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7892A0><colcolor=#ffffff>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Henri de La Tour d'Auvergne, Vicomte de Turenne | |
이름 | 앙리 드라투르 도베르뉴[1] (Henri de La Tour d'Auvergne)[2] |
출생 | 1611년 9월 11일 스당 공국 스당 성 |
사망 | 1675년 7월 27일 (향년 63세) 뷔르템베르크 공국 사스바흐 |
배우자 | 샤를로트 드 코몽 (1622년 결혼) |
아버지 | 부용 공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
어머니 | 오라녀나사우의 엘리자베트 프랑드리카 |
형제 | 루이즈, 마리, 쥘리엔 카트린, 프레데리크 모리스, 엘리자베트, 앙리에트 카트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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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세기 프랑스의 육군 원수. 흔히 작위명인 튀렌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군 역사상 단 6명만 임명된 프랑스 대원수 중 한 명이며, 30년 전쟁, 대 스페인 전쟁, 대 네덜란드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이다.2. 생애
2.1. 초기 경력
튀렌 자작은 1611년 9월 11일 부용 공작이자 스당의 영주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와 침묵공 빌럼 1세의 딸 엘리자베트 프랑드리카 드랑쥬 나사우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칼뱅의 교리를 따르는 위그노 집안인 라 투르 도베르뉴 가문의 자제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개신교 교육을 받았고 귀족의 자제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으로 병약했고 특히 언어 장애가 있어서 타인을 대하는 걸 꺼렸다. 이 언어 장애는 평생동안 그의 발목을 잡는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부터 군사 방면에 관심이 많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활약상을 다룬 서적을 탐독하며 그들을 본받고 싶어했다.162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튀렌은 신체 단련에 몰두하여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신체를 개선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숙부인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 판 나사우의 야영지에서 군사학을 익혔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참가해 군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튀렌은 처음엔 숙부의 경호를 맡은 사병으로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625년 마우리츠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총독 및 오라녜 공에 즉위한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1626년 조카 튀렌을 육군 대위에 승진시켰다. 이후 튀렌은 여러 포위전에 참가했고 1629년 스헤르토헨보스 포위전에서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용기를 발휘해 프레데리크로부터 특별 훈장을 수여받았다.
1630년, 튀렌은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이는 아들이 프랑스군에서 승진할 뿐만 아니라 부용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실에게 인정받길 원하는 어머니 엘리자베트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였던 리슐리외 추기경은 즉시 그를 보병연대 대령으로 임명했다. 튀렌은 이후에도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오라녜 공 휘하에서 짧은 시간 동안 계속 근무했다. 1634년, 그는 프랑스군 장교로서 처음으로 전투를 치르게 되니, 바로 로렌의 라 몽드 앙 바시니 포위전이었다. 그는 이 포위전에서 목숨을 걸고 돌격해 프랑스군이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 공을 인정받아 소장으로 승진했다.
1635년, 튀렌은 라 발렌트 추기경의 휘하에서 로렌과 라인강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과 맞붙었다. 프랑스와 독일 신교도 연합군은 마인츠에서 제국군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메츠로 후퇴했다. 이때 튀렌은 퇴각 과정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의 장군 마티아스 가라스와 결투를 벌였는데, 상당히 우수한 검술을 보여줘 가라스를 고전시켰다고 한다. 다만 신성 로마 제국군 병사들이 장군을 구하러 달려오는 바람에 가라스를 죽이지 못하고 후퇴했다. 그는 이 일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1636년 프랑스군은 메츠에서 재편성한 뒤 사베른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때 튀렌은 중상을 입고 후방 진지에서 치료받았다. 1637년 부상에서 복귀한 그는 플랑드르 원정에 참가해 여러 전투 및 포위전을 수행했다. 또한 그는 1638년에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의 휘하에 배속되어 라인강 상류의 강력한 요새였던 브레사흐 급습을 지휘해 12월 17일 브레사흐가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 튀렌은 프랑스의 젊은 장군들 중 가장 유망한 인물로 손꼽혔고, 리슐리외는 그를 아르크르 백작 앙리 드 로렌의 군대에 배속시켜 이탈리아 원정 임무를 맡겼다.
