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1:26:04

프랑스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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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2. 중세3. 근세4. 대육군5. 19세기6. 제1차 세계 대전7. 엘랑 비탈 교리8. 청년학파9. 서부전선의 주력10. 전간기11. 제2차 세계 대전12. 한국 전쟁13. 현대14. 역대 편제

1.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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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 지역은 고대에는 갈리아라고 불렸고, 골족[1]의 영역이었다. 골족은 전사계급을 우대하는 호전적인 종족이었는데, 동시대의 유럽에서 강력하고 정교한 정부 체계를 이룬 고대 로마고대 그리스계 국가들에 비해 아직 발전 단계가 부족 연맹 사회 정도에서 머물러 있었다. 근방의 게르만족이나 그보다 더 나중에야 두각을 드러낸 슬라브족에 비하면 훨씬 발전된 상태에 있긴 했으나 로마인 입장에서는 똑같은 야만족들이었다.

켈트는 매우 광범위하게 유럽은 물론 중동에 까지 퍼져있었는데 그 규모는 지금의 아일랜드에서부터 이탈리아 반도 북부, 스페인은 물론 독일[2] 남부에서 발칸 반도 북부, 심지어는 아나톨리아에다 이집트까지 퍼져있을 정도였다. 하나의 민족이 아닌 광범위한 켈트 제어 사용자들이므로 이게 전부 하나의 민족이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며[3], 따라서 이 글에서는 프랑스 땅에서 살았던, 즉 갈리아 지방의 켈트인들, 즉 골족만을 다룬다.

갈리아-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걸쳐있던 켈트계 민족들은 종종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하였는데 한 때에는 당시 아직 도시 국가 수준이던 로마를 점령하네 마네 하는 수준으로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중동 오리엔트 문명에 이어 세계적인 수준으로 문명화되고 발전한 그리스계 국가들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춘 로마 공화국은 켈트인들의 침략을 막아내고 이탈리아 반도를 차츰 통일해가며 발전을 하였고 이들이 이탈리아 북부를 차지한 이후부터는 전세가 뒤바뀌어 로마인이 갈리아의 골족의 땅을 침입하는 형세가 되었다.

로마 공화국의 갈리아 신임 총독이자 사령관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장기적으로 골족의 이탈리아 침입을 원천 봉쇄하고 켈트 족속들 이외에 로마의 새로운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게르만족[4]을 막아낼 전방 방어선을 형성하겠다는 연유로써 갈리아로 진격, 부족 연맹사회에 머물러 있던 골족을 정복하고 10여 년 만에 갈리아 전체를 로마의 영토로 삼았다.

물론 당연히 모든 부족들을 일일이 정복하여 해체하고 직할지로 삼은 게 아니라, 우호적인 부족들은 포섭하고 적대적인 부족들을 이이제이 및 자신의 군단으로 직속 타격하여 제압해낸 것. 그렇다해도 엄청난 전공으로 순식간에 갈리아를 정복해내었다. 이는 당시 카이사르의 정치적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에 비해 한참 부족했던 카이사르의 군공을 크게 끌어올려 카이사르가 차후 로마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골족에서도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베르킨게토릭스와 같은 유능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로마에 적대적인 골족 부족들은 물론 우호적인 부족들까지 최대한 설득, 골족 대다수를 규합하여 로마 군에 대항하였고 실제로 베르킨게토릭스가 마치 후대의 게르만족 연합을 이끌던 아르미니우스가 통합 게르만족 국가를 세우려 했던 것처럼 통합 골족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학설도 있다.[5]

문제는 베르킨게토릭스 본인의 출신 부족인 아르베르니족은 골족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강력한 부족이 아니었고 따라서 자신이 추구하는 전략, 전술을 타 부족 족장들의 의견 때문에 제약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베르킨게토릭스는 필요 이상으로 잔혹한 결정을 많이 내리기도 했다. 자신의 출신 부족이 약하니 타 부족 족장들을 고분고분하게 다루려면 힘과 잔혹성을 보여줘야했기 때문이다. 반면, 지역 사령관-총독에게 매우 막강한 권한을 주고 중앙집권적인 정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제대로 된 국가인 로마 공화국은 힘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골족에 비해 한참 우위였기 때문에 사투 끝에 골족 연합은 로마와 카이사르에게 패배한다.

그러한 국가 체계의 수준 차이 때문에 로마 군대가 구사할 수 있는 전략, 전술과 골족 연합군이 구사할 수 있는 전략, 전술의 수준 차이는 매우 컸다. 베르킨게토릭스 본인도 이를 잘 알았기에 유격전청야 전술로 카이사르를 궁지로 내몰았고, 카이사르가 직접 오기 전까지의 로마군은 사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골족 전사들에게 박살이 나고 있었다. 이렇듯이 골족이 일방적으로 로마군에 털린 것은 아니다. 그 카이사르조차 베르킨게토릭스의 봉기 이후로 자신이 이전에 점령했던 갈리아 땅 대부분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갈리아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애초에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지는 시점의 먼 훗날의 로마도 아니고 라이벌이던 카르타고를 멸해버린 뒤, 한창 군사적 전성기를 달리던 고대 로마를 상대로 이 정도로 격렬한 전쟁, 악전고투를 강요한 세력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기껏해야 훗날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을 박살낸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부족 연합군이나 카르헤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문자 그대로 전멸시켜버린 파르티아 제국 정도가 전부다. 좀 더 쳐주더라도 다키아 전쟁 직전의 다키아 왕국 정도 밖에 없다. 거기에 상대가 다름이 아니라 로마 역사상 최고의 명장 1~2위를 다툴만한 자인 그 카이사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처럼 통합된 국가를 이끈 인물이 아니라 부족 연합을 이끌어야 했던 인물이었고 따라서 타 부족 족장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강요에 못이겨 몇 차례의 전략적 오판을 저지름으로써 세계구의 명장인 카이사르의 숨통을 온전히 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근성으로 버텨낸 끝에 요충지 아바리쿰을 함락시키고 알레시아 전투에서 희대의 대승리를 거둔 카이사르와 로마 군대에 의해 자신의 전략이 실패했음을 직감한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하면서 갈리아는 완전히 로마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로마 제국의 장기간에 걸친 통치 끝에 골족은 거의 정체성을 잃고 라틴화되었다. 로마의 모든 속주들 중에서도 가장 충실하게 로마화된 지역이었으므로 이를 흔히 '갈로-로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갈로-로만의 언어는 켈트계 언어 기반에 라틴어가 모어화하면서 오늘날의 프랑스어로 이어지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

이 갈로-로만인들이 훗날 이 지역을 정복한 게르만계 민족인 프랑크족과 섞이면서 오늘날의 프랑스/문화, 프랑스어, 프랑스/사회를 구축하게된 셈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중세~근세 프랑크인, 프랑스인은 자신들의 조상 기원을 어디까지나 '프랑크' 내지 하다못해 로마에 두었지, 고대 켈트인들인 골족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민족주의가 고양되었을 당시 "프랑스 땅에 더 오래된 기원 조상들을 다시 되새기자"는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사회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필두로 하는 고대 골족은 "외세의 침입에서 프랑스를 지키려한 영웅들"로 다시 기억되었다.

한편 그러한 고대 골족의 유산은, 로마에게 정복되었다고 해서 그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어에 대한 켈트적 영향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군사적인 측면에서 있어서 골족은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고 깔보기는 했어도 그 로마와 맞먹는 수준의 강력한 야금술을 자랑하였으며, 그들의 도검 양식[6], 갑주 양식[7], 투구 양식은 역으로 정복자 로마인들의 양식에 영향을 주어 로마의 무구를 변화시켰다. 또한 비록 오리엔트의 사르마티아, 파르티아와 같은 유목민 출신의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한 세력들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켈트인들은 유럽 최고의 기병들로 유명했으며 갈리아가 로마에 정복된 이후에도 골족이 순식간에 로마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온전히 갈로-로만이 되기 전까지는 일종의 어용 전사들로써 로마 군대에 독자적인 켈트적 색채를 유지한 채 기병으로 복무, 참전하여 로마 공화국, 그리고 로마 제국의 팽창기에 크나큰 일조를 하였다. 로마의 기병 교리와 기술은 말하자면 자신들이 정복한 켈트인들로부터 대단한 영향을 받았다고 봐도 좋은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 체제로 변화하던 즈음 본래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살던 게르만 계통 민족들이 서쪽으로 대대적인 이주를 시작하면서 로마인들의 땅이던 갈리아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갈리아는 그럭저럭 살만한 땅이긴 했지만 그만큼 서로마 제국이 집중 관리하는 땅 중 하나였을 뿐더러 정착 이후 방어하기에는 영 쉽지 않은 땅으로 여겨졌던지 갈리아를 거쳐간 게르만계 민족들은 즐비했지만 갈리아에 정착한 게르만계 민족은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수에비인들은 갈리아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 포르투칼레 지역에 정착하면서 오늘날의 포르투갈인의 조상 중 하나가 되었으며 비시고트(서고트)인들 역시 갈리아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 오늘날의 스페인인의 조상 중 하나가 되었다. 반달인들도 갈리아 남부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로 갔다가 아예 북아프리카로 나아가 오늘날의 튀니지를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게르만족은 현대 독일인을 말하는게 아니라 게르만 계통의 온갖 민족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작센, 앵글로, 랑고바르드, 프리스, 알레마니, 고트(서고트, 동고트), 수에비, 프랑크, 노르드 등등은 전부 게르만 제어 사용자 민족들이지만 그렇다고 서로 간의 동족 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여하간 마침내 게르만의 한 일파인 프랑크인들이 오늘날의 동북부 프랑스에 해당하는 지역에 아예 정착을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프랑스의 실질적인 시작이라고 봐도 좋다.[8]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면서 갈리아 지역에 독자적인 로마인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던 시아그리우스 장군의 세력[9]클로비스가 지휘하는 프랑크 군대가 격멸하면서 프랑크의 갈리아 정복 및 정착이 급속히 진전되었다. 클로비스가 프랑크 왕국을 세우면서 일컬어지는 클로비스 혈통의 왕가를 통칭 메로빙거 왕조라고 일컫는다.[10] 클로비스와 이후 이어진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은 한동안 서유럽 최강의 군사 국가나 다름없었다. 클로비스 당대에 갈리아 남부와 히스파니아(스페인)를 장악하고 있던 비시고트 왕국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부이예 전투에서 프랑크 군대에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나며 무너지고, 갈리아 남부 대부분을 프랑크 왕국에게 헌납해야 했다.

이후에도 메로빙거 왕조는 끝도 없는 팽창을 반복하여 오늘날의 동남부 프랑스[11] 일대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부르군트족의 부르군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부르군트인들을 프랑크인들 속으로 편입시켰다. 부르군트인들은 차츰 프랑크, 그리고 뒤이은 프랑스에 동화되어버린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래도 이 부르군트라는 개념은 부르고뉴라는 지명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메로빙거 왕가는 동방 원정을 감행하여 오늘날의 독일 지역인 게르마니아를 줄기차게 공격하여 남독일 지역은 메로빙거 왕조 시기에 거의 프랑크 왕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고트나 수에비, 반달, 랑고바르드, 프랑크 등 구 서로마 제국령에 대한 대이주와 정착을 성공시키며 고대 로마인들의 발전된 문화와 기술력을 쉽게 입수할 수 있게 된 이주형 게르만계 민족들과는 달리 게르마니아 지역에 잔존한 작센인, 알레마니인, 튀링겐인 등의 토착 게르만계 민족들은 발전이 훨씬 쳐져있었고, 그것이 프랑크 왕국과 게르마니아 지역의 토착 게르만계 민족들 사이의 강력한 전력 격차를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일례로 프랑크인과 랑고바르드인은 로마식 보병 전술을 거의 그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고 여겨지며 거기에 더해 프랑크인들은 갈리아 지역의 기병 풍토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게르만계 민족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기병 전력을 활용하는 민족이기도 했다.[12] 때문에 게르마니아의 게르만계 민족들은 프랑크 왕국의 지속된 공세에 제대로 방어를 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메로빙거 왕조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비스케이에서 동쪽으로는 라인란트에서부터 남독일 전역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배권을 구축하였고 수도는 파리에 두었다. 파리라는 프랑스의 역사적인 도시의 기원은 이보다 더 오래된 것이지만 실질적인 수도로써의 역사는 메로빙거 왕조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메로빙거 왕조는 세대를 거치며 차츰 장자상속제와 중앙 집권제를 시도하려 했으나 궁중 암투, 지방 프랑크 귀족들의 저항이라는 강력한 장벽에 가로막히고 또한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한 내분이 반복되면서 분열하고 차츰 약화되었다.

7~8세기 프랑크 메로빙거 왕조 말기, 아랍 이슬람 제국의 팽창은 절정에 달해있었고 당시 아랍 이슬람 통합 세력을 이끄는 것은 우마이야 왕조였는데 이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는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며 오늘날의 포르투갈, 스페인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하였으며 이후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프랑스 일대에까지 약탈과 국지적 침략 행위를 개시하고 있었다.[13] 비록 메로빙거 왕조 자체는 약해져 왕가가 주도해서 이를 막아낼 순 없었지만 약화되어가는 메로빙거 왕가를 대신하여 실권을 휘두르던 궁재 카를 마르텔[14]을 중심으로 프랑크 왕국이라는 존재 자체는 건재한 상태였다.

카를 마르텔이 지휘하는 프랑크군은 마침내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며 이슬람 세력의 프랑스 방면으로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었고 이 위업은 카를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15]이 메로빙거 왕조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건설하는 명분적 기반이 되었다. 피핀은 왕위를 찬탈하고 프랑크 왕국의 군주가 된 이후로 게르마니아 지역에 대한 침공의 수위를 강화하여 오늘날의 북독일 지역에서 패권을 휘두르던 작센족[16]을 압박하였고 이탈리아 반도를 거의 통일하면서 강성함을 뽐내던 랑고바르드 왕국[17]을 공격하여 그들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리며 교황청을 구원, 가톨릭 교황의 권위를 세워줌과 동시에 중부 이탈리아의 로마냐, 안코나 일대를 교황에게 기증하면서 역사적인 교황령의 개념을 시작시켰다. 이를 '피핀의 기증'이라고 일컫는다.

물론 사방이 적이던 피핀의 프랑크 왕국은 이탈리아에 오래 신경을 쓸 수가 없어서 다시 철수해야 했고, 곧 랑고바르드인들은 재기하여 왕국을 재건하고 교황청을 두들겨 기증된 교황령 토지 대부분을 다시 빼앗았지만, 어쨌건 이 피핀의 기증 사건은 피핀 그 자신의 찬탈 행위를 교황청과의 연대를 통한 기독교적 명분 강화로 정당화시키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또한 교황을 도운 프랑크의 서유럽에서의 패권자로써의 입지, 이미지를 굳히는 것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의 프랑크는 문자 그대로 서유럽의 최강자였고, 동유럽으로 가보더라도 동로마 제국만이 오직 그들을 능가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존재였다. 군사적인 측면에 있어서 클로비스 시대의 프랑크인은 물론 다른 게르만계 민족들에 비해 기병의 비중이 높았을 가능성도 배재할 순 없지만 일반적인 당시 게르만계 민족들의 군사 체계가 그렇듯이 보병이 중심이었다. 창, 장창, 방패, 도끼, 곤봉, 장검 등 다양한 무기로 무장한 보병들은 선조 대대로 오랜기간 서로마 제국의 포에데라티[18]로 활동했던 경험 덕에 로마식의 선진적 군사 전략, 전술을 능히 활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프랑크 보병들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일명 프란시스카라는 투척 도끼인데 다른 게르만계 민족들도 투척 도끼는 다 사용했지만 프랑크인들의 인지도가 너무 높아져서 투척 도끼하면 프랑크인이라는 식으로 이미지가 굳어진 감이 있다. 유목민족인 훈족이 프랑크인들과 대결할 때에 훈족 기병들은 프랑크인들이 던져대는 프란시스카에 꽤 깊은 감명을 받았던지 이와 관련된 기록도 남아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뛰어난 기마술로 유명한 세력들인, 훈족과의 대결[19], 아바르와의 전쟁, 우마이야 칼리파조 아랍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 영향을 받은 프랑크인들의 기병 전술이 급격히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며 또한 사방 국경이 트여있는 국토 특성 상 주력군의 빠른 기동으로 적들을 섬멸할 필요가 있던 프랑크인들은 애초에 기병을 높게 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고대 말-중세 초의 유럽 전역으로 퍼져 토착 국가들을 세우던 게르만계 이주 민족들의 게르만계 지배층 질서에서 기인하는 봉건적 분봉 체계를 고려하면 봉건제에 기반한 군인-세습 토지 소유주 구조가 형성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으며 이는 곧 중세를 주름잡는 기사의 개념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프랑크는 말하자면 그러한 중세 기사라는 개념 및 그 기사 전략/전술의 선구적인 세력이자 국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위치였다.

통합된 하나의 세력이 아닌 이합집산의 부족들이었던 골족들의 각 부족들과 관련된 전적은 개별적으로는 다루지 않고 유일하게 프랑스 전역의 골족들을 통합된 세력 비스무리한 형태를 임시적으로나마 만든 베르킨게토릭스의 골족 연합 케이스를 포함하여 이후 프랑크의 형성 시점을 중점으로 고대 프랑스군의 대표적인 전쟁 전적[20]들을 다루자면 다음과 같다. 세부적인 전투들은 다루지 않으며 전쟁만을 거론한다.

베르킨게토릭스의 골족 연합과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원정군 간의 전쟁 : 골족 연합의 패배. 로마 원정군의 승리. 갈리아 전역이 이후 로마화하면서 훗날 생겨날 프랑스 민족의 라틴계로써의 정체성 배경으로 이어졌다.

클로비스의 프랑크족과 시아그리우스의 수아송 왕국 간의 전쟁 : 프랑크족의 승리. 수아송 왕국의 멸망. 프랑크인들이 북프랑스를 장악하고 정착하였다.

클로비스의 프랑크 왕국과 비시고트(서고트) 왕국 간의 전쟁 : 프랑크 왕국의 승리. 남프랑스 영역 상당부분과 정세 주도권을 프랑크인들이 가지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 원정군과 동로마 제국 간의 전쟁 : 오스트로고트(동고트) 왕국 잔당을 지원하러간 프랑크 원정군의 패배.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였다.

프랑크 왕국과 프리지아 왕국 간의 전쟁 : 프랑크 왕국의 승리. 프리지아 왕국[21]이 멸망하고 저지대 지역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과 알레마니 제세력 간의 전쟁 : 프랑크 왕국의 승리. 알레마니계 제세력의 영역이던 오늘날의 남서부 독일 지역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22]

프랑크 왕국과 우마이야 칼리파조 아랍 이슬람 제국 간의 전쟁 : 프랑크 왕국의 승리. 아랍 이슬람의 유럽으로의 팽창을 피레네 산맥 선으로 한정시켰다.

2. 중세

우리는 보병이 필요 없다. 우리는 충분한 기사들이 있다.
필리프 6세가 제노바인들을 학살하며 한 말 (익명의 로마인 연대기)[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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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링거 왕조를 창건한 피핀의 뒤를 이어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공통된 역사적 위인으로도 대우받는다.[24]

다만 이탈리아인의 경우에는 프랑크인 지배층과 이탈리아인, 랑고바르드인 피지배층의 혼혈이 딱히 광범위하게 일어나지 않았고, 프랑크인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조상의 일부라기보다는 그저 '이탈리아 반도를 스쳐지나간 한 때의 정복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며, 그보다 이전의 고대 로마에 대한 동경의 정서가 압도적이기에, 딱히 프랑크나 카롤루스 마그누스를 자국의 대단한 위인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예 카롤루스를 자국 위인이 아니라 외국인 침략자로 보는 정서가 더 강할 정도이다.

