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2:48:19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

<colbgcolor=#DEBCA8><colcolor=#000000> 보방 후작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Sébastien le Prestre, Marquis de Vauban
파일:Vauban_picture.jpg
보방의 초상화,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作, 1703년
이름 세바스티앙 르프레스트르 드보방
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출생 1633년 5월 15일
프랑스 왕국 부르고뉴 생레제드푸셰레스[1]
사망 1707년 3월 30일 (향년 73세)
프랑스 왕국 파리
배우자 잔 도네 데피리 (1660년 결혼 / 1705년 사망)
자녀 샤를로트, 잔 프랑수아즈
아버지 위르뱅 르 프레스트르
어머니 프랑수아즈 드 라 페리에르
형제 샤를로트
1. 개요2. 생애3.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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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 시대의 귀족, 장군, 엔지니어이다. 특히 루이 14세 치세 동안에 프랑스 북서부 국경에 많은 요새를 축조하여 프랑스군이 전략적으로 우세를 가지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튀렌 자작, 대 콩데 공, 르텔리에 부자와 함께 루이 14세 시기의 프랑스 명장 라인업을 구성하는 인물.

2. 생애

그는 1633년 오늘날 부르고뉴프랑슈콩테에 속한 생 레제 드 푸셰레에서 태어났다.[2] 그의 가문은 하급 귀족이었지만,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분쟁과 재정난으로 성과 토지를 잃고 다른 귀족들의 숲과 정원을 관리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할 정도로 영락했고 10살 때는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은 이후 그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부친의 일을 이어받기 위해 정원 설계의 일을 배우는 과정에서 토목 지식을 쌓게 된 것이었다.

프롱드의 난 당시 성인이 된 그는 프랑슈콩데의 영주이자 명장이었던 콩데 공작의 휘하에 들어가 공병장교로 임관해 전쟁에 참여했지만, 결국 왕당파로 편을 바꿔 콩데의 동맹이었던 스페인과 전투를 벌여 명성을 얻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끝나자 그는 스페인으로부터 할양받은 플랑드르 지방의 요새화를 담당하였는데, 이는 '철의 벨트'라 불리며 이후 수많은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우세를 차지하여 현재의 프랑스 국경을 확립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특히 9년 전쟁 동안에는 그가 프랑스 국경에 빽빽하게 축조한 요새가 진가를 발휘하여, 프랑스 국토가 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에게 패배하는 와중에 연합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려서 그나마 스페인에 들어선 부르봉 왕조가 유지되는 것으로 협상하는 데에 성공한다.

한국에서는 특이한 생김새로 유명한 성형 요새(star fort)를 고안해낸 인물처럼 알려져 있어 별 모양 요새를 보방식 요새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실제로는 별모양 요새는 보방보다 훨씬 이전에 이탈리아에서 고안되어 있었다. 보방식 요새라는 이름은 사실 별 모양 요새라는 이름이 좀 모양 빠져서 역덕들 사이에서 임의로 붙은 이름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프랑스군에 기여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요새 축조의 경험을 통해 공병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현대적인 공병조직과 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또 성형요새에 대응하는 공성교리, 특히 포병 조직과 전술의 개선에도 기여했으며, 프랑스 군에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소켓방식의 총검을 도입한 것 역시 그의 업적이다.

그의 관심은 군대에만 국한된 것 역시 아니었다. 요새 축조 지식은 다른 토목공사에도 응용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는 이를 도로, 운하와 항구 건설에도 활용했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사업 과정에서 경험한 재무, 특히 조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프랑스의 재정 적자를 타파하기 위해 귀족과 같은 특권계급에 대한 면세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통계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덤. 그러나 불행히도 이는 당시 귀족 계층의 호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고 결국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 손보지 못한 프랑스의 재정 적자 문제는 결국 프랑스 혁명의 주요 원인이 되고 만다.

3. 관련 항목



[1]부르고뉴프랑슈콩테 레지옹 생레제보방[2] 생 레제 드 푸셰레는 이후 보방을 기념하여 생 레제 보방으로 명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