1639년 11월 19일, 튀렌은 '루테 드 키에르 전투'라고 불리는 유명한 후위 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토리노 요새에 대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겨울 동안 식량을 공출하고 있었다. 이때 카리냐노 공작 토마조가 프랑스군의 식량 공출에 반발해 토리노를 급습해 도시를 점거했다. 이에 튀렌은 토리노로 급파해 토마조와 격돌, 그를 격파했다. 1640년, 아르크르 백작 앙리가 토리노를 포위하는 동안, 튀렌은 또 다른 프랑스군을 이끌고 토리노 요새를 포위했다. 요새 수비대는 버텼지만, 토마조는 1640년 9월 17일 아르크르 백작에게 항복했다. 이후 튀렌은 1641년 원정에 참가해 크네오, 체바, 몬드비를 점령했다.
2.2. 30년 전쟁을 마무리하다
1642년, 튀렌은 루지용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런데 이때 그의 정치적 입지에 두고두고 장애 요인이 될 사건이 벌어진다. 튀렌의 형 부용 공작 프레데리크 모리스가 생 마르 후작의 리슐리외 암살 음모에 연루된 것이다. 리슐리외는 이 음모를 적발했고, 모리스는 이탈리아 카살리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모리스의 아내가 스페인에 세단을 넘겨버리겠다고 위협하자, 리슐리외는 할 수 없이 세단과 로쿠르와의 전략적 요충지를 프랑스로 넘길 것을 모리스로부터 약속받은 뒤 석방했다.프랑스 왕가와 부용 공작가의 관계는 튀렌에게 있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왕가는 튀렌의 군사적 역량이 탁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부용 공작가를 회유하려면 그를 승진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튀렌의 형 모리스가 리슐리외를 암살하는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부용 공작은 왕실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기보다는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는 데 집중했고 때로는 왕실의 간섭에 반발해 위험한 음모를 꾸몄다. 따라서 왕실과 국왕의 측근들은 튀렌을 전적으로 신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튀렌은 신교 신앙을 고집하고 있어서 구교를 신봉하는 왕실로서는 다루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튀렌이 쓸만한 인재이며 부용 공작가와 대립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다고 판단한 리슐리외는 그가 계속 프랑스군 장성으로서 활약하게 해준다. 이후 튀렌은 1643년 말 프랑스로 돌아와 12월 19일 프랑스군 원수에 임명되어 작센-바이마르군 연대 재편성을 위해 알자스로 떠났다. 당시 작센-바이마르군은 베른하르트 지휘하에서 1643년 11월 24일부터 25일에 걸쳐 벌어진 뤼트링겐 전투에서 스웨덴군과 연합해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과 맞붙었으나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알자스로 도주했다. 튀렌은 이 패잔병들 재편성 작업에 착수해 1644년에 완료하고 다시 전선에 섰다.
이보다 앞선 1643년, 앙기앵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네덜란드-벨기에 국경 지대에 위치한 로크루아에서 스페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서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군은 일소되었고, 프랑스군은 이 기회에 30년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독일 공세를 개시했다. 튀렌은 1644년 브라이자흐에서 라인강을 건너 로크루아 전투의 승자 앙기앵 공작이 이끄는 군대와 합세했다. 앙기앵 공작은 프랑스 왕가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그가 프랑스-작센-바이마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644년 8월, 튀렌은 프랑스군이 프란츠 폰 메르시가 지휘하는 바이에른군을 상대로 맞붙은 프라이부르크 전투에 참가했다. 그후 앙기앵 공작이 철수하자, 튀렌이 지휘를 맡아 1645년 원정을 전개했으나 5월 2일 마리엔탈 전투에서 메르시가 이끄는 바이에른군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앙기앵 공작이 곧 돌아왔고 스웨덴군과 헤센과 카셀 측 백작군이 합세하면서, 프랑스군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전력을 확보했다. 1645년 8월, 튀렌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바이에른군을 섬멸하고 메르시를 전사시켰다. 이와 동시에 스웨덴군은 안카우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격파해 제국에게 지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듬해인 1646년, 튀렌은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를 분리시키는 데 성공하고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가 평화 협정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1647년, 튀렌은 약화된 신성 로마 제국군을 공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그를 플랜더스로 보냈다. 그러던 중 바이마르 군인들이 수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 것에 분노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튀렌이 폭동 진압을 위해 파견되어 피를 거의 흘리지 않고 질서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바이마르군을 이끌고 룩셈부르크로 행진했지만 곧 라인강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철수했다.