독일인의 경우 이탈리아인에 비해서는 카롤루스와 프랑크인을 역사적 위인이자 자국 민족을 구성하게한 선조 종족 중 하나로 확실히 간주하기는 하지만, 바로 그 카롤루스와 프랑크 왕국이 잔혹한 정복전쟁을 펼친 장소 및 대상 중 하나가 다름이 아니라 오늘날의 독일이자 그 땅에 살던 토착 게르만족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처럼 마냥 카롤루스를 위인이라고 숭앙하지는 않는다. 카롤루스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아헨 지역에서야 카롤루스를 크게 기리지만, 그 외의 독일 지역에서 카롤루스는 자국 위인이기는하나 동시에 '독일계 선조 민족들을 잔혹하게 도살한 외국인 정복자'로써의 이미지도 분명하게 잔재해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중심부가 오늘날의 프랑스 땅이라는 점, 뒤를 이은 카롤링거 왕조 역시 프랑스 땅을 기점으로 외부 팽창을 행하였다는 점, '프랑크' '제국'의 정통성 중 '프랑크'의 정통성은 프랑스 왕국이 가장 강력하게 이었다는 것이 중세 시대에 이미 자타공인되어 있었다는 점 등등으로 인해 카롤루스를 자국 위인으로 칭송하는 것에 아무런 꺼리낌이 없는 편이다. 독일인들도 카롤루스를 자국 위인으로 기리기는 하지만, 굳이 어느 한 쪽의 역사에 더 가까운 위인이냐고 한다면 프랑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편. 여담으로 카롤루스가 건설한 프랑크 제국의 '프랑크'로써의 정통성은 프랑스가 가져갔지만 '제국'으로써의 정통성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형태로 독일이 가져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오늘날 유럽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있는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역사적인 정복자로서 중세 초에 신화적인 명성을 남기게 되었다. 즉위 직후, 왕국을 함께 분할하여 상속받은 동생 카를로만이 급사하자[25] 이후 왕국을 통합하게 된 카롤루스는 대다수가 고대 게르만 토착 신앙[26]을 믿는 게르마니아 지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독일 지역 사람들은 죽던지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후 오늘날의 독일 땅 전역에 전방위적인 원정을 펼쳤는데, 이 전쟁은 수십년의 세월 동안 장기간 이어졌고 통칭 '작센 전쟁'으로 불린다. 주요 전장이 가장 거세게 항거한 작센인과 그들의 터전인 북독일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카롤루스 마그누스 항목을 참조하자.

기독교 개종을 거부하며 항거하는 게르마니아 토착민들을 상대로 작센 전쟁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와중에도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석권할 것 같은 맹위의 기세를 떨치는 후우마이야 왕조를 공격하여 일시적이나마 바르셀로나 방면을 석권하였으며 데시데리우스 왕의 치세 하에 이탈리아를 거의 통일했던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하여 여러 전투들에서 대승을 거두고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켰다. 또한 오늘날의 헝가리의 영토에 해당하는 판노니아 평야에 자리를 잡고 있던 아바르를 공격하여 정복함으로써 사실상 아바르인들이 재기불능으로 멸망되게끔 만들었다.[27] 수십년의 세월에 걸쳐 마침내 게르마니아 전체를 정복하게된 카롤루스는 더욱 더 동진하였는데, 여기서 덴마크의 기원인 데인족과 국지적인 소규모 접전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또한 훗날 폴란드 왕국을 건설할 서슬라브계 민족인 폴스카인들의 기독교 개종에도 카롤루스와 프랑크의 동진이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또한 동남방으로 원정을 가면서 크로아티아인의 기독교 개종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카롤루스가 살아 생전 실패한 원정은 후우마이야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에서 후우마이야 군대에게 역으로 몰려 철수하게 된 경우와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킨 이후 남부 이탈리아까지 장악하고자 남진하였으나 동로마 제국 및 동로마와 결탁한 랑고바르드계 제후들의 연합 방어에 가로막힌 경우,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서북부 발칸 반도로의 진입에서 마찬가지로 이를 저지하고자한 동로마 제국과의 국지적인 접전이 벌어져 결국 소득을 보지 못하고 물러난 경우뿐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도 뚜렷하게 주력군을 잃는 대패 같은 것은 겪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카롤루스가 오늘날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들 중에서도 탑 클래스의 명장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여기까지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카롤루스가 이룩한 최대 강역은 오늘날의 프랑스에서 독일, 북부 이탈리아, 카탈루냐 일부,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일부, 헝가리 방면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카롤루스는 자신이 정복한 이 광대한 영토를 막내아들이자 어쩌다보니 아들들 중 유일하게 생존하면서 적장자가 되어버린 루도비쿠스 1세[28]에게 장자 상속을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운 좋게 장자상속을 시킬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게르만계 민족들 특유의 분할상속제는 관습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당연한 방식'으로 각인되어 있었고, 또한 대다수가 이것이 '정당하다'고 여겼으므로, 고작 카롤루스-루도비쿠스 2대 만에 제국 전역에 장자상속제를 관철시킬 수는 없었다. 이전의 왕조인 메로빙거 왕조가 몇 대에 걸쳐서 프랑스 지역에서 장자상속제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만 보더라도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여러가지 내우외환이 겹치면서 프랑크 제국은 루도비쿠스 1세 사후 그의 아들 4명의 손에 의해 분할 상속되었다. 이 때 프랑크 제국은 오늘날의 네덜란드, 라인란트, 부르고뉴, 프로방스, 북부 이탈리아 반도를 관할하는 중프랑크 / 오늘날의 남부 프랑스에 해당하는 아키텐 / 오늘날의 북부 프랑스에 해당하는 서프랑크 / 오늘날의 독일에 해당하는 동프랑크로 분할되었다.[29]

이 시점부터는 서프랑크(= 프랑스)의 시점으로만 서술한다.

이후의 분할된 프랑크 왕국들은 서로 장기간의 군사적 쟁패극을 벌였지만 다시 통합되지는 못하였다. 중프랑크 왕국은 아예 완전히 붕괴하였고,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카롤링거 왕가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며 왕조가 교체되었다.[30] 서프랑크는 가장 오랜기간 카롤루스의 직계 혈통이 왕실로써 유지되다가 무위왕 루이 5세가 987년에 후계자가 없이 급사하였고 모계로 카롤링거 가문과 연관된 위그 카페가 왕좌를 차지하면서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명문가 계열로 여겨지는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카롤링거의 직계 혈통이 남아있었다는 점은, 프랑스가 자신들이 프랑크 제국의 적통임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유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의 과정 동안 프랑크의 중기병 중심 기사 전술은 서유럽-중부 유럽을 관통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프랑크(=프랑스)건 동프랑크(=독일)건 북부 이탈리아건 간에 기사 돌격은 가장 중요한 전술로 여겨지고 있었고 또한 게르만계 민족들이 유럽 사방에 퍼져 토착민들과 섞이며 초기 중세 국가를 건설하며 구축한 유럽 봉건제 체제에서 기본적으로 세습 지주, 영주들은 지역 행정 관료이면서 동시에 군인 장교이기도 하였고 바로 이러한 지주, 영주 기사들을 주축으로, 그리고 비록 토지를 보유하진 않았지만 이런저런 연유로 무구를 갖추고 기사로써 복무할 수 있게 되어 다른 부유한 왕, 영주, 지주 휘하에 종군하며 먹고 사는 기사들을 중심으로 병력 구조가 구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하였다.

브르타뉴 반도의 브르타뉴인들은 브리튼 제도 켈트 계열의 토착 민족으로 카롤링거 왕조 서프랑크 치세에 프랑크인들에게 어느 정도 복속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오랜기간 반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브르타뉴인들 역시 서프랑크를 통해 기사 전술이 유입되면서 매우 강력한 기사들로 저명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한편 스칸디나비아에서 살아가던 북게르만계 민족인 노르드인들[31]은 대략 9세기 경에 유럽 전역으로 약탈선과 전사들을 보내 약탈 전쟁을 벌이곤 했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이킹이 바로 그러한 자들로[32] 이러한 노르드 바이킹들 중 일부가 서프랑크의 북부 해안을 반복적으로 침탈하고 숫제 대도시인 파리까지 공격하는 등 대담한 약탈전을 펼치자, 카롤링거 가문의 사람들은 이이제이의 차원에서 이 노르드 바이킹들 중 일부를 아예 서프랑크 북부 해안지대에 정착시키고 봉토를 주어 신하로 삼았고, 이러한 노르드인들이 프랑크 문화에 동화되면서 노르만족이 되었다.[33] 노르만인들의 조상 혈통은 노르드이지만, 이미 피지배층 갈로-로만인들과 융합되며 라틴화 되어가고있던 서프랑크인들을 따라 자신들도 점차 라틴화하며 서프랑크어(프로토-프랑스어/프로토-오일어)를 따라 쓰게 되었으며, 서프랑크인들 및 바로 옆 동네의 브르타뉴인들로부터 프랑크식 기사 전술을 전수받아 종래의 보병 전사들인 바이킹 군사 문화에서 탈피하여 서유럽 기사 군사 문화를 갖추게 되었다.[34]

이러한 브르타뉴인들과 노르만인들은 서프랑크, 그리고 프랑스의 강력한 군사 재원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앙집권제가 아닌 초기적 봉건제의 특성 상 브르타뉴인들과 노르만인들은 서프랑크, 프랑스의 왕을 군주로 옹위하면서도 반쯤 독립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브르타뉴 통일을 꿈꾸던 야심가 코낭 드 렌의 독자적인 군사 작전들이나 노르만인들의 봉토인 노르망디 지역의 영주들 중 가장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인 윌리엄 1세의 독자적인 잉글랜드 정복 및 잉글랜드 왕위 계승, 로베르 기스카르의 독자적인 시칠리아 정복 및 시칠리아 왕위 구축은 초기 유럽 봉건제의 특성 상 왕가가 강력한 지방 봉신들을 통제하기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프랑스 뿐이 아니라 독일 지역에서도 별 반 차이는 없는 광경이었다. 단지 윌리엄이나 로베르 기스카르와 같은 임팩트 있는 장면이 없었을 뿐.

여하간 브르타뉴, 노르만, 프랑스의 기사들은 10~11세기 유럽 최강의 군사 집단으로 그 명성을 휘날렸는데 독일 지역의 기사들도 이에 못지 않는 강력한 면모를 동유럽 방면으로의 진출을 통해 보여주었지만 당대에 프랑스인 기사들이 독일인 기사들을 보고 "저 자들은 왜 저리 말들이 별로 없고 걸어다니는 치들이 많은가"라고 말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병 비율 자체가 프랑스 방면이 훨씬 높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프랑스 기사들의 강력함은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사실상 유일하게 성공적인 십자군 전쟁이었던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참전 제후들과 기사들의 대다수는 프랑스 내지 노르만 출신들이었고 소수만이 네덜란드, 독일 방면 출신이었다. 유명한 십자군 기사단들인 성전 기사단이나 구호 기사단의 초기 구성원 대다수도 프랑스인이었으며[35] 애초에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라틴 제국 등 십자군 활동을 통해 구성된 국가들의 주요 인물들 이름이 프랑스어 이름들이 다수인 것으로도 충분히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동로마인들이 괜히 서-중부 유럽 사람들을 싸잡아서 프랑크인이라고 칭한 게 아닌 셈.

그러나 그러한 프랑스 제후, 기사들의 영향력과 강력함과는 별개로 카롤링거 왕조가 서프랑크에서 끊어진 그 시점의 프랑스라는 국가체 자체는 그다지 강한 입지를 가지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름대로 오랜기간 왕좌를 점유하면서 제후들과 기사들을 강력히 휘두를 권위가 있었던 카롤링거 왕조는 루이 5세가 죽고 끊겨버렸고 모계 혈통으로 카롤링거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왕좌를 확보한 카페 왕조의 초기 권위와 실질적인 물리력은 상당히 약한 편이었다.

바로 그러한 약한 권위와 물리력이 봉건제의 문제점과 맛물리면서 위의 윌리엄이나 로베르 기스카르처럼 자신들의 주군인 프랑스 왕과는 별개로 행동하며 결국 독자적인 왕좌를 얻고 떨어져 나가버리는 이들이 나타나는 사태가 반복된 것이다. 그나마 로베르 기스카르는 딱히 프랑스 내에 가지고 있던 영지라도 거의 없었지 윌리엄은 프랑스 내에서도 손 꼽히게 넓은 봉토인 노르망디 공국을 든 채로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하고 잉글랜드 국왕이 되어 독립해버린 케이스라 노르망디라는 넓은 영토가 프랑스의 손아귀에서 순식간에 빠져나간 꼴이었다.

반면 독일 방면의 경우 프랑스 방면보다 카롤링거의 직계 혈통이 훨씬 일찍 끊긴데다 카페 가문과는 달리 독일의 왕가들은 툭하면 직계가 끊어져 선거로 새로 왕가를 선출하는 일이 잦아 분명 왕권이 미약해야 정상이었음에도 오토 대제라는 걸물이 등장하여 마자르족을 박살내고 이탈리아를 정복하며 교황을 압박해 황제의 제위를 확보하여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신 체제를 세우면서 왕가가 선거를 통해 교체되더라도 기독교 세계 전체를 지도하는 신성 로마 황제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위성에 기반하여 강력한 황권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기에 독일 내 산하 제후들이 그런 식으로 막 나가는 것을 황제들이 지속적으로 어느 정도나마 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미약한 왕권 문제가 결정적으로 두드러진 시점이 프랑스 서북 지역인 앙주 지방의 제후이던 앙리 플랑타주네가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의 대가 끊기자 모계로 이를 계승하고 헨리 2세로써 잉글랜드의 왕좌에 앉으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출범한 시기로 노르망디에 더해 앙주까지 그런 식으로 잉글랜드 쪽으로 날아가버렸다. 거기에 더해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아키텐의 대영주인 엘레오노르 다키텐과의 파국적인 결혼생활 끝에 결국 혼인무효[36]를 하자, 헨리 2세는 이를 아키텐 상속권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자신보다 한참 연상인 엘레오노르와 재혼하면서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 등 아들들을 보게 되었고 이로인해 아키텐 상속권까지 잉글랜드, 즉 플랜테저넷 가문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잉글랜드 왕가인 플랜테저넷 가문이 프랑스 왕가인 카페 가문보다 프랑스 땅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루이 7세의 아들은 프랑스 역사상 열 손가락에 꼽힐만한 명군인 '존엄왕' 필리프 2세였고, 그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의 물 밑 암투와 파비우스 전략을 성공시키며 지연전을 벌이다가 리처드가 죽자마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리처드의 뒤를 이은 존 왕을 문자 그대로 탈탈 털어버리며 아키텐과 노르망디 일부를 제외한 국토 전역을 거의 모조리 수복해버리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다.

필리프 2세는 권모술수의 달인으로 산하 제후들을 손쉽게 가지고 놀며 왕권과 직할지를 크게 확대하여 카페 왕조의 권력을 반석 위로 올려놓았으며 이를 기반으로 더욱 병력을 크게 확충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존은 복수를 위해 신성 로마 제국오토 4세,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낭 등과 결탁하여 연합군을 결성하고 프랑스를 침공했으나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은 부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군기를 빼앗아버리는 등의 치욕을 오토 4세에게 안겨주기에 이르렀다.[37]

이 필리프 2세의 치세에서부터 필리프 4세까지 이어지는 시기가 프랑스의 역사적 전성기 중 하나로 간주될 정도이고 그 시기의 프랑스군은 서유럽 최강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필리프 2세의 아들인 '사자왕' 루이 8세는 비록 왕좌에 앉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해버리기는 했지만 왕자 시절부터 부친을 대신하여 전장을 치구함으로써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는 왕좌에 앉은 뒤, 존 왕을 혐오하는 잉글랜드 제후들의 초청을 받아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숫제 잉글랜드를 침공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에는 당대 유럽 최고의 명장이라는 평가[38]를 받던 윌리엄 마셜이 있었고 그는 플랜테저넷 충성파 제후들을 결집시켜 루이 8세의 원정을 좌절시켰다. 다만 그 마셜조차 루이 8세와의 정면 대결은 자살 행위라고 판단하고 절대 루이 8세가 이끄는 프랑스군 본대와 결전하지 않았으며 루이 8세가 이끄는 본대를 파비우스식 지연전으로 몰아가 결전을 회피, 마셜 자신의 주력군은 반플랜테저넷 제후들만 집중적으로 타격하고 각개격파하면서 루이 8세 본인이 잉글랜드 사방에서 승승장구하고 런던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철수할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루이 8세의 원정은 실패했지만, 그는 프랑스군 본대를 직접 이끌면서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전하지 않은 군주였기에 '사자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루이 8세가 얼마 안 가 요절하면서 뒤를 이은 '성왕' 루이 9세는 다방면으로 유능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군재는 부친과는 달리 그리 별 볼일이 없었기에 깊은 신앙심으로 7차 십자군을 주도했지만 오히려 패하고 자신이 사로잡히는 등의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뛰어난 내정 능력과 정치력으로 중세 프랑스의 전성기를 유지시켰다.

루이 9세의 손자인 필리프 4세 때에는 플란데런 백국, 잉글랜드 왕국과 대립하였는데 당시의 플란데런 백국은 오늘날의 벨기에 절반, 네덜란드의 절반, 프랑스 동북부 상당부분을 장악한, 절대 만만한 세력이 아닌 강국이었다. 필리프 4세는 잉글랜드 왕국령 가스코뉴를 점령하고자 전쟁을 벌여 비록 전투에서 연승하고 기옌을 정복했지만 가스코뉴 전역에서 반란 봉기가 일어나자 점령 비용이 세금 수익보다 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판국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정복한 가스코뉴를 잉글랜드에 반납하였으나 반면 플란데런을 상대로는 큰 소득을 얻었다.

코르트리크에서 일어난 골든스퍼스 전투에서는 패하였지만, 뒤이은 몽셍페벨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플란데런에게서 영토를 뜯고 굴복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란데런은 한동안 프랑스의 속국 노릇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 국내에서 고리대금업(..)으로 악명이 높던 성전 기사단에게 여러가지 죄를 덮어 씌워 성전 기사단을 해체시키고 주요 인원들을 모조리 숙청 처형해버렸는데 결과적으로 이 역시 프랑스의 국고에 도움이 되었다. 성전 기사단은 하라는 성전은 안하고 고리대금업으로 엄청난 돈을 빨아들이고 있었는데 그걸 몽땅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

또한 필리프 4세는 마침내 아비뇽 유수까지 일으키며 마침내 프랑스 국왕의 왕권이 중세를 주름잡던 교황의 교황권을 추월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보를 벌이며 교황청을 꼭두각시로 부리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프랑스는 가톨릭권 유럽의 명목 상의 최고 군주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을 빛 좋은 개살구를 쥔 자들로 치부하며 실질적인 가톨릭권 유럽의 1인자처럼 군림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렇게 찬란히 빛나던 카페 왕조의 최대 전성기는 필리프 4세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뒤이은 카페 왕조 국왕들의 연이은 요절과 함께 종식되었다.

샤를 4세의 요절로 인해 카페의 부계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버리고 게르만계 민족들의 관습 전통으로써 모계 계승을 엄금하는 살리카 법으로 인해 모계 상속이 불가능해지자 카페 가문의 분가인 발루아 가문의 수장 필리프 6세가 가장 가까운 친척 가문의 당주로써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발루아 왕조가 카페 왕조를 대신하여 프랑스의 새로운 왕조가 되었으며 이것이 발루아 왕조이다.

사실 말이 분가이지, 필리프 6세는 필리프 4세의 조카로써 샤를 4세와도 촌수가 그리 멀지 않았으며, 이 정도 거리면 동아시아 가문 개념 기준으로는 분가할 것도 없고 그냥 한 가문 수준이다. 그러나 특유의 봉건 분할 상속의 전통 때문에 유럽에서는 오랜기간 최상위 작위를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은 형제와 차상위 작위를 상속받은 자신의 위치의 분리성을 표현하기 위해 가문명을 바꾸고 분가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는데, 프랑스만 그런 게 아니라 유럽 전체가 다 그런 식이었다. 이를 Cadet Branch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관습 전통화되어, 유럽 각 국가들이 봉건제를 종식시키고 중앙집권제 체제로 넘어간 뒤에도 유지되었다. 당연하지만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 모두 말이 분가이지 카페 가문과 사실상 한 가문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라, 그냥 공식적으로도 자신들을 카페 가문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애초에 "카페 가문의 혈통이 아니면 프랑스 왕위를 가질 수도 없다"는 개념은 불문율 비슷하게 프랑스 혁명 전까지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루아 왕조의 시작과 함께 프랑스는 내외적으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가인 플랜테저넷 가문은 카페 가문과 인척 관계였으므로, 모계 혈통의 권한으로 끊어진 카페 왕조 직계를 이어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위치였다. 이를 이용해 플랜테저넷 가문의 에드워드 3세는 발루아 왕조의 필리프 6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에 딴지를 걸고 자신이 진짜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발발한 전쟁이 백년전쟁이다. 백년전쟁은 민중과 귀족들이 분리되어 따로이 움직이는 전형적인 귀족들 간의 왕위 계승 전쟁으로써의 성격도 없진 않았지만, 이미 플랜테저넷 가문이 프랑스 귀족 가문으로써의 성격을 거의 버리고 진짜로 '잉글랜드인 가문'이 된 상태에 있었으므로, 플랜테저넷의 이러한 요구는 외세 침략의 성격을 함유하게 되었고, 따라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과 같은 개념도 분명하게 내재한 전쟁이었다.

