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11:51:27

올리버 크롬웰

파일:Coat_of_Arms_of_the_Protectorate_(1653–1659).png
잉글랜드 연방 호국경
초대 제2대
올리버 크롬웰 리처드 크롬웰
잉글랜드 국왕 · 스코틀랜드 국왕 · 영국 국왕(연합법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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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잉글랜드 연방 초대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liver_Cromwell_by_Samuel_Cooper.jpg
<colbgcolor=#CF091F><colcolor=#fff> 출생 1599년 4월 25일
잉글랜드 왕국 헌팅던셔 헌팅던
사망 1658년 9월 3일 (향년 59세)
잉글랜드 연방 런던 화이트홀 궁전
재임기간 초대 호국경
1653년 12월 16일 ~ 1658년 9월 3일
서명 파일:올리버 크롬웰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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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로버트 크롬웰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배우자 엘리자베스 부처 (1620년 결혼)
자녀 장남 로버트 크롬웰
차남 올리버 크롬웰 2세
장녀 브리짓 크롬웰
삼남 리처드 크롬웰
사남 헨리 크롬웰
차녀 엘리자베스 크롬웰
삼녀 메리 크롬웰
사녀 프랜시스 크롬웰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드니 서식스 컬리지
종교 개신교 (청교도) }}}}}}}}}}}}
1. 개요2. 생애
2.1. 내전 이전2.2. 잉글랜드 내전에서의 활약2.3. 목을 자르고 공화국을 세우다2.4. 아일랜드 진압2.5. 스코틀랜드 침공2.6. 종신 호국경 취임 및 군사독재2.7. 사망과 사후
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어록5. 미디어 믹스에서6. 기타7.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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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71px-Arms_of_the_Protectorate_%281653%E2%80%931659%29.svg.png
크롬웰 가문의 문장

17세기 잉글랜드 연방의 정치인이자 군인.

젠트리 계급 지주 출신으로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고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스스로 종신 호국경이 되었다. 군주가 되어 크롬웰 가문의 새 왕조를 개국하려고 하였으나 군부가 반대하자 설득을 시도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아들 리처드 크롬웰후계자로 지명하여 호국경 자리를 세습했지만, 결국 그가 세운 잉글랜드 연방은 무너졌다.

2. 생애

2.1. 내전 이전

크롬웰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젠트리 가문의 자제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통해 독실한 청교도주의자가 되었고 이후 런던에서 법률 공부를 한다. 그리고 1620년 런던 부호의 딸인 엘리자베스 부처와 결혼을 하게 된다.

1628년 고향인 헌팅던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629년 찰스 1세의 의회 해산으로 인해 의회가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1634년에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아메리카의 코네티컷 식민지로 이주하고자 하였으나 정부가 승인하지 않았다. 1640년 단기의회와 장기의회가 차례대로 소집되자 여기에 케임브리지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한다.

그렇게 평범한 잉글랜드의 하원의원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그의 인생은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면서 바뀌게 된다.

2.2. 잉글랜드 내전에서의 활약

1642년 찰스 1세와 의회가 충돌,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고향 헌팅던으로 돌아가서 기병대를 조직한다. 엣지힐 전투에서 두각을 보였던 그는 엄격한 규율을 갖춘 기병연대를 편성하여 훈련시켰다. 이렇게 조직된 그의 철기대는 1643년 7월 게인즈버러 전투와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차례대로 승리하였고, 내전 초반 왕당파에 밀려 고전하던 의회파는 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크롬웰이 잘한 것은 지극히 기본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크롬웰은 기존의 약점을 충실히 보강하고 내실을 다져서 싸울 수 있는 군대를 길러내는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기병의 운용과 질이 전술의 키포인트임을 파악하고 이를 육성하는데 애쓴 것, 싸울 의욕이 없는 병사들에게 명분을 심어준 것[1], 민병대 수준이었던 군대를 강도 높은 훈련으로 정규군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 귀족이나 서열상 연장자라는 이유로 장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제대로 지휘할 줄 아는 사람으로 대체한 것이 군사행동의 핵심이었다.

또 크롬웰은 야전에서 본인의 철기대만 지휘하는 기껏해야 대대장 정도의 지휘만 하고, 전체적인 의회파 신식군의 야전 지휘관은 그의 친구였던 '흑색 톰' 토머스 페어펙스 경에게 맡겼다. 야전 지휘관으로서 페어펙스는 명장으로서 당시 영국에서 대륙식의 대규모 회전과 병과의 합동 전술을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지휘관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본인이 의회파의 수장이었을지언정, 야전에서는 크롬웰도 페어펙스의 일개 부관에 불과했고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와 이런 미묘한 위치에 있으면 무슨 식으로든 마찰이 생기기 마련인데 크롬웰은 현명한 처신으로 야전에서는 페어펙스에게 전권을 확실하게 밀어주어 항상 대귀족과 왕족 출신 지휘관들의 군공 다툼으로 지휘 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왕당파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크롬웰은 철기군을 중심으로 신모범군/신형군(New Model Army)[2]을 조직하여 1645년 6월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당파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황이 결정적으로 의회파에 기운다. 1646년 왕당파의 거점 옥스퍼드를 포위 공격하였고, 그해 6월 왕당파는 버티지 못하고 의회파에 항복한다. 또한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사로잡힌 찰스 1세는 1647년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로 넘어오게 된다.