1648년, 바이에른은 조약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와 재차 동맹을 체결했다. 이에 튀렌과 스웨덴 동맹군은 5월 17일 시스마르샤우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로서 신성 로마 제국과 바이에른은 더이상 싸울 힘이 없어 프랑스를 비롯한 적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베스트팔렌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이때 튀렌은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바이에른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병사들이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걸 묵인했다. 이로 인해 바이에른은 황폐화되고 말았고, 많은 현대 작가들은 이 일에 대해 튀렌을 비난했다.
2.3. 프롱드의 난과 대 스페인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30년 전쟁이 막을 내렸지만, 프랑스는 얼마 안가 내란에 휩싸인다. 1642년 12월 리슐리외 추기경이 사망하고 5개월 후인 1643년 5월 루이 13세가 사망하면서 당시 겨우 5살이었던 루이 14세가 즉위했다. 리슐리외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누가 섭정이 될 것인지는 심한 논란을 야기했다. 관례에 따르면 루이 13세의 왕비이자 루이 14세의 모친인 얀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스페인 출신이고 프랑스의 기밀을 조국에게 흘리는 짓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 13세는 그녀가 섭정이 되면 프랑스보다 스페인의 이익을 우선시할 거라고 보고 임종 직전에 얀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지 못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파리 고등법원은 이 유언을 묵살하고 얀 도트리슈를 섭정으로 인정했다.얀 도트리슈는 남편의 우려와는 달리 자신의 아들인 루이 14세를 위해 프랑스 국익을 먼저 생각했다. 다만 정치력은 별로였기 때문에 리슐리외의 후임 추기경인 쥘 마자랭에게 통치의 대부분을 맡겼다. 그러나 귀족들은 30년 전쟁 기간 동안 강화된 왕권에 반발해 자신들의 권익을 쟁취하기 위해 반란을 꾸몄다. 1648년 봄, 법복귀족으로 구성된 파리 고등법원은 파리의 유력인사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법안의 접수를 거부했다. 이에 마자랭은 강경파 재판관 2명을 구속했지만 파리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달래기 위해 재판관들을 풀어줬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귀족들은 파리 시민들을 선동해 더욱 큰 봉기를 일으켰고, 마자랭은 루이 14세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과 함께 파리를 탈출했다.
이 시기, 튀렌은 파리 고등법원의 뜻에 따르겠다며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다. 그러나 정적들은 그를 반역자로 매도했고, 바이마르군은 그의 뜻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게다가 로크루아 전투의 영웅인 콩데 공 (Prince of Condé) 루이 2세 드 부르봉은 고등법원을 맹렬히 비난하고 왕실에 충성을 맹세했다. 결국 튀렌은 네덜란드로 도주했고, 루이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파리를 포위했다. 1649년 4월, 마자랭은 반란군과 협상 끝에 그들을 사면하고 파리 고등법원의 권한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같은 해 5월에 파리로 돌아왔다. 또한 튀렌은 사면되어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후 마자랭과 루이 2세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났다. 루이 2세는 자신이 혼란을 가라앉힌 영웅이라고 자부하며 프랑드 난의 원인을 제공한 마자랭에게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마자랭은 1650년 1월 루이 2세와 그의 동생 및 매부를 전격 체포하고 감옥에 가뒀다. 그러나 루이 2세가 감옥에 갇힌지 13개월 만에 그를 따르는 이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들을 달래기로 한 마자랭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러나 반란은 오히려 더욱 거세졌고, 마자랭은 다시 파리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루이 2세는 파리 고등법원과 갈등을 빚고 1651년 9월 파리를 떠나 보르도에서 민중 봉기를 일으키고 파리로 진격했다.