전형적인 귀족들 간의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성격은 프랑스 귀족 제후들이 발루아 왕조에게 절대 충성하질 않고 플랜테저넷 가문의 명분에 긍정하며 플랜테저넷 가문을 따라 잉글랜드에 붙어버린 케이스들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으며 반대로 국가와 국가 사이의 대결이라는 개념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은 전쟁 막바지 프랑스 평민들이 발루아 왕조에 총체적인 지지를 보내며 그 평민의 대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던 잔다르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내고 있다.

어쨌건 이런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발루아 왕조의 권위는, 본디 신생(?) 왕조가 다 그렇듯이 이전의 왕조인 카페 가문의 그것에 비하면 매우 미약한 것이었다. 반면 플랜태저넷 가문은 오랜기간 잉글랜드를 지배하면서 강력한 권위를 축적한 가문이었으므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력 격차에도 불구하고 플랜테저넷 가문이 충분히 해볼만한 전쟁인 것도 사실이었다. 즉 프랑스의 국력이 100이라고 해서, 발루아가 그 100을 전부 쓸 수 있는 구조가 전혀 아니었다는 의미.

자세한 항목은 백년전쟁을 참조할 것. 하지만 한국 대중사관에서의 백년전쟁을 비롯한 중세 유럽에 대한 이해도의 상당한 부족과 고전적인 영국 중심의 전사(戰史) 기록에만 거의 의거해서 알려진 단편적인 기록들 때문에 위키 내의 백년전쟁 및 유명한 전투들의 항목도 누락된 정보들이 많거나 이미 폐기된 오래된 학설이거나 다소 편향된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백년전쟁이라는 거대하고도 장기간 이어진 전쟁에 관해서는 사실 제대로 된 역사서를 구매해서 읽어보는 것을 권장한다.[39]

여하간 간단히 말하자면 백년전쟁은 위태롭기 짝이 없던 '발루아 왕조의 위기 극복기'에 가깝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왕위를 확보한 필리프 6세는 나무위키에서의 그를 평가하는 간략한 항목과는 달리 학계에서 연구한 그의 생애를 미루어보아 권모술수에도 꽤나 능했고 군사작전과 전략, 전술적 안목도 나름대로 평균 이상은 가던 인물이었으며 그가 크레시 전투에서 생각없이 돌격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말뚝과 수레진을 치고 우주방어를 하는 병력을 어떻게 상대하는지에 관해 1328년의 플란데런과의 전쟁에서 잘 선보인 바가 있었다. 쇠뇌수들과 궁수들을 보내어 수레진 안에 우세한 화력을 투사하고 적들이 견디지 못하고 이를 요격하러 나오면 매복시킨 기사들을 즉각 돌격시켜 모조리 쓸어버리는 식이었고 이는 매우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플란데런군을 그렇게 궤멸시켰던 사례와는 달리 크레시 전투에서는 고용한 제노바 공화국의 쇠뇌수 용병들이 파비스 방패를 지참하지 않은 상태로 참전했다는 것이 기록에 기재되어있으며[40] 그 결과 그들은 여지없이 잉글랜드 장궁수들에게 박살났고 그렇게 도망치는 제노바 병사들을 보고 필리프 6세와 프랑스 병사들은 제노바 용병들이 대금만 꿀꺽한 뒤에 배신했다고 착각하고 그들을 공격하게 되면서 이를 기회로 삼은 잉글랜드군의 공격에 완파당한 것이다.

사실 필리프 6세는 혼란한 정국 속에서도 그럭저럭 나름대로 공격 주도권을 가져오는 등 대국적인 전략안에서 그렇게 무능하진 않다는 점을 입증했으며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령 아키텐으로의 프랑스군의 침입을 막는 것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필리프 6세는 크레시에서 승리했다면 전쟁을 유리한 협정으로 이르게 끝냈을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그렇게 대패하면서 이 전쟁은 백년짜리 전쟁이 되어버렸다. 필리프 6세 본인도 곧바로 한국에서 무능과 졸장의 상징처럼 이미지가 전락하기도 하였고.

그러나 필리프 6세가 진짜 무능했다면 플랜태저넷 가문이 발루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한 프랑스 정국을 찌르기 훨씬 수월했을 것이고 백년전쟁은 플랜태저넷 가문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여하간 필리프 6세는 속전속결을 원했지만 크레시 전투에서 패하면서 상황이 현상 유지 및 악화로 이어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의 패배가 프랑스의 전쟁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후 그 유명한 흑태자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군대를 이끌면서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군은 나락에 빠졌다. 흑태자는 각지에서 프랑스군을 연파하였고 프랑스군이 패할 수록 발루아 왕조의 위신은 추락할 수 밖에 없으므로 프랑스 내 제후들이 발루아에게 등을 돌려 플랜태저넷에게 붙을 여지도 그만큼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위기 상황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필리프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장 2세가 흑태자에게 패하고 사로잡히는 대패를 겪으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장 2세가 포로가 되자 그의 아들인 샤를 5세가 프랑스 왕위를 이었는데 그는 매우 유능한 군주였기에 전세를 호전시킬 수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손 꼽히는 명장 중 한 명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바로 이 시기의 사람이기도 하였다. 샤를 5세는 동요를 일으키는 귀족들을 안정화시키고 내부를 결속시키며 정국을 잘 다스려 병력을 재구성했으며 미천한 출신인 베르트랑에게 군권을 맡기는 파격적인 인사를 선보였고 또한 프랑스 왕국의 군제 개혁을 지속시켰다. 베르트랑은 렌, 디낭 전투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코크렐 전투에서 적게는 2배, 많게는 4배 가까이 수가 많던 잉글랜드군[41]을 박살내며 전세를 호전시켰고 이후로도 병력을 이끌고 흑태자와 국지적 공방전을 주고 받았다.

당대의 명장들인 흑태자와 게클랭의 국지 공방전에서 전투 자체는 흑태자가 대체로 승리했지만 게클랭은 병력 손실을 크게 일으키지 않으며 파상적으로 기동 공세를 펼쳤기에 흑태자가 아무리 승리를 거두어도 전황이 잉글랜드 쪽으로 확 유리해지기 어려웠고, 잉글랜드군은 흑태자의 군사활동으로 인한 군사 비용 지출이 너무 심각해져 추가적인 지원을 하기도 어려웠으며 그 와중에 흑태자가 과로(추정) 및 질병으로 급사하면서 곧 전세는 프랑스 쪽으로 완전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퐁발랭 전투, 시세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가문과 맺은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이후로 138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였다. 잉글랜드 측은 이 패전 상황 이후로 1380년에서 1413년의 기간 동안 프랑스 방면에의 영토가 백년전쟁을 일으키기 전 시점과 별 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점령지를 잃게 되어 보르도 인근과 바욘 인근, 노르망디의 절반 가량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잉글랜드 본토까지 샤를 5세가 파견하는 해군의 공격을 받는 입장이었다. 만약 게클랭이나 샤를 5세가 10년 정도만 더 살았으면 백년전쟁은 그냥 60년이나 70년 전쟁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에게는 천운이 함께 하였는지 게클랭은 1380년 어느 성채의 적 잔당을 소탕하는 가벼운 싸움에서 불운히 전사하였고 동년 샤를 5세도 급사하였다. 그리고 샤를 5세의 뒤를 이은 샤를 6세정신병 환자였으므로 정무 집행이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프랑스는 정무를 돌볼 수 없는 샤를 6세의 상태가 결정적인 방아쇠가 되어 귀족들간의 내전이 발발하였고, 이것이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이다. 프랑스 전국의 귀족들이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로 갈려 싸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 잉글랜드에는 플랜테저넷 가문의 분가인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5세라는 유능하고 걸출한 인물이 왕위에 즉위하여 이걸 절호의 찬스로 살릴 수 있었다. 랭커스터 왕조의 두번째 군주인 그는 프랑스 귀족 내전에서 점차 밀리고 있던 부르고뉴파에게 동맹을 제의하였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하는 심정이던 부르고뉴파 귀족들이 헨리 5세의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잉글랜드는 프랑스로의 교두보를 다시 확보할 수 있게된 것이다.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곧바로 프랑스로 상륙해 삽시간에 북부 프랑스를 장악했으며 이에 아르마냑파 프랑스 귀족 제후들이 연합하여 샤를 1세 달브레를 사령관으로 삼아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에게 덤볐지만 그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냑파 제후 연합군은 잉글랜드군에게 문자 그대로 완파를 당하고 만다.

흔히들 '프랑스인들이 무식해서 닥돌만 하다가 참패했다.'라는 식으로 대중사관에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럴만한 이유도 있는 패전이기도 했다. 수적으로야 아르마냑파 제후 연합군이 압도 우위였지만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귀족 제후군의 연합체이지 왕의 명령을 받아 싸우는 일사불란한 형태의 국가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략, 전술도 지도부의 체계적인 지침으로 명령이 하달되어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그냥 귀족 제후들이 협의해서 덤벼드는 식이었으므로 그 방식도 매우 단순무식한 돌격전이 될 수 밖에 없었으며 상대는 전투에 통달한 인물이었던 헨리 5세였으니 도통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냑파 제후군이 완패하면서 발루아 왕조를 옹위하는 프랑스군 주력이 상실되었고 헨리 5세가 파리랭스까지 장악하면서 백년전쟁은 거의 패배 직전에 몰렸던 잉글랜드가 역으로 순식간에 승리 직전 상황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 프랑스 쪽에 천운이 기울었는지, 그 헨리 5세가 갑자기 급사해버린 것이다. 헨리 5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그는 정신병자인 샤를 6세의 딸과의 혼약을 통해 사위로써 더욱 강력한 명분을 쥐고 발루아 왕조를 압박하여 프랑스 왕위를 얻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헨리 5세가 급사하고 반면 프랑스 군주인 샤를 6세가 죽자 그 아들인 샤를 7세잔 다르크를 죽게 내버려둔 졸렬한 놈이라고 한국 인터넷에서 오지게 욕을 먹긴 하지만 나름대로 유능한 군주로써 금치산자이던 자신의 부친 때문에 벌어진 내부 분열 문제를 최대한 수습하고 전력을 재구성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샤를 7세의 시기는 샤를 5세가 갓 즉위하던 시절보다도 훨씬 처참한 상태였다. 아쟁쿠르로 말아먹은 전력이 보통 전력도 아니었고 이를 빠르게 다시 충원하기는 어려웠으며 프랑스 왕위 계승 대관식은 전통적으로 랭스 대성당에서 수행해야 하는데, 랭스가 잉글랜드의 수중에 있으니 대관식을 치룰 수가 없어서 샤를 7세는 정식 왕위 계승 행사를 할 수도 없어 명분 측면에서 취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존재가 잔 다르크이다. 자세한 항목은 잔 다르크 항목을 참조할 것.

학설에 따라서는 "잔 다르크의 등장은 헨리 5세가 초래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다. 헨리 5세는 이전의 잉글랜드군을 이끌던 에드워드 3세나 에드워드 흑태자 등과는 달리 프랑스로 재진공하면서 보급 문제가 심했고 따라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 이전의 잉글랜드군이 행하던 것보다 훨씬 가혹한 현지 징발 및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일들은 프랑스 백성들이 플랜테저넷 가문을 외세 침략자로 간주해버리는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평민 출신인 잔다르크의 등장은 바로 그러한 프랑스 민중들의 분노가 정치적으로 곧장 드러난 케이스가 아니냐는 것. 실제로 평민인 잔다르크가 굳이 "발루아가 무조건 프랑스의 정당한 왕조라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한 원인에는, 역으로 플랜테저넷 가문이 프랑스 현지 농민들의 민심을 그만큼 잃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역사적 해석인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잔다르크의 전략, 전술과 그녀의 존재로 인한 사기의 급속한 상승 및 플랜테저넷과 발루아 사이에서 간을 보던 아르튀르 드 리슈몽 같은 프랑스 제후들이 잔다르크를 따라 발루아 왕조를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 전세는 다시 프랑스와 발루아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잔다르크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파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오를레앙과 랭스를 수복하였으며 샤를 7세가 이 덕에 랭스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릴 수 있게 되면서 전세는 발루아 왕조 측으로 압도적으로 유리해지게 되었다.

이후 잔다르크가 파리 공성전에서 샤를 7세의 미비한 지원 및 여러가지 불운이 겹쳐 패하고 잉글랜드인, 부르고뉴파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종교재판을 당한 뒤 화형당하게 되었지만, 그녀 덕에 호전된 전세를 샤를 7세는 느긋하게 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사실 그 시점의 샤를 7세와 프랑스군은 그냥 속된 말로 어택땅만 찍어도 잉글랜드를 계속 밀어붙일 수 있는 입장이었다. 결국 1436년 리슈몽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마침내 파리를 탈환하였고 1449년에 이르면 프랑스군은 아예 병력을 서부방면군, 중부방면군, 동부방면군의 세갈래로 나누어도 각 방면에서 잉글랜드군을 밀어붙이며 잉글랜드령 프랑스 전역에 공세를 퍼부을 정도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쉘부르 전투, 루앙 공성전, 포미니 전투 등에서 이미 전황을 완전히 그르친 잉글랜드군은 엄청난 기세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계속해서 연패했고 장 뷔로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의 숙장인 존 탈보트가 이끄는 군대와 보르도에서 격돌하여 승리하면서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혼인 이래로 무려 200년 넘게 잉글랜드 플랜태저넷의 영토였던 아키텐과 가스코뉴가 송두리째 프랑스 발루아의 영토로 넘어가게 되었다. 1453년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잉글랜드의 프랑스 방면 영토는 칼레 딱 하나만 남고 모조리 상실되었다.[42] 백년전쟁의 전반적인 흐름 개요는 이와 같다.

백년전쟁의 패전으로 잉글랜드는 사실상 유럽 대륙과 관련된 영토를 모조리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이후의 잉글랜드는 플랜태저넷 가문의 분가들인 요크 가문랭커스터 가문 중 누가 잉글랜드의 정당한 왕가인지를 두고 장미 전쟁이라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내전 이후로 영국인들은 더 이상 프랑스 방면에 대한 팽창의 의욕을 보이지 않았고 브리튼 제도 내의 지배권 확립 및 발전하는 항해 기술을 기반으로 더 먼 바다로 뻗어나가는 새로운 진출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오랜 숙적이었던 플랜태저넷-랭커스터와의 대결이 종료된 발루아 왕조는 샤를 7세의 최종적인 승리로 이후 왕권을 급속도로 강력하게 다지면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정으로 프랑스의 향후 방향을 이끌게 되었다. 백년전쟁 중반부의 샤를 5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시대에 이미 종래의 기사 전술과 고용한 용병들을 활용한 다양한 연합 전략, 전술이 개발, 고안 연구되었고 샤를 7세와 잔다르크의 시점에 이르면 프랑스군은 아예 대포를 전격적으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대포의 사거리를 이용해 기존에 진지를 짜고 니가와를 강요할 수 있었던 잉글랜드군[43]을 상대로 역으로 니가와를 강요하며 잉글랜드군이 진지를 버리고 벌판에 나오게 만들었으며 잉글랜드군이 진지와 지리의 이점을 포기하고 벌판에 나오는 시점부터는 유럽 최강의 기사 전력을 자랑하는 프랑스군의 쇼타임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대포의 강력한 성능에 반한 발루아 왕조는 대포를 무기고에 비축하는 것에 항상 깊은 신경을 쓰게 되었고 '대포로 니가와, 튀어나온 적을 기사로 쓸어버린다.'는 개념은 사실상 중세 전술의 완성형이나 다름없었다.[44]

샤를 7세의 아들인 루이 11세는 백년전쟁의 승리와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한 발루아 왕조의 권위를 아예 200년 전 거의 전제군주정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던 필리프 2세~필리프 4세 시기 카페 왕조의 권위와 같은 것으로 끌어올리고자 강력한 귀족 제압 정책,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쳤는데 당연히 이것은 발루아 왕조가 손에 쥔 프랑스 국가 단위의 군사력에 기반한 것이다. 루이 11세는 프랑스와 독일(신성로마) 양쪽으로부터 모두 독립될 부르고뉴 공국의 야망을 꿈꾸던 용담공 샤를이 스위스인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부르고뉴를 장악하고 프랑스 내의 힘 있는 제후들을 차근차근 무력화시키며 중앙 정부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증대시켰으며 루이 11세의 아들인 샤를 8세 치세에는 아예 직접 2만 5천~3만에 달하는 전력으로 외부 원정을 떠나는게 가능할 정도로 강성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샤를 8세는 이렇게 강력해진 프랑스의 힘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혼란한 틈을 타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고 이탈리아 지배를 통한 권위 확립 및 교황을 손아귀에 넣어 신성 로마 제국을 능가하는 가톨릭 유럽 세계에서의 최고위 위치를 노리게 되었다. 학설에 따라서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프랑스의 왕이지만 동시에 로마 황제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45]

이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장악하고 스페인 왕위까지 차지한 뒤, 이를 기반으로 이탈리아 장악을 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대립의 시작을 시사하지만 이것은 중세가 아닌 근세-근대 파트에서 다룬다.

중세 프랑스군의 전쟁 전적을 다루자면 다음과 같다. 세부적인 전투들은 다루지 않으며 전쟁만을 거론한다.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간의 전쟁 - 프랑크 왕국의 승리. 랑고바르드 왕국은 멸망하고 프랑크가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하였다. 남부 이탈리아의 잔존 랑고바르드인들은 시간이 지나 시칠리아인에 동화되었으며 프랑크에 굴복한 북부 랑고바르드인들은 시간이 지나 이탈리아인으로 변화하였다.

프랑크 왕국과 작센인들 간의 전쟁 - 프랑크 왕국의 승리. 독일 지역 전역이 프랑크 왕국령이 되었으며 독일 지역 사람들 전원이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다. 시간이 지나 소수의 프랑크인 지배층과 다수의 게르만계 토착민 피지배층들, 기타 슬라브계 민족들 등이 섞이면서 독일 민족 개념이 형성되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과 후우마이야 왕조 간의 전쟁 - 무승부. 국지적인 승리는 몇 차례 거두었으나 전쟁 승리를 이루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큰 이득을 얻을 수 없었다.

프랑크 왕국과 아바르 간의 전쟁 - 프랑크 왕국의 승리. 이로 말미암아 쇠퇴해가던 아바르인들은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멸족의 길을 걷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간의 전쟁 - 무승부. 하지만 침공하는 쪽이던 프랑크 쪽이 딱히 소득이 없었고 프랑크를 저지하려는 동로마의 의도가 적중하였으므로 동로마의 승리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 하다.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와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 간의 전쟁 - 서프랑크의 승리. 이 승리로 말미암아 프랑스, 아키텐은 물론 로타링기아 전역을 장악한 샤를 2세는 이탈리아까지 집어삼키고 카롤루스의 위업을 재현하는가 싶었지만 늑막염으로 급사하면서 이탈리아를 상실하였다.

서프랑크 왕국의 루이 3세와 노르드 바이킹 약탈자들 간의 전쟁 - 서프랑크의 승리. 그러나 루이 3세가 급사해버리면서 장기 지속되지 못했다.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로망과 노르드 바이킹 약탈자들 간의 전쟁 - 서프랑크의 패배. 이후 바이킹들은 노르망디 지역을 들쑤셨는데 서프랑크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 중 일부를 노르망디에 정착시키고 봉신으로 삼았다. 이것이 노르만족의 기원이다.

1차 십자군의 프랑스-노르만 제후들과 아랍, 튀르크 무슬림 제후들 간의 전쟁 - 1차 십자군의 승리. 이후 예루살렘 왕국 등 중동 가톨릭 국가들이 세워졌다.

카페 왕조 프랑스와 노르만 왕조 잉글랜드 간의 전쟁(1109~1113) - 무승부.

