정 폐지에 반대했다가 미움을 받은게 커서 재판에 끌려나왔다고 한다.[16] 이에 따라 프랑스 남부까지 프랑스 군정청의 영역이 되지만, 연합군이 프랑스에 진격하고 있던 상태라 명목상으로만 군정청 영역이었다. 그리고 이미 1942년에 독일군이 쳐들어와서 비시 프랑스 정부를 한 차례 해산시켰는데 비시 정부가 뭘 더 할 것도 없었고 결국 1944년 12월 군정청이 해산되었다.[17]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민간행정은 여전히 비시 정부가 관할 중이었다.[18] 원래부터 무장 투쟁에 호의적이며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불법화된 자들. 레지스탕스의 50% 차지.[19] 전쟁 전에 공산당과 결별한 적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정치적 이상은 공산주의자와 비슷했다.[20] 레지스탕스의 30% 차지했다.[21] 전쟁 전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선거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22] 독일 군인에게 강간당한 매춘부 등 애먼 피해자들을 머리를 강제로 깎고 폭행하는 등 정당한 전후처리가 아닌 단순 화풀이에 가까운 모습이 많이 보였다.# 도리어 비시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공화국을 배신했던 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주로 우익 진영, 심지어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였던 샤를 드골에까지 붙어 살아남았으며, 이는 68운동 때까지 계속되었다.[23] 급진파 민족주의자였던 프랑수아 드 라 로크가 만든 어구이다.[24] 국민혁명이라고도 번역된다[25] 자연법과 자연권이 보장되는 자연적으로 자연스레 구성되는 공동체라는 개념[26] 이용우,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숙청과 기억의 역사, 1944-2004, (역사비평사, 2008-03-02) pp232[27] 비시정권 통제하에 있는 프랑스 남부의 자유 지구.[28] 가령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나 헝가리, 불가리아에서도 다른 유럽지역과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가 성행하기는 했으나, 이들 국가들은 자국내 유대인들을 독일의 절멸수용소로 보내지 않았다. 이들 지역의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끌려가기 시작한 것은 전쟁 중후반기에 독일이 군사 점령을 한 이후의 일이었다.[29]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간기 프랑스의 특수한 사회상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스페인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붙어있는 나라인데, 나치의 침공 직전 프랑스는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돌아가며 스페인 및 전세계 출신의 국제여단 패잔병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대거 망명해왔다. 이들은 밥 먹고 혁명 생각만 하는 빨갱이 또라이 혁명가들이라고 프랑스 제3공화국으로부터 불순분자 및 반정부세력으로 찍혔는데, 이를 보다못한 제3공화국 정부는 이들을 격리수용하기 위한 강제수용시설을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설치하고 단속을 벌였다. 그런데 3공이 패망하고 들어선 비시 정권은 이 시설을 국내 유대인 단속에까지 알뜰하게도 써먹었고, 급기야는 기존 수용소의 외국 출신 유대인은 물론 자국 유대인까지 독일 절멸수용소 가스실로 보내기도 했다. 이런 탄압이 심해지자 혁명가들은 단속을 피해 레지스탕스나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하여 본격적으로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30] (프랑스사 연구, 2011.8, Vol 25.), 한국프랑스사학회, pp150.[31] (담론, 2004, Vol.201)한국사회역사학회 pp.225[32] 이용우 저,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 숙청과 기억의 역사 1944-2004"를 참조.[33] 1998년 개정판부터 추가되었다.[34] 주류 공산주의자들도 이를 묵인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실제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던 공산주의자들일수록 이런 미화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당시 상황에서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35] 앙리 루소(Henry Rousso, 프랑스 역사학자)가 처음 사용한 용어.[36] 다만 그림자 군단은 이런 추모나 영웅화 성향과는 많이 다른 영화며 결말도 상당히 차갑고 씁쓸한 편이었다. 감독인 장 피에르 멜빌이 실제 레지스탕스였여서 미화와는 관련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흥행에서는 실패했다.[37] 이 이전까지는 나치에 대한 반성이 제대로 이루지지 않았다.[38] 1942년 7월 16일 비시 정부가 유대인들을 일제 검거하여 자전거 경기장에 가둔 사건인 '벨디브 사건'이 발생했다. 비시 정부에서 일했던 과거가 있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이 2차 대전 시기 비시 정부의 홀로코스트 사건이었던 '벨디브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정부 사과를 거부했던 데 반해, 시라크는 집권하자마자 바로 '벨디브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9] 코러스의 영화 속 배경이 1940년대 후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올수 있는 장면이다. 참고로 아이에게 주인공이 어디서 그 노래를 들었냐고 묻자 자기의 할아버지에게 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