1652년 4월, 파리에 입성한 루이 2세는 자신에게 대적한 귀족들을 체포하는 한편 스페인과의 동맹을 추진했다. 그러자 외세를 끌여들이려 한 그에게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루이 2세는 같은 해 10월 파리에서 쫓겨나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한편, 튀렌은 이번엔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루이 14세와 얀 도트리슈를 호위하고 있다가 루이 2세가 쫓겨나가 파리로 모셨다. 마자랭은 그동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1653년 2월에 파리로 귀환했다.
1653년, 스페인으로 망명했던 루이 2세 드 부르봉은 스페인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전격 침공했다. 이에 튀렌이 프랑스군을 이끌고 침략군에 맞서 싸웠다. 30년 전쟁의 영웅이었던 두 명장의 대결이었기에, 전쟁의 향방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튀렌은 루트르, 상드-무느와, 무종을 공략했지만 루이 2세가 로크로아를 획득하는 걸 막지 못했다. 또한 튀렌은 1654년 7월 25일 아라스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대부분의 프랑스 남서부 영지를 탈환했지만, 1656년 바란시에느에서 루이 2세에게 패배해 공세를 더 이어가지 못했다.
이렇듯 두 명장이 일진일퇴를 벌이던 중, 마자랭은 잉글랜드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과의 동맹을 체결하고 잉글랜드의 지원을 약속받는 데 성공했다. 1658년 5월, 튀렌은 2만여 병력을 이끌고 됭게르크를 포위했고 윌리엄 로카트(William Lockhart) 장군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군 6천명도 도착했다. 스페인군은 이에 맞서 펠리페 4세의 서자이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인 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가 루이 2세와 함께 구원군 15,000명을 이끌고 됭게르크로 향했다. 또한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제임스(훗날 제임스 2세)도 잉글랜드-아일랜드 왕당파 군대 3천명을 이끌고 스페인군에 참가했다. 사실 요크 공작은 프랑스에 망명해 튀렌 휘하에서 4차례 전투에 참가했지만 형의 요청에 따라 스페인 측으로 가담하면서 이제는 튀렌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1658년 6월 14일, 튀렌은 됭게르크 근처의 뒨에서 스페인군과 맞붙어 적병 1,000~1,200명을 전사시키고 800명을 부상시키고 4,000~5,000명을 포로로 잡는 완승을 거뒀다. 반면 프랑스군의 사망자는 400명에 불과했다.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뒨 전투는 튀렌이 거둔 가장 뛰어난 승리라고 극찬했다. 뒨 전투에서 완패한 스페인은 더이상 싸울 여력을 잃어버렸고 1659년 6월 피레네 조약을 체결해 루시용과 아르투아를 비롯하여 알자스 지방과 로렌 지방 등의 점령지를 프랑스에게 넘겼다. 그 대신, 스페인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카탈루냐는 스페인에게 반환되었다. 또한 루이 14세와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즈와의 결혼을 맺기로 합의했고 거액의 지참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참금은 결국 지불되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루이 14세가 스페인 왕가에 대한 상속권을 요구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2.4. 루이 14세의 전쟁
1660년, 튀렌은 프랑스 역사상 3번째로 프랑스 대원수에 임명되었다. 루이 14세는 그가 자신의 영토 확장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위그노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튀렌에게 만약 카톨릭으로 개종한다면 1627년 폐지했던 궁내장관에 앉히겠다고 권유했다. 그러나 튀렌은 거절했다.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그는 1639년 리슐리외의 조카와의 결혼을 거절하고 마자랭의 친척과의 결혼 의뢰도 거절했으며 1652년 개신교 신자이자 프랑스 원수인 포르스 공작의 딸 샤를로트 드 코몽과 결혼했다. 이렇듯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게 내킬 리 없었다.1667년, 튀렌은 5만여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그의 대군은 승승장구하며 스페인령 네덜란드 영토의 상당수를 삽시간에 점령했다. 이에 스페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레오폴트 1세는 1668년 1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할 경우 스페인의 영지를 분할하는 내용[3]의 비밀 조약을 프랑스와 체결했기에 스페인의 구원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프랑스에게 넘어가는 꼴을 지켜볼 수 없었던 네덜란드가 나섰다. 