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colbgcolor=#002395> 문화유산 | 1979년 몽생미셸과 만 Mont-Saint-Michel et sa baie | 1979년 샤르트르 대성당 Cathédrale de Chartres | 1979년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 Palais et parc de Versailles |
1979년 베즐레, 교회와 언덕 Basilique et colline de Vézelay | 1979년 베제르 계곡의 선사 유적지와 동굴 벽화 Sites préhistoriques et grottes ornées de La Vallée de La Vézère | 1981년 퐁텐블로 궁전과 정원 Palais et parc de Fontainebleau | ||
1981년 아미앵 대성당 Cathédrale d'Amiens | 1981년 오랑주 지방의 로마 극장과 개선문 Théâtre antique et ses abords et "Arc de Triomphe" d'Orange | 1981년 아를의 로마 시대 로마네스크 기념물 Arles, monuments romains et roma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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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생 사벵 쉬르 가르텅프 교회 Abbatiale de Saint-Savin sur Gartempe | 1985년 가르 교(로마시대 수도교) Pont du Gard | 1988년 스트라스부르 : 그랑딜에서 노이슈타트까지 Strasbourg, Grande-Île et Neustad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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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아비뇽 역사 지구 : 로마 교황의 궁전, 감독파 앙상블, 아비뇽 다리 Centre historique d’Avignon : Palais des papes, ensemble épiscopal et Pont d’Avignon | 1996년 미디 운하 Canal du Midi | 1997년 카르카손 역사 요새 도시 Ville fortifiée historique de Carcassonn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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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유산 | 1997년 피레네 산맥 : 몽 페르뒤 산 Pyrénées - Mont Perdu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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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국어 | 몽생미셸과 만 |
영어 | Mont-Saint-Michel and its Bay | |
프랑스어 | Mont-Saint-Michel et sa baie | |
국가·위치 | 프랑스 노르망디 망슈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79년[1] | |
등재기준 | (i)[2], (iii)[3], (iv)[4] | |
지정번호 | 80 |
Mont-Saint-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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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지방, 망슈의 해안 근처에 있는 작은 섬이자 도시. 몽생미셸은 성 미카엘[5]의 산이란 뜻이다.몽생미셸 수도원의 인장으로 위에 왕실 상징인 푸른 바탕에 금색 백합 3개를 놓고 밑으로 10개의 은빛 조개껍데기가 있는 모습.
전승에 따르면, 708년 아브란슈의 주교로 있던 성 아우트베르토(라틴어: Sanctus Autbertus)(프랑스어: Saint Aubert 생 오베르)(축일 9월 10일)의 꿈 속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나 "바다 위에 성을 쌓아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베르 주교는 너무 뜬금없을 뿐더러 실현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말이기에 그냥 개꿈인가 보다하고 넘겨 버렸다. 그랬더니 미카엘 대천사는 두 번이나 더 나타나 같은 말을 했고, 세 번째로 나타났을 때는 손가락으로 빛을 쏘아서 주교의 이마에 상처를 냈다고 한다.[6][7][8] 이쯤 되자 오베르 주교는 자신이 꿈에서 본 것이 예사 것이 아니라는 판단에 미카엘의 계시대로 바다 위에 성을 쌓는 황당무계한 대공사를 시작했고, 몽 통브(Mont-Tombe)[9]에 성당과 수도원을 세워 대천사 미카엘에게 봉헌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10][11][12] 710년에야 몽 통브(Mont Tombe)는 그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Mont-Saint-Michel-au-péril-de-la-Mer(번역하면 "위험한 바다의 몽생미셸"정도로 할 수 있겠다.)"[13]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후로도 중세 시대 내내 앞서 나온 이름의 라틴어 버전인 "Mons Sancti Michaeli in periculo maris"로 불리다가 점차적으로 우리가 아는 "Mont Saint Michel"로 불리게 된다. 966년에는 노르망디의 리샤르 1세가 이곳에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을 보냄으로써 본격적인 수도원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렇게 수도사들이 깃들어 살게 되고, 1023년부터[14] 로마네스크 수도원을 세우기 시작한 이후 몽생미셸은 서유럽 전역에서의 순례지가 되었다.[15] 당시 서유럽 수도원들은 수고본(manuscript/manuscrit)[16]을 생산하는 곳으로서 문화적, 지적 활동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는데, 앞서 말했던 몽생미셸의 종교적 중요성 때문에 많은 프랑스와 영국의 군주들[17] 또한 순례함으로써 정치적 중요성 또한 갖게 되었다.