찰스 1세의 처리 문제를 두고 의회 내 온건파와 크롬웰의 군부가 갈등을 빚었고, 의회파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찰스 1세는 1647년 12월 스코틀랜드와 비밀 협약을 체결하였다. 1648년 7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를 침략하며 2차 내전에 돌입하였다. 크롬웰이 이끄는 군대가 이를 곧 제압하였고, 1648년 8월 왕당파가 대패하며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찰스 1세는 다시 의회파에게 사로잡힌다.

2.3. 목을 자르고 공화국을 세우다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역시나 찰스 1세의 신병을 두고서 크롬웰은 의회파 내의 온건적이었던 장로파 세력들과 지속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찰스 1세와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찰스 1세가 사로잡히고 나서도 깍듯이 예우했으며, 찰스 1세는 군대가 의회보다 자신에 우호적이라 여길 정도로 착각하며 재기를 꿈꿀 정도였고, 상당한 수준의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한다.

찰스 1세의 편지 보관함이 발견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크롬웰을 비롯한 의회파에게 사로잡혀서 좋은 말로 속이고 있지만, 추후에 남김없이 모가지를 칠 것'이라고 으스대는 편지들이 발견되면서 결국 크롬웰은 국왕 처형에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국왕과 협상하려는 장로파에 맞서 국왕을 극형에 처하자는 독립파의 수장이 되었고 결국 장로파를 몰아내고 국왕 처형의 주동자 중 하나가 된다.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크롬웰과 그가 이끄는 독립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영국 역사상 유일한 공화정부인 '잉글랜드 연방 혹은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웠다.[3]

2.4. 아일랜드 진압[4]

1649년 잉글랜드 내전의 종결과 동시에 크롬웰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잉글랜드가 내전으로 정신없던 틈에 거의 독립국처럼 통제불능이었던 아일랜드의 반잉글랜드 가톨릭 세력을 평정하는 것이었다. 내전으로 잉글랜드의 세력이 악화된 사이 아일랜드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4천~2만 명에 달하는 잉글랜드인을 살해하거나 추방하고 신교 교회를 불태웠다.[5] 게다가 찰스 1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돈인 네덜란드에 딸을 시집보내면서 귀금속을 담보 삼아 사채를 빌리고 이 돈으로 프랑스 로렌 공작을 매수하여 1만 병력을, 또 아일랜드에 가톨릭 신앙의 자유와 독립을 꼬드기며 1만 병력을 요청하려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내전이 끝나고 나서 아일랜드 토벌군을 모집하여 파견하려 하자 그동안 전쟁에 지친 병력들이 파병을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의원 대다수는 시골지주, 교수, 상공인이었고 내전 기간 피를 본 군대가 이들 명을 받을 리가 없었다. 결국 군대를 이끌고 공을 세운 크롬웰이 나서서 항명을 일으킨 병력들 가운데 주모자 몇 명을 처형했고 도망간 탈영병을 추격하여 이들이 숨은 마을에 가차없이 포격을 하여 진압했으며, 잡힌 반란군 400명을 총살시켜버렸다. 가차없이 폭동을 막은 공로로서 크롬웰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반란 병력을 막고 나서 역시 군대를 스스로 이끌고 아일랜드에 친정을 하는데, 처음엔 농민과 살인에 관계되지 않은 반란자들은 사면령을 내렸으나, 사태가 여의치 않자 익히 알려진 것처럼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사정없이 초토화시키고 살인과 방화, 약탈을 동반하여 진압했다. 이때 죽어나간 아일랜드인이 당시 인구의 1/4 정도였던 20~30만 가량이었다.

이 당시 가장 잔인했던 사건이 바로 드로이다(Drogheda[6]) 공성전으로, 1649년 잉글랜드군이 어머니가 아이를 잡아먹을 때까지 드로이다 성을 포위한 뒤, 함락이 되자[7] 같은 개신교도까지 포함해[8] 남녀노소 2,000명을, 그것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9]

이 사건은 소설 및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언급된다.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아버지이자 아일랜드계 미국인 출신인 제럴드 오하라[10]는 이 크롬웰이 저지른 드로이다 학살을 스칼렛에게 이야기해 준 적이 있는데, 200년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11] 이게 트라우마가 된 스칼렛은 애틀란타 포위전 당시 레트 버틀러에게 "셔먼 장군이 크롬웰 같은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며 두려워한다. 그러자 레트는 "셔먼은 크롬웰하고는 달라요"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12] 이렇듯 아일랜드 재정복 과정에서 크롬웰이 자행한 폭력은, 아일랜드인들의 역사적 기억에 뿌리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다.