2차 십자군의 프랑스, 신성로마 연합군과 아랍, 튀르크 무슬림 제후들 간의 전쟁 - 2차 십자군의 사실상의 패배.

3차 십자군의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로마 연합군과 아이유브 왕조 간의 전쟁 - 3차 십자군의 사실상의 패배. 프랑스군은 애초에 실질적인 참전 자체를 하지 않고 도중에 물러갔지만 어쨌건 3차 십자군을 진두지휘한 리처드의 잉글랜드군이 전략적 목적 달성에 실패했으므로 패배로 간주한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의 리처드 간의 전쟁 - 무승부. 필리프 2세는 의도적으로 결전을 회피하였고 리처드는 리모주 샬루-샤브롤 공방전에서 정찰 도중 화살에 맞아 죽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의 존 왕 간의 전쟁 - 프랑스의 승리. 잉글랜드령 프랑스의 대부분이 프랑스령으로 수복되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플랑드르, 불로뉴, 브라반트 연합군 간의 전쟁 - 프랑스의 승리. 카페 왕조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루이 8세와 잉글랜드 간의 잉글랜드 정복 전쟁 - 프랑스의 패배.

7차 십자군의 프랑스와 아이유브 왕조 간의 전쟁 - 7차 십자군과 프랑스군의 패배.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생통주 전쟁(1242~1243) - 프랑스의 승리.

8차 십자군의 프랑스, 시칠리아, 나바라 연합군과 하프스 왕조 간의 전쟁 - 무승부.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가스코뉴 전쟁(1294~1303) - 프랑스의 승리이나 전략적 목적 달성 실패.

프랑스와 플랑드르 간의 전쟁 - 프랑스의 승리.

백년전쟁 - 프랑스의 승리.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로렌, 브르타뉴, 알브레, 오랑주 연합군 간의 전쟁 - 프랑스의 승리.

3. 근세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군사강국으로 부상했다. 전쟁 중의 경험과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와 경제력, 강한 왕권[46]을 바탕으로 한 상비군으로 자연스레 대외 팽창 정책을 본격화하여 15세기말 샤를 8세 시기 이탈리아 원정에서 초반에 선전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후 프랑수아 1세 때 결국 그 유명한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의 정예군에 제대로 궤멸당해 왕이 포로로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다. 그리고 이후 스페인테르시오가 유럽 최강의 지위를 차지하고 프랑스군은 군사 강국임에도 유럽에서 패권국의 위치로는 아직 떠오르지 못했다. 기병 대국답게 16세기에도 기병+포병의 체제를 고수했으나, 아무리 유럽 제일의 기병을 갖고 있어도 파이크 때문에 돌격을 하지 못하니 하고는 게임이 안 됐다.

이후에도 프랑스는 17세기 직전까지 위그노 전쟁으로 한동안 자기들끼리 투닥대며 구석에서 버로우하다 안정을 되찾고 루이 13세의 치세 때에 발발한 30년 전쟁을 기회로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했다.[47] 다만, 군사학자 John lynn에 따르면 30년 전쟁 시기에 프랑스의 보병은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은 반면, 기병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루이 14세 때에는 사실상 서유럽 내 가장 강력한 군대로 떠올랐다. 30년 전쟁 동안 네덜란드의 마우리츠가 개혁한 방식인 머스킷 총병 중심의 선형진이 스페인의 테르치오를 압도하고 유럽 군대의 표준이 되었고, 프랑스도 이러한 기류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기 때문.
더군다나 이처럼 유럽의 군사 체제가 표준화된 상황에서는 인구나 경제력, 즉 물량빨에서 가장 강한 프랑스가 우세를 확립할 수 있었다. 루이 14세 때 상비군이 40만[48]이었다. 루이 14세의 군대는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 전 유럽의 군대를 상대로 혼자 싸웠지만, 유럽 전체를 합친 병력보다 프랑스 병력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물론 이게 가능했던 건 17세기 루이 14세 때 이미 프랑스 인구가 2,000만을 넘기고, 훗날 18세기 말에 이르면 3천만에 달할 정도로 영국의 4~5배,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거의 3배[49]에 달하는 인구수에 넓은 농경지를 바탕으로 한 본토 경제력 때문이다.[50] 말 그대로 주변국들에게는 냉전 당시의 소련군과도 같았으리라....

이에 반해 동시기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면

1. 바다 건너 잉글랜드 왕국-영국은 겨우 겨우 1천만을 목전에 두고 있었거나 넘겼었는데, 이쪽은 섬나라에다가 인구가 적고, 가장 가까운 지역이 프랑스여서 유럽 본토 진출이 힘들다는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팽창정책도 유럽 본토는 진출보다 힘의 균형 유지에 맞추는 대신 해외 식민지 확장에 집중했고, 군사 정책도 해군을 최우선으로 육성하는 대신, 육군은 해군이 육지로 투사하는 포탄 같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실탄 사격 등의 고강도 훈련을 시키고 빨간 군복을 채용[51]하는 등 철저히 소수 정예로 키웠다.

2.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52]는 전체 영토나 인구, 경제력을 보면 프랑스와 그럭저럭 비등비등했지만 이 가문이 거느린 각각의 세습령이 처한 현실 때문에 모든 영지 중에서 최후의 한 방울까지 역량을 쥐어짜낼 수 있는 영토는 고작해야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할령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뿐이었다. 심지어 그 오스트리아 대공국조차도 단일 통치령이었던 게 아니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괴르츠 후백국, 티롤 후백국 등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 작위를 겸하는 방식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거느린 주요 세습령은 자신들의 본토이자 직할령인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북부의 보헤미아 왕국, 오스만 제국 쪽 국경 수비에 집중해야 했던 동부와 남부의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이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헝가리는 직할령인 오스트리아를 상회하는 인구를 갖고 있었지만, 토착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황실을 고깝게 여겨왔고[53], 북부의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상의 경제력을 갖고 있었으며, 30년 전쟁으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급부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구성국 가운데 하나였으나 동군연합으로 이루어진 합스부르크 제국의 특성과 귀족들이 장악한 의회의 영향력이 강하다보니 왕권이 약해 제대로 군권을 행사하기 어려웠으며, 18세기 까지는 반골기질이 강했다.[54] 이러한 현실 때문에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방어전이 아닌 침공전에서는 총력전을 펼칠 수 없었다.

3. 스페인은 가격혁명과 상업혁명이라는 시대적 조류를 잘 넘지 못한 데다가 네덜란드영국에 제해권과 해양무역 패권을 차례대로 뺏기고, 1억 두카트[55](...)가 넘는 부채[56]에 짓눌렸으며[57] 많지도 않던 국내 인구가 아메리카로 유출[58]되는 등 내우외환으로 몰락을 거듭해 이류 열강으로 밀려난 지 오래. 군사적인 면에서도 그들이 무적이라고 자랑하던 테르시오도 화기와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머스킷-선형진 위주의 전술이 표준화되면서 구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루이 14세 때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부르봉 왕조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프랑스 2중대로 전락[59]했다.

4. 그나마 프로이센은 병력의 질에서 프랑스 왕국보다 나았는데, 안타깝게도 이쪽은 프랑스와 체급 격차가 너무 심했다. 당연히 당시 1천만은 커녕 5백만도 간신히 넘길까 말까한 인구[60]에 신성 로마 제국 내 일개 선제후[61]에서 칭호만 왕[62]으로 바꾼 프로이센군이 라이트급이었고 그 몇 배가 넘는 병력과 인구를 보유한 프랑스군이 헤비급이었다.

이렇듯 프랑스의 상황과 프랑스를 견제할 만한 나라들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잘 나가는 놈은 일단 두들겨 패고 본다."라는 유럽의 유구한 전통(...)을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연횡책 같은 외교적 수완으로 보완하고 군사적 행동과 병행했다면 유럽을 정복했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오히려,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라이벌격인 국가들 모두를 상대로 프랑스 혼자 본토와 식민지 양쪽에서 양면전쟁을 펼친 게 대단해 보이는 건 과장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이후 루이 14세 말기, 17세기 말 ~ 18세기 초부터 프랑스의 국력이 휘청이기 시작하는데, 대규모 상비군의 바탕이었던 프랑스의 경제력이 전쟁덕후 카를 5세의 후배격인루이 14세의 잦은, 그리고 실익이 떨어지는 전쟁 수행으로 국고가 바닥나면서 펠리페 2세스페인처럼 재정이 무너지기 시작[63]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루이 14세부터 시작된 개신교 탄압으로 프랑스 사회의 지식인, 상인, 기술자 계층이던 위그노들과 유대인들이 영국, 네덜란드, 독일로 모두 탈출하면서, 프랑스의 경제력과 기술력이 전반적으로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부잣집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프랑스는 본토 자체 생산력이 받쳐주는 유럽 최강국이었기 때문에 군사력에서도 오랜 전통과 뛰어난 장군들을 바탕으로 패권을 놓지 않았는데, 루이 14세 시대에는 네덜란드로 여러 번 레이드를 뛴 끝에 사실상 열강에서 탈락시키고[64] 스페인에게서 벨기에 일부를 빼앗았으며[65] 아메리카와 인도 식민지에서도 각각 퀘벡 지역과 콜카타 지역을 기반으로 식민지를 확장했다가 7년 전쟁 중에 영국에게 모조리 밀렸다.

하지만 마지막 전쟁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는 프랑스는 단독으로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 전체와 대등한 수준의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지만 영국의 존 처칠[66]사부아 공자 외젠[67]의 활약에 의해 한때 큰 위기에 몰렸다. 드냉 전투에서는 영국이 빠지자마자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는 등 건재함을 과시하였지만 전쟁에서 프랑스가 기사회생한 건 연합국측이 밀던 카를 6세의 형 요제프 1세가 갑자기 죽어서 계속 밀다간 카를 5세처럼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같이 먹을까봐 틀어진 것[68]이라 프랑스가 외교적 수세에서 벗어난 거지 프랑스의 군사적 승리로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69] 루이 14세 시절에 있던 다른 전쟁과 달리 전 유럽을 압도하지 못했고 오히려 밀리게 됐는데, 사부아 공자 외젠과 영국의 존 처칠에게 여러차례 패배하면서 루이 14세의 유럽 패권 장악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후 루이 15세 시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는 모리스 드 삭스(Maurice de Saxe)[70]라는 걸출한 군인이 활약하며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와 프로이센 편을 들면서 숙적 오스트리아를 터는 데 일조했고, 동맹의 역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총부리를 틀어 영국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 맞서 7년 전쟁에 뛰어들지만,역시 프랑스의 유럽 지배 야욕(?)을 분쇄하려는 영국, 영국의 유럽 본토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에게 패배했다. 7년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군이나 오스트리아 군대는 프로이센 군대를 연구해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몇 번 격파하기도 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한테 프랑스군은 그냥 승점 셔틀이 됐다. 한편, 영국은 7년 전쟁에서 식민지 전쟁에 집중해 프랑스와 지구 방방곡곡에서 치고박고 싸웠고, 유럽 지상전은 돈줄을 대면서[71] 잘 싸우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맡긴 반면, 프랑스는 이도저도 아닌 전략으로 힘이 분산되면서 식민지에서 분투한 병력들은 영국에서 충원되는 압도적인 적군 물량[72]에 밀리면서, 사실상 프랑스 식민제국들은 코딱지만큼 남기고 몰락했다.

유럽 지상전에서 졸전의 원인은 지휘관 인선이 퐁파두르 부인이랑 친하냐에 따라 결정되었었고, 로스바흐 전투의 참패 이후에도 지휘관[73]이 퐁파두르와 친해서 처벌은 흐지부지 넘어갔다.

프로이센은 총사령관이자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부터 독약이 든 로켓[74]을 들고 다니며 '이걸 오늘 먹어야 하나, 내일 먹어야 하나'할 정도로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75] 러시아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사망과 영국의 유럽 전선 재참전으로 인해 기사회생했지만, 프랑스는 이미 오래 전에 로스바흐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하여 전열에서 이탈해 있었다. 전쟁 말에 영국과 동군연합인 하노버에 찝적거리다가 영국, 하노버, 헤센-카셀, 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에 박살나면서 라인강 서쪽으로 철수했다.

이렇듯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많이 쳐주면 7년 전쟁까지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국력이 최강이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면에서 양과 질을 모두 갖춘 절대적인 육군 강대국이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제 이후 프로이센이 잠시나마 프랑스를 질적으로 추월했고,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7년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사이의 러시아 제국 또한 프랑스 못지않게 양과 질을 모두 갖춘 육군을 보유한 국가이기도 했다.(영국은 지리적, 정치적, 인구적 여건 상 해상력으로 특화됐지만, 육군은 전쟁의 역사의 저술자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성의 평가로는 존 처칠 이후 암흑기라고 본다. 특히 러시아 제국군은 18세기 후반쯤엔 오스만 제국에게서 캅카스크림 반도까지 빼앗았고 인구와 국력이 급신장했다. 이미 이 시기 프랑스의 인구를 훌쩍 뛰어 넘었다.) 한편, 루이 15세는 7년 전쟁 때의 프랑스 육군의 한심한 전투력에 충격을 받아 귀족들의 반발에도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전통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자녀들도 받아들이는데, 이 수혜자가 10여년 후 입학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연대장(대령)들의 추태와 머릿수 부풀리기 스킬로 군수품 떼먹기를 감시하기 위해 중령(Lieutenant-colonel)직위가 나오게 되는 것도 이 시대이다.

10여 년 후 프랑스군은 미국 독립 전쟁 덕분에 미국 본토에서 미국과 연합하여 대규모로 작전한 유일한 군대이다. 미국 독립은 프랑스가 완성시켰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프랑스군의 참전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현재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보면 참 역사의 아이러니. 놀랄 일은 아닌 게,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을 바랐다기보다는 눈엣가시인 라이벌 국가인 영국을 골탕먹이기 위해 미국을 지원한 것이었다. 이렇듯 서로 간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 지속적으로 바뀌는 게 국제정세이기 때문에, 오늘날 미국의 최우방국임에도 미국과 프랑스 사이가 딱히 원만하지 못하다.[76]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4. 대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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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세기

파일:attachment/Lignedefeu16August.jpg
이후 왕정 복고를 거쳐 나폴레옹 3세프랑스 제2제국 시기에는 다시 프랑스군의 위세를 떨치기 위한 전쟁을 추진했다.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프랑스 식민제국)에서 자주 밀렸지만[77] 또한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격파함으로써 프랑스군이 유럽내에서 아직은 강국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듯이 보였다. 크림 전쟁에서 오랜 원수지간 영국과 손잡고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단, 크림 전쟁은 전쟁사적으로 유례없는 한심한 일들의 향연으로 영국과 프랑스군 모두 지휘관들이 무능했는데[78], 연합군인 영국군 25만, 프랑스군 40만, 러시아군 70만이었는데, 실질적으로 승기는 전쟁 초기에 연합국이 잡았지만 영국 프랑스 지도부가 둘다 너무 무능해서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하고 돈잡아 먹고 시간잡아먹고 병력잡아먹는 요새 포위전에 투입하면서 전쟁이 길게 끌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국, 프랑스가 승리한것은 러시아 제국군은 더 사정이 안좋았기 때문이었다.[79] 그 외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해로를 통한 보급에 별 문제가 없었던 반면, 러시아군은 마차를 이용한 보급에서 한계[80]를 드러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라이플의 발전으로 화력이 강화된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폴레옹 시대처럼 종대로 돌격하는 한계를 노출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훈련이 부족하고 아직 라이플의 화력을 충분히 활용하는 법을 익히지 못해서 종대로 돌격한 프랑스군이 승리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의 '교훈'을 살려 화력에 의존하는 대신 종대로 돌격해서 백병전을 벌이도록 군대를 다시 훈련시키는 바람에 프로이센에 참패했다. 뒤이어 프랑스군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군에게 패배하면서, 위대한 군대의 후예의 유산은 화려한 군복과 철지난 명성임이 확인되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보다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자국 무기의 우수성을 너무 믿었는데, 헬무트 폰 몰트케가 나폴레옹처럼 교전 지역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소수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다녔다. 전쟁 기간 병력 손실은 프랑스군 38만, 프로이센 위주 독일군 11만이었다.[81]

이 결과에 대해서 나폴레옹 3세의 삽질, 혹은 단지 몰트케가 너무 뛰어났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를 개인적인 역량의 차이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프로이센은 참모본부를 구성해서 작전의 계획과 실행을 위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장교들을 통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 점만으로도 다른 나라의 군대에 비해 선진적이었지만, 이때까지는 전쟁을 지휘하는 것은 여전히 고전적인 장군들이었으며, 참모부는 단지 작전을 건의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통을 살려 국왕이 직접 전쟁을 지휘한다"는 명분하에 국왕이 자신을 '보좌'하는 참모본부에 힘을 실어주는 형식으로 사실상 참모본부가 전쟁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했다. 원수 진급도 국방부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보다 참모총장 몰트케가 빨랐을 정도. 육군 최고사령관은 명목상 국왕이었지만 참모총장이 군의 실질적 통수권자로, 총리나 민간정부 국방부에도 책임을 지지 않고 오로지 국왕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덕분에 참모총장인 몰트케는 민간정부와 국방부, 그리고 심지어 국왕에게조차 일일이 허가를 받지 않고 직접 군을 지휘할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82]

또한 프로이센 참모본부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지휘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기 이전에도 미래의 전쟁을 대비해서 사전에 작전을 세워두고 실행할 준비를 하는 역할 또한 수행했다. 이는 현대에는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놀라운 발상이었고,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떳떳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반면 프랑스군은 (다른 대부분의 국가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경험을 중시하고 지식과 지성을 사용하는 일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제2제정의 유명한 군인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Patrice de MacMahon)은 "책을 저술한 군인은 승진에서 제외시킨다"고 할 정도로, 제2제정의 장군들은 군사상을 무시하고 경험을 통해 배운 터프한 군인을 선호했다. 당연하게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전쟁을 지휘하거나 작전을 세우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프랑스군으로서는 불운하게도, 이 시대는 후장식 소총과 기관총이라는 새로은 무기체계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경험뿐만 아니라 지성도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즉 프랑스군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던 것이다. 예컨대 이 시대에는 프로이센 이외의 국가에서는 여전히 사격을 엎드리지 않고 서서 하도록 병사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전장식 소총은 엎드려서는 장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장식 소총과 기관총이라는 화력의 발전 앞에서 이런 방식이 어떤 참상을 불러왔을지는 명백하다. 그 외에도 유선통신망 등의 기술적 진보를 프로이센군의 장교들은 군의 지휘체계에 통합시킬 수 있었지만, 프랑스군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이러한 프로이센군과 전통적인 프랑스군의 차이가 극적으로 드러난 전쟁이었다. 프랑스군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상황을 점검하고 군대를 동원하며 작전을 세우기 위해 부산을 떠는 동안, 프로이센군은 이미 신속하게 동원을 마치고 준비해 둔 작전대로 공격을 시작해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프랑스군을 압도적인 병력으로 무너뜨리고 포위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몰트케가 대군을 동원한다는 '천재적 작전'을 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은 대군을 동원하고 운용할 작전을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고 그 작전을 실행할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장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대군을 동원해서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병사들은 특히 스당 요새에서 포위당했을 때 자살에 가까운 기병돌격을 하는 등의 용맹성을 보여줬으나, 그것으로는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결국 프랑스 제2제국스당 전투에서 패하고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하는 대굴욕을 맛보게 된다.

프랑스-프로이센전쟁 이후 프로이센군은 전 유럽의 모범이 되었고, 프랑스군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에는 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략전술적인 면 등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군사상가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명한 명장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은 제2제정 시대의 경향을 벗어나 프로이센 왕국의 클라우제비츠로부터 배우려 노력했으며 보불전쟁의 패배를 분석하면서 프로이센군의 활약을 높게 평했다. 그에 비해 제2제국의 장군들과 그들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폐착은 가루가 되도록 깠다.