섬의 거대한 모래톱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바위섬 위에 지어진 몽생미셸 수도원은 높이가 최대 80m에 이르는 탓에 ‘서구의 경이(Wonder of the West)’로 꼽힌다. 수도원 건물은 11세기와 16세기 사이에 건축되었지만, 군사 요새화를 위한 공사도 별도로 진행되었다. 독특한 자연 지형을 극복·적응하여 건설된 기술적 · 예술적 걸작으로 손꼽힌다. 수도원과 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베네딕토회 소속의 수도원이 들어와 있다.
상술하였듯, 수도원으로 출발했지만 노르망디 해안의 한 축을 막아서는 몽생미셸의 전략/전술적 가치를 알아본 프랑스[18]에 의해 오랜 세월 군사적 증축이 종교적 증축보다 더 열심히 거듭되었다. 원래 조수간만 차이가 큰 노르망디 해안 중에서도 유독 큰(최대 14m) 이곳의 공사는 당연히 극악의 난이도. 썰물 때에만 기나긴 갯벌을 통해 인력 및 자재를 투입하며 몽생미셸의 공사 및 보수는 매우 오랜 기간 꾸준히 이어졌고, 무려 1000년도 더 지난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형태가 완성될 수 있었다.
이런 지형적인 단점은 군사요새나 감옥으로 쓰기에는 오히려 딱 좋았다. 때문에 몽생미셸은 수도원과 성당이라는 본연의 기능 외에도 이 부수적인 목적들을 훌륭히 수행해왔다. 특히 백년전쟁 내내 영국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을 방어해왔다. 1356년, 영국이 인근 통블렌(Tombelaine)을 점령하고 요새를 세워 수도원을 공략하려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수도원 수비대장으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임명되었고, 그는 몇 년간 영국의 공세에 맞서 승리를 따내게 된다. 1419년, 루앙이 영국군의 손에 들어가자 당시 수도원장은 영국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나, 샤를 7세는 새 수비대장을 임명하여 영국의 공세를 막아내도록 한다. 1429년부터 1440년까지 몽생미셸은 노르망디에서 영국에 저항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특히 1434년 잉글랜드군은 몽생미셸에 맹렬한 포격을 동반한 공성전을 걸어 왔지만 몽생미셸의 병력은 이를 모두 버티며 백년전쟁 기간 내내 프랑스의 철옹성으로 버틴 역사가 있다.[19] [20] 이는 프랑스 국민들의 가톨릭 신앙심, 특히 미카엘 대천사 신심을 크게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철옹성을 감옥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1세 시기 부터인데, 루이 14세 시기까지만 해도 수도원 안에 감옥이 "있는" 수준이었지 모든 섬이 감옥으로 기능하던 건 아니었다. 수감자들은 10여 명이 있었다고 하며, 대개 지역 탐관오리나 미친 수도승(...)들을 가뒀다고 한다. 한편 1731년 루이 15세는 이 섬을 증축한 뒤 감옥으로 탈바꿈시켰지만, 본격적으로 수백 명씩 섬에 잡아넣게 된 건 프랑스 혁명기 때부터였다. 혁명기 당시 정부는 섬의 수도승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섬을 "몽 리브르(mont libre)[21]"으로 명명하고 교도소로 만들었는데, 이를 두고 빅토르 위고는 이곳을 방문하여 수도원이 얼마나 쇠락했는지, 죄수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 비판하며 "성유물함의 두꺼비"라고 까내린 바 있다. 1863년이 되어서야 몽생미셸은 감옥의 신세에서 벗어났는데, 1793년부터 1863년까지 약 800여명의 수감자를 수용했던 것으로 추산된다.[22] 70여년 간 감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인지 수도원 경내에는 죄수들이 남긴 흔적들이 굉장히 많으며, 감옥과 관련된 장치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23] 당시에는 중앙 수도원도 감옥으로 사용했는데, 당시 감옥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도에 감방들이 줄줄이 달린 구조[24]가 아니라 커다란 기숙사 같은 느낌으로 수도원 본당의 익랑[25](transept)을 나무 판자로 나누고, 본당에 죄수들을 밀어넣는 식으로 감옥을 운영했는데, 당시 죄수들이 이용하던 짚 메트리스만 300여개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유럽에서 가보는 대성당들보다 수도원 본당이 협소한 편임을 감안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몽생미셸은 혁명기 동안 중세 시대 성지에서, 죄수들이 하루 12-14시간씩 밀짚모자를 만들거나 실을 잣고 선박용 옷감을 짓는 감옥으로 탈바꿈되었다. 총평으로, 상당히 열악하고 끔찍한 곳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감옥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특별히 열악한 곳은 아니라고... 그래도 이 섬의 환경 및 건물구조를 생각하면 탈옥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2차 대전 때도 결과적으로 큰 피해는 없었지만, 하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된 노르망디에 있었기에(...) 