이는 단순히 크롬웰의 잔혹함으로 끝나지 않고 아일랜드의 이후 역사를 바꿔버렸다. 크롬웰이 추진한 아일랜드 진압 정책의 핵심이, 아일랜드 정복 이후로도 아일랜드 내부의 핵심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가톨릭 귀족들'과 '켈트족 족장들'의 힘을 아예 기반부터 절멸시키기 위한, '포괄적인 토지 강탈 및 재분배 정책'이었다. 계획적으로 크롬웰의 병사들은 씨앗 한 톨, 돼지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아일랜드 전역을 처절하게 불지른 다음, 원래 주민들은 늪지대만 가득한 쓸모 없는 땅인 서부의 코노트 지방에 가두어 버리고, 나머지 알토란 같은 토지는 전부 다 자신을 따라온 부하들에게 분배했다. 처절하게 가난한 대다수 가톨릭 소작농을 극소수의 부유한 개신교 지배층이 착취하는 아일랜드의 기형적인 사회 경제적 구조는 이렇게 크롬웰의 초토화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크롬웰은 지금까지 아일랜드에서 증오를 받는 인물이다. 아일랜드가 크롬웰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 1997년에 있었는데 아일랜드 총리였던 버티 아헌이 영국의 로빈 쿡 외무장관을 만나 회담하다가, 회의장에 '크롬웰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불쾌하다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한 일이 있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일본 수상관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 히로히토의 초상화를 발견했을 때 나올만한 반응이라 볼 수 있다.

2.5. 스코틀랜드 침공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1650년, 찰스 왕세자를 데려와서 국왕 찰스 2세로 추대하자, 크롬웰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1650년 7월 말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런데 이는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매우 어처구니없는 일인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동군연합이었고, 국왕이 같은 사람일 뿐 별개의 나라였다. 그런데 잉글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왕이기도 한 찰스 1세를 죽여버렸고, 이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1세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인 찰스 2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크롬웰이 이것을 시비걸고 넘어져 침략해온 것은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명백한 내정간섭 행위이자 명분 없는 침략행위였다.

잉글랜드 내전의 승리에 도취한 크롬웰은 호기롭게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갔으나, 스코틀랜드군이 전면전을 회피하고 청야전술로 괴롭히자, 크롬웰은 결국 많은 병사들을 질병과 굶주림으로 잃은 채 잉글랜드로 후퇴했다. 그러다가 던바 남쪽에 주둔한 스코틀랜드군이 퇴로를 가로막자, 그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이후 벌어진 던바 전투에서, 크롬웰은 100명의 손실만 입은 채 적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크롬웰은 본국으로 돌아가 전력을 재정비한 뒤 1651년 9월 잉글랜드로 쳐들어온 스코틀랜드군을 우스터 전투에서 괴멸시키고 왕당파 세력을 전부 일소시켰다.

2.6. 종신 호국경 취임 및 군사독재

정권을 잡은 크롬웰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중상시민, 젠트리의 권익을 위해 중상주의를 실시했다. 1651년에 항해조례(=항해법)를 반포하여 네덜란드 중계무역상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일어난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제1차 영란전쟁)에 간신히 무승부를 거두면서 네덜란드 유일의 패권체제에서 벗어나 잉글랜드가 제해권과 식민지 개척에 좀 더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653년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상원 의사당을 폐지한 후 남아있는 의원들은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일단 기존 의회의 대다수는 청교도들이긴 한데, 다수파는 장로회였지만 크롬웰 그의 군대는 소수파에 속하는 독립파였기 때문에 원래부터 갈등이 있었고, 크롬웰이 왕당파가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던 스코틀랜드와 의회 장로회가 연관되었다는 구실로 장로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화정부 수립 직후 한 일이 의회 해산. 그는 존 램버르트와 함께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는데, 전 유럽에서 헌법 작성은 최초로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걸 본인이 갈아엎고 군사독재를 시작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크롬웰은 평등한 선거를 주장하는 수평파, 가톨릭, 왕당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청교도 법령을 반포하는 등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한 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강제 병합하고 국가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에 취임했다.[13] 호국경의 정식 명칭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연방 호국경(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이었다. 영국 역사의 유일한 성문법이자 헌법인 "통치장전(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이 제정되었는데, 최고 통치권과 정부권을 호국경에게 위임하는 것을 규정했다. 이는 의회가 아닌 장로교회의 아이디어였다.

의회를 해산한 크롬웰은 자신이 지명한 인원으로 배어본스 의회(Barebones Parliament)를 새로이 조직하였으나, 이마저도 반 년 후에 폐지시켰다.