즉 프랑스군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노력했다. 프로이센처럼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정립해 뛰어난 장교단을 기르려 노력했으며, 독일에 비해 뒤떨어진 동원능력을 개선하려 매우 노력했다. 1898년에 계획된 제14계획에서 악명높은 제17계획까지 모두 독불전선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짧은 기간 내에 전개하는 방법을 위해 강구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패배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덕분에 프랑스군은 1914년에 갑작스럽게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직면하자 열흘 좀 넘어서 백만병의 병력을 독불국경에 전개할 수 있었고, 이러한 숫자빨은 프랑스군이 전술적으로 패퇴하는 도중에 프랑스군이 버틸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작용했다. 또한 하늘이 독일을 버리는 행동을 해 주었는데 독일군 참모본부의 대몰트케의 조카 소몰트케는 양면전쟁을 수행해야 된다는 것에 부담을 너무 심하게 가졌는지 사단단위의 행동의 자유가 아닌 군단위의 행동의 자유를 부여해 각군이 제대로 협동하지 못한채로 따로 놀며 서로의 의도를 추측해가며 전쟁을 펼쳐나가야하는 막장 상황을 연출했다.

6. 제1차 세계 대전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c25aefb9188c4b0a8b9e913204162c2.jpg 파일:external/papersolders.ucoz.ru/2567871.jpg
프랑스 일반보병 1914년 프랑스군 9군단, 17사단, 34여단, 125연대 소속 병사들
대전 초기의 프랑스군 모습이다.
프랑스군 군복프랑스 대혁명 이후 전통적으로 파란색이었으나, 보불전쟁 이후 검은색으로 바뀌었다가 1차대전 직전에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다시 파란색으로 바뀐다. 빨간바지에서 볼 수 있듯이 외모를 실속보다 더 중요시한 결과,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기관총과 참호전에서 수많은 인명을 손실하였다. 기병 제복을 입으면 무릎을 접기 불편해 앉아 쏴 자세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19세기에 사용되던 주아브 복장까지 존속 중이었다. 이 외에 식민지에서 고용된 티레뢰 산병(skirmisher)도 고용했다. 산병이란 밀집대형의 측면이나 전면에 약간 떨어져 배치된 소규모 부대이다. 현대로 치면 정찰조 정도로 보면 될듯하다.

19세기까지 유럽 각국은 위장 효과보다는 사기와 지휘의 편리성을 이유로 전통적인 원색군복을 대체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보어전쟁 초기까지는 눈에 잘 띄는 레드코트와 하얀색 방서모를 착용했던 영국군도, 보어인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저격을 당해 대량의 인명손실을 내고 나서야, 저시인성 카키색을 정식 군복으로 교체하게 되었다.
파일:French_infantry_coming_back_through_Passy-sur-Marne,_pass_a_British_regiment.jpg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영국군, 오른쪽이 프랑스군이다.
문제는 독일이나 러시아 등 영국의 이러한 뼈아픈 교훈을 즉시 받아들인 나라도 많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라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였던 것. 프랑스군 수뇌부는 위장색을 받아들이자는 말에 분노하며 위대한 군대는 저런 수치스러운 군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한술 더 떠 프랑스 국방장관은 "붉은 바지는 곧 프랑스다(Le pantalon rouge c'est la France!)"라고 선언하며 위장색을 거부해버렸다. 그 결과 1차 대전 초기 수많은 보병들이 기관총 앞에 어육 신세가 되었다. 이 때문에 개전 초기부터 말이 많았지만, 전통을 고집하는 일부 장군들 때문에 한동안은 이런 고채도의 군복이 존속된다.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어서 결국 알록달록한 제복은 프랑스에서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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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 프랑스군

그러나 채도 높은 군복은 포기했으면서도, "프랑스군의 상징"이라는 파란색은 포기할 수 없었던 탓에, 채도가 낮은 지평선 청색이라는 색의 군복이 신형 군복으로 채택된다. 초기의 채도가 높고 알록달록한 복장에 비하면 인시성이 낮아졌으며, 이론상으로는 하늘의 색과 비슷하기 때문에 낮은 참호에 있는 적군을 상대로 위장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군이 활동한 북부 프랑스벨기에의 축축한 진흙밭에서는 채도가 낮은 파란색 위장이 좋았다고 한다.[83][84]

대중적으로는 이 당시 프랑스군이 병력 수만 많고 정예도가 떨어지며 똥별이 지휘하는 한심한 군대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프랑스 군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삽질과는 달리 나름 준비를 철저히 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보불전쟁의 원한을 갚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수복하기 위해 다가올 독일과의 전쟁을 나름 튼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1914년 개전 당시 (동원 직전의) 프랑스군은 독일 제국군 84만 명보다 약간 많거나 비슷할 정도였다. 물론 추가 동원시 400만 명 대 368만 명이라는 수적 차이가 있었고, 독일의 인구가 프랑스의 1.7배에 달했기 때문에[85], 인구 수 차이에서 이어지는 군 병력 차이를 메우기 위해 프랑스군의 병역기간이 길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군은 양면전쟁을 하느라고 그 병력을 제대로 사용 못할 판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방침 때문에 군 운영이나 동원이 훨씬 효율적이었고 제국 내의 반독립적인 왕국군이나 공국군이 반독립상태로 존재하며[86] 따로따로 사령부나 교육기관을 운용하던 독일군보다 훨씬 통일성이 있었다.

또한 프랑스군은 일반적으로 식민지 전쟁으로 장교들의 실전경험도 독일군 측보다 훨씬 많았다. (식민지 전쟁 참전이 장교의 출세코스였다.) 보불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전쟁이 한동안 없어졌고 독일군 장교들은 보불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한 고위급을 제외하면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프랑스군 장교들, 특히 초급장교들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국(청불전쟁), 그리고 중동에서 여러가지로 실전경험을 쌓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군의 병역대체제도가 병사의 질을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나라가 마찬가지였으며, 영국은 아예 지원병제였고, 미국은 (계속 지원병제였으나) 징집이 필요할 때(특히 남북전쟁)는 돈을 내고 병역에서 빠질 수 있었다.[87]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만)에서는 공격정신에만 집착하면서도 공세를 취할 작전능력은 매우 떨어져서 1차대전 직전 20세기 초에 독일에 대응하여 징병제를 3년으로 늘렸지만 1년에 겨우 12일만 소집하고 의회에서 좌파 계열 정당이 의회에서 "프랑스를 병영으로 만들 셈이냐!!"라는 비판 덕에 하루마다 출퇴근하며 복무할 지경이었다. 1913년 프랑스 육군의 군사훈련 판단으론 공세를 위해서는 준비가 무려 1주일이 소요되며 공세는 3일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고 나와 있다.

프랑스의 국력이 독일에 뒤진 것은, 양국의 체제와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역량과, 독일은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고 프랑스는 그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저조한 것도 있겠지만, 사실 프랑스의 인구증가 정체도 한몫했다. 프랑스의 인구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유럽의 중국'으로 불리던 물량을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기 내내 프랑스의 출산율은 타 유럽국가에 비해 낮아 독일에게 추월당했고, 19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의 출산율이 2명대 후반 수준까지 떨어지면서[88]인구가 4천만명선에서 정체되고 말았고, 이러한 인구정체는 2차 세게대전 종전직전까지도 이어졌으며, 수백년 전 백년전쟁 당시 10분의 1에 불과했던 영국에도 밀리는 인구 상태에 있었다. 혁명 시기 프랑스 인구(2,800만 명)는 서유럽에서 가장 많았고, 유럽 전체에서도 러시아 다음 가는 엄청난 인구였다. 게다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숙적 영국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러나, 120년 뒤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인구는 2배도 늘지 않은 4,000만, 영국은 4배가 증가하여 4,500만, 독일은 6,500만에 달했다.[89]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대육군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졌다. 물론 프랑스가 소유한 식민지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마디다스카르 등 많았지만 이 들 식민지는 프랑스 본토와 인접하지도 않았고, 식민지 주민들 대다수가 문맹이라서 내부총질 가능성을 제외하고도 제대로 동원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보불전쟁 이후 석탄-철강 산지[90]였던 알자스-로렌을 빼앗기면서 본격적인 산업화의 시기인 19세기 말 철강 생산이 독일의 4분의 1, 영국의 절반 이하일 정도로 프랑스의 산업이 정체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알사스-로렌 상실 때문으로, 사실 철강생산량만 보면 독일이 1차대전 이후 알사스-로렌을 다시 상실하면서 철강생산량이 반으로 뚝 떨어진 것을 보면 #, 프랑스의 공업생산량 문제는 알사스-로렌의 상실로 인한 것이었다. 프랑스가 보불전쟁 이래 알사스-로렌 수복을 위해 이를 갈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엘랑 비탈(Elan Vital)'이라 불리는 왕성한 공격정신을 중시하는 사기론과 해군의 '청년 학파(Jeune École)' 등 독자적 군사노선을 지향했는데, 이 2가지가 프랑스군의 흑역사로 남게 되지만, 당대만 해도 프랑스군에 대한 전반적인 평은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온몸을 불살라 탱킹을 안해줬으면 독일이 이기는 구조로 전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기술적으로 독일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공중전에서 캠축을 활용해 프로펠러가 기관총 앞에 오면 아예 발사가 되지 않도록 하는 싱크로나이즈드 기어는 프랑스와 독일이 각각 독립적으로 특허가 나왔다. 그리하여 독일군과 치고받았으며[91] 연합군 공인 최고 격추기록을 가진 르네 퐁크를 비롯한 수많은 에이스들을 배출하기도 하는 등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또한 프랑스판 MIT나 KAIST라고 할 수 있는 에콜 폴리테크닉 출신들이 군수기업이나 기술장교로 가서 만든 프랑스군의 야전포 등은 전장에서 통용이 되었고 생산성이 우수해서 유럽에 파병된 미군도 초기에는 프랑스제 장비를 대량으로 운용했다.[92]

7. 엘랑 비탈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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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년학파

제2제정기에 대대적인 투자를 받아서 강력한 함대를 건설했으면서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제3공화국 시기에 해군예산이 감축일로에 이르렀던 프랑스 해군 내부에서 영국이 주도한 건함 경쟁과 전함 중심의 해군체계에서 벗어나 당시 신기술이었던 어뢰정잠수함 중심의 체계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던 해군 전략을 주장하던 장교단들의 총칭이다. 청년학파의 주장은 일종의 비대칭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전함은 호레이쇼 넬슨 시대처럼 거대한 전함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포화를 주고받는 해전을 가정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함의 대구경 대포는 위력은 강했지만 매우 부정확했고 사정거리도 짧았다. 더구나 이러한 대포는 주로 전장포였기 때문에 장전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렸다. 따라서 작은 어뢰정이 어뢰를 쏘고 달아나는데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93]

그런데 소형함이라도 어뢰라면 1발로도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소형의 어뢰정이 대형함보다 훨씬 강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고 '장갑함 1척을 만들 예산으로는 어뢰정 60척을 건조할 수 있으므로 연안방어를 위해서는 어뢰정을 만드는 것이 보다 유효하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당시 상황에서 영국과의 전쟁을 상정한다면 매우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전략은 지나치게 영국만을 고려한 수세적인 전략이었다는 점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연안방어 임무에 있어서는 다수의 미사일 탑재 고속정이 소수의 대형 전투함들에 비해 유리한 게 사실이지만, 대형 전투함들은 다양하고 많은 무장과 전천후 활동능력, 우월한 장거리 항행능력으로 인해 해상교통로 보호나 장거리 원정, 초계 등등 범용적으로 쓸 수 있는데 비해, 소형함 위주의 해군세력은 연안 방어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크게 받는 편이며 악천후 하 작전에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결국 이와 같은 세력 편성안을 채택하는 것은 해상에서의 무력 투사를 포기하고 해안선에서의 수세전략을 편다는 것과 사실상 같은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는 전세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다른 강국보다 해군력에서 우위를 점할 능력이 있었다. 청년학파의 비대칭 전략은 이러한 해양 강국으로서의 지위(1등은 아니지만)를 스스로 버리고 수세만이 가능한 3류 해군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프랑스와 같은 대국에게 적합한 전략이 아니었다.

또다른 문제는 프랑스의 전략이 영국 해군을 자극해서 적극적인 기술혁신을 일으켰기 때문에, 결국 영국 해군도 제대로 견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어뢰정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해군은 암스트롱 후장포를 도입했고, 대포의 사거리와 정확도, 장전 시간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어 어뢰를 명중시킬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공격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결국 적당한 속사포를 갖춘 구축함[94]이 어뢰정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게 되어 어뢰정은 군사적 가치를 거의 상실했고, 이는 청년학파가 건설한 프랑스 해군 역시 군사적 능력을 급격히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95]

결과적으로 청년학파의 전략은 해군력의 약화와 건함경쟁에서의 이탈, 그리고 대형함 제조 능력의 저하만을 가져왔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타국이 3년에서 4년 사이에 12인치포 4문을 연장포탑으로 장비하는 상비배수량 1만 5천 톤 규모의 표준형 전함을 만들어 내는 것에 반해서 프랑스는 1만톤에도 못미치는 11인치포 2문 장비형 해방전함조차 7~8년에 걸쳐서 만들고 있었다. 정규의 표준전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런 개판 5분 전의 상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간기에 리슐리외급같은 건실한 전함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프랑스의 저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 서부전선의 주력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처음부터[96] 끝까지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의 주력군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고의 전투력과 병력을 자랑했다(제2차 세계 대전 소련군의 역할을 1차대전에서는 프랑스군이 한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 몸빵[97]). 초반에 패배한 제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프랑스군은 전쟁 내내 주역이었고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다. 사실 서부전선이 거의 대부분 프랑스 영내거나 프랑스 근처에서 벌어진 전장이다.

1914년의 대후퇴, 1915년 이후 독일에 점령당한 자국의 영토와 벨기에를 해방하기 위해서 프랑스군은 공세적인 측면으로 입장을 바꾸고 전쟁이 끝나는 1918년 11월까지 끊임없는 공세를 시작한다. 참호 침투 전술인 후티어 전술이 마치 독일 고유의 교리인 것처럼 포장이 되어있지만, 가장 먼저 개발해서 사용했던 건 프랑스군이며, 참호 청소병인 느투아예흐 드 트랑시(nettoyeurs de tranchee)를 참호에 투입하여 말 그대로 청소해버리는 교리를 사용했다. 독일의 돌격대와 유사한 병과다. 또한 독일의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서 포슈가 이동탄막사격을 개발하고 영국과 함께 전차 개발에 열을 올리는 등[98] 전쟁의 승기를 잡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이런 노력 끝에 1차대전 초기 협상국 주요국(영,프,러)과 독일 사이의 교환비는 5:3에 가까웠는데 전쟁 중후반 부터는 협상국 중 유일하게 1:1의 교환비를 강요하며 독일의 소모전을 돈좌시켰다.

이는 1차대전 종전까지 서부전선 연합군 최고사령관 역할을 포슈가 맡았던 것을 보면 된다(독일이 힌덴부르크의 이름으로 보낸 휴전협상 제안의 수신자는 포슈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반 서부전선에 전개한 연합군 병력은 프랑스군 250만명, 미군 190만명, 영국군 180만명으로서 수적으로도 프랑스군이 가장 많았으며 병력의 질 또한 다른 참전국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기존의 소수정예군에 의존해 1916년에야 대군을 투입하는 영국군,[9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격파해버리는데 유독 독일군에게 역대급 실수로 털려[100] 개전 초반 승기를 빼앗긴 러시아군[101]과 전쟁 후반에 참전한 미군을 대신해서 독일군과 전쟁에서 주력군을 맡을 수 있는 가진 군대는 프랑스군밖에 없었다. 애당초 영국-프랑스 동맹에서 해군은 영국 해군이, 지상군은 프랑스 육군이 주력이었으며 나중에 미군이 참전한 뒤로도 프랑스 육군은 여전히 연합군 지상군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었다.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백일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은 숫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2차 마른 전투에서도 50개가 넘는 연합군 사단중 40개가 넘는 사단을 프랑스군이 맡았다는 것은 프랑스군이 서부전선 연합군의 중핵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삽질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10. 전간기

1920년대 프랑스군은 여전히 세계 최강 육군을 자랑했다. 승전국의 지위에 걸맞게 전차, 항공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독가스 생산도 실시한다. 수상기 모함과 전함을 대거 건조하고 리프 전쟁에 참전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또한 에스티엔느 대령의 뒤를 맡은 후임인 소장파의 에메 두망 장군은 군대의 기계화를 주장하며 장비 생산에 열을 올린다. 최초의 하프트랙인 시트로앵-케그레스가 이 때 생산되었고 르노 경전차의 후계기형도 잇따라 개발 및 생산되었다. 하지만 1차대전의 전훈 때문에 1인 포탑, 2인승을 고수하게 된다. 물론 이 문제는 프랑스의 고질적인 인구 부족 문제도 겸한다. 덕분에 전간기 때 개발된 프랑스 전차들은 대부분 1인 포탑에 최대한 승무원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장갑을 가진다.

문제는 1930년대였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은 1930년에 영국, 1931년에 프랑스에 상륙하면서 프랑스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고 1930년부터 1934년까지 국방 예산이 1/4 넘게 삭감된다. 이 때 모리스 가믈랭은 사표까지 던지면서 항의했었다. 하지만 곧이어 집권한 프랑스 인민전선(좌파-중도좌파-중도우파 연정)은 원래 계획된 국방 예산보다 더 많은 예산을 부여하면서 여러 전차와 장비를 개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년 기준 독일군의 국방 예산에 1/12정도 되는 빈약한 국방 예산으로 주적인 독일을 상대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전간기의 프랑스는 꽤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2개가 MAS-40/44로 대표되는 반자동소총의 제식 계획과 G1R로 대표되는 통합전투전차 계획이다. 2차대전의 졸전으로 프랑스군 자체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랑스는 미국과 소련에 뒤이어 반자동소총을 제식화할 수 있었다. 이미 1차대전 이전에 뫼니에 A6을 개발할 정도로 반자동소총을 개발해 소총수 화력을 늘리려는 야망이 있었고 1차대전 때는 RSC 1917을 개발하며 실제로 86000정 가량 대운용하기도 했었다. 이에 따라서 프랑스는 새로운 탄도 개발할 겸 반자동소총 개발에 열을 올리는데 이 중간다리가 바로 MAS-36이다.

G1R의 경우에는 프랑스의 복잡한 전차 개발 및 분류를 타파하기 위해 모든 병과, 모든 분야에서 쓸 수 있는 통합전차를 개발해서 주력화하려고 했던 계획이다. 개발 배경은 프랑스의 기갑 차량 계통도의 복잡한 분류에서 나타난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 소련과 같이 보병전차와 기병(순항)전차의 엄격한 역할 구분을 기본으로 삼았고, 보병전차는 Char, 기병전차는 Automitrailleuses라는 제식명을 부여한다. 거기에 체급과 목적에 따라 보병 경전차[102] / 보병 전투전차[103] / 보병 중전차[104] / 기병 발견장갑차[105] / 기병 정찰전차[106] / 기병 전투전차[107]로 구분했다. 딱봐도 불편하고 복잡한 분류였기에 프랑스도 이웃나라 독일처럼 통일하거나 적어도 영국처럼 보병전차 / 순항전차로만 통합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통합된 구분의 보병전차의 역할을 담당할 전차가 G1 전차였다. 소련의 T-34 특징이 비슷한 르노사의 G1R 전차가 선정되어 1940년 9월부터 생산하려고 했지만 패전으로 무산된다. 여담으로 통합된 보병전차(Chars)은 G1R이 맡은 반면에, 통합된 기병전차(AMC)는 AMX-40이 맡을 예정이었고, 정찰(AMD+AMR) 역할은 전차가 아닌 파나르 178 같은 장갑차가 맡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든 계획은 1939년과 1940년에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갈 계획들이었고 전쟁은 이미 너무 가까워져있었다.

만약 어이없는 졸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군의 재무장 또한 눈여겨볼만 했을 것이다. 결과는 아래와 같지만.

11.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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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의 강군 이미지가 망가지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영미계 역사가와 군사무기 매니아들 사이에서 프랑스군이 '유럽의 당나라 군대' 취급을 받고 지나친 폄하를 당하게 된 이유는 대부분 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처참한 모습에서 기인한다.

전간기의 여러 악영향과 아직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전하지 못한 사령부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개전 6주만에 항복을 하고 말았다.

전간기 시기, 소련, 독일이 앞으로의 지상전은 전차 중심의 기동전이 될 것으로 예상한데 반해,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의 전쟁 준비는 제1차 세계대전처럼 참호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08]. 사실 프랑스군은 기동전보다 방어전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부터 이어진 저출산/고령화로 이미 주적인 독일보다 인구도 부족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20~40대 남자 1/3이 전사-전상을 입었던데다가, 북프랑스 일대가 주 전장이 되면서 피해가 컸던 상황이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이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프랑스는 공세보다는 수비에 집착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수비 위주의 전략을 짠 상태에서 독일 국경으로부터 수도인 파리까지의 짧은 종심을 고려하면, 애초에 기동전이 프랑스군의 주 교리가 되기는 무리였다고 봐야 한다.