주변에 연합군의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이 떨어지고, 독일군에 점령되어 수도원 첨탑에 레이더가 설치되는 등 약간의 부침 정도는 겪어야 했다.[26][27] 1944년 8월 1일 몽생미셸은 3명의 종군 기자를 태운 미군 지프의 도착과 함께 "해방"되었다. 8월 6일에는 몇몇의 기자들과 함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도착하였는데, 전쟁 전에 몽생미셸을 와본 헤밍웨이는 동료들에게 La Mère Poulard[28]에 가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몽생미셸은 모래톱을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서 밀물 때는 고립되고, 썰물 때 물이 빠지면 육로로 통행이 가능했다. 그러다 1870년대에 들어 제방 겸 도로를 만들어서 육지와 완전히 연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도로 때문에 오히려 섬에 위치한 몽생미셸 특유의 이미지가 훼손되고 갯벌이 심각하게 왜곡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2015년에는 기존의 제방도로를 철거하고 그 대신 공중에 뜬 교량을 건설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모파상을 비롯한 프랑스 내외의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주는 등, 바다 위에 솟구친 드높은 성이라는 몽생미셸의 웅장하고 신비한 이미지는 현장에서 직접 보아야 그 진가를 느껴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증축/개조/용도변경이 거듭된 결과 수도원 + 성당 + 군사요새 + 작은 정원 + 왕족과 귀족의 접객실 + 명상실 + 자그마한 주택들 등이 어우러지고, 10,000t 이상 쌓아 올린 돌의 하중을 떠받치는 높은 아치들과 굵은 기둥들의 대열 등 수많은 매력포인트들이 나선형의 동선을 따라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정점인 정원 옆 난간에서는 60~70m의 까마득한 높이에서 노르망디의 광활한 갯벌과 지평선을 감상할 수 있다. 보면 볼수록 볼거리가 끊이지 않는 것이 몽생미셸의 매력이다.
파리에서 4시간(또는 그 이상) 걸리는 먼 위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여행 필수코스 중에 포함되며[29], 위 사진처럼 프랑스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대접받고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관광을 위해 미관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도로나 주차장 등의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10년간의 복원 사업 끝에 불필요한 주변 시설을 정리하고 조류와 강물의 흐름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고전적인 경관을 다시 되찾았다.
수도원의 거대한 벽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최고의 관광지로 유명한 만큼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호텔과 식당으로 모두 바뀐 상태. 현재(2021년 기준) 몽생미셸의 거주자는 25명이다. 그 중 대부분은 현재도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성직자들과 수도원 직원들 및 공무원들이 대부분으로, 이 중에는 이곳을 관리하는 신부 2명이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기술의 발달(...)로 자동차를 타고 통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근처 마을에 산다.[30] 당연하게도, 중세 시대 거주자 수는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산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자료가 없어 추정한 바로는 수백명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특히 백년전쟁 중 몽생미셸의 인구가 눈에 띄게 늘어났는데, 이는 당연히도 여기로 피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부터 전해지는 바로는 백년전쟁 중 몽생미셸에 119명의 "용맹한[31]" 노르망디 기사들이 전쟁 중 피신하여 몽생미셸을 넘기라는 영국 왕에 맞서 싸웠다고 한다. 중세에 기사들이 홀몸으로 다니지 않고 주위의 시종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녔던 점과 그들을 따르는 병사들 수까지 합산하여 생각해 보면 당시 인구는 대략 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후 인구는 대략 평균 200-250명 정도가 살았으며 현대에는 30명 내외가 거주해 왔다. 몽생미셸에 몰리는 어마어마한 인파와 낙후된 기반 시설을 생각하면 진정한 용자들만이 사는 셈이다.