하지만 국내 사정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그 이유는 엄격한 청교도법령에 입각한 강력한 군사독재 정치 때문. 크롬웰과 청교도들은 '청교도 도덕성'에 입각하여 엄격한 도덕주의를 지키도록 할 법을 도입했는데 극장이나 운동 경기나 춤 등을 비롯한 청교도 입장에서 죄악시될 수 있는 행동들을 폐지하는 것.[14] 심지어 대중음악마저도 금지해서 영국인들은 노래라고는 오로지 찬송가만 부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역시 금지되어 의회가 매년 12월 25일에 소집되었다.

크롬웰의 정치는 근본주의 성향에 가깝게 엄격하여 가혹한 처벌을 앞세운 통치를 했기에 결국 잉글랜드 백성들은 그에게 점차 실망하고 날이 갈수록 증오하였으며 그나마 조금이나마 자유롭던 왕정 시대를 그리워하게 됐다. 처음에 새로운 세력으로 믿고 기대했던 크롬웰 세력의 통치는 찰스 1세 시절보다 훨씬 살기 힘들 지경이었으므로, 찰스 1세가 사형당한 것에 대한 동정론이 일면서 "왕을 사형시킨 건 잘못"이라는 여론까지 생겼다.[15] 이 때문에 왕당파의 복귀를 두려워한 젠트리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크롬웰은 1654년 배어본스 의회를 해산시키고 군부독재 하에서 종신 호국경이 되었다.

독실한 청교도임에도 불구하고 1656년에, 1290년아일랜드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는데, 원래 크롬웰이 믿는 청교도가 속한 칼뱅파 급진주의 교단들은 이 때만 하더라도 공적인 스페인 중심의 가톨릭 절대주의를 막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들과도 협력하는 등, 기독교 외부 종교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타종교에 대해 청교도가 관용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 그대로 당장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손을 잡은 것이고 언젠가는 이들도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크롬웰이 사망하는 바람에 흐지부지 되었지만.

크롬웰이 종신 호국경이 되자, 의회에선 그를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는 젠트리 계급이 그를 왕위로 올리는 대신 의회가 군부를 재정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던 일환이었다. 크롬웰 본인도 왕이 되어 크롬웰 가의 신왕조를 개창하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이는 그의 치세 후기의 주요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군대의 반대로 크롬웰은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다는 정도로 일단 타협한다. 그럼에도 크롬웰은 왕이 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나 이전에 사망하고 만다. 결국 죽기 얼마 전에 자신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을 후임 호국경으로 지명하고 사망한다. 결국 이는 크롬웰 체제가 사후 붕괴되는 원인이 된다.

2.7. 사망과 사후

파일:external/www.traveldarkly.com/Deathbed-Oliver-Cromwells-House.jpg
마네킹으로 재현한 크롬웰의 임종

1658년 9월 3일 크롬웰은 독감으로 사망했다. 말년에 들어서면서 크롬웰은 요로결석말라리아를 심하게 앓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는데 사망한 원인도 이런 두 질병이 악화된 상태에서 독감까지 걸렸기 때문이다. 크롬웰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 자리를 승계받았으나, 조지 멍크 장군과 장로파 중심의 군부, 의회의 반(反)크롬웰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리처드를 축출하고 망명 중인 찰스 2세를 불러들여 왕으로 옹립하는 왕정복고를 실행하자 크롬웰 세력은 와해되어 몰락한다.

게다가, 찰스 1세의 처형 12주기인 1661년 1월 30일에 크롬웰 세력을 증오하며 복수심에 불타던 찰스 2세의 명령으로 크롬웰은 무덤이 파괴되어 시체가 분해되는데, 머리를 베고 몸통을 4조각내어 시가지에 걸어놓아 온갖 수치를 당하게 했다. 안 그래도 생전 크롬웰의 엄격한 정치에 등을 돌린 잉글랜드 군중은 통쾌하게 여기며, 그의 시신에 욕설을 하고 침을 뱉고 돌을 던지는 등 한풀이를 했다. 뒤이어 크롬웰의 추종자들 중 찰스 1세의 사형을 주도한 자들[16] 26명은 교수형에 처하는 것으로 잉글랜드 공화정이 막을 내린다. 다만 찰스 2세는 주동자 외 나머지 역할이 적은 사람 또는 당론과 여론에 휩쓸려 찰스 1세의 사형에 찬성한 크롬웰 정권의 정치 인사는 면책하거나 가벼운 형벌만 내리는 정도로 끝냈다.

크롬웰은 사망 당시 왕실, 귀족, 명사가 별세했을 때 쓰인 장례 예법대로 장기와 뇌를 꺼내고 약품에 절여 엠버밍을 마친 후 관에 봉안되었다고 하는데,[17] 방부처리가 잘 되어 있어 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효수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 데 30번을 내리쳐야 했다고 한다.

