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1 22:43:14

프랑스 2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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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진행4. 결과5. 평가6. 여담

1. 개요

Révolution de Février

7월 혁명으로 집권한 루이필리프7월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자유주의 혁명.

전유럽으로 번져나간 1848년 혁명의 시초다.[1]

2. 배경

우리는 지금 화산 위에서 잠자고 있다. (...) 대지가 다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폭풍우는 지금 지평선 저 위까지 다가왔다.
Nous dormons sur un volcan (...) Ne voyez-vous pas que la terre commence à trembler? Le vent de la révolte souffle, la tempête est à l’horizon
- 알렉시스 드토크빌, 2월 혁명 발발 직전 의회 연설에서

루이필리프는 비록 입헌군주제를 지향했고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완전한 민주주의를 원하지는 않았고 의회에게 권한을 주는 것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편 183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산업 혁명이 활발하게 진행되자 세력이 커진 산업자본가와 노동자들이 7월 왕정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재산 보유액에 근거하여 제한적으로 투표권을 주었는데 문제는 이 재산 보유액의 기준이 오로지 토지였다는 것. 이로 인하여 정치권력은 소수의 지주들에게 집중되었고 이 시기 한창 부를 쌓아 가던 산업자본가들은 철저히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당했다. 빈곤한 삶을 영위하던 다수의 노동자들이 제외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필이면 바로 옆동네였던 영국이 1832년 선거법 개정을 통하여 중산층들에게 정치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산업자본가들의 불만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게다가 1846년 무렵 유럽 전역에 흉년과 경제 불황이 발발하면서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분노는 임계점으로 치달으면서 상황은 일촉즉발에 다다르게 되었다.

3. 진행

1848년 2월 파리 마들렌 광장에서는 선거권 확대와 관련되어 공개토론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소요를 우려한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토론회 개최를 방해하자 그동안 쌓여 있던 시민들의 불만이 한번에 터져나온다. 2월 22일 무렵 파리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7월 왕정의 핵심인물로 시민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아 왔던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 수상이 다음날인 23일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수상직에서 사퇴했다.

기조 수상의 사퇴에 고무된 군중들이 정부 청사로 몰려들었고 정부 측에서는 병력을 동원하여 군중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발포가 이루어졌고[2] 무려 52명의 시민들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전 파리가 들고 일어섰다. 파리 전역이 1500개의 바리케이드로 뒤덮이자 국왕 루이필리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결국 24일 스스로 퇴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했다.

4. 결과

국왕의 퇴위 다음날인 25일 파리에서는 임시 공화국이 선포됐다. 임시 공화국을 구성하는 양대 세력은 부르주아들이 주축이 된 온건 자유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혁명이 진행될 당시만 하더라도 두 세력은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혁명의 성공 이후 수립된 새로운 공화국의 청사진을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실은 동상이몽에 불과했음이 분명해져 간다.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은 노조 허용, 근로시간 제한과 같은 사회개혁안을 추진했고 부르주아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개혁안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처럼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커지는 와중이었던 4월에 새로운 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된다. 선거권 제한 여부가 혁명을 불러온 핵심 원인이었던 만큼 임시정부는 보통선거를 도입했고 이에 따라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30만명에서 950만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새로 선거권을 부여받은 이들 중 대다수는 시골의 농민들이었고 이들은 총선에서 부르주아들에게 표를 몰아줬다.[3]

선거에서 참패한 사회주의 세력들이 임시정부에서 대거 갈려 나가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는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이 되자 임시정부는 한층 더 노동자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는데 오늘날로 치자면 실업자 생활보조금 지급과 같은 사회보장 정책이었던 직업 알선소를 강제로 폐쇄해 버린 것.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4일에 걸쳐 10만명의 노동자들이 정부에 대항하는 소위 6월 봉기[4]를 일으켰지만 정부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진압된다.