수도원의 첨탑을 장식하는 성 미카엘 상은 1895년에야 설치되었다.[32] 해당 동상은 악의 화신인 용을 자신의 칼로 위협하는 미카엘 대천사를 나타내고 있다. [33] 백년 전쟁 이후 미카엘 대천사에 대한 신심은 백년 전쟁 중 영국군에 맞서 저항한 몽생미셸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모래를 실은 바람과 벼락에 의해 금도금이 손상되어 1987년과 2016년에 헬리콥터에 실려 복원 작업을 거치기도 하였다.[34]
영국해협 건너편 영국의 콘월에도 몽생미셸과 이름까지 비슷한 세인트 마이클스 마운트(St Michael's Mount)라는 꼭대기 수도원이 위치한 해안가 바위섬이 있다. 다만 몽생미셸에 비하면 높이나 규모는 작다.
여담이지만,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사이의 경계에 거의 걸쳐져 있는 위치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노르망디에 속해 있지만, 농담삼아 지금도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중 누구 것이냐 하는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브르타뉴 사람은 브르타뉴 거라고 하고, 노르망디 사람은 당연히 현재 속해 있는 노르망디 거라고 하는 식.[35] 역사적으로도 이곳은 브르타뉴 공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사이로 분쟁 지역이었는데,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36]에만 해도 당시 몽생미셸의 수도원장은 렌의 백작들과 브르타뉴 공작과도 친밀한 사이였으나 11세기 초[37] 리샤르 2세에 의해 노르망디 공국이 해당 지역을 완전히 지배한 뒤로 노르망디 공국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몽생미셸을 향한 브르타뉴 쪽의 집념도 만만치 않아서 해당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잃은 뒤에도 몇몇 공작들은 몽생미셸에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묻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 "그리스도교의 수호자이자 장려자"로서의 이미지를 노린 노르망디의 지배자들은 몽생미셸을 전폭적으로 후원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몽생미셸은 노르망디 공국의 영향력에 완전히 들어오게 된다.[38][39]
2. 관광
상술하였듯 몽생미셸은 내부/외부 모두 볼거리가 정말로 넘쳐나는 명소이다. 최소 3시간 이상을 안배하며 천천히 거닐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으니 지도상으로 보이는 작은 면적에 방심하지 말고 일정을 넉넉히 할애하는 것이 좋다.파리를 기준으로 몽생미셸로 가는 방법은 자가용(렌트카), 기차가 대표적이지만, 장거리 개인이동이 부담스러울 경우 구글링을 통해 파리-몽생미셸 당일치기 왕복 관광상품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2020년 초반인 현재 기준으로 약 15~20만원(식사 및 기념품 등 개인지출 별도)이 소요되며, 렌트카 및 기차와의 비용차이는 그리 큰 편이 아니니 취향껏 선택하도록 하자. 프랑스 전체 지도를 대충 보면 파리에서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아 보이지만
파리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렌까지 TGV로 이동하면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걸리며, 여기서 역 옆에 있는 버스터미널(Gare Routière de Rennes)에서 Keolis[41]가 하루 왕복 3회[42] 운행하는 직통버스를 타면 1시간 15분 정도 걸려 방문센터에 도착할 수 있다. 렌에서 환승은 TGV 도착시간에서 대부분 30분 내로 환승할 수 있도록 시간표가 짜여 있어, 장거리 이동치고는 효율적인 편이다.
또는 몽파르나스역에서 몽생미셸과 가장 가까운 역이 Pontorson Mont-Saint-Michel까지 성수기 하루 1회 운행하는 NOMAD 직통열차가 있는데, 여기서 다시 몽생미셸로 가는 2번 버스(Keolis 운행)로 갈아타고 이동할 수 있다. 버스 시간표도 열차 운행시간에 맞춰 20분 내외에 환승이 가능하다. 다만 고속열차가 아니라 소요시간만 4시간에 가까운 데다, 버스가 추가로 30분 정도 더 걸려서, 렌을 거쳐가는 것보다 소요시간면이나 운행횟수에 큰 장점은 없는 편이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2번 버스가 섬에서 약 350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들어가, 미리 방문 티켓을 인터넷으로 구매한다면 버스에서 내려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본 섬에 도착한다는 것 정도. 다만 티켓 인터넷 구매는 프랑스어 홈페이지에서만 지원한다.
상기하였듯 파리에서 몽생미셸은 생각보다 대단히 먼 거리이다. 따라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억지로 당일치기를 하는 것보다, 경유지인 렌, 캉, 인근의 생말로 등 지방도시들도 매우 매력적인 곳인 만큼 여기에 하루 이상을 추가하여 느긋하게 즐기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물론 체력이 버텨준다면 파리에서 아침 6시 반쯤 출발하는 첫 기차로 출발하면 생말로, 렌까지 당일치기로 둘러보고 저녁 늦게 파리로 돌아가는 방법도 가능하다.