그들은 1667년 잉글랜드와 전쟁을 중단하고 브레다 조약을 체결한 뒤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프랑스에게 병합되지 않고 완충지대로 남아있도록 하기 위해 잉글랜드,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외교적 공세를 강화했다. 네덜란드-스웨덴-잉글랜드 3국 동맹은 프랑스가 1668년까지 점령한 지역에 대해서만 소유권을 인정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남아있게 하는 중재안을 제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스페인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1668년 겨울, 루이 14세는 3국 동맹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스페인 영토인 프랑슈콩테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프랑슈콩테에 대한 공세를 맡은 지휘관 루이 2세 드 부르봉[4]은 단 15일 만에 프랑슈콩테 일대를 석권했다. 이에 튀렌, 루이 2세 등 야전 지휘관들은 지속적인 공세를 요구했다. 하지만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전쟁 장기화에 따른 재정난을 우려해 조속히 평화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스페인이 1668년 리스본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승리를 낙관할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루이 14세는 더이상 전쟁을 지속시키지 않기로 하고 엑스라샤펠 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콩테를 스페인에게 돌려주는 대가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점령지역을 그대로 차지했다.
2.5. 네덜란드 전쟁과 최후
1672년 4월, 루이 14세는 자신의 계획을 훼방놓은 네덜란드에게 보복하기 위해 잉글랜드, 스웨덴과 동맹을 체결한 뒤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고 12만 대군을 네덜란드로 파견했다. 튀렌은 루이 2세와 함께 군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샤를루아와 스당에서 출발해 친 프랑스 성향의 중립 지역인 리에주 주교령을 지나 마스트리흐트 근처에서 합류했다. 1572년 5월 5일 루이 14세가 샤를루아에 도착한 뒤, 튀렌은 5월11일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비세로 진군했다. 이후 튀렌은 네덜란드의 여러 주를 공략하고 여러 도시를 약탈하면서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진격했다. 이에 다급해진 네덜란드 총독 빌럼 3세는 아군을 홀란트 근처로 집결시킨 후 암스테르담 근처의 둑을 무너뜨려 인위적으로 홍수를 일으켰고, 이후 홍수선을 장벽으로 삼아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의 진군은 일시적으로 차단되었다.1672년 7월 9일, 튀렌은 헬데를란트의 네이메현을 함락시킨 뒤 이틀 후 스헤르토겐보스까지 공략했다. 이리하여 네덜란드를 구성하는 7개 주중 위트레흐트, 헬데를란트, 오버레이설의 3개 주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갔고 나머지 4개주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루이 14세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하고 네덜란드에게 평화 조약의 대가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빌럼 3세는 프랑스의 강화협상을 거절하고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홍수선을 뚫는데 애를 먹으면서 전황은 지지부진해졌다.
한편,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지원에 나섰다. 여기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에 압박을 느낀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전쟁을 더이상 진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마스트리흐트를 제외한 네덜란드 점령지에서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러던 1673년 1월 오스트리아-브란덴부르크 동맹군 25,000명이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장군(1609~1680)의 지휘하에 네덜란드로 진군하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미점령 지역과 라인 강 유역을 점거하고 있던 튀렌은 이들에 맞서 싸웠다.