크롬웰의 머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그의 잘린 머리는 한동안 시가지에 효수되었다가 실종되었다. 이후 그의 머리를 지키던 경비병의 가족들이 경비병이 죽은 후 크롬웰의 머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인 수집가에게 팔아버렸고, 프랑스로 건너간 후 무려 4번이나 주인이 바뀌어 가며 심지어 지저분한 곳에서 축구공으로 어떤 시기에는 훈제 당하거나 창에 꿰어져 전국을 순방하며 효수를 여러번 당하기도 했다.[18] 심지어 창에 있던 좀벌레가 머리로 옮겨져 턱엔 구멍이 생기고, 그 유명한 코도 폭삭 주저앉았다. 결국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진 그의 머리는 자그마치 300년이나 세상을 떠돌다가 1960년에서야 다시 모국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 곁에[19] 묻혔다. 그러나 실제 웨스트민스터 사원 관리인의 이야기로는, 크롬웰의 머리가 효수되었다가 폭풍이 불던 어느 날 바닥에 떨어졌고, 그것을 경비병이 주워서 자기 집에 계속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에 그 경비병의 후손들이 크롬웰의 머리를 그의 모교에 돌려주어 정원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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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크롬웰의 관이 안장되었던 자리. 현재는 공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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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궁전 옆에 세워진 크롬웰의 동상

짧은 통치 기간이었지만 군사적인 연전 연승과 국왕을 처형하는 독단적 태도와 그리고 통치 시기의 무자비함 때문에 그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는 민간 신앙 이상의 레벨로 승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숭배하려는 목적의 전설들은 아니었는데, 그 예들을 보자면 17세기 후반에는 강력한 폭풍을 '크롬웰 폭풍'이라 부르기도 하고, 크롬웰의 정체가 흑마술사 또는 주술사로서 악마를 부렸다거나 초자연적인 검은 개를 끌고 다녔다던가 하는 전설들이 만들어졌다.

3. 평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국 역사에 끼친 막대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라 현대 영국인들이 뽑은 위인 중에서도 항상 TOP 10 안에는 들어가는 인물이다.

3.1. 긍정적 평가

잉글랜드 내전의 승리를 이끌어 의회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비록 독재로 변질되었지만,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가 패배하였을 경우 오늘날 입헌군주제의 전형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20] 오늘날 입헌군주제는 잉글랜드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는 잉글랜드 내전에서 명예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크롬웰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

크롬웰은 집권하자마자 스페인과 함께 해상강국이 된 네덜란드와의 결전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호국경에 부임하자마자 잉글랜드 해군 재정비와 강도높은 훈련을 통한 재정비를 하며 전력을 가다듬으며 잉글랜드 해군을 부활시켰다.

또한 항해법 제정을 통해 제해권에서 우위를 점했던 네덜란드과의 마찰로 인해 발생한 영란전쟁의 승리로 대외 무역을 확대시켜서 훗날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네덜란드의 성장으로 인해 같은 후발주자였던 잉글랜드가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 반전을 가져온 것이다.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항해법이 지니는 족적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전신인 13개 식민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시기에 청교도들의 식민지 이주가 증가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크롬웰은 청교도가 다수인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종교적 관용을 인정해줬고 식민지가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줬다.

3.2. 부정적 평가

의회의 수호자를 자처해놓고서 의회를 해산하고 지위를 세습한 것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이었고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고 평가받는 잉글랜드가 세습 군주를 두지 않는 공화정으로 계속 이어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입헌군주정을 유지하는 이유는 크롬웰의 독재가 부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군대를 동원해 민간의 음주가무와 문화생활을 통제하는 등 청교도 근본주의에 의한 금욕적 군사독재 철권통치가 도를 넘은 나머지 민심을 크게 잃었다. 심각한 문화탄압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부터 꽃피웠던 영국 문화가 크롬웰 시기에 들어 침체에 빠졌으며, 영국 요리가 오늘날까지 유럽 최악으로 악명이 높은 것도 크롬웰 금욕주의의 산물이다.[21][22] 결국 크롬웰의 편집증적인 금욕주의가 크롬웰 사후 왕정복고가 일어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아일랜드에서의 전쟁범죄는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잔혹했고 아일랜드 대기근, 피의 일요일 사건과 같이 아일랜드인이 가진 역사적 반영 감정의 근원이다. 크롬웰은 아일랜드 반란군을 진압한 후 아일랜드인을 농사짓기 어려운 습지로 몰아내고 그들이 소유했던 농지를 모두 부하들에게 분배했다. 이들은 아일랜드 신교도가 되어 지배층으로서 원주민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기형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오늘날도 아일랜드 일부 구역은 신교도와 토착인의 거주지가 분리될 정도로 사이가 안 좋다.

무엇보다 당시 영국 의회는 현대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전국민을 대변하는 기구가 아닌 일종의 금권정이자 귀족공화제적인 기관이었다. 대다수 평민은 권리를 무시당했다. 오히려 찰스 1세와 왕당파가 평민인 농민과 소상공인을 챙긴 편이었다. 따라서 크롬웰은 민주정을 상징하기에도 논란이 된다.

그리고 항해조례 역시 13개 식민지의 무역을 제한하고 생활 비용이 늘어나는 부작용을 초례했으며 식민지인들도 불공정한 규제라며 반발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를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식민지와 본토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결국 세월이 지나 이 갈등은 미국 독립 전쟁으로 터졌다.