마지노선은 열심히 건설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전략, 전술 발전은 거의 없었다. 초기 연합군 동맹인 영국과 마찬가지로 기동전과 보병전 독트린을 놓고서 지휘부가 치고 받는 바람에 실 전술 개발[109]은 지지부진했으며 더 나쁜 것은 참호전의 트라우마 탓으로 구식 보병전에 압도적으로 경도되었다는 점이다. 해군 강국인 영국과는 달리 전통적 육군국인 프랑스에게 있어 이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단 독일군이 마지노선을 우회할 것은 예상하고 벨기에 국경에 주력을 배치했지만, 독일군이 프랑스군이 전혀 생각못한 아르덴 숲을 관통하여 진격하자 혼란에 빠졌다.

사실 전쟁 발발 전에도 프레트라 장군이 아르덴 돌파에 관해서 워게임을 실행했는데 빠르면 3일, 늦어야 일주일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고, 이는 독일 수뇌부가 예측한 열흘보다 빠른 결과였다. 프레트라 장군은 "아르덴이 기존의 인식처럼 천연 요새이기는커녕, 적들의 기갑 병력을 위한 고속도로 수준이니, 방어를 보강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여럿 제출했지만, 장성들이 무시하는 바람에 아르덴 고원이 돌파되어 각개격파로 이어졌다. 게다가 공군을 후방 배치하여 제공권이 장악당해 독일 공군폭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보유한 전차는 분대장 전차를 제외하곤 무전기도 없어 유기적인 전투를 전혀 치르지 못했다. 결국 주력군이 섬멸당하자 항복한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군함들이 독일군에 넘어갈 두려워한 영국 해군이 캐터펄트 작전으로 프랑스 해군을 공격하는 등 어려운 상황이 이어진다.

이는 단순히 몇몇 무능한 상층부 때문이 아니라 19세기부터의 프랑스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심화된 결과였다. 이상하리만큼 통신의 중요성을 무시해서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프랑스군은 종종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문서로 된 명령문을 수령하기 전에는 행동에 나설 수 없다"며 지휘관이 직접 상급부대로 가서 명령문을 받아오느라 시간을 끌다가 상황을 망치는 모습이 거의 모든 부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상황에 맟춰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려면 어떤 식으로 군이 운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고려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계획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딜 계획'이다. 프랑스는 마지노선의 방어력은 확실했고 벨기에 남부도 마스 강과 아르덴 삼림지대 때문에 돌파가 어려운 지역이었지만, 벨기에 중부와 북부는 평탄한 지형으로 방어에는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독일군이 슐리펜 작전으로 바로 이 지역을 노렸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이 침공하면 신속하게 벨기에로 진입해 나뮈르-딜(Dyle) 강-앤트워프를 잇는 선을 확보기하기로 했다. '딜 계획'이라는 이름은 물론 딜 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런데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계획이 딜-브레다 계획으로 확장됐고, 335만을 동원한 독일에 비해 224만을 동원한 프랑스군은 부족한 숫자로 벨기에부터 네덜란드까지 막아야했고, 그러한 넓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가용 병력을 모두 방어선에 투입하게 된 결과, 벨기에 방면의 프랑스군에는 전략적 예비군이 전혀 남지 않게 되었다. 물론 프랑스군에도 바보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서 북동부군 사령관인 알퐁스 조르주는 예비대인 제 7군을 네덜란드 방면에 파견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그전부터 이어진 가믈랭과 조르주의 파벌 싸움으로 묵살됐고, 독일군이 아르덴을 돌파한 이후의 상황은 정확히 조르주가 경고한 대로 흘러갔다.

더구나 구체적인 작전계획은 없는 상태에서 딜-브레다 계획에 따른 프랑스군의 신속한 배치만이 강조되다보니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예상을 뒤엎고 아르덴 삼림지대를 돌파했을 때 거의 대응하지 못했다. 독일군이 프랑스의 전선을 돌파했을 때 프랑스군 지휘부는 현지의 방어군에게 여러 차례 반격을 지시했지만, 하급부대들은 대부분 시간만 끌다가 반격을 취소하거나 반격을 시행하더라도 소규모의 부대의 무의미한 축차투입을 반복했을 뿐이다. 이들 하급부대들은 방어를 위한 배치만이 되어 있었을 뿐 기동을 위한 계획이나 훈련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호전이었다면 이런 상황이라도 천천히 병력을 재배치해가면서 공세를 준비할 수 있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군의 속도는 따라갈 수 없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참호전과 같은 느린 속도의 전쟁만을 예상했기 때문에 특별한 준비 없이도 임기응변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당시 프랑스군과 싸운 독일 병사/장교들의 평가처럼 프랑스 군대의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은 독일군에 뒤지지 않는 왕성한 투지를 가지고 있었다. 1940년 프랑스 침공 초반부에는 짧은 시간만에 주력이 날아가버리는 치명타를 입었지만 됭케르크 이후에도 남아있던 프랑스군은 각지에서 필사적으로 싸웠고 다 이겼다고 생각하던 독일군은 지헬슈니트 작전 때보다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러나 수뇌부는 바보인데 하사관이나 병사들은 잘 싸운다는 평가는 이탈리아군이나 일본군도 받은 평가이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프랑스군에서 수뇌부만 문제였다는 변명으로 저평가를 피할 수는 없다.

됭케르크 철수 이후 프랑스군은 마른 전선에서 며칠이나마 버티며 분투했고 최후까지 벌어진 브레스트 일대의 공방전에서도 전황타개를 모색했지만 초반에 손실병력과 장비가 너무 컸고 공군력 자체가 열세한 관계로 패전을 피하지 못했다. 당시 레노 내각이 보르도까지 수도를 옮겨가며 항전 의지를 다졌지만 독일군이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한지 3주가 되지 않아 이미 파리가 함락되고 2집단군 50만 명이 포위섬멸된 상황에서 더이상의 항전은 무의미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독일군과는 달리 유럽 제2위의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잖아도 빡빡한 국가 운영에 해군에도 투자해야 했고, 덕분에 육군은 산하 136개 사단중 정규급 및 A급 사단이 전체 편제에서 절반 정도밖에 확보가 안된 것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군력은 1940년 ~1944년까지 별 활약 못하다가 영국군에게 공격을 당하고 자침하거나 이탈리아 해군에 인양되는 수모까지 겪는다. 이를 두고 "육군에나 투자할 것이지 해군에 쓸데없이 투자했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가 많아 강력한 해군력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애초 육군이 A급 사단이 절반 뿐이었다 쳐도 운용만 제대로 했다면 독일 육군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기에 해군 탓을 할 처지는 못 된다.

당시 영관급 장교였던 샤를 드 골은 1930년대 중반부터 독일군의 기계화를 예상하고 "프랑스군도 기갑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가올 전쟁을 예상한 몇 권의 저서를 내어 참호전을 고집하는 육군 수뇌부를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했으나,[110] 당시 프랑스 정국은 개판이었고 군 수뇌부는 정치권의 비위를 맞추느라 혁신적인 시도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프랑스 정국은 1939년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거국일치내각으로 전환하고 타협에 의해 정국이 굴러갔으나, 프랑스 군부는 파벌 중심의 고질적인 사내 정치로 그 어떤 안건도 채택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진 시점부터, 거국일치내각을 구성한 정치권에서는 군부에 계속해서 개혁을 요구했으나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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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항복 이후 에펠탑 앞에서 기념 사진을 촬영한 히틀러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 전차들은 독일의 주력이었던 2호 전차에 뒤지지 않았으며 전격전 따위는 최근에는 거의 신화로 치부되는 현실이라서 수뇌부만 개념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프랑스군은 그렇게 참패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일단 독일군이 아르덴 숲을 넘어오자 프랑스군 지휘부는 공황에 빠져서 순식간에 무너저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임기응변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전선을 뚫고 후방으로 진입해오자 상황을 파악할 수단도, 부대에 효과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단도 없었다. 지휘관이 직접 사령부로 가서 명령문을 수령해 오는 상황에서 그 중간에 독일군이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손발과 눈이 한꺼번에 떨어져나간 격이다. 게다가 프랑스군 부대들 역시 그러한 상황에 대응할 작전계획 따위는 없었다.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독일군에 대한 반격은 지휘체계도, 작전계획도, 훈련도 아닌 전적으로 프랑스군 지휘관 개개인의 똑똑함에만 달린 것이 되었다. 당시 독일군 지휘관들처럼 기갑전에 대한 이해가 풍부했던 드골 대령은 200대의 전차를 가진 제4기갑사단을 이끌고 1940년 5월 14일 아르덴 숲 접경 몽코르네에서 독일군에 반격을 가하여 승리했고 이게 프랑스 침공에서 거의 유일한 프랑스군의 승리였다. 이 공적으로 드골은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전의를 잃은 프랑스군 지휘부는, 파리가 함락당하자 항복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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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던 프랑스 외인부대[111]

영국으로 철수한 장병들이나 식민지에 있던 프랑스인 밎 식민병들은 드골의 지휘아래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였다. 자유 프랑스군은 1944년 당시, 55만명이나 되는 비교적 대군이었고, 프랑스가 해방된 이후에는, 150만으로 병력이 급격히 늘어나서 미군과 함께 서부전선을 담당하였다. 이런 대군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제2차대전 종전 후에 승전국의 말석에 낄 수 있었다. 자유 프랑스군은 영국과 미국의 원조로 무장하고 있었고, 특히 무장은 물론 육군 군복마저 장교의 케피나 일부 식민지군이 쓴 아드리안 헬멧을 제외하곤 대부분 미군 또는 영국군과 같을 정도였다.

공군의 경우는 뻘짓의 강도가 더욱 심했는데, 주력 전투기인 D.520의 절반을 후방에 배치하고 나머지 절반 조차 축차투입하며 날려먹으며 총 500여대의 D.520을 무기력하게 독일군에 헌납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 전투기들은 독일군이 1941년까지 유용하게 사용했다.

이후 프랑스 침공 당시 아무것도 못해보고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공군 조종사들은 동서에서 전투를 벌였다. 서부에서는 영국 공군의 제326, 327, 328 비행중대를 이루면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몰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활동했고 동부에서는 소련 공군에 편입되어 유명한 노르망디-니에멘 연대로 개편, 야크기를 운용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감사의 표시로 그동안 정들었던 야크기를 몰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부대(1/30 노르망디-니멘 전투비행중대, Escadron de chasse 1/30 Normandie-Niemen)는 아직까지도 프랑스에서 현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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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국 전쟁

세계대전 종전 후 다시 군대를 재정비한 프랑스의 첫 대규모 전장은 한반도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여유전력이 없었지만, 영국이나 터키도 여단 병력을 보내는데 자기들만 뒤처질 수는 없었기에 2차대전 및 인도차이나 전선의 참전경험자들을 중심으로 지원병을 모아 파병했다. 이때 지휘관도 물론 자원을 받았는데, 여기 지원한 양반이 나르빅 전투의 영웅이자 프랑스군 현역 중장라울 마그랭베르느레 장군. 이 부대는 규모가 대대였기 때문에 미군 23연대 휘하로 배속되었고, 연대장인 대령중장을 지휘해야 하는 괴상한 모양새(…)가 되자 스스로 대대장을 자처해 중령계급으로 부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유엔군사령부에서는 그를 장군으로 대우해줬다.

사실 프랑스군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연합군 수뇌부는 물론이고 일반 장교들 및 언론기자 전원이 가진 '프랑스군'에 대한 이미지는 1940년의 패배한 군대의 이미지였던 탓에 어느 지휘관도 이 1천 명의 프랑스군 보병들을 자기 지휘하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을 배속받은 미 23연대장도 명령을 받았으니 받아들인 것뿐이지, 받아놓고서도 과연 프랑스군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프랑스군의 실제 전과로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중에 본대의 측면을 방어하던 1개 소대, 단 25명의 프랑스병이 총검돌격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쫓아버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 이런 짓을 하고도 프랑스군의 피해는 부상자 단 2명이었다. 전투종족당나라 군대[112]

돌격을 지휘한 소대장은 그 공으로 미군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고 은성훈장까지 수상했는데, 이에 대한 프랑스 대대 장병들의 평가는 간단했다고 한다. 다음은 대대장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중장중령의 발언.
"우리 병사들이 한 총검돌격은 보병전술의 기초 중의 기초인데 양키놈들은 그걸 가지고 왜 난리인 건지 모르겠다"
태평양 전선의 경험 때문입니다.[113]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중령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미군은 감명을 받았고, 8군 사령부는 예하 전 미군에게 총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 장군 명의의 이런 명령서를 내려서 경악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총검은 아마도 연합군의 최후의 비밀무기는 아닐지라도, 귀관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전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총검이 단지 통조림 깡통을 따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장병들은 유의해 주길 바란다. - 리지웨이 -
이후 1951년 9월에 가진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는 중공군에 패배하여 100여 명 사상자를 내기도 했지만 프랑스군은 10월에 전열을 가다듬고 재공격하여 2개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이 점령전에서 중공군에 4,000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안겨주며 수십배 설욕에 성공하는 맹활약을 했다. 이렇게 프랑스군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치열하게 계속해서 싸워 연인원 3,421명이 참전, 전사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의 손해를 냈다. 참전병력은 적었지만 워낙 치열한 전투에 많이 투입되었던 터라, 한국전쟁 참전 외국군 사상율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 병력들은 베트남전이 격화하면서 한국에서 철수, 베트남으로 간다.

한편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프랑스군과 함께 싸운 미군 장교들의 회고에 의하면, 프랑스군은 전의가 왕성하고 용감했지만, 태도가 오만했다고 한다. 한 번은 미군과 프랑스군이 함께 야간 경계를 서고 있는데, 프랑스군 장교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피우자 미군 장교가 경악해서 "빨리 담배를 끄라"고 하니, 프랑스군 장교가 "왜 그러냐"고 묻자 미군 장교는 "당신이 붙인 담뱃불을 보고 적들이 몰려오니 빨리 끄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프랑스군 장교는 "적들이 오면 총검으로 찔러 죽이면 될텐데, 뭐가 걱정이냐?"라고 태연자악했다고.[114]

미군 부대의 카투사처럼 프랑스군에도 일부 한국인 장병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프랑스군이 베트남으로 가기 직전까지 프랑스군과 함께 복무했고, 일부는 외인부대에 입대하여 인도차이나 전쟁알제리 독립 전쟁 등에 참전한다.

13. 현대

세계대전 이후 국력저하[115]식민지 유지를 하지 못하게 된 실정에도 4공화국은 국가 재건을 위해 식민지를 유지할 필요를 느꼈고, 식민지의 독립 요구를 시대착오적인 판단으로 진압하려다가 인도차이나 전쟁알제리 전쟁으로 패배를 겪고 망신을 당한다.

사실 이것은 프랑스군의 문제라기보다는 프랑스 정치가들의 문제가 더 크다.[116] 당시 프랑스는 더이상 해외 식민지들을 유지할 국력이 안 되는 상황인데, 무리하게 유지하려 들고 독립을 시켜줘야 했을 때 안 들어줬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수습하느라 능력 밖의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참패를 면치 못한다. 그저 그런 이미지와는 별개로 냉전기 프랑스군은 실제로는 다방면으로 고른 능력을 갖춘 강한 군대였으나 비교대상이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 같은 유럽의 강대국 영국과 영연방, 독일이었고 2차대전 후에는 북한군, 중국군을 상대로 선전하여 체면좀 살리나 싶었는데 베트민에게는 정규전으로 붙어서 패전하고 알제리에서는 그나마 뒷마당이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진압하려 들었으나 제대로 진압도 못하고 밀리다가 결국 국제여론에 밀려서 독립을 시켜줘야 했으므로 이미지를 회복할 기회가 없었다.

냉전시대에 미/영과의 마찰로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탈퇴한 바 있다. 다만 이 사건은 탈퇴는 프랑스만의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1956년에 있었던 제2차 중동전쟁 당시, 소련이집트군을 제압한 영/프 연합군에 대해 핵공격 위협을 한다. 아직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던 영/프 연합군은 다 이긴 전쟁에서 굴욕적인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양국의 핵개발 드라이브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여기까지는 딱히 문제가 없었으나 핵실험에 성공한 영국은 자국을 배신했던[117] 미국 편에 곧바로 붙어 프랑스의 핵개발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동맹군으로서 함께 싸웠고 함께 핵공격 위협을 받았던 영국이 미국 편에 서서 적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프랑스의 국내 여론은 좌파/우파, 보수/진보, 여당/야당 할 것 없이 단결하여 조국의 핵무장을 지지했고, 이러한 범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은 프랑스 정부는 국방비의 무려 25%를 핵개발에 투입하는 초강수를 둔 끝에 1960년 핵개발에 성공한다. 이 와중에 영국에 느낀 배신감, 미국이 소련과 손잡고 프랑스의 핵개발을 저지하려고 나섰던 데서 깨닫게 된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 등은 프랑스가 나토를 탈퇴하는 초강수를 두도록 만든 원동력이 된다.[118] 물론 이것 때문에 미국과 영국이 크게 반발했고 미국도 가만있지 않고 프랑스에 주둔한 미군을 전원 철수시켜 버렸으며, 지금까지도 프랑스에는 미군이 1명도 주둔하지 않고 있다.

냉전시기 프랑스군과 프랑스 외인부대콩고 내전이나 아프리카 각지의 내전에 직간접적으로 많이 개입하였다.

이후 프랑스미국이나 소련과는 좀 다른 독자 노선을 걸으며 중동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 무기를 판매하였다. 이스라엘중동전쟁에서 미라지로 재미를 보자 아랍 각국이 소련제 무기 대신 미라지를 사들이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제 무기보다는 싸고 러시아제 무기보다는 신뢰도가 있다'는 이미지 때문에, 틈새시장에서 의외로 많이 팔았다. 걸프전쟁 직후 걸프전에 투입된 미제 무기의 압도적인 성능 및 냉전의 종료로 미제 및 러제, 독일제 등의 무기들을 구하기가 쉬워진 덕분에 틈새시장도 많이 넘아가 판매량이 상당히 감소했지만 2000-2010년 10년간의 무기 수출량은 미국, 러시아,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의 무기 판매국이었다.[119]

어쨌든 냉전 기간 동안에는 비록 나토에서 탈퇴하긴 했지만 집단안보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냉전기간 중에는 징병제를 통해서 60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전쟁 발발시 나토의 지휘 체계 내에 편입되어 영국군/서독연방군과 함께 나토 지상군의 중핵을 맡을 예정이었으며, 규모 역시 6개 기갑사단/3개 경기갑사단/3개 기계화보병사단, 거기에 각 1개의 공수사단/공중기동사단/해병사단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프랑스군이 전 부대 기계화에 신경 쓴 결과인데, 이는 보병 위주의 요새화와 참호전에 고집하다가 나치 독일군 기갑부대의 전격전 앞에 허무하게 돌파당했던 프랑스 침공의 전훈을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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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안보지원군의 일원으로 작전중인 프랑스군 보병, 여단 규모급으로 파견되어 있다.

다 과거 이야기이고 냉전 종식 이후 대대적인 군개편에 들어가서 1997년 징병제를 폐지하였고, 현재 병력 22만 명으로 거의 3분의 1로 줄었다. 3세대 전차로서 미군이 M1A1과 영국군이 챌린저 1을 각각 운용하던 걸프전 시점에 2세대 전차AMX-30을 주력전차로서 파견하는 등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전력증강이 늦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120]

육군 병력은 12만 명에 전차는 비축전력을 제외하고 운용대수는 현재 200여대 수준이다. 냉전의 종결과 함께 상당한 규모로 감축이 지속적으로 진행돼서, 과거의 육군 대국의 모습을 연상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과거 독일에 전격전으로 나라를 뺏긴 경험이 있어 상당히 기동성에 역점을 두는 경향이 짙으며 군대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많은 장갑차를 보유 중이며 기계화율이 높은편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특수부대 위주로 옛 세력권인 아프리카 지역에 제한적으로 개입하거나 미군을 보조하는 정도만 가능하지, 실제론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대규모 독자작전 능력을 상실했다. 특히 NATO 전체 방위비의 70% 이상을 미국이 부담하는지라, 미군하고 비교하긴 민망한 상황이다.