이어 12월 10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듣보잡에 가까웠던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되었는데 농민과 노동자들의 몰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보수 세력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위대였던 지방 농민들은 '위대한 프랑스의 재현'을 부르짖으면서 나폴레옹 1세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표를 몰아주었고 노동자들 역시 6월 봉기 당시 자신들을 무참히 진압한 부르주아 세력들에게 치를 떨면서 나폴레옹에게 대거 표를 던졌다.

5. 평가

이 혁명은 단순히 프랑스의 7월 왕정이 무너지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유럽으로 번져 그 해 3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이 실각하여 빈 체제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덩달아 이탈리아독일에서는 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독일에서는 같은 해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소집되어 통일에 대한 논의가 오갔고 이탈리아에서는 카르보나리당 중심의 통일 운동이 시작되었다.

또 계급적 관점에서도 이 혁명은 상당히 중요한데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의 갈등 구도가 이 혁명을 통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프랑스 혁명7월 혁명의 경우에는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이 동맹 관계에 가까웠다. 부르주아들이 자유주의, 계몽주의와 같은 이념적 로드맵을 제시하는 역할이었다면 대중들은 정부를 전복시키는 물리력을 제공했던 것. 하지만 1830년대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성장하면서 노동자들을 포함한 대중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부르주아들이 이에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두 세력 간의 결별이 시작된 것. 실제로 1848년 혁명 이후 유럽 전역에서 실질적으로 정치 권력을 손에 쥔 부르주아들은 기득권화되어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데 몰두했다. 다음은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한 1848년 혁명에 대한 에릭 홉스봄의 평가다.
1848년 혁명들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혁명으로부터 몸을 뺐다. 그들은 프랑스의 지도 아래 서로 보강해 가면서 옛 지배자들의 부활을 막거나 연기시키고, 러시아가 개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다시 한 번 '위대한 국민'이 된다는 보수와 그것에 따르는 위험보다는 국내의 사회적 안정 쪽을 택했던 것이다.

6. 여담

  • 혁명 성공 직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적기를 새로운 국기로 수립하자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부르주아들이 강경히 반대해서 기존의 삼색기가 국기로 채택되었지만 만약에라도 적기가 채택되었더라면 러시아보다도 70년 앞서서 세계 최초[5]로 적기를 국기로 선택한 정부가 등장할 수 있었다.
  • 현재까지 프랑스에서 성공한 마지막 혁명이다. 이 혁명 이후로 사회 기득권을 손에 넣은 부르주아들이 혁명 세력으로부터 이탈하면서 애초에 혁명 자체가 자주 벌어지지도 않았다. 파리 코뮌은 결국 몇 달 지나지 않아 진압당했으며 68운동도 결국 보수 세력이 재집권에 성공했다.[6]


[1] 엄밀히 따지자면 1848년에 제일 먼저 반란이 일어난 곳은 시칠리아 왕국이었다. 하지만 전유럽으로 혁명이 퍼져나가는 데 공헌한 것은 프랑스의 2월 혁명이기 때문에 보통은 이 혁명을 1848년 혁명의 시초로 본다.[2]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정부 측에서는 유혈 사태를 빚을 마음이 없었는데 명령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나 발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3] 유럽 사회에서 농민들이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지주들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에 물들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반 세기 가까이 지난 19세기 후반이나 되어서였다. 그나마 그것도 지주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쪽 얘기였고 혁명으로 인해 자영농이 된 프랑스의 농민들 중 다수는 변함없는 우파 세력의 지지자로 남았다.[4] 1832년 6월 봉기와는 다른 봉기로, 1848년 6월에 일어났다. 물론 우파에서는 6월 폭동이라고 폄하한다.[5] 물론 1871년의 파리 코뮌 역시 적기를 국기로 채택하기는 했지만 이쪽은 세력이 철저히 파리에 국한됐던 데다 몇 달 버티지도 못해서 실질적인 정부로 인정을 못 받고 있다.[6] 하지만 68운동은 이후에 서유럽북유럽 국가들의 대부분의 헤게모니를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좌파 사상이 차지하는 첫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절대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