4. 어록

No one rises so high as he who knows not whither he is going.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할 때만큼 그렇게 높이 올라갈 수 없다.[23]
Though peace be made, yet it's interest that keep peace.
비록 평화를 이룩하더라도, 이제부터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관심이다.

5. 미디어 믹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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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버스 덤블도어를 연기했던 리처드 해리스가 올리버 크롬웰로 등장하고[24] 노년의 오비완을 연기한 알렉 기네스가 찰스 1세로 등장한 사극 영화《풍운아 크롬웰(Cromwell, 1970)》에서는 제목처럼 주인공이다. 영국 영화이며 감독인 켄 휴즈, 주연 배우인 리처드 해리스, 알렉 기네스, 티모시 달튼(찰스 2세역) 등 배우진들도 싸그리 영국인들이다. 헌데 찰스 1세도 나쁘게 나오지 않고 "둘이 같은 시대를 잘못 만났다" 이렇게 나오며, 처형당할 때 왕자인 찰스 2세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냥 무난한 군주 정도로 나온다. 찰스 1세를 사형장으로 보내고 홀로 왕좌같은 자리에 앉은 모습으로 나오며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영화평은 그냥저냥 범작 수준 사극으로 평가되며 역사왜곡이 많나는 비난을 받았다. 영화는 많은 엑스트라들을 동원하고 나오는 전투씬은 140분 가까운 영화에서 다 합쳐 20분도 되지 않으며, 주로 찰스 1세와 크롬웰의 대립이라든지 정치적 요소에 집중했다. 그나마, 흥행은 성공했으며 영화 자체보다 배우들 연기나 의상디자인은 호평을 받았다. 그래서,1971년에 열린 미국 제 4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을 맡은 이탈리아 출신 비토리오 니노 노바레세(1907~1983)가 최우수 의상상을 받았으며 7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리처드 해리스는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켄 휴즈는 이 영화는 원래 215분이었고 전투 장면도 더 많았는데 편집했다고 밝혔는데 감독판은 나오지 않았다. 전투장면은 스페인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1971년 개봉해 괜찮게 흥행했지만 한국에선 미개봉했다가 1991년에서야 대우비디오로 풍운아 크롬웰이란 제목으로 해외 개봉판 그대로 140분으로 출시했다.
  • 만화 헬싱 2권에서 아카드가 변신할 때의 "상황 A <크롬웰> 발동"이란 대사가 나오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암호와 크롬웰에 대한 민간 신앙적 두려움을 작가가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 애니메이션 울프워커스호국경(The Lord Protector)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이먼 맥버니가 크롬웰 역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에서는 이름이 불리진 않지만 생김새며 코의 사마귀며 직함이며 완전히 올리버 크롬웰 본인. 그래픽 노블판에서는 직접 이름이 언급된다. 감독과 제작사가 아일랜드 출신인 만큼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데,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악역으로 등장한다. '아일랜드와 자연'을 억압하는 '잉글랜드와 문명'을 상징하는 인물.