샤를 드 골급 항공모함으로 상징되는 해군 역시 상당한 경험과 규모를 갖추고 있다. 예산이 부족해 드 골의 후속함 건조 사업이 휘청이고 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와 합작으로 FREMM 프로젝트호라이즌 프로젝트를 통해 대잠/방공 호위함 도입 사업을 성공리에 이어가고 있고, 신형 공격원잠 바라쿠다급의 취역 역시 착착 맞춰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거기다 러시아에 수출까지 된 강습상륙함 건조 노하우를 갖춘 데다[121] 신형함도 취역 중이라는 점까지 봤을 때 프랑스 해군의 전력은 상당히 탄탄하다. 게다가 전략 원잠도 갖추고 있으니 핵 억지력의 한축으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의 전력증강이 지지부진해 지고 영국이 파리 테러 이래 국방비를 증대시키고, 해군력을 늘릴 예정이라, 프랑스 해군이 영국을 압도적으로 넘어서기는 힘들것이라는 게 현재 전망.[122] 하지만 프랑스도 현재 건조, 배치가 진행중인 준이지스급 호위함인 FREMM급을 8척으로 완편하고 추가로 대잠, 대공성능이 향상된 4,000t급 신형 FTI중형호위함 5척을 2020년대 중반까지 건조,배치할 예정이다. 현재 프랑스해군의 전력증강계획이 완료되면 2020년대 중반에 프랑스해군은 총15척의 준이지스급 호위함을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영국의 차기 31형 호위함과 유사한 현 프로레알급의 대체함으로 저강도분쟁용 호위함 6척의 건조를 2020년대에 계획하고 있고, 바라쿠다급 신형 공격원잠 6척의 취역도 예정돼있어 미래에도 영국에 비해 떨어지지않는 대등한 전력을 보유할 예정이다.

공군은 현재 약 250여기 안팎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리비아 내전때 유럽공군 중에선 공습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편이긴 한데 파리테러 이후에 공군 전폭기가 부족해 영국에 도움을 부탁한거 보면 이쪽도 상황이 심각해 보인다.

말리 내전에 개입하고 아프리카 정치 분쟁에도 끼어드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2017년 프랑스 육군의 타이거 공격헬기 59대의 가동율은 25.6%이며, 해군의 NH90 17대의 가동율은 47.6%로 운용하는 날 보다 정비하는 날이 더 많다고 비판받고 있다. 심지어 이보다 수명이 오래된 퓨마의 경우 가동율이 2016년 12.2%에서 9.9%로 더 떨어졌다.

2018년 초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2020년까지 영국군과의 공동군 1만명을 창설키로 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2020년께 차세대 항공모함 건조를 시작할 예정이다.# 2010년대 들어 자신들의 옛 나와바리인 아프리카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전술했듯 리비아 내전 때 가장 적극적이었고, 코트디부아르 내전에 참여 내전을 종식시키고 말리에서 투아레그 반군을 정리했다. 그리고 우주군 사령부를 창설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 사헬지대에서 주도하는 대테러전에 유럽 통합 특수전 사령부을 설치 예정이다.#

세계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군사강국이고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유럽 군사력의 자존심을 지키는 군대. 20세기 말에 소련이 무너지고 그로 인한 경제난 때문에 러시아가 대책 없는 군축을 감행하자, 프랑스군도 대규모 감군을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투자는 하고 있기에 독일보단 나은 편이다.

또한 군사력 감축으로 인한 전력 축소와는 별개로, 정예도와 실전 경험은 21세기 이후로 미국, 영국과 함께 세계의 분쟁에 자주 개입하는 만큼 상당히 강력한 편이다. 프랑스 특수부대는 과격 이슬람 세력이 판치고 있는 아프리카의 서부에 계속 전개하고 있으며, 해군과 공군도 이들과 함께 계속 실전경험을 쌓으며 유지되고 있다. 냉전시절에는 총 70만, 육군만 45만의 대병력이었지만 현재는 군축으로 인해 대부분의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그 1/2~1/3로 줄었으며, 20만의 소수정예로 운영되고 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영국은 유지할 능력이 안 되는 식민지들은 쿨하게 놓아주되 아르헨티나만큼은[123]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확실하게 조져놓아 품위 유지에 성공했지만,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하고 전후 식민지들의 독립 과정에서도 여기저기 끊임없이 패배하는 모습만 보여준 탓에 실력도 없이 자존심만 강한 군대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물론 식민지에서 영 좋지 않은 일을 겪은 것은 정치권의 잘못된 결정과 핵무기 전력 증강으로 예산도 없고 상황도 나쁜 프랑스군이 독박을 쓴 것일 뿐이다. 그래도 나토에서 해군만 집중적으로 키운 영국[124]과 육군만 비대해진 독일에 비해 3군이 가장 균형을 이뤘다고 평가받고 있다.

핵무기항공모함도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 러시아와 같은 초강대국에는 비할 수 없지만, 핵무기를 이용해서 적국의 대도시들은 충분히 저승길 길동무로 삼을 수 있다. 그래서 예전 식민지에서 정변이 일어났다고 하면 프랑스군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많은 사상자가 생겨도 정치적으로 문제될 것 없는 외인부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국외 파병에도 나름 공을 들이고 있다. 알제리베트남에서의 실패 사례가 눈에 띄지만, 단기간에서는 아프리카프랑스어권에서 프랑스군의 개입은 상당히 효과적인 사례도 많았다.

외인부대가 가장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국외에 투입되기 때문에 이들이 프랑스군의 정예인 것처럼 보이고 이는 사실이긴 하지만, 외인부대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규군의 정예도도 그에 뒤쳐지지 않게 높다. 특이하게 국외에 자주 출동하는 해병대(Troupes de Marines)는 해군 소속이 아닌 육군 소속이다. 그 외 해군 육전대를 별도로 보유중이다. 프랑스군의 전체적인 전력 자체는 축소되는 추세이지만 병사 개개인의 정예도, 특히 외인부대와 프랑스 특수전부대와 같은 정예군들의 실력은 세계에서도 손에 꼽는다.

친미적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집권 이후 수십년 만에 나토에 복귀했다. 나토에 복귀한 이유는 사르코지의 성향도 성향이지만, 실상은 현재 프랑스 경제상황이 나빠서 프랑스가 예전처럼 자주 국방을 수행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국 혼자 떠받들고 미국이 중심되는 나토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파리 테러 이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보복을 천명했지만, 실제론 프랑스순의 사정상 해군 항공대와 공군의 공습 이상의 실질적인 보복이 가능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본인들도 그걸 아는지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국가헌병대 및 예하의 대테러부대GIGN은 상당한 실력을 자랑한다. 1950년대부터 70년까지는 독립을 요구하는 바스크인이나 알제리 독립단체의 테러를 겪고, 70년대부터는 프랑스에 몰려 사는 각국의 망명자들을 노리는 암살 및 테러 등에 시달려온 탓에, 그동안 축적된 대테러전 노하우는 세계 여러 유수의 최정예 특수부대들과 함께 세계 최고의 경지에 달해 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다른 프랑스 특수전 관련 부대들 또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다. 1994년에 테러범에 납치된 에어 프랑스기 납치사건도 인질 전원 무사, 테러범 전원 사살로 깔끔히 해결하여 프랑스군의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말리의 한 결혼식을 테러집단의 비밀 회합으로 오인폭격해 수십 명이 사망하여 국제적 이미지가 굉장히 나빠졌으며, 프랑스 밖 국가 국민들의 선진국 환상을 깨뜨리는 사례가 되었다. # 다만 프랑스군 측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닌 게, 중동에선 결혼식장에 AK를 그냥 이유없이 흥을 돋구겠다는 이유로 난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인폭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기본적으로 현대전에서 오인폭격은 상상 이상으로 자주 일어나고 있는 상황인데,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폭격 체계를 자랑하는 미국 공군조차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무려 민간병원을 오인폭격해서 수십명을 죽이거나 국경없는 의사회 멤버들을 죽이거나 하여 엄청난 비판을 받아야 했으며, 최근에도 IS 토벌전 당시 IS 병사들과 싸우던 쿠르드족 민병대에게 오인폭격을 가해 60여명을 죽이는 등, 선진국 공군들이 외부에 개입하다가 오인폭격으로 엄한 사람 죽이는 경우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 이번에는 프랑스 항공우주군이 이 행위를 일으킨 것이다.

국방과학기술 2위, 군수산업시장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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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역대 편제