당시 튀렌에게 주어진 병력은 16,000명으로 적보다 열세였고 루부아 후작 프랑수아 미셸 르 텔리에가 군사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갈등을 빚었다. 다만 루부아 후작이 보급만큼은 충분하게 지원해줬기 때문에, 튀렌은 적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오히려 분견대를 활용하여 북독일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1673년 6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네덜란드와의 동맹에서 이탈하고 전쟁에서 빠진다.
1673년 겨울, 튀렌은 일단 적의 공세를 막긴 했지만 적이 또다시 공세를 가해오면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루부아 후작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루부아 후작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튀렌을 알자스로 이동시켰다. 이에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장군은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하고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라인강 저지선을 돌파하여 빌렘 3세의 네덜란드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11월, 네덜란드-오스트리아 동맹군은 본을 함락시켜 라인강 하류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파괴했다. 튀렌은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알자스 방어에 전념해야 했다.
1674년 6월 튀렌은 오스트리아군이 로렌 공작 샤를 4세에게 가세하는 걸 막기 위해 여름 공세에 착수해 6월 16일 진스하임에서 로렌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로렌군은 하이델베르크에서 알렉상드르 드 부르농빌의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튀렌은 일단 후퇴한 뒤 노이슈타트에서 새로운 병력을 보급받고 다시 네카어 강을 건너 팔츠 선제후령으로 진격했다. 알렉상드르 드 부르농빌은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서둘러 남하해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하여 알자스로 향하를 길을 열었다. 이에 튀렌은 그들을 격퇴하기로 결심하고 10월 4일 엔츠하임으로 진군하던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했다. 전투 자체는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채 물러섰기에 무승부였지만 오스트리아군이 알자스로 진격하는 걸 저지하는 건 성공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674년 겨울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다시 전쟁에 뛰어들어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면서 튀렌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튀렌을 지원하기 위해 낭시에서 병력 5천 명을 모집하여 파견했지만, 튀렌은 이들이 제대로 훈련되어있지 않아 별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 11월에 해산시켰다. 그럼에도 그는 1674년에서 1675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겨울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전쟁은 4~10월까지 진행하고 겨울에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루부아 후작이 보급 체계를 개선하면서 겨울에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튀렌은 알렉상드르 드 부르농빌의 혀를 찌르기 위해 겨울 공세를 개시한 것이다.
튀렌은 부르농빌을 속이기 위해 알자스 북부의 사베른과 아그노 사이에서 겨울 숙영지를 편성한 후 알자스 중부의 프랑스 요새의 수비를 강화시켜 겨울을 보내는 것처럼 위장한 뒤 남서쪽으로 멀리 우회하여 적에게 접근했다. 여기에 루이 2세의 증원병력이 도착하면서 병력 규모가 3만 3천명이 되자, 그는 다시 병력을 여러 분견대로 나눈 뒤 보르주 산맥의 프랑스 점령지를 따라서 은밀하게 이동했다. 이때 튀렌은 개별 분견대에게 각자의 이동 경로만 지시했을 뿐 최종 목적지는 밝히지 않았다. 분견대 중 한 부대라도 적에게 적발될 시 작전 전체가 들통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674년 12월 초 사베른의 숙영지를 출발한 프랑스군은 로렌공국으로 향하여 자르부르, 바카라를 통과한 후 12월 18일 에피날에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부르농빌도 적의 접근을 알게 되었지만 적의 최종 목적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대응책을 어찌 마련해야 할 지를 고민했다. 일부 장성들은 프랑스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사베른과 아그노를 탈취하자고 주장했지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벨포르를 점령할 것을 제안했고 로렌 공작 샤를 4세는 자신의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기를 원했다. 적이 이렇듯 우왕좌왕하는 사이, 튀렌은 분견대를 동쪽으로 파견하여 보르주 산맥의 콜 두 본홈므와 콜 드 라 술뤼슈 산길을 천천히 이동하게 해 적이 더욱 혼란에 빠지게 했다. 그 사이 자신은 에피날의 남동쪽 길을 강행군으로 돌파해 르미르몽에서 흩어진 부대를 모두 합류시켰다.