2~3회 이상 환승을 해야 하는 대중교통 조합에 비해 자가용의 경우가 가장 쉽고 편안하다. 소요시간은 편도 4시간 정도. 그러나 이 경우 다른 관광지에 비해 다소 높은 비용이 든다는 것은 몽생미셸의 문제점. 15유로에 달하는 입장료 뿐 아니라, 기름값, 통행료에 더해, 주차요금도 파리 시내도 아닌 지방&시골 기준으로는 매우 높은 금액인 별도로 10유로를 받기 때문이다.[43][44] 여기에 한국인 관광객이라면 프랑스에 자가용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니 렌터카 비용도 든다. 게다가 편도 4시간, 왕복 8시간을 독박운전을 한다면 운전자 입장에선 이런 고생도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문제들로 몽생미셸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다소 감소 추세에 있어 프랑스 정부에서도 고민하는 과제라고 한다.
자가용을 끌고 갈 경우 몽생미셸 섬까지 들어갈 수 없다. 자가용 이용자든, 대중교통 이용자든, 모두가 약 3km 떨어진 셔틀버스 정류장(구글지도 링크)에서 시기에 따라 최소 5분에서 30분 간격으로 오는 셔틀버스, 또는 걸어서 입장할 수 있다. 당연히 자가용 주차장도 여기에 있다. 직원/작업자용 버스정류장이 바로 근처에 있는 탓에, 자칫 직원버스에 탔다가 쫓겨나고, 멀쩡한 관광객용 버스를 보내 버리는 등 시간을 30분 가까이 허비하는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 상기 링크에서와 같이, 버스전용 플랫폼이 세 줄 예쁘게 파여 있는 곳에서 탑승하면 된다. 셔틀버스비는 무료이다.
셔틀버스를 타고 편하게 입장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넉넉하면 몽생미셸을 향해 약 40여 분 느긋하게 산책하며 노르망디의 평야와 해안의 경치[45]를 즐기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다만 이곳의 바람이 매우매우 강하니 주의하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자주 몰아치는 곳이다.
파일:불꺼진 몽생미셸.jpg
안타깝게도 이 문서 최상단에 실린 사진처럼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몽생미셸의 야경은 2022년 하반기부터는 보기 힘들게 되었다.[46]
프레살레(pré-salé)[47]라는 양고기 요리가 유명하다. 몽생미셸 수도원의 입지가 바닷가에 접해서 소금기가 많다 보니 이 부근에서 자란 풀을 먹은 양들은 굳이 소금을 안 뿌려도 고기가 간이 맞다나... # 물론 재미로 듣고 넘어가자.
3. 대중문화에서
- 루이지 코지 감독의 1976년 영화 《라스트 콘서트》에서 도입부의 배경이 된 곳이다.
- 애니메이션 용자왕 가오가이가 파이널에서 부활한 거대전함 킹 제이더가 피아데켐 피크와 결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 애니메이션 개구리 중사 케로로 극장판 4기인 케로로 더 무비: 드래곤 워리어에서 작중 주요 무대이자 격전지로 나왔다.
- 대항해시대 3에서 튜토리얼에서 등장하며 모험자가 가장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다.
- 귀무자3의 주요 던전이기도 하다.
- 문명 6의 중세시대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 스트라이크 위치스 1기의 제501통합전투항공단의 기지 모티브가 되었다.
-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의 멀티플레이 맵 중 하나로 등장한다.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매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에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져있으나, 이에 대한 공식적인 근거는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탈리아의 치비타 디 바뇨레조(Civita di Bagnoregio)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 천사소녀 네티에서 최후의 무대인 폐수도원으로 등장한다.
- 수인 장미향 동인 게임 Knights College의 배경이 되는 학교 건물의 모티브이다.
- 꿈빛파티시엘 시즌2 44화 '초콜릿 프린세스'에 세계 케이크 그랑프리 대회 장소로 나왔다.
- 원신 몬드성이 이곳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굉장히 유사하다.
- 스나이퍼 엘리트 5의 캠페인 중 3번째 메인 미션인 '스파이 양성 학교'의 배경 장소인 보몽 생드니도 이곳을 모티브로 했다. 게임을 플레이해 보면 알겠지만 전체적인 모습이 몽생미셸과 굉장히 흡사하다.