[1] 켈트의 한 일파. 갈리아 켈트라고도 말한다.[2] 이 지역에서 살던 켈트계 민족은 보이족이라고 불렸다.[3] 게르만족이 하나의 민족이 아닌 것과 같다. 독일인덴마크인이 같은 게르만계 제어 사용자 민족들이지만 별개 민족인 것과 같다.[4] 오늘날의 독일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로마인들 입장에서 '게르마니아 땅에 거주하는 야만족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게르만계 민족들은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식보다 훨씬 다양하고 포괄적이다.[5] 물론 결과적으로 둘 다 실패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와 로마인들에게 패하면서, 아르미니우스는 다른 게르만 부족들에게 살해되었다.[6] 스파타 등의 장검류. 이러한 장검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차츰 기존 로마의 제식(?) 칼이던 글라디우스를 대체하게 되었다.[7] 특히 당시 그리스에서 토락스라고 불리웠던 체인메일 계통. 로마의 로리카 하마타 계열로 이어졌다.[8] 샤를 드 골프랑스 대통령 曰, "프랑스의 시작은 클로비스 대왕의 프랑크 왕국부터이다."[9] 통칭 수아송 왕국이라고 부른다.[10] 현대 프랑스어 발음으로는 메로뱅지앙[11] 부르고뉴, 프로방스 등지[12] 물론 프랑크와 한 때 싸우던 입장이었던 훈족이 보기에는 그저 뚜벅이들이었겠지만.[13] 서고트의 잔당 세력은 아스투리아스 지역으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훗날의 카스티야, 레온 등 오늘날의 스페인을 구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14] 삼국지로 빗대자면 조조승상직을 가지고 후한을 휘두르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15] 현대 프랑스어로는 페팽 르 브레로 알려져있는 인물이다.[16] 소위 니더작센인은 이 북독일 작센족의 후예이다. 앵글로색슨족의 색슨(Saxon)이 작센(Sachsen)의 영어명칭이다.[17] 이 게르만계 민족인 랑고바르드인들은 로마인, 오스트로고트(동고트)인과 함께 현대 이탈리아인의 주요한 조상들 중 하나이다.[18] 일종의 어용 부족 군대 개념이다.[19] 훈족은 아틸라의 사망 이후 장기간의 내전, 유목민으로써의 성장 원동력 종료 시점이었다는 문제, 주변 게르만계 민족들 전부가 훈족을 증오하여 훈족을 몰살시킬 것을 원했다는 점 등이 악재로 작용하여 결국 고트인, 게피다이인 등등에게 협공을 맞아 사실상 멸족되었다. 현대 헝가리인은 자신들이 훈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지만,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유력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훈족의 후예가 아니라 피노-우그릭 계통의 우랄계 민족 출신인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헝가리인들이 정신적인 형태로라도 훈족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훈족 잔당들과 헝가리인들이 혼혈을 이루었을 가능성도 온전히 배재할 일은 아니지만.[20]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의 역사로 간주되는 고대 세력들의 전적[21] 오늘날의 네덜란드에 위치한 프리스족의 나라.[22] 여담으로 이 알레마니족이 프랑크인의 뇌리에 깊게 남은 것이기라도 한 것인지 이후 프랑스인들은 독일을 줄곧 알레마뉴, 즉 '알레마니인의 땅'이라고 부른다.[23] 백년전쟁에서의 프랑스군이 패한 대표적인 3개 전투 중 하나인 크레시 전투에서 한 말로 기사만 믿고 닥돌하는 중세 프랑스의 막장스러운 면모를 풍자하는 용도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필리프 6세는 여러 군사 전략/전술 면에서 유능한 인물이었고, 크레시 전투에서 저런 말을 한 충분한 사유도 존재하였으므로, 필리프 6세나 당대 프랑스인들이 기사 돌격만 믿고 정면 돌격만 반복하는 바보들인 것은 전혀 아니다. 특히 필리프 6세가 이런 말을 할 정도로 프랑스 기병대가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한 것이다.[24] 현대 프랑스어로는 샤를마뉴로 불리우며 현대 독일어로는 카를 데어 그로세(Karl der Große), 현대 이탈리아어로는 카를로 마그노(Carlo Magno)이다. 일반적으로는 샤를마뉴라는 명칭이 제일 유명하며 최근에는 어느 한 쪽에 치우쳐지지 않은 중립적인 표현을 위해 주로 카롤루스 마그누스라는 라틴어 발음이나 카롤루스 대제로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25] 독살설 존재.[26] 우리가 잘 아는 오딘, 토르 등이 등장하는 바로 그 게르만 신화를 말한다.[27] 프랑크인은 판노니아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하였으나 아바르인도 재기불능 상태였기에, 얼마 안 가서 판노니아는 사실상 무주공산의 땅이 되었고, 훗날 마자르족이 이주해와 그 땅에 자리잡으면서 헝가리 왕국을 건설한다.[28] 현대 프랑스어로는 루이(Louis), 현대 독일어로는 루트비히(Ludwig), 현대 이탈리아어로는 루도비코(Ludovico)이다.[29] 장남 로타리우스 1세가 중프랑크, 차남 피핀이 아키텐, 3남 루트비히가 동프랑크, 그리고 후처 소생인 샤를이 서프랑크를 나누어 가졌다. 로타리우스는 물론 장남으로써 제국을 독차지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피핀은 샤를과의 암투 끝에 패하여 아키텐을 잃으면서 샤를이 아키텐을 서프랑크에 통합시켰고, 이것은 오늘날의 프랑스로 이어지는 기본적인 영토 기반이 된다.[30] 다만 동프랑크=독일의 제후들은 카롤링거 왕가 사람과의 혼인을 통해 모계로나마 카롤루스의 혈통이 자신들에게 흐름을 말하며, 이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유지하였으므로, 카롤링거 혈통의 영향 자체가 부정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서프랑크=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향후 프랑스를 방계 가문들인 발루아, 부르봉, 도를레앙의 치세를 포함하여 1천년 가까이 지배하게 되는 카페 왕조 역시 자신들이 모계로 카롤루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31] 이들은 훗날 덴마크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등으로 분화된다.[32] 동아시아에 비유하자면 노르드가 일본인이라면 바이킹은 왜구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33] 자세한 내용은 노르만족 항목 참조.[34] 여담으로 동프랑크의 프랑크인들은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게르만계 토착민족들인 작센인, 튀링겐인, 슈바벤인 등등, 그리고 서슬라브계 민족들인 포메른인, 체코인, 소수의 폴란드인 등과 섞이면서 차츰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장기간에 걸쳐 정체성이 변화,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35] 구호 기사단은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인 비중이 줄어들게 된다.[36]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대신 '혼인무효'라는 것이 있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37]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 오토 4세는 제위에서 폐위당하였고, 존 왕은 분노한 잉글랜드 제후들의 위압에 말려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게 된다. 여담으로 본래 프랑스인 귀족 가문에서 시작한 플랜테저넷 가문은, 존 왕의 실패 이후 프랑스 방면 영토를 너무 많이 잃으면서 잉글랜드 왕국령에 집중하며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고, 에드워드 1세 때에는 아예 귀족들은 프랑스어가 아니라 영어를 쓸 것을 명령하면서 플랜테저넷 왕가와 노르만 귀족들의 영국인화의 역사적 행보를 걷게 되었으므로 필리프 2세의 승리는 다름이 아니라 영국/역사에도 큰 이정표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38] 다소 과대평가라는 말도 있지만[39] 당장 프랑스가 참패한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는 열심히 기재되어있지만 백년전쟁이 중반부에 프랑스 쪽으로 완전히 전세가 쏠려버린 샤를 5세 치세에 잉글랜드군이 참패한 렌 공방전, 코르슈렐 전투, 퐁발랭 전투, 카스티야 지역에서의 영불 간의 일종의 대리전 성격으로 벌어진 몬티엘 전투에서의 프랑스군의 승리 같은 것은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서 나무위키 문서만 가지고 백년전쟁을 이해한다는 것은 꽤나 편향된 지식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당장 샤를 5세 치세에 잉글랜드와 플랜태저넷 가문이 자신들이 전쟁 전 가지고 있던 영토보다도 더 영토를 잃고 잉글랜드 본토까지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국에서는 별로 많지 않다.[40] 물론 그들이 왜 방패를 지참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대금 부족이거나 제노바인들이 직무태만이었거나 혹은 크레시라는 전장 환경이 더러운 뻘밭이라 파비스 방패를 짊어지고 다니는게 곤혹스러워 짊어지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거나.[41] 프랑스군 1,500~3,000 / 잉글랜드군 5,000~6,000[42] 칼레는 100년 뒤인 1558년에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이마저도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43] 보통 프랑스군이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전투들은 잉글랜드군이 니가와를 하기도 전에 근접해버리거나 니가와를 하지 못하게 유인해 끄집어내는 것에 성공한 경우들이었다.[44] 여기까지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필리프 6세는 이와 같은 개념을 제노바 쇠뇌수들과 기사의 조합으로 시도했다. 플랑드르군을 상대로는 성공했으나 잉글랜드군을 상대로는 실패했지만.[45] 실제로 샤를 8세는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 이후 동로마 황제위의 마지막 합법적 계승자로써 떠돌아다니던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로부터 헐값에 로마 황제위를 구매하기까지 했다. 구매만 하고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46] 백년전쟁 이후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 영주 휘하의 병력들을 왕이 거둬들이고 이들을 앞세워 영주들로부터 영지를 몰수하거나 제압하는 식으로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물론 귀족의 권한은 여전히 강하다 보니, 국왕은 항상 귀족들을 경계해야 했다.[47] 이 당시 전쟁사적으로의 의미지만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는 잉글랜드도, 프랑스도, 합스부르크 제국도 아닌 바로 스웨덴 구스타브 2세 아돌프군대였다. 그가 남긴 유산은 칼 12세대북방전쟁에서 패전하기 전까지 스웨덴이 군사강국으로 군림하게 하는 발판을 다졌다. 하지만 물량 면에서는 프랑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48] '프랑스의 절대왕정' -서정복(충남대학교 명예교수)-[49] 오스트리아 대공국 외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거느린 주요 영토를 닥닥 긁어모으면 프랑스와 그럭저럭 인구수를 맞출 수 있었지만, 각종 산재한 문제들이 있었다. 자세한 건 하술된 부분 참고.[50] 단, 이 시기의 병력은 농사꾼들을 징병시킨 게 아니라 세금을 바탕으로 고용한 용병이었다. 여담이지만 최초의 국민개병제는 전술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치하의 스웨덴 바사 왕조였다.[51] 빨간 염료가 저렴하기도 했고, 총상이나 자상, 열상 등으로 피를 흘려도 핏자국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심리적 효과도 좋았다고 한다.[52] 전 버전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언급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제후국들, 특히 선제후국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차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 보는 건 명백한 오류'다. 당시에 제국 내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프로이센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차례나 전쟁을 벌인 것만 봐도 제국 내 강대한 제후국들은 잘해봐야 중립, 최악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53] 서부를 중심으로 한 헝가리인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전대 왕조인 아르파드 왕조, 카페앙주 왕조, 야기에우워 왕조의 뒤를 잇는 성 이슈트반 왕관의 주인으로 모시고 고분고분했지만, 동부의 에르데이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은 독립 에르데이 공국 시절의 향수나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제2차 빈 공방전을 유발한 퇴쾨이 임레의 기반은 상 헝가리였고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쿠루츠 봉기나 1848년 헝가리 혁명은 헝가리 동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54] 후스 전쟁의 원인이었던 얀 후스프라하 대학교의 교수였고, 30년 전쟁의 발단이 같은 곳에서 터졌던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배신하고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에게 왕위를 가져다 바치기까지 한 전적도 있었다. 이후 체코인들은 친 합스부르크 정책으로 선회하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천대 뿐이었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해 떨어져나간다.[55] 1두카트=순금 3.5g짜리 금화. 1억 두카트는 녹여서 금괴로 만들면 순금 350t이었다. 당시 스페인 GNP의 170%였다고.[56] 루이 14세의 전쟁덕질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카를 5세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유럽 외 지역 식민지를 상속할 때 같이 상속한 부채가 3천만 두카트였는데, 펠리페 2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 로비 자금 살포라던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던가, 잉글랜드 침공으로 아르마다를 거하게 말아먹었다건가 등등오만가지 삽질 때문에 펠리페 3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부채가 1억 두카트에 달해 사실상 변제가 불가능했다.[57] 실제로 이 부채 문제 때문에 펠리페 2세는 치세 동안 무려 4번이나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58] 스페인중남미에 확보한 대규모 식민지가 화근이었다. '신대륙으로 건너가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이 스페인 본토 젊은이들 사이에서 만연해진 바람에, 본토에서 식민지로 인구가 자꾸 유출됐다.[59] 그나마 유럽 다른 국가들이 전쟁을 마무리 짓고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할 때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스페인 보르본 왕조가 절대로 서로의 왕위를 겸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삽입해서 대서양 일대와 지중해 서부를 장악할 수 있는 불-서 동군연합은 막혔다.[60] 18세기 중반에 프리드리히 2세슐레지엔을 병합하기 전에 2백만 밖에 안 되었고, 병합 후에도 고작 3백만으로 늘어났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로 영토와 인구를 프리드리히 2세 초기의 배 이상으로 늘렸지만, 그래도 1천만 명을 밑돌았다.[61] 물론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제국 시종장 같은 지위와 화폐 주조권, 재판권 등 선제후 고유의 특권을 누려 왕이나 다름없었지만, 상대가 그 신성 로마 제국과 맞먹는 면적에 생산력과 인구는 곱을 뛰어넘는 프랑스였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발루아 왕조 시절에 종교법학자들을 동원해서 '각 왕국의 왕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그 국가의 통치권과 왕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는 황제와 같은 절대권력을 가진다.'라는 왕권신수설적 논리를 정립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내정간섭을 원천봉쇄한 뒤, 유럽의 패권을 두고 수세기에 걸쳐 신성 로마 제국, 정확히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하고 있었다.[62] 그나마 그 왕이라는 칭호도 König von Preußen이 아니라 König in Preußen였는데, 전자는 프로이센 왕이 프로이센 밖에서도 왕이라는 표현이었고, 후자는 프로이센에서만 왕이라는 것으로 동양식으로 정리하면 외왕내제의 하위호환인 이었다. 때문에 프로이센의 군주는 여전히 유럽 세계에서 공식적으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이었고, 그나마 브란덴부르크 대신 프로이센의 왕이라 칭한 것도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사실상 세습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알아서 기었던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발루아 왕조 치세의 프랑스에서 외왕내제 이론을 정립한 이래로 유럽의 거의 모든 왕국들이 이 이론을 도입했는데, 형식적이나마 제국의 일개 제후국을 다스리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이 감히 왕을 칭한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나아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차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 게다가, 제국 내에서 '왕'의 호칭을 쓸 수 있는 건 차기 황위 계승자인 '로마왕'과 선제후 중 한 명인 '보헤미아 왕이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두 왕의 자리를 수세기에 걸쳐 독식해왔다. 물론, 이 당시의 프로이센은 인구 대비, 절대 숫자, 질적 수준 모두 유럽 내 순위권으로 인정받는 막강한 육군을 갖춘 데다 이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맹위를 떨치면서 대외적으로도 사실상 왕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정식으로 왕국을 선포한 것은 제1차 폴란드 분할서프로이센을 병합한 1772년의 일이었다.[63] 그래도 프랑스는 본토 생산력이 워낙에 튼실해서 충격이 덜했지만, 본토가 부실했던 스페인은 펠리페 2세 사후 겉잡을 수 없는 망조가 열리기 시작했다.[64] 1678년 잉글랜드 왕국찰스 2세와 손잡고 네덜란드를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그러나 승자였던 네덜란드의 국력도 기울었다. 참고로 17세기 중엽까지의 네덜란드 국력의 일면을 살펴보면 전 세계 바다를 다니는 무역선 1만 척 중 70%에 육박하는 7천여 척이 네덜란드 국적선이었을 정도로 국력이 최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4세 군대의 인해전술을 막아 내느라 국력이 기울었는데, 가장 심각했을 때는 간척지를 만들기 위해 세웠던 제방을 터뜨려 적들을 수장시키는 고육지계까지 썼다고 한다.[65]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스페인 공주)가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오는 대신 스페인 상속권을 포기한다는 결혼이었는데, 스페인의 국력이 기울어서 지참금을 덜 챙겨온 걸 빌미로 상속권 드립을 치며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뺏으러 갔다. 애초에 마자랭이 스페인이 재정이 어려워 결국 지참금을 미납할 것을 내다보고 결혼을 추진했다고 한다.[66] 20세기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9대 조상이다. 초대 말버러 공작.[67] 이탈리아를 통일사보이아 가문 출신으로 어머니 올랭프 만치니마자랭 추기경의 조카였던 덕분에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나 올랭프 만치니가 루이 14세의 독살사건에 연루되어 쫓겨난 이력 때문에 루이 14세는 그를 외면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경쟁국인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넘어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해 복무했고 대 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헝가리트란실바니아 공국을 통째로 오스트리아에 안겨주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대 튀르크 전쟁이 마무리되자마자 프랑스를 상대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혈통상으로는 이탈리아인이며 교육은 프랑스식으로 받았지만, 활동지였던 오스트리아의 언어인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참고로 이 사람의 위상은 천하의 나폴레옹조차 "내 승리의 비결은 별 게 없다. 알렉산더, 한니발, 카이사르, 프리드리히 2세, 구스타브 2세, 사부아 공자 외젠, 튀렌[이상](의 전쟁기록)을 읽고 또 읽을 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그 정도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가적 영웅이었던 덕분에 벨베데레 궁전을 남길 수 있었다.[68]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도팽의 차남 필리프를 밀었는데, 당연히 왕세손은 따로 프랑스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루이 14세가 스페인을 사실상 위성국화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반대편 오스트리아를 밀었다가는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아예 통합되어 동군연합이 되기 때문에 프랑스와의 전쟁명분이 완전히 퇴색되어버렸다.[69] 유럽 각국들로서는 반드시 막아야 했다. 두 나라가 하나로 합쳐졌다면 프랑스-스페인 연합에 의해 유럽 각국이 고사했을 공산이 컸기 때문. 게다가 가공할 본토 인구와 생산력을 자랑하는 프랑스광활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가진 스페인은 상호보완적인 부분이 있어서 1+1이 단순히 2가 아니라 그 이상의 상승효과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불-서 연합은 반드시 막아야 할 문제였다.[70]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의 수많은 사생아 중 한 명이었으나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어머니는 스웨덴 출신 마리아 아우로라 쾨니히스마르크(Maria Aurora von Königsmarck 1662~1728).[71] 영국이 유럽에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피트의 식민지 우선정책과 달리 조지 2세는 열렬한 유럽파였다. 그 이유는 아직 조지 2세까진 하노버 선제후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세대였기 때문.[72] 물론 프랑스가 식민지에 전력과 물자를 충원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영국 해군의 노략질과 공격에 바다 밑 정모 행을 면치 못했다.[73] 샤를 드 로앙(Charles de Rohan, prince de Soubise, 1715-1787)이라는 인간으로 방탕하고 놀기 좋아하는 똥별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의 로앙 추기경의 아저씨뻘이다.[74] rocket이 아니다. locket이라고 쓰며, 조그만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갈 수 있는 목걸이다.[75] 아닌 게 아니라 프로이센의 수도였던 베를린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짓밟혔고, 전 국토가 전쟁에 휩쓸리면서 프로이센으로서는 7년 전쟁이 이겨도 이긴 전쟁이 아니게 됐다.[76] 이는 한 번도 유럽 정치와 그 확장판인 세계 정치, 최소한 유럽과 이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에서 패권을 놓지 않으려는 프랑스가 경찰 역할을 자처하고 실제로 세계 경찰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데서 기인한 결과다. 오죽하면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자국을 '라 그랑드 나시옹'(La Grande Nation, 프랑스어로 '위대한 국가'라는 뜻)이라 부르겠는가. 물론 그런 단순 자존심 싸움 말고도, 프랑스의 핵개발 같은 문제도 끼어있다.[77] 말이야 '쟁탈전'이라고 하긴 하지만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문제로 총탄을 주고받은 적은 없다. 두 나라는 19세기에는 대체로 같은 편이었다. 유명한 파쇼다 사건 때마저도 두 군대는 그냥 대치하기만 했다.[78] 단, 프랑스에선 발라클라바 같은 누가봐도 정신나간 심한 바보짓은 없었다.[79] 버나드 로 몽고메리著 <전쟁의 역사> 무능과 별도로 시대상이 변했는데 각국의 전쟁수행방식 자체가 뒤떨어것도 큰 요인이다.[80] 장거리 운송에서 마초를 출발지에서 모두 싣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길가의 풀을 소모하게 되었는데, 풀은 일단 먹어치우고 나면 다시 자라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81] 사망자만이 아닌 실종 포로등의 전투 손실이다. 당시 인구를 보면 프로이센은 인구가 약 2,000만, 프랑스는 3,800만었다.[82] 물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국왕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야 했다.[83] 그런데 독일군 측도 이런 면이 없는 건 아니었으며, 1차대전 중반까지 프로이센군 전통의 피켈하우베(스파이크 철모)를 고집하다가 엄폐가 중요한 참호전에서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다.[84] 현대 군대에도 사기 증진을 위한 이런 류의 멋 중시는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미군이 사기 증진을 위해 2001년부터 모든 부대에 베레모 착용을 지시했다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처럼 그늘이 거의 없는 곳에서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다시 전통적인 군모를 보급한 사례가 있다.[85] 프랑스 4,000만 명, 독일 6,700만 명[86] 독일 제국군의 주력은 프로이센군이었지만, 이밖에도 바이에른군, 뷔르템베르크군 등의 소규모 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87] 이 때문에 1차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징집할 때는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어 반전여론에 불을 붙일까봐, 이런 제도를 상당히 보완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버렸다.[88] 21세기 기준에서야 이 정도면 출산율이 높은 나라였지만, 이 당시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인구 대체출산율이 2.1명이 아니라 2명대 후반에 달했다. 프랑스가 아무리 타 국가들에 비해 평균수명이 높았다해도 40대 초중반인 시절이었다.[89] 다른 나라에 비해 프랑스의 인구증가저조는 유럽사의 미스테리라 학자들 연구 대상이다. 영국과 독일은 신대륙으로 인구 유출이 있는데도 몇 배씩 늘었는데, 프랑스는 이민자도 적었다. 그렇지만 인구증가의 필수조건인 경작지는 독일이나 영국보다도 훨씬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는 매우 미미했다. 나폴레옹 시절 상속법 변경으로 인한 저출산 여파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90] 당시 프랑스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은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었다.[91] 프랑스군의 방식이 독일군보다 먼저 발명되었다. 그러나 그 프로펠러를 만든 사람은 독일군 진영에서 격추되어 불시착하고 말고 결국 독일군 역시도 비슷한 장치를 개발한다. 출처: 무기의 세계사[92] 야드파운드법 일색인 미군에서 인치가 아닌 155mm 구경 포탄을 쓰는 이유가 바로 프랑스의 영향이다.[93] 사실 당시 영국에도 장전시간도 짧고 사정거리도 길고 정확한 강철 후장포가 있었다. 문제는 이들 대포는 민간업자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국영 조병창에서는 이런 후장포를 만들 값비싼 시설을 도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 해군은 민간업자들이 만든 대포를 채택할 것을 거부했으며, 이런 자세는 프랑스 청년학파의 전략이 심대한 위협으로 다가올 때까지 계속되었다.[94] 구축함(destroyer)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뢰정 구축함(torpedo boat destroyer)를 줄인 말이다.[95] 사실 대형함에 비해 딱히 확실한 우세를 유지하지도 못할뿐더러, 소형함이 가진 신무기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면 군사적 가치가 뚝 떨어져버리는 것은, 비대칭 전략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만하다. 청년학파 시대의 어뢰정은 영국 해군이 암스트롱포를 장비하게 되면서 몰락했고, 현대 시대의 미사일 고속정은 대형함이 헬기를 장비하게 되면서 몰락했다. 둘 다 신무기로 무장하고 나올 당시에는 위력적인 무기체계로 평가받았으며 얼마 못가서 대책이 나와버려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무기를 장착한 소형함이 출현하면 기존의 대형함들을 위협할 수 있지만 대형 플랫폼은 그러한 신무기를 활용하는데 있어서도 훨씬 선택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96] 초기에는 서부전선의 군대 그 자체에 가까웠고, 1916년에 영국군이 대거 투입된 이후에도 여전히 주력이었으며, 1918년의 백일전투에서도 주력이었다.[97] 이때 러시아 제국군은 대략 2차대전의 중국군 정도의 역할을 했다. 주요 전선에서 직접 몸빵을 맡는 대신, 비주요 전선에서 따로 몸빵을 해서 주요 전선에서 싸우는 연합군의 압력을 덜어준 것이다.[98]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2022)에서도 이 두 요소가 모두 언급된다.[99] 그러나 전초에 소수 "정예"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게, 숙련된 영국군은 매우 뛰어난 분전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정예병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그래서 1916년까지 전선에 숙련된 영국군이 적었고 피터 심킨스의 경우에는 독일군이 상대적으로 영국군이 약체화된 1915년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하지 않고 만만한 동부전선에서 전과를 올린 게 결과적으론 마지막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독일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것이라 평가할 정도였다. 1915년 이후엔 서부전선에선 프랑스군, 영국군, 독일군 가릴 것 없이 충원율 100%가 넘는 부대가 속출했다. 사망, 부상, 실종, 포로 등으로 손실된 병력이 편제의 100%를 넘어 일부 운이 좋은 베테랑을 제외하고는 싹 물갈이가 되었다.[100] 탄넨베르크 전투 자체는 1개군이 전멸할 정도의 대패였지만, 마른 전투 시기에 독일군 일부를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켜서 프랑스엔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101] 러시아군의 장비 교육훈련과 장교 수준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매우 떨어졌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정도는 격파했다. 독일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갈리치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에 붕괴되었을 정도이다. 러시아군은 병력은 유지하면서 전선을 축소시키는, 러시아군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해야 했고 서부전선에서 압력이 줄어들었기에 프랑스군에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애초에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병력을 투입한 것도 러시아군 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니콜라이 2세가 투입을 지시한 것, 이는 동맹국 프랑스와의 의리 때문이었다.[102] Chars Légers. 르노 R35, FCM 36이 해당된다. 오치키스 H35는 르노 R35와 경합한 보병 경전차였지만, 보병 사단 소속 기병 수색대에서 채택해서 사용했다.[103] Chars de Bataille. 르노 D2, 르노 B1이 해당된다.[104] Chars Lourds. 2C 전차, FCM F1이 해당된다.[105] AMD or Automitrailleuses de Découverte. 파나르 178이 해당된다.[106] AMR or Automitrailleuses de Reconnaissance. 르노 AMR-33/35가 해당된다. AMD와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차이는 AMD는 장륜형 장갑차인 반면에 AMR은 궤도형 전차였다.[107] AMC or Automitrailleuses de Combat. 소뮈아 S-35가 해당된다.[108] 사실 이는 예산 문제가 더 크다. 대공황 이전 1920년대 프랑스군은 그 어느 나라보다 기계화와 차량화에 집중했었다[109] 독일군은 프랑스에게도 KV 쇼크 비슷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프랑스군의 기병전차라는 놈들은 1, 2호 전차를 아득히 뛰어넘는 넘사벽 스펙이었고 보병전차이자 중전차인 샤르 시리즈에 오면 1:13의 전설까지 자랑했다. 문제는 역시 전술 교리와 무전기 장비 여부이다.[110] 오히려 독일군 총참모부가 이 책을 가져다가 프랑스군의 대응방안을 연구했다고 한다.[111] 북아프리카 전역 중 영연방군과 함께한 가잘라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빼앗긴 벙커를 재탈환하기 위해 돌격하는 모습이다. 이들의 분전으로 독일군은 유리한 위치에서 공세를 가하면서도 큰 손실을 입었고, 이들은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한계까지 버티다가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격전지였던 비르하케임은 지금도 외인부대에서 전설로 언급되는 성지이다. 여담으로 나치 독일에 항거하던 독일인들이 자유 프랑스군에 많이 자원했다고 한다. 주로 통역이나 도청 임무를 맡았지만, 전투 부대에도 투입되었다.[112] 사실 저런 소수 정예부대가 상대적으로 기량 및 훈련도는 낮고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적을 상대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총검돌격밖에 없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저런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총검돌격은 생각보다 성공율이 높다. 물론 상대 나름이지만 말이다. 북한군한국군에게 총검 돌격을 한다 생각해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펑 펑 드르륵 끝 지평리 전투 당시 중공군의 의표를 효과적으로 찌른 측면도 컸는데, 당시 꽹과리 등의 악기로 한국 및 UN군을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어내는 게 중공군의 기본 전술이었고, 재미를 많이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똑같이 중공군이 쳐들어오자, 프랑스군은 사이렌을 울려 꽹과리보다 더 큰 소음으로 중공군을 역관광으로 놀라게 했고, 이는 적 전열 붕괴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113] 당연히 반자이 돌격과는 다르게 봐야 할 것이, 일본군전차부대에 착검돌격을 했다. 일본군이 대전차총검술을 시전한 것은 아직 제대로 된 대전차 전술이 100% 자리잡기 전에나 그랬지 2차대전 때는 초창기인 과달카날 전투부터 자살적인 공격을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지뢰화염병을 던지면서 한 것이지 무턱대고 칼을 들이댄 적은 없다시피하다. 인터넷 내에서만 널리 퍼진 낭설 중 하나로, 미군이 총검돌격을 경시한 것은 일본군과의 교전 경험 탓이 아니라 1차대전기 프랑스군의 화력 중심 교리를 받아들인 탓에 교리부터가 총검돌격과 거리가 멀었던 탓이 크다. 실제로 태평양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타군에 비하면 미군은 유독 총검돌격과 백병전을 꺼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며, 이는 미군과 교전한 대부분의 추축군의 미군에 대한 인식과 동일하다.[114] 출처: 콜디스트 윈터/ 데이비드 핼버스탬 저/ 정윤미, 이은진 공역/ 살림출판사.[115] 다만 국력저하가 되었다고 해도 UN 상임이사국, 핵보유국이며, 영국보다 훨씬 큰 해외영토보유하고 있다. 당장 프랑스령 기아나만 봐도 꽤 큰 해외영토다.[116] 다만 정치가들의 문제가 더 클 뿐이지 프랑스군의 문제도 있었다. 당장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도 시대상황에 맞지않게 식민지를 유지하려 들었지만 적어도 이 둘은 프랑스마냥 공수부대 같은 정예부대가 전멸하는 참사는 겪지 않았다.[117] 미국영국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맺었던 핵기술공유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영국의 핵개발에 도움을 주지 않은 전과가 있다. 당연히 영국은 이에 격분했다.[118] 이후 프랑스는 1990년이 돼서야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재가입했으며, 프랑스군이 NATO 통합군으로 재가입된 건 프랑스가 탈퇴한 지 거의 40년이 지난 2009년의 일이다.[119] 단, 이탈리아와 더불어 중국에도 무기 수출을 할 정도로 유럽 내에서 아웃사이더였다.[120] 다만 쿠웨이트군도 쿠웨이트 침공 당시에 영국제 2세대 전차인 치프틴빅커스 Mk.1을 주력전차로 굴리고 있었다.[121] 그러나 러시아 수출 예정이던 미스트랄급 강습상륙함은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프랑스가 인도를 취소하고 러시아에 보상금을 지불하였다. 완성된 함정은 이집트군이 사갔다.자세한 내용은 미스트랄급 항목 참조.[122] 영국은 2030년까지 중형항모 2척과 초대형 호위함 (8,000t급, 26형 호위함) 8척, 그리고 신형 31형 호위함 (만재 6,000t) 6척을 추가할 예정이다.[123] 아르헨티나가 먼저 영국의 식민지를 침공했다. 영국이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방어를 한 것.[124] 현재 대한민국 육군이 매우 비대해진 상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25] 역대 공군 부대 목록[126] 알제리 독립전쟁 투입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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