당시 르미르몽에 있던 샤를 4세는 적이 갑자기 나타나자 기겁하고 그대로 도망쳤다. 하지만 튀렌도 12월 27일 벨포르에 도착한 후 식량 보급을 위해 잠시 진군을 멈췄다. 이후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묄루즈로 가서 적 기병대 5천명과 교전해 격퇴하고 벨포르로 귀환한 튀렌은 1675년 1월 4일 본군을 이끌고 콜마르로 진군했고 1월 5일 투르켐에서 오스트리아-브란덴부르크 동맹군을 대파했다. 부르농빌은 적이 이렇듯 강하게 몰아붙이자 어쩔 수 없이 알자스 점령지를 포기하고 스트라스부르로 후퇴했고, 오스트리아는 부르농빌을 전격 해임하고 고령을 이유로 은퇴했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1675년 봄, 몬테쿠콜리는 재차 알자스로 향하기 위해 독일 남서부의 숲과 산악 지형인 슈바르츠발트를 통과하는 경로를 선택하고 총 3만 2천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적이 라인강 근처에 다다르자, 튀렌도 총 3만 5천명을 이끌고 적의 라인강 도하를 저지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 전령을 보내 오스트리아군이 도시의 다리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는 이를 묵살하고 5월 22일 오스트리아군이 다리를 건너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양측은 라인강 동쪽에서 대치했다. 몬테쿠콜리는 프랑스군 우측면에 군대를 진군한 후 슈바르츠발트를 통과하여 오펜부르크를 점령한 후 프랑스군이 건설한 다리를 위협했다. 하지만 튀렌이 부교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발슈테드 근처에 두게 해 그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이후 양군은 대치만 할 뿐 어느 누구도 전투를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을 때 보급난에 시달린 몬테쿠콜리는 북쪽으로 후퇴하여 렌치강 근처로 후퇴했다. 그러자 튀렌은 즉시 본군을 이끌고 적을 추격했다. 이때 그의 군대 역시 적처럼 보급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적을 섬멸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해 이를 무릅쓰고 강행군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뜻밖의 사고에 직면하고 만다.
1675년 7월 27일, 튀렌은 잘츠바흐에서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을 따라잡고 전투를 개시했다. 이때 그는 포병 진지를 시찰하며 적을 어찌 격파할 지를 궁리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날아온 적 포탄이 튀렌이 있던 진지에 떨어졌고, 튀렌은 이 포탄에 맞아 즉사했다. 향년 만 63세. 이 소식을 들은 몬테쿠콜리는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고 한다.
"존경했던 한 남자가 오늘 죽었다!"
프랑스군은 경애하는 지휘관이 즉사하자 퇴각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몬테쿠콜리의 엄명에 따라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시신은 본국으로 운구하여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후대에도 그에 대한 예우는 여전해서, 프랑스 혁명 때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된 왕족 및 귀족들의 무덤들이 대거 훼손될 때도 튀렌의 유해는 파리 식물원으로 따로 옮겨서 보전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앵발리드로 이장할 것을 명령해서 튀렌의 묘소는 앵발리드에 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드(de)'와 '오베르뉴(Auvergne)'가 모음 충돌로 합쳐져 도베르뉴로 발음한다. 비슷한 예로 잔 다르크와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있다.[3] 오스트리아 왕가는 스페인 본국과 해외 식민지, 그리고 북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을 얻고, 프랑스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프랑슈콩테, 나바르 왕국, 남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섬을 차지하기로 했다.[4]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끝난 직후 사면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가 이때 정식으로 원정군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