4. 참조 링크
- 위키백과(프랑스어)
- 프랑스관광청의 몽생미셸 소개
- INSIDR의 몽생미셸 관광 및 교통정보
- 몽생미셸, 에너지 소비 감축의 선봉에 서다
- 몽생미셸이 가장 붐볐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
- 몽생미셸은 얼마 동안 감옥이었을까?
- 몽생미셸 수도원 공식 홈페이지
- 몽생미셸이 독일 점령 하였을 때
-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몽생미셸의 해방
[1] 2007, 2018년 부분수정[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성 미카엘'은 프랑스어로는 생 미셸(Saint-Michel)로 발음된다.[6] 지금도 아브란슈의 가톨릭 교회에 오베르 주교의 이마에 구멍이 작게 난 두개골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7]
[8] 전설에 따르면 대천사는 주교에게 산탄젤로산의 성 미카엘 성소를 모방하여 지으라 했다고 한다.[9] ‘무덤의 산’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무덤이 있는 건 아니고, 고대 시대 골족의 드루이드교 의식을 했던 곳으로 추정하여, 옛 지명인 Mons vel Tumba Beleni와 관련하여 벨레노스 신과 관련이 있는 곳이 아니었느냐하는 가설이 존재했으나, 현재는 폐기된 상태. 결국, 무덤도 종교 의식 장소도 아니라 모래가 무덤"처럼" 쌓여있어서 Mont Tombe(Mons Tumba)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6세기 중반 정도가 되면 해당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정착되어 몽생미셸을 짓기 전에도 몽 통브에는 성 스테파노나 성 심포리아노에게 봉헌된 예배당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수도원 건립 전설에서는 주교 오베르가 몽 통브에 있던 이교도들이 쌓아놓은 돌들을 치우며 수도원 건립을 시작하는 것으로 나온다.[10] 이 일화는 당시 역사적 상황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687년 테르트리 전투 이후 해당 지역에 온 프랑크 왕실 신앙 중 하나였던 성 미카엘 신앙을 받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11] 이러한 일화는 7세기에 이미 세워진 이탈리아의 산탄젤로산의 성 미카엘 성소 건축과도 연계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서유럽에 급속히 퍼지는 그리스도교 교세와도 연관된다. 동방에서 전래된 성 미카엘 신앙은 5세기 경 서방으로 널리 퍼졌으며, 813년에는 샤를마뉴가 프랑크 왕국 전체에 성 미카엘 축일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성 미카엘에게 봉헌된 장소들은 대개 높은 곳에 있거나 외따로 떨어져 있는데, 이는 당시 천사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졌던 미카엘 대천사의 지위와도 관련이 있다. 여담으로, 이탈리아의 미카엘 성소는 이탈리아의 세계 문화유산인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에 포함되어 있다.[12] 당시 세워진 건물은 지금은 남아있지는 않는데, 1960년 한 고고학자가 Notre-Dame-de-Sous-Terre(직역하면 "땅 밑의 성모님")의 동쪽 벽이 사실은 8세기에 세워진 첫 예배당을 구성한 구조이며, 성 오베르의 무덤 또한 그 근처에 있다는 가설을 폈지만, 2000년대의 고고학 조사에서 이는 10세기 때 세워진 받침대임을 확인하며 첫 예배당의 흔적은 현재로서는 찾기 힘들게 되었다.[13] 다른 각주에도 나와있지만, 이 때 당시에는 조수 간만의 차에 대해 자세히 몰랐기에 많은 순례자들이 익사하거나 펄에 빠져 죽었기에 붙은 이름이다.[14] 전승에 따른 날짜다.[15] 여담이지만, 지금이야 몽생미셸에 셔틀버스 타고 가고 여유롭게 걷고 해서 수도원 주위 갯벌에 대해 큰 생각이 안들고, "순례"라는 단어가 주는 고생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혹은 종교적 의미가 잘 안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조수 간만의 차에 대해 지금처럼 잘 알지도 못했고, 설령 인지했더라도 지금처럼 정확히 물이 빠지고 들어오는 시간을 알 수 없었기에, 많은 순례자들이 수도원을 향해 가다가 펄에서 물에 휩쓸려 죽었다고 한다. 즉, 내가 살아서 이 수도원에 온 것은 신, 혹은 이 수도원이 봉헌된 성 미카엘의 가호 때문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수 밖에 없었다.