6. 기타

  • 1차 영란전쟁 종전 당시 네덜란드 측 대표였던 요한 더 비트에게 "오라녀나사우 가문스타트허우더 자리를 세습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평소 오라녀나사우 가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더 비트는 이 제안을 얼른 받아들였는데, 실은 네덜란드 내의 국론을 분열시켜서 영국과 경쟁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요한 더 비트는 친 오라녀나사우파 시민들에게 매국노처럼 각인되었고, 나중에 동생 코넬리우스와 함께 숙청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 큰 코를 두고 별명이 많았는데 구리 코, 빛나는 코, 심지어는 전능하신 코도 있었다. 코 외에도 눈 위와 입술 아래에 큰 사마귀여드름이 있었다. 피터 렐리(Peter Lely)가 그린, 본 문서에도 있는 초상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피터 렐리는 초상화를 그릴 당시 이 사마귀와 여드름 자국을 지워서 당대의 관행대로 외모를 적당히 미화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크롬웰은 "내 얼굴에서 종기 하나라도 뺀다면 돈은 한 푼도 못 준다."면서 있는 그대로 그리라고 명령했다. 여기서 유래된 영어 표현이 warts and all이다. wart는 사마귀란 뜻으로, 표현의 전체 뜻은 있는 그대로 숨기지 않고라는 의미이다. 비슷한 의미로 paint a person with his warts가 있는데, "~의 모습 그대로 그리다."란 뜻이다.
  • 크롬웰은 영국의 해군력 강화 및 해양 진출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함선의 이름으로 쓸 법한 하지만, 크롬웰이 함선 이름으로 쓰인 사례는 단 한번뿐이며,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1945년 8월 6일 취역한 C급 구축함에 크롬웰이라는 이름이 붙은 적이 있지만, 1년만에 노르웨이 해군에게 매각되어 베르겐(HNoMS Bergen)으로 개명되었다. 명색이 왕립 해군영국 해군이니 영국 왕실이 함선에 크롬웰의 이름을 쓰는 걸 허용할 리가 없다. 윈스턴 처칠이 해군장관에 재직하던 시절 각각 아이언 듀크급 전함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에 크롬웰의 이름을 붙이자는 제안을 올렸으나, 왕실의 강경한 반대로 처칠도 이를 취소해야 했다. 처칠이 크롬웰과 더불어 제안한 다른 전항의 함명으로 피트(Pitt)가 있으나 이 역시 왕실이 거부했다. 나중에 처칠은 왕실의 권위에 어울리지 않는 쪼잔한 짓이라고 왕실을 깠지만 정작 본인도 나중의 킹 조지 5세급 전함에 유틀란트 해전의 지휘관 젤리코와 비티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거부했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에도 코네티컷 해군[26]에는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코르벳이 있었지만 나중에 영국 해군이 나포한 다음 리스토레이션(Restoration)으로 개명해버렸다.
  • 영국 국회의사당웨스트민스터 궁전에 가보면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왕의 목을 딴 인물이기에 국왕과 대귀족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역사적으로 반대해 온 영국 하원의 반골 기질과 필요하면 힘으로도 의회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것을 상징하는 의회의 수호성인 비슷한 존재로 대접받아 세워졌다. 현재도 영국에서는 소수 의견이지만 항상 존재해 왔던 영국 공화파의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우고 있는데, 내력을 보면 오히려 의회의 견제 때문에 한번도 스페인, 프랑스와 같은 권위권력을 누려본 적 없이 항상 분리된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게 전통이었던 잉글랜드의 왕들에 비해 훨씬 더 현대적인 의미의 독재자에 가까웠던 인물이기 때문에 뭔가 미묘한 점이 많다.
  • 영국 도싯 주 도체스터 인근의 언덕그림(hill figure)인 루드 맨의 정체가 이 인물이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 조선 말기의 선교사이자 조선사를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조선의 3대 군주 태종을 크롬웰에 비유하였다. 물론 정치적으로 비슷한 행보를 보였기에 그렇게 비유한 것이겠지만, 개인적인 성품은 달랐다. 금욕주의자인 크롬웰에 비해 태종은 여색이며 사냥이며 개인의 욕구에는 매우 충실한 인물이었다(...) 물론 자기에게만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자기에게 직접 기어오르거나 미래에 권력을 쥐고 놀만한 사람안 아니라면 무례를 저질러도 봐줄 정도로 널널한 사람이었다.
  • 신해철의 가명 중 하나인 크롬이 이 인물에게서 따왔다. 영국에서 작업하던 시기에 다른 엔지니어들이 "넌 크롬웰처럼 독한 놈"이라는 말을 하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영국 공화주의자의 상징이지만 의외로 크롬웰 초상화를 들고 시위하지 않는데, 이는 업적도 많은 동시에 부정적인 평가 역시 만만치 않아서 반감을 살 수도 있기 때문.