[16] 우리가 흔히 중세 시대를 다룬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수도사들이 평생 앉아서 손으로 필사한 문서들을 이른다.[17] 대표적으로는 헨리 2세, 루이 9세(생 루이), 루이 11세, 프랑수아 1세, 안 드 브르타뉴 등이 있다.[18] 프랑스가 설립되기 이전에도 몽생미셸의 지형적 이점은 피신처로서 잘 사용되었는데,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어 혼란에 빠지고 바이킹의 침략이 있을 때면 지역의 지식인들은 몽생미셸로 피신해 왔다고 한다. 뒤에도 언급되지만, 백년전쟁 중에도 후퇴하던 노르망디 기사들이 몽생미셸에 피신한 일화도 있다.[19] 이는 뒤에 언급되는 "119명의 용맹한 노르망디 기사들"로 이들은 30년 동안 수도원에서 공방전을 수행하였는데, 특히 후대의 한 낭만주의 역사가에 의하면 1434년에는 20,000명의 영국군을 막아낸 전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연히도 이는 과장된 것으로 현재에는 2,000명 이하의 영국군을 격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몽생미셸에는 이 119명의 기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석판이 있다.[20]
[21] 해방된/자유로운 산[22] 다만 1863년 나폴레옹 3세 때 문을 닫을 때까지 이곳을 거쳐간 수감자는 약 14,000명이라고 한다.[23] 그 중 하나로 수도원(당시는 감옥) 밖에서 안으로 물자를 들여오기 위해 설치한 도르래가 있는데, 문제는 이 도르래를 움직이는 데에 커다란 사람용 쳇바퀴를 이용했다는 것. 이 장치들은 1819년 즈음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개 2톤 정도 되는 물자를 화강암 암벽을 따라 거대한 쇠사슬로 끌어올려야 했기에 엄청난 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물자를 들여오려면 죄수 다섯에서 여섯 사람이 쳇바퀴 안에서 무거운 물자를 거의 수직으로 수십 미터 끌어 올리기 위해 바퀴 속에서 열심히 뛰어야 했던 것이다. 혹여나 힘들거나 힘이 부쳐서 장력이 약해지기라도 하면 바로 역으로 쇠사슬이 풀려 쳇바퀴 안에 있는 죄수들이 죽는 일도 왕왕 벌어지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 형체가 온전한 일은 거의 없었다고... 다만, 바로 옆에 시체 던져넣는 구멍이 있어서 시체 처리는 그나마 용이했을 듯싶다.[24] 이러한 구조는 19세기에 알렉시 드 토크빌에 의해서야 정립된 구조이다.[25] 성당이나 수도원 구조에서 양옆으로 삐죽 '날개'처럼 삐죽 튀어나와 있는 구조[26]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몽생미셸은 1940년 6월 21일부터 1944년 8월 초까지 독일군에 점령당했었는데, 당시 거주민의 말에 따르면 해안 지대가 여행금지구역으로 설정되었기에, 몇몇 독일군 장교들이나 특별히 허가된 사람들만 드나들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몽생미셸의 유일한 식료품점은 포벨(Fauvel) 부부가 하는 빵집뿐이었다고 하는데, 이들 부부는 독일군 경비병들에게 검문당하지 않은 채로 왔다갔다 할 수 있었으며, 그들도 독일군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독일군들도 이 부부가 만든 빵으로 먹고 살았으니... 그는 대체로 독일군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고 점령 하에서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1944년 6월 6일 D-Day가 닥치면서 독일군들이 "예의(Courtesy)"를 잃고 허둥댔다고 회상한다. 이후 8월 1일 경 독일군은 완전히 몽생미셸에서 후퇴했고, 이어 패튼의 아브랑슈 공세에 따라 미군이 몽생미셸로 오게 되었고, 증언에 따르면, 미군 지프를 본 순간 몽생미셸의 거주민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고 한다...[27] 대개는 독일군 병사들이나 장교들이 여행 목적으로 왔다 갔는데, 당시 기준 5프랑 정도를 내고 들어갔다고. 그리하여 총 325,000명 정도 되는 독일군 병사들이 몽생미셸을 둘러보고 갔다고 한다.[28] 1888년에 아네트와 빅토르 풀라르가 연 여관으로 몽생미셸에 오는 순례자들을 손님으로 맞던 곳이다. 아직까지 운영중이며, 숙박도 가능하다. 특히 계란 오믈렛이 유명하다.[29] 프랑스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 중 파리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30] 2021년 INSEE 자료[31] 프랑스어로 preux[32] 1898년에야 완전히 설치되었으며, 돋을 세공된, 압착되고 도금된 구리판으로 만들어졌으며, 3.5m의 높이(날개를 합치면 4.5m)에 800kg을 자랑한다. 당시 기준 6,000프랑 정도(현재 기준 15,000유로)가 들었다고 한다.[33] 중세에 미카엘 대천사는 망자를 이끌어 최후의 심판날에 그 영혼을 저울에 달든가 하여 무게를 잰다고 믿어졌는데 이 때문에 중세의 중요한 신앙 중 하나였다.[34] 두 사진 중 밑의 사진은 2016년의 것으로 헬리콥터로 다시 상을 세우는 모습이다.[35] 이 문제와 완전히 관련된 일은 아니지만, 몽생미셸 설립 일화(혹은 전설)은 노르망디 공국과 브르타뉴 공국 사이 권력 다툼 맥락과 함께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애초에 바로 옆 동네인데다, 브르타뉴 공국같은 경우는 15세기 프랑수아 2세대에야 프랑스로 편입되는 나라로, 당시에는 독립국이었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과 그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세력과 브르타뉴 공국 사이의 세력 다툼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수 있다는 뜻.[36] 1009년까지[37] 1009에서 1020년 사이[38] 11세기 당시 루앙이나 르아브르가 있던 오트노르망디(위쪽 노르망디라는 뜻)지역에서는 많은 큰 수도원들이 세워졌으나 몽생미셸이 포함된 바스노르망디(아래쪽 노르망디라는 뜻)지역은 아직까지 이교도들이 판치는 곳이었기에 몽생미셸에 대한 전폭적 후원과 지원이 곧 "그리스도교의 수호자이자 장려자"로 연결될 수 있었다.[39] 여담으로, 1204년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고 있던 영국 왕과 프랑스 왕 사이가 험악해지자, 필립 오귀스트는 영국 왕의 유럽 본토 영지를 빼앗고자 동맹이었던 브르타뉴 공작 기 드 투아르를 보내 몽생미셸을 정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기 드 투아르는 수도원을 얻는 데 그닥 관심이 없어서인지 수도원을 무력화시키고 불을 지르고 후퇴해버렸다. 불은 섬 전체를 휩쓸어서 결국 몽생미셸의 거의 모든 건축물들이 전소된 바 있다. 이후 몽생미셸은 노르만 양식으로 13세기 초중반에 걸쳐 재건되었다.[40] 이 먼 거리 탓에, 당일치기 단체관광상품의 경우 이른 아침인 7시에 파리 시내에서 집합/출발하여, 일정을 모두 마치고 파리로 돌아와 해산할 때는 한밤중인 21~22시(!)가 보통이다.[41] SNCF의 자회사다.[42] 2024년 4~9월 기준 렌 8:45, 10:45, 12:45 출발, 몽생미셸 11:00, 17:00, 18:00 출발[43] 프랑스의 과속 범칙금은 의외로 한국과 큰 차이가 없으나(10~20km/h 초과시 한화로 1~2만 원 비싼 정도), 불법주정차 범칙금은 한국보다 대단히 비싸다. 견인료 포함 최대 150유로 이상이 나올 수도 있으며, 단속도 불시에 수시로 자주 이루어지는 편. 따라서 주차요금 아낀답시고 한국에서처럼 은근슬쩍 불법주정차는 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다.[44] 적발시 범칙금 고지서는 바로 발부되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 귀국 후 국제우편이나 이메일로 범칙금 고지서를 받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를 내지 않고 먹튀한다면 프랑스 정부가 강제로 징수할 방법은 없지만 걔네들이 호구가 아닌 이상 다음 프랑스 입국 시에 매우 높은 확률로 입국이 거부되거나 또는 입국장에서 가산금이 3~4배 이상 붙은 큰 액수의 체납액을 즉석에서 징수 당할 수 있다. 평생에 몇 번 가기도 힘든 해외여행을 이런 일로 망치지 않게끔 그리고 나라 망신시키지 말고 제때 내도록 하자. 프랑스 내무부 범칙금 납부 사이트에서 범칙금 고지서에 적힌 범칙금 번호 및 키 번호를 입력하면 신용카드로 쉽게 납부할 수 있다.[45] 드넓은 풀밭 위에 방목되어 있는 양떼도 볼 수 있다.[46] 몽생미셸 관리국(L’Établissement public du Mont Saint-Michel (EPMSM))과 프랑스 국가유산청(le Centre des monuments nationaux (CMN))이 밝힌 바로는 최소 2024년까지 10%의 에너지 소비 감축 및 몽생미셸만의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서 야간 조명을 끈다고 한다.[47] 프랑스어로 '미리 간을 해 뒀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