7. 참고 자료



[1] "찰스 1세는 사탄이고, 왕당파는 사탄의 꼭두각시다. 너희는 우리 땅에서 사탄과 그 부하들이 날뛰게 내버려둘 셈이냐?"하고 신앙심을 다졌다.[2] 당시 가장 값 싸고 병사들의 부상도 숨겨주는 효과가 있었던 붉은 색 염료로 염색한 복장으로 통일시켜 최초로 현대적인 의미의 군복이 생기는 것에도 일조했으며 이는 왕정이 복고된 후대의 영국군에게도 계승되어 영국 레드코트의 전설의 시발점이 된다.[3] "Commonwealth and Free State"라고도 불렀다. 공화국이자 자유국. 혹은 연방 자유국 정도로 번역되는 이름. Commonwealth란 단어는 영연방에서 사용된다.[4] 아일랜드 정복을 시작한 것은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취임하기 전이다.[5] Modern historians estimate the number massacred in Ireland in 1641 at between 2,000 and 12,000." Marshal, John (2006). John Locke, Toleration and Early Enlightenment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65114-X, Page 58, footnote 10.[6] 원체 아일랜드 게일어 표기법이 엉망이라 글자만 보고는 읽기가 쉽지 않은데,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ˈdrɒhədə/ 혹은 /ˈdrɔːdə/라고 읽는다고 한다. 굳이 한글로 표기한다면 '드로허다' 혹은 '드로다' 정도. 한국에서는 '드로이다'라고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 위키피디아도 드로이다로 연결된다.[7] 사실 크롬웰도 드로이다 성의 아일랜드 저항군에게 항복하면 무사하지만 끝까지 거부하면 학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드로이다 성의 아일랜드 저항군 지도자 아서 애스턴이(성이 함락될때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찰스 1세의 충실한 부하이며 찰스 1세를 참수한 크롬웰을 증오했고 그를 불신한터라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한것이다. 저항이 워낙 치열해서 잉글랜드군도 150명이 전사하자 격분한 크롬웰이 성을 함락하고 나서 학살극을 벌인것이다.[8] 이들은 당시 찰스 1세에게 충성을 바친 잉글랜드 왕당파이다. 그러니 크롬웰을 증오했고 크롬웰도 이들을 싫어하여 학살한 것이다.[9] 이것도 공식적으로 계산해서 나온 결과이지 수치에서 누락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학살당한 사람들이 2배인 4천명이나 된다. 특히 이때 크롬웰이 얼마나 잔혹했냐면 저항군과 주민들이 항복해도 죽여버렸고 그들이 교회로 피신하고 성직자들이 학살을 말렸는데 오히려 성직자들을 죽이고 교회까지 불태워 파괴한것이다. 이때문에 아일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에서도 경악할 정도였다.[10] 일단 오하라(O'Hara)부터가 아일랜드 성씨다.[1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남북 전쟁(1861-1865)이 배경이다.[12] 셔먼의 전술의 핵심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하되, 불필요한 살인은 금지시켜 공포와 절망에 빠진 이들만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 전술은 매우 효과적이었는데, 민병대로 이뤄진 남군 병사들은 가족들과 이웃들의 편지를 통해서 폐허가 된 고향을 보면서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북군 측에 항복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13] 크롬웰만 가진 직위가 아니라 직계왕족이 아닌 섭정을 호국경이라 한다. 리처드 3세도 즉위하기 전인 글로스터 공작 시절에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으로 호국경에 취임했었는데 선왕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자 에드워드 5세의 숙부로서 받은 직위다. 크롬웰 이전에 호국경으로 임명받은 비왕족은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였다.[14]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창살 없는 감옥이 이거구나...", "크롬웰은 나라를 수도원으로 만들 셈이냐!"라는 말로 영국 국민들의 심정을 표현했다.[15] 특히 당시 유럽 전역이 크롬웰이 왕을 몰아내고 죽이며 왕정을 폐지하기까지 한 것에 대해 경악하였다. 그중에서 왕권이 강하던 프랑스영국을 야만적이라고 강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나라 망신이라는 여론도 컸다.[16] 크롬웰의 충신이자 최측근이던 존 브래드 쇼와 헨리 이레톤은 크롬웰보다 먼저 사망했지만, 이들 역시 생전에 자신의 상관이던 크롬웰과 마찬가지로 무덤이 파괴되고 부관참시되어 효수된다. 이들은 찰스 1세의 처형과 크롬웰의 독재에 앞장선 터라, 잉글랜드 백성들로부터 앞잡이라고 증오를 받았다. 찰스 2세는 이들을 효수해서 백성들의 손에 수치를 당하게 하였다.[17] 실제로는 프랑스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많이 행한 장례법이라 한다.[18] 돈벌이용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하지만, 야사에서는 부르봉 왕가인 루이 15세가 비밀리에 지시해서 왕을 시해하거나 시도하는 자는 이렇게 된다는 경각심을 주기 위해 시행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그 손자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고 효수당하지만.[19] 정확한 장소는 비밀에 부쳐졌는데, 위치가 알려지면 다시 수난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다니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묻혔다는 소문도 존재한다.[20] 다만 최근에는 잉글랜드 내전을 단순한 의회주의vs전제군주제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은 없다는 것에 유의하자[21] 크롬웰은 열렬한 청교도 신자였는데, 청교도는 그 교리상 맛있는 음식 같은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을 죄악으로 간주했다.[22] 물론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다. 원래 요리를 폄하하는 영국인들의 습관, 채소가 잘 나지 않는 영국의 기후 및 자연 조건(대신 밀 농사와 축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요리의 발전 여지가 꺾여버린 것 등이 현재 영국 요리가 비참한 현상의 원인이다.[23] 이 문장을 에머슨이 「Circles」이라는 에세이에서 인용하고, 에머슨이 인용한 것을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 3부에서 재인용한다.[24] 아이러니하게도 리처드 해리스는 아일랜드 배우다.[25] 조카현손자(great-great-grandnephew)로, 토머스의 누나의 현손자다. 왜 여성인 누나의 후손인데 성이 같냐면, 누나의 아들이 성을 친가가 아닌 외가 성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남편이 데릴사위였던 듯 하다.[26]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코네티컷 주의 식민지 해군.[27] 찰스 1세가 처형당한 뱅퀴팅 하우스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뱅퀴팅 하우스에서는 스코틀랜드 야드가 가로막고 있어 올리버 크롬웰 동상이 안보이고 올리버 크롬웰 동상은 서쪽, 길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북쪽에 있는 뱅퀴팅 하우스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헷갈리는 이유는 뱅퀴팅 하우스와 웨스트민스터 궁, 세인트 마가렛 교회가 서로 별로 떨어지지 않았고 뱅퀴팅 하우스와 세인트 마가렛 교회 두곳 다 찰스 1세의 흉상이 그것도 비슷한